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즈마카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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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즈마카가미는 무로마치 시대부터 사용된 명칭으로, 일본 간토 지방을 가리키는 '아즈마'와 역사를 비추어 교훈을 얻는다는 의미의 '거울'을 합쳐 가마쿠라 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1290년에서 1304년 사이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며, 가마쿠라 막부의 정치, 사회, 문화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사료로 평가받는다. 편찬자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가마쿠라 막부 실무 관료 가문 출신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호조 씨를 현창하고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왜곡된 서술이 존재하지만, 다양한 판본과 연구를 통해 사료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한국과의 관계에서는 조선 시대 학자들이 이 책을 통해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려 했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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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즈마카가미 | |
---|---|
개요 | |
유형 | 역사서 |
언어 | 한문 |
시대 | 가마쿠라 시대 |
편찬 시기 | 13세기 말 |
분량 | 전52권 |
다른 이름 | 호조본(北条本) |
내용 | |
주요 내용 |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거병한 1180년부터 미나모토 사네토모가 암살당한 1219년까지의 가마쿠라 막부의 역사를 기록 |
특징 | 가마쿠라 막부의 공식 기록으로 간주됨 당시의 정치, 사회, 문화상을 생생하게 반영 무사 사회의 규범과 의식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사료 |
구성 | 본문: 52권 목록: 1권 총 53권 |
평가 | |
사료적 가치 | 가마쿠라 막부 연구의 필수 자료 당시의 정치적 상황, 사회상, 문화 등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역할 고케닌을 비롯한 무사들의 동향 파악에 유용 |
문학적 가치 | 간결하고 명료한 문체 당시의 생생한 묘사 무사들의 삶과 가치관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 |
기타 | |
참고 문헌 | 국립국어원: https://www.korean.go.kr/ 國學院大學博物館: https://museum.kokugakuin.ac.jp/ |
2. 명칭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부터 《아즈마카가미》(吾妻鏡, 오처경)라는 명칭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에도 시대 초기에는 《동감》(東鑑, 동감)이라는 명칭도 사용되었다.
《아즈마카가미》는 지쇼 4년(1180년)부터 분에이 3년(1266년)까지 87년간의 역사를 다룬다. 모치히토 왕이 겐지들에게 헤이시 타도를 명하는 령지(令旨)가 이즈 국의 호조 저택에 있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6대 쇼군 무네타카 친왕이 교토에 도착해 쇼군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끝맺는다.[68] 주요 내용은 겐페이 전쟁, 가마쿠라 막부 성립, 조큐의 난, 싯켄 정치 시작, 호지 합전, 호조 도쿠소 가문 지배 확립 등이다. 쇼군 중심의 연대기 형식으로, 화풍한문(和風漢文)으로 기록되었다.[68]
'아즈마(あずま)'는 일본에서 간토 지방을 가리키는 말이다. 《고사기》 및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야마토타케루(日本武尊)가 동쪽 정벌에서 아내 오토타치바나 히메(弟橘媛)를 기리며 "내 아내여"(あづまはや, 吾が妻よ)라고 외친 데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다.
《아즈마카가미》의 한자 제목인 '''吾妻鏡'''은 '''東鑑'''으로 쓰기도 한다. 과거의 역사를 현재와 미래 세대를 위한 거울(鏡)에 비유하는 것은 중국 고대 이래 동아시아에 널리 퍼진 역사관이다. 한국 고려 시대에는 금'''경'''록(金'''鏡'''錄)이라는 역사책이 존재했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당시 일본에 포로로 끌려간 조선의 선비 강항(姜沆)은 《아즈마카가미》라는 이름을 "나의 잘잘못이 곧 나의 아내에게 나타나므로 나의 아내를 보면 나의 잘잘못을 알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했다.[67]
3. 내용
편찬 과정에서 광범위한 문서가 참고되었는데, 주로 막부의 기록, 문필 관료의 필록 및 일기, 호조 집안 및 고케닌 집안의 전승, 소송 관련 서류, 사찰 기록, 그리고 문신들의 기록 등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참조 문헌들의 시대적 불일치와 편찬자의 주관으로 인해, 가마쿠라 시대 후기의 인식이 반영되거나 곡필(曲筆) 및 가필(加筆)된 부분도 있다. 특히 겐지 3대 쇼군(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요리이에, 사네토모)에 대한 기술은 《구칸쇼》나 《교쿠요》 등 동시대 자료와 비교하여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68]
《아즈마카가미》의 여러 사본 중 가장 유명한 「호조본」은 전 52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겐지 3대 관련 내용이 24권, 그중 요리토모 관련 내용이 15권을 차지한다. 그러나 45권이 빠져 있고, 그 외에도 12년 분량의 내용이 유실되어 있다. 일부 내용은 「깃카와본」이나 「시마즈본」 등 다른 사본에 남아 있다. 난보쿠초 시대에 가나자와 문고에서 「호조본」 목록이 확인되었을 때 이미 일부 내용이 유실되기 시작했으며, 무로마치 시대에는 완전한 형태로 전해지지 못하고 단편적인 발췌본이나 일부 내용이 빠진 채로 전해졌다.
에도 시대에는 하야시 라잔 등이 《아즈마카가미》를 연구했다. 라잔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위해 《동경강요(東鏡綱要)》를 작성했고, 구로다 번 가신에게는 《아즈마카가미고(東鑑考)》를 써 주었다. 유학자와 국학자들은 유직고실(有職故実)이나 무가고실(武家故実) 측면에서 《아즈마카가미》를 연구했다. 도쿠가와 미쓰쿠니가 편찬한 《대일본사》에도 《아즈마카가미》가 채택되었지만, 참조 방식이 정확하지는 않았다. 에도 시대 후기, 곤도 모리시게는 《아즈마카가미》의 여러 사본을 비교 연구하여 중요한 사료로 남겼다.
근대에는 호시노 히사시가 《아즈마카가미》 연구의 출발점을 마련했고, 하라 가츠로는 역사 연구에서 사료 비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와다 히데마츠와 야시로 쿠니하루는 《아즈마카가미》가 동시대 기록이 아니라 후대에 편찬된 것이며, 오류와 곡필이 많음을 밝혔다. 전후에는 가사마츠 히로시, 마스다 소 등이 야시로의 2단계 편찬설에 반론을 제기했고, 고미 후미히코는 《아즈마카가미》의 기반이 된 일기 및 필록을 추정하는 연구를 진행했다.
편찬자는 겐지 3대에 대해서는 냉정한 반면, 호조 도쿠소 가문의 활약은 강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특히 호조 야스토키 관련 기록에서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진다.[68]
3. 1. 주요 사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거병 직후 이시바시 산 전투에서 패배하여 배를 타고 아와로 건너간 지쇼 4년(1180년) 8월 29일부터, 같은 해 10월 6일 가마쿠라에 입성할 때까지, 요리토모의 측근인 후지와라 구니미치와 호조 부자는 동행하지 않았다. 이때 대무사단을 이끌고 달려와 요리토모를 도운 두 명의 유력한 고케닌(고케닌, 御家人, 막부와 주종 관계를 맺은 무사)은 가즈사노스케 히로쓰네와 지바 쓰네타네였다.[20]
가즈사노스케 히로쓰네는 나중에 요리토모의 명령으로 살해되었는데, 그 이유와 사건의 전말은 《아즈마카가미》에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다.[20] 다만, 히로쓰네는 훗날 살해될 것을 예감하게 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예를 들어 지쇼 4년(1180년) 9월 19일, 히로쓰네가 처음 요리토모를 만났을 때, 히로쓰네는 속으로 요리토모를 칠 생각을 품고 있었지만, 요리토모의 의연한 태도에 마음을 바꾸었다는 내용이 《쇼몬키》의 고사를 인용하여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히로쓰네가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이 후세의 편찬자에게까지 전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이때 히로쓰네가 이끌고 온 군세는 《아즈마카가미》에는 2만 기(騎)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엔큐본 헤이케 이야기》에는 1만 기, 《겐페이 투쟁록》에는 1천 기라고 기록되어 있어 《아즈마카가미》의 기록이 가장 과장되어 있다.
반면, 지바 쓰네타네에 대한 기록은 매우 긍정적이다. 지쇼 4년(1180년) 9월 9일, 쓰네타네는 "겐지 가문의 재건에 감격하여 눈물이 앞을 가려 말로 표현할 수 없다"라며 감격하여 눈물을 흘린다. 요리토모가 가마쿠라를 선택한 이유에 대한 이야기에도 반드시 이때 지바 쓰네타네의 헌책(獻策, 정책이나 의견을 임금에게 아룀)이 인용된다. 그러나 소마노 미쿠리야에 대한 고문서에 따르면, 지바 쓰네타네에게 요리토모의 아버지 미나모토노 요시토모는 "은혜"를 느낄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지바 쓰네타네와 가즈사노스케 히로쓰네가 요리토모에게 가담한 것은, 《아즈마카가미》의 묘사처럼 대대로 겐지의 로토(郎党, 가신)였기 때문이 아니라, 헤이케의 가신 후지와라 다다키요나 헤이케와 결탁한 시모사 후지와라 씨, 히타치의 사타케 씨의 압박에 대항하여 요리토모를 내세워 빼앗긴 영지를 되찾기 위한 도박이었다고 해석된다. 이는 간토에서 요리토모에게 가담한 다른 유력 영주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겐큐 3년(1192년) 8월 5일, 세이이타이쇼군이 된 요리토모가 정소(政所, 정치 기관)를 시작하면서, 그동안 요리토모가 내린 안도장(安堵状, 영지 소유를 보증하는 문서)을 회수하고 정소에서 발급하는 게몬(下文, 명령을 전달하는 문서)을 새로 주려고 하자, 지바 쓰네타네는 "매우 확집"(確執, 굳게 고집함)하여 자신의 문서에는 요리토모의 화압(花押, 수결)이 찍힌 게몬을 달라고 주장하여 특별히 받았다. 《아즈마카가미》에는 지바 쓰네타네를 현창(顯彰, 훌륭한 행실을 널리 알림)하는 게몬의 문면이 실려 있다. 고야마 도모마사 또한 요리토모의 화압이 찍힌 게몬을 받았지만, 그 실물은 매우 간결한 안도장인 반면, 《아즈마카가미》에 실린 지바 쓰네타네의 것은 게몬으로서는 이질적인 문언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이 기간의 역사를 상세히 전하는 지바 씨 가문이 조상을 현창하기 위해 자료를 제출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요리토모 거병기"와 같은 형태의 원형이 완성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지바 씨 외에 이 기간 요리토모와 동행한 미우라 일족 중, 호지 합전에서 호조 측에 붙어 살아남은 사와라 미우라 씨의 시조 사와라 요시쓰라를 현창하는 기사도 보인다.
오에노 히로모토와 관련하여 주목받는 것은 분지 원년(1185년) 11월 12일, 히로모토가 「슈고지토」 설치를 건의했다는 부분이다. 과거에는 이것이 '슈고 지토'의 시작으로 여겨졌다. 같은 해 11월 28일, 호조 도키마사가 조정에 '슈고 지토' 설치를 요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구조 가네자네의 일기 《교쿠요》에는 '슈고 지토'라는 표현이 없고, "호조마루 이하의 낭종들이 오기, 산인, 산요, 난카이, 사이카이 제국을 나누어 받고, 장공(荘公, 장원과 공령)을 논하지 않고 병량(兵粮, 군량미)을 징수하되, 모든 토지를 지행(知行, 다스림)해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960년 이시모다 쇼는 「가마쿠라 막부 일국 지토직의 성립」에서 이 문제를 분석하여, '제국 평균에 슈고 지토를 보임한다'는 것은 가마쿠라 시대 후기 다른 사료에도 보이는 점으로 미루어 막부의 독자적인 기록이 아니라 가마쿠라 시대 후기의 통설에 근거한 작문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 분석을 발단으로 슈고·지토의 발생과 위치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고, 이 '슈고 지토' 설치 시기는 '국지토제'로서 슈고제의 전 단계로 해석되게 되었다.
4. 편찬 시기 및 배경
1889년 호시노 히사시(星野恒)가 《사학잡지》 창간호에 '아즈마카가미 고(考)'를 발표하면서 《아즈마카가미》에 대한 근대적 연구가 시작되었다. 호시노는 《헤이케 이야기》 등을 바탕으로 한 역사관을 비판하며, 《아즈마카가미》를 《교쿠요》, 《메이게쓰기》와 같은 수준의 사료로 평가했다.
1898년, 하라 가쓰로(原勝郞)는 '아즈마카가미의 성질 및 그 사료로서의 가치'를 발표하여 사료 비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아즈마카가미》를 무비판적으로 신뢰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다이쇼 시대에 와다 히데마쓰(和田英松)와 야시로 구니지(八代國治)는 깃카와본 등 여러 사본을 소개하며, 《아즈마카가미》가 가마쿠라 막부의 만도코로(政所)나 몬츄쇼(問注所)의 기록뿐 아니라 교토 문신들의 일기까지 참조하여 후대에 편찬되었으며, 많은 오류와 곡필이 포함되어 있음을 밝혔다. 야시로는 1913년 '아즈마카가미의 연구'를 저술하여 이후 연구의 기반을 마련했다.
1960년대 이후 가사마쓰 히로시(笠松宏至), 마스다 소오(益田宗) 등이 야시로의 설에 반론을 제기했다. 마스다와 히라타 도시하루(平田俊春)는 《아즈마카가미》에서 《메이게쓰기》가 이용된 방법과 《교쿠요》와의 관계를 검증했다. 1980년대 이후 고미 후미히코(五味文彦)는 이러한 지적들을 바탕으로 《아즈마카가미》의 원자료 추적 연구를 진행했다.
와다 히데마쓰는 1912년 「아즈마카가미 고사본고」에서 《아즈마카가미》 편찬 의도를 다음과 같이 추정했다.
- 막부의 기록을 통일하고 선례 조사의 기관에 대비
- 막부 개창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 역대 쇼군의 실기를 편찬할 필요성
가마쿠라 시대 후기, '집안(家)'이라는 개념이 형성되고 가업, 가직이 고정화되면서, 자신의 가계를 확인하고 정통성을 주장할 필요성이 커졌다. 마스다 소오는 1977년 「아즈마카가미, 의 전래에 대해」에서 3대 쇼군이 가마쿠라에서 쫓겨나는 장면을 선례의 구체적인 사례로 들었다. 고미 후미히코는 혼란스러운 시대에 과거를 돌아볼 필요성과 함께, 자신의 가계를 확인하고 정통성을 주장할 필요성 때문에 《아즈마카가미》 편찬이 필요했다고 주장한다.[89]
《아즈마카가미》 편찬 시기, 가마쿠라 막부의 정책은 요리아이슈(寄合衆)가 결정했다. 에이닌(永仁) 3년(1295년) 오오타 도키쓰라(太田時連)의 기록 《에이닌산넨기(永仁三年記)》, 오초(應長) 원년(1309년) 가나자와 문고의 고문서, 겐겐(乾元) 원년(1302년) 히키쓰케토인(引付頭人)[90] 구성 등을 통해 요리아이슈 구성을 알 수 있다. 호조 모로토키(北條師時), 호조 도키무라(北條時村), 오사라기 무네토키(大佛宣時) 등 호조 일문과 나가이 무네히데(長井宗秀), 니카이도 유키후지(二階堂行藤) 등 실무 관료 가문의 선조들이 《아즈마카가미》에 긍정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편찬 연대로 추정되는 1300년경은 도쿠소(得宗) 전제 정치가 이루어지던 시대였다. 무라이 쇼스케(村井章介)는 이 시기 가마쿠라 막부가 나아갈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고 설명한다.[91]
- 고안(弘安) 7년(1284년) 호조 도키무네(北條時宗) 사후, 요리아이가 도쿠소케 권력을 대행했으나, 시모쓰키 소동(霜月騒動), 헤이젠몬의 난(平禅門の乱) 등 권력 투쟁 발생.
- 에이닌 5년(1297년) '에이닌의 덕정령' 반포. 고케닌(御家人) 체제 유지가 목적이었으나, 분할 상속과 화폐 경제 발달로 고케닌은 영세화.[92]
- 가겐(嘉元) 3년(1305년) 가겐의 난(嘉元の乱) 발생. 요리아이슈 내부 대립 심화.
고미 후미히코는 1304년 7월 이전에 《아즈마카가미》 편찬이 중단된 이유를 현실의 급격한 변화 때문으로 추정했다.[93]
5. 편찬자
정확한 편찬자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오에 씨, 미요시 씨, 니카이도 씨 등 막부의 실무 관료 가문 출신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야시로 구니하루는 만도코로(政所)와 몬추조(問注所)의 집사를 지낸 미요시 야스노부의 자손(오타, 마치노), 오에노 히로모토의 자손(모리, 나가이), 니카이도 유키마사의 자손들이 편찬했을 것이라 추정했다.[86]
미요시 야스노부의 경우 겐랴쿠 원년(1211년) 11월 4일 조항이 메이게쓰키의 기록을 축약한 것이고, 겐큐 2년(1205년) 윤 7월 29일 조항에 "요시노부 봉행(奉行)한다"라고 적혀 있는 점, 미나모토노 사네토모가 고노 미치노부에게 내린 어교서(御教書) 기사가 에이닌의 덕정령과 관련된 위조 문서를 바탕으로 작성되었다는 점을 들어, 미요시 씨의 자손이 편찬자 중 한 명일 가능성이 확실시되고 있다.[86]
오에노 히로모토의 필록으로 생각되는 조겐 3년(1209년) 10월 15일 조와 겐포 2년(1214년) 5월 7일 조, 니카이도 유키마사의 경우 분지 2년(1186년) 10월 3일 조 등이 꼽힌다. 호조 야스토키가 오에노 히로모토 시대의 기록을 히로모토의 손자 나가이 야스히데에게 보냈다는 기사가 있어, 나가이 씨에게 전해진 기록이 아즈마카가미 편찬에 이용되었을 것이라는 점은 다이쇼 시대부터 지적되고 있다.[87]
니카이도 유키마사의 자손에 대해서는, 아들 니카이도 유키미쓰의 현창 기사인 겐큐 원년(1204년) 9월 15일 조가 있으며, 금괴화가집에서 채록한 것으로 보이는 겐포 원년(1213년) 12월 19일 조와 20일 조가 있다. 니카이도 집안에서 아즈마카가미 기사의 원사료로 여겨지는 필록의 저자가 다수 나타나는 것을 감안할 때 니카이도 집안의 의사가 편찬에 관여한 정도는 농후한 것으로 여겨진다.[88]
고미 후미히코는 니카이도 유키마사, 니카이도 유키미쓰, 니카이도 유키무라, 고토 모토쓰나, 나카하라 모로카즈, 니카이도 유키카타, 나카하라 모로쓰라를 기반이 되는 필록의 저자로 추측했다. 또한 의도적인 현창과 출산 기사를 통해 편찬자를 추정했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하여, 오타 도키쓰라, 니카이도 유키마사, 나가이 무네히데 등이 편찬자로 거론된다.
- '''오타 도키쓰라(太田時連)''': 미요시 야스노부의 자손이자 에이닌 원년(1293년)부터 겐코 원년(1321년)까지 몬추쇼 집사를 지냈으며, 요리아이슈(寄合衆)였을 가능성도 있다.
- '''니카이도 유키마사''': 쇼오 3년(1290년)에 만도코로 집사로 취임했으나, 3년 뒤 헤이젠몬의 난 직후 파면되었다가 겐겐 원년(1302년)에 복귀했다.
- '''나가이 무네히데(長井宗秀)''': 에이닌 3년(1295년) 무렵부터 요리아이슈로 활동했다.
이들 세 명이 막부의 주요 기록에 나란히 등장하는 것은 니카이도 유키마사가 만도코로 집사로 복직한 1302년이다.
6. 사료적 가치 및 한계
《아즈마카가미》는 가마쿠라 막부의 역사, 정치, 제도, 사회,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지만, 편찬자의 주관과 정치적 의도가 반영되어 있어 비판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특히 호조씨를 정당화하고 현창하기 위한 내용이 많아 주의해야 한다.[30][31]
《아즈마카가미》 편찬에는 막부 사무관료의 일기 및 필록, 고케닌, 지샤 등에서 제출된 문서, 막부 중추기관에 보관된 공문서, 교토 측 기록 등 다양한 원사료가 활용되었다.[84] 겐페이 전쟁 시대(1180년~1184년경)에는 고케닌 가문에 전해지는 문서나 '요리토모 거병기'와 같은 이야기가 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요리토모 사후에는 니카이도 유키마사의 아들 니카이도 유키미쓰의 필록을 토대로, 미요시 야스노부나 와다 전투의 군부교를 맡았던 니카이도 유키무라의 기록이 보충된 것으로 보인다. 요리이에·사네토모 쇼군 시대의 기록은 호조씨의 행동을 정당화하거나 현창하기 위한 곡필이 많으며, 《메이게쓰키》가 인용되기도 했다. 구조 요리쓰네 시대부터는 조큐의 난에서 군부교를 맡았던 고토 모토쓰나의 필록이 중심이 되었고, 요리쓰구 쇼군 시대에는 고쇼부교의 필록을 중심으로, 고초 3년(1263년) 7월 5일까지는 니카이도 유키카타, 그 이후는 나카하라 모로쓰라의 기록이 중심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쇼·주에이의 난에 대한 《아즈마카가미》의 기록은 가마쿠라 측이 직접 관여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에서 정보의 정확도에 차이를 보인다. 특히 미나모토노 요시나카의 호쿠리쿠 지방 동향은 후대의 교토 측 자료를 통해 보충한 것으로 보인다. 가즈사노스케 히로쓰네와 지바 쓰네타네에 대한 기술은 대조적인데, 히로쓰네는 요리토모에게 살해당할 것을 암시하는 듯한 인물로 묘사된 반면, 쓰네타네는 요리토모에게 충성스러운 인물로 그려진다. 이는 지바 씨 가문이 선조 쓰네타네를 찬양하는 내용의 전승을 자료로 제출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현대 일본 역사학계에서는 《아즈마카가미》를 1차 사료로 간주하지 않고, 다른 사료들과의 교차 검증을 통해 신중하게 활용하고 있다.
- 호시노 히사시는 막부 기록의 효시이자 무가 제도, 법령, 정치, 경제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사료로 평가했다.
- 하라 가쓰로는 호조씨를 정당화하기 위한 곡필이 많아 정치사의 재료로서는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 와다 히데마쓰는 《아즈마카가미》 전체가 후대의 편집물이라고 보았다.
- 야시로 구니지는 편찬 과정의 오류, 산 자와 죽은 자의 혼동, 위조문서 채록 등 기사의 오류를 지적했다.
- 사토 신이치는 대응 자료를 찾을 수 없는 경우 《아즈마카가미》를 채록하지 않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 마스다 소오는 《아즈마카가미》의 곡필이 편찬자뿐만 아니라 원사료에도 존재했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가마쿠라 막부 연구에 불가결한 문헌이라고 평가했다.
- 고미 후미히코는 원사료의 출처를 파악하여 《아즈마카가미》의 유익한 정보를 추출할 수 있다고 보았다.
6. 1. 호조 씨 관련 서술의 특징
호조 도키마사 혹은 호조 요시토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곡필(왜곡된 기록)이 존재한다.[32] 미나모토노 요리이에의 최후,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난 관련 기술 등에서 왜곡이 발견된다. 호조 도쿠소 가문을 현창(드러내어 칭송함)하기 위한 내용이 많다 (예: 호조 야스토키, 호조 도키요리 관련 기술).[30][31]- 미나모토노 요리이에의 최후: 《아즈마카가미》는 겐닌 3년(1203년) 9월 7일에 요리이에가 출가하고, 9월 10일에 미나모토노 사네토모가 쇼군직을 계승했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고노에 이에자네의 《이노쿠마간파쿠기》, 후지와라노 사다이에의 《메이게쓰키》, 시라카와 하쿠오가의 교시 왕의 《교시 왕기》에 따르면, 9월 1일에 요리이에가 병사했다는 소식이 교토에 전해졌고, 9월 7일에 사네토모의 쇼군 임명을 요청하는 사자가 도착했다. 이는 요리이에의 쇼군직 폐위가 사전에 계획되었음을 시사한다.
-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난: 《아즈마카가미》는 하타케야마 시게타다를 몰락시킨 인물이 호조 도키마사의 후처 마키노 카타이며, 호조 요시토키는 시게타다 모살에 반대했다고 묘사한다. 이는 호조 마사코와 요시토키가 도키마사를 추방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복선으로 해석된다.
- 호조 도키마사 현창: 《아즈마카가미》 분지 2년(1186년) 5월 13일조에 고시라카와 법황이 도키마사를 칭찬하는 내용이 있으나, 이는 도키마사 현창을 위한 날조로 추정된다.[34][35]
- 호조 야스토키 현창: 《아즈마카가미》 조지 2년(1200년) 4월 8일조에 야스토키가 뇨인(女院)의 덴조비토(殿上人)를 살해한 무사를 엄벌해야 한다고 말한 내용은 《메이게쓰키》에 기록된 후지와라노 사다이에의 감상을 표절한 것이다.[37][38]
- 호조 도키요리 현창: 《아즈마카가미》 닌지 2년(1241년) 11월 29일조와 30일조에는 호조 쓰네토키보다 도키요리가 더 뛰어나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7. 연구사
1889년(메이지 22년) 호시노 히사시(星野恒)가 《사학잡지》 창간호에 '아즈마카가미 고(考)'를 발표하면서 《아즈마카가미》에 대한 근대적 연구가 시작되었다. 호시노는 《헤이케 이야기》(平家物語) 등을 바탕으로 한 역사관에 반대하며, 《아즈마카가미》를 《교쿠요》, 《메이게쓰기》와 같은 수준의 신뢰할 수 있는 기록으로 평가했다.
1898년(메이지 31년), 하라 가쓰로(原勝郞)는 《사학잡지》에 '아즈마카가미의 성질 및 그 사료로서의 가치(吾妻鏡の性質及其史料としての價値)'를 발표하여 사료 비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아즈마카가미》를 무비판적으로 신뢰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다이쇼 시대에 와다 히데마쓰(和田英松)와 야시로 구니지(八代國治)는 깃카와본 등 여러 사본을 소개하며, 《아즈마카가미》가 동시대의 기록이 아니라 가마쿠라 막부의 만도코로(政所)나 몬츄쇼(問注所) 기록, 교토 문신들의 일기 등을 참고하여 후대에 편찬되었으며, 오류와 곡필이 많음을 밝혔다. 야시로의 1913년(다이쇼 2년) 저술 '아즈마카가미의 연구(吾妻鏡の研究)'는 이후 연구의 기초가 되었다.
1960년대 이후 가사마쓰 히로시(笠松宏至), 마스다 소(益田宗) 등은 야시로의 설에 반론을 제기했다. 마스다와 히라다 도시하루(平田俊春)는 《아즈마카가미》에서 《메이게쓰기》가 이용된 방법, 《교쿠요》와 《아즈마카가미》의 관계를 검증했다. 1980년대 이후 고미 후미히코(五味文彦)는 《아즈마카가미》의 원자료 추적 연구를 실시했다.
《아즈마카가미》는 '일기' 형식으로 쓰여 있어 현재진행형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마쿠라 시대 후기 편찬자들이 모은 다양한 성격의 자료들을 정리한 것이다. 여기에는 사실과 소문, 후대의 인식, 이야기 등이 섞여 있다. 예를 들어, 가즈사노스케 히로쓰네(上總介廣常)와 지바 쓰네타네(千葉常胤)에 대한 묘사는 후대의 시각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78]
메이지 시대 이후 연구자들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연구자 | 평가 |
---|---|
호시노 히사시 | "가마쿠라 막부의 일기"이므로 신뢰할 수 있다고 평가. |
하라 가쓰로 | 기사의 정확성과 풍부한 자료를 인정하면서도 전면적인 신뢰에는 의문 제기. |
와다 히데마쓰 | 후대의 편찬물이지만 사료적 가치는 일기에 뒤지지 않는다고 평가. |
야시로 구니지 | 오류를 지적하며 정치사 사료로는 신중해야 하지만, 가마쿠라 시대의 근본 자료로 평가. |
사토 신이치 | 매우 신중한 태도를 보이며, 후일의 연구를 기다리기로 함. |
마스다 소 | 호조본의 한계를 지적하고, 편찬 시기 이전의 호조 도쿠소 전제기의 영향에 주의해야 하지만, 단점 나름대로 가치가 있다고 평가. |
고미 후미히코 | 원사료를 파악하면 유익한 정보를 추출할 수 있다고 평가. |
8. 여러 판본
- '''호조본'''
1933년에 편찬된 「신정증보국사대계」의 저본이 된 책이다. 고호조 집안이 소장하고 있던 사본으로, 덴쇼 18년(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 때 호조 우지나오를 설득해 성을 열도록 한 구로다 조스이가 가져온 것을, 조스이의 아들 구로다 나가마사가 게이초 9년(1604년)에 도쿠가와 집안에 바쳤다는 것이 통설이었다. 그러나 이에야스의 《아즈마카가미》 고활자본 개판 준비는 이미 게이초 6년(1603년)에 시작되었으므로 이 설은 현재 부정되고 있다.[95]
현존 호조본 《아즈마카가미》의 서지 분석을 보면 32권은 낡은 닥종이 용지였고 그 낡은 닥종이 용지보다 좀 더 새것인 수선사지(修善寺紙)라는 종이를 보충한 것이 10권, 그리고 수선사지만으로 이루어진 한 권, 합쳐 총43권을, 이에야스는 1603년(게이초 8년) 이전, 어쩌면 게이초 이전(1596년 이전)에 모두 손에 넣었다고 여겨진다.[95] 그 뒤 수집을 통한 증보를, 앞서 입수하고 있었던 것과 같은 서식으로 베껴쓰게 한 것이 백지에 가까운 종이를 이용한 8권이며, 그 추가 수집과 함께 고활자본 개판의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구로다 나가마사가 바칠 당시에는 몇 권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백지에 가까운 새 종이(수선사지)를 가지고 8권을 증보하는 과정에서 《아즈마카가미》 복원을 위한 '기록 조합'에 이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호조본'이라 불리는 사본은 '옛 호조본으로 보이는 사본' 즉 '전(傳) 호조본'이며, 고호조 집안으로부터 처음 전해질 당시의 실물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고, 이에야스의 명으로 증보된 사본 안에 필사된 원자료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된다.[96]
이에야스가 개판한 것은, 게이초 10년(1605년)에 출판된 게이초 고활자본(후시미판)이며, 겉표지나 판심(版心)에는 '東鑑'이라고 적고, 안에는 '신간(新刊) 아즈마카가미(吾妻經)'라고 적혀 있어, 쇼코쿠사의 중흥조 사이쇼 조타이의 발문이 있다. 간에이판은 간에이 3년(1626년)에, 앞서 게이초 10년에 인쇄한 고활자본을 바탕으로 난해한 문장을 정정해 가나를 부기한 《아즈마카가미》 보급을 목표로 인쇄한 것이다. 여기에 하야시 라잔(임도춘)의 발문이 더해져 《아즈마카가미》의 유래를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호조본의 원본은 이에야스 사후, 에도 성 내의 모미지야마 문고에 수장되었고 현재는 일본 국립공문서관에 옮겨져 있으며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앞서 소개한 「신정증보국사대계」는 이 '호조본' 《아즈마카가미》를 저본으로 삼아 후술할 '시마즈본'을 참조로 보충한 「아즈마카가미 탈루」를 더했고 '깃카와본'도 교합에 이용했다.
- '''시마즈본'''
권두에 실린 계도를 따르면 덴분 연간(1532년 ~ 1555년)의 사본으로 추정되지만, 모든 《아즈마카가미》 목록에 없는(호조본에도 실려있지 않은) 3년분이 포함되어 있는 것 등을 볼 때 덴분 이후로도 수집과 보정이 계속 진행되었다고 보여진다. 게이안 3년(1650년)에 막부에 헌상되었는데, 현재 시마즈 집안의 문서로 남은 것은 그때의 부본으로 여겨진다. 막부에 헌상된 시마즈본은 현재 행방불명 상태이며, 그 중에서 도쿠가와 집안 소장본(이른바 '호조본')에도 빠져 있던 3년분이 간분 8년(1668년)에 《아즈마카가미 탈루》로서, 거듭 호조본 11권과의 차분(差分)을 더한 《아즈마카가미 탈찬》이 엔포 7년(1679년)에 목판본으로 출판되었다.
- '''깃카와본'''
현존하는 《아즈마카가미》 사본 가운데 가장 우수한 것으로 주목받는 사본이다. 오우치 씨 집안의 중신이었던 스에 집안의 일족인 미기타 히로아키(스에 히로아키)에 의해 수집된 것이다. 미기타 스에아키는 분키 원년(1501년) 무렵에 그 사본 42첩을 손에 넣었고 몇 사람의 서기를 고용해 이를 베껴쓰게 하여 비장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20년이 넘는 분량의 결핍이 있었고, 히로아키는 그 후 결핍된 부분 중 5첩분을 간신히 손에 넣어 처음 베낄 때와 같은 형식으로 베껴쓰게 하고 그 목차도 겸한 연보 한 첩을 더해 다이에이 2년(1522년)에 전48첩으로 마무리지었다. 오우치 집안이 멸망하면서 모리 모토나리의 아들인 깃카와 모토하루의 손에 옮겨져 이후 깃카와 집안에 전해지게 되었다. 오늘날까지 [http://www.sky.icn-tv.ne.jp/~kikkawa7/index.html 깃카와 자료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일본의 중요문화재이다.
호조본에는 있는 간겐 4년, 겐초 3년, 겐초 7년분이 빠져있기는 있지만, 또한 호조본에는 없는 탈루된 3년분의 일부분이나마 모두 포함하고 있고, 그 밖에도 사건 단위로 수백 개 분량의 호조본에는 전해지지 않는 부분들을 수록하고 있다. 호조본과 비교할 때 기도나 제례에 관한 기사가 많고, 또 전반부의 경우 대부분 일치하지만 후반부에서는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때문에 와다 히데마쓰는 「아즈마카가미, 고사본고」에서 호조본 등의 원류인 가나자와 문고본은 절략본이며, 깃카와본은 그보다 앞선 편집 도중의 판을 베이스로 한 사본이라고 보았다.[97] 오늘날 이른바 '호조본'은 앞서 말한 대로 '전(傳) 호조본'에 불과하며, 오늘날에는 와다의 이러한 주장이 근거를 잃고 있긴 하지만, 야시로 구니지와 함께 "편찬 도중 첨삭이 더해지기 이전 단계를 그려볼 수 있게 하는 깃카와본의 사료적 가치는 호조본보다 뛰어나다"고 평가한 것은 오늘날에도 긍정되고 있다.
- '''구로카와본'''
《군서유종》을 편찬한 하나와 호키이치의 '화학강담소온고당(和學講談所溫古堂)'이라는 장서인이 찍혀 있다. 목록 마지막에 '오에이 11년 갑신(1404년) 8월 25일 가나자와 문고 본서지(應永十一年甲申八月二十日金澤文庫御本書之)'라고 적혀 있어, 오에이 11년에 가나자와 문고본에서 필사한 것을 더 필사한 것으로 보인다. 다이쇼 시대에 구로카와 신도(黑川眞道)가 소장하고 있었다 하여 구로카와본으로 불리지만 그 뒤 소실되어, 현재는 일본 도쿄대학 사료편찬소에 그 목록 부분의 영사된 사진만 남아 있다.
- '''기타'''
집성본으로 분류되는 사본 가운데 주요한 것으로 꼽히는 것은 앞서 설명한 호조본, 깃카와본, 시마즈본의 3점이지만, 그 밖에 발췌ㆍ결본된 부분을 모은 사본 종류로는 마에다육덕회 존경각문고에 소장된 오에이 13년(1406년)에 작성된 발문이 있는 「산밀왕래」(山密往來)의 이면지에 주에이 3년(1184년) 4월 6일조에서 동년 12월 16일까지 아홉 달에 조금 못 미치는 분량의 발췌본이 발견되고 있어 사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꼽히고 있다(현재 일본의 중요문화재). 또한 마에다 집안에는 포지상서(包紙上書)에 「분지(文治) 이래의 기록」이라 쓰여진 분지 3년(1187년)부터 가로쿠 2년(1226년) 사이의 야부사메 등 무예 관계기사 43일분을 발췌한 것도 남아 있다. 이밖에 일본의 황족이었던 후시미노미야 집안 소장본인 후시미노미야본은 17일분 기사의 초본이다. 센고쿠 시대의 승려 산조니시 기네다에 의해 필사된 것으로 보이는 산조니시본은 50일 전후의 기사를 두 종류 가지고 있으며 여기에는 중복되는 기사도 있다. 세이겐죠본(淸元定本)이라 불리는 사본은 무로마치 막부의 부교(奉行)였던 기요하라 모토사다가 필사한 것으로 4권에 106정이다. 집성본은 이러한 발췌 및 결본된 계열의 사본들을 미기타 히로아키 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힘써 모은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9. 한국과의 관계
조선 중기 유학자 강항은 정유재란 때 일본에 포로로 끌려가 《아즈마카가미》를 읽었다. 그는 책 제목을 "나의 잘잘못은 곧 나의 아내를 통해 드러나므로 나의 아내를 보면 나의 잘잘못을 알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했다.[67] 또한 요리토모 이후 일본이 전국시대(일본)의 혼란에 빠졌다고 평가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는 《청장관전서》에서,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아즈마카가미》를 언급했다.
아주대학교 도서관 소장 규장각 해제 원문 텍스트에는 《아즈마카가미》가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디지털화된 자료를 통해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아즈마카가미》는 몽골의 침입과 왜구 문제 등 고려와 가마쿠라 막부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는 데 참고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10. 현대적 의의
吾妻鏡일본어는 중세 일본의 정치, 사회, 문화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사료이다.[3] 권력 투쟁, 제도 변화, 사회 변동 등 역사 속에서 반복되는 현상들을 보여주며, 현대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동아시아 역사 속에서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일본사 연구자들은 吾妻鏡일본어의 역사적 가치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
연구자 | 평가 내용 |
---|---|
호시노 히사시(星野恒) | 吾妻鏡일본어는 가마쿠라 막부의 일기이자 신용할 수 있는 자료이며, 무가의 제도와 법령, 정치, 경제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사료라고 평가했다. |
하라 가쓰로(原勝郞) | 吾妻鏡일본어의 기사가 비교적 정확하고 당대의 사실에 대한 많은 자료를 제공한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전반부는 일기로 볼 수 없으며 전면적으로 신용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했다. 호조씨를 정당화하기 위한 곡필이 많아 정치사의 재료로서는 신빙성이 높은 직접 사료로 보기 어렵다고 했다. |
와다 히데마쓰(和田英松) | 전반부는 물론 전체가 후세의 편집물이며 리얼 타임의 일기는 아니라고 보았다. 하지만 가마쿠라 중엽 막부가 공사의 일기 문서를 모아 편찬한 것으로, 사료로서의 가치는 일기만큼은 못해도 높다고 평가했다. |
야시로 구니지(八代國治) | 吾妻鏡일본어 자체가 후세의 편집물이며, 편집 과정의 오류, 산 자와 죽은 자의 혼동, 위조문서의 여과 없는 채록 등 기사의 오류를 지적했다. 정권 투쟁사에 관한 사료로서는 1급 사료로 신용하기 어렵지만, 막부 관련자들과 교토 구게들의 일기 등의 자료를 가지고 편찬한 부분이 대부분이므로, 곡필이나 위조문서 등을 주의 깊게 배제하면 가마쿠라 시대를 연구하는 근본 자료로 吾妻鏡일본어에 필적할 것은 없다고 평가했다. |
사토 신이치(佐藤進一) | 대응 자료를 찾을 수 없는 경우 吾妻鏡일본어를 채록하지 않고 훗날의 연구를 따르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
마스다 소오(益田宗) | 현존하는 吾妻鏡일본어 사본은 흩어진 것을 모은 것이며, 14세기 초두에 성립되었다고 주장했다. 호조씨 본종가의 전제정치 시기였기에 호조씨를 의도적으로 찬양한 기록도 있다는 점은 주의가 필요하지만, 가마쿠라 막부 연구와 무가 사회 해명에 빠질 수 없는 문헌이라고 평가했다.[98] |
고미 후미히코(五味文彦) | 吾妻鏡일본어는 무가 시대의 법령에 관한 자료를 풍부하게 포함하고 있으며, 원사료의 출처를 알 수 있다면 가마쿠라 시대의 근본 자료로서 유익한 정보를 추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99] |
중도진보적 관점에서 볼 때, 吾妻鏡일본어는 권력의 집중과 분산, 사회 개혁의 필요성, 국제 관계의 중요성 등을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참조
[1]
서적
Japan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2005
[2]
문서
National Archives of Japan
[3]
문서
Feng, Wang
[4]
서적
Azumakagami ho : Chūgokujin ni yoru saisho no Nihon tsūshi
Hōyū Shoten
1997
[5]
문서
近藤守重は「老談一言集」と書いているが江戸中期の旗本で国学者の[[朝倉景衡]](日下部景衡とも)が「老談一言記」を著している。
[6]
문서
なお、関幸彦は『吾妻鏡必携』冒頭の「『吾妻鏡』とは何か」の中で「和田英松・八代国治などの代表的見解では」、増田宗も『国史大辞典』「吾妻鏡」の項で「和田英松・八代国治の研究によれば」として編纂2段階説を紹介しているが、より厳密には編纂2段階説は八代国治からであり、和田は少なくともこの1912年の「吾妻鏡古写本考」、更に1936年の「吾妻鏡の伝本に就いて」においても2段階説はとっていない。
[7]
문서
以下頁数は1941年復刊の明世堂書店版による。
[8]
서적
吾妻鏡の研究
[9]
간행물
徳政・偽文書・吾妻鏡
1963
[10]
문서
『鎌倉幕府裁許状集』下
[11]
간행물
吾妻鏡の伝来について
吉川弘文館
1977
[12]
문서
八代国治が『吾妻鏡の研究』で指摘したのは14箇所であったがその後の研究で3箇所が追加された。
[13]
서적
源平争乱と平家物語
[14]
서적
源平の争乱
[15]
서적
源平の争乱
[16]
서적
源平の争乱
[17]
서적
源平合戦の虚像を剥ぐ
[18]
서적
源平争乱と平家物語
[19]
서적
義経の登場
[20]
문서
『[[愚管抄]]』には後に頼朝が後白河法皇に語った内容が書かれており、そちらの記述からこの間の経緯が理解されている。
[21]
서적
武士の成立
[22]
문서
千葉氏における先祖顕彰は妙見信仰や『[[源平闘諍録]]』など、他氏には類を見ないほど強いものがあるが、野口実は『中世武家系図の史料論』収録の「千葉氏系図の中の上総氏」等の中で、その背景を上総千葉氏が宝治合戦に連座して滅亡し、庶子家の分立、幼少な当主と言う中での精神的な一族統合の必要性故としている。
[23]
문서
なお、千葉氏に関しては安貞2年5月28日条の[[千葉胤綱]]の死亡記事において享年を誤記した疑いが高く、更に後世において『吾妻鏡』の記述を真実と信じた千葉氏側が誤った系譜の修正を行った問題が浮上している(詳細は[[千葉時胤]]を参照のこと)。
[24]
문서
『中世の法と国家』収録
[25]
서적
日本の歴史 7 鎌倉幕府
[26]
문서
辞世の句のようなもの。
[27]
서적
日本の歴史8 蒙古襲来
[28]
문서
吾妻鏡騒動記
[29]
문서
論説中世の窓
[30]
문서
八代国治の『吾妻鏡の研究』(1913年)で初めて紹介されたものであり、1895年の『吾妻鏡集解』には収録されていない。
[31]
문서
八代国治の『吾妻鏡の研究』(1913年)に全文が紹介されている。
[32]
간행물
吾妻鏡の性質及其史料としての價値
1898
[33]
문서
ただしこれを義時擁護のための編纂者の意図的な曲筆と決めつけてよいものかについては疑問もある。武久堅は1976年の『文学』44-10「畠山物語との関連」において鎌倉時代に『畠山物語』という四巻の軍記物があったと言い、『吾妻鏡』に見る畠山重忠像は北条氏に滅ぼされたにしては際だった英雄像であることから、そこでの畠山顕彰がそのまま『吾妻鏡』に書き写された可能性を大石直正は『吾妻鏡辞典』(p21)で指摘している。なお、[[細川涼一]]「河越重頼の娘」(『京都橘大学女性歴史文化研究所紀要』16号、)において畠山重忠と[[河越重頼]]の記事を比較して、重忠の同族([[秩父氏|秩父一族]])の出身で比企氏の婿であった重頼と[[郷御前|その娘]](源義経の正室)については存在をなるだけ「隠蔽」する曲筆が行われ、北条氏の婿である畠山重忠は北条氏と対立した比企氏・河越氏の事績を隠す意味においてはむしろ顕彰の対象であったとしている。
[34]
문서
元東大史料編纂所教授
[35]
웹사이트
吾妻鏡の虚構一考補論──文治二年五月六日院宣の信憑性
http://ronfoo.at.web[...]
[36]
웹사이트
吾妻鏡の虚構一考─文治二年三・四・五月の公武交渉を素材として(上)
http://ronfoo.at.web[...]
龍福義友
[37]
문서
ただし鎌倉側にも関連資料が残っていたらしく、藤原保季を斬り殺した武士の名などは『明月記』にはない。
[38]
문서
殺された藤原保季は定家の親族である。
[39]
논문
吾妻鏡編纂の材料の再検討
平田俊春
[40]
논문
承久役に関する吾妻鏡の記事の史料について
平田俊春
[41]
간행물
史学雑誌
佐藤進一
1952
[42]
서적
吾妻鏡の研究
[43]
서적
吾妻鏡の研究
[44]
문서
五味は同時に文治2年(1186年)閏7月19日条もあげている。
[45]
서적
増補 吾妻鏡の方法
[46]
문서
その出産はツボを突いているように見えるが、他の要素との兼ね合いでの話であり、出産記事だけなら文治4年(1188年)1月22日条には政子の女房比企藤内朝宗の妻越後局の記事がある。
[47]
문서
永仁三年記 6月26日条
[48]
서적
論集中世の窓
[49]
서적
増補 吾妻鏡の方法
[50]
문서
金沢文庫古文書 324号
[51]
문서
永仁三年記 6月26日条
[52]
서적
日本通史
[53]
서적
永仁三年記
[54]
서적
日本通史
[55]
문서
吾妻鏡の謎をさぐる
[56]
서적
鎌倉政権得宗専制論
[57]
문서
頼朝の死に関する記事が無いことから江戸時代には「家康が隠したのでは」などとの憶測も生まれたが「江戸時代の研究」で触れた通りである。室町期の写本である「黒川本」や家康誕生前に死去した右田弘詮によって蒐集された「吉川本」にも3年分の記事が存在していないため、仮にこの時期の記事を書いた巻が存在したとしても早い時期に散逸した可能性が高い。
[58]
서적
論集中世の窓
[59]
문서
その説は、江戸時代後期の文化5年(1808年)2月に徳川幕府の書物奉行となった[[近藤重蔵|近藤守重]]が著した『御本日記続録』からであるが、黒田長政が『吾妻鏡』を献上したというのはその時期「[[寛政重修諸家譜]]」にまとめられた黒田家提出の系図の黒田長政の箇所からであり、そこには「九年(慶長)三月父が遺物備前国長光の刀、木丸の茶入を献じ、台徳院殿(秀忠)に東鑑一部を奉る」とあるのみで、何巻だったのかなどは記されていない。
[60]
논문
明月記研究
2000
[61]
문서
家康が印行の準備に取りかかりるのは慶長8年(1603年)、翌慶長9年(1604年)3月に黒田長政から「吾妻鏡一部」の献上を受ける。つまり後北条氏が所持していたとされるものが黒田を通じて家康の手に入る以前に8割以上の巻を既に持っていたことになる。6月に[[西笑承兌]]に全52巻内49巻は揃っているが3巻が手元に無く、諸家に声をかけて捜しているところだと手紙を出している。そして更に翌年慶長10年(1605年)3月の慶長古活字本開版時点では52巻中51巻が揃っ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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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吾妻鏡の伝来につい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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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北条時頼の廻国説を論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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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吾妻鏡
小学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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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
吾妻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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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増補 吾妻鏡の方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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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간양록》적중봉소(賊中封疏), 왜국팔도육십육주도(倭國八道六十六州圖)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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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체 한문의 일종으로 한문체가 현저하게 무너진 당시의 일용문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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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켄의 보좌역으로 싯켄 다음 가는 중직. 보통 호조 일문의 유력자가 맡았으며, 한때 싯켄과 맞먹는 지위로 꼽히기도 했다. 가마쿠라 막부 초기 쇼군 휘하의 싯켄과 렌쇼들 사이의 합의를 통해 이루어지던 합의제 정치상황에서 나온 관직이다.
[70]
서적
吾妻鏡の研究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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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吾妻鏡の研究
[72]
논문
덕정・위문서・吾妻鏡
[73]
서적
鎌倉幕府裁許状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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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일본의 덕정령
[75]
논문
吾妻鏡の伝来について
[76]
서적
源平の争乱
[77]
서적
源平의 쟁란
[78]
서적
武士の成立
[79]
문서
가마쿠라 시대 안도장
[80]
문서
지바씨 집안의 선조 현창
[81]
서적
日本の歴史 7 鎌倉幕府
[82]
서적
論説中世の窓
[83]
웹아카이브
吾妻鏡の虚構一考─文治二年三・四・五月の公武交渉を素材として(上)
http://ronfoo.at.web[...]
2012-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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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史学雑誌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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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吾妻鏡の研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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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吾妻鏡の研究
[87]
서적
増補 吾妻鏡の方法
[88]
서적
増補 吾妻鏡の方法
[89]
서적
増補 吾妻鏡の方法
[90]
문서
가마쿠라 막부 히키부슈
[91]
서적
日本通史
[92]
서적
日本通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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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吾妻鏡の謎をさぐ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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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論集中世の窓
[95]
연구
明月記研究
2000
[96]
논문
吾妻鏡の伝来について
[97]
논문
北条時頼の廻国説を論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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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
吾妻鏡
[99]
서적
増補 吾妻鏡の方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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