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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레리우스 개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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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갈레리우스 개선문은 4세기 로마 황제 갈레리우스가 테살로니키에 건설한 건축물로, 궁전, 로톤다와 함께 황제의 권력을 상징하는 시설 중 하나이다. 사산 제국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는 부조로 장식되었으며, 도시의 주요 축에 위치하여 4세기 테살로니키의 도시 구조와 연결되었다. 개선문은 벽돌로 만들어졌으며 대리석 조각 패널로 덮여 있었으나, 현재는 일부만 남아있다. 19세기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필리포스 2세 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헌정된 것으로 추측되기도 했으나, 1880년대 조사를 통해 갈레리우스에게 헌정되었음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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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레리우스 개선문
위치 정보
개요
종류개선문
건축 양식석조 건축 구조 (벽돌, 대리석)
위치테살로니키
명칭
한국어 명칭갈레리우스 개선문
다른 이름카마라
역사
기공AD 298년
완공AD 299년
봉헌AD 303년
지리 정보
세계유산 정보
등재 기준문화: i, ii, iv
ID456-002
등재 연도1988년
면적0.587 ha
일부테살로니키의 초기 기독교 및 비잔틴 기념물
건축 정보
건축가알 수 없음
이미지
카마라
갈레리우스 개선문
관련 정보

2. 역사

갈레리우스 개선문은 4세기 로마 황제 갈레리우스사산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건설되었다. 개선문은 테살로니키에 있는 갈레리우스 궁전과 로톤다와 함께 주요 시설 중 하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개선문은 본래의 모습을 많이 잃었다. 19세기 오스만 제국 시기에는 개선문이 누구에게 헌정되었는지 잊혀 콘스탄티누스 대제, 필리포스 2세, 알렉산드로스 대왕 등에게 헌정된 것으로 추측되기도 했다. 1880년대 칼 프레데리크 킨치의 연구를 통해 갈레리우스에게 헌정된 것임이 밝혀졌다.[3]

2. 1. 건립 배경

4세기 로마 황제 갈레리우스는 테살로니키 궁전, 자신의 무덤인 로톤다와 함께 개선문을 건설했다. 이 세 시설은 개선문을 중심으로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뻗은 거리를 통해 일직선으로 연결되어 황제의 권력을 상징했다.[2] 개선문은 벽돌로 만들어졌고 표면은 대리석으로 덮여 있었으며, 사산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는 부조가 새겨져 있었다. 현재는 개선문의 일부만 남아있다.

갈레리우스 개선문과 로툰다(미나렛이 추가된 모습), 서기 299-303년


갈레리우스 개선문


갈레리우스 개선문은 에그나티아 거리와 디미트리우 구나리 거리 교차로에 있다. 개선문은 298년에서 299년 사이에 건설되었으며, 303년에 사두정치의 일원이었던 갈레리우스가 사산 제국과의 사탈라 전투에서 승리하고 수도 크테시폰을 점령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헌정되었다.[5]

개선문은 팔각(8개의 기둥이 있는 문) 구조로, 3개의 아치로 구성되어 있었다. 벽돌과 잡석으로 만든 조적 코어를 대리석 조각으로 덮은 형태였다. 중앙 아치형 통로는 너비 9.7m, 높이 12.5m였고, 양쪽의 보조 통로는 너비 4.8m, 높이 6.5m였다. 중앙 아치는 비아 에그나티아의 일부인 도시를 통과하는 ''데쿠마누스'' (동서 주요 거리) 위에 걸쳐 있었다. 로툰다(북동쪽 125m 지점)와 궁전 단지(남서쪽 235m 지점)를 연결하는 도로는 개선문의 긴 축을 따라 이어졌다.

현재 8개의 기둥 중 북서쪽 3개와 그 위의 아치 조적 코어 일부만 남아있다. 동쪽 4개의 기둥과 서쪽 기둥 중 가장 남쪽에 있는 기둥은 소실되었다.[6] 중앙 아치형 통로 양쪽에 있는 두 기둥에는 갈레리우스의 페르시아 전쟁 승리를 묘사한 조각된 대리석 판이 남아있다.

2. 2. 건설 과정



갈레리우스 개선문 건설은 서기 298년과 299년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303년에 사두정치의 일원이었던 갈레리우스사산 제국과의 사탈라 전투에서 승리하고 298년에 수도 크테시폰을 점령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5]

이 구조물은 팔각(8개의 기둥이 있는 문)으로, 3개의 아치를 이루고 있으며, 먼저 벽돌, 다음 대리석 조각으로 덮인 잡석 조적 코어로 만들어졌다. 중앙 아치형 개구부는 너비 9.7m, 높이 12.5m였으며, 반대편의 보조 개구부는 너비 4.8m, 높이 6.5m였다. 중앙 아치는 비아 에그나티아(디라키움에서 비잔티움으로 이어지는 주요 로마 도로)의 일부인 도시를 통과하는 ''데쿠마누스'' (동서 주요 거리)에 걸쳐 있었다. 로툰다(북동쪽 125m)와 궁전 단지(남서쪽 235m)를 연결하는 도로는 개선문의 긴 축을 따라 통과했다.

8개의 기둥 중 북서쪽 3개와 그 위의 아치 조적 코어의 일부만 남아 있다. 즉, 동쪽 전체(4개의 기둥)와 서쪽 기둥 중 가장 남쪽에 있는 기둥이 유실되었다.[6] 기념물을 보호하기 위해 노출된 조적 코어에 현대 벽돌을 사용하여 광범위한 보강 공사가 수행되었다. 중앙 아치형 통로를 양쪽에서 감싸는 두 개의 기둥에는 조각된 대리석 슬라브가 남아 있는데, 여기에는 갈레리우스가 페르시아와 벌인 전쟁을 찬양하는 내용이 광범위하게 묘사되어 있다.

2. 3. 이후의 역사

어느 시점엔가 이 아치가 왜 건설되었고 누구에게 헌정되었는지에 대한 지식이 사라졌다. 아치에는 페르시아에 대한 승리 장면만 묘사되어 있고 갈레리우스를 직접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19세기, 이 지역이 살로니카 빌라예트의 일부로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던 시기에는, 사람들은 아치가 콘스탄티누스 대제, 필리포스 2세 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같이 잘 알려진 유명한 통치자 중 한 명에게 헌정된 것으로 추측했다. 이 기간 동안 "필리포스 아치", "아르크 뒤 콩스탕탱" 등으로 불렸다. 칼 프레데리크 킨치는 1880년대에 아치를 조사하여 1890년에 아치가 갈레리우스에게 헌정되었다는 내용의 모노그래프를 발표했다.[3]

1864년 말, 프랑스인 엠마누엘 밀러가 라스 잉칸타다스로 알려진 현관을 철거하여 프랑스로 가져갈 목적으로 도시에 도착했을 때, 도시 주민들은 크게 반대했다. 밀러가 갈레리우스 개선문도 해체하여 가져갈 것이라는 잘못된 소문이 퍼지면서 대중의 항의는 더욱 거세졌다. 아치는 전혀 손상되지 않거나 옮겨지지 않았다 (하지만 라스 잉칸타다스는 옮겨졌다).[4]

3. 구조 및 특징



평면도


갈레리우스 개선문은 벽돌로 쌓고 대리석을 붙인 구조로, 사산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는 부조가 새겨져 있다. 팔각 구조에 3개의 아치를 가지고 있으며, 중앙 아치의 너비는 9.7m, 높이는 12.5m이다. 양쪽 보조 아치는 너비 4.8m, 높이 6.5m이다. 현재 북서쪽 3개의 기둥과 아치 조적 코어 일부만 남아있으며, 나머지는 유실되었다.

갈레리우스의 로툰다는 개선문에서 북동쪽으로 125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원통형 구조물이다. 지름 24.5m, 벽 두께 6m 이상으로, 테살로니키의 지진을 견뎌냈다. 벽에는 8개의 직사각형 만이 있으며, 서쪽 만이 입구 역할을 한다. 돔은 정점에서 30m 높이이며, 원래는 판테온처럼 ''오쿨루스''가 있었다. 로툰다의 돔과 통 모양의 볼트는 원래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많은 부분이 유실되었다.

3. 1. 갈레리우스 개선문

'''갈레리우스 개선문'''은 4세기 로마 황제 갈레리우스테살로니키에 건설한 기념물이다. 로톤다, 궁전과 함께 정비되었으며, 이 세 시설은 개선문을 중심으로 북동에서 남서로 뻗은 거리에 연결되어 있었다. 개선문은 황제의 권력을 상징하는 건축물로, 벽돌로 만들어졌으며 표면에는 대리석을 붙였다. 사산 제국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는 부조로 장식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개선문의 일부만 남아있다.

개선문은 에그나티아 거리와 디미트리우 구나리 거리 교차로에 있다. 서기 298년과 299년에 걸쳐 건설되었으며, 303년에 사두정치의 일원이었던 갈레리우스가 사산 제국과의 사탈라 전투에서 승리하고 수도 크테시폰을 점령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5]

개선문은 8개의 기둥이 있는 팔각 구조로, 3개의 아치를 이루고 있다. 중앙 아치는 너비 9.7m, 높이 12.5m이며, 양쪽의 보조 아치는 너비 4.8m, 높이 6.5m였다. 중앙 아치는 비아 에그나티아의 일부인 도시를 통과하는 데쿠마누스 (동서 주요 거리) 위에 걸쳐 있었다. 로톤다(북동쪽 125m)와 궁전 단지(남서쪽 235m)를 연결하는 도로는 개선문의 긴 축을 따라 통과했다.

현재 8개의 기둥 중 북서쪽 3개와 그 위의 아치 조적 코어의 일부만 남아있다. 동쪽 전체(4개의 기둥)와 서쪽 기둥 중 가장 남쪽에 있는 기둥은 유실되었다.[6] 노출된 조적 코어는 현대 벽돌을 사용하여 보강되었다. 중앙 아치 양쪽에 있는 두 개의 기둥에는 조각된 대리석 슬라브가 남아있는데, 여기에는 갈레리우스가 페르시아와 벌인 전쟁을 찬양하는 내용이 묘사되어 있다.

3. 1. 1. 부조의 내용

갈레리우스 (좌)가 나르세스 (우)를 공격하고 있다.


개선문의 조각은 대부분의 대리석 패널이 손실되어 그 내용을 온전히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남아있는 부분을 통해 전체적인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각 기둥에는 정교한 몰딩으로 구분된 4개의 수직 조각 장식이 새겨져 있었다. 티그리스강에 대한 표시는 건축가들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다른 표현에도 라벨이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표현 방식에는 예술적 자유가 있었는데, 예를 들어 카이사르 갈레리우스는 패널 중 하나에서 사산 왕조의 샤 나르세스와 개인적인 전투를 벌이는 모습으로 묘사되었지만, 실제 그들은 전투에서 만난 적이 없다. 개선문에는 갈레리우스가 창을 들고 말을 탄 채로 비슷한 모습의 나르세스를 공격하고 있으며, 독수리가 승리의 화환을 발톱에 들고 갈레리우스에게 접근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카이사르는 뒷발을 든 말 위에 안정적으로 앉아 있는 반면, 페르시아 왕은 거의 말에서 떨어질 듯한 모습이다. 공포에 질린 페르시아인들은 전투의 혼란 속에서 카이사르의 말발굽 아래에서 엎드려 있다. 이 패널은 카이사르 갈레리우스의 권력을 표현한다.

감사 제사에 참여한 황실 가족의 부조는 로마의 ''아라 파키스''에 있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부조에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다. 갈레리우스의 아내이자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딸인 발레리아가 그의 옆에 묘사되어 있으며, 그녀는 전임자에 대한 그의 연결 고리를 증명하는 역할을 한다. 여기에서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모든 얼굴이 조심스럽게 조각되어 지워졌는데, 이는 ''다마나티오 메모리아에'' 때문이거나, 나중 시대의 문화적 이미지에 대한 불관용 때문일 수 있다.

또 다른 패널에서는, 사두정치제의 모든 통치자들이 토가를 입고 있으며, ''빅토리아''가 승리의 화환을 두 ''아우구스투스''의 머리 위로 내밀고 있다. 세 번째 패널은 사두정치의 단결을 기념하며, 사두정치제 통치자들이 함께 서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사두정치제 통치자들이 개별적인 특징 없이 묘사된 방식은 베네치아 산 마르코 대성당에 있는 사두정치제 통치자들의 반암으로 만들어진 도식적인 조각상과 유사하다. 갈레리우스만이 갑옷을 입고 있으며, 제단에 제물을 바치고 있다.

개선문에 남아있는 부분은 사두정치제의 영광과 그 체제 내에서의 갈레리우스의 두드러짐을 강조한다. 이 개선문은 사산 왕조의 왕에 대한 갈레리우스의 승리의 일환으로 로마 제국을 기념한다. 갈레리우스는 또한 오른쪽에서 말을 타고 사산 왕조의 경비병을 공격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3. 2. 로톤다

'''갈레리우스의 로툰다'''는 '''성 게오르기우스의 로툰다'''라고도 불리며, 갈레리우스 개선문에서 북동쪽으로 125m 떨어진 곳에 있다. 이 건물은 그리스 정교회의 ''아기오스 게오르기오스'' 교회 또는 간단히 로툰다 교회라고도 불린다.

306년경 사두정치제 황제 갈레리우스의 명령으로 건설된 이 원통형 구조물은 갈레리우스가 자신의 묘소로 사용하려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로마의 산타 코스탄차와 유사한 중앙 집중식 구조에 돔이 덮여 있다. 4세기 말 교회로 개조되면서, 앱시스 형태의 합창단 확장부와 주변을 둘러싼 넓은 회랑이 추가되었다.[7]

로툰다의 지름은 24.5m이며, 벽 두께는 6m가 넘어 테살로니키의 지진을 견뎌낼 수 있었다. 벽에는 8개의 직사각형 만이 있으며, 서쪽 만이 입구이다. 평평한 벽돌 돔은 정점에서 30m 높이로, 원래 설계에서는 로마의 판테온처럼 ''오쿨루스''가 있었다.

갈레리우스는 311년 사망 후 세르비아 자예차르 근처의 펠릭스 로물리아나(감지그라드)에 묻혔다. 원형 홀은 수십 년 동안 비어 있다가,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4세기 말에 기독교 교회로 개조하라고 명령했다.[8] 교회는 매우 훌륭한 품질의 모자이크로 장식되었으나, 현재는 원래 장식의 일부만 남아 있다.

이 건물은 오스만 제국에 함락될 때까지 1,200년 이상 대천사(Ασώματοι|아소마토이el)를 위한 교회로 사용되었다. 1590년에는 술레이만 호르타지 에펜디 모스크라는 모스크로 개조되어 첨탑이 추가되었다. 1912년 발칸 전쟁에서 그리스가 도시를 점령할 때까지 모스크로 사용되었고, 이후 그리스 정교회는 건물을 교회로 재봉헌했지만 첨탑은 남겨두었다. 1978년 지진으로 건물이 손상되었지만 복구되었다. 첨탑은 여전히 비계로 안정화되고 있었다.

현재 이 건물은 그리스 문화부의 비잔틴 고대 유물 에포레이트에 의해 역사적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리스 정교회는 1년에 며칠 동안 다양한 축제(성 조지 교회)를 위해 기념물에 접근할 수 있다.

원형 홀은 테살로니키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이다. 일부 그리스 출판물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 교회라고 주장하지만, 그 타이틀을 놓고 경쟁하는 곳들이 있다. 이 건물은 로마 제국의 그리스어 사용 지역의 초기 기독교 시대 교회 중 가장 중요한 생존 사례이다.

3. 2. 1. 내부 모자이크

로툰다의 돔과 통 모양의 볼트는 원래 모자이크로 완전히 덮여 있었지만, 현재는 많은 부분이 유실되었다. 남아있는 모자이크는 돔의 사라진 그리스도 이미지를 둘러싸고 있던 과일 화환과 상록수 식물과 같은 많은 유기적 형태를 묘사한다. 상록수 화환은 하얀 백합, 월계수, , 포도, 석류가 있는 25개의 가지 부분으로 구성된다.[7] 상록수의 존재는 부활, 더 나아가 예수의 부활에 대한 아이디어를 암시하며, 사계절과 관련된 다양한 식물의 포함은 갱신과 영원성을 상징할 수 있다. 빛이 들어오는 부분에는 하얀 백합이 함께 있는 잘 익은 과일 두루마리가 있는데, 이 과일은 천국의 풍요로움을 상징하며 백합은 기독교적 순결을 시각적으로 상기시켜 준다. 강렬한 색상의 통 모양 볼트에서 한 패널은 포도를 포함한 다양한 과일을, 다른 패널은 많은 양식화된 꽃과 아칸서스 잎으로 둘러싸인 황금 십자가를 묘사한다.[7] 아칸서스 잎은 고대부터 사용된 장식으로, 그리스-로마 건축 장식에 자주 사용되었다. 전통적으로 아칸서스 잎은 영원한 생명과 불멸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죽음 이후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영원한 삶에 대한 기독교적 아이디어를 전파하고, 이교도 상징주의를 기독교 장식에 융합하는 데 적합하다.

4. 현대의 활용

갈레리우스 개선문은 오늘날 테살로니키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명소이자 만남의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현지에서는 개선문을 줄여 '카마라'라고 부르기도 한다.[1]

4. 1. 접근 방법


  • 그리스 국철 테살로니키 신역에서 남동쪽으로 2.2km 거리에 있다.
  • 카마라(Καμάραel) 버스 정류장에서 100m 이내 거리에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Paleochristian and Byzantine monuments of Thessaloniki https://whc.unesco.o[...] 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 2022-11-05
[2] 문서
[3] 간행물 Karl Frederik Kinch - a Danish pioneer in Thessaloniki https://hdl.handle.n[...] CLARA 2019
[4] 서적 Salonica, City of Ghosts: Christians, Muslims and Jews 1430-1950 Harper Collins Publications
[5] 문서
[6] 문서
[7] 서적 The rotunda in Thessaloniki and its mosaics Kapon Editions
[8] 간행물 Empire and Apocalypse in Thessaloniki: Interpreting the Early Christian Rotunda http://nrs.harvard.e[...]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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