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와라노 모토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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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지와라노 모토히라는 1128년 사망한 아버지 후지와라노 기요히라의 뒤를 이어 오슈 후지와라 씨 2대 당주가 되었다. 그는 이복 형제인 후지와라노 고레쓰네와의 가독 상속 분쟁에서 승리하고 무쓰국을 장악했으며, 무쓰노카미 후지와라노 모로쓰나와의 갈등을 겪었다. 모토히라는 중앙 정계와 연계를 강화하고 불교를 진흥하여 모쓰지 사원을 건립했다. 1157년 사망했으며, 그의 유해는 미라 상태로 주손지 곤지키도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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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노 모토히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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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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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헤이안 시대 후기 |
출생 | 조지(長治) 2년(1105년)? |
사망 | 호겐(保元) 2년 음력 3월 19일(1157년 4월 29일)? |
묘소 | 주손지 곤지키도 |
이명 | 모토히라(基平) 주고칸 히라이즈미(中御館平泉) 데와오료시(出羽押領使) |
씨족 | 오슈 후지와라 씨 |
관위 | 데와, 무쓰 압령사 |
가계 | |
아버지 | 후지와라노 기요히라 |
어머니 | 기타카타 헤이시 (여러 설 존재) |
형제 | 고레쓰네 (가레이) 모토히라 마사히라 기요쓰나 남자 남자 딸 (사타케 마사요시의 부인) 딸 딸 |
배우자 | 아베노 무네토의 딸 (계실?) |
자녀 | 남자? 후지와라노 히데히라 쓰가루 히데나가 히즈메 도시히라 도쿠히메 (이와키 노리미치의 부인) |
2. 생애
다이지 3년(1128년)에 아버지 기요히라가 사망한 후, 모토히라는 이복 형제들과 가독 상속을 둘러싼 분쟁을 겪었다. 이듬해 다이지 4년(1129년)에는 이복형 고레쓰네의 '국관(國館)'[19]을 공격하여, 고레쓰네는 배를 타고 탈출하려다 붙잡혀 처형되었다. 이 싸움에서 승리함으로써 모토히라는 오슈 후지와라 씨 2대 당주가 되었다.
고지 원년(1142년), 후지와라노 모로쓰나(藤原師綱)가 무쓰노카미(陸奧守)로 부임해 오면서 모토히라와 갈등이 발생했다. 모로쓰나는 모토히라가 무쓰 국을 장악하여 국사의 권위가 유명무실하다고 판단, 조정에 보고하여 노부오 군(信夫郡)의 공전에 대한 검주(檢注)를 실시하려 했다. 모토히라는 자신의 게닌(家人)인 지토(地頭) 오오쇼지 모토하루(사토 모토하루(佐藤季治))[20]를 시켜 이를 방해했고, 양측은 교전까지 벌였다. 모로쓰나는 모토하루를 처형했고, 모토히라는 모토하루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모로쓰나에게 사금 1만 냥을 바쳤으나 거절당했다.
1143년 모토히라는 모로쓰나의 후임으로 무쓰노카미로 부임해 온 후지와라노 모토나리(藤原基成)와 연계를 맺어, 그 딸을 자신의 적자(嫡子) 히데히라에게 시집보냈다. 당시 인(院)의 근신(近臣)이기도 했던 모토나리와의 연계로 모토히라는 고쿠후(國府)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당시 권력의 중추였던 인과도 연줄을 가지게 되었다.
사다이진(左大臣)·후지와라노 요리나가(藤原賴長)는 셋칸케(攝關家) 소유 장원의 연공(年貢)을 늘릴 것을 요구해 왔으나, 5년의 긴 공방 끝에 모토히라는 닌페이(仁平) 3년(1153년) 요리나가가 요구했던 양보다 대폭 줄인 연공만을 바치는 것으로 타결을 보았다.
모토히라는 규안(久安) 6년(1150년)부터 규주(久壽) 3년(1156년) 사이에 모쓰지(毛越寺)에 광대한 규모의 사원을 지었다. 또한 모토히라의 아내도 관자재왕원(觀自在王院)을 지었다.
덴닌 원년(1108년), 토바 상황의 칙선에 따라 데와국 사가에 장원 지온지에 여러 불당을 짓고 불상을 안치했다는 기록이 있으나,[14] 모토히라의 나이가 너무 어려, 아버지 키요히라가 지온지를 재흥했거나, 혹은 재흥 연도에 오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2. 1. 가독 상속과 형제간의 분쟁
다이지 3년(1128년)에 아버지 기요히라가 사망한 후, 모토히라는 이복 형제들과 가독 상속을 둘러싼 분쟁을 겪었다.[15] 이듬해인 다이지 4년(1129년)에는 이복형인 고레쓰네 등과의 쟁란이 기록되어 있다. 모토히라는 고레쓰네의 "국관"(고쿠가를 뜻하는 것으로 보임)을 공격했고, 고레쓰네는 작은 배에 아이를 포함해 20여 명을 태우고 에치고 국으로 도망쳐 모토히라와 대립하는 다른 동생과 함께 반격하려 했다. 그러나 모토히라는 육로로 군사를 보냈고, 역풍으로 배가 출발 지점으로 돌아오자 고레쓰네 부자를 붙잡아 참수했다.[15] 이 싸움에서 승리함으로써 모토히라는 오슈 후지와라 씨 2대 당주의 자리를 차지했다.당시 고레쓰네는 후계자를 의미하는 "고쇼"라 칭하며 독자적인 저택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 모토히라는 "미소시"라 칭하며 기요히라와 같은 저택에 살았다. 당시 "미소시"는 "그곳에 사는 사람"이나 "식객"이라는 의미였고, 훗날 미나모토노 요시쓰네도 같은 의미로 "미소시"라 불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정당한 가독 상속자는 고레쓰네였고 모토히라는 찬탈자였다고 볼 수 있다. 장자 상속이 절대적이지 않았던 시대였기에 이러한 사태는 흔히 일어날 수 있었다.
이 내란의 배경에는 기요하라 씨의 딸을 어머니로 둔 고레쓰네를 지지하는 가신단과 아베 씨의 딸을 어머니로 둔 모토히라를 지지하는 가신단 간의 다툼이 있었다. 각 가신단은 독립성이 매우 강했기 때문에, 오슈 후지와라 씨의 당주가 된 모토히라는 내란 종결 후 당주의 권력 강화와 확립, 그리고 그것에 의한 가신단의 통제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모토히라를 지지한 것은 사토 모토하루와 그의 아들들인 쓰구노부, 타다노부 형제를 배출한 시노부 사토 씨였다.
동시대 사람인 미나모토노 모로토키(源師時)의 일기 《조슈기(長秋記)》 다이지(大治) 5년(1130년) 6월 8일조에는, 기요히라 사후 형인 「오다테(小館)」고레쓰네 등 형제간의 상쟁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고지 원년(1142년), 후지와라노 모로쓰나(藤原師綱)가 무쓰노카미(陸奧守)로 부임해 왔을 때 무쓰국은 "모토히라가 일국(一國)을 압령(押領)하여 고쿠시(國司)의 위엄은 없는 것과 다름없는"(《고지단(古事談)》) 모습이었다. 모로쓰나는 조정에 일의 내막을 알려 선지(宣旨)를 받아 노부오 군(信夫郡)의 공전(公田)에 대한 검주(檢注)를 행하고자 했다. 모토히라는 자신의 게닌(家人)인 지토(地頭) 사토 모토하루(佐藤季治)[20]를 시켜 이를 방해했고, 양측이 교전까지 벌이자 격노한 모로쓰나는 모토히라를 규탄한다. 모토하루는 모로쓰나 앞에 출두해 재판 끝에 처형되었는데, 모토히라는 모로쓰나에게 사금(砂金) 1만 냥을 바쳐가며 모토하루의 목숨을 구걸했지만 거부당했다.
모토히라는 이듬해인 고지 2년(1143년)에 모로쓰나의 후임으로 무쓰노카미로 부임해 온 후지와라노 모토나리(藤原基成)와 연계를 맺어, 그 딸을 자신의 적자(嫡子) 히데히라에게 시집보냈다. 당시 인(院)의 근신(近臣)이기도 했던 모토나리와의 연계로 모토히라는 고쿠후(國府)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당시 권력의 중추였던 인과도 연줄을 가지게 되었다.
2. 2. 무쓰노카미 후지와라노 모로쓰나와의 갈등
다이지 3년(1128년)에 아버지 후지와라노 기요히라가 사망한 후, 모토히라는 형제간의 권력 다툼에서 승리하여 오슈 후지와라 씨의 2대 당주가 되었다. 《조슈기》에 따르면, 모토히라는 형인 '오다테' 후지와라노 고레쓰네의 '국관(國館)'[19]을 공격했고, 고레쓰네는 배를 타고 탈출하려다 붙잡혀 처형되었다.고지 원년(1142년), 후지와라노 모로쓰나가 무쓰노카미로 부임해 오면서 모토히라와 갈등이 발생했다. 모로쓰나는 모토히라가 무쓰 국을 장악하여 국사의 권위가 유명무실하다고 판단, 조정에 보고하여 시노부 군의 공전에 대한 검주(檢注)를 실시하려 했다. 모토히라는 자신의 게닌(家人)인 지토 오오쇼지 모토하루(사토 모토하루)[20]를 시켜 이를 방해했고, 양측은 교전까지 벌였다. 모로쓰나는 모토하루를 처형했고, 모토히라는 모토하루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모로쓰나에게 사금 1만 냥을 바쳤으나 거절당했다.
2. 3. 중앙 정계와의 관계
다이지(大治) 5년(1130년) 미나모토노 모로토키(源師時)의 일기 《조슈기(長秋記)》에 따르면, 1128년에 기요히라가 죽은 뒤, 형인 「오다테(小館)」후지와라노 고레쓰네(藤原惟常) 등 형제간의 상쟁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모토히라는 고레쓰네의 '국관(國館)'[19]을 쳤고, 고레쓰네는 작은 배를 타고 에치고국(越後國)으로 탈출, 모토히라와 대립하는 다른 동생과 함께 반격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자식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이 싸움에서 승리함으로써 모토히라는 오슈 후지와라 씨 2대 당주가 되었다. 기요히라의 '전처'는 기요히라 사후 교토로 와서 게비이시(檢非違使) 미나모토노 요시나리(源義成)와 재혼하여 기요히라의 두 아들이 벌인 싸움에 대해 떠들고 다녔지만, 교토 사람들은 귀담아 듣지 않았다고 한다. 이 여성은 모토히라와 반목하다 히라이즈미(平泉)에서 쫓겨온 것으로 여겨진다.고지(康治) 원년(1142년), 후지와라노 모로쓰나(藤原師綱)가 무쓰노카미(陸奧守)로 부임해 왔을 때 무쓰국은 "모토히라가 일국(一國)을 압령(押領)하여 고쿠시(國司)의 위엄은 없는 것과 다름없는"(《고지단(古事談)》) 모습이었다. 모로쓰나는 노부오 군(信夫郡)의 공전(公田)에 대한 검주(檢注)를 행하고자 했으나, 모토히라는 자신의 게닌(家人)인 지토(地頭) 오오쇼지(大庄司) 모토하루(季治, 사토 모토하루(佐藤季治))[20]를 시켜 이를 방해했다. 양측이 교전까지 벌이자 격노한 모로쓰나는 모토하루를 처형했는데, 이때 모토히라는 모로쓰나에게 사금(砂金) 1만 냥을 바쳐가며 모토하루의 목숨을 구걸했지만 거부당했다.
1143년 모토히라는 모로쓰나의 후임으로 무쓰노카미로 부임해 온 후지와라노 모토나리(藤原基成)와 연계를 맺어, 그 딸을 자신의 적자(嫡子) 히데히라(秀衡)에게 시집보냈다. 당시 인(院)의 근신(近臣)이기도 했던 모토나리와의 연계로 모토히라는 고쿠후(國府)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당시 권력의 중추였던 인과도 연줄을 가지게 되었다.
사다이진(左大臣)·후지와라노 요리나가(藤原賴長)는 셋칸케(攝關家) 소유의 장원(莊園) 12곳 가운데 자신이 상속받은 데와(出羽)의 유사 장(遊佐莊), 야시로 장(屋代莊), 오오소네 장(大曾根莊)과 무쓰(陸奧)의 모토키치 장(本吉莊), 다카쿠라 장(高鞍莊)에서 해마다 바치는 연공(年貢)을 늘릴 것을 요구해 왔다. 5년의 긴 공방 끝에 모토히라는 닌페이(仁平) 3년(1153년) 요리나가가 요구했던 양보다 대폭 줄인 연공만을 바치는 것으로 타결을 보았고, 요리나가는 이를 분개했다고 한다. 이 일화에서 무쓰와 데와, 두 구니에 존재한 셋칸케 장원은 오슈 후지와라 씨가 장관(莊官)으로서 관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4. 불교 진흥
모토히라는 규안(久安) 6년(1150년)부터 규주(久壽) 3년(1156년) 사이에 모쓰지(毛越寺)에 광대한 규모의 사원을 지었다. 또한 모토히라의 아내도 관자재왕원(觀自在王院)을 지었다.[17]모쓰지를 건립할 때의 호화로운 증여는 도읍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그 모습은 『아즈마카가미』에서 "영장의 장엄함은 우리나라에 비할 데 없다"라고 칭찬했다.[17] 금당 엔류지(円隆寺)와 광대한 정토 정원을 중심으로 가람이 잇달아 건립되었다.
모쓰지 본존 조립과 관련하여 당시 오슈 후지와라 씨의 재력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당시 모쓰지의 본존은 기요히라의 의뢰로 도읍의 불사(佛師) 운케이(雲慶)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그 사례로 100냥이나 되는 금을 비롯해 비단과 오슈산 말, 에조가시마(홋카이도)산 바다사자 가죽 등 대량의 물품을 기요히라가 보냈다. 한 번은 별도로 생미견(生美絹, 스즈시노키누)을 배 세 척에 실어 보냈는데, 운케이는 매우 기뻐하며 "생견이라면 더욱 좋았을 텐데"라고 농담조로 말하자, 그 이야기를 들은 기요히라는 매우 후회하여, 새로 연견(練絹)을 배 세 척에 실어 보냈다고 한다.
덴닌 원년(1108년), 토바 상황의 칙선에 따라 데와국 사가에 장원 지온지에 아미타당(상행당)·석가당(일체경당)·장륙당을 신조하고, 토바 인(院)으로부터 하사받은 아미타 삼존을 아미타당에, 석가 삼존과 하사받은 일체경 5천여 권을 석가당에, 모토히라가 봉납한 장륙척의 석가상을 장륙당에 안치했다고 한다.[14] 그러나 이 일화에서는 모토히라의 나이가 너무 어려, 아버지 키요히라가 지온지를 재흥했거나, 혹은 재흥 연도에 오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3. 사망
호겐 2년(1157년) 3월 19일경에 사망했으며, 『아즈마카가미』에서는 그의 죽음에 대해 "요망(夭亡)[18]"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가독은 적남인 히데히라가 계승했지만, 그 당시에는 모토히라가 가독을 계승했을 때와 같은 내란은 기록되지 않았다.
4. 곤지키도(金色堂)와 유해
모토히라의 유해는 미라가 되어 아버지 기요히라, 아들 히데히라와 함께 주손지(中尊寺)의 곤지키도(金色堂)에 안치되었다.[1] 1950년에 학술조사가 이루어졌는데, 1994년 7월에 주손지에서 펴낸 『주손지 시신 학술조사 최종 보고(中尊寺御遺体学術調査 最終報告)』에 따르면, 모토히라의 신장은 164cm로 잘 발달된 어깨에 비만 체질로 배가 튀어나와 있었다고 여겨진다.[1] 콧날이 오똑한 코에 얼굴은 턱이 길고 큰 편이었으며, 목은 굵고 짧았다.[1] 심각한 치주질환에 충치가 확인되었는데 이는 기름진 음식을 섭취한 결과로 보인다.[1] 엑스레이 검사 결과 모토히라의 사인은 골수염성 척수염(骨髄炎性脊椎炎) 내지는 척추 질환으로 추정되었다.[1] 혈액형은 AB형이었다.[1] 사망 당시의 나이는 60세에서 70세 정도이거나 70세 전후이고, 오른쪽 손목에 염주를 착용한 흔적이 발견되었다.[1] 주요 부장품으로는 목제 지팡이와 나무, 유리로 만든 염주, 금을 입힌 수정노옥(水晶露玉)과 옻칠한 타치(太刀) 파편, 나(羅), 백릉(白綾), 금(錦) 등의 옷감, 금동방울 등, 당시 교토(京都)의 것에 뒤지지 않는 당대 최고의 공예품들이었다.[1]
5. 관련 작품
- 이마히가시 코토 『푸른 에조의 피』 (신진물왕래사/도쿠마 문고)
- 곤 도코(今東光) 『푸른 에미시의 피(蒼き蝦夷の血)』(신인물왕래사新人物往來社/덕문문고德間文庫)
참조
[1]
웹사이트
Oshu-Fujiwara Clan
http://www.town.hira[...]
Hiraizumi Cultural Heritage
2018-01-20
[2]
웹사이트
Monuments hint at glory of Hiraizumi's golden age
https://www.japantim[...]
The Japan Times
2018-01-20
[3]
서적
Japan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4]
문서
[5]
문서
[6]
문서
「紺紙金銀字交書一切経 大品経 巻二十二」の奥書
[7]
문서
『史料総覧』3編903冊362頁。「平泉志」「続平泉雑記」
[8]
논문
藤原基衡と秀衡の妻たち
[9]
문서
[10]
문서
[11]
문서
[12]
문서
[13]
문서
[14]
문서
『寒河江市史 上巻』『寒河江市史 慈恩寺中世資料(解読版)』、「瑞宝山慈恩寺伽藍記」
[15]
간행물
『長秋記』
1130-06-08
[16]
문서
『寒河江市史 上巻』 p.256
[17]
문서
[18]
문서
[19]
문서
[20]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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