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허혼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허혼은 788년에 태어나 860년에서 862년 사이에 사망한 당나라 시인이다. 832년 진사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며, 당도현, 태평현 현령, 감찰어사 등을 역임했다. 만년에는 영주자사를 지냈으며, 절동 지역의 농민 봉기를 진압하기도 했다. 그의 시는 율시와 절구를 중심으로 하며, 《당 시 삼백수》에 그의 작품 두 편이 수록되어 있다. 대표작으로는 7언 절구 형식의 시인 《추사》가 있으며, 그의 시구는 현대에도 인용되어 사용되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중국의 시인 - 굴원
    굴원은 초나라의 정치가이자 시인으로, 친제파의 수장으로서 진나라와의 동맹을 반대하다가 좌천되어 멱라강에 투신 자결했으며, 그의 작품은 애국심을 담고 있으며 단오절 풍습의 기원이 되었다.
  • 중국의 시인 - 쉬즈모
    중국의 시인이자 작가인 쉬즈모는 낭만주의와 자유시의 영향을 받아 현대 중국어로 자유로운 형식과 현대적인 감각을 담은 시를 발표하여 중국 시의 근대화에 기여했으며, 린후이인, 루샤오만과의 사랑으로도 유명하다.
  • 당나라의 시인 - 두보
    두보는 당나라 시대의 시인으로, 이백과 함께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여겨지며 '시성'이라 불리고, 사회 현실 비판과 민생에 대한 연민, 안사의 난을 겪으며 전쟁의 참상과 민중의 고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시사'라는 평가를 받는 등 후대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당나라의 시인 - 당 태종
    당 태종은 당나라의 제2대 황제로서,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정관의 치로 불리는 치세를 통해 당나라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며, 균전제 등 제도를 정비하고 영토를 확장하는 등 긍정적, 부정적 평가를 함께 받는 인물이다.
허혼
기본 정보
이름허혼
용회(用晦)
정수(丁叟), 고소부포의 우인(故蘇부布衣의 友人)
출생연도 미상
사망연도 미상
시대당나라
국적중국
활동 분야시인

2. 생애

788년에 태어나[6] 806년에 대량 양씨 가문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832년 진사에 급제한 후,[7] 836년 노균의 막부에 들어갔다.[7] 841년 감찰어사로 승진하였으나,[8] 선종 즉위 후 다시 감찰어사가 되었다.[9] 860년 절동 지역에서 일어난 농민 봉기를 진압하였다.[13] 만년에는 은거하여 단양 정묘교에서 살았으며,[14] 세간에서는 그를 '''허정묘'''라 불렀다.[15] 사망 시기는 855년에서 861년 사이로 추정된다.[16]

832년 진사 급제 이후 관직 생활과 신라와의 관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을 참조하라.

오늘날에는 『정묘집』 2권이 남아있다.

2. 1. 관직 생활과 신라와의 관계

832년 진사에 급제하여 당도현·태평현 현령, 감찰어사 등을 역임했지만, 병약하여 면직되었다.[7][8][9] 만년에는 은퇴하여 향리에 재임할 때 사두었던 정묘간(丁卯澗)에서 은거했다.

전당시》에는 허혼이 신라로 돌아가는 벗에게 전별로 써 주었다는 한시 1수가 실려 있다.

과거 시험을 끝마치고 신라로 돌아가는 벗을 전송하며(送友人罷擧歸新羅)
滄波天塹外푸른 파도 가로막힌 바다 저 바깥
何島是新羅어느 섬이 신라 나라 거기일런가.
舶主辭番遠배 주인은 번국 떠나 멀리도 오고
碁僧入漢多바둑 두는 중은 중국 많이도 온다.
海風吹白鶴바닷바람 하얀 학 날개에 불고
沙日曬紅螺모래밭 햇볕에서 소라를 말리네
此去知投筆이제 가면 붓 던질 것을 알겠거니와
須求利劍磨모름지기 날카롭게 칼을 갈아라.


3. 작품 세계

허혼의 시는 대부분 율시(律诗)와 절구(绝句) 형식이며, 이상은과 온정균의 스타일과 비교되기도 한다.[2] 그의 작품 중에는 7언 절구 형식의 시인 《추사》(秋思)가 있다.

추사
기수(琪樹)의 서풍, 침전(枕簟)에 가을이 드리우니
초운(楚雲)과 상수(湘水)에서 함께 놀던 날을 기억하네
높은 노래 한 곡조에 밝은 거울을 가리니
어제의 소년은 이제 백발이 되었네



「산우가 오려는데 풍이 누각에 가득하다」는 허혼의 「함양성 동루 시」의 「계운이 처음 일어나 해가 각에 지니, 산우가 오려는데 풍이 누각에 가득하다」에서 유래했다. 이는 큰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비유하는 표현으로, 당나라 왕조의 쇠퇴기였던 당시의 시대상과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고 여겨진다.[3]

3. 1. 시풍과 평가

허혼의 시는 대부분 율시(律诗)와 절구(绝句)로 이루어져 있다. 《당시고취(唐诗鼓吹)》에는 그의 7언율시 31수가 실려 있는데, 대부분 산림에서 지내거나 벗과 전별할 때 써준 것으로 물(水)이라는 글자를 많이 사용하여 사람들은 '허혼의 시 1천 수는 모두 물에 젖어 있다(許渾千首濕)'라고 칭하였다.[17] 구법(句法)은 완급이 세밀하고 정제되어 있으며 성율(声律)의 원숙함을 허혼의 시에 빗대기도 하였다.[18] 당시 저명한 시인이었던 두목(杜牧), 위장(韋庄) 및 송대(宋代)의 육유(陸游)가 모두 그의 시를 숭배하고 추앙하였다. 다만, 그의 시를 두고 임기응변하는 재주가 모자라다거나 기교는 넘치는데 맛이 부족하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다.[19]

문집으로 《정묘집》(丁卯集) 2권이 남아 있다.[20]전당시(全唐诗)》 권11에 그의 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모두 5백여 수에 달한다. 그의 시에 대한 평가는 역사적으로도 격차가 있으나, 역대에 그의 시에 대한 토론과 평가는 매우 높았으며, 칭찬하는 사람만큼이나 비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이는 당대 시인 가운데서도 그리 자주 볼 수 없는 현상이다.

허혼의 시 가운데 《함양성동루》(咸阳城东楼)의 '산비 오려 하니 바람이 가득차네(山雨欲來風滿樓)'라는 구절은 중국의 경제학자 쑹훙빙(宋鴻兵)이 2014년에 펴낸 자신의 저서 《화폐전쟁》 시리즈의 다섯 번째 권인 '탐욕경제'의 부제로도 쓰였다.

허혼의 시 두 편은 유명한 시 선집인 ''당시삼백수(唐詩三百首)''에 수록되어 있으며, 두 편 모두 5언 율시 형식이다. 그의 작품은 이상은과 온정균의 스타일과 비교되기도 한다.[2]

허혼의 작품 중에는 7언 절구 형식의 시인 《추사》(秋思)가 있다.

추사
기수(琪樹)의 서풍, 침전(枕簟)에 가을이 드리우니
초운(楚雲)과 상수(湘水)에서 함께 놀던 날을 기억하네
높은 노래 한 곡조에 밝은 거울을 가리니
어제의 소년은 이제 백발이 되었네



「산우가 오려는데 풍이 누각에 가득하다」는 허혼의 「함양성 동루 시」의 「계운이 처음 일어나 해가 각에 지니, 산우가 오려는데 풍이 누각에 가득하다」에서 유래했다. 산비가 쏟아지기 전에 먼저 바람이 높은 누각에 불어닥치는 현상을 비유한다. 이는 곧 대사건이 일어날 듯한,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도는 상황을 비유한다. 당시에는 당나라 왕조의 쇠퇴기였으며,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의 표현으로 여겨진다.[3]

3. 2. 대표작

전당시》에는 허혼이 신라로 돌아가는 벗에게 전별로 써 주었다는 한시 1수가 실려 있다.

과거 시험을 끝마치고 신라로 돌아가는 벗을 전송하며(送友人罷擧歸新羅)
滄波天塹外푸른 파도 가로막힌 바다 저 바깥
何島是新羅어느 섬이 신라 나라 거기일런가.
舶主辭番遠배 주인은 번국 떠나 멀리도 오고
碁僧入漢多바둑 두는 중은 중국 많이도 온다.
海風吹白鶴바닷바람 하얀 학 날개에 불고
沙日曬紅螺모래밭 햇볕에서 소라를 말리네
此去知投筆이제 가면 붓 던질 것을 알겠거니와
須求利劍磨모름지기 날카롭게 칼을 갈아라.



허혼의 시 두 편은 유명한 시 선집인 《당 시 삼백수》에 수록되어 있으며, 두 편 모두 5언 율시 형식이다. 그의 작품은 이상은과 온정균의 스타일과 비교되기도 한다.[2]

허혼의 작품 중에는 7언 절구 형식의 시인 《추사》(秋思)가 있다.

추사
琪樹西風枕簟秋기수(琪樹)의 서풍, 침전(枕簟)에 가을이 드리우니
楚雲湘水憶同遊초운(楚雲)과 상수(湘水)에서 함께 놀던 날을 기억하네
高歌一曲掩明鏡높은 노래 한 곡조에 밝은 거울을 가리니
昨日少年今白頭어제의 소년은 이제 백발이 되었네


4. 문학적 유산

허혼의 시 《함양성동루》(咸陽城东楼)의 '산비 오려 하니 바람이 가득차네(山雨欲來風滿樓)'라는 구절은 중국의 경제학자 쑹훙빙(宋鴻兵)이 2014년에 펴낸 자신의 저서 《화폐전쟁》 시리즈의 다섯 번째 권 '탐욕경제'의 부제로도 쓰였다.[1]

4. 1. 현대적 재조명

허혼의 시 가운데 《함양성동루》(咸陽城东楼)의 '산비 오려 하니 바람이 가득차네(山雨欲來風滿樓)'라는 구절은 중국의 경제학자 쑹훙빙(宋鴻兵)이 2014년에 펴낸 자신의 저서 《화폐전쟁》 시리즈의 다섯 번째 권 '탐욕경제'의 부제로도 쓰였다.[1]

참조

[1] 문서 Davis, xvi
[2] 문서 Davis, xvi
[3] 웹사이트 コトバンク https://kotobank.jp/[...]
[4] 문서 지금의 중국 강소 성(江苏省) 단양시(丹阳市)이다.
[5] 서적 동내빈(董乃斌)의 《당시인허혼고색》(唐诗人许浑考索)에서 허혼의 본관이 낙양이었음을 지적하였다.
[6] 문서 《당시대계》(唐诗大系)에서는 정원 7년([[791년]])에 태어났다고 했지만 여기에는 사료상의 근거가 없다. 나시진의 《허혼선생고》(许浑生年考)에서는 정원 4년이 맞다고 고증하였다. 왕원언(王远彦)의 《허혼생졸년고》(许浑生卒年考)에서는 허혼이 정원 16년(800년)에 태어났을 것으로 보았는데, 그 근거는 장우(张祜, 785—849)의 시 《방허용회》(访许用晦)였다. 곽문호(郭文镐)의 《허혼남해지행고》(许浑南海之行考)에서는 허혼이 정원 12년(796년)에 태어났다고 보았다.
[7] 서적 나시진 《당시연진론》(唐诗演进论)
[8] 서적 《당재자전》(唐才子传) 권7.
[9] 문서 허혼 자신이 쓴 《오사란시》(乌丝栏诗)의 자서(自序)에서 “大中三年,守监察御史,抱病不任朝谒,坚乞东归”라 하였다.
[10] 문서 금화주씨집성당(金华朱氏集成堂)에서 펴낸 《건덕현지》(建德县志) 권9 《주부승천표》(州府升迁表)에서.
[11] 문서 곽문호의 《허혼자영급졸년고》(许浑刺郢及卒年考)에서는 허혼이 대중 5년 가을에서 6년 가을 사이에 낙양으로 분사(分司)하였고 이듬해 봄에 원외랑으로써 수도를 떠나 자사로써 영주로 나가게 되었다고 보고 있다.
[12] 문서 《신당서》 예문지(艺文志)에서 허혼에 대해 "大中睦州、郢州二刺史"고 하였고, 왕안석(王安石)의 《당백가시선》(唐百家诗选) 권16에도 허혼의 이름 아래에 주석을 달아 “大中末为郢州刺史”라고 하였다.
[13] 문서 나시진 《당시연진론》(唐诗演进论) “송(宋) 사람 범경(范埛)과 임우(林禹)의 《오월비사》(吴越备史) 권1에는 정사에 기재되지 않은 사적 하나를 싣고 있다. ‘함통 중에 경사(京师)에서 기를 보는 자가 말하기를 전당(钱塘) 땅에 왕자(王者)의 기가 서려 있다 하므로, 시어사(侍御史) 허혼(许浑)과 중사(中使) 허집(许计)을 보내어 벽(璧)을 내려 와서 진(秦)의 망산(望山) 중에 이를 묻어 기를 눌렀다(压을《오월비사》 원문에는 厌라 썼다). 사자가 돌아왔을 때에 기를 보는 자가 말하기를 결코 누를 수 없을 것이라 하였다.’”,頁272.
[14] 시 허혼 자신이 쓴 밤에 '정묘교의 촌사로 돌아오며(夜歸丁卯橋村舍)'라는 시가 남아 있다.
[15] 시 방문(方文)의 《증원장경군백》(赠袁长卿郡伯)이라는 시에서 “前辈犹传许丁卯,凌敲送客不曾閒”라고 하였다.
[16] 문서 허혼의 사망 시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당시대계》(唐詩大系)에서는 선종 대중 8년(854)에 사망한 것 같다고 적었으나, 관련 사료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곽문호의 《허혼자영급졸년고》에서는 대중 9년에 졸하였다고 했는데, 나시진(罗时进)의 《허혼생보고》(许浑年谱稿)에서는 함통 2년 혹은 그 이후일 것으로 보았다.
[17] 문서 《초계어은총화》(苕溪渔隐丛话)에서는 《동강시화》(桐江诗话)를 인용해 “허혼의 문집에는 가구(佳句)가 매우 많은데 물(水) 자를 많이 사용하였으며 때문에 국초의 인사들이 '허혼의 1천 수는 물에 젖어 있다(許渾千首濕)고 한 것이 이것이다.”라고 썼다. 나시진이 쓴 《허혼천수습과 그의 불교사상》(许浑千首湿与他的佛教思想)、《시론(試論) 허혼천수습》(试论许浑千首湿) 등에서는 허혼이 남종선 불교에 귀의하였음을 인정하였으며, 그렇기에 어둠과 맞서 싸우려는 생각이 조금도 없었고,또한 시대에 영합하기를 바라지 않았던 허혼은 물은 불교 특히나 선종에서는 청정하고 티끌이 없이 맑고 항상 고요한 가장 높은 경계이자 보편적인 중생의 성물이라고 생각했고, 이러한 이념들은 다른 시가들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고 하였다.
[18] 문서 田雯 《古欢堂集·杂著》
[19] 문서 방회(方回), 《영규율수》(瀛奎律髓).
[20] 문서 《신당서》 예문지 별집에 「許渾丁卯集二卷」이라 수록되어 있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