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야노 요시토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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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훈야노 요시토모는 9세기 일본의 인물로, 신라 해적의 침입에 맞서 쓰시마 방어에 기여했다. 그는 간교 7년(883년) 가즈사국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했으며, 신라 해적의 잦은 침입에 대응하여 쓰시마의 수비 책임자로서 활약했다. 특히 간표 6년(894년)에는 쇠뇌를 활용한 전투에서 승리하여 많은 적을 사살하고 무기를 노획했으며, 생포한 신라 해적의 심문을 통해 신라의 기근으로 인한 약탈 지시를 확인했다. 이러한 활약은 당시 쇠퇴하던 율령제 국가 군제의 쇠퇴 속에서 주목할 만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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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야노 요시토모 | |
|---|---|
| 기본 정보 | |
| 씨족 | 문실씨 |
| 인물 정보 | |
| 씨명 | 분야노 요시토모 |
| 이름 | 문옥선우 |
| 시대 | 헤이안 시대 전기 |
| 생몰년 | 불명 |
| 관위 | 가즈사 대승, 쓰시마 수 |
| 섬긴 군주 | 요제이 천황 → 고코 천황 → 우다 천황 |
| 가족 | 부모: 불명 형제: 불명 배우자: 불명 자녀: 불명 |
2. 역사적 배경
9세기 말, 동아시아는 격변의 시기였다. 신라는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지방 호족 세력이 성장했고, 잦은 기근과 자연재해로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이러한 사회 불안은 해적 활동의 증가로 이어졌다.
한편, 일본 역시 율령 체제가 변화하면서 중앙 귀족 세력이 성장하고 지방에서는 무사단이 등장하는 등 국가 방위 체제에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라 해적의 침입이 잦아지자 일본 조정은 다자이곤노소치를 임명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등 대책 마련에 나섰다.
원경 7년(883년) 가즈사국에서 일어난 부수의 난을 진압한 훈야노 요시토모는 1,000명의 병사를 이끌었던 경험이 있었다. 당시 신라 해적은 쓰시마국·규슈 북부 연안을 자주 습격했고, 조간 15년(873년)에는 오노노 하루카제가 쓰시마 수호로 부임하여 군비를 확충하기도 했다.
2. 1. 신라 말기의 사회 혼란
신라한국어 말기에는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지방에서 호족 세력이 성장하였고, 사회 불안과 민생 악화가 심화되었다. 잦은 기근과 자연재해로 인해 백성들의 고통과 불만이 커졌고, 이는 해적 활동으로 이어지기도 했다.조간 15년(873년)에는 오노노 하루카제가 쓰시마 수호로 부임하여 군비를 확충하는 등 신라 해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간페이 5년(893년)에는 신라 해적이 규슈 북부의 인가를 불태우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듬해인 간페이 6년(894년) 4월에는 신라 선박 100척에 탄 2,500명에 달하는 신라 해적의 대군이 쓰시마에 침입했다. 일본 조정은 후지와라노 구니쓰네를 다자이곤노소치로 임명하여 토벌을 명하는 등 대책에 나섰다.
간페이 6년(894년) 9월 5일 아침, 쓰시마에 45척의 신라 해적선이 들이닥쳤다. 쓰시마 수호 젠유는 다무라노 다카요시에게 부대를 정비하게 하고, 쓰시마도 분사의 상좌 멘킨과 가미아가타 군의 부대령 시모이마누시를 압령사로 삼아 100명의 병사를 20개 부대로 나누었다. 도요마루노 하루타케가 이끄는 40명의 약군으로 적을 유인하여 쇠뇌 사격전을 벌여, 화살이 비처럼 쏟아지는 전투 끝에 적을 격퇴했다. 이 전투에서 대장 3명, 부장 11명을 포함한 적 302명을 사살하고, 배 11척, 갑옷, 보로, 은제 칼 및 칼 50자루, 창 1000개, 활 110개, 활 고리(야나구이) 110개, 방패 312개 등 막대한 병기를 포획했으며, 적 1명을 생포했다.
생포된 포로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은 단순한 해적이 아니라 신라 정부의 명령을 받은 정규군이었다. 포로는 "기근으로 왕성이 불안하여 식량과 비단을 얻기 위해 왕명을 받은 배 100척, 2,500명의 병사를 각지에 파견했다"고 진술했으며, 쓰시마를 습격한 45척도 그 일부 부대였다고 한다. 또한 도망친 적들 중에는 뛰어난 장군이 3명 있었고, 그 중 한 명의 당인이 강대하다고 말했다.
당시의 전투는 율령 군제의 최말기에 해당하며, 에미시 이외의 대외 세력과의 전투에서 쇠뇌가 사용된 몇 안 되는 사례 중 하나이다.
2. 2. 일본 율령 체제의 변화
9세기 말, 일본은 율령 체제가 변화하면서 군사 제도도 약화되었다. 중앙에서는 귀족 세력이 성장했고, 지방에서는 무사단이 등장하여 국가 방위 체제에 변화가 생겼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라 해적의 침입이 잦아지자, 조정은 다자이곤노소치를 임명하고 군비를 늘리는 등 대응했다.간페이 6년(894년), 신라 해적선 100척에 탄 2,500명의 병력이 쓰시마를 공격했다. 쓰시마 수비군은 쇠뇌를 쏘아 공격하고 추격전을 벌여 적을 물리치고 많은 무기를 얻었다. 포로의 말에 따르면, 신라 정부가 기근으로 식량을 얻기 위해 이들을 보냈다고 한다.
이 전투는 율령 군제가 쇠퇴하던 시기에 쇠뇌가 다른 나라와의 전투에 사용된 드문 사례이다.
2. 3. 한반도와 일본 간의 관계
간페이일본어 6년(894년) 4월, 신라 선박 100척에 탄 2,500명에 달하는 신라인들이 쓰시마를 침입했다. 이 소식을 접한 일본 조정은 참의였던 후지와라노 구니쓰네를 다자이곤노소치로 임명하여 토벌을 명하는 등 대책에 나섰다.9월 5일 아침, 쓰시마에 들이닥친 신라 선박은 45척이었다. 쓰시마 수호였던 젠유는 다무라노 다카요시에게 부대를 정비하게 하고, 100명의 병사를 동원하여 쇠뇌를 이용해 사격전을 벌였다.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는 전투 끝에, 일본군은 적군 302명을 사살하고 배 11척, 갑옷, 은제 칼, 창 1000개, 활 110개 등 막대한 병기를 포획했으며, 적군 1명을 생포했다.
생포된 신라인은 신라 조정이 기근으로 인해 식량과 비단을 얻기 위해 100척의 배와 2,500명의 병사를 파견했으며, 쓰시마를 습격한 부대는 그 일부였다고 진술했다.
당시는 율령 군제의 최말기였으며, 이 사건은 쇠뇌가 에미시 이외의 대외 세력과의 전투에서 사용된 몇 안 되는 예이다. 격퇴 성공 소식은 다자이후의 비역에 의해 9월 19일에 일본 조정에 전해졌다.
3. 신라 해적의 침입
조간 15년(873년), 오노노 하루카제는 쓰시마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중앙 조정에 식량 1000매와 호료(保呂, 피박) 1000벌을 요청했다. 이는 쓰시마노카미(対馬守)로 부임한 그가 신라 해적을 막기 위한 물자를 요청한 것으로, 당시 일본 서해에서 신라 해적들이 쓰시마 및 규슈 북부 해안을 약탈하고 일본 조정군과 교전을 벌이는 일이 빈번했기 때문이다.
간표 5년(893년) 신라 해적이 규슈 북부에 출몰해 민가를 불태웠다. 이듬해 4월, 신라 해적은 45척의 선단을 이끌고 쓰시마를 습격하였다.
당시 쓰시마노카미였던 훈야노 요시토모는 젠시(前司) 다무라노 다카요시에게 부대 정비를 명하고, 쓰시마 고쿠분지(対馬嶋分寺)의 상좌(上座) 멘균과 가미아가타 군의 부대령(副大領) 시모이마누시를 압령사(押領使)로 삼았다. 병사 100명을 5명씩 20개 조로 나누고, 도요마루노 하루타케에게 약한 병사 40명을 주어 적을 유인하게 한 뒤, 쇠뇌 일제 사격을 가했다. 화살이 비 오듯이 쏟아지는 가운데 도주하는 적들을 추격해 대장 3명과 부장 11명을 포함, 302명을 사살하였다. 배 11척, 갑옷, 호로, 은제 타치(太刀) 및 타치 50자루, 창 1천 자루, 활 110장, 야나구이(弓胡, 화살통) 110개, 세우는 방패 312개 등 많은 무기를 노획하고, 현춘이라는 신라 포로를 생포했다.
포로 현춘은 "기근으로 왕성이 불안하니 먹을 것과 견면을 약탈하라는 왕명을 받고 100척의 배에 2,500명의 병사를 나누어 각지에 보냈다"고 진술했다. 쓰시마를 습격한 45척은 그 일부이며, 본거지에는 장군 3명이 있는데 그중 한 명은 당나라 출신으로 매우 강하다고 덧붙였다.
당시 일본은 율령제에 기반한 국가군제가 점차 쇠퇴하던 시기로, 일본 조정군이 에미시 외에 쇠뇌를 사용한 것은 매우 드문 사례였다.
승전 소식은 다자이후의 비역(飛駅)을 통해 9월 19일 교토에 전해졌다.
3. 1. 침입 경로와 목적
간페이 6년(894년) 4월, 신라 해적선 100척에 탄 2,500명의 병력이 쓰시마를 습격했다. 이들은 신라 조정이 기근으로 인한 식량과 비단을 확보하기 위해 파견한 부대였다. 포로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은 왕명을 받고 각지에 파견되었으며, 쓰시마를 습격한 45척의 배도 그 일부였다.9세기 후반, 신라 해적은 쓰시마국·규슈 북부 연안을 자주 습격했다. 조간 15년(873년)에는 오노노 하루카제가 쓰시마 수호로 부임하여 군비를 확충하기도 했다.
3. 2. 간교의 난 (883년)
간교(元慶) 7년(883년), 훈야노 요시토모는 가즈사국(上総国)에서 일어난 후슈(俘囚)들의 반란을 진압했다. 당시 가즈사노다이죠(上総大掾)였던 그는 여러 군(郡)의 병사 1천 명을 이끌고 반란군을 제압했다.이 사건은 당시 일본 서해안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던 신라 해적의 활동과 관련이 있다. 신라 해적들은 쓰시마(対馬)와 규슈(九州) 북부 해안을 공격하여 약탈을 일삼았고, 일본 조정군과 교전을 벌이기도 했다. 조간(貞観) 15년(873년)에는 오노노 하루카제(小野春風)가 쓰시마노카미로 부임하여 신라 해적을 막기 위해 식량과 군수 물자를 조정에 요청하기도 했다.
3. 3. 조간 15년 (873년)의 상황
873년 (조간 15년), 신라 해적의 침입이 잦아지자 쓰시마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오노노 하루카제가 중앙 조정에 식량 1000매와 호료(保呂, 피박) 1000벌을 요청하였다. 이는 당시 쓰시마노카미(対馬守)로 부임한 오노노 하루카제가 신라 해적을 막기 위한 물자를 요청한 것으로, 일본 서해에서 신라 해적들이 출몰하여 쓰시마 및 규슈 북부 해안을 약탈하고 일본 조정군과 교전을 벌이는 일이 빈번했기 때문이다.3. 4. 간표 5년 (893년) ~ 간표 6년 (894년)의 침입
간표일본어 5년(893년) 신라 해적이 규슈 북부에 출몰해 민가를 불태우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듬해 4월, 신라 해적은 45척의 선단을 이끌고 쓰시마를 습격하였다.당시 쓰시마노카미였던 훈야노 요시토모는 젠시(前司) 다무라노 다카요시(田村高良)에게 부대 정비를 명하고, 쓰시마 고쿠분지(対馬嶋分寺)의 상좌(上座) 멘균(面均)과 가미아가타 군(上県郡)의 부대령(副大領) 시모이마누시(下今主)를 압령사(押領使)로 삼았다. 병사 100명을 5명씩 20개 조로 나누고, 도요마루노 하루타케(豊円春竹)에게 약한 병사 40명을 주어 적을 유인하게 한 뒤, 쇠뇌 일제 사격을 가했다. 화살이 비 오듯이 쏟아지는 가운데 도주하는 적들을 추격해 대장 3명과 부장 11명을 포함, 302명을 사살하였다. 배 11척, 갑옷, 호로, 은제 타치(太刀) 및 타치 50자루, 창 1천 자루, 활 110장, 야나구이(弓胡, 화살통) 110개, 세우는 방패 312개 등 많은 무기를 노획하고, 현춘이라는 신라 포로를 생포했다.
현춘은 「기근으로 왕성이 불안하니 먹을 것과 견면을 약탈하라는 왕명을 받고 100척의 배에 2,500명의 병사를 나누어 각지에 보냈다」고 진술했다. 쓰시마를 습격한 45척은 그 일부이며, 본거지에는 장군 3명이 있는데 그중 한 명은 당나라 출신으로 매우 강하다고 덧붙였다.
당시 일본은 율령제에 기반한 국가군제가 점차 쇠퇴하던 시기로, 일본 조정군이 에미시(蝦夷) 외에 쇠뇌를 사용한 것은 매우 드문 사례였다.
승전 소식은 다자이후(大宰府)의 비역(飛駅)을 통해 9월 19일 교토에 전해졌다.
3. 5. 일본 조정의 대응
간페이 6년 4월, 신라 선박 100척에 탄 2,500명 규모의 신라 해적 대군이 쓰시마에 침입했다는 소식을 접한 일본 조정은 후지와라노 구니쓰네를 다자이곤노소치로 임명하여 토벌을 명하는 등 대책을 세웠다.같은 해 9월 19일, 다자이후의 비역은 신라 해적 격퇴 소식을 수도에 전했다.
3. 6. 쓰시마 전투 (894년)
894년 신라 해적이 쓰시마(対馬)를 공격했을 때, 쓰시마노카미였던 훈야노 요시토모는 이들을 격퇴하고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당시 전투 상황과 전후 처리 과정은 다음과 같다.간표(寛平) 6년(894년) 4월, 신라 해적 45척이 쓰시마를 습격했다. 이에 훈야노 요시토모는 젠시(前司) 다무라노 다카요시(田村高良)에게 부대 정비를 맡기고, 쓰시마 고쿠분지(対馬嶋分寺)의 상좌 멘균(面均)과 가미아가타 군(上県郡)의 부대령(副大領) 시모이마누시(下今主)를 압령사(押領使)로 삼아 병사 100명을 5명씩 20개 조로 편성했다. 또한 도요마루노 하루타케(豊円春竹)에게 약한 병사 40명을 주어 적을 유인하게 한 뒤 쇠뇌 공격을 퍼부었다.
일본군은 쇠뇌를 집중 사격하여 신라 해적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이 전투에서 대장 3명, 부장 11명을 포함한 302명을 사살하고, 배 11척, 갑옷, 호로(保呂), 은제 타치(太刀) 등 많은 무기를 노획했으며, 현춘이라는 신라 병사 한 명을 생포했다.
이 승전 소식은 다자이후(大宰府)의 비역(飛駅)을 통해 같은 해 9월 19일 교토(京都) 조정에 전해졌다.
3. 6. 1. 일본군의 전략과 전술
간표 6년(894년) 4월, 신라 해적선 45척이 쓰시마(対馬)를 습격했을 때, 쓰시마노카미였던 훈야노 요시토모는 다음과 같은 전략과 전술을 사용했다.우선 젠시(前司) 다무라노 다카요시(田村高良)에게 부대를 정비하게 하고, 쓰시마 고쿠분지(対馬嶋分寺)의 상좌 멘균(面均)과 가미아가타 군(上県郡)의 부대령(副大領) 시모이마누시(下今主)를 압령사(押領使)로 삼아 병사 100명을 5명씩 20개 조로 편성했다. 그리고 도요마루노 하루타케(豊円春竹)에게 약한 병사 40명을 주어 적을 유인하게 한 뒤, 쇠뇌 일제 사격을 명했다.
화살이 비 오듯이 쏟아지는 가운데 도주하는 적들을 추격해 대장(大将) 3인과 부장(副将) 11인을 포함해 302명의 적을 사살했다. 또한 배 11척, 갑옷, 호로, 은으로 만든 타치(太刀) 및 타치 50자루, 창 1천 자루, 활 110장, 야나구이(弓胡, 화살통) 110개, 세우는 방패 312개 등 많은 무기를 노획하고 현춘이라는 이름의 신라 포로 한 명을 생포했다.
당시 일본은 율령제에 기초해 유지되던 국가군제가 서서히 막바지에 다다르던 시기로, 일본 조정군이 쇠뇌를 사용한 것은 에미시(蝦夷) 이외에는 사용한 사례가 극히 드물었다.
3. 6. 2. 포로 심문 내용
894년 신라 해적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생포된 현춘이라는 포로의 진술에 따르면, 당시 신라는 기근으로 인해 왕성(王城)이 불안정한 상황이었고, 왕명에 따라 식량과 비단을 약탈하기 위해 100척의 배에 2,500명의 병사를 나누어 각지로 보냈다고 한다. 쓰시마를 습격한 45척의 배도 그 일부 부대였다. 현춘은 또한 본거지에는 장군 세 명이 있는데, 그 중 한 명은 당나라 사람으로 매우 강대하다고 진술했다.4. 결과 및 영향
간페이 6년(894년) 신라 해적선 100척이 쓰시마를 침략했으나, 쓰시마 수비군이 이들을 격퇴했다. 이 사건은 단순한 해적의 침입이 아니라 신라 조정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으며, 당시 신라의 기근과 경제난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쓰시마 수비군은 쇠뇌를 주력 무기로 활용하여 적을 제압했다. 이는 율령 군제 말기에 쇠뇌가 에미시 이외의 대외 세력과의 전투에서 사용된 드문 사례로 기록되었다.
포로로 잡힌 신라 병사의 진술에 따르면, 신라는 기근으로 인해 왕성이 불안정해져 식량과 비단을 확보하기 위해 각지에 병력을 파견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신라 내부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보여주는 동시에, 해상 활동을 통한 자원 확보 시도가 빈번했음을 시사한다.
이 사건은 다자이후의 비역을 통해 9월 19일에 수도에 보고되었다.
4. 1. 동아시아 정세 변화
간페이 5년(893년), 신라 해적이 규슈 북부의 민가를 불태우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듬해인 간페이 6년(894년) 4월에는 신라 선박 100척에 2,500명에 달하는 신라 해적 대군이 쓰시마에 침입했다. 조정은 후지와라노 구니쓰네를 다자이곤노소치로 임명하여 토벌을 명하는 등 대책을 마련했다.9월 5일 아침, 쓰시마에 45척의 배가 들이닥쳤다. 쓰시마 수호 젠유는 다무라노 다카요시에게 부대 정비를 맡기고, 쓰시마도 분사의 상좌 멘킨과 가미아가타 군의 부대령 시모이마누시를 압령사로 삼아 100명의 병사를 20개 부대로 나누었다. 도요마루노 하루타케가 이끄는 40명의 약군으로 적을 유인하여 쇠뇌 사격전을 벌여, 적장 3명, 부장 11명을 포함한 302명을 사살하고, 배 11척과 많은 병기를 노획했다. 생포된 포로 1명은 이것이 사략이 아니라 신라 조정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고 진술했다. 그는 "기근으로 왕성이 불안하여 식량과 비단을 얻기 위해 왕명을 받은 배 100척, 2,500명의 병사를 각지에 파견했다"고 하며, 쓰시마를 습격한 45척도 그 일부 부대였다고 한다.
당시는 율령 군제의 말기였으며, 에미시 이외의 대외 세력과의 전투에서 쇠뇌가 사용된 몇 안 되는 사례이다.
다자이후의 비역은 9월 19일에 수도에 격퇴 성공 소식을 알렸다.
4. 2. 율령 체제의 변화 가속화
이 시기, 신라의 해적이 쓰시마·규슈 북부 연안을 습격하는 사건이 자주 발생하였다. 조간 15년(873년)에는 오노노 하루카제가 쓰시마 수호로 부임, 조정에 식량 자루 1,000개, 보로(화살을 막는 무구) 1,000령을 신청하여 군비 확충을 행하고 있었다. 간페이 5년(893년)에도 신라의 적이 규슈 북부의 인가를 불태우는 사건이 있었고, 이듬해 간페이 6년(894년) 4월에는 신라 선박 100척에 탄 2,500명에 달하는 신라의 적 대군이 쓰시마에 내습했다. 이 소식을 접한 조정은 참의·후지와라노 구니쓰네를 다자이곤노소치로 임명하여 토벌을 명하는 등 대책에 나섰다.전투 경과는 다음과 같다.
9월 5일 아침, 쓰시마에 들이닥친 것은 45척이었다. 쓰시마 수호·젠유는 먼저 전사 다무라노 다카요시에게 부대를 정비하게 하고, 쓰시마도 분사의 상좌멘킨과 가미아가타 군의 부대령 시모이마누시를 압령사로 삼아 100명의 병사를 각 5명씩 20번으로 나누었다. 먼저 도요마루노 하루타케가 이끄는 40명의 약군으로 적을 젠유 앞으로 유인하여, 쇠뇌에 의한 사격전을 벌였다. 화살이 비와 같았다는 전투 끝에, 도주하려는 적을 더욱 추격하여 대장 3명, 부장 11명을 포함한 적 302명을 사살했다. 또한 배 11척, 갑옷, 보로, 은제 칼 및 칼 50자루, 창 1000개, 활 110개, 활 고리(야나구이) 110, 놓아둔 방패 312개 등 막대한 병기를 포획하고 적 1명을 생포했다.
이 포로가 말하기를, 이것은 사략이 아니라 신라 정부에 의한 것이며, "기근으로 왕성이 불안하여 식량과 비단을 얻기 위해 왕의 명을 받은 배 100척, 2,500명의 병사를 각지에 파견했다"고, 쓰시마를 습격한 이 45척도 그 일부 부대였다. 또한 도망쳐 돌아간 자 중에는 뛰어난 장군이 3명 있었고, 그 중 한 명의 당인이 강대하다고 말했다.
당시는 율령 군제의 최말기였으며, 또한 그 장비인 쇠뇌가 에미시 이외의 대외 세력과의 전투에서 사용된 몇 안 되는 예이다.
격퇴의 성공은 다자이후의 비역에 의해 9월 19일에 도읍에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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