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조 무네히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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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혼조 무네히데는 일본 에도 시대의 무사로, 도쿠가와 막부의 관료로 활동했으며, 안세이 대옥을 주도하고 제2차 조슈 정벌에 참여했다. 그는 1809년에 태어나 1873년에 사망했다. 마쓰다이라 무네토시의 아들로 태어나 가독을 상속받았으며, 지샤 봉행, 오사카 조다이, 교토 쇼시다이, 로주 등 막부의 주요 직책을 역임했다. 안세이 대옥 당시 지사 처벌을 행했으며, 제2차 조슈 정벌에서 조슈 번의 가신을 석방한 것이 발각되어 파면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신정부에 출사하여 이세 신궁의 대구지 등을 역임했다. 또한 그는 근세 다이묘 중 유일하게 후지산 등반에 성공한 인물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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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조 무네히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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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이름 | 마쓰다이라 무네히데 |
다른 이름 | 혼조 무네히데 |
호칭 | 호키노카미 단고노카미 |
출생 | 1809년 10월 21일 |
사망 | 1873년 12월 20일 |
관직 | |
봉직 | 에도 막부 |
주요 직책 | 소자반 겸 지샤부교 오사카 성대 교토 쇼시다이 노중 |
관위 | 종4위하 시종 도서료 단바노카미 호키노카미 |
가문 | |
씨족 | 혼조 마쓰다이라 가문 혼조 씨 |
아버지 | 마쓰다이라 무네치카 마쓰다이라 무네하루 |
가족 관계 | |
형제자매 | 무네히데 우치다 마사요시의 정실 사다코 스와 요리야스의 정실 스와 요리야스의 계실 오다 나가요시의 계실 등 |
배우자 | 마쓰다이라 노리타다의 딸 오쿠보 다다자네의 7녀 오우코 마쓰다이라 데루노부의 딸 미쓰코 |
자녀 | 나스 스케오키 마키노 다다쿠니 마쓰다이라 무네타케 마쓰다이라 노리타케 구쓰키 쓰나카네 도미타 도모오키의 부인 마쓰다이라 무네카타 |
영주 | |
번 | 미야즈 번 |
임기 | 1841년 ~ 1866년 |
전임 | 마쓰다이라 무네아키라 |
후임 | 마쓰다이라 무네타케 |
주요 경력 | |
오사카 성대 | 임기: 1860년 ~ 1862년 전임: 마쓰다이라 노부요시 후임: 마쓰다이라 노부히사 |
교토 쇼시다이 | 임기: 1862년 전임: 사카이 다다아키 후임: 마키노 다다유키 |
묘소 |
2. 생애
4대 번주 마쓰다이라 무네토시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사망 당시 어렸기 때문에 삼촌인 마쓰다이라 무네모토를 거쳐 덴포 11년(1840년)에 가독을 상속받았다. 다이로 이이 나오스케 휘하에서 지샤 봉행으로 안세이 대옥을 집행했으며, 기타마치 부교 이시가야 무쓰키요 등과 함께 지사들을 처벌했다. 오사카 성대를 거쳐 교토 쇼시다이에 임명되었으나, 오하라 시게토미를 중심으로 조정에서 반대했고, 아이즈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도 반대하여 부임하지 못하고(대역으로 사카이 다다즈미) 2개월 만에 해임되었다. 그 대가로 류메즈메가 되어 후다이 다이묘 최고 격식을 얻었지만, 안세이 대옥에 대한 추벌 인사로 1년 3개월 만에 박탈되었다.
이후 로주가 되어 아베 마사토와 함께 막부군 3천을 이끌고 상락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에도로 연행하고 교토를 막부 통제 하에 두려 했으나 실패했다. 게이오 2년(1866년) 제2차 조슈 정벌에서 아키 국히로시마에 출진하여 막부군을 지휘했다. 전쟁 지속이 불리함을 깨닫고 포로였던 조슈 번 가로 시시도 다마키와 오다무라 이노스케를 독단으로 석방하여 평화 공작을 시도했으나 발각되어 로주에서 파면되었고, 가독을 다섯째 아들 무네타케에게 물려주고 은거 근신을 명받았다.
도바·후시미 전투 때 구 막부 측에 섰던 미야즈 번이 번병을 이끌었던 중신 두 명을 할복시키려 하자, 조슈 번에서 신정부에 대해 앞선 시시도·오다무라 석방의 공적과 맞바꿀 것을 제안해 두 명은 사면되었다[3]。
메이지 유신 이후 신정부에 출사하여 이세 신궁의 대구지 등을 역임했다. 1873년(메이지 6년)에 65세로 사망했다.
2. 1. 유년기와 가독 상속
4대 번주 마쓰다이라 무네토시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무네토시가 사망했을 당시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삼촌인 마쓰다이라 무네모토를 거쳐 덴포 11년(1840년)에 가독을 상속받았다.[3]2. 2. 막부 관료 경력
무네히데는 도쿠가와 막부에서 여러 직책을 맡았다. 1858년 11월부터 1861년 11월까지 ''지샤-부교''를, 1861년 2월부터 1862년 7월까지 오사카 ''조다이''를 역임했다.[1] 1862년 7월 26일부터 같은 해 9월 17일까지는 교토 ''쇼시다이''를 맡았고,[2] 1864년 9월부터 1866년 9월까지 로주의 자리에 올랐다.[1]다이로 이이 나오스케 아래에서 지샤 봉행으로 일하며 안세이 대옥을 집행했고, 기타마치 부교 이시가야 무쓰키요 등과 함께 지사들을 처벌했다. 오사카 성대를 거쳐 교토 쇼시다이에 임명되었으나, 오하라 시게토미를 중심으로 조정에서 반대했고, 아이즈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도 반대하여 부임하지 못하고 2개월 만에 해임되었다. 대신 류메즈메가 되어 좋은 대우를 받았지만, 안세이 대옥에 대한 처벌로 1년 3개월 만에 박탈되었다.
이후 로주가 되어 아베 마사토와 함께 3천 명의 막부군을 이끌고 상락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에도로 데려가고 교토를 막부 통제 하에 두려 했으나 실패했다. 게이오 2년(1866년) 제2차 조슈 정벌 때는 아키 국히로시마에 출진하여 막부군을 지휘했다. 전쟁이 불리함을 깨닫고 포로였던 조슈 번 가로 시시도 다마키와 오다무라 이노스케를 독단으로 석방하여 평화 공작을 시도했으나 발각되어 로주에서 파면되고, 가독을 다섯째 아들 무네타케에게 물려주고 은거 근신을 명받았다.
2. 3. 안세이 대옥
이이 나오스케 휘하에서 지샤 봉행으로서 안세이 대옥을 행정화했으며, 기타마치 부교 이시가야 무쓰키요, 간조 봉행 이케다 요리카타, 오메쓰케 구가이 마사노리, 메쓰케 진보 나가오키 등과 함께 지사를 처벌했다.[3] 그 후 오사카 성대를 거쳐 교토 쇼시다이로 임명되었으나, 오하라 시게토미를 중심으로 조정 내에서 안세이 대옥 당사자 기용에 반대했고, 마쓰다이라 가타모리가 막부 내에서도 반대했기 때문에 임명은 되었지만 부임하지 못했다.(대역으로 사카이 다다즈미) 2개월 후 해임되었다.[3] 그 대가로 류메즈메가 되어 후다이 다이묘 최고 격식을 얻었지만, 안세이 대옥에 대한 추벌 인사를 받아 약 1년 3개월 만에 그 격식은 박탈되었다.[3]2. 4. 제2차 조슈 정벌과 파면
게이오 2년(1866년) 제2차 조슈 정벌에서 막부군의 지휘를 위해 아키 국히로시마에 출진했다. 그러나 전쟁 지속이 불리함을 깨닫고, 포로로 잡고 있던 조슈 번 가로 시시도 다마키와 오다무라 이노스케 두 명을 독단으로 석방하여 유리한 조건으로 평화 공작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 사실이 발각되어 로주에서 파면되었고, 다섯째 아들인 무네타케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 근신을 명받았다.[3]2. 5.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유신 이후 신정부에 출사하여 이세 신궁의 대구지 등을 역임했다.[3] 1873년(메이지 6년)에 65세로 사망했다.3. 후지산 등반
후지미야시의 유형 문화재로 지정된 양조장 주인이 기록한 "소데닛키"[4]라는 고문서에는 혼조 무네히데가 후지산 등산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소데닛키"의 6번째 기록에 따르면, 무네히데는 에도와 미야즈를 참근교대로 왕복하는 동안 후지산에 오르려는 생각을 했다. 참근교대 여정은 막부가 지정한 경로였으며, 이를 벗어난 코스를 가거나 사찰 참배를 위한 곁길 이동도 허용되지 않았다.[4] 무네히데는 막부에 후지산 등산을 요청했으나 3년이 지나서야 허가를 받았고, 그나마도 "우마가에시"(1합목 아래 지점으로, 등산객들이 말을 내려놓고 산에 오르는 곳)까지만 허용되었다.[4] 결국 무네히데는 1852년 6월 21일, 막부 몰래 등산을 결심하고 새벽부터 산을 오르기 시작하여 점심 무렵 정상에 도착했다.[4] 무네히데의 후지산 등정은 근세 다이묘의 후지산 등산 중 유일한 기록이다.[4]
4. 연표
연도 | 사건 |
---|---|
1809년 | 출생 |
1841년 | 가독 상속 |
1842년 | 주자반 취임 |
1844년 | 주자반 면직 |
1846년 | 주자반 재임 |
1852년 | 후지산 등정 |
1858년 | 지샤 봉행 겸임 |
1860년 | 주자반 겸 지샤 봉행 면직, 오사카 성대 배명 |
1862년 | 오사카 성대 면직, 교토 쇼시다이 배명, 쇼시다이 면직, 도메마즈메 격으로 변경 |
1863년 | 간마즈메로 강등 |
1864년 | 로주 취임 |
1866년 | 로주 면직, 은거 |
1873년 | 사망 |
5. 가신
6. 등장 작품
- 도쿠가와 요시노부 (1998년) - 배역: 사카니시 료타
- 꽃 타오르다 (2015년) - 배역: 스와 타로
- 세고 돈 (2018년) - 배역: 야마다 아키호
7. 계보
(다섯째 아들)
(일곱째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