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사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호사호는 금나라 말기의 무장으로, 1168년 황태자를 호위하는 장수로 시작하여 공위직지휘사까지 올랐다. 그는 폭력적이고 잔혹한 성격으로 인해 여러 차례 좌천되었으며, 남송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워 서경유수가 되었으나, 권력 남용으로 비판받았다. 몽골의 침략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반란을 일으켜 금 위소왕을 폐위하고 금 선종을 옹립한 후 권력을 장악했으나, 2개월 만에 쿠데타로 인해 가족과 함께 살해되었다.
호사호는 금나라 말기의 무장으로,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다. 1168년 황태자 호위를 시작으로 군 경력을 쌓았으나, 폭력적이고 잔혹한 성격 탓에 술 문제로 관리를 폭행하는 등 문제를 일으켜 여러 차례 좌천과 복직을 반복했다.
2. 생애
1205년 남송과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워 서경유수, 행추밀원겸안무사 등 군의 요직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군사력을 이용하여 임지에서 재물을 빼앗는 등 권력을 남용하였고, 당시 위소왕과 조정은 이를 제지하지 못했다.
몽골 제국의 칭기즈 칸이 금나라를 침공하자, 호사호는 방어에 나섰으나 패배하였다. 이후 자신의 처벌을 두려워하고 정치적 위기를 느끼자, 1213년 군사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과 대립하던 도단남평 부자와 좌승상 완안강 등 주요 인물들을 살해하고, 황제 위소왕을 폐위시킨 뒤 독살하였다. 이후 위소왕의 조카인 선종을 황제로 옹립하고 자신은 태사, 상서령, 도원수 등의 최고 직책을 겸하며 권력을 장악했다.
하지만 그의 권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정권을 잡은 지 불과 2개월 만인 같은 해 10월, 몽골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돌아온 부하 장수 고기가 처벌을 두려워하여 일으킨 쿠데타로 인해 아들과 가족들과 함께 살해당하며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생활
1168년(대정 8년) 황태자를 호위하는 직책을 맡으며 관직 생활을 시작했고, 수도 금나라 군대의 사령관 중 하나인 공위직지휘사(拱衛直指揮使)에 올랐다. 그러나 본래 성격이 폭력적이고 화를 잘 내며 사납고 잔혹했다.
1193년(명창 4년), 술맛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감주관(술 담당 관리)이었던 거란인 이사보(移刺保)를 폭행하여 다치게 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이 일로 우복점검(右副点檢)으로 강등되었으나, 호사호는 처분에 불만을 품고 근무를 태만히 했다. 결국 어사중승(御史中丞) 맹주(孟鑄)로부터 "탐욕스럽고 법을 지키지 않으며 반성할 줄 모르는 자"라는 탄핵을 받아 조주방어사(肇州防禦使)로 좌천되었다.
이후 지방 군관을 지냈으나, 상관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일이 잦았고 금나라 신하로서 불손한 태도를 보인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처벌을 받았다. 1200년(승안 5년)에는 수도 중도대흥부(中都大興府)의 행정 책임자인 지대흥부사(知大興府事)가 되었지만, 그의 행동이 수도의 관리로서 부적절하다는 이유로 다시 맹주를 중심으로 한 어사대 관리들에게 탄핵되어 무위군도지휘사(武衛軍都指揮使)로 좌천되었다.
1205년(태화 5년) 남송과의 전쟁이 발발하자 산둥 지역으로 출정하여 큰 공을 세웠다. 남송의 장수 이조(李藻)를 격파하고 충의장군 여장(呂璋)을 사로잡는 등의 전공으로 서경유수(西京留守, 대동부의 장관)로 임명되어 산서 지역에 주둔하게 되었다. 1209년(대안 원년)에는 대대로 관직을 물려줄 수 있는 세습 모극(謀克)을 하사받았고, 군의 요직인 행추밀원겸안무사(行樞密院兼安撫使)에 임명되었다. 호사호는 자신이 지휘하는 막강한 군사력을 이용하여 임지에서 관리와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는 등 권력을 남용했지만, 당시 황제였던 위소왕과 조정 대신들은 이를 제지하지 못하고 사실상 묵인했다.
2. 2. 남송과의 전쟁과 권력 남용
태화 5년(1205년), 남송과의 전쟁이 발발하자 산동 지방으로 출정하여 큰 전공을 세웠다. 남송의 장군 이조(李藻)를 쳐서 죽이고, 충의장군 여장(呂璋)을 사로잡는 등의 공을 세워 서경유수(西京留守, 대동부의 장관)로 임명되었고, 산서 지방에 주둔하게 되었다.[1][2] 대안 원년(1209년)에는 세습이 가능한 모극(謀克) 직위를 하사받았으며, 군의 주요 직책인 행추밀원겸안무사(行樞密院兼安撫使)에 올랐다.[1][2]
그러나 호사호는 자신이 장악한 강력한 군사력을 이용하여 임지에서 관리와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는 등 권력을 남용하고 전횡을 일삼았다.[1][2] 당시 황제였던 위소왕과 조정의 대신들은 그의 이러한 월권 행위를 제지할 능력이 없었고, 결국 호사호의 권력 남용은 불문(不問)에 부쳐지며 사실상 묵인되었다.[1][2]
2. 3. 위소왕 시해와 정권 장악
칭기즈 칸이 이끄는 몽골 제국군의 침공이 시작되자, 호사호는 우부원수(右副元帥)·권상서좌승(權尙書左丞)에 임명되어 산서 지방의 방어를 맡았다. 그러나 그는 몽골군에게 패배하여 금나라의 수도인 중도로 도망쳤다. 이전부터 호사호의 태만하고 잔인한 성격에 불만을 품고 있던 황제 위소왕의 측근 관료들은 이를 기회로 삼아 호사호를 처벌할 것을 상소했다.
이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호사호는 중도의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반란을 결심했다. 정우 원년(1213년) 8월 신해일에 군대를 이끌고 궁궐에 난입하여, 먼저 자신과 대립하던 위소왕 측근이자 여진족 귀족인 도단남평과 그의 아들 도단몰열 부자를 살해했다. 이어서 금나라 황족 출신인 좌승상(左丞相) 완안강마저 참수했다. 이윽고 위소왕을 폐위시키고 유폐한 뒤, 환관 이사중에게 명하여 독살했다.
호사호는 위소왕의 조카인 선종을 황제로 즉위시키고, 자신은 태사, 상서령, 도원수, 감수국사에 취임하여 독재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정권 탈취 2개월 후인 같은 해 겨울 10월에, 원수우감군(元帥右監軍)에 임명되어 몽골군과 싸우던 고기가 패배하여 중도로 도망쳐 오자, 호사호에게 처벌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호사호는 자택이 포위되어 아들과 가족과 함께 참살되었다.
2. 4. 최후
칭기즈 칸이 이끄는 몽골 제국 군대의 침공이 시작되자, 호사호는 우부원수(右副元帥) 겸 권상서좌승(權尙書左丞)에 임명되어 산서 지방 방어를 맡았으나 패배하고 수도인 중도로 도망쳐 돌아왔다. 이전부터 호사호의 태만하고 잔인한 성격에 불만을 품고 있던 황제의 측근 관료들은 이 패배를 빌미로 호사호를 처벌해야 한다고 위소왕에게 상소했다.[1][2]
신변의 위협을 느낀 호사호는 이미 중도의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반란을 결심했다. 정우 원년(1213년) 8월 신해일, 그는 군대를 이끌고 궁궐에 난입하여 먼저 자신과 대립하던 위소왕의 측근이자 여진 귀족인 도단남평(徒單南平)과 그의 아들 도단몰열(徒單没烈)을 살해했다. 이어서 금나라 황족 출신의 좌승상(左丞相) 완안강(完顔綱)까지 참수했다. 곧이어 위소왕을 폐위시키고 유폐한 뒤, 환관 이사중(李思中)에게 명령하여 독살하였다.[1][2]
호사호는 위소왕의 조카인 선종을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고, 자신은 태사(太師), 상서령(尙書令), 도원수(都元帥), 감수국사(監修국史) 등의 최고 관직에 올라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1][2]
그러나 그의 권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정권을 탈취한 지 불과 2개월 뒤인 그해 10월, 원수우감군(元帥右監軍)에 임명되어 몽골군과 싸우던 장수 고기(高琪)가 전투에 패배하고 중도로 도망쳐 왔다. 고기는 호사호에게 처벌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반란군은 호사호의 저택을 포위했고, 호사호는 아들과 다른 가족들과 함께 그 자리에서 살해되었다.[1][2]
참조
[1]
서적
元史
[2]
문서
杉山(2008)pp.99-102
[3]
문서
원사(元史)에 기록된 이름이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