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광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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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홍광제는 명나라 만력제의 손자이자 복공왕 주상순의 차남으로, 숭정제의 사촌형이었다. 이자성의 농민군에 의해 부친이 살해된 후 남명 정권을 세웠으나, 정치적 능력 부족으로 유비의 아들 유선에 비유될 정도로 무능한 평가를 받았다. 홍광제는 청나라 군대에 의해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남명 황제로서의 통치는 종말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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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형가는 명나라의 번왕 작위를 세습하고 남경 함락 후 감국을 칭하며 섭정을 선포했으나, 융무제의 견제와 반대에 직면하여 체포된 후 처형되었다. - 남명의 황제 - 주상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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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정제는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로, 내우외환 속에서 명나라 멸망의 책임을 지고 자결했으며, 그의 죽음은 명나라 멸망을 상징하고 청나라의 중국 지배의 계기가 되었다. - 명나라의 친왕 - 주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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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제4대 황제인 강희제는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섭정을 거쳐 친정 후 삼번의 난을 평정하고 타이완을 복속시켰으며 러시아 제국과의 분쟁에서 승리하고 몽골과 티베트를 정벌하는 등 정복 군주로서 활약했고, 감세 정책과 학문 장려를 통해 청나라의 전성기인 강건성세를 이룩했으며 중국 역사상 가장 긴 재위 기간을 가졌다. - 17세기 중국의 군주 - 태창제
만력제의 장남인 태창제는 황태자 책봉 과정의 정쟁과 암살 미수 사건을 겪고 즉위 29일 만에 급서하여,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관련된 미스터리는 명나라 말기 정치적 혼란의 중요한 요소로 평가받는다. 
| 홍광제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 |
| 휘 | 주유숭 (朱由崧) | 
| 자 | 미상 | 
| 묘호 | 안종 (安宗) | 
| 시호 | 처천승도성경영철찬문비무선인도효간황제 (處天承道誠敬英哲纘文備武宣仁度孝簡皇帝) | 
| 추존 시호 | 성안황제 (聖安皇帝) - 융무제가 추존 | 
| 생몰 | 1607년 9월 5일 ~ 1646년 5월 23일 | 
| 출생지 | 순천부, 명나라 | 
| 사망지 | 차이시커우 형장, 순천부, 청나라 | 
| 매장지 | 허난성 멍진현 동산터우촌 | 
| 신분 | |
| 왕조 | 남명 | 
| 아버지 | 주상순 | 
| 어머니 | 요씨 부인 | 
| 배우자 | 효절간황후 효의황후  | 
| 자녀 | 요절한 딸 1명 | 
| 재위 | |
| 남명 황제 | 1644년 6월 19일 ~ 1645년 6월 15일 | 
| 연호 | 홍광 (弘光) - 1645년 1월 28일 ~ 1645년 8월 17일 | 
| 복왕 | 1643년 ~ 1644년 | 
| 덕창왕 | 1617년 ~ 1643년 | 
| 기타 | |
| 전임 | 숭정제 (명나라) | 
| 후임 | 융무제 | 
2. 생애
만력제의 손자이자 복공왕(福恭王) 주상순의 아들인 주유숭은 숭정제의 사촌 형제였다.[1] 1641년 아버지 주상순이 이자성의 농민군에게 살해된 후, 주유숭은 명나라가 멸망하자 명나라 부흥을 선언하고 남쪽으로 가 남명을 세웠다.
1644년 5월 중순, 숭정제의 자결 소식이 난징에 전해지자 큰 충격을 주었다.[1] 황태자의 행방이 알려지지 않아 새 황제 옹립은 이르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남쪽에서 명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결집시키기 위해 황실 인물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했다.[1]
계통상 태창제의 아들 천계제와 숭정제는 후사가 없었고, 숭정제의 세 아들 또한 실종된 상태였다.[1] 따라서 숭정제의 숙부들 중에서 후계자를 선택해야 했다.[1] 복왕 주상순은 만력제의 셋째 아들이었고, 주유숭은 주상순의 맏아들이었으므로 황위 계승 첫 번째 순위가 되었다.[1]
1644년 6월 초, 조정은 복왕 주유송을 중심으로 섭정 정부를 구성하기로 결정했다.[1] 주유송은 마사영의 군사적, 정치적 지원을 받았다.[1] 동림당은 노왕 주상방을 계승자로 선호했으나,[1] 6월 5일 복왕은 난징에 입성했고, 다음 날 "감국"(섭정) 칭호를 받아들였으며,[1] 6월 7일 황궁으로 옮겨 새 직위의 상징을 받았다.[1]
몇몇 조정 대신들의 압력으로 복왕은 즉시 황제가 되는 것을 고려했다. 마사영과 다른 지지자들과의 대립을 두려워한 사가법은 망설이는 조정원들을 설득하여 즉위를 받아들이게 했다. 1644년 6월 19일, 복왕은 마사영의 보호 아래 공식적으로 황제로 즉위했다. 다음 해는 "홍광 원년"으로 정해졌으며, 수도는 난징으로 결정되었다.
홍광제는 명나라 부흥을 선언했지만, 정치적 능력은 노왕이나 계왕보다도 부족했다. 단지 황족 생존자 중 서열이 높고 연령이 많다는 점 때문에 황제로 인정받았을 뿐이었다. 부흥군은 그를 유비의 아들 유선과 비슷하게 취급하며 무시했고, 홍광제는 피난 조정에서조차 당쟁을 일삼는 동림당원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홍광 조정은 "오랑캐와 연합하여 도적을 평정하는 것"(聯虜平寇)을 목표로 선언했는데, 이는 이자성, 장헌충이 이끄는 반란 농민군을 소탕하기 위해 청나라 군대와 협력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홍광 정권은 초창기부터 마사영을 비롯한 전 위충현 지지 세력과 사가법 장군을 포함한 동림당 지지 세력 간의 정치적 갈등에 시달렸다.[1]
1645년, 청나라 군대는 빠르게 진격하여 소주를 점령했다. 같은 해 4월 25일, 양주 또한 청나라 군대에 함락되었다. 양주를 방어하던 사가법 장군은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포로로 잡혔다. 도도 청왕은 그의 목숨을 살려주고 벼슬을 제안했지만, 사가법은 충성을 지키며 제안을 거절하고 처형되었다. 소식이 난징에 전해지자, 홍광제, 마사영과 몇몇 환관들은 공포에 질려 우후 시로 도망쳤다. 5월 15일, 조룡, 왕봉, 전선 등 대신들이 청에 항복했다. 그 결과, 난징과 몇몇 다른 도시들은 싸움 없이 함락되었다.
홍광제는 퉁링에서 양쯔강 남쪽 기슭의 안후이로 도망쳐 황덕공의 군영에 합류했다. 황덕공은 그에게 만약 난징에서 죽을 때까지 싸웠다면 모든 대신들이 청에 대항하는 그의 지휘를 따랐을 것이지만, 아무런 싸움도 없이 도망치고 반역자들의 말을 들었기에 자신의 작은 군대는 황제를 보호할 수 없다고 말했다. 6월 15일, 청나라 한족과 팔기 군인들이 장천로, 과주 수비대 사령관, 도도의 기병, 유량좌 장군과 함께 우후의 황덕공 진영에 나타났다. 황덕공은 홍광제를 넘겨달라는 그들의 요구를 거절했지만 장천로는 화살을 쏘아 황덕공의 목을 관통하여 죽였다. 황덕공 휘하의 여단 사령관인 전웅과 마동은 청에 투항하여 유량좌 장군에게 홍광제를 넘겨주었다.[2] 홍광제는 5월 28일에 체포되었다.
도도 청 우왕은 홍광제의 작전에 대해 비난하며, 남명이 황하를 건너기 전에 청군을 공격했다면 청을 물리쳤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 황제는 자신을 변호하려 했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3] 그는 베이징으로 보내져 청나라 조정에 회부되었고, 1646년 차이시커우에서 처형되었다.
평소에 술을 좋아했는데, 재상 유종주(劉宗周)는 그에게 술을 끊을 것을 권고했으나 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명나라 부흥군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지만 홍광제는 정치적으로 무능했으며 안목이 좁고 식견이 짧았다는 평가가 있다.
그가 명나라의 부흥을 선언하자 조선의 유학자들은 숭정제 이후 청나라의 연호 대신 그의 연호를 따서 사용하기도 했다.
2. 1. 초기 생애
朱由崧|주유숭중국어은 만력제의 손자이자 주상순의 차남이며 숭정제의 사촌 형이었다. 아버지 주상순은 만력제의 서자였으나 만력제는 그를 총애하여 태창제를 제치고 황태자로 세우려 했으나 실패했다. 주상순은 복왕에 책봉되었으나 1641년 이자성의 농민군이 낙양을 공격했을 때 살해되었다. 주유숭은 어머니와 함께 피신하여 목숨을 건졌다.[1]1614년, 주유숭은 아버지와 함께 뤄양의 봉토로 갔고, 이후 "덕창군왕" 칭호를 받았다. 나중에 복왕의 세습 왕자로 지정되었다. 1643년, 아버지의 왕위를 물려받았다. 1644년, 먼 친척인 노왕 주상방(융경제의 손자이자 만력제의 조카)에게 피난처를 구하기 위해 웨이후이로 피신했다. 이후 화이안으로 함께 피신했다.
2. 2. 숭정제의 죽음과 즉위 과정
만력제의 손자이자 복공왕(福恭王) 주상순의 아들인 주유숭은 숭정제의 사촌 형제였다.[1] 1641년 아버지 주상순이 이자성의 농민군에게 살해된 후, 주유숭은 명나라가 멸망하자 명나라 부흥을 선언하고 남쪽으로 가 남명을 세웠다.1644년 5월 중순, 숭정제의 자결 소식이 난징에 전해지자 큰 충격을 주었다.[1] 난징의 고위 관리들은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논의를 시작했다.[1] 황태자의 행방이 알려지지 않아 새 황제 옹립은 이르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남쪽에서 명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결집시키기 위해 황실 인물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했다.[1]
계통상 태창제의 아들 천계제와 숭정제는 후사가 없었고, 숭정제의 세 아들 또한 실종된 상태였다.[1] 따라서 숭정제의 숙부들 중에서 후계자를 선택해야 했다.[1] 복왕 주상순은 만력제의 셋째 아들이었고, 주유숭은 주상순의 맏아들이었으므로 황위 계승 첫 번째 순위가 되었다.[1]
1644년 6월 초, 조정은 복왕 주유송을 중심으로 섭정 정부를 구성하기로 결정했다.[1] 주유송은 마사영의 군사적, 정치적 지원을 받았다.[1] 동림당은 노왕 주상방을 계승자로 선호했으나,[1] 6월 5일 복왕은 난징에 입성했고, 다음 날 "감국"(섭정) 칭호를 받아들였으며,[1] 6월 7일 황궁으로 옮겨 새 직위의 상징을 받았다.[1]
몇몇 조정 대신들의 압력으로 복왕은 즉시 황제가 되는 것을 고려했다. 마사영과 다른 지지자들과의 대립을 두려워한 사가법은 망설이는 조정원들을 설득하여 즉위를 받아들이게 했다. 1644년 6월 19일, 복왕은 마사영의 보호 아래 공식적으로 황제로 즉위했다. 다음 해는 "홍광 원년"으로 정해졌으며, 수도는 난징으로 결정되었다.
2. 3. 통치
홍광제는 명나라가 망하자 명나라의 부흥을 선언하고 남쪽으로 가서 남명을 세웠다. 그러나 정치적인 능력은 부족했는데, 단지 황족 생존자 중 서열이 높고 연령이 많다는 점 때문에 부흥군은 그를 황제로 인정했다. 부흥군은 그를 유비의 아들 유선과 비슷하게 취급하며 무시했다고 한다. 홍광제는 피난 조정에서조차 당쟁을 일삼는 동림당원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홍광 조정은 "오랑캐와 연합하여 도적을 평정하는 것"(聯虜平寇)을 목표로 선언했는데, 이는 이자성, 장헌충이 이끄는 반란 농민군을 소탕하기 위해 청나라 군대와 협력하겠다는 의미였다.
홍광 정권은 초창기부터 마사영을 비롯한 전 위충현 지지 세력과 사가법 장군을 포함한 동림당 지지 세력 간의 정치적 갈등에 시달렸다.[1] 양쯔강 북쪽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파견된 사가법은 마사영의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심지어 전선에 있던 장군들조차 권력을 놓고 서로 공격하고 민간인을 약탈했다.[1]
1645년, 청나라 군대는 빠르게 진격하여 소주를 점령했다. 같은 해 4월 25일, 양주 또한 청나라 군대에 함락되었다. 양주를 방어하던 사가법 장군은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포로로 잡혔다. 도도 청왕은 그의 목숨을 살려주고 벼슬을 제안했지만, 사가법은 충성을 지키며 제안을 거절하고 처형되었다.
소식이 난징에 전해지자, 홍광제, 마사영과 몇몇 환관들은 공포에 질려 우후 시로 도망쳤다. 5월 15일, 조룡, 왕봉, 전선 등 대신들이 청에 항복했다. 그 결과, 난징과 몇몇 다른 도시들은 싸움 없이 함락되었다.
홍광제는 퉁링에서 양쯔강 남쪽 기슭의 안후이로 도망쳐 황덕공의 군영에 합류했다. 황덕공은 그에게 만약 난징에서 죽을 때까지 싸웠다면 모든 대신들이 청에 대항하는 그의 지휘를 따랐을 것이지만, 아무런 싸움도 없이 도망치고 반역자들의 말을 들었기에 자신의 작은 군대는 황제를 보호할 수 없다고 말했다. 황덕공은 "기꺼이 제 목숨을 바쳐 당신을 섬기겠습니다"라고 말했고, 황제는 그를 신뢰할 수 없다고 불쾌하게 말했다. 6월 15일, 청나라 한족과 팔기 군인들이 장천로, 과주 수비대 사령관, 도도의 기병, 유량좌 장군과 함께 우후의 황덕공 진영에 나타났다. 황덕공은 홍광제를 넘겨달라는 그들의 요구를 거절했지만 장천로는 화살을 쏘아 황덕공의 목을 관통하여 죽였다. 황덕공 휘하의 여단 사령관인 전웅과 마동은 청에 투항하여 유량좌 장군에게 홍광제를 넘겨주었다.[2] 홍광제는 5월 28일에 체포되었다.
도도 청 우왕은 홍광제의 작전에 대해 비난하며, 남명이 황하를 건너기 전에 청군을 공격했다면 청을 물리쳤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 황제는 자신을 변호하려 했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3]
2. 4. 몰락과 죽음
1645년, 청나라 군대는 빠르게 진격하여 소주를 점령했다. 같은 해 4월 25일, 양주가 청나라 군대에 함락되었다. 양주를 방어하던 사가법은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포로로 잡혔다. 도도 청왕은 그에게 벼슬을 제안했지만, 사가법은 충성을 지키며 거절하고 처형되었다.[1]소식이 난징에 전해지자, 홍광제, 마사영과 몇몇 환관들은 우후 시로 도망쳤다. 5월 15일, 조룡, 왕봉, 전선 등 대신들이 청에 항복하면서 난징과 다른 도시들은 함락되었다.
홍광제는 퉁링에서 안후이로 도망쳐 황덕공의 군영에 합류했으나, 황덕공은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 6월 15일, 청나라 한족과 팔기 군인들이 황덕공 진영에 나타나 홍광제를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황덕공은 거절했지만, 장천로가 쏜 화살에 맞아 죽었다. 황덕공 휘하의 장수 전웅과 마동은 청에 투항하여 홍광제를 넘겨주었다.[2] 홍광제는 5월 28일에 체포되었다.
도도 청 우왕은 홍광제의 작전을 비난하며, 남명이 황하를 건너기 전에 청군을 공격했다면 청을 물리쳤을 것이라고 말했다. 홍광제는 자신을 변호하려 했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3]
홍광제는 베이징으로 보내져 청나라 조정에 회부되었고, 1646년 차이시커우에서 처형되었다.
3. 사후
1646년 명나라 부흥군은 홍광제에게 성안황제(聖安皇帝)라는 시호와 질종(質宗)이라는 묘호를 추서했다. 최종 시호는 질종독천계도장민경숙소문강무혜도의효혁황제(質宗續天繼道莊愍敬肅昭文康武惠悼懿孝赧皇帝)였다. 영력제는 묘호를 질종에서 안종으로 고치고 시호는 처천승도성경영철찬문비무선인광효간황제(處天承道誠敬英哲纘文備武宣仁度孝簡皇帝)로 고쳐 추서하였다. 명나라 저항 세력은 1662년에 최종적으로 멸망했다.
4. 평가
홍광제는 평소 술을 좋아했으며, 재상 유종주는 그에게 술을 끊을 것을 권고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정치적으로 무능했으며 안목과 식견이 짧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부흥군은 그를 유비의 아들 후주(後主) 유선과 비슷하게 취급하고 무시했다고 한다. 명나라를 멸망으로 몰고 간 동림당은 황제와 훈신들 탓만 하였으나, 홍광제는 피난 조정에서조차 당쟁을 일삼는 동림당원들 역시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5. 가계
홍광제는 만력제의 손자이자 복공왕 주상순의 차남이며, 숭정제의 사촌 형이었다. 아버지 주상순은 1641년 이자성의 농민군에게 살해되었으나, 홍광제(주유숭)는 어머니 추씨와 함께 피신하여 목숨을 건졌다.
홍광제의 후궁과 자녀는 다음과 같다.
- '''황후'''
 - 효철견황후 황씨(孝哲坚皇后 黄氏)
 - 효의황후 이씨(孝义皇后 李氏)
 - '''후궁'''
 - 귀비 진씨(金貴妃)
 - 비 동씨(童妃)
 - 비 왕씨(汪妃)
 - 비 진씨(陳妃)
 - 숙녀 황씨(淑女 黃氏)
 - 숙녀 곽씨(淑女 郭氏)
 - 선시 모씨(選侍 某氏)
 - 궁인 장씨(宮人 張氏)
 - 궁인 왕씨(宮人 王氏)
 - 궁인 서씨(宮人 徐氏, 이름은 숙수(淑秀))
 - 엽자미(葉子眉)
 - '''자녀'''
 - 딸 (이름 불명, 요절)
 
5. 1. 황후
| 봉호 | 시호 | 이름(성씨) | 재위년도 | 생몰년도 | 국구(장인/장모) | 별칭 | 비고 | 
|---|---|---|---|---|---|---|---|
| 복왕비(福王妃) | 효철의장온정인정의천소성간황후 | 황씨(黃氏) | (추존) | ? - ? | 도지휘첨사 황기서(黃奇瑞) | 정비 | |
| 복왕비(福王妃) | 효의단인숙명정결희천이성황후 | 이씨(李氏) | (추존) | ? - 1641년 | 계비 | 
5. 2. 후궁
| 봉호 | 시호 | 이름(성씨) | 생몰년도 | 비고 | 
|---|---|---|---|---|
| 복왕비(福王妃) | 효철간황후(孝哲簡皇后) | 황씨(黃氏) | ? - ? | 정비 | 
| 복왕비(福王妃) | 효의왕후(孝義皇后) | 이씨(李氏) | ? - 1641년 | 계비 | 
| 후궁 | ||||
| 귀비 | 진씨(金貴妃) | ? - ? | ||
| 비 | 동씨(童妃) | ? - ? | ||
| 비 | 왕씨(汪妃) | ? - ? | ||
| 비 | 진씨(陳妃) | ? - ? | ||
| 숙녀 | 황씨(淑女 黃氏) | ? - ? | ||
| 숙녀 | 곽씨(淑女 郭氏) | ? - ? | ||
| 선시 | 모씨(選侍 某氏) | ? - ? | ||
| 궁인 | 장씨(宮人 張氏) | ? - ? | ||
| 궁인 | 왕씨(宮人 王氏) | ? - ? | ||
| 궁인 | 서씨(宮人 徐氏), 이름은 숙수(淑秀) | ? - ? | ||
| 엽자미(葉子眉) | ? - ? | |||
6. 기타
그가 명나라의 부흥을 선언하자 조선의 유학자들은 숭정 이후 청나라의 연호 대신 그의 연호를 따서 사용하기도 했다.
7. 대중 문화
- 1699년 공상인이 완성한 역사극 ''도화선''은 홍광 정권 하의 삶을 그렸다. 이 작품은 다양한 연극으로 각색되었으며, 2001년에는 16부작 타이완 가극 ''"진회연우(秦淮煙雨)"''로 제작되기도 했다.[1]
 - 1981년 KBS1 TV 시리즈 ''대명''에서 배우 이근희가 홍광제를 연기했다.[2]
 - 2023년 루카스 핸슨의 소설 《매니스티 블러드》의 주요 인물로 묘사되었다. 소설 속에서 홍광제는 21세에 뱀파이어로 변모한 푸바라는 이름의 뱀파이어로, 청군에게 붙잡힐 때 죽음을 위장했다. 왕족의 삶을 피해 도망친 그는 황하의 해적이 되었고, 필리핀에서 가톨릭 신부가 되었으며, 그 외에도 선원 등 여러 직업을 거쳤다. 현재는 호주에 거주한다.[3]
 
참조
[1] 
서적
 
明史新編 第十二章 第二節 南明政權的曇花一現
 
[2] 
서적
 
The Great Enterprise: The Manchu Reconstruction of Imperial Order in Seventeenth-century China, Volume 1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5
 
[3] 
서적
 
The Great Enterprise: The Manchu Reconstruction of Imperial Order in Seventeenth-century China, Volume 1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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