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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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지는 3세기 초 한수 상류 지역을 기반으로 일어난 저족의 세력으로, 전구지(296-371년)와 후구지(385-443년)로 나뉘어 존속했다. 양등이 부락의 대수가 된 이후, 양모수가 독립적인 왕으로 즉위하며 세력을 확장했으나, 4세기 말 전진에 의해 멸망했다. 이후 부활한 후구지는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 속에서 존속을 이어갔으며, 5세기에는 여러 왕조와 교류하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580년 수 문제의 공격으로 멸망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저족(氐族)의 일파인 양씨(楊氏) 세력은 후한 말 양등을 시작으로 간쑤성 동남부와 한수 상류 지역에서 기반을 다졌다. 그의 아들 양구는 험준한 지형의 구지(仇池)로 근거지를 옮겼고, 이후 양천만 대에는 조위에 복속하여 백경저왕(百頃氐王) 칭호를 받기도 했다.[5][6][3]
2. 역사
서진 말기의 혼란기에 296년 양모수가 구지에서 자립하여 전구지(前仇池) 시대를 열었다. 전구지는 서진의 인정을 받기도 했으나, 양모수 사후 내부 분열과 전조, 성한 등 주변 세력과의 경쟁 및 복속 관계를 반복하며 부침을 겪었다. 거듭된 왕위 찬탈과 내분으로 쇠약해진 끝에 371년 전진의 부견에게 멸망당했다.[3]
385년, 비수 전투 이후 전진이 쇠퇴한 틈을 타 전구지 왕족 양정이 역성(歷城)을 중심으로 후구지(後仇池)를 재건했다.[3] 후구지는 동진, 북위, 후진 등 주변 강국 사이에서 복잡한 외교 관계를 통해 존속을 모색했다. 한때 독자적인 세력 구축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결국 442년 북위의 압박으로 양난당이 망명하면서 멸망했다.[3]
후구지 멸망 이후에도 양씨 일족은 무도(武都), 음평(陰平), 무흥(武興) 등의 이름으로 나뉘어 명맥을 유지했다.[5][7][3] 이들은 남북조 시대 강대국들의 영향력 아래 놓인 소규모 정권으로 존속하다가, 580년 마지막 남은 음평 정권이 북주에 대항하는 반란에 연루되어 수나라 군대에 의해 최종적으로 멸망하면서 저족 양씨가 세운 구지 정권은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5][6][3]
2. 1. 전사(前史)
약양군 청수현을 본관으로 하는 저족(氐族) 양씨는 진·한 시대부터 대대로 농서 땅에 살았던 호족이었다. 후한 건안 연간(196년~220년)에 양등이 부락의 지도자가 되었다. 양등의 아들 양구는 용맹하고 지략이 뛰어나 아버지 사후 무리를 이끌고 구지(仇池)로 거점을 옮겼다. 구지는 넓이가 백 경이라 하여 '''백경'''(百頃)이라고도 불렸으며,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고립되어 있고 고저차가 20여 리에 달하는 험준한 지형이었다. 산길은 복잡하여 정상에 오르려면 36번이나 구불구불 돌아가야 했으며, 산 위에는 수원이 풍부했고, 흙을 삶아 소금을 얻을 수도 있었다고 한다.
양구 사후에는 양천만이 뒤를 이었다. 213년, 양주의 군벌인 마초와 손을 잡았으나 마초가 한중으로 쫓겨나자 이후 조위에 귀순하여 백경저왕(百頃氐王)이라는 칭호를 받았다.[5][6][3] 양천만의 자손인 양비룡이 계승했을 때 저족 양씨는 세력이 강성해져 서진 무제로부터 정서장군(征西將軍)에 임명되었고, 다시 여양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296년, 아들이 없던 양비룡은 외조카 영호무수(令狐茂搜)를 양자로 삼아 양모수라는 이름으로 후계자를 삼았다. 양비룡이 사망하자 양모수가 뒤를 이었다. 4세기 초, 양모수는 독립적인 왕으로 즉위했다.[3] 이 시기 구지 군대는 종종 동쪽의 중원 지역을 약탈하고 주민들을 납치하기도 했지만, 동진과 한조 군대의 공격으로 일부 영토와 백성을 빼앗기기도 했다. 322년, 양난제는 한조에 패배하여 무도왕(武都王)과 초치공(仇池公)으로 강등되었다.[3] 이후 수년간 양씨 가문 내부에서는 수많은 권력 다툼과 찬탈이 일어났다. 구지의 통치자들은 동진 정부 아래의 단순한 지방 감찰관(刺史)이나 태수(太守)로 취급되지 않았고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했다.[3] 371년, 전진의 군주 부견이 구지를 공격하여 통치자 양찬(楊篡)을 사로잡으면서 전 초치 시대는 막을 내렸다.[3]
385년, 양모수의 증손이자 부견의 사위인 양정이 역성(歷城)을 수도로 삼아 구지 왕국을 부활시켰다. 그의 동생 양성은 한수 상류의 양주(梁州) 지역을 정복하고 스스로 동진의 양주자사(梁州刺史)를 칭했다. 현재의 쓰촨성 영토를 점령하려는 시도는 실패했지만, 구지는 현재 간쑤성 동부와 산시성 남부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며 후 초치 시대를 열었다.[3]
443년 이후 구지의 군주들은 남북조 시대 강대국들의 통제 하에 있는 꼭두각시 통치자에 불과했다. 역사가들은 구지의 역사를 크게 전 초치(前仇池), 후 초치(後仇池), 무도(武都), 음평(陰平), 무흥(武興)의 다섯 시기(仇池五國)로 나누기도 한다.[5][7][3]
| 시대 구분 | 존속 기간 | 비고 |
|---|---|---|
| 전 초치(前仇池) | 296년 ~ 371년 | 양모수가 독립 왕조 시작, 전진에 의해 멸망 |
| 후 초치(後仇池) | 385년 ~ 443년 | 양정이 부활, 북위에 의해 정복 |
| 무도(武都) | 443년 ~ 477년 | 양문덕이 북위 정복 후 복원, 후 초치의 연장으로 보기도 함 |
| 음평(陰平) | 477년 ~ 6세기 중반 | 양문두 사후 분열 |
| 무흥(武興) | 477년 ~ 553년 | 양문두 사후 분열 |
443년 북위가 구지를 정복했으나, 같은 해 양문덕이 왕국을 복원하여 무도 시대가 시작되었다. 477년 양문두가 사망하자 왕국은 음평과 무흥으로 분열되었으며, 음평은 6세기 중반까지, 무흥은 553년까지 존속하다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 2. 전구지(前仇池, 296년~371년)
삼국시대에 저족의 일부는 마초, 한수 등과 협력하여 조조에 대항했으나 패배 후 흩어졌다. 위나라 말기, 사마소 집권 시기에 저족의 양비룡(楊飛龍)이 세력을 모아 고지 회복을 시도했다.[5][6][3]양비룡의 양자였던 양무수(楊茂搜)는 296년 제만년의 난을 피해 부족 4천여 호를 이끌고 략양에서 구지(仇池)로 이동하여 스스로 보국장군(輔國將軍), 우현왕(右賢王)을 자칭하며 왕위에 올랐다. 이는 전구지(前仇池)의 시작이었다. 그는 관중에서 피난 온 유민들을 받아들여 세력을 키웠고, 이후 서진 민제로부터 표기장군·좌현왕에 임명되어 지위를 공인받았다. 건국 후 양무수는 구지공(仇池公)을 칭하며 무도(武都)와 음평(陰平) 일대를 다스렸다.
313년 양무수의 장남 양난적(楊難敵)은 양주를 점거하고 자사를 자칭했으나 이듬해 반란으로 쫓겨났다. 317년 양무수가 사망하자 후계 문제로 내분이 발생했다. 양난적은 좌현왕(左賢王)으로서 하변(下辨)을, 그의 동생 양견두(楊堅頭)는 우현왕으로서 하지(河池)를 거점으로 삼아 대립했다. 결국 양난적이 동생을 누르고 권력을 장악했으나, 이 내분으로 전구지의 세력은 약화되기 시작했다.
322년 전조의 유요가 구지를 공격하자 양난적은 패배하여 무도왕(武都王)과 구지공(仇池公)으로 강등되었고 전조에 항복했다. 323년 전조의 재침을 두려워하여 양견두와 함께 한중으로 도주했으나 추격당해 큰 피해를 입었다. 양난적은 성한에 잠시 의탁하려 했으나, 전조 군대가 물러나자 바로 성한을 배신했다. 이웅이 보낸 성한 군대의 공격을 격퇴하고, 325년에는 한중에서 군사를 일으켜 구지를 되찾았다. 이후 327년 전조, 331년 성한의 침입을 연이어 막아냈다.
334년 양난적이 사망하고 아들 양의(楊毅)가 뒤를 이었다. 양의는 동진에 사신을 보내 복속의 뜻을 표했고, 이후 전구지는 대대로 동진으로부터 구지공(仇池公) 칭호를 받으며 종속 관계를 유지했다.[3]
그러나 337년 양의는 족형 양초(楊初)에게 살해당했다. 양초는 구지공을 자칭하고 후조에 복속했다. 이후 전구지는 극심한 내부 혼란에 빠졌다. 355년 양의의 동생 양송노(楊宋奴)가 양초를 살해하게 했으나, 곧 양초의 아들 양국(楊國)에게 살해당했다. 356년 양국은 숙부 양준(楊俊)에게 살해되었고, 양준이 자립했다. 360년 양준이 죽자 아들 양세(楊世)가 계승했다. 양세는 368년 전진에 복속하여 남진주 자사(南秦州 刺史)로 임명되었다.
370년 양세가 사망하고 아들 양찬(楊篡)이 즉위했으나, 숙부 양통(楊統)이 이에 불복하고 자립을 시도하면서 전구지는 분열되었다. 양찬은 즉위 직후 전진과의 관계를 끊었다.[3]
371년 3월, 전진의 군주 부견은 부아, 양안 등에게 7만 대군을 주어 구지를 공격하게 했다. 4월, 양찬은 5만 병력으로 맞섰고 동진의 양주자사 양량이 지원군을 보냈으나 대패했다. 양통이 먼저 전진에 항복했고, 양찬 역시 뒤따라 항복하여 장안으로 압송되었다. 구지의 백성들은 관중으로 강제 이주되었고, 양찬은 이후 양안에게 살해당하면서 전구지는 멸망했다.[3]
2. 3. 후구지(後仇池, 385년~443년)
전진이 비수 전투에서의 패배 이후 혼란에 빠지고 385년 부견이 후진에 의해 살해되자, 부견의 사위이자 전 구지(前仇池) 왕족인 양정(楊定)은 따르던 무리를 이끌고 농우(隴右, 현재의 간쑤성 동남부) 지역으로 돌아왔다. 같은 해 11월, 양정은 역성(歷城, 현재의 시허현)을 근거지로 삼아 용양장군(龍驤將軍)·평강교위(平羌校尉)·구지공(仇池公)을 자칭하며 자립하여 후구지 정권을 세웠다.[3] 양정은 동진에 복속 의사를 표했고, 동진은 그가 자칭한 칭호를 모두 인정해주었다.양정은 세력 확장에 힘써 389년 혹은 390년에는 천수(天水), 약양(略陽), 농성(隴城), 익성(翼城) 등 진주(秦州) 일대를 점령하고 농서왕(隴西王)을 자칭할 정도로 세력을 키웠다. 그러나 이러한 확장은 서진(西秦)의 걸복건귀와의 충돌을 야기했고, 394년 10월 벌어진 전투에서 양정은 패배하여 살해당했으며 농서 지역도 잃게 되었다.
양정이 죽자 그의 사촌인 양성(楊盛)이 구지공의 자리를 계승했다. 양성은 북위, 후진, 동진 등 주변 강국들 사이에서 복잡한 외교 관계를 유지하며 후구지의 생존을 도모했다. 396년에는 후진에 복속하여 구지공에 봉해졌고, 398년에는 북위에 복속하여 구지왕(仇池王)에 봉해졌으며, 399년에는 다시 동진에 복속하여 평강교위·구지공이 되었다. 404년에는 동진을 찬탈하고 초나라를 세운 환현으로부터 서융교위(西戎校尉)로 임명되기도 했다.
양성은 404년과 405년에 서진과 전투를 벌였고, 405년에는 후진과 싸워 크게 패했으나 아들 양난당을 인질로 보내는 조건으로 위기를 넘겼다. 그러나 412년 양성은 다시 후진을 배반했고, 후진의 공격을 격퇴했다. 오히려 416년부터는 후진을 공격하기 시작하여, 417년 후진이 동진에게 멸망할 때까지 교전했다. 후진 멸망 후에는 관중 지역의 패권을 두고 다른 세력들과 경쟁했다. 420년 유유가 동진을 멸망시키고 송나라를 세우자, 양성은 송에 복속하여 422년 무도왕(武都王)에 봉해졌지만, 연호는 동진의 마지막 연호인 의희(義熙)를 계속 사용하였다. 425년 6월 양성이 사망하고 아들 양현(楊玄)이 뒤를 이었다.
양현은 송의 연호인 원가(元嘉)를 사용하며 공식적으로 송에 복속했다. 그러나 426년 12월 북위가 장안을 점령하자 북위에도 복속하여, 이후 후구지는 남조와 북조 모두와 관계를 맺는 양면 외교 노선을 취하게 되었다. 429년 양현이 사망하자 아들 양보종(楊保宗)이 뒤를 이었으나, 곧 숙부인 양난당에게 폐위당했다. 양난당은 송나라에 복속 의사를 밝혔다.
432년 후구지에 기근이 발생하고, 같은 시기 송나라에서 사마비룡의 난이 일어나자 양난당은 이를 틈타 양주(梁州, 현재의 쓰촨성 동북부) 북부 지역을 공격하여 한중을 점령했다. 그러나 곧 송나라 소사화의 반격을 받아 434년에 사죄하고 다시 송에 복속했다. 한편, 폐위되었던 양보종은 432년에 양난당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실패하고 사로잡혔으며, 435년 사면되어 동정(董亭, 현재의 간쑤성 톈수이시 부근)에 주둔하게 되었으나 이후 형 양보현(楊保顯)과 함께 북위로 망명했다.
436년 3월, 양난당은 건의(建義)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스스로를 대진왕(大秦王)이라 칭했으며, 아내를 왕후, 세자 양화(楊和)를 태자로 삼아 남북조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적인 국가 체제를 갖추려 했다.[3]
후구지는 한때 영역을 확대하며 세력을 떨쳤으나, 주변 강대국들의 압박 속에서 불안정한 상태를 유지하다가 결국 443년 북위에 의해 멸망하였다.[5][7][3] 이후 양문덕 등이 잠시 세력을 회복하여 무도국 등을 세우기도 했으나, 독립적인 세력으로서의 후구지 시대는 막을 내렸다.
2. 4. 후기 소국
443년 이후, 초치의 군주들은 남북조 시대 강대국들의 통제를 받는 이름뿐인 통치자에 가까웠다.[5][7][3]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포함하여 초치의 역사를 다섯 시기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를 초치오국(仇池五國)이라 부른다. 초치오국은 전 초치(前仇池, 296년~371년), 후 초치(後仇池, 385년~443년), 그리고 후기 소국에 해당하는 무도(武都), 음평(陰平), 무흥(武興)이다.[5][7][3]443년, 북위가 초치를 정복했으나, 같은 해 양문덕이 이를 복원하면서 무도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는 후 초치의 연장선으로 보기도 한다.[3] 이후 477년 양문도가 사망하자 왕국은 음평과 무흥으로 분열되었다.[3] 무흥은 553년까지 존속했으며, 음평은 6세기 중반까지 명맥을 유지했다.[3][5][7]
580년, 마지막 남은 음평의 국왕(陰平國王) 양법침(楊法琛)이 북주의 익주총관 왕겸(王謙)이 수 문제 양견에 대항하여 일으킨 반란에 협력하였다. 그러나 반란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음평은 수나라 군대에 의해 멸망하였고, 양무수의 후예들이 세운 저족의 정권은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5][6][3]
2. 4. 1. 무도(武都)
역사가들은 구지의 5개 왕국(仇池五國)으로 전 초치(前仇池), 후 초치(後仇池), 무도(武都), 음평(음평), 무흥(무흥)을 꼽는다.[5][7][3] 후 초치는 385년부터 443년까지 존속했다.443년, 북위가 초치를 정복했으나, 같은 해 양문덕에 의해 복원되어 무도 시대가 시작되었다.[3] 이는 후 초치의 연장선으로 보기도 한다. 무도는 477년 양문도가 사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무도 시대의 군주는 다음과 같다.
477년 양문도가 사망한 후, 왕국은 음평과 무흥으로 분열되었다.[3]
2. 4. 2. 무흥(武興, 477년~553년)
443년 이후 초치의 군주들은 남북조 시대에 의해 통제되는 꼭두각시 통치자에 불과했다.[5][7][3] 477년 양문두가 사망한 후, 왕국은 음평과 무흥(武興)으로 분열되었다.[3] 무흥 정권은 477년부터 553년까지 존속했다.[3]무흥의 군주 목록은 다음과 같다.
| 군주 | 재위 기간 |
|---|---|
| 양문홍 | 477년 ~ 482년 |
| 양후기 | 482년 ~ 486년 |
| 양집시 | 486년 ~ 503년 |
| 양소선 | 503년 ~ ?년 |
| 양지혜 | ?년 ~ ?년 |
| 양벽사 | ?년 ~ 553년 |
2. 4. 3. 음평(陰平, 477년~6세기 중반)
477년 무도의 양문두가 사망한 후, 왕국은 음평(陰平)과 무흥(武興)으로 분열되었다.[5][7][3] 음평은 6세기 중반까지 존속했다고 전해진다.[5][7][3]580년, 당시 음평국왕(陰平國王) 양법침(楊法琛)은 북주의 익주총관 왕겸(王謙)이 수 문제 양견에 대항하여 일으킨 반란(反楊堅 運動)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이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고, 음평은 수나라 군대에 의해 멸망하였다.[5][6][3] 이로써 양무수의 후예들이 세운 저족의 정권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음평의 역대 군주는 다음과 같다.
| 군주 | 재위 기간 |
|---|---|
| 양광향 | 477년 ~ 481년경 |
| 양경 | 483년 ~ 496년 |
| 양숭조 | 496년 ~ 501년경 |
| 양맹손 | 502년 ~ 511년 |
| 양정 | 511년 ~ ? |
| 양태적 | 516년경 |
| 양법심 | 520년대 ~ 553년경[5][7][3] (기록상 재위 종료 시점. 단, 580년 멸망 당시에도 군주였음[5][6][3]) |
2. 5. 멸망
371년 3월, 전진의 서현후 부아, 양안, 왕통, 서성, 우림좌감 주동, 양무장군 요장 등이 보병과 기병 7만 명을 이끌고 구지를 공격했다. 4월, 당시 구지의 통치자였던 양찬은 5만 명의 병력으로 맞섰다. 동진의 양주자사 양량이 독호 곽보와 토정에게 기병 천여 명을 주어 양찬을 지원하게 했으나, 양찬은 크게 패하여 병력의 30~40%를 잃고 퇴각했다. 양통이 무도의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자, 양찬 역시 스스로 결박하고 항복하여 장안으로 압송되었다.[3] 구지의 백성들은 관중 지방으로 강제 이주되었고, 구지 땅은 황폐해졌다. 양찬은 이후 양안에게 살해당했다. 이 사건으로 전구지(前仇池) 시대는 막을 내렸다.[3]후구지(後仇池) 시대의 양난당은 북위를 공격하려 했으나, 북위는 먼저 망명해 있던 양보종을 이용하여 이를 막았다. 440년, 양난당은 한발과 재해를 이유로 스스로 왕호를 대진왕(大秦王)에서 무도왕(武都王)으로 낮추었다. 441년에는 송의 익주 북부를 공격했으나 격퇴당했다. 결국 442년 윤5월, 양난당은 구지를 포기하고 북위로 망명하면서 후구지는 멸망했다.
먼저 망명했던 양보종은 443년 4월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북위에 의해 살해되었고, 구지는 북위에 의해 완전히 평정되었다.
양무수의 후예들은 이후에도 무도, 무흥, 음평 등의 정권을 세우며 명맥을 이어갔다.[5][7][3] 그러나 580년, 음평의 저족 수장 양영안이 북주의 익주총관 왕겸이 양견(훗날 수 문제)에 대항하여 일으킨 반란에 협력하였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양견이 보낸 군대에 의해 음평 정권은 멸망하였고, 구지의 남은 세력은 흩어져 역사 기록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3. 역대 군주
| 시호 | 이름 | 재위 기간 또는 재직 기간 | 연호 |
|---|---|---|---|
| 전구지 (296년~371년) | |||
| (상세 내용은 전구지 문단 참조) | |||
| 후구지 (385년~477년) | |||
| (상세 내용은 후구지 문단 참조) | |||
| 무두(武都) 왕 (443년~477년) | |||
| 양문덕 楊文德zho | 443년~454년 | ||
| 양원화 楊元和zho | 455년~466년 | ||
| 양승사 楊僧嗣zho | 466년~473년 | ||
| 양문도 楊文度zho | 473년~477년 | ||
| 무흥(武興) 왕 (477년~506년 및 534년~555년) | |||
| 양문홍 楊文弘zho | 477년~482년 | ||
| 양후기 楊後起zho | 482년~486년 | ||
| 안(安) | 양집시 楊集始zho | 482년~503년 | |
| 양소선 楊紹先zho | 503년~506년, 534년~535년 | ||
| 양지혜 楊智慧zho | 535년~545년 | ||
| 양벽사 楊辟邪zho | 545년~553년 | ||
| 참고: 양지혜와 양벽사는 동일 인물일 수 있음 | |||
| 음평(陰平) 왕 (477년~6세기 중반) | |||
| 양광향 楊廣香zho | 477년~483년? | ||
| 양경 楊炯zho | 483년~495년 | ||
| 양숭조 楊崇祖zho | 495년~502년 이전 | ||
| 양맹손 楊孟孫zho | 502년 이전~511년 | ||
| 양정 楊定zho | 511년~? | ||
| 양태적 楊太赤zho | 516년경 | ||
| 양법심 楊法深zho | 520년대~553년경 | ||
3. 1. 전구지(前仇池)
삼국시대에 양주의 마초, 한수, 양추 등은 현재의 간쑤성 일대에 세력을 가졌던 저족(氐族)의 왕 아귀회(阿貴匯)와 협력하여 조조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일부 세력은 촉한에 투항하였고, 투항하지 않은 이들은 조조에 의해 천수(天水) 일대로 강제 이주되었다.위나라 말기 사마소가 정권을 잡았을 무렵, 저족의 양비룡(楊飛龍)은 정서장군(征西將軍)에 임명되어 부족을 이끌고 옛 땅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을 시작했다. 양비룡의 양자가 된 양무수(楊茂搜)는 296년 스스로 보국장군(輔國將軍), 우현왕(右賢王)을 자칭하고 부족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그는 나라를 세운 후 구지공(仇池公)을 칭하며 무도(武都)와 음평(陰平) 두 군을 다스렸다.
317년, 구지에서는 후계자 문제로 형제간의 내분이 일어났다. 양무수의 맏아들 양난적(楊難敵)은 좌현왕(左賢王)으로서 하변(下辨)을 다스렸고, 동생 양견두(楊堅頭)는 우현왕(右賢王)으로서 하지(河池, 현재의 후이 현)를 다스렸는데, 두 형제는 격렬하게 대립했다. 결국 형 양난적이 동생을 꺾고 자리를 계승했지만, 한때 농남(隴南) 지역 대부분을 차지했던 구지의 세력은 점차 약해지기 시작했다. 371년, 전진의 황제 부견이 파견한 양안(楊安)의 군대에 의해 멸망하였다.
| 이름 | 재위 기간 |
|---|---|
| 양무수 楊茂搜중국어 | 296년 ~ 317년 |
| 양난적 楊難敵중국어 | 317년 ~ 334년 |
| 양의 楊毅중국어 | 334년 ~ 337년 |
| 양초 楊初중국어 | 337년 ~ 355년 |
| 양국 楊國중국어 | 355년 ~ 356년 |
| 양준 楊俊중국어 | 356년 ~ 360년 |
| 양세 楊世중국어 | 360년 ~ 370년 |
| 양통 楊統중국어 | 370년 |
| 양찬 楊纂중국어 | 370년 ~ 371년 |
3. 2. 후구지(後仇池)
전진이 멸망하자 부견의 사위였던 양정(楊定중국어)은 부족을 이끌고 농우(隴右) 지역으로 돌아왔다. 385년, 양정은 용양장군(龍驤將軍) 구지공(仇池公)을 자칭하며 자립하여 후구지 정권을 수립했다.양정은 389년에 천수(天水), 약양(略陽), 농성(隴城), 익성(翼城) 등을 점령하고 스스로 농서왕(隴西王)을 칭하며 세력을 크게 넓혔다. 그러나 서진(西秦)의 걸복건귀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전사했다.
양정의 뒤는 사촌형인 양성(楊盛중국어)이 이었다. 후구지는 양성 시대에 일시적으로 영역을 확장하는 등 국세가 융성하기도 했으나, 443년에 북위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 시호 | 이름 | 재위 기간 | 연호 |
|---|---|---|---|
| 무(武) | 양정 楊定중국어 | 385년 ~ 394년 | |
| 혜문(惠文) | 양성 楊盛중국어 | 394년 ~ 425년 | |
| 효소(孝昭) | 양현 楊玄중국어 | 425년 ~ 429년 | |
| 양보종 楊保宗중국어 | 429년 및 443년 | ||
| 양난당 楊難當중국어 | 429년 ~ 441년 | 建義|건의중국어 (436년 ~ 440년) | |
| 양보치 楊保熾중국어 | 442년 ~ 443년 |
참조
[1]
서적
宋書》列傳第五十八
[2]
서적
Scroll of 水經注, Circle of 卷三, part 河水
[3]
웹사이트
The States of Qiuchi 仇池 (www.chinaknowledge.de)
http://chinaknowledg[...]
2019-07-28
[4]
서적
仇池国志
https://www.worldcat[...]
书目文献出版社
1986
[5]
서적
抱朴子, part 內篇, section 仙藥
[6]
서적
漾水, particularly page 7
[7]
서적
Era of 魏晉南北朝, Title 三國志, Part 吳書十, section 董襲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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