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인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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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헌인릉은 태종과 원경왕후의 헌릉, 순조와 순원왕후의 인릉을 포함하는 조선왕릉이다. 헌릉은 쌍릉으로 태종과 원경왕후를 안장했으며, 세종의 효심이 깃든 석물 배치가 특징이다. 헌릉 신도비는 보물 제1805호로 지정되었다. 인릉은 순조와 순원왕후를 합장한 능으로, 난간석과 다양한 석물, 섬세한 조각의 문인석과 무인석이 특징이다. 헌인릉은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지니며, 6.25 전쟁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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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인릉 | |
|---|---|
| 위치 정보 | |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서울 헌릉과 인릉 |
| 로마자 표기 | Seoul Heonneung-gwa Illeung |
| 종류 | 사적 |
| 지정 번호 | 194 |
| 지정일 | 1970년 5월 |
| 주소 | 서울특별시 서초구 헌인릉길 36-10 |
| 시대 | 조선 시대 |
| 소유 | 문화재청 |
| 면적 | 1,193,071m2 |
| 문화재청 정보 | |
| 문화재청 ID | 13,01940000,11 |
2. 헌릉
헌릉(獻陵)은 조선 제3대 임금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능으로, 같은 언덕에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 형식이다. 조선 왕릉 중 가장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며, 곳곳에 아들 세종의 지극한 효심이 깃들어 있다. 특히 세종은 생전에 사이가 좋지 않았던 부모님의 화해를 바라는 마음으로 두 봉분을 연결하는 난간석을 설치하는 등 능 조성에 각별한 정성을 쏟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종 자신도 죽어서 부모 곁에 묻히기를 원하여, 승하 후 18년간 이곳 헌릉 서쪽 언덕에 모셔졌다가 예종 원년인 1469년에 현재 경기도 여주의 영릉으로 옮겨졌다.
헌릉에는 제향 공간인 정자각(丁字閣), 신도비가 있는 비각(碑閣), 능역 입구의 홍살문(紅箭門) 등이 남아 있다. 비각 안의 '서울 태종 헌릉 신도비'는 태종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1422년(세종 4년)에 세워졌으며, 변계량이 비문을 지었다. 이 신도비는 2013년 7월 16일 보물 제1805호로 지정되었다.[1][2]
2. 1. 헌릉의 구조와 특징
헌릉(獻陵)은 조선 제3대 임금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를 같은 언덕에 봉분을 따로 만들어 모신 쌍릉 형식이다. 두 봉분 모두 아랫부분에 병풍석(屛風石)을 둘렀으며, 그 바깥으로는 각 봉분에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하여 서로 연결하였다.봉분이 있는 위층에는 양석(羊石)과 호석(虎石) 각 4쌍, 상석(床石) 2좌, 망주석(望柱石) 1쌍이 놓여 있으며, 이 석물들을 3면의 곡장(曲墻)이 감싸고 있다. 봉분 아래 한 단 낮은 중간층에는 각 무덤 앞에 문인석(文人石)과 마석(馬石) 각 1쌍, 팔각형 명등석(明燈石) 1좌씩, 총 문인석 2쌍, 마석 2쌍, 명등석 2좌가 배치되어 있다. 그 아래 마지막 층에는 무인석(武人石)과 마석 각 2쌍, 총 4좌가 자리하고 있다.
헌릉의 석물 배치는 고려 시대 현릉·정릉, 조선 시대 후릉의 양식을 따르면서도, 망주석을 제외한 석물을 하나씩 더 갖추었다. 이는 조선 왕릉 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로 알려져 있으며, 아버지 태종을 향한 세종의 깊은 효심이 반영된 결과로 해석된다. 특히 난간석을 설치한 것은 세종이 생전에 사이가 좋지 않았던 부모님의 화해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세종은 부모님 곁에 묻히기를 원하여 승하 후 18년간 헌릉 서쪽 언덕에 모셔졌으나, 예종 원년인 1469년에 현재의 경기도 여주 영릉으로 옮겨졌다.
헌릉의 봉분 아래에는 제사를 지내는 정자각(丁字閣)과 2기의 신도비가 있는 비각(碑閣)이 있으며, 능역 입구에는 홍살문(紅箭門)이 세워져 있다.
문화재청은 2013년 7월 16일 '서울 태종 헌릉 신도비'를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1805호로 지정했다. 이 신도비는 태조의 다섯째 아들이자 조선 왕조의 기틀을 다진 태종 이방원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1422년(세종 4년)에 세워졌다. 비문은 변계량(1369~1430)이 지었다.[1][2]
2. 2. 헌릉 신도비 (보물 제1805호)
헌릉에 있는 신도비는 조선 제3대 임금 태종 이방원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조선 태조의 다섯째 아들이었던 태종은 조선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다진 인물로 평가받는다. 이 신도비는 1422년(세종 4년)에 건립되었으며, 변계량(1369~1430)이 태종의 일대기를 담아 비문을 지었다.[1][2] 문화재청은 2013년 7월 16일 이 신도비를 '서울 태종 헌릉 신도비'라는 명칭으로 보물 제1805호로 지정하였다. 신도비는 헌릉의 비각 안에 위치한다.3. 인릉
인릉은 조선 제23대 왕 순조와 왕비 순원왕후 김씨를 함께 모신 합장릉이다. 능 주위에 배치된 석물들의 조각은 사실적이며 섬세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평가받는다.
3. 1. 인릉의 구조와 특징

인릉은 순조와 순원왕후를 같은 언덕에 합장한 봉분이다. 무덤 아래에는 병풍석은 설치하지 않았고, 대신 12칸의 난간석을 둘렀다. 봉분 주위로는 양석과 마석 각 2쌍, 상석 1좌, 망주석 1쌍을 배치하고, 3면을 곡장으로 감쌌다.
한 단 아래에는 문인석과 마석 각 1쌍, 명등석 1좌를 설치했다. 그 아래에는 무인석과 마석 각 1쌍을 배치하였다. 문인석과 무인석의 조각은 매우 사실적으로 새겨져 섬세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무덤 언덕 아래에는 정자각, 2기의 비석이 있는 비각, 그리고 입구에 홍살문이 있다. 홍살문 남쪽 도로변에 있는 재실은 원래 능역 안에 있었으나, 6.25 전쟁 이후 중간 부분이 농지로 개간되면서 능역과 떨어져 위치하게 되었다.
4. 헌릉과 인릉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
헌릉(獻陵)은 조선 제3대 임금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를 같은 언덕에 봉분을 달리하여 모신 쌍릉이다. 두 봉분 모두 아래쪽에 병풍석(屛風石)을 둘렀고, 그 밖으로 각 봉분에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하여 서로 연결하였다. 봉분 주위에는 양석(羊石)과 호석(虎石) 각 4쌍, 상석(床石) 2좌, 망주석(望柱石) 1쌍을 세웠으며, 3면을 곡장(曲墻)으로 감쌌다. 그 아래 단에는 문인석(文人石) 2쌍, 마석(馬石) 2쌍, 팔각형 명등석(明燈石) 2좌가 각 무덤 앞에 놓여 있고, 가장 아래 단에는 무인석(武人石)과 마석 각 4좌가 배치되어 있다. 이는 조선 왕릉 중 가장 웅장한 규모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세종이 부모님을 위해 정성을 들인 흔적을 엿볼 수 있다.[1][2] 헌릉의 석물 배치는 고려 현릉·정릉, 조선 후릉과 유사하지만, 망주석 외에는 각 석물을 하나씩 더 갖추고 있다. 세종은 부모의 능 조성에 각별한 정성을 보였으며, 난간석을 설치한 것은 생전에 사이가 좋지 않았던 부모의 화해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세종 자신도 승하 후 유언에 따라 18년간 헌릉 서쪽 편에 모셔졌다가 1469년(예종 원년)에 현재의 여주 영릉으로 옮겨졌다. 헌릉에는 쌍봉 아래에 정자각(丁字閣), 2기의 신도비가 있는 비각(碑閣), 입구의 홍살문(紅箭門) 등이 남아있다.
특히 헌릉 입구에 있는 '서울 태종 헌릉 신도비'는 1422년(세종 4년)에 세워진 것으로, 조선 왕조의 기틀을 다진 태종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변계량이 비문을 지었다. 이 신도비는 그 역사적,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7월 16일 보물 제1805호로 지정되었다.[1][2]
인릉(仁陵)은 조선 제23대 임금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를 같은 언덕에 합장한 능이다. 봉분 아래에는 병풍석 없이 12칸의 난간석만 둘렀으며, 주위로 양석과 마석 각 2쌍, 상석 1좌, 망주석 1쌍을 세우고 3면을 곡장으로 감쌌다. 그 아래 단에는 문인석과 마석 1쌍, 명등석 1좌가 있고, 가장 아래 단에는 무인석과 마석 각 1쌍이 배치되어 있다. 인릉의 문인석과 무인석은 사실적이면서도 섬세하게 조각되어 예술적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능 언덕 아래에는 정자각, 2기의 비석이 있는 비각, 입구의 홍살문이 있다. 홍살문 남쪽 도로변에 있는 재실은 당초에는 능역 안에 있었으나, 6.25 전쟁 이후 농지로 개간되어 능역과 분리되었다.
4. 1. 6.25 전쟁과 헌릉, 인릉
인릉(仁陵)의 재실은 본래 능역 안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6.25 전쟁 이후 변화를 겪었다. 전쟁 이후 능역의 일부가 농경지로 바뀌면서, 홍살문 남쪽 도로변에 위치한 재실은 능역 본래 영역과 분리되어 현재의 위치에 자리하게 되었다. 이는 전쟁이 문화유산의 보존 환경에 영향을 미친 사례를 보여준다.참조
[1]
뉴스
'서울 태종 헌릉 신도비' 보물 지정
http://news1.kr/phot[...]
뉴스1
2013-07-16
[2]
뉴스
조선초기의 왕릉 신도비 3기 보물로 지정
http://news.khan.co.[...]
2013-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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