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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의 일본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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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나라의 일본 원정은 13세기 후반 몽골 제국 황제 쿠빌라이 칸이 일본을 정복하려 한 두 차례의 원정을 말한다. 1274년(문영의 역)과 1281년(고안의 역)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몽골, 고려, 중국 군대가 참여했다. 일본은 몽골의 복속 요구를 거부했고, 이에 몽골은 고려를 통해 일본 침략을 시도했다. 1차 원정은 쓰시마, 이키 섬을 공격한 후 하카타 만에 상륙했으나, 태풍으로 인해 철수했다. 2차 원정은 더 큰 규모로 진행되었지만, 역시 태풍(가미카제)으로 인해 실패했다. 이 원정은 일본 내정에 큰 영향을 미쳐 가마쿠라 막부의 쇠퇴를 가속화했고, 일본인의 대외관을 변화시켰다. 몽골 제국은 해군력의 손실과 국내 문제로 인해 이후 일본 원정을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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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의 일본 원정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정보
분쟁원나라의 일본 원정
元日战争
元日戰爭
원寇, 분영의 역, 홍안의 역
그림[[파일:Mōko Shūrai Ekotoba.jpg|360px]]
설명원정군의 화살과 폭탄에 맞는 일본의 사무라이
《몽고습래회사》(蒙古襲來繪詞)의 일부
날짜1274년, 1281년
장소대마도, 이키섬, 규슈
결과연합군의 일본침공 실패 (칸의 일본원정 단념)
교전국 1
교전국 2
지휘관 1
지휘관 2
병력 1
병력 2
사상자 1
사상자 2
캠페인 상자 몽골 제국
몽골 고원 통일 전쟁제1차 메르키트
제1차 자달란
제1차 타타르
주르킨
제2차 자달란
타이치우드
제2차 타타르
케레이트
나이만
제3차 메르키트
동아시아버마
제1차
응가사웅갼
파간
제2차
중앙아시아
거란
화레즘
파르완
바미얀
인더스 강
중국
탕구트
여진
한족
조어성
양양성
애산
한반도
제1차
제2차
제3차
제4차
제5차
제6차
제7차
제8차
제9차
일본
분에이
코우안
베트남
박당강
그 외
인도
자바
티베트
유럽캅카스
러시아
볼가 불가르 - (사마라벤드, 빌레르)
체첸
제1차 폴란드
제1차 헝가리
발칸
제2차 폴란드
제2차 헝가리
제3차 폴란드
중동화레즘-페르시아
아나톨리아
아바스조
팔레스타인 (아인잘루트)
레반트
전투 정보 (문영의 역)
전투 이름문영의 역
이미지[[파일:Mōko Shūrai Ekotoba.jpg|360px]]
이미지 캡션『몽고습래회사』보다 문영의 역의 도리카이가타 전투
분쟁원寇
날짜1274년11월4일-19일
문영11년10월5일-20일/지원11년10월5일-20일)
장소규슈 북부
결과일본의 승리
몽골 제국(원조)・고려 연합군의 철퇴
교전국 1 (문영의 역)
교전국 2 (문영의 역)
지휘관 1 (문영의 역)
지휘관 2 (문영의 역)
병력 1 (문영의 역)
병력 2 (문영의 역)
사상자 1 (문영의 역)
사상자 2 (문영의 역)

2. 명칭

한국과 중국의 사료에는 주로 동정(東征) 내지 정동(征東), 정일본(征日本) 등으로 언급된다.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원나라의 일본 원정(日本遠征)', 중국의 사학자들은 원일전쟁(元日战争)이라 부르고 있다.

일본측에서 해당 사건을 가리켜 부르는 원구(元寇)라는 용어는 에도 시대에 도쿠가와 미쓰쿠니 등이 편찬한 대일본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이후 18세기 나가무라 아키라(長村鑒)의 『몽고구기』(蒙古寇紀), 오미야야마 마사히데(小宮山昌秀)의 『원구시말』(元寇始末), 19세기의 오하시 토츠안(大橋訥庵)의 『원구기략』(元寇紀略) 등 한국이나 중국의 왜구에서와 같은 '구'(寇)를 사용한 사서가 등장해, 해당 사건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로 굳어갔다.

사건이 벌어졌던 당대 및 그 시점에서 멀지 않은 가마쿠라 시대무로마치 시대의 일본 문헌에서는 '''몽골 습래(蒙古襲来)''', '''이적 습래(異賊襲来)''', '''몽골 합전(蒙古合戦)''', '''이국 합전(異国合戦)''' 등으로 표기되어 등장한다. '이적(異賊)'이라는 호칭은 일본 이외의 외래로부터 침입해 온 세력을 가리키는데 쓰였는데 『하치만구도훈(八幡愚童訓)』 등 가마쿠라 시대 후기를 전후한 문헌에서는 도이의 입구(刀伊の入寇)나 진구 황후(神功皇后)에 의한 삼한정벌(三韓征伐) 전설에 대해서도 이 호칭을 사용하였다. 그밖에 '흉도'(凶徒)라는 호칭도 사용되었다. 또한 1274년의 1차 침공을 '''분영 합전(文永合戦)''', 1281년의 제2차 침공을 '''홍안 합전(弘安合戦)'''이라 부르기도 한다.[78]

1271년 쿠빌라이 칸은 국호를 한어로 "대원(大元)" (몽골어로는 "대원대몽골국"(Dai-Ön Yeke Monγol Ulus))으로 개칭했지만, 가마쿠라 시대 일본에서는 "몽골"이라는 명칭이 일반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원(元)", "대원(大元)" 등의 명칭은 사용되지 않았다. 에도 시대에 들어서 『원사(元史)』 등의 한적(漢籍)이 수입되면서 명나라에서 원나라를 줄여 부르던 "원(元)"이라는 명칭, 그리고 쿠빌라이를 가리켜 "호주(胡主)", "호원(胡元)" 등 유목민 세력에 대한 貶称|폄칭일본어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구(寇)"는 "외적"이라는 뜻으로, "구하다(寇す)" 즉 "침략하다"를 명사로 표현한 글자이다. 역사학자 가와조에 쇼지(川添昭二)는 이 표현이 에도 후기에 등장한 배경으로 아편전쟁에서 청(清)이 영국(イギリス帝国)에 패배한 것과 일본 근해에 서양 열강의 선박이 자주 출몰한 것을 들며, 당시 일본 지식인들 사이에서 "외이(外夷)"에 대한 "대외 의식"이 고양되어 과거 몽골의 침입에 대해서도 그러한 맥락에서 보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3. 배경

1231년부터 시작된 몽골의 고려 침입 이후, 고려몽골에 유리한 조약을 체결하고 속국이 되었다. 1260년 몽골 제국의 카안으로 즉위한 쿠빌라이 칸1264년 칸발릭(현재 베이징 안에 위치)에 수도를 세웠다.

당시 일본은 호조씨의 실권자(쇼군의 섭정)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들은 1203년 사망한 가마쿠라 막부의 쇼군 미나모토 요리이에와 결혼하여 권력을 장악했었다. 호조 씨의 핵심 인물들은 막부의 의회(評定|효조일본어), 교토의 궁정 또는 그들의 고켄인 봉신들과 더 이상 상의하지 않았고, 저택에서 비밀 회의(寄合|요리아이일본어)를 통해 결정을 내렸다.

몽골은 또한 1264년부터 1308년까지 사할린의 원주민인 아이누와 니브흐를 정복하려 시도했다.[3] 그러나 사할린에서의 몽골의 활동이 일본 침략 노력의 일부였는지는 의문이다.[4]

몽골 제국(원)·고려 연합군의 두 차례 일본 침공에 대해, 가마쿠라·무로마치 시대 일본 문헌에서는 '''몽골 습래''', '''이적 습래''', '''몽골 합전''', '''이국 합전''' 등으로 표기했다. 「이적(異賊)」이라는 명칭은 일본 이외의 외래 세력이 침입하는 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으며, 『하치만구도훈(八幡愚童訓)』 등 가마쿠라 시대 전후의 문헌에서는 도이(刀伊)의 입구(入寇)나 신공황후의 삼한정벌에도 사용되었다. 그 외에 「흉도(凶徒)」라는 명칭도 사용되었다. 또한, 1274년의 제1차 침공은 '''분영 합전(文永合戦)''', 1281년의 제2차 침공은 '''홍안 합전(弘安合戦)''' 등으로 표기되었다.

「원구(元寇)」라는 명칭은 에도 시대도쿠가와 미쓰쿠니가 편찬을 시작한 『대일본사(大日本史)』가 최초의 사례이다. 이후, 18세기의 나가무라 아카리 『몽골구기(蒙古寇紀)』, 고미야마 마사히데 『원구시말(元寇始末)』, 19세기의 오하시 토츠안 『원구기략(元寇紀略)』 등 「구(寇)」를 사용한 사서가 나타나 에도 시대 후기에는 원구라는 명칭이 일반화되었다.

; 「원(元)」

: 몽골 제국 제5대 황제 쿠빌라이 칸이 일본에 보낸 국서 서두에 "대몽골국 황제"라고 적혀 있는데, 이는 몽골 제국의 한어식 자칭인 "대몽골국" (몽골어 ''Yeke Monγol Ulus''의 번역)이 처음 등장한 것이다. 이러한 명칭은 1268년(문영 5년/지원 5년) 정월에 쿠빌라이의 명으로 고려에서 파견된 사자가 대재부(大宰府)에서 구두와 서면으로 "몽골"의 존재를 전달하면서 일본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심심원관백기(深心院関白記)』, 『간충기(勘仲記)』 등 당시 공가의 일기에서도 "몽골"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

: 1271년 12월 18일 (문영 8년/지원 8년), 쿠빌라이는 국호를 한어로 "대원(大元)" (몽골어로는 "대원대몽골국"(Dai-Ön Yeke Monγol Ulus))으로 개칭하지만, 가마쿠라 시대 일본에서는 "몽골"이라는 명칭이 일반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원(元)", "대원(大元)" 등의 명칭은 사용되지 않았다.

: 에도 시대에 들어서 『원사(元史)』 등의 한적(漢籍)이 수입되면서 명나라에서 원나라를 줄여 부르던 "원(元)"이라는 명칭, 그리고 쿠빌라이를 가리켜 "호주(胡主)", "호원(胡元)" 등 유목민 세력에 대한 폄칭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 「구(寇)」

: "구(寇)"는 "외적"이라는 뜻으로, "구하다(寇す)" 즉 "침략하다"를 명사로 표현한 글자이다.[78] 역사학자 가와조에 쇼지는 이 표현이 에도 후기에 등장한 배경으로 아편전쟁에서 청(清)이 영국에 패배한 것과 일본 근해에 서양 열강의 선박이 자주 출몰한 것을 들며, 당시 일본 지식인들 사이에서 "외이(外夷)"에 대한 "대외 의식"이 고양되어 과거 몽골의 침입에 대해서도 그러한 맥락에서 보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 막말(幕末)에 유행한 라이 산요의 『일본외사(日本外史)』에서는 홍안의 역에 대해 "원주(쿠빌라이)가 우리가 다시 사신을 죽였다는 것을 듣고, 곧 분노하여 크게 군선을 보내어 한(漢), 호(胡), 한(韓)의 군사 약 십만 명을 합쳐 범문호를 장수로 삼아 '''입구(入寇)'''하게 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1287년 쿠빌라이 정권에 반기를 든 나얀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은 쿠빌라이의 친정으로 진압되었으나, 이후 카치운가의 왕족 카다안이 봉기하는 등 혼란이 계속되었다. 한편, 베트남 북부의 쩐 왕조 대월국에서도 몽케 황제 시대 복속 이후, 원의 과도한 물자 징발에 항의하여 반란이 일어났다. 쿠빌라이는 대규모 군대를 파견했으나, 백등강 전투에서 패배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내란과 남방에서의 군사적 실패로 인해 일본 원정 계획은 당분간 중단되었다.

3. 1. 몽골 제국의 팽창과 고려 복속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몽골 고원 및 중국 대륙을 중심으로 동아시아북아시아를 지배하고 있던 몽골 제국1231년(간희 3년, 태종 3년)부터 고려 침공을 시작했다.[80] 1259년(정원 원년·몽케 9년), 반몽골 제국 급선봉인 무신 정권이 무너짐으로써 고려는 몽골 제국에 항복했다.

이듬해 1260년(문응 원년·중통 원년), 몽골 제국의 제5대 황제(대카안)에 즉위한 쿠빌라이 칸은 그동안 고려에 대한 무력 정압책을 회유책으로 방침을 변경했다. 고려에 대한 회유책 채택은 일본 침공에 고려를 협력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1272년(문영(文永) 9년/지원 9년) 고려 국왕 원종의 아들 왕세자 심(諶)(후의 충렬왕)이 원의 쿠빌라이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남아 있다. "일본은 아직 폐하의 성스러운 감화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명령을 내려 우리 군의 장비와 식량을 준비하게 하였습니다. 지금이 바로 전함과 군량을 사용해야 할 때입니다. 적지만 신인 저에게 맡겨주신다면, 힘껏 노력하여 황제의 군대를 조금이나마 도울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462]

조선 유성룡의 『징비록』에도 “옛날 고려가 원의 군대를 이끌고 일본을 공격했다”라고 적혀 있으며, 조선 시대에도 원의 일본 원정에 대한 고려의 주도적인 관여가 있었다는 인식이 있었다.[463]원사』에 따르면 고려 국왕 충렬왕은 홍안의 역 이후 “고려 국왕, 스스로 배 150척을 만들어 일본 정벌을 돕겠다.”라고 하며 150척의 군선을 직접 만들어 일본 원정을 지원하겠다고 쿠빌라이에게 상소하였다.[374]

고려는 몽골 제국의 침략 이전에는 무신이 왕을 꼭두각시로 삼아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원종, 충렬왕 이후의 고려 국왕은 몽골 제국의 병력을 빌려 왕권을 되찾았다. 그 이후 고려 왕은 대부분 몽골 제국에 의존하여 몽골식 이름을 받고, 몽골 제국 황제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여 황제인 쿠빌라이 왕가의 사위(구레겐)가 되는 인척 관계, 즉 “부마 고려국왕가”가 되었다.[464] 이처럼 몽골 제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충렬왕이 자신의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쿠빌라이의 뜻을 따르려고 이러한 발언을 했다는 견해가 있다.

3. 2. 쿠빌라이 칸의 일본 복속 시도

쿠빌라이 칸


쿠빌라이 칸의 사냥도


몽골 제국의 제5대 황제 쿠빌라이 칸1260년 카안으로 즉위하여, 1264년 칸발릭(현재 베이징 안에 위치)에 수도를 세웠다.[80]

1265년(문영(文永) 2년/지원 2년) 고려인 조이(趙彞)는 쿠빌라이에게 "일본은 고려의 이웃 나라이며, 제도와 법률, 정치가 칭찬할 만합니다. 또한 한(漢)·당(唐) 시대 이래로 사신을 파견하여 중국과 교류해 왔습니다."[93]라고 말하며 일본과의 교류를 건의하였다.[85] 이는 쿠빌라이가 일본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1272년(문영(文永) 9년/지원 9년) 고려 국왕 원종의 아들 왕세자 심(諶)(후의 충렬왕)은 원의 쿠빌라이에게 “일본은 아직 폐하의 성스러운 감화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명령을 내려 우리 군의 장비와 식량을 준비하게 하였습니다. 지금이 바로 전함과 군량을 사용해야 할 때입니다. 적지만 신인 저에게 맡겨주신다면, 힘껏 노력하여 황제의 군대를 조금이나마 도울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462]라고 아뢰었다.

조선 유성룡의 『징비록』에도 “옛날 고려가 원의 군대를 이끌고 일본을 공격했다”라고 적혀 있어, 조선 시대에도 원의 일본 원정에 고려가 주도적으로 관여했다는 인식이 있었다.[463]

원사』에 따르면 고려 국왕 충렬왕은 홍안의 역 이후 “고려 국왕, 스스로 배 150척을 만들어 일본 정벌을 돕겠다.”라고 하며 150척의 군선을 직접 만들어 일본 원정을 지원하겠다고 쿠빌라이에게 상소하였다.[374]

마르코 폴로의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서는 일본이 대양(오케아노스) 위 동쪽 섬나라로 소개되어 있으며, 쿠빌라이가 일본에 관심을 가진 것은 일본의 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흥미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 "지팡구(일본)는 동쪽의 섬으로, 대양 속에 있다. 대륙에서 1500마일(약 2,250km) 떨어진 큰 섬으로, 주민들은 피부색이 희고 예의 바르다. 또한, 우상숭배자이다. 섬에서는 금이 발견되므로, 그들은 무한정 금을 소유하고 있다. (중략) 자, 쿠빌라이 칸은 이 섬의 풍요로움을 듣고 이것을 정복하려고 생각하여, 두 명의 장군에게 수많은 배와 기병과 보병을 붙여 파견했다." [87][88]

한편, 쿠빌라이는 일본에 사절을 파견하는 것과 동시에 "짐은, 송(남송)과 일본을 치고자 할 뿐이다."[91]라고 명확히 언급했으며, 고려에 군선 건조를 명령하며 "혹은 남송, 혹은 일본, 명령에 거역하면 정벌한다."[92]라고 말하는 등, 남송 정복과 마찬가지로 일본 정복 의지를 표명했다.

3. 3. 몽골의 사할린 침공

몽골은 1264년부터 1308년까지 사할린의 원주민인 아이누와 니브흐를 정복하려 시도했다.[3] 그러나 사할린에서의 몽골의 활동이 일본 침략 노력의 일부였는지는 의문이다.[4]

4. 외교적 접촉과 갈등



몽골 고원 및 중국 대륙을 중심으로 동아시아북아시아를 지배하고 있던 몽골 제국1231년부터 고려 침공을 시작하여, 1259년 고려는 몽골 제국에 항복했다.

1260년 몽골 제국의 제5대 황제(카안)에 즉위한 쿠빌라이 칸은 고려에 대한 정책을 무력에서 회유책으로 변경하는데,[80] 이는 일본 침공에 고려를 협력시키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여겨진다.[80]

1266년 쿠빌라이는 일본에 보낼 국서인 「'''대몽고국황제봉서'''」를 작성하고, 정사·병부시랑 히즐(흑적)과 부사·례부시랑 인홍 등의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했다.[85] 이들은 고려를 거쳐 고려인에게 일본으로 안내받을 예정이었다.[93] 11월 히즐(흑적) 등은 고려에 도착하여 고려 국왕 원종에게 일본과의 중재를 명령했고, 고려인 추밀원부사 송군비와 시어사 김찬 등이 안내역으로 임명되었다.[93][94] 그러나 고려는 몽골 제국의 일본 침공에 대한 군사비 부담을 우려했다.[95] 이듬해 송군비 등 고려인은 히즐(흑적) 등 사절단을 거제도까지 안내한 후, 대마도를 바라보며 항해가 위험하고, 대마도의 일본인은 완고하고 예의를 모른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일본 진출은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96] 이에 따라 사절단은 고려 관리와 함께 쿠빌라이에게 귀국했다.[97]

쿠빌라이는 원종에게 국서 전달을 엄명했고,[98] 원종이 충성을 맹세했음에도[97] 사절단을 일본에 보내지 않은 것에 분개하여, 고려가 직접 일본에 사절을 파견하여 답변을 얻어오도록 원종에게 명령했다.[99] 원종은 이 명령에 따라 측근인 기거사인 반부 등을 일본에 파견했다.[99][100]

1279년 쿠빌라이는 범문호의 제안으로 다시 사절단을 파견했으나, 주복 등이 포함된 사절단은 하카타에서 참수되었다.[271] 1284년 쿠빌라이는 왕적옹(王積翁) 등을 포함한 사절단을 파견했으나, 쓰시마에서 선원들이 왕적옹을 살해하여 실패했다.[399][414] 1292년 쿠빌라이의 중신 연공남(燕公楠)은 일본 국왕에게 보내는 서한을 일본 측에 전달했다.[417][418][419]

문영의 왜구 이후 사자 살해는 스파이 행위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八幡愚童訓』에는 몽골 사신이 첩보 행위를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471] 懐良親王은 趙良弼이 일본 침략을 위한 스파이 행위를 했다고 인식했다.[472]元史』에서도 趙良弼이 정보 수집을 하고 쿠빌라이에게 보고했으나,[143] 일본 침공에는 반대했다.[144]

4. 1. 몽골의 외교 사절 파견

1266년부터 1273년까지, 몽골과 고려는 일본에 6차례 사신을 파견하여 몽골에 굴복할 것을 요구했지만, 일본은 이를 무시했다.[5][6]

1265년, 고려인 조의(趙彝)는 쿠빌라이에게 몽골이 일본을 속국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건의했다.[85] 쿠빌라이는 이에 동의하여 흑축(黑竹)과 은홍(殷洪)을 사신으로 임명하고, 고려 원종에게 사신을 동행시킬 것을 명령했다. 원종은 손균비(孫均比)와 김찬(金磾)을 동행시켰으나, 폭풍으로 인해 몽골 사신들을 원(元) 조정으로 돌려보냈다. 쿠빌라이는 원종에게 다시 몽골 사신을 일본으로 보내라고 명령했다. 고려 신하 이장용(李長勇)은 몽골의 일본 정벌 계획을 만류하려 했다. 쿠빌라이는 김준(金俊)을 원 조정으로 데려오라고 요구했으나, 김준은 사신을 죽였다. 원종은 김준을 처벌하지 못했고, 김준은 왕에게 불경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원종을 싫어하던 관리 임연(任衍)은 김준을 죽였다.

몽골과 고려 사신들은 일본 수도에서 무례한 대접을 받고 5개월간 열악한 환경에 머물다 돌아갔다. 쿠빌라이는 사신들이 무례하게 대우받은 것을 믿을 수 없어, 1268년 흑축을 다시 일본으로 보냈으나, 일본은 편지를 거부했다.

1266년 8월, 쿠빌라이 칸이 보낸 "대몽골국" 국서. "일본국왕"에게 보낸 편지로 도다이지에 보관되어 있다.


쿠빌라이 칸이 일본 국왕에게 보낸 국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269년 초, 고려인과 몽골인 70명으로 구성된 사절단이 쓰시마에 도착하여 칸의 편지에 대한 답변을 요구했다. 가마쿠라 막부는 몽골의 요구를 거부하는 편지를 작성했지만 전달하지 않았다.

1270년 말, 쿠빌라이는 조량비(趙良弼)가 이끄는 마지막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했다. 1271년 일본에 도착한 사절단은 공격을 받고 "일본 국왕" 방문을 거부당한 채, 1273년까지 답변을 기다리다 돌아갔다. 조량비는 쿠빌라이에게 일본 공격에 반대하는 조언을 했다.

일본은 1268년 두 번째 사절단의 편지를 침략 징조로 받아들여 규슈(九州)의 방어를 강화했다.[5]

1275년, 쿠빌라이는 두세충을 정사로 하는 사절단을 파견했다.[261][262] 나가토국 무쓰에 도착한 사절단은 호조 시무네에 의해 에노시마 부근에서 참수되었다.[262]

전·원사총(일본인 건립). 몽골인 사절 두세충 등의 위령탑.


두세충은 다음과 같은 사망시의 시를 남겼다.

1279년, 쿠빌라이는 범문호의 제안으로 다시 사절단을 파견했다.[270] 주복 등이 포함된 사절단은 하카타에서 참수되었다.[271]

1284년, 쿠빌라이는 왕적옹(王積翁) 등을 포함한 사절단을 파견했으나, 쓰시마에서 선원들이 왕적옹을 살해하여 실패했다.[399][414]

1292년, 쿠빌라이의 중신 연공남(燕公楠)은 일본 국왕에게 보내는 서한을 일본 측에 전달했다.[417][418][419] 같은 해, 고려 충렬왕(忠烈王)은 김유성(金有成) 등을 일본에 파견했다.[420] 김유성은 일본에서 15년 가까이 생존했다.[422]

1299년, 테무르(鐵穆耳)는 일산일녕(一山一寧)을 정사(正使)로 삼아 일본에 파견했다.[427] 일산일녕은 일본에서 사망했다.

문영의 왜구 이후 사자 살해는 스파이 행위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八幡愚童訓』에는 몽골 사신이 첩보 행위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471] 懐良親王은 趙良弼이 일본 침략을 위한 스파이 행위를 했다고 인식했다.[472]元史』에서도 趙良弼이 정보 수집을 하고 쿠빌라이에게 보고했다.[143] 다만, 조량필은 일본 침공에 반대했다.[144]

4. 2. 가마쿠라 막부의 대응

1266년부터 1273년까지, 몽골과 고려는 일본에 6차례나 사신을 보내 몽골에 굴복할 것을 요구했지만, 일본은 이를 무시했다.[5][6]

1265년, 고려인 조의(趙彝)는 쿠빌라이에게 몽골이 일본을 속국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건의했고, 쿠빌라이는 이를 받아들여 흑축(黑竹)과 은홍(殷洪)을 사신으로 임명했다. 이들은 고려 원종에게 사신을 함께 보낼 것을 요청했고, 원종은 신하 손균비(孫均比)와 김찬(金磾)을 동행시켰다. 그러나 출발 시 폭풍을 만나 사신들은 원나라로 돌아갔다. 쿠빌라이는 다시 흑축을 보내 원종에게 몽골 사신을 일본으로 보내라고 명령했다. 고려 신하 이장용(李長勇)은 몽골의 일본 정벌 계획을 만류하려 했다. 쿠빌라이는 장군 우야손달(烏也孫達)을 보내 이장용과 김준(金俊)을 원나라로 데려오게 했다. 김준은 우야손달을 죽였고, 원종은 김준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김준과 그의 가족은 왕에게 불경을 저지르기 시작했고, 원종과 김준을 싫어하는 관리 임연(任衍)은 그를 궁정으로 소환하여 죽였다.

몽골과 고려 사신들은 일본 수도에 도착했지만 무례한 대접을 받고 성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그들은 도시 서쪽 성문 밖 타자부(T'ă-jă-bu)에 머물며 5개월간 열악한 환경 속에 있다가 돌아갔다. 쿠빌라이는 사신들이 무례하게 대우받은 것을 믿을 수 없어 흑축을 고려 사신 심사준(沈思俊)과 함께 다시 일본으로 보냈다. 사신들은 1268년까지 돌아오지 않았지만, 결국 일본이 편지를 거부한 후 떠났다.

1269년 초, 70명의 고려인과 몽골인으로 구성된 사절단이 쓰시마에 도착하여 칸의 편지에 대한 답변을 요구했다. 가마쿠라 막부는 몽골의 요구를 거부하는 편지를 작성했지만 전달하지 않았다.

1270년 말, 쿠빌라이는 조량비(趙良弼)가 이끄는 24명의 서기관으로 구성된 마지막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했다. 1271년 일본에 도착한 그들은 "일본 국왕"을 방문하는 것을 거부당하고 편지를 전달하지 못한 채 돌아갔다. 조량비는 1273년까지 답변을 기다린 후 중국으로 돌아가 쿠빌라이에게 일본 공격을 반대하는 조언을 했다.

일본은 1268년 두 번째 외교 사절단이 가져온 편지를 침략의 징조로 받아들였다. 신사와 불교 사찰은 외국군 격퇴를 기원했고, 중앙 정부는 규슈(九州)의 방어를 강화하는 데 집중했다.[5]

1275년(겐치 원년·지원 12년) 2월, 쿠빌라이는 일본 재침공을 준비하며 몽골인 예부시랑 두세충을 정사, 당인 병부시랑 하문저를 부사로 하는 사절단을 파견했다.[261][262] 이들은 나가토국 무쓰에 도착했지만, 섭정 호조 시무네는 사절단을 가마쿠라로 연행하여 룡노구 형장(에노시마 부근)에서 두세충 이하 5명을 참수했다.[262]

예율희량의 건의로 일본 침공 계획이 연기된 후, 1279년(홍안 2년/지원 16년) 쿠빌라이는 다시 일본 침공을 계획하며 범문호의 제안에 따라 주복, 련충을 원나라 사신으로 파견했다.[270] 이들은 남송의 옛 신하였던 범문호의 입장을 이용하여 일본에 에 복속할 것을 권유했다.[272] 그러나 일본 측은 하카타에서 주복 등 사절단 일행을 참수했다.[271]

1284년(弘安 7년/至元 21년) 10월, 쿠빌라이는 정사 왕적옹(王積翁)과 보타산(補陀禅寺)의 장로 여지(如智) 등을 포함한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했지만,[414] 쓰시마에서 선원들이 왕적옹을 살해하여 실패했다.[399][414]

1292년(정응 5년, 지원 29년) 고려 충렬왕은 쿠빌라이의 명을 받아 고려인 김유성(金有成)을 정사로, 곽린(郭鱗) 등을 일본에 파견했다.[420] 김유성 일행은 가마쿠라로 연행되었고,[421] 김유성은 1307년까지 일본에서 생존했다.[422]

1299년(정안(正安) 원년·대덕(大徳) 3년), 테무르는 승려 일산일녕을 정사로 삼아 일본에 파견했다.[427] 일산일녕 등은 가마쿠라 막부 9대 섭정 호조 사다토키의 명령으로 가마쿠라로 연행되어 이즈 국 슈젠지(修禅寺)에 머물렀다.[428] 일산일녕은 일본에서 고승으로 대우받았고, 겐초지 주지, 남선사 3세가 되는 등 활동하다 1317년 일본에서 사망했다.

문영의 왜구 이후 사자 살해는 스파이 행위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팔만우동훈』에는 사자들이 쓰쿠시(筑紫) 땅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했다는 기록이 있다.[471] 1370년 명나라 사신 조질(趙秩)에 대해 회량친왕은 趙良弼(조량필)이 일본 침략을 위한 스파이 행위를 했다고 인식했다.[472] 『元史(원사)』에서도 趙良弼(조량필)은 1년 가까이 太宰府(다자이후)에 머물며 정보 수집을 하고 쿠빌라이에게 보고했다.[143]

4. 3. 삼별초의 난과 일본의 연관성

1231년 몽골 제국고려 침공을 시작하여, 1259년에는 반몽골 제국 급선봉인 무신 정권이 무너지고 고려는 몽골에 항복했다.

1260년 쿠빌라이 칸은 고려에 대한 무력 정압책을 회유책으로 변경했는데[80], 이는 일본 침공에 고려를 협력시키기 위한 목적이었다.[80]

1266년 쿠빌라이는 「'''대몽고국황제봉서'''」를 작성, 정사·병부시랑 히즐(흑적)과 부사·례부시랑 인홍 등의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했다.[85] 이들은 고려인을 통해 일본으로 안내받을 예정이었다.[93]

11월, 사절단은 고려에 도착, 원종에게 일본과의 중재를 명령했고, 고려인 추밀원부사 송군비와 시어사 김찬 등이 안내역으로 임명되었다.[93][94] 그러나 고려는 몽골의 일본 침공에 따른 군사비 부담을 우려했다.[95] 이듬해 송군비 등은 사절단을 거제도까지 안내한 후, 대마도를 바라보며 항해의 위험성과 대마도 일본인의 완고함을 이유로 들어 일본 진출의 무익함을 주장했다.[96] 결국 사절단은 고려 관리와 함께 쿠빌라이에게 돌아갔다.[97]

쿠빌라이는 원종에게 국서 전달을 엄명했고,[98] 원종 또한 충성을 맹세했음에도[97] 사절단을 일본에 보내지 않은 것에 분개했다. 쿠빌라이는 고려가 직접 일본에 사절을 파견하여 답변을 얻어오도록 원종에게 명령했고,[99] 원종은 측근인 기거사인 반부 등을 일본에 파견했다.[99][100]

5. 제1차 원정 (1274년, 문영의 역)

1268년 (문영 5년/지원 5년) 정월, 고려의 사절단이 다자이후에 도착했다.[101] 다자이후의 진제봉행인 쇼니 스케요시는 '''대몽골국 황제 봉서'''(일본측 명칭: '''몽골국 첩장''')와 고려 국왕 서장[102], 사절단 대표 반부의 덧붙인 글 3통을 받아 가마쿠라로 보냈다.[101] 당시 국정은 외교는 조정의 담당이었기 때문에, 막부는 조정에 국서를 보냈다.[101] 조정과 막부의 중개 역할을 맡은 관동신차인 사이온지 사네우지는 막부로부터 국서를 받자, 고사가 상황에게 "이국(異國)의 일"이라며 제출했다.[104] 몽골 국서에 대한 조정의 평정은 매일 계속되었다.[104]

막부에서는 몽골인이 흉심을 품고 일본을 노리고 있으며, 곧 첩자를 파견해 왔다고 하여, 몽골군의 침략에 대비하여 고케닌들에게 주의를 당부했다.[105] 가마쿠라에는 남송에서 온 선승들이 있었는데, 이들의 진언이나, 대륙에서의 몽골 제국의 폭정 등에 대한 보고도 있었다고 한다.[106]

일본 측의 반응이 없었기 때문에, 대재부 도착 후 7개월 만에 사절단은 고려로 돌아갔고, 고려는 쿠빌라이 칸에게 사절 실패 사실을 보고했다.[107]

1268년 (문영 5년/지원 5년) 5월, 쿠빌라이 칸은 사절단의 귀환을 기다리지 않고 "짐은, 송(남송)과 일본을 치고자 할 뿐이다"라고 일본 정복 의지를 표명하고, 고려에 전함 1,000척의 건조를 명령했다.[91] 같은 해 10월, 쿠빌라이는 고려에 군병 10,000명과 전함 1,000척의 군비를 갖추면 "혹은 남송, 혹은 일본, 명에 거역하면 정벌한다"라고 말했고, 몽골 제국 관리를 고려에 파견하여 조선반도의 흑산도에서 일본 침공 루트를 조사하게 했다.[92]

1274년 11월, 제1차 일본 침략이 시작되었다. 원나라의 훈둔과 고려의 김방경이 지휘하는 4만 명의 군대가 900척의 함선을 이끌고 고려를 출발했다.[478] 10월 5일 쓰시마를, 10월 14일 이키를 습격했다.[478]

원나라 침략군은 1274년 11월 2일(중국력 동월 5일) 합포(合浦, 현재 대한민국 경상남도 마산시)에서 출발했다.[9][10][11] 이틀 후, 쓰시마섬에 상륙하기 시작했다. 주요 상륙 지점은 쓰시마 남쪽 섬인 시모노의 북서쪽 끝에 있는 사스우라 근처의 코모다 해변이었다. 쓰시마 두 섬 사이의 해협과 카미노 북쪽 섬의 두 지점에도 추가 상륙이 이루어졌다.

지토 ''지토다이''인 소 스케쿠니는 80명의 기마 사무라이와 그들의 수행원을 이끌고 침략군과 맞섰다. 몽골군은 11월 4일 새벽 2시에 상륙하여 일본 측의 협상 시도를 무시하고, 궁수들로 사격을 가하며 일본군의 후퇴를 강요했다. 전투는 새벽 4시에 시작되었다. 소규모 주둔군은 빠르게 패배했지만, 스케사다라는 한 사무라이가 1대 1 전투에서 적군 25명을 베었다고 한다. 침략자들은 해질 무렵 마지막 일본 기병대의 돌격을 물리쳤다. 코모다에서 승리한 후, 원군은 사스우라 주변의 대부분 건물을 불태우고 대부분의 주민들을 학살했다.

원나라 함대는 11월 13일 쓰시마를 출발하여 이키섬을 공격했다. 쓰시마의 스케쿠니와 마찬가지로, 이키의 지사 다이라노 카게타카는 100명의 사무라이와 현지 무장 주민들과 함께 용감하게 방어했지만 밤이 되자 성으로 후퇴했다. 다음날 아침, 원나라군은 성을 포위했다. 패배가 불가피함을 알게 된 카게타카는 사무라이 소자부로와 함께 딸을 비밀 통로를 통해 해안으로 보냈고, 거기서 배를 타고 본토로 향했다. 몽골 궁수들이 그들을 발견하고 배에 화살을 쏘았다. 카게타카의 딸은 죽었지만, 소자부로는 博多湾에 도착하여 이키의 패배를 보고했다.

카게타카는 36명의 병사와 함께 마지막으로 돌격했으나 실패했고, 그중 30명이 전투에서 사망했다. 그는 가족과 함께 자살했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몽골군은 살아남은 여성들을 제압하고 칼로 손바닥을 찔렀으며, 옷을 벗긴 후 시체를 배 옆에 묶어 항복하지 않으면 어떤 운명을 맞게 될지 다른 일본인들에게 보여주었다고 한다.

1274년 11월, 훈둔이 이끄는 원나라군과 김방경이 이끄는 고려군 연합군은 9백 척의 함선에 4만 명의 군사를 싣고 하카타 항에 도착했다. 이들은 히라도, 다카시마마쓰우라 본거지를 전멸시켰다.[478]

원나라 함대는 11월 19일 규슈의 옛 행정 수도였던 다자이후에서 가까운 하카타 만에 상륙했다. 다음 날, '분에이의 역' 또는 '하카타 만 제1차 전투'로 알려진 전투가 벌어졌다. 일본군은 몽골군의 전술에 당황했다. 원군은 방패로 보호받으며 밀집 대형을 유지한 채 상륙하여 진격했고, 빈틈없이 밀집하여 장창을 휘둘렀다. 진격하면서 종이와 철제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군의 말을 놀라게 했다. 밤이 되자 원군 침략군은 방어군 3분의 1을 죽이고 해변에서 일본군을 몇 킬로미터나 내륙으로 몰아낸 후 하카타를 불태웠다.

일본군은 미즈키 성에서 최후의 항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원군의 공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원군의 지휘관 중 한 명인 유복향은 쇼니 카게스케에게 얼굴에 총을 맞아 중상을 입었다. 유복향은 홀돈, 홍다구와 함께 배로 돌아갔고, 홍다구의 의견에 따라 원군을 배로 돌려보냈다.

태풍으로 인해 지속적인 피해를 보았고,[478] 강남군의 지연 도착으로 군사 작전에 큰 차질이 생겨 다음날 퇴각하였다.[477] 7월 30일 심야, 태풍이 덮쳐 원나라 군선 대부분이 침몰하거나 파손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67][362][334]

바다에 잠기는 원나라 군선. 葛飾為斎 그림


원나라 군대는 태풍 다음 날 수도 대도에 상황을 알리기 위해 마하마드(馬馬)를 급파했다.[55] 윤7월 9일, 일본군은 포로 2만~3만 명을 팔각도(하카타?)로 연행한다.[76]원사』에 따르면, 일본군은 몽골인과 고려인, 그리고 한인 포로는 살해했지만, 교류가 있었던 옛 남송인 포로는 목숨을 살려 노예로 삼았다고 한다.[76]

원나라 군대 중 귀환할 수 있었던 병사는 『원사』에서 전군의 1~4할 정도로 차이를 보인다.[70][71][72][73] 원나라 군대 14만~15만6989명 중 1~4할이었다면 귀환자 수는 약 1만4000~6만2796명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군 및 동로군 수부의 귀환자는 2만6989명 중 1만9397명이었다.[64][75] 이 전투로 원나라 군대의 해군 전력의 2/3 이상이 손실되었고, 남은 군선도 상당수가 파손되었다.

5. 1. 원정 준비

고려가 몽골에 굴복한 후, 1268년에 쿠빌라이 칸은 고려를 통해 일본에 사절을 보내 통교를 제안하고 조공을 요구했다. 그러나 당시 집권이었던 호조 도키무네는 이를 거부하고 답신을 보내지 않았다. 몽골은 이후에도 계속 사절을 보냈지만, 막부는 몽골의 요구를 무시했다.[477]

결국 몽골은 고려를 압박하여 원정을 준비하게 했고, 1274년 11월에 1차 일본 침략을 감행했다. 고려는 막대한 비용이 드는 원정에 반대할 수 없었다. 원나라의 훈둔과 고려의 김방경이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900척의 함선에 4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고려를 출발했다. 이들은 10월 5일에 쓰시마, 10월 14일에 이키를 공격하고 규슈하카타 항에 도착, 히라도·다카시마의 마쓰우라 근거지를 전멸시켰다. 그러나 전투 중 태풍으로 큰 피해를 입었고,[478] 강남군의 도착 지연으로 작전에 차질이 생겨 다음날 퇴각했다. 이는 개국을 위한 1차 군사적 압박이 주 목적이었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쓰시마에서 전사한 몽골 병사를 발 아래 두고 있는 두 명의 사무라이. 오른쪽의 인물은 쓰시마 방어 사령관인 소 스케쿠니일 가능성이 높다. 쓰시마 사스우라의 고모다하마 신사에 있는 기원 그림(''에마'')


1274년 4월, 원은 홀돈과 홍다구에게 1만 5천 명을 동원하여 일본 침략을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고려 장군 김방경은 3만 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남중국식 배를 건조했다. 쿠빌라이의 배 건조를 도왔던 산둥 출신 기공지는 고려로 파견되었다가 남송 정벌을 위해 향양으로 보내졌다. 건조된 배는 세 종류로, 1,000석급 대형 선박 300척, 빠른 배인 바투루(발투루) 300척, 수송선 300척이었다. 홍다구는 대형 수송선, 차구는 바투루 건조를 감독했다. 고려는 인력, 자재, 건조 비용을 부담하며 이에 항의했지만, 건조는 1274년 7월 5일에 완료되었다. 침략 함대는 1274년 7월(음력)에 출발 예정이었으나, 원종의 서거와 홀돈, 유복행의 지각으로 3개월 지연되어 9월에 출발했다.

쿠빌라이는 함대가 먼저 쓰시마섬이키섬을 공격한 후 하카타 만에 상륙할 계획이었다. 일본은 고케닌을 동원하여 저항하려 했고, 양측 모두 상대 병력을 과장했다. 『원사』는 일본군을 10만 2천 명으로 기록했지만, 실제 일본군 규모는 4,000~6,000명 정도로 추정된다. 원의 침략군은 1만 5천 명의 몽골, 한족, 여진족 병사와 6,000~8,000명의 고려군, 7,000명의 고려 선원으로 구성되었다.

일본에서 널리 알려진 이야기에 따르면, 가마쿠라에서 도키무네는 침략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무가쿠소겐 선사에게 조언을 구했다. 무가쿠소겐은 명상을 통해 두려움의 근원을 찾으라고 조언했고, 도키무네는 "가쓰!"라고 외치며 용기를 얻었다. 이후 도키무네는 사무라이들 사이에서 선종무사도를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268년 정월, 고려 사절단이 다자이후에 도착했다.[101]

다자이후의 진제봉행인 쇼니 스케요시는 '''대몽골국 황제 봉서'''(일본측 명칭: '''몽골국 첩장''')와 고려 국왕 서장[102], 사절단 대표 반부의 덧붙인 글 3통을 받아 가마쿠라로 보냈다.[101] 가마쿠라 막부에서는 이 해 3월에 호조 도키무네가 8대 집권에 취임했다.[103]

당시 외교는 조정의 담당이었기에 막부는 조정에 국서를 보냈다.[101] 조정과 막부의 중개 역할을 맡은 관동신차 사이온지 사네우지는 막부로부터 국서를 받아 고사가 상황에게 "이국(異國)의 일"이라며 제출했다.[104] 몽골 국서에 대한 조정의 평정|일본어은 매일 계속되었다.[104]

막부는 몽골이 일본을 노리고 첩자를 파견했다고 판단, 몽골군의 침략에 대비하여 고케닌들에게 주의를 당부했다.[105] 가마쿠라에는 남송 출신 선승들이 있었는데, 이들의 진언과 대륙에서의 몽골 제국 폭정 보고도 있었다고 한다.[106]

일본 측의 반응이 없자, 사절단은 7개월 만에 고려로 돌아갔고, 고려는 쿠빌라이 칸에게 사절 실패를 보고했다.[107]

1268년 5월, 쿠빌라이는 "짐은, 송(남송)과 일본을 치고자 할 뿐이다"라며 일본 정복 의지를 표명하고, 고려에 전함 1,000척|일본어 건조를 명령했다.[91] 10월에는 군병 10,000과 전함 1,000척의 군비가 갖춰지면 "혹은 남송, 혹은 일본, 명에 거역하면 정벌한다"라고 말하며, 몽골 제국 관리를 고려에 파견하여 흑산도에서 일본 침공 루트를 조사하게 했다.[92]

같은 해, 제2대 황제 오고타이 이래의 숙원이었던 남송 침공을 개시했다. 1273년에 남송의 상양·번성이 함락될 때까지 격전이 벌어졌다.

대몽골국 황제 봉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원·고려 연합군의 침공을 격퇴한 가마쿠라 막부는 고려를 침공하여 역습할 것을 계획했다.[248][249][250] 고려 출병 계획은 원의 재침에 대비하기 위한 석축지(원구방루) 축조와 동시에 진행되었고, 고려 출병에 동원되는 자를 제외한 진제이 사람들이 석축지 축조에 종사하게 되었다.[251]

막부는 1276년 3월에 고려 출병을 명확히 하고, 쇼니 쓰네스케를 중심으로 진제이 여러 국에 동원령을 내려 하카타에 군사와 선박을 집결시켰다.[252]

배의 노를 젓는 사람인 갑수(かんどり)와 수수(かこ)는 진제이 여러 국을 중심으로 소집되었고, 부족한 경우 산인·산요·난카이 각 도에서도 소집하도록 고케닌에게 명령했다.[252] 막부는 동원을 독촉한 무사에게 수수, 갑수 등의 연령과 동원 수, 병기, 선박 수 등을 보고하게 하고, 도망자에게는 엄벌을 내리는 등 출병 준비를 진행했지만,[253][254][255][256][257][258] 갑자기 출병 계획은 중지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불명이나, 석축지 축조에 막대한 비용과 인원이 필요했던 것과 군선 부족 등의 이유로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고 한다.[259]

막부는 이국경고번역을 강화하고, 규슈의 고케닌에게 원군의 재침에 대비하여 규슈 연안 경비를 맡겼다.[260] 이국경고번역은 3개월 교대로 춘하추동으로 나누어, 봄은 지쿠젠·히고국, 여름은 히젠·분젠국, 가을은 분고·지쿠고국, 겨울은 휴가·오스미·사쓰마국 등의 규슈 고케닌이 담당했다.[260]

쿠빌라이는 두세충 등 사절단의 귀환을 기다리는 한편, 출병 준비를 시작했다.

  • 1279년 2월, 쿠빌라이는 양주, 호남, 감주, 취주 4성에서 일본 침공용 전함 600척 건조를 명령한다.[274] 그중 200척의 건조를 아랍계 이슬람교도인 색목인·포수경에게 명령했다.[275]
  • 같은 해 5월, 쿠빌라이는 제주도에서 군선 건조용 목재 3,000척 분을 공출하게 하고,[276] 6월에는 900척의 건조를 고려에 명령했다.[69]

그러나 건조는 원활하지 않았고, 200척 건조를 명령받은 포수경은 쿠빌라이에게 "칙령에 따라 해선 200척을 건조해야 하지만, 현재 완성된 배는 50척뿐입니다. 백성들이 매우 고통받고 있습니다"라며 백성들의 피폐함을 상소했다.[275] 이에 쿠빌라이는 포수경에게 명령했던 200척의 건조를 중지시켰다.[275]

이처럼 조선(造船)으로 인해 강남 지방 백성들이 피폐해지는 가운데, 쿠빌라이의 일본 침공을 만류하는 자들이 속출했다. 자거정은 백성들의 피폐함이 난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쿠빌라이에게 일본 침공 중단을 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77] 서세륭도 정중하게 일본 침공을 간언했으나 마찬가지였다.[278]

중신인 앙기르도 쿠빌라이에게 다음과 같이 간언했다.

: 앙기르 "신(앙기르)은 군병은 사기가 중요하다고 들었습니다. 상하가 같은 것을 원하면 이깁니다. 그러나 이들(일본 침공군)은 계속된 정벌로 자주 출혈을 강요당하고 있으며, 여기서 사기를 고려하지 않으면 천하는 소란해지고, 징발을 하면 상하는 원망할 것입니다. 이는 같은 것을 원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병사를 멈추고 백성을 쉬게 해주십시오."[279]

그러나 앙기르의 간언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79] 노신인 왕반도 자거정, 앙기르와 다른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간언했다.

: 왕반 "일본은 작고 외진 나라이며, 해도는 험하고 멉니다. 이겨도 큰 무공이 되지 않고, 이기지 못하면 위엄을 손상시킵니다. 신이 생각건대 정벌해서는 안 됩니다."[280]

이 간언에 쿠빌라이는 격노했으나, 나라를 걱정하는 왕반의 마음을 헤아려 다음 날 왕반에게 사자를 보내 위로했다고 한다.[280]

  • 같은 해 8월, 도망친 수부로부터 두세충 등의 처형이 고려에 알려지자, 고려는 즉시 쿠빌라이에게 보고하는 사자를 파견했다.[281] 원에 사절단의 처형이 전해지자, 동정도원수인 힌두·홍차구는 즉시 병사를 이끌고 일본에 출병할 것을 청했으나, 조정에서는 함부로 움직이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282]
  • 1280년경, 쿠빌라이는 일본 침공군의 사령부·일본행성을 설치한다.[283]
  • 1281년 2월, 쿠빌라이는 침공에 앞서 수도·대도에 일본 침공군의 사령관인 아라칸, 범문호, 힌두, 홍차구 등 여러 장수를 소집하여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 쿠빌라이 "처음에는 일본 사자가 온 것에 의해, 이쪽 조정에서도 사자를 보냈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우리 사자를 붙잡아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러므로 경들로 하여금 이번 원정을 하게 한 것이다. 내가 한인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남의 나라를 빼앗는 것은 백성과 땅을 얻고 싶어서이다'라고 한다. 만약 일본 백성을 모두 죽인다면, 쓸데없이 땅을 얻어도 일본 땅은 무엇에 쓸 수 있겠는가. 또 하나 내가 정말로 걱정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경들이 서로 협력하지 않는 것만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일본 사람이 경들에게 와서 협의할 일이 있다면, 마음을 합치고 생각을 맞춰 답이 하나의 입에서 나오도록 하라."[284]

  • 5월 3일, 동정도원수이자 흔두(忻都, 힌두)와 홍차구(洪茶丘)가 이끄는 몽골인과 한인 등으로 구성된 몽골·한족군 3만 명과 정일본도원수인 금방경(金方慶)이 이끄는 고려군 약 1만 명(실제 9,960명)으로 이루어진 동로군 900척이 고려 국왕 충렬왕의 사열을 받은 후, 조선반도 합포(合浦)에서 출항하였다.[291][292]

5. 2. 쓰시마, 이키 침공

1268년(문영 5년/지원 5년) 정월, 고려의 사절단이 대재부에 도착했다.[101] 진제봉행 쇼니 스케요시는 '''대몽골국 황제 봉서'''(일본측 명칭: '''몽골국 첩장''')와 고려 국왕 서장[102], 사절단 대표인 반부의 덧붙인 글 3통을 받아 가마쿠라로 보냈다.[101] 가마쿠라 막부에서는 이 해 3월에 호조 도키무네가 8대 집권에 취임한 참이었다.[103]

당시 국정은 외교는 조정의 담당이었기 때문에, 막부는 조정에 국서를 보냈다.[101] 조정과 막부의 중개 역할을 맡은 관동신차인 사이온지 사네우지는 막부로부터 국서를 받자, 고사가 상황에게 "이국(異國)의 일"이라며 제출했다.[104] 몽골 국서에 대한 조정의 평정(評定)은 매일 계속되었다.[104]

막부에서는 몽골인이 흉심을 품고 본조(日本)를 노리고 있으며, 곧 첩사를 파견해 왔다고 하여, 몽골군의 침략에 대비하여 주의하도록 고케닌들에게 통달했다.[105] 가마쿠라에는 남송에서 선승이 와 있었는데, 이들 남송 승려들의 진언이나, 대륙에서의 몽골 제국의 폭정 등의 보고도 있었다고 한다.[106]

일본 측의 반응이 없었기 때문에, 대재부 도착 후 7개월 만에 사절단은 고려로 돌아갔고, 고려는 사절 실패의 사실을 쿠빌라이에게 보고했다.[107]

같은 1268년(문영 5년/지원 5년) 5월, 쿠빌라이는 사절단의 귀환을 기다리지 않고 "짐은, 송(남송)과 일본을 치고자 할 뿐이다"라고 일본 정복 의지를 표명하고, 고려에 전함 1,000척의 건조를 명령했다.[91]

1274년 11월, 제1차 일본 침략이 시작되었다. 원나라의 훈둔과 고려의 김방경이 지휘하는 4만 명의 군대가 900척의 함선을 이끌고 고려를 출발했다.[478] 10월 5일 쓰시마를, 10월 14일 이키를 습격했다.[478]

원나라 침략군은 1274년 11월 2일(중국력 동월 5일) 합포(合浦, 현재 대한민국 경상남도 마산)에서 출발했다.[9][10][11] 이틀 후, 그들은 쓰시마섬에 상륙하기 시작했다. 주요 상륙 지점은 쓰시마 남쪽 섬인 시모노의 북서쪽 끝에 있는 사스우라 근처의 코모다 해변이었다. 쓰시마 두 섬 사이의 해협과 카미노 북쪽 섬의 두 지점에도 추가 상륙이 이루어졌다.

부지사(지토 ''지토다이'') 소 스케쿠니는 80명의 기마 사무라이와 그들의 수행원을 이끌고 900척의 배에 탄 8,000명의 전사로 이루어진 침략군과 맞섰다. 몽골군은 11월 4일 새벽 2시에 상륙하여 일본 측의 협상 시도를 무시하고, 궁수들로 사격을 가하며 일본군의 후퇴를 강요했다. 전투는 새벽 4시에 시작되었다. 소규모 주둔군은 빠르게 패배했지만, 스케사다라는 한 사무라이가 1대 1 전투에서 적군 25명을 베었다고 한다. 침략자들은 해질 무렵 마지막 일본 기병대의 돌격을 물리쳤다. 코모다에서 승리한 후, 원군은 사스우라 주변의 대부분 건물을 불태우고 대부분의 주민들을 학살했다.

원나라 함대는 11월 13일 쓰시마를 출발하여 이키섬을 공격했다. 쓰시마의 스케쿠니와 마찬가지로, 이키의 지사 다이라노 카게타카는 100명의 사무라이와 현지 무장 주민들과 함께 용감하게 방어했지만 밤이 되자 성으로 후퇴했다. 다음날 아침, 원나라군은 성을 포위했다. 패배가 불가피함을 알게 된 카게타카는 믿을 수 있는 사무라이인 소자부로와 함께 딸을 비밀 통로를 통해 해안으로 보냈고, 거기서 배를 타고 본토로 향했다. 몽골 궁수들이 그들을 발견하고 배에 화살을 쏘았다. 카게타카의 딸은 죽었지만, 소자부로는 博多湾에 도착하여 이키의 패배를 보고했다.

카게타카는 36명의 병사와 함께 마지막으로 돌격했으나 실패했고, 그중 30명이 전투에서 사망했다. 그는 가족과 함께 자살했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몽골군은 살아남은 여성들을 제압하고 칼로 손바닥을 찔렀으며, 옷을 벗긴 후 시체를 배 옆에 묶어 항복하지 않으면 어떤 운명을 맞게 될지 다른 일본인들에게 보여주었다고 한다.

5. 3. 하카타 만 상륙과 전투

1274년 11월, 훈둔이 이끄는 원나라군과 김방경이 이끄는 고려군 연합군은 9백 척의 함선에 4만 명의 군사를 싣고 하카타 항에 도착했다. 이들은 히라도, 다카시마마쓰우라 본거지를 전멸시켰으나, 태풍으로 인해 지속적인 피해를 보았고,[478] 강남군의 지연 도착으로 군사 작전에 큰 차질이 생겨 다음날 퇴각하였다.[477]

원나라 함대는 11월 19일 규슈의 옛 행정 수도였던 다자이후에서 가까운 하카타 만에 상륙했다. 다음 날, '분에이의 역' 또는 '하카타 만 제1차 전투'로 알려진 전투가 벌어졌다.

일본군은 몽골군의 전술에 당황했다. 원군은 방패로 보호받으며 밀집 대형을 유지한 채 상륙하여 진격했고, 빈틈없이 밀집하여 장창을 휘둘렀다. 진격하면서 종이와 철제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군의 말을 놀라게 했다.

『하치만 구도쿤』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총사령관은 고지에 자리 잡고 손북으로 신호를 보내 여러 부대를 필요에 따라 지휘했다. 그러나 (몽골) 군사들이 도망칠 때마다 우리 쪽으로 철제 폭탄(철포)을 날렸는데, 이로 인해 우리 쪽은 어지럽고 혼란스러워졌다. 우리 군사들은 우레 같은 폭발음에 기겁을 했고, 눈은 멀고 귀는 먹먹해져 동서도 구별할 수 없었다. 우리의 전투 방식에 따르면 먼저 적 진영에서 누군가를 이름으로 부른 다음 일대일 결투를 벌여야 한다. 그러나 그들(몽골군)은 그런 관례를 전혀 무시하고 모두 한꺼번에 떼로 몰려들어 잡히는 사람은 누구든 붙잡아 죽였다.

원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고지를 점령한 장군들은 북을 쳐서 명령을 내렸고, 군대는 북소리에 따라 진격하거나 후퇴했다. 적이 미리 정해진 위치로 이동하자 침략군은 사방에서 공격했다. 그들은 또한 화기를 사용하여 [그리하여] 적군을 무수히 학살했다. 이렇게 해서 일본군은 패주했다.

전투는 단 하루 만에 끝났고, 치열했지만 무질서하고 짧았다. 다케자키 스에나가는 쇼니 카게스케의 명령을 어기고 몽골군을 공격했다가 부상을 입었지만, 시로이시 미치야스의 도움으로 퇴각하는 데 성공했다. 밤이 되자 원군 침략군은 방어군 3분의 1을 죽이고 해변에서 일본군을 몇 킬로미터나 내륙으로 몰아낸 후 하카타를 불태웠다.

일본군은 미즈키 성에서 최후의 항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원군의 공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원군의 지휘관 중 한 명인 유복향은 쇼니 카게스케에게 얼굴에 총을 맞아 중상을 입었다. 유복향은 홀돈, 홍다구와 함께 배로 돌아갔고, 홍다구의 의견에 따라 원군을 배로 돌려보냈다.

5. 4. 원정군의 철수와 피해

7월 30일 심야, 태풍이 덮쳐 원나라 군선 대부분이 침몰하거나 파손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67][362][334] 『장씨묘지명』에 따르면, 태풍으로 인한 거친 파도는 "산과 같았다"고 하며, 군선끼리 충돌하여 침몰하고, 원나라 병사들은 소리치며 익사하는 자가 무수히 많았다고 한다.[55]

; 원나라 군대의 피해 상황

원나라 문인 주밀의 『계신잡식』에 따르면, 원나라 군선은 태풍으로 인해 함선끼리 충돌하여 부서졌고, 약 4,000척의 군선 중 잔존 함선은 200척이었다고 한다.[336] 하지만, 강회전함 수백 척이나 여러 장수들은 태풍 피해를 면했고, 동로군의 고려선 900척의 태풍 피해도 경미했던 것으로 보아 『계신잡식』의 잔존 함선 200척이라는 기록은 과장일 가능성이 있다.

; 원나라 장수 등의 상황

『元史』 등의 사료에는 태풍을 맞은 원나라 장교들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강남군의 일본행성 좌승 이정은 태풍으로 인해 자신의 군선이 침몰하고, 부서진 선체 파편을 붙잡고도 겨우 해안에 도착했다.[71] 강남군 1천여 명의 병사를 이끌었던 관군총관 초정도 배가 부서져 3일 낮밤 표류한 끝에 강남군 총사령관 우승 范文虎와 합류했다.[337]

대원에 인질로 잡혀 있던 고려 국왕 고종의 아들 왕륜의 아들로 동로군의 좌부도원수 알라템을(阿剌帖木児)은 태풍으로 익사했다.[33]

; 강남군에서 피해를 면한 부대

히라도섬에 주둔하고 있던 강남군의 도원수 장희의 군세는, 함선끼리 거리를 두고 정박하는 등 풍랑 대책을 세웠기 때문에 피해를 입지 않았다.[320] 또한, 『원사』낭가대전에 따르면 강남군의 도원수 낭가대(嚢加歹)가 이끄는 전함들은 "아직 도착하지 못하고 돌아갔다"라고만 되어 있어 태풍 피해는 확인되지 않는다.[340] 동로군 관군 만호 예스델(也速䚟児)이 이끄는 강회전함 수백 척도 태풍 피해를 입지 않고, 후에 전군 철수했다. [341][342]

; 동로군의 피해 상황

동로군도 태풍으로 피해를 입었지만, 강남군에 비하면 피해는 경미했다.[64][72] 중서성 우승 정이라는 자는 쿠빌라이에게 “강남의 전선은 큰 배가 매우 크지만, (태풍으로) 접촉하면 곧바로 부서졌다. 이것이 (제2차 일본 원정의) 이익을 잃는 이유이다. 고려로 하여금 배를 만들게 하여 다시 일본에 원정하여 일본을 취하는 것이 좋다”[343]라고 말했고, 고려에서 건조된 군선에 비해 강남 선박은 취약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원나라 관리 왕윤도 “오직 구려(고려)의 배만이 견고하고 온전하여 마침내 군대를 서쪽으로 돌아가게 했다”[344]라고 말하고 있어 고려선이 튼튼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포로, 전사, 병사, 익사를 제외한 고려병과 동로군 선원의 생환자는 7할을 넘었다.[64]

  • 원나라 군대는 태풍 다음 날 수도 대도에 상황을 알리기 위해 마하마드(馬馬)를 급파했다.[55]
  • 윤7월 9일, 일본군은 포로 2만~3만 명을 팔각도(하카타?)로 연행한다.[76]원사』에 따르면, 일본군은 몽골인과 고려인, 그리고 한인 포로는 살해했지만, 교류가 있었던 옛 남송인 포로는 목숨을 살려 노예로 삼았다고 한다.[76]
  • 원나라 군대 중 귀환할 수 있었던 병사는 『원사』에서 전군의 1~4할 정도로 차이를 보인다.[70][71][72][73] 원나라 군대 14만~15만6989명 중 1~4할이었다면 귀환자 수는 약 1만4000~6만2796명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군 및 동로군 수부의 귀환자는 2만6989명 중 1만9397명이었다.[64][75]


이 전투로 원나라 군대의 해군 전력의 2/3 이상이 손실되었고, 남은 군선도 상당수가 파손되었다.

6. 제2차 원정 (1281년, 고안의 역)

1281년(충렬왕 7년)에 제2차 원정이 실시되었다. 고려를 거쳐 가는 동로군(東路軍)은 함선 900척에 병원(兵員) 4만 명 규모였고, 강동군(江東軍)은 함선 3,500척에 병원 10만 명 규모였다.[77]

이번 원정 역시 태풍으로 실패했다. 여기에는 해상 기후에 대한 인식 부족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 가마쿠라 막부의 강력한 저항과 일본 정벌에 전력을 기울일 수 없었던 원나라 국내 사정도 원인이었다.

원·고려 연합군을 주력으로 한 동로군은 약 40,000~56,989명과 군선 900척, 옛 남송군을 주력으로 한 강남군은 약 100,000명과 강남군 수부(인원 불명) 및 군선 3,500척으로 구성되었다. 3군을 합치면 약 140,000~156,989명과 강남군 수부(인원 불명) 및 군선 4,400척으로, 역사상 유례없는 세계 최대 규모의 함대였다.[77] 『원사』 아라한전에는 몽골인을 주력으로 한 몽골군 약 400,000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60]

원의 관리 왕윤은 이 일본 침공군의 기세를 “, 이래, 출사의 성대함이 이와 같았던 적은 없었다”[286]라고 『범해소록』에서 평했다.

고려인 정혜사의 선승 충지는 동로군의 위용을 앞두고 쿠빌라이와 동로군을 찬양하는 한시를 지었다.[287]

홍안의 역 이후 쿠빌라이의 중신 유선은 강남군에 대해 “남방의 신부의 구군(강남군)은 십여 년 사이에 노쇠하여 도망치고 출정으로 상처 입었고, '''그때까지의 정예군은 해동의 일본에서 패배하였고,''' (홍안의 역 후) 새로 소집된 군사는 모두 무예나 전쟁에 익숙하지 않은 것뿐, 이것으로는 적(일본)을 제압하려고 해도 반드시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288]라고 말했다. 즉, 홍안의 역에서 강남군은 정예군이었고, 이들을 잃었기 때문에 새로운 군세로는 일본 정복이 어렵다는 것이다.

동로군과 강남군은 6월 15일까지 이키섬에서 합류하여 다자이후를 공격할 계획이었다.[289][290] 먼저 동로군이 출발했다. 동로군은 쓰시마이키섬을 재침공하여 점령하고 하카타만에 나타나 북큐슈로 상륙하려 했다. 그러나 일본은 방어 체제를 갖추고 하카타만 연안에 약 20km의 돌 축대(원구방뢰)를 쌓았고, 동로군은 상륙을 단념했다.


  • 6월 6일, 하카타만 연안 상륙을 단념한 동로군은 지가섬에 상륙, 점령하고 주변을 군선 정박지로 삼았다.[300]
  • 6월 8일 오전 10시경, 일본군은 해상과 우미노나카미치 육로 양면으로 지가섬 동로군을 총공격했다.[301][302][303][304][305] 지가섬 동로군은 일본군에 300명 정도 피해를 입혔으나, 공세에 궤멸되었다.[301][302]
  • 6월 9일, 동로군 장성 등은 방어에 전념, 진영을 굳히고 일본군에 대항했다.[300] 그러나 이날도 일본군이 승리, 동로군은 연패했다.[301]


지가섬 전투에서 대패한 동로군은 지가섬을 버리고 이키섬으로 후퇴, 강남군을 기다렸다.

1281년(홍안 4년) 7월 30일 심야, 태풍이 덮쳐 원나라 군선 대부분이 침몰하거나 파손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67][362][334] 원나라 군대가 일본을 향해 출항한 지 약 3개월, 하카타만에 침입하여 전투가 시작된 지 약 2개월 만이었다.

『장씨묘지명』에 따르면, 태풍으로 인한 거친 파도는 "산과 같았다"고 하며, 군선끼리 충돌하여 침몰하고, 원나라 병사들은 소리치며 익사하는 자가 무수히 많았다.[55]

동로군도 태풍으로 피해를 입었지만, 강남군에 비하면 경미했다.[64][72] 포로, 전사, 병사, 익사를 제외한 고려병과 동로군 선원의 생환자는 7할을 넘었다.[64]

윤7월 5일, 강남군 총사령관 우승 范文虎(판문호)와 도원수 장희 등은 전투를 계속할 것인지, 귀환할 것인지 논의했다.[320] 장희는 병사들의 익사자가 절반에 달하며, 남은 병사들은 귀환을 원치 않을 것이므로 적에게서 식량을 빼앗아 싸우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范文虎(판문호)는 귀국 후 책임을 자신이 지겠다며 퇴각을 주장했고, 결국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다른 장수들도 튼튼한 배에 병졸들을 무리하게 내리게 하고 타면서, 응도(나가사키현) 서쪽 포구에서 10만 명이 넘는 병졸들을 버리고 도망쳤다.[76][346]

6. 1. 원정 준비

1274년 침입 이후, 가마쿠라 막부는 재침략에 대비하여 규슈의 무사들을 조직하고, 하카타만 등 상륙 예상 지점에 방어용 석벽을 쌓았다.[13] 또한, 몽골군의 상륙을 막기 위해 강어귀와 예상 상륙 지점에 많은 말뚝을 박았다.

1275년 9월, 쿠빌라이 칸은 5명의 사절을 규슈에 보냈으나, 호조 도키무네는 이들을 가마쿠라에서 참수했다.[14] 처형된 사절들의 무덤은 가나가와현 후지사와시의 조류사에 남아 있다.[15] 1279년 7월, 다시 파견된 5명의 사절도 하카타에서 참수되었다.

1280년 가을, 쿠빌라이는 회의를 열어 일본 침략 계획을 논의했다. 1279년 송나라 정복을 완료하여 양면 공격이 가능해졌다. 침략군은 범죄자와 부모 상중인 자들을 포함하여 모집되었다. 1,500척 이상의 배가 동원되었는데, 남중국에서 600척, 고려에서 900척이었다. 한국에 4만 명, 남중국에 10만 명의 군대가 집결했다는 보고가 있지만,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271년 9월, 조량필 등이 몽골 제국에 복속을 요구하는 국서를 가지고 하카타만 이마즈에 상륙했다.[128][129] 일본 측은 다자이후 동쪽 방문을 거부했고, 조량필은 국서 사본을 전달하며 11월 말까지 답변이 없으면 무력 사용도 불사하겠다고 했다.[132] 조정은 답서를 전달하기로 결정했으나,[132] 다자이후에서는 일본 사절을 쿠빌라이에게 파견하기로 했다.[129]

1272년 1월, 일본 사절 12명이 원나라 수도 대도를 방문했으나,[129][134] 쿠빌라이 칸과의 면담은 허락되지 않았다.[129]

1275년부터 1286년까지 쿠빌라이는 일본 원정을 위한 다양한 준비를 진행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275년:
  • 9월: 고려에서 일본으로 가는 항로 조사.[264]
  • 10월: 고려에서 전함 수리 및 건조 시작.[265]
  • 11월: 경상도·전라도 백성들에게 화살촉과 깃털 생산 증가 지시.[266]
  • 1276년:
  • 1월: 남송과 일본의 이중 전선을 피하기 위해 고려에 전함 건조와 화살 생산 중지 지시.[268]
  • 1279년:
  • 2월: 양주, 호남 등 4성에서 일본 침공용 전함 600척 건조 명령.[274]
  • 6월: 고려에 900척 건조 명령.[69] (백성들의 피폐함으로 일부 중지[275])
  • 1280년: 일본행성(정동행성) 설치.[283]
  • 1281년: 2월, 쿠빌라이가 침공에 앞서 여러 장수를 소집하여 연설.[284]
  • 1282년:
  • 1월: 일본행성 폐지.[373]
  • 7월: 충렬왕이 150척 군선 건조 제안.[374]
  • 9월: 3,000척 군선 건조 시작.[375]
  • 1283년:
  • 1월: 일본행성 재설치, 아타카이 총사령관 임명.[379]
  • 5월: 일본 원정 계획 중지.[389]
  • 8월: 출병 계획 재개, 민간 선박 500척 반환, 몽골인 대선주 배 징발.[390]
  • 1284년:
  • 2월: 고려에서의 조선 중단.[394]
  • 5월: 일본행성 폐지, 일본 침공 계획 중단.[396]
  • 10월: 일본 원정을 위한 배와 선원 모집 시작.[401]
  • 1285년:
  • 4월: 강회 지역에서 일본 원정용 군량 및 군선 운반, 해상 전투 훈련 실시.[402]
  • 10월: 일본행성(日本行省) 재설치, 아타카이 좌승상 임명.[404]
  • 11월: 제3차 일본 원정 작전 계획 발표.[407]
  • 12월: 군적 조례 시행, 회회포(回回砲) 포수 50명 추가.[409]
  • 1286년: 1월, 일본 원정 계획 중단.[221]

6. 2. 가마쿠라 막부의 방어 강화

1274년 침입 이후, 가마쿠라 막부는 다시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두 번째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노력했다. 막부는 규슈사무라이들을 더 잘 조직하고, 하카타만을 포함한 여러 잠재적 상륙 지점에 요새와 대규모 석벽(石塁) 및 기타 방어 시설 건설을 명령했다. 1276년에는 높이 2미터의 성벽이 건설되었다.[13] 또한, 몽골군의 상륙을 막기 위해 강어귀와 예상 상륙 지점에 많은 수의 말뚝이 박혔다.

니시진(西神), 세이난 대학 근처에 있는 돌로 만든 방어벽(元寇防塁). 현재는 일부 돌벽의 꼭대기만 지면에 드러나 있으며, 대부분 매립되었다.


몽골군의 상륙을 막기 위해 강어귀에 박은 말뚝. 1905년 발굴됨(겐코 박물관).


1275년 9월, 쿠빌라이 칸규슈에 5명의 원나라 사절을 보냈고, 그들은 답변 없이는 떠나지 않겠다고 했다. 호조 도키무네는 그들을 가마쿠라로 보낸 후 참수했다.[14] 처형된 5명의 원나라 사절의 무덤은 가마쿠라 다쓰노쿠치 처형장 근처 가나가와현 후지사와시 조류사에 아직 남아 있다.[15] 1279년 7월 29일, 같은 방식으로 5명의 원나라 사절이 더 파견되었고, 이번에는 하카타에서 참수되었다.

6. 3. 쓰시마, 이키 재침공

1281년(충렬왕 7년), 제2차 원정이 시작되었다. 고려를 경유하는 동로군은 함선 900척, 병력 4만 명이었고, 강동군은 함선 3,500척, 병력 10만 명이었다.

1281년 일본 사무라이들이 원나라 배에 오르는 모습


하카타의 방어벽


동로군은 5월 22일 고려를 출발하여 6월 9일 쓰시마를, 6월 14일 이키섬을 공격했다. 『원사』에 따르면, 일본의 쇼니 스케토키와 류조지 스에토키가 지휘하는 군대가 침략군에 맞섰다. 원나라 원정군은 화기를 사용했고, 일본군은 패주했으며, 스케토키는 전사했다. 300명 이상의 섬 주민이 사망했다. 원나라 군인들은 아이들을 찾아내어 살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원사』는 6월의 사건과 쇼니 스케토키가 실제로 전사한 7월의 후속 전투를 혼합하고 있다.[16]

동로군은 이키섬에서 남로군을 기다릴 예정이었으나, 지휘관 홍다구김방경은 명령을 어기고 단독으로 일본 본토 침략을 개시했다. 6월 25일, 300척의 배가 나가토국을 공격했으나 격퇴당해 이키섬으로 돌아가야 했다.

한편, 동로군 나머지는 방어벽으로 견고하게 요새화된 하카타만을 공격했다. 일부 원나라 배는 상륙했으나 방어벽을 넘지 못하고 화살 세례에 격퇴당했다. 상륙에 실패한 몽골군은 자섬과 노코 섬을 점령하고 하카타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일본군은 소형 선박을 이용하여 야간에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다음 날, 가와노 미치아리는 단 두 척의 배로 주간 기습 공격을 이끌었다. 그의 삼촌 미치토키는 즉시 화살에 맞아 사망했고, 미치아리는 어깨와 왼팔에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적선에 승선하여 몽골 장수를 베어 영웅으로 추앙받고 후한 상을 받았다. 타케자키 스에나가 또한 원 함대를 공격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타케자키는 자섬에서 몽골군을 몰아내는 데에도 참여했지만, 그 과정에서 부상을 입고 6월 30일 이키섬으로 후퇴했다.

하카타만 방어전은 흔안의 역(弘安の役)으로 알려져 있다. 7월 16일, 이키섬에서 일본군과 몽골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고, 그 결과 몽골군은 히라도섬(平戸島)으로 후퇴했다.

5월 26일, 동로군은 이키섬을 침공하며 홀로몰탑(忽魯勿塔)으로 향하던 중 폭풍우를 만나 병사 113명, 선원 36명이 실종되었다.[295] 6월 29일, 일본군은 마쓰우라 당(松浦党), 히게(彼杵), 타카기(高木), 류조지씨(龍造寺氏) 등 수만의 군세로 이키섬의 동로군에 총공격을 개시했다.[321] 7월 2일, 히젠의 고케닌 류조지 이에키요(龍造寺家清) 등 일본군은 이키섬의 세토우라(瀬戸浦)에서 상륙을 개시하여 동로군과 격전을 벌였다.

이키섬 전투 결과, 동로군은 일본군의 공세에 밀려 고전하고 강남군이 히라도섬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이키섬을 포기하고 강남군과 합류하기 위해 히라도섬으로 이동했다. 한편, 일본군은 이 전투에서 동로군을 이키섬에서 몰아냈지만, 전 덴세이 부교(鎮西奉行) 소니 스케요시(少弐資能)가 부상을 입었고(이후 사망), 소니 경자(少弐経資)의 아들 소니 스케토키(少弐資時)가 이키섬 앞바다에서 전사하는 등 피해를 입었다.[328]

6. 4. 하카타 만 상륙 시도와 교착 상태

1281년(충렬왕 7년)에 벌어진 제2차 원정에서, 고려를 경유한 동로군은 함선 900척, 병력 4만 명이었고, 강동군은 함선 3,500척, 병력 10만 명이었다.[77] 그러나 이번 원정도 태풍으로 실패했다. 여기에는 해상 기후에 대한 인식 부족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 가마쿠라 막부의 강력한 저항과 원나라 국내 사정으로 일본 정벌에 전력을 다할 수 없었던 점도 원인이었다.

동로군은 이키섬에서 남로군을 기다릴 예정이었으나, 지휘관 홍다구와 김방경은 명령을 어기고 단독으로 일본 본토 침략을 개시했다. 이들은 6월 23일, 남로군보다 일주일이나 앞서 출발했다. 동로군은 병력을 나누어 하카타만과 나가토국을 동시에 공격했다. 6월 25일, 300척의 배가 나가토를 공격했으나 격퇴되어 이키섬으로 돌아갔다.

한편, 동로군 나머지는 방어벽으로 요새화된 하카타만을 공격했다. 일부 원나라 배는 상륙했으나 방어벽을 넘지 못하고 화살 세례에 격퇴당했다. 상륙에 실패한 몽골군은 자섬과 노코 섬을 점령하고 하카타 공격을 계획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소형 선박을 이용한 야간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八幡愚童訓』에는 쿠사노 지로(草野次郎)가 몽골 선박에 불을 지르고 21명의 목을 베었다는 기록이 있다.

다음 날, 가와노 미치아리(河野通有)는 단 두 척의 배로 주간 기습 공격을 이끌었다. 그의 삼촌 미치토키(通時)는 화살에 맞아 즉사했고, 미치아리는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적선에 승선하여 몽골 장수를 베어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타케자키 스에나가 또한 원 함대를 공격한 사람 중 하나였다. 타케자키는 자섬에서 몽골군을 몰아내는 데 참여했지만, 부상을 입고 6월 30일 이키섬으로 후퇴했다.

하카타만 방어전은 흔안의 역(弘安の役)으로 알려져 있다. 7월 16일, 이키섬에서 일본군과 몽골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고, 몽골군은 히라도섬(平戸島)으로 후퇴했다. 남로 함대와 동로 함대가 합류한 후, 두 함대는 다카섬(Taka island)으로 진격하기 전에 재정비 시간을 가졌다. 다카섬을 점령한 후, 원나라 군대는 하카타로 진격했다. 2주간의 전투는 교외 전역에서 교착 상태에 빠졌다.

8월 12일, 일본군은 밤새도록 침략 함대에 소규모 공격을 반복했다. 몽골군은 방어용 플랫폼을 구축하기 위해 배들을 서로 연결했다. 하카타만 방어전과는 달리 이 사건에 대한 일본 측 기록은 없다. 『원사(History of Yuan)』에 따르면, 일본 배는 작아서 모두 물리쳐졌다고 한다.

1281년(홍안 4년, 지원 18년), 원나라와 고려 연합군을 주력으로 한 동로군은 약 40,000~56,989명과 군선 900척이었고, 옛 남송군을 주력으로 한 강남군은 약 100,000명과 군선 3,500척이었다. 3군을 합치면 약 140,000~156,989명과 군선 4,400척으로, 역사상 유례없는 세계 최대 규모의 함대였다.[77] 『원사』 아라한전에는 몽골인을 주력으로 한 몽골군 약 400,000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60]

원의 관리 왕윤은 일본 침공군의 기세를 “, 이래, 출사의 성대함이 이와 같았던 적은 없었다”[286]라고 『범해소록』에서 평했다.

고려인 정혜사의 선승 충지는 동로군의 위용을 앞두고 쿠빌라이와 동로군을 찬양하는 한시를 지었다.

: “황제(쿠빌라이)가 천하를 통치하니, 공적은 (중국 신화의 군주)를 넘었다. 덕은 관대하여 단절을 포용하고, 넓은 은택은 구석구석까지 미쳤다. 수레는 천도의 수레 자국과 함께하고, 글은 천하의 글과 함께하였다. 다만 추한 도이(섬나라 야만인, 일본)만이 남아, 정어(鼎魚, 솥에 삶아 먹는 물고기)처럼 무리를 지어 살았다. 다만 대양을 사이에 두고 있다는 것을 믿고, (원과) 영역을 나누려 하였다. 일본은 포모(조공)에 들어간 적이 없고, 반서(조공)도 또한 들어본 적이 없다. 거기에 황제가 노하여, 때에 우리 군주(충렬왕)에게 명하였다. 천 척의 용작(군함)과 10만의 용감한 군사로 부상(일본)의 들에서 죄를 묻고, 합포의 물가에서 군을 일으켰다. 북소리가 대양에 울려 퍼지고, 깃발은 긴 구름을 흔들었다.”[287]

충지는 원군의 승전과 승전 후 천하태평을 상상하며 다음과 같이 읊었다.

: “원군은 순식간에 일본군의 군영을 무너뜨리고, 승전보는 아침저녁으로 전해질 것이다. 옥패로 수공을 다투고, 전쟁으로 분쟁을 해결한다. 원수는 보옥과 주기를 받고, 병졸은 전답으로 돌아갈 것이다. 삼척의 쾌검은 검집에, 백근의 양궁은 화살통에. 사방에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고, 세상의 음악으로 가득 찰 것이다. 변방의 경비에서 전쟁을 알리는 봉화가 사라지고, 변방에 풍진(소란)의 기운이 끊어질 것이다. 성스러운 천자(쿠빌라이)를 뵙고, 만세까지 남훈태평가를 연주하자.”[287]

홍안의 역 이후 쿠빌라이의 중신 유선은 강남군에 대해 “남방의 신부의 구군(강남군)은 십여 년 사이에 노쇠하여 도망치고 출정으로 상처 입었고, '''그때까지의 정예군은 해동의 일본에서 패배하였고,''' (홍안의 역 후) 새로 소집된 군사는 모두 무예나 전쟁에 익숙하지 않은 것뿐, 이것으로는 적(일본)을 제압하려고 해도 반드시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288]라고 말했다. 즉, 홍안의 역에서 강남군은 정예군이었고, 이들을 잃었기 때문에 새로운 군세로는 일본 정복이 어렵다는 것이다.

동로군과 강남군은 6월 15일까지 이키섬에서 합류하여 다자이후를 공격할 계획이었다.[289][290] 먼저 동로군이 출발했다.

동로군은 쓰시마 섬 주민들에게서 다자이후 서쪽 60리에 있던 일본군이 동로군 침략에 대비해 이동했다는 정보를 얻었다. 동로군은 일본군이 이동한 틈을 타 상륙, 다자이후를 점령할 계획을 세우고 쿠빌라이에게 군사 작전 승인을 받았다.[298] 그리하여 강남군을 기다리지 않고 방비가 허술한 다자이후 서쪽에서 단독 상륙을 개시하기로 결정했다.

쓰시마와 이키를 점령한 동로군은 하카타만에 나타나 북큐슈로 상륙하려 했다. 그러나 일본은 방어 체제를 갖추고 하카타만 연안에 약 20km의 돌 축대(원구방뢰)를 쌓았고, 동로군은 상륙을 단념했다. 이요의 무사 코노 미치아리 등은 무용을 과시하기 위해 돌 축대를 등지고 진을 쳐 동로군과 싸웠다. 코노 미치아리는 “'''코노의 후축지'''(うしろついじ)”라 불리며 칭찬받았다.[299]

돌 축대는 가장 견고한 부분에서 높이 3m, 너비 2m 이상이었으며, 내륙 쪽에는 기마병이 달려 올라갈 수 있도록 흙을 쌓았고, 해변 쪽에는 난퇴(亂杭)와 역모목(逆茂木) 등 상륙 방해물을 설치했다.[299] 『예장기』에 따르면, 바다에서 본 하카타만은 “험준한 봉우리가 있는 강에 임하는 것”[299] 같았다고 한다.

  • 6월 6일, 하카타만 연안 상륙을 단념한 동로군은 지가섬에 상륙, 점령하고 주변을 군선 정박지로 삼았다.[300]
  • 동로군 관군 상백호 장성의 묘비에 따르면, 이날 밤 일본군 일부가 동로군 군선에 야습, 장성 등은 군선에서 응전했다.[300] 날이 밝자 일본군은 철수했다.[300]
  • 6월 8일 오전 10시경, 일본군은 해상과 우미노나카미치 육로 양면으로 지가섬 동로군을 총공격했다.[301][302][303][304][305]
  • 우미노나카미치를 통해 온 일본군에 장성 등은 노병을 이끌고 군선에서 내려 응전했다.[300] 지가섬 동로군은 일본군에 300명 정도 피해를 입혔으나, 공세에 궤멸되었다.[301][302] 동로군 사령관 홍차구는 말을 버리고 패주했으나, 일본군 추격을 받아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302] 관군 만호 왕모 군세가 홍차구를 추격하던 일본군 측면을 공격, 일본군 50명을 죽여 홍차구는 도망쳤다.[302]
  • 해상에서 동로군을 공격한 이요 고케닌 가와노 미치아리는 원나라 병사 석궁에 부상당했으나, 태도로 원나라 군선에 뛰어들어 장교를 생포했다.[306] 히고 고케닌 타케사키 스에나가[303]히젠 고케닌 후쿠다 카네시게·후쿠다 카네미쓰 부자 등도 해상 공격에 참가, 활약했다.[305]
  • 6월 9일, 동로군 장성 등은 방어에 전념, 진영을 굳히고 일본군에 대항했다.[300] 그러나 이날도 일본군이 승리, 동로군은 연패했다.[301]


지가섬 전투에서 대패한 동로군은 지가섬을 버리고 이키섬으로 후퇴, 강남군을 기다렸다.

6. 5. 태풍(가미카제)과 원정군의 궤멸

1281년(홍안 4년) 7월 30일 심야, 태풍이 덮쳐 원나라 군선 대부분이 침몰하거나 파손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67][362][334] 원나라 군대가 일본을 향해 출항한 지 약 3개월, 하카타만에 침입하여 전투가 시작된 지 약 2개월 만이었다. 북큐슈에 상륙하는 태풍은 평년 3.2회 정도로, 약 3개월 동안 해상에 머물렀던 원나라 군대에게는 우연한 태풍이 아니었다.[335]

『장씨묘지명』에 따르면, 태풍으로 인한 거친 파도는 "산과 같았다"고 하며, 군선끼리 충돌하여 침몰하고, 원나라 병사들은 소리치며 익사하는 자가 무수히 많았다.[55] 원나라 문인 주밀의 『계신잡식』에서는 약 4,000척의 군선 중 잔존 함선은 200척이었다고 전한다.[336] 그러나 강회전함 수백 척이나 여러 장수들은 태풍 피해를 면했고, 동로군의 고려선 900척의 태풍 피해도 경미했던 것으로 보아 『계신잡식』의 기록은 과장일 가능성이 있다.

원나라 장수 중 강남군의 일본행성 좌승 이정은 배가 침몰하여 부서진 선체 파편을 잡고 겨우 해안에 도착했다.[71] 관군총관 초정도 배가 부서져 3일 밤낮 표류한 끝에 강남군 총사령관 우승 范文虎와 합류했다.[337] 반면, 동로군의 좌부도원수 알라템을은 태풍으로 익사했다.[33]

강남군의 도원수 장희의 군세는 함선끼리 거리를 두고 정박하는 등 풍랑 대책을 세워 피해를 입지 않았다.[320] 낭가대(嚢加歹)가 이끄는 전함들도 태풍 피해가 확인되지 않는다.[340] 동로군 관군 만호 예스델이 이끄는 강회전함 수백 척도 태풍 피해를 입지 않고, 후에 전군 철수했다.[341][342]

동로군도 태풍으로 피해를 입었지만, 강남군에 비하면 경미했다.[64][72] 11년 후 제3차 일본 원정 논의 때, 중서성 우승 정은 "강남의 전선은 큰 배가 매우 크지만, (태풍으로) 접촉하면 곧바로 부서졌다. 고려로 하여금 배를 만들게 하여 다시 일본에 원정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343] 원나라 관리 왕윤도 "오직 구려(고려)의 배만이 견고하고 온전하여 마침내 군대를 서쪽으로 돌아가게 했다"고 말했다.[344] 포로, 전사, 병사, 익사를 제외한 고려병과 동로군 선원의 생환자는 7할을 넘었다.[64]

원나라 군대는 태풍 다음 날 수도 대도에 상황을 알리기 위해 마하마드(馬馬)를 급파했다.[55]

윤7월 5일, 강남군 총사령관 우승 范文虎(판문호)와 도원수 장희 등은 전투를 계속할 것인지, 귀환할 것인지 논의했다.[320] 장희는 병사들의 익사자가 절반에 달하며, 남은 병사들은 귀환을 원치 않을 것이므로 적에게서 식량을 빼앗아 싸우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范文虎(판문호)는 귀국 후 책임을 자신이 지겠다며 퇴각을 주장했고, 결국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장희는 군선을 잃은 范文虎(판문호)에게 튼튼한 배를 주어 퇴각하게 했다.[320] 다른 장수들도 튼튼한 배에 병졸들을 무리하게 내리게 하고 타면서, 응도(나가사키현) 서쪽 포구에서 10만 명이 넘는 병졸들을 버리고 도망쳤다.[76][346] 히라도섬에 주둔한 장희는 군선에서 군마 70필을 내려 히라도섬에 버리고 그 군세 4,000명을 군선에 수용하여 귀환했다. 귀국 후, 范文虎(판문호) 등은 패전으로 벌을 받았으나, 장희는 부하들을 버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벌을 받지 않았다.[320]

7. 원정 실패 이후

쇼니 가게스케(少弐景資)와 그의 군대, 아카사카(赤坂)


몽골 제국은 원나라의 일본 원정에서 패배하면서 해군력 대부분을 상실했고, 해상 방어 능력은 크게 저하되었다.[19] 고려 역시 침략을 위한 조선 수군의 조선 건조를 담당하면서 목재를 대량으로 벌채하여 함선 건조 능력과 해상 방어 능력을 상실했다.[20] 반면 일본은 방어전이었기에 새롭게 획득한 영토가 없었고, 따라서 가마쿠라 막부는 전투에 참가한 고케닌(御家人)들에게 상을 내릴 수 없어 권위가 약화되었다.[21] 이후 왜구(倭寇)에 가담하는 일본인의 수가 증가하기 시작했고, 중국과 고려 연안에 대한 공격이 강화되었다.[1]

전쟁 결과, 중국에서는 일본인이 용감하고 잔혹하며 일본 원정이 무의미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명나라 시대에는 일본 원정이 세 차례 논의되었지만, 이 전쟁의 결과를 고려하여 실행되지 않았다.[22][23][24]

7. 1. 고려의 피해와 내정 간섭

두 차례에 걸친 원나라의 일본 원정에 강제 동원된 고려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농민들은 새로운 동원으로 형언키 어려운 참상을 겪었다. 목선과 무기에 동원된 자원도 엄청나서 여몽전쟁에 시달린 고려 백성에게 더욱 큰 부담이 되었다. 원정 도중 징발된 많은 고려 백성이 태풍으로 사망하여 인적 손실 또한 막대하였다.[479] 무엇보다도, 원나라가 일본 정벌을 위해 설치한 정동행중서성은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는 기구로 변하였고, 1356년(공민왕 5) 반원 정책을 추진하면서 폐지될 때까지 고려를 압박하였다. 특히 속관으로 존재한 이문소는 고려에 존재했던 부원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구로 변했다.[479]

문영의 역에서 선박, 군사, 군량 등을 지원한 고려는 국력이 극도로 악화되어 쇠약해졌다. 고려에서 쿠빌라이에게 파견된 김방경과 인공수는 상소에서 삼별초의 난 진압에 대규모 군대와 많은 군량을 소비했고, 백성들은 일본 정벌(문영의 역)로 손상된 선박을 수리하느라 남자들은 모두 공역에 나갔으며, 일본 정벌에 참여한 병사들은 전투 부상과 귀환 중 태풍으로 많은 부상자와 익사자가 발생하여 농사지을 사람이 늙은이와 아이들뿐이라고 하였다. 게다가 가뭄과 장마로 벼는 열리지 않고 백성들은 나무 열매와 풀잎으로 굶주림을 면하는 등 “백성의 피폐는 이때보다 심했던 적이 없었다”라며 고려의 극심한 피폐 상황을 전했다.[239] 그리고 다시 일본 정벌군을 일으킨다면, 작은 나라(고려)는 선박과 군량 등의 지원을 감당할 수 없다고 쿠빌라이에게 호소했다.[239]

두 차례에 걸친 일본 침략(문영·홍안의 역)과 세 번째 일본 침략 계획에 따른 조선(造船)으로 고려 국내의 목재가 거의 고갈되어 해군력이 약화되었고, 이는 이후 잇따른 왜구의 침입에 고전하게 된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1272년(문영(文永) 9년/지원 9년), 고려 국왕 원종의 아들 왕세자 심(諶)(후의 충렬왕)은 원의 쿠빌라이에게 “일본은 아직 폐하의 성스러운 감화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명령을 내려 우리 군의 장비와 식량을 준비하게 하였습니다. 지금이 바로 전함과 군량을 사용해야 할 때입니다. 적지만 신인 저에게 맡겨주신다면, 힘껏 노력하여 황제의 군대를 조금이나마 도울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462]라고 아뢰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남아 있다. 조선 유성룡의 『징비록』에도 “옛날 고려가 원의 군대를 이끌고 일본을 공격했다”라고 적혀 있어, 조선 시대에도 원의 일본 원정에 대한 고려의 주도적인 관여가 있었다는 인식이 있었다.[463]

원사』에 따르면 고려 국왕 충렬왕은 홍안의 역 이후 “고려 국왕, 스스로 배 150척을 만들어 일본 정벌을 돕겠다.”라며 150척의 군선을 직접 만들어 일본 원정을 지원하겠다고 쿠빌라이에게 상소하였다.[374]

고려는 몽골 제국의 침략 이전에는 무신이 왕을 꼭두각시로 삼아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원종, 충렬왕 이후의 고려 국왕은 몽골 제국의 병력을 빌려 왕권을 되찾았다. 그 이후 고려 왕은 대부분 몽골 제국에 의존하여 몽골식 이름을 받고, 몽골 제국 황제의 딸을 왕비로 맞아 황제인 쿠빌라이 왕가의 사위(큐레겐, 그레겐)가 되는 인척 관계, 즉 “부마 고려국왕가”가 되었다.[464] 이처럼 몽골 제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충렬왕이 자신의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쿠빌라이의 뜻을 따르려고 이러한 발언을 했다는 견해가 있다.

7. 2. 가마쿠라 막부의 쇠퇴

원나라의 침공과 미나모토노 가문 후손 단절로 인해 일본 민심이 흔들리고, 전쟁으로 가마쿠라 막부 정권이 쇠퇴하면서 세력이 분열되어 남북조 시대로 넘어가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일본으로서는 최초로 받은 외부 세력의 대규모 공격이었다.[19]

일본은 방어전이었기에 새롭게 획득한 영토가 없었고, 따라서 가마쿠라 막부는 전투에 참가한 고케닌(御家人)들에게 상을 내릴 수 없어 권위가 약화되었다.[21] 이후 왜구(倭寇)에 가담하는 일본인의 수가 증가하기 시작했고, 중국과 고려 연안에 대한 공격이 강화되었다.[1]

1274년 1차 침입(문영의 역) 이후, 막부는 석축지 건설과 이국경고번역 설치 등 하카타만 방비를 강화했지만, 전투에서 물질적으로 얻은 것은 없었고, 은상은 고케닌들을 불만하게 만들었다. 타케자키 스에나가는 가마쿠라까지 가서 직접 막부에 호소하여 은상을 얻었다.

1281년 2차 침입(홍안의 역) 이후, 막부는 원군의 재침을 대비하여 고케닌 통제를 강화했지만, 충분한 은상이 지급되지 않았다. 규슈 북부 주변에 동원된 이국경고번역도 가마쿠라 시대 말기까지 계속되어, 전비로 궁핍해진 고케닌들은 빚에 시달렸다. 막부는 덕정령을 발포하여 고케닌의 곤궁에 대응하려 했지만, 불만은 해소되지 않았다.

13세기 중반부터 진행되던 일본 사회 변동은 원구의 영향으로 더욱 가속화되었다. 빚이 탕감된 고케닌도, 상인들이 덕정령을 경계하여 고케닌과의 거래·융자를 꺼리게 되어 자금 조달에 궁지에 몰려 몰락했다. 고케닌 계층 몰락과 함께 신흥 계층인 악당 활동이 활발해지고, 가마쿠라 막부에 불신감을 품는 고케닌들이 속출했다. 이는 결국 가마쿠라 막부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다.

가마쿠라 막부가 여성의 소령 지행을 제한·금지하는 방침을 명확히 한 것은, 원구에 대한 이국경호체제 유지와 관련 있다는 견해도 있다. 이는 중세 후기 이후 부계 직계 단독 상속과 근세, 근대의 가부장제에서 여성의 무권리 상태가 성립해 가는 배경으로 간과할 수 없다.[441]

7. 3. 몽골 제국의 추가 원정 계획과 중단

남송에서의 반란으로 인해 3차 정벌 준비는 도중에 무산되었다.[19] 패배한 몽골 제국은 해군력 대부분을 상실했고, 해상 방어 능력은 크게 저하되었다.[20] 침략을 위해 조선 수군의 조선 건조를 담당했던 고려 역시 목재의 대량 벌채로 인해 함선 건조 능력과 해상 방어 능력을 상실했다.[21] 반면 일본은 방어전이었기에 새롭게 획득한 영토가 없었고, 따라서 가마쿠라 막부는 전투에 참가한 고케닌(御家人)들에게 상을 내릴 수 없어 권위가 약화되었다.[21] 이후 상황을 이용하여 왜구(倭寇)에 가담하는 일본인의 수가 증가하기 시작했고, 중국과 고려 연안에 대한 공격이 강화되었다.[1]

전쟁의 결과로 중국에서는 일본인이 용감하고 잔혹하며 일본 원정이 무의미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명나라 시대에는 일본 원정이 세 차례 논의되었지만, 이 전쟁의 결과를 고려하여 결코 실행되지 않았다.[22][23][24]

1279년(고안 2년/지원 16년) 2월, 쿠빌라이는 양주, 호남, 감주, 취주 4성에서 일본 침공용 전함 600척 건조를 명령했다.[274] 그중 200척은 아랍계 이슬람교도인 색목인·포수갱에게 건조를 명령했다.[275] 같은 해 5월, 쿠빌라이는 제주도에서 군선 건조용 목재 3,000척 분을 공출하게 하고[276], 6월에는 900척의 건조를 고려에 명령했다.[69]

1280년(고안 3년·지원 17년)경, 쿠빌라이는 일본 침공군의 사령부·일본행성(정동행성)을 설치한다.[283]

1281년(고안 4년·지원 18년) 2월, 쿠빌라이는 침공에 앞서 수도·대도에 일본 침공군의 사령관인 아라칸(阿剌罕), 범문호, 힌두(忻都), 홍차구 등 여러 장수를 소집하여 연설했다.[284]

가마쿠라 막부는 고려 원정 계획을 발표했다.[369] 막부는 쇼니 쓰네스케 또는 오토모 요리야스를 대장군으로 삼고, 3개 국의 고케닌을 주력으로 고려 원정을 계획했다.[370] 그러나 제2차 고려 원정 계획은 갑자기 중단되었다.[371] 한편, 쿠빌라이도 일본의 반격을 경계하여 고려의 금주 등에 진변만호부를 설치하여 일본군의 침략에 대비했다.[372]

제2차 원정(홍안의 역)에서 패배한 원은 이듬해인 1282년(고안 5년·지원 19년) 1월 일단 일본 원정의 사령부인 일본행성을 폐지했지만[373], 쿠빌라이는 일본 원정을 포기하지 못하고 다시 일본 원정을 계획했다. 같은 해 7월, 쿠빌라이의 재침략 의향을 알게 된 고려 국왕 충렬왕은 150척의 군선을 건조하여 일본 원정을 돕겠다는 뜻을 쿠빌라이에게 아뢰었다.[374] 같은 해 9월, 제2차 일본 원정(홍안의 역)에서 대부분의 군선을 잃은 원은 평란, 고려, 탐라, 양주, 륭흥, 취주에서 새롭게 크고 작은 3,000척의 군선 건조를 시작했다.[375]

1283년(고안 6년·지원 20년) 1월, 일본 원정의 사령부인 일본행성을 재설치했다. 아타카이(阿塔海)를 일본행성 승상에 임명하여 일본 재침략의 총사령관으로 삼았다.[379]

1284년(고안 7년/지원 21년) 2월, 쿠빌라이는 고려에서의 조선을 중단시켰다.[394] 같은 해 5월 쿠빌라이는 일본행성을 폐지하고 다시 일본 침공 계획을 중단했다.[396]

1294년(영인 2년/지원 31년) 1월, 대원 초대 황제 쿠빌라이가 죽었다. 쿠빌라이의 죽음에 따라 고려에서의 조선은 중단되었고, 여러 차례 제기되었다 사라졌던 일본 원정 계획은 마침내 중단되었다.[425]

7. 4. 문화적 영향

호조 도키무네와 그의 선사인 북조의 선종 불교는 국경을 넘어 신뢰를 얻었고, 사무라이들 사이에서 선종 가르침을 따르는 첫 대규모 추종자들이 번창하기 시작했다.[25] 실패한 침략은 "신풍(神風, kamikaze)"이라는 단어의 첫 사용을 의미한다.[25] 첫 번째 침략에서 몽골 해군의 패배에 도움이 된 태풍이 정상적인 태평양 태풍 계절(5월~10월)이 지난 11월 말에 발생했다는 사실은 일본이 결코 패배하거나 성공적으로 침략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굳히는 데 기여했다.[25] 이러한 믿음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일본 외교 정책의 중요한 측면으로 남았다.[25]

문영의 역에서 원나라 군대가 신풍(神風)으로 궤멸하고 일본 측이 승리했다는 설이 유포된 배경에는 당시 일본 국내에서 원나라의 침략을 일본의 신과 이적(異賊)의 싸움으로 보는 관념이 공유되었기 때문이다. 신사와 절의 포교와 기도는 일본 신의 힘을 강하게 한다고 믿었기에, 원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요인은 신력(神力)·신풍(神風)이라고 신사 등은 선전하며 막부에 상벌을 요구했다.

예를 들어, 공가(公家)인 히로하시 카네나카는 ‘간츄키(勘仲記)’에서 “역풍(逆風)의 일은, 신명(神明)의 가호(神明のご加護)”[227]라고 신에게 감사하고 있다. 1276년 관선지(官宣旨) 문장에도 “몽고의 흉적(凶賊) 등이 칭세이(鎮西)에 도착하여 합전을 했는데, '''신풍(神風)'''이 사납게 불어 이적(異賊)은 목숨을 잃고 배를 버리거나 해저에 가라앉거나, 또는 만(灣)이나 포구(浦)에 밀려왔다. 이것은 곧 영신(霊神)의 정벌(征伐), 관음(観音)의 가호(加護)에 틀림없다”[226]라고 하며, 당시부터 원군을 덮친 폭풍우를 신풍(神風)이라고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적국 조복(敵國調伏)과 가지 기도(加持祈祷)에 의해 일본의 신과 불(佛)도 전투에 동원되어 원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는 관념은 각 사(社)의 “신신에 의한 군충장(軍忠狀)”이라는 형태로 나타났고, 전후에도 막부에 각 사(社)의 상벌 요구가 격렬했다.[243] 막부는 이러한 각 사(社)의 군충장(軍忠狀)에 대해 신령흥행(神領興行)령이라고 불리는 덕정령(德政令)을 각 사(社)에 3번이나 발표하여 상벌에 충당했다.[246]

1281년, 홍안의 역 한 달 전, 남송 출신 승려 무학조원은 호조 도키무네에게 “막번뇌(莫煩悩)”라는 글을 주고[285], “막직거(驀直去)”라고 전하며, “막직(驀直)”하게 앞으로 나아가 회고하지 말라고 전했다.[285] 이는 후에 “막직전진(驀直前進)”이라는 고사성어가 되었다. 무학조원에 따르면, 도키무네는 선(禪)의 대오(大悟)로 정신을 지탱했다고 한다.[285]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는 마르코 폴로가 전해들은 홍안의 역에 관한 기록이 있다.

몽고퇴산을 기원하는 니치렌. 가츠시카 이사이 그림


니치렌은 『입정안국론』에서 자신이 예상했던 외국의 침략이 원나라의 침입으로 실제로 일어나자, 이를 자신의 예측이 적중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묘법연화경』 수행자로서의 확신을 더욱 강하게 했다. 정토교를 민간에 널리 알린 일편의 염불춤에서 볼 수 있는 열광적인 배경에는 원나라의 침입으로 인한 긴박감과 종말론적인 감정이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442]

이후 일본에서는 원나라-고려 연합군이 일본을 침략하여 학살을 자행한 원몽고침입(元寇)을 계기로 "몽골과 고구려의 귀신이 온다"라며 두려워하게 되었다. 이것이 변하여 무서운 존재의 대명사로서 아이들을 훈육할 때 "무쿠리코쿠리(むくりこくり), 귀신이 온다"라고 협박하는 풍습 등으로 이어졌고, 요괴로 변하여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모꼬(モッコ)의 자장가'처럼 "울면 산에서 모꼬가 온다, 울지 말고 잠자라"와 같이 옛 원몽고침입의 기억을 자장가로 만든 것 등, 위와 같은 잔혹 행위에 대한 공포를 증명하는 민간 전승은 전국에 존재한다.

8. 군사적 측면

원나라 군대는 일본군에 비해 진보된 무기와 전술을 사용했다. 특히,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원나라 군은 독화살과 테츠하우를 사용하여 일본군을 압도했다.[181] 『하치만구도훈』에는 몽골군의 집단전술에 일본군이 고전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현대 연구에서는 일본군도 집단 전술을 사용했으며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182]

다케자키 스에나가가 그리게 한 『몽골침입화첩』에는 일본 무사들이 기병을 밀집시켜 집단 전투를 벌이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183] 이는 당시 일본군도 집단 전술을 사용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왕윤은 그의 저서 『범해소록』에서 일본 무사들이 기병을 결속하여 싸웠다고 기록했다.[188]

7월 27일, 다카시마 앞바다에서 일본군 함선이 원나라 함대를 공격하여 해전이 벌어졌다.[331] 이 전투는 낮부터 새벽까지 계속되었고, 새벽에 일본군은 철수했다. 일본 측 자료가 없어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원나라는 이 전투에서 초토사 혹토하스(忽都哈思)가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56] 원나라는 다자이후를 향해 진격하려 했지만, 규슈 본토 상륙을 주저하고 다카시마에 머무르며 방어 시설을 구축했다.[73]

윤 7월 5일, 일본군은 이마리 만 해상의 원나라 군대에 총공격을 개시했다. 히고국고케닌 다케자키 스에나가 등이 원나라 군선을 공격했고,[349] 지쿠고국지토 고사이 도케이 등은 원나라 군선에 탑승하여 원나라 병사의 목을 베었다.[350] 일본군은 이 전투에서 원나라 군선을 거의 전멸시켰다.

윤 7월 7일, 일본군은 다카시마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했다.[351] 분고국고케닌 도고 고레치카 부자 등이 상륙하여 원나라 군과 전투를 벌였다.[355] 해상에서도 일본군이 원나라 군선을 불태우는 등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359] 이 전투로 10만 명이 넘는 원나라 군이 괴멸되었고, 일본군은 2만~3만 명의 포로를 잡았다.[76]

8. 1. 집단 전술과 무기

몽골의 침입은 중국 이외 지역에서 벌어진 초기 화약 전쟁의 한 예시이다. 이 전쟁에서 주목할 만한 기술적 혁신 중 하나는 폭발성 폭탄의 사용이었다.[2] 이 폭탄은 중국어로 "뇌전폭탄"으로 알려져 있으며, 투석기에서 발사되어 적군에게 피해를 입혔다.

다카시마 난파선에서 발굴된, 일본어로는 '철포(てつはう)' 또는 중국어로는 '진천뢰(震天雷)'로 알려진 도자기 폭탄, 2011년 10월


일본 몽골 침략 그림에는 폭탄의 그림이 묘사되어 있지만, 토마스 콘란은 이 그림이 18세기에 추가된 것이며 당시 사용 상황을 목격한 묘사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26] 그러나 콘란의 주장 이후 고고학적 발견으로 원 침략군의 무기고에 폭탄이 존재했음이 확인되었다. 큐슈 오키나와 수중고고학회는 일본 해안 바닷속 난파선에서 여러 개의 폭탄 잔해를 발견했다. 일본 과학자들이 발굴된 잔해에 대해 X선 촬영을 한 결과, 화약이 들어 있었고 철 조각들로 채워져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27]

원군은 침략 당시 대포를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1300년경에 쓰여진 『일본국조직시(日本國祚國史)』는 1274년 쓰시마 전투와 1281년 홀돈이 이끈 두 번째 해안 공격에서 '화통(火筒)'을 언급하고 있다. 1360년의 『하치만구도군(八幡愚童訓)』은 발사 시 섬광과 큰 소리를 낸 철제 '포(炮)'를 언급한다. 『태평기(太平記)』는 종 모양의 무기로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수천 개의 철구를 발사했다고 언급한다.

다케자키 스에나가(武藏介宗長)와 도망치는 몽골인들


정식 명칭은 진천뢰|震天雷중국어 또는 철화포(鉄火砲)라고 불리는 수류탄에 해당하는 파열탄이다. 용기는 철제와 도자기제가 있으며, 용기 안에 폭발력이 강한 화약을 채워 사용한다. 사용법은 도화선에 불을 붙여 사용한다. 형태는 구형이며 지름 16~20cm, 총중량은 4~10kg(약 60%가 용기의 무게, 나머지는 화약)이다.

2001년(헤이세이 13년), 나가사키현의 다카시마 해저에서 "테츠하우" 실물이 2개 정도 발견되어 인양되었다. 하나는 반구형, 다른 하나는 지름 4cm의 구멍이 뚫린 지름 14cm의 소성(素燒) 용기로 무게는 약 4kg이었다. 이 "테츠하우"에는 녹슨 흔적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철편을 용기 안에 넣고 폭발시 철편이 주위에 흩어져 살상력을 높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和弓의 첫 번째 특징은 활의 길이가 약 2.2m로 세계 최대의 장궁이었다는 점이다. 장궁은 화살을 당기는 길이(시척)를 늘여 활의 위력을 증대시킨다는 것을 의미하며, 현존하는 가마쿠라 시대의 화살로 미루어 볼 때 80~90cm 전후의 시척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두 번째 특징은 활을 잡는 위치이다. 일본 이외의 활은 잡는 위치가 활의 중앙인 반면, 和弓은 위에서부터 2/3 지점보다 아래쪽을 잡도록 되어 있으며, 단하장상(短下長上) 구조를 하고 있었다.

세 번째 특징은 「弓返(유가에리)」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것은 화살이 발사된 직후, 활을 잡는 왼손 안에서 활이 시계 반대 방향으로 거의 1회전하는 것을 말한다.

한편, 몽골궁은 길이가 1.5m~0.6m로 단궁이다. 활은 소의 뿔과 힘줄, 나무를 조합하여 만들어졌다.

8. 2. 해전과 선박



; 아카사카 전투 추격전

: 아카사카 전투에서 패주한 원나라 군대 대부분은 소하라산(소하라야마)이 있는 소하라로 향했고, 소규모 부대는 벳푸(베푸)의 츠카하라로 도망쳤다.[184] 츠카하라로 도망친 일부 원나라 군대는 소하라에 있는 원나라 군대 본대에 합류하려고 사라군에 있는 도이가이가타(토리카이가타)[190]를 지나 도망치려 했지만, 히고고케닌・다케자키 스에나가 등 일본군이 이를 추격했다.[191]

; 도이가이가타 전투

: 소하라 일대에 진을 치고 있던 원나라 군대는 징과 북을 빨리 치는 것처럼 울리며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191] 다케자키 스에나가는 선봉을 서려 했으나, 랑당・후지겐타 스케미츠는 아군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전공의 증인을 세운 후 전투를 하라고 간언했다. 하지만 다케자키 스에나가는 이를 무시하고 원나라 군대에 선봉을 섰다.[191] 원나라 군대도 소하라에서 도이가이가타를 향해 전진하여 도이가이가타의 시오야 소나무 아래에서 다케자키 스에나가 주종과 충돌했다.[192]

: 다케자키 스에나가 주종은 원나라 군대의 화살을 맞고 다케자키 스에나가, 미츠이 스케나가 등 세 명이 부상당하는 위기 상황에 빠졌지만,[193] 시라이시 미치야스가 이끄는 100여 기가 도착하여 원나라 군대에 돌격을 감행했기 때문에 원나라 군대는 소하라산 진지로 물러났다.[192]

: 히젠의 고케닌・후쿠다 카네시게의 문서에 따르면, 사라군에서 원나라 군대가 상륙하자 무사들에게 사라군으로 달려가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후쿠다 카네시게 등 일본군은 도이가이가타에서 원나라 군대와 조우하여 충돌했다.[181] 분고의 고케닌・토고 코레치카(토고우 코레치카)는 도이가이가타 전투에서 분전하여, 후에 분고 슈고・오토모 요리야스로부터 서하를 받았다.[194] 이들 무사들의 분전으로 원나라 군대는 도이가이가타에서 일본군에게 패배하여 햐쿠도하라[190]로 패주했다.[181]

; 햐쿠도하라・메이하마 전투

: 도이가이가타 전투에서 패배한 원나라 군대를 뒤쫓아 일본군은 햐쿠도하라까지 추격했다.[181]

: 『사이즈씨 계보』에 따르면, 햐쿠도하라 전투에서 분고의 고케닌・히타 나가모토 등이 분전하여 원나라 군대를 격파했고, 햐쿠도하라 서쪽의 메이하마[190] 전투에서 하루에 두 번 원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했다고 한다.[195]

: 『무토 계도』쇼니 케이시전에는 햐쿠도하라에서 원나라 군대의 좌부도원수로 추정되는 몽골군 장수가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고 적혀 있으며,[197]신원사』류후크행 전에도 햐쿠도하라에서 쇼니 케이시에 의해 류후크행이 사살되었기 때문에 원나라 군대가 후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98]

; 도이가이가타 전투에 대해

: 이 전투에는 일본군 총대장 쇼니 케이시와 오토모 요리야스가 참가했을 것으로 보이며,[199] 분고, 히젠, 히고, 치쿠고 등 큐슈 각지에서 온 무사들이 참전한 것으로 확인되므로, 도이가이가타 전투는 일본군이 총력을 기울인 분에이(문영)의 역에서의 일대 결전이었다는 견해가 있다.

; 강남군의 히라도섬·타카시마 도착

: 6월 하순, 경원(慶元)(명주(明州))·정해(定海) 등에서 출항한 강남군 주력은 7일 밤낮으로 항해하여 히라도섬과 타카시마에 도착했다.[55][73] 히라도섬에 상륙한 도원수 장희가 이끄는 4,000명의 군세는 성을 쌓고 진지를 구축하여 일본군의 습격에 대비하는 한편, 선박은 풍랑에 대비하여 50보 간격으로 히라도섬 주변에 정박시켰다.[320]

: 7월 27일, 鷹島(나가사키현) 앞바다에 정박한 원나라 함대에 대해 집결한 일본군 함선이 공격을 가하여 해전이 벌어졌다. 전투는 낮부터 새벽까지 장시간 지속되었고, 새벽이 되자 일본군은 철수했다.[331] 이 해전에 대해서는 일본 측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원나라는 그동안의 전투로 초토사 혹토하스(忽都哈思)가 전사하는 등의 피해를 입었다.[56] 그 때문인지 원나라는 다자이후를 향해 진격하려 했지만, 규슈 본토 상륙을 주저하고 鷹島(나가사키현)에서 진군을 멈추었다.[73] 『장씨묘지명』에 따르면, 鷹島(나가사키현)는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해 군선이 나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한다.[55] 鷹島(나가사키현)에 머무른 원나라 군대는 토성을 쌓는 등 방어 시설을 구축하여 일본군의 상륙에 대비했다.[362] 또한, 원나라 함대는 배를 묶어 요새로 만들고, 이를 지주총파 마하마드(馬馬)에게 방어하게 했다.[55]

: 7월 30일 심야[67][362], 태풍이 덮쳐[334] 원나라 군선 대부분이 침몰 또는 파손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 원나라 군대의 피해 상황

: 『장씨묘지명』에 따르면, 태풍으로 인한 거친 파도는 “산과 같았다”고 하며, 군선끼리 충돌하여 침몰하고, 원나라 병사들은 소리치며 익사하는 자가 무수히 많았다고 한다.[55] 원나라 문인 주밀의 『계신잡식』에 따르면, 원나라 군선은 태풍으로 인해 함선끼리 충돌하여 부서졌고, 약 4,000척의 군선 중 잔존 함선은 200척이었다고 한다.[336] 하지만, 강회전함 수백 척이나 여러 장수들은 태풍 피해를 면했고, 동로군의 고려선 900척의 태풍 피해도 경미했던 것으로 보아 『계신잡식』의 잔존 함선 200척이라는 기록은 과장일 가능성이 있다.

; 원나라 장수 등의 상황

: 『元史』 등에는 태풍을 맞은 원나라 장교들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강남군의 일본행성 좌승 이정은 태풍으로 인해 자신의 군선이 침몰하고, 부서진 선체 파편을 붙잡고도 겨우 해안에 도착했다.[71]

; 문영의 역의 원나라 군선

: 원나라 군대가 후퇴하던 중 폭풍우를 만났던 문영의 역에서 고려는 군선 건조에 “만양(南宋양식)”의 배(竜骨(선)|용골을 가진 격벽 구조의 배)를 사용했더라면 건설비가 많이 들고 기한 내에 완성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고려 양식의 배를 건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444]

; 홍안의 역의 원나라 군선

: 홍안의 역에서 태풍으로 원나라 군선이 침몰한 이유로, 배의 건조가 정복한 고려인과 남송인에게 맡겼기 때문에 조잡하게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부실 공사를 뒷받침하는 사료는 없고, 오히려 원나라 관리 왕윤의 글 『범해소록』이나 『고려사』에는 고려 배가 튼튼했던 것이 지적되어 있으며, 실제로 고려 배로 생환한 사람이 많았다.

나가사키현마쓰우라시의 해저 유적 “다카시마 유적”에서 발견된 원나라 침몰선 조사 결과, 원나라 군선의 선저는 이중 구조로 되어 있으며, 튼튼하게 만들어졌다는 것이 밝혀졌다. 류큐대학 교수 이케다 에이지(池田栄史)는 선저에 안쪽에서 목재를 덧대어 이중으로 보강함으로써 물이 들어오지 않도록 고안한 것으로 보이며, 당시 무역선에서는 볼 수 없는 튼튼한 구조였다고 설명했다. 이케다 에이지는 “(원나라 군선은) 정교한 조립 방식을 하고 있으며, 조잡하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을 것”이라며 조잡하게 만들었다는 설에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445] 발견된 원나라 군선의 전장은 25~27m 정도로 추정된다.[446] 또한, 선체와 별도로 발견된 가장 큰 닻의 일부로 추정할 수 있는 최대급의 원나라 군선은 40m에 달한다는 견해도 있다.[447]

: 최근 해저 조사에서는 나가사키현탁시마 남부 해저에서 원나라 군대의 도검과 닻돌 등이 발견되었다. 바다에서 인양된 물건 중에는 원나라 군대 중대장급인 관군총파의 증표인 「'''관군총파인'''」이라고 새겨진 청동 인장이 발견되었다. 관군총파인의 인자는 원나라의 국자 파스파 문자로 새겨져 있으며, 인면 뒷면 왼쪽에는 한자로 「중서례부 지원십사년(1277년) 9월 일 조」라는 글자가 보인다.[452]

2011년 10월 24일, 류큐 대학 교수 이케다 에이지의 연구팀이 이마리 만 탁시마 앞바다 해저에 침몰해 있는 침몰선을 원나라 원정 때의 원나라 군선으로 판정했다고 발표했다.

9. 역사적 평가와 논쟁

하치만 신의 영험·신덕을 설명하고 문영의 역을 상세히 서술한 일본 측 문서인 『하치만구동훈』에는, 무사들이 막부에 제출한 문서와는 달리 “일본 무사들은 몽골군에게 패배하여 내륙 깊숙이 밀려났지만, 야간에 나타난 신의 군세가 하룻밤 사이에 몽골의 선단을 몰아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일본 병사들은 일기일회로는 졌지만 신풍으로 기적적으로 승리했다”는 속설의 근거가 되지만, 신뢰성은 낮다.[201]

원군에 맞서 진제봉행 쇼니 스케요시의 손자 쇼니 스케토키가 관습에 따라 가뢰를 쏘았지만, 원군은 이를 조롱하며 을 쳐서 일본의 말들을 놀라게 했다.[202] 원군의 활은 짧지만 화살촉에 독을 발라 비처럼 쏘았고, 돌격한 자들은 포위되어 죽임을 당했다.[202] 『하치만구동훈』은 원군의 모습을 “갑옷이 가볍고, 말을 잘 타며, 강하고 용맹”하며, “대장은 높은 곳에서 북을 쳐서 군대를 지휘했다”고 묘사한다.[203] 또한, 물러날 때는 “철포”를 사용하여 추격을 방해했다.[203]

쇼니 케이시 등이 방어에 힘썼지만, 원군은 일본군을 연파하고 하코자키까지 난입하여 많은 포로를 잡았다.[205] 일본군은 수성으로 후퇴했고, 류 후크헹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사살되기도 했지만,[206][207] 결국 하카타를 버리고 후퇴했다.[205] 10월 21일 아침, 원군은 하카타만에서 철수했다.[208]

원군의 철수 이유에 대해 『하치만구동훈』은 하치만 신의 화신이 나타나 원군을 물리쳤다고 전한다.

『금강집』에는 원군 철수 후 시가섬에 좌초된 원군 선박 1척에서 약 130명의 원병이 참수되거나 포로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치만구동훈』에는 시가섬에 좌초된 병선의 대장이 투신자살하고 약 220명이 참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208] 『금강집』에는 100척이 넘는 원군 선박이 표착하고 4명의 원군 포로가 생겼다고 기록되어 있다.[224] 『황년대략기』에는 10월 30일에 대재부(大宰府)에서 교토로 이 사실을 보고했다.[225] 『안국론사초』에는 11월 24일, 쓰시마(対馬) 1척, 이키(壱岐) 130척 등 여러 곳에 원군의 배가 부서져 표착했다는 정보가 있었다.[48]

히로하시 카네나카(広橋兼仲)의 일기 『간추기(勘仲記)』에는 "적선 수만 척이 해상에 떠 있었는데, 갑자기 역풍(남풍)이 불어와 본국으로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다.[227] 『사쓰마규키(薩摩旧記)』에는 "신풍(神風)이 거세게 불어 이적(異賊)은 목숨을 잃었다"는 기록이 있다.[226] 『역대황기(歴代皇紀)』에는 10월 20일 일본 병선 300척이 추격 중 표류하는 원군 선박 200척을 발견했다는 기록이 있고,[41] 『안국론사초』에는 11월 9일 유키노세 항구에 원병 150명이 표착했다.[48]

『간추기』(11월 6일 조)에는 원병 50여 명이 다이토 모리타다(大友頼泰) 군사에게 붙잡혀 교토(京都)로 호송된다는 기록이 있다.[227]

가마쿠라 막부(鎌倉政権)에는 원군이 쓰시마(対馬)에 침략했다는 소식이 늦게 전해졌다.[228] 『간추기』(10월 29일 조)에는 막부에서 원군 토벌 파병 논의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229]

11월, 호죠 토키무네(北条時宗)는 혼슈(本州) 상륙에 대비하여 동원령을 발하고, 막부의 영향력이 증대되었다.[230][231][232][233] 11월 6일, 교토에 승전보가 전해진다.[234][235] 『제왕편년기(帝王編年記)』에는 "몽고와 무사가 합전하여 적선 1척을 빼앗았다"는 보고가 실려 있다.[234] 『고단법일기(五檀法日記)』에도 "몽고군 병선은 도망쳤다"는 보고가 실려 있다.[235]

막부는 승전보를 접하고 문영의 역에서 공적이 있었던 고케닌 120여 명에게 포상을 내렸다.[236]

9. 1. 원정 목적

몽골 제국은 사전에 100명에서 10,000명 규모의 위력 정찰을 여러 차례 실시한 후, 본격적인 침공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칭기즈칸부터 오고타이 시대에 걸쳐 행해진 금나라 침공에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군사 행동에 앞서, 또는 병행하여 사절을 파견하여 복속을 요구했으며, 침공한 지역에서 약탈이나 교전은 있었지만, 영토 정복을 하지 않고 군대가 철수하는 경우도 있었다.[449]

원사』에는 문영의 역에서 원군의 화살이 떨어졌다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 주력 무기였던 화살이 곧바로 떨어질 정도의 준비로 왔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는 점과 일본 정복을 위한 병력이 33,000명 정도로 적다는 점을 위력 정찰의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원군의 일본 이외 파병 병력은, 삼별초의 난 진압전에서는 약 12,000명[125], 사할린 침공에서는 최대 10,000명[84], 자바 침공에서 20,000명[450]으로, 문영의 역의 병력은 다른 침공과 비교해서 결코 규모가 작은 것은 아니었다. 또한, 정찰 목적임을 뒷받침하는 사료는 없으며, 『원사』의 화살이 떨어졌다는 기록 앞에 "관군(원군) 정비 불량"이라는 철수 이유가 기록되어, 일본군과의 전투에 이르러 편성이 흐트러지고 철수하기로 결정한 원군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으며, 예정대로 철수했다고 쓰여 있지 않다.[211]고려사』에서도 원군은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을 만나 병력 부족을 고려한 결과, 원군의 총사령관인 홀돈이 철수를 결단했다고 기록되어 있다.[214]

남송 멸망 후의 홍안의 역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구 남송군을 주력으로 한 강남군 10만 명에 대해서는 군대 겸 이민단이었다는 견해가 있다.[451] 원래 남송은 금으로 병사를 모집하는 모병 형태를 취하고 있었고, 수는 많지만 긁어모은 병사들이라 사기·충성심이 낮고 전투 능력도 높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구 남송군의 새로운 고용처로 받아들인 것은 원나라에게 부담이었으며, 군대를 해산하면 직업을 잃은 다량의 병사들이 사회 불안의 요인이 된다는 것이지만, 정복한 현지 병사를 다음 전쟁에 투입하는 것은 몽골 제국에서 창건 초기부터 자주 행해졌으며, 일본과의 싸움 때만 특히 강조해야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에도 시대 후기의 국학자 다치바나 모리베는 원구가마쿠라 막부호조씨와 원나라가 결탁하여 벌인 자작극이라는 설을 주장했다. 덴포 시대의 국학 4대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모리베가 이러한 허황된 설을 주장한 배경은 불명확하지만, 일설에는 호조 시종을 높이 평가했던 국학자 모토오리 노리나가에 대한 앙갚음이었다고 한다.

9. 2. 신풍(가미카제)의 역할

일반적으로 '가미카제'(神風)는 몽골의 일본 원정 당시 일본을 구원한 신성한 바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신풍의 역할에 대해서는 다양한 역사적 기록과 해석이 존재한다.
일본 측 기록:

  • 하치만구동훈: 이 문서는 하치만 신의 영험과 신덕을 설명하며, 문영의 역(1차 원정) 당시 일본 무사들이 몽골군에게 크게 패배했지만, 밤에 나타난 신의 군세가 하룻밤 사이에 몽골 함대를 몰아냈다고 전한다. "일본 병사들은 일대일 대결에서는 졌지만 신풍으로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었다"는 속설의 근거가 되지만, 신뢰성은 낮게 평가된다.[201]
  • 간츄키: 히로하시 카네나카는 그의 일기에서 "역풍(逆風)은 신명의 가호(神明のご加護)"[227]라고 기록하여, 당시 사람들이 폭풍우를 신의 도움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 1276년 관선지: "몽골의 흉적(凶賊) 등이 칭세이(鎮西)에 도착하여 합전을 했는데, '''신풍(神風)'''이 사납게 불어 이적(異賊)은 목숨을 잃고 배를 버리거나 해저에 가라앉거나, 또는 만(灣)이나 포구(浦)에 밀려왔다. 이것은 곧 영신(霊神)의 정벌(征伐), 관음의 가호(加護)에 틀림없다"[226]라는 내용이 있어, 당시부터 폭풍우를 신풍으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원나라 측 기록 (고려사):

  • 고려사 김방경: 원군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고전했으며, 군의에 따라 퇴각을 결정했다. 일본에서 철수하는 도중 폭풍우를 만났다고 기록되어 있다.[214]

종합적 해석:

  • 일본군의 분전: 『제왕편년기』, 『오단법일기』, 『관동평정중전』 등의 일본 측 사료에서는 일본군이 원군을 격퇴했다고 보고하고 있어, 일본군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234][235][242]
  • 태풍의 시기: 11월 하순에는 태풍이 오는 일이 드물기 때문에, 원군이 만난 것은 단순한 강풍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기상학적 분석도 있다.
  • 신국(神國) 사상: 당시 일본에서는 원나라의 침략을 일본의 신과 이민족의 싸움으로 보는 관념이 퍼져 있었다. 사찰과 신사는 신의 힘을 강조하며 신풍을 선전했고, 이는 가미카제 특공대까지 이어지는 신국 사상의 배경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신풍은 몽골의 일본 원정 실패에 영향을 미친 요인 중 하나로 볼 수 있지만, 일본군의 저항과 원정 시기의 불리함 등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한 결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10.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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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 書籍 日のたいしやう(大将)たさい(太宰)のせうに三らうさゑもんかけすけ(少弐三郎左衛門景資)、はかた(博多)のおき(息)のハま(浜)をあひかた(固)めて、一とう(一同)にかせん(合戦)候へしと、しきりにあひふれられ候しによて、すゑなか(季長)ゝ一もん(門)そのほか(他)、たいりやく(大略)ちん(陣)をかた(固)め候なかをいて候て、
[186] 書籍 あかさか(赤坂)はむま(馬)のあしたち(足立ち)わろく候。これにひか(控)へ候ハゝ、さためてよ(寄)せきたり候ハんすらん。一とう(一同)にかけて、をものい(追物射)にい(射)るへきよし申さるゝにつきて、けんしち(言質)のやくそく(約束)をたか(違)へしとて、をのゝゝ(各々)ひか(控)へしあいた、
[187] 書籍 はかた(博多)のちん(陣)をう(討)ちいて、ひこ(肥後)のくに(国)[ ]一はん(番)とそん(存)し、すみよし(住吉)のとりゐ(鳥居)の[ ]す(過)き、こまつはら(小松原)をうちとを(通)りて、あかさか(赤坂)には[ ]かふところに、あしけ(芦毛)なるむま(馬)に、むらさきさかおもたか(紫逆沢潟)のよろひ(鎧)に、くれなゐ(紅)のほろ(母衣)をか(懸)けたるむしや(武者)、そのせい(勢)百よき(余騎)はか(計)りとみへて、けうと(凶徒)のちん(陣)を[ ]り、そくと(賊徒)を(追)ひお(落)として、くひ(首)二たち(太刀)となきなた(長刀)のさき(先)につら(貫)ぬきて、さう(左右)にも(持)たせてま[ ]とゆゝしくみ(見)へしに、たれ(誰)にてわたらせ給候そ、すゝ(涼)しくこそみ(見)え候へと申に、ひこ(肥後)のくに(国)きくち(菊池)の二郎たけふさ(武房)と申すもの(者)に候、かくおほせられ候ハたれ(誰)そとと(問)ふ、をな(同)しきうち(内)たけさき(竹崎)の五郎ひやうへすゑなか(兵衛季長)、か(駆)け候、御らん(覧)候へと申ては(馳)せむ(向)かふ。」
[188] 書籍 兵仗有弓刀甲、而無戈矛、騎兵結束。殊精甲往往代黄金為之、絡珠琲者甚衆、刀製長極犀、銃洞物而過、但弓以木為之、矢雖長、不能遠。人則勇敢視死不畏。
[189] 書籍 蒙古襲来絵詞と竹崎季長の研究 錦正社
[190] 書籍 角川日本地名大辞典 第40巻 福岡県
[191] 書籍 つかハら(塚原)よりとりかひ(鳥飼)のしほ[ひ]かた(汐干潟)を、おほせい(大勢)になりあハむとひ(退)くをお(追)かくるに、むま(馬)ひかた(干潟)にはたハ(倒)して、そのかたき(敵)をのハ(逃)す。けうと(凶徒)ハすそはら(麁原)にちん(陣)をとりて、いろゝゝ(色々)のはた(旗)をた(立)てなら(列)へて、らんしやう(乱鐘)ひま(暇)なくして、ひしめきあ(合)ふ。すゑなか(季長)は(馳)せむ(向)かふを、とうけんたすけみつ(藤源太資光)申す。御かた(味方)ハつゝき候らん、御ま(待)ち候てせう人をた(立)てゝ御かせん(合戦)候へ、と申を、きうせん(弓箭)のみち(道)さき(先)をも(以)てしやう(賞)とす、たゝか(駆)けよとて、をめいてか(駆)く。」
[192] 書籍 けうと(凶徒)すそハら(麁原)より、とりかいかた(鳥飼潟)のしほや(塩屋)のまつ(松)のもと(下)にむ(向)けあハせてかせん(合戦)す。一はん(番)にはたさしむま(旗指馬)をい(射)られては(跳)ねを(落)とさる。すゑなか(季長)いけ(以下)三き(騎)いたて(痛手)を(負)ひ、むま(馬)い(射)られては(跳)ねしところに、ひせん(肥前)のくに(国)の御け人(御家人)しろいし(白石)の六郎みちやす(通泰)、こちん(後陣)より大せい(大勢)にてか(駆)けしに、もうこ(蒙古)のいくさ(戦)ひ(引)きしり(退)そきて、すそはら(麁原)にあ(上)かる。むま(馬)もい(射)られすして、ゐてき(異敵)のなか(中)にか(駆)けい(入)り、みちやす(通泰)つゝ(続)かさりせハ、し(死)ぬへかりしみなり、
[193] 書籍 はかた(博多)のちん(陣)をう(打)つい(出)て、とりかひ(鳥飼)のしおひかた(汐干潟)には(馳)せむ(向)かひ候て、さき(先)をし候てかせん(合戦)をいたし、はたさ(旗指)しのむま(馬)、おな(同)しきの(乗)りむま(馬)をいころ(射殺)され、すゑなか(季長)、三井の三郎、わかたう(若党)一人、三き(騎)いたて(痛手)をかうふ(被)り、ひせん(肥前)のくに(国)の御け(家)人しろいし(白石)の六郎せう(証)人にた(立)て候て、かけすけ(景資)のひきつ(引付)けに一はん(番)につき候し事、
[194] 書籍 蒙古人合戦事、於筑前国鳥飼濱陣、令致忠節給候之次第、已注進関東候畢、仍執達如件、文永十一年十二月七日 (大友)頼泰 都甲左衛五郎(惟親)殿 東京堂出版
[195] 書籍 文永十一年十月二十日、拒異賊於筑前國姪濱百路原両所一日二度大破之。 文献出版
[196] 書籍 文永十一年十月二十日蒙古ノ賊襲来ス 日田弥次郎永基 筑前国早良郡ニ軍ヲ出シ姪ノ浜百路原両処ニ於テ一日二度ノ合戦二討勝テ異賊ヲ斬ル事夥シ 文献出版
[197] 書籍 弘安(文永カ)蒙古出來時、蒙古大将於百道原射留ラル
[198] 書籍 戰于百道原、復亨披赤甲、縱横指揮、鋒鋭甚。日本將三郎景資射復亨墜馬、乃引軍還、
[199] 書籍
[200] 書籍 福田兼重申状
[201] 웹사이트 元寇「幕府軍が一騎打ちでボコボコにされた」は本当か 覆される元寇の常識(第1回)【JBpressセレクション】(3/5) | JBpress (ジェイビープレス) https://jbpress.isme[...]
[202] 書籍 太宰小貳三郎左衛門尉景資殿を、日大将軍として待かけたるところ、十月廿日未明より、蒙古陸地に、おしあかり、馬やにのり、旗をあけて攻めかゝる、こゝに前小貳入道覺慧孫(4オ)わつかに十二三なるか、矢合の為とて小鏑を射出したりしに、蒙古一度に、とつと笑ひ、大皷をたゝき、とらを打て鬨をつくる事おひたゝし、日本の馬も、これにおとろき、をとり、はねくるふほとに、馬をこそ刷ひしか、向はんとする時の、おくれけるうちに、射かけらる、蒙古か矢、みじかしといへとも、矢のねに毒をぬりたれは、ちともあたる処、とくに氣にまく、かくて敵より数百人、矢さきを、そ(4ウ)ろへて雨のことくに、いけるに、向ふへくもあらす、楯、鉾、長柄、物の具の、あき間をさして、はつさす、一面にたちならんて、もし、よする者あれは、中に包て引退て、左右より端をまはし合せて、とりこめて、皆ころしける、其中に、よくふるまひ死したるをは、腹をさき肝をとりてそ、のみにける、もとより牛馬の肉を、うまきものとする國なりけれは、人のみならす、いころさる□馬をも、とりて(5オ)食とせり、 三弥井書店
[203] 書籍 鎧かろく、馬に、よくのり、ちから、つよく、命をします、豪盛勇猛、自在きはまりなく、かけ引せり、大将は高き所にあかりゐて、引へき所は、逃皷をうち、駈へき時には攻皷を鳴し、それにしたかふて、ふるまへり、その引ときに、てつほうとて、鉄丸に火を包て烈しく、とはす、あたりおちて、わるゝ時、四方に火をとはし、火烟を以て、くらます、又、其音、甚高けれは、心を迷はし、きもをけ(5ウ)し、目くれ耳ふたかりて、東西をしらすなる、これかために、打るゝ者、多かり、日本の軍の如く、相互に名のりあひ、高名せすんは、一命かきり勝負とおもふ処に、此合戦は、大勢一度に、より合、足手のうこく所、われもゝゝと取つきて、おし殺し、又は生捕けり、この故に、かけ入ほとの日本人に、一人として、もれたる者こそなかりけれ、其中にも松浦いさみたりし故、おほく打れぬ、原田一類、澤田に、おひこまれ(6オ)て、うせにけり、日田、青屋二三百騎はかりにて、ひかへたり、青屋かのりたる馬、口つよくして、しねんに敵陣にそ引れたる、主人入しかは、かの手に、したかふものとも、つゝいて、かけ入たりけるに、ひしゝゝと巻こめられて、残りすくなく打死にす、主人ののりし馬、御方の陣、へ歸しにこそ、青屋伐れたりとは、しられたれ、肥後國御家人、竹崎五郎兵衛尉季長、天草城主大矢野種保兄弟、船にかゝりしほ(6ウ)とは、よくふるまひたれと、此所にいたりて、得かゝらす、白石六郎通泰も、えすゝます、こゝに山田か若者五六人、蒙古に、おひたてられ、赤坂をくたりて、のけ兜になりて、にくる処に蒙古三人、もみにもみてそ、おひかけたる、されとも、とくにけ延し事、一町あまりなりしかは、蒙古ちからなく、せめての事にや、尻をかきあけて、此方へむかひてそ、をとりける、この時、山田の逃武者とも、口をし(7オ)き事かな、奴原に、かく追立らるゝ事よと、精兵を、えらひて、いあつへきには、あらすとも、遠矢射て見む、南無八幡大菩薩、此矢、敵に當させ給へとて、何にあつよもなく、はなちけるに、あやまたす、かの二人とも射殺しつ、此とき、日本人は一度に、とつと、わらへとも、蒙古は音もせす、手負を掻具して、にけさりつ、大菩薩の御罸にあらさるほか、いかにして、かの矢の、あたるへき事あらんと、貴はさる人なく、うれし(7ウ)さ、はかりなかりけり、されとも蒙古、次第につよく、かちに乗じて攻来、今津、佐原、百道、赤坂まて乱入して、松原の中に陣を取てそ居たりける、かほとの事あるへしとは、兼ては、おもはさりけれは、妻子眷属をかくしもおかすして、数千人そ捕られにたる、 三弥井書店
[204] 書籍 はしめより軍立、思ひしにたかひて、おもてを、むくへきやうもなく、御方追々に引退て、一人も、かゝる者こそ、なくなりに(8オ)けれ、こゝに菊池次郎、おもひ切て、百騎はかりを二手に分て、おしよせて、さんゝゝにかけちらし、上になり下になり、勝負をけつし、家のこ、らうたう等、多くうたれにけり、いかゝしたりけん、菊池はかりは、うちもらされて、死人の中より、かけいて、頸とも数多とりつけ、御方の陣に入しこそ、いさましけれ、是偏に、大菩薩を深く信して、もし、勧賞あるならは、賜ひたらん一はんの物を、手向奉らん(8ウ)との立願なりし故なりとて、後に太宰府よ(ママ)より注進して、京都より賜はりし甲冑を當社へそ納めける、蒙古ハ、次第ニ、勝ニ乗(ノリ)テ責入テ、赤坂マテ乱入ル、松原ノ中ニ陣ヲトル、(中略)爰ニ菊地ノ次郎ハ、思切テ、百騎計ヲ二手ニ分テ押寄セ、散々ニ、カケ散シ、取重ナリテ勝負ヲス、蒙古ニ、郎等多ク打セテ、イカゝシタリケン、菊池計ハ死人ノ中ヨリ、ヲキ挙リ、頸共アマタ取テ、城内ヘ入シコソ、名ヲ後代ニ留ケレ 三弥井書店
[205] 書籍 (劉復)亨、中流矢、先登舟少弐入道ガ子三郎右衛門景資、(中略)究竟ノ馬乗、弓ノ上手也シカバ、逸物ノ馬ニハ乗リタリ、一鞭打テ馳延ビ見帰テ放ツ矢ニ、一番ニ懸ケル大男ガ真中射テ、馬ヨリ逆様ニ落シケリ。(中略)葦毛ノ馬ニ金覆輪ノ鞍置タルガ走廻リシヲ捕テ後ニ尋ヌレバ、蒙古ノ一方ノ大将軍流将公之馬也ト、生捕共申ケリ 岩波書店
[206] 書籍 元寇紀略
[207] 書籍 廿一日なり、あしたに松原を見れは、さはかり屯せし敵も、をらす、海のおもてを見わたせは、きのふの夕へまて、所せきし賊船、一艘もなし、こはいかに、いつくへは、かくれたる、ようへまて、いねもらやれす、(中略)よくゝゝ見れは、異賊の兵船一艘、志[賀]嶋にかゝりて、逃のこれるも見えにけり、さりけれと、あまり恐れて、さうなく、むかふ者しもあらす、かの陣とりし跡所の、いとあやしく荒れたるを見つゝ行に、こは、たゝ事なたしと、おもへと、なを、さても、おちをのゝきたる、心くせの、はなれぬは、蒙古か方より手をあはせて、をかみけれと、我ゆかんというふ人なく、たゆたひてあるに、賊とも、助船もよせこさるは、降るをたにもゆるさゝる心にこそと、おもひ切て、その中の大将、海に入てそ、うせにける、のこる敵とも、御方の地に、わたりきて、弓箭をすて、兜を脱く、其時はしめて、われもゝゝと、おしよせて高名かほに生捕にける、残る賊ともを水木岸に、引ならへて、二百二廿人、斬てけり、やうゝゝこれを、見きゝて、蒙古退散しにけり(以下略) 三弥井書店
[208] 書籍 もし、此時、日本の軍兵、一騎なりとも、ひかへたりせは、大菩薩の御戦と、いはれすして、わか高名にて、おひ返せしとも、申なさましを、一人もなく落失てのち、よるになりて、さはかりなる異賊ともの、おち恐れて、あるひは、つふ(カ)れ、あるひは、逃かへりしは、偏に神軍の威徳厳重にして、不思議、いよゝゝ顕然とあらはれ(17オ)たまひけりと、ふしをかみ貴はぬ人こそ、なかりけれ 建○○○ 此下、紙四五枚うせににけり(17ウ) 三弥井書店
[211] 서적 元史 巻二百八 列傳第九十五 外夷一 日本國 (Unspecified)
[212] 서적 元史 巻一百五十四 列傳第四十一 洪福源・附洪俊奇 (Unspecified)
[213] 서적 高麗史 巻一百四 列伝十七 金方慶 (Unspecified)
[214] 서적 高麗史 巻一百四 列伝十七 金方慶 (Unspecified)
[215] 서적 高麗史節要 巻十九 二十五葉 元宗十五年十月十一日条 (Unspecified)
[216] 서적 旧唐書 (해당 부분 출처 불명) (Unspecified)
[217] 서적 孫子 (書物) 謀攻編 (Unspecified)
[218] 서적 金剛仏子叡尊感身学正記 (Unspecified)
[219] 서적 高麗史 巻二十八 世家二十八 忠烈王一 元宗十五年(十一月)己亥(二十七日)の条 (Unspecified)
[220] 서적 呉文正集 巻八十八 大元故御史中丞贈資善大夫上護軍彭城郡劉忠憲公行状 (Unspecified)
[221] 서적 元史 巻一百六十八 列傳第五十五 劉宣 (Unspecified)
[222] 서적 元史 失里伯伝 (Unspecified)
[223] 서적 心史 大義略叙 (Unspecified)
[224] 서적 金綱集 第十二 雑録 異賊襲我国事 (Unspecified)
[225] 서적 皇年代略記 後宇多院 (Unspecified)
[226] 서적 薩藩旧記 前編巻五 国分寺文書 (Unspecified)
[227] 서적 勘仲記 (Unspecified)
[228] 서적 福岡県史 第一巻下冊 福岡県 1962
[229] 서적 勘仲記 (Unspecified)
[230] 서적 東寺百合文書ヨ 関東御教書 (Unspecified)
[231] 서적 長府毛利家文書 関東御教書 (Unspecified)
[232] 서적 諸家文書纂十一 関東御教書案 (Unspecified)
[233] 서적 北条時宗と蒙古襲来-時代・世界・個人を読む 日本放送出版協会 2001
[234] 서적 帝王編年記 (Unspecified)
[235] 서적 五檀法日記 (Unspecified)
[236] 서적 蒙古襲来絵詞 詞八 (Unspecified)
[237] 서적 高麗史 巻八十七 表巻第二 (Unspecified)
[238] 서적 高麗史 巻二十八 世家二十八 忠烈王一 忠烈王六年(十一月)己酉(十一日)の条 (Unspecified)
[239] 서적 高麗史 巻二十八 世家二十八 忠烈王一 忠烈王元年正月庚辰(八日)の条 (Unspecified)
[240] 서적 (Unspecified, 여러 출판사의 역사 교과서) 일본문교출판, 帝国書院, 扶桑社, 일본서적출판협회, 清水書院 등 2010
[241] 서적 元寇―本土防衛戦史 陸上自衛隊福岡修親会 1964
[242] 서적 関東評定衆伝 文永十一年条 (Unspecified)
[243] 서적 神風の武士像―蒙古合戦の真実 吉川弘文館 2001
[244] 서적 一代要記 (Unspecified)
[245] 서적 肥前武雄神社文書 武雄社大宮司藤原国門申状 (Unspecified)
[246] 서적 神風の武士像―蒙古合戦の真実(歴史文化ライブラリー) 吉川弘文館 2001
[247] 서적 神風の武士像―蒙古合戦の真実(歴史文化ライブラリー) 吉川弘文館 2001
[248] 간행물 薩藩舊記 島津久時書下案 東京堂出版
[249] 간행물 薩藩舊記 島津久時書下案 東京堂出版
[250] 간행물 肥前武雄神社文書 少弐経資書状案 東京堂出版
[251] 간행물 肥前深江文書 少弐経資石築地役催促状 東京堂出版
[252] 간행물 東寺文書 関東御教案 東京堂出版
[253] 간행물 野上文書 大友頼泰書下 東京堂出版
[254] 간행물 石清水文書 肥後窪田庄僧定愉請文 東京堂出版
[255] 간행물 石清水文書 肥後窪田庄僧定愉注進状 東京堂出版
[256] 간행물 石清水文書 井芹秀重西向請文 東京堂出版
[257] 간행물 石清水文書 尼眞阿請文 東京堂出版
[258] 간행물 石清水文書 持蓮請文 東京堂出版
[259] 서적 福岡県史 第一巻下冊 福岡県 1962
[260] 간행물 薩摩比志島文書 少弐経資書下 東京堂出版
[261] 서적 元史 巻二百八 列傳第九十五 外夷一 日本國
[262] 간행물 鎌倉年代記裏書 臨川書店増補版 1979-09
[263] 기타
[264] 서적 高麗史 巻二十八 世家二十八 忠烈王一 忠烈王元年(九月)戊子(二十一日)の条
[265] 서적 高麗史 巻二十八 世家二十八 忠烈王一 忠烈王元年(十月)壬戌(二十五日)の条
[266] 서적 高麗史 巻二十八 世家二十八 忠烈王一 忠烈王元年(十一月)癸巳(二十七日)の条
[267] 서적 元史 巻一百六十 列傳第四十七 王磐
[268] 서적 高麗史 巻二十八 世家二十八 忠烈王一 忠烈王二年(正月)丙子(十日)の条
[269] 서적 元史 巻一百八十 列傳第六十七 耶律希亮
[270] 서적 元史 巻十 本紀第十 世祖七 至元十六年八月戊子の条
[271] 간행물 鎌倉年代記裏書 臨川書店増補版 1979-09
[272] 간행물 中原師守『師守記』弘安二年六月二十六日・七月二十五日条 続群書類従完成会 1975
[273] 간행물 広橋兼仲『勘仲記』弘安二年七月二十五日条 八木書店 2008-05
[274] 서적 元史 巻十 本紀第十 世祖七 至元十六年二月甲申の条
[275] 서적 元史 巻十一 本紀第十一 世祖八 至元十八年二月己丑の条
[276] 서적 元史 巻十一 本紀第十一 世祖八 至元十七年五月甲寅の条
[277] 서적 元史 巻一百五十三 列傳第四十 賈居貞
[278] 서적 元史 巻一百六十 列傳第四十七 徐世隆
[279] 서적 元史 巻一百三十二 列傳第十九 昂吉兒
[280] 서적 元史 巻一百六十 列傳第四十七 王磐
[281] 書籍 高麗史巻二十九 世家二十九 忠烈王二 忠烈王五年八月の条 高麗史
[282] 書籍 元史巻十一 本紀第十一 世祖八 至元十七年二月己丑の条 元史
[283] 書籍 元史巻十一 本紀第十一 世祖八 至元十七年二月辛丑の条 元史
[284] 書籍 元史巻二百八 列傳第九十五 外夷一 日本國 元史
[285] 書籍 禅の世界 世界文化社 2006
[286] 書籍 秋澗先生大全文集巻四十 汎海小録 秋澗先生大全文集
[287] 書籍 圓鑑国師集東征頌 圓鑑国師集
[288] 書籍 呉文正集巻八十八 大元故御史中丞贈資善大夫上護軍彭城郡劉忠憲公行状 呉文正集
[289] 書籍 高麗史巻一百四 列伝十七 金方慶 高麗史
[290] 書籍 高麗史巻二十九 世家二十九 忠烈王二 忠烈王六年八月乙未(二十六日)の条 高麗史
[291] 書籍 高麗史巻二十九 世家二十九 忠烈王二 忠烈王七年 五月戊戌(三日)の条 高麗史
[292] 書籍 高麗史巻二十九 世家二十九 忠烈王二 忠烈王七年四月癸未(十八日)の条 高麗史
[293] 書籍 高麗史巻一百四 列伝十七 金方慶 高麗史
[294] 書籍 高麗史巻一百四 列伝十七 金方慶 高麗史
[295] 書籍 高麗史巻二十九 世家二十九 忠烈王二 忠烈王七年五月癸亥(二十八日)の条 高麗史
[296] 書籍 勘仲記弘安四年六月十四日条 勘仲記
[297] 書籍 弘安四年日記抄(壬生官務家日記抄)六月十五日条 元寇史料集
[298] 書籍 元史巻十一 本紀第十一 世祖八 至元十八年六月壬午の条 元史
[299] 書籍 予章記
[300] 書籍 元敦武校尉管軍上百戸張成墓碑銘
[301] 書籍 高麗史節要巻二十 十四葉 忠烈王七年六月壬申(八日) 高麗史節要
[302] 書籍 高麗史節要 高麗史節要
[303] 書籍 蒙古襲来絵詞詞十四 蒙古襲来絵詞
[304] 書籍 筑前右田家文書 大友頼泰書下案 鎌倉遺文
[305] 書籍 福田文書 平国澄起請文写
[306] 書籍 蒙古襲来絵詞絵十一 蒙古襲来絵詞
[307] 書籍 高麗史巻一百四 列伝十七 金方慶 高麗史
[308] 書籍 感渡海
[309] 書籍 金周鼎墓誌銘 第5版 高麗墓誌銘集成 2012-01-05
[310] 書籍 金方慶墓誌銘 第5版 高麗墓誌銘集成 2012-01-05
[311] 書籍 元史巻二百八 列傳第九十五 外夷一 日本國 元史
[312] 書籍 元史巻一百二十九 列傳第十六 阿剌罕 元史
[313] 書籍 元史巻二百八 列傳第九十五 外夷一 日本國 元史
[314] 書籍 至正集巻第四十五 碑志二 勅賜推誠宣力定遠佐運功臣太師開府儀同三司上桂國曹南忠宣王神道碑銘并序 至正集
[315] 書籍 墻東類稿 故武徳将軍呉侯墓志銘 墻東類稿
[316] 書籍 呉文正集
[317] 書籍 高麗史
[318] 書籍 勘仲記 八木書店 弘安四年六月廿四日
[319] 書籍 弘安四年日記抄(壬生官務家日記抄) 国民精神文化研究所 六月二十七日
[320] 書籍 元史
[321] 書籍 歴代鎮西要略
[322] 書籍 薩摩比志島文書 東京堂出版
[323] 書籍 薩摩比志島文書 東京堂出版
[324] 書籍 山代文書 続群書類従完成会
[325] 書籍 龍造寺系図 太宰府町(福岡県)
[326] 書籍 肥前龍造寺文書 東京堂出版
[327] 書籍 元敦武校尉管軍上百戸張成墓碑銘 東洋文庫
[328] 書籍 武藤少弐系図 山田安栄
[329] 書籍 弘安四年日記抄(壬生官務家日記抄) 国民精神文化研究所 七月十二日
[330] 書籍 弘安四年日記抄(壬生官務家日記抄) 国民精神文化研究所 七月二十一日
[331] 書籍 元敦武校尉管軍上百戸張成墓碑銘 東洋文庫 七月二十七日
[332] 書籍 宇都宮系図 続群書類従完成会
[333] 書籍 弘安四年日記抄(壬生官務家日記抄) 国民精神文化研究所 七月六日
[334] 書籍 勘仲記 八木書店 弘安四年閏七月一日
[335] 웹사이트 台風の平年値 https://www.data.jma[...] 2013-06-27
[336] 書籍 癸辛雑識-続集下 中華書局
[337] 書籍 元史
[338] 書籍
[339] 書籍 滋溪文稿
[340] 書籍 元史
[341] 書籍 元史
[342] 書籍 高麗史
[343] 書籍 高麗史
[344] 書籍 秋澗先生大全文集
[345] 書籍 発掘された日本列島2012 新発見考古速報 朝日新聞出版
[346] 書籍 蒙古襲来絵詞 海鳥社
[347] 書籍 道園類稿
[348] 書籍 道園類稿
[349] 書籍 蒙古襲来絵詞
[350] 書籍 筑後五條文書 東京堂出版
[351] 간행물 肥前武雄神社文書 東京堂出版 null
[352] 서적 蒙古襲来 山川出版社 2014
[353] 서적 蒙古襲来と神風 - 中世の対外戦争の真実 中央公論新社 2017-11
[354] 웹사이트 蒙古襲来と神風 -服部英雄 著|電子書籍|中央公論新社 https://www.chuko.co[...] 2023-12-02
[355] 간행물 豊後都甲文書 東京堂出版 null
[356] 간행물 薩摩比志島文書 東京堂出版 null
[357] 간행물 薩摩比志島文書 東京堂出版 null
[358] 간행물 江上系図 null null
[359] 간행물 福田文書 吉川弘文館 1986
[360] 서적 角川日本地名大辞典 第42巻 長崎県 角川日本地名大辞典編纂委員会 1987
[361] 서적 伏敵篇 null 1891
[362] 서적 新訂 旧唐書倭国日本伝・宋史日本伝・元史日本伝―中国正史日本伝 岩波書店 1986
[363] 간행물 諸家文書纂野上文書 東京堂出版 null
[364] 뉴스 元寇捕虜が大般若経修正、「重用示す」 http://www.yomiuri.c[...] 2017-06-21
[365] 간행물 弘安四年日記抄(壬生官務家日記抄) 国民精神文化研究所 1935
[366] 간행물 勘仲記 八木書店 2008-05
[367] 간행물 弘安四年日記抄(壬生官務家日記抄) 国民精神文化研究所 1935
[368] 서적 全訳マルコ・ポーロ東方見聞録『驚異の書』fr.2810写本 岩波書店 2002
[369] 간행물 兼仲卿記弘安五年七月・九月巻裏文書 東京堂出版 null
[370] 간행물 東大寺文書 東京堂出版 null
[371] 서적 福岡県史 福岡県 1962
[372] 서적 高麗史 null
[373] 서적 元史 null
[374] 서적 元史 null
[375] 서적 元史 null
[376] 서적 元史 null
[377] 서적 元史 null
[378] 서적 元史 null
[379] 서적 元史 null
[380] 서적 元史 null
[381] 서적 元史 null
[382] 서적 元史 null
[383] 서적 高麗史 null
[384] 서적 元史 null
[385] 서적 元史 null
[386] 서적 元史 巻十二 本紀第十二 世祖九 至元二十年六月戊子の条
[387] 서적 元史 巻一百七十 列傳第五十七 申屠致遠
[388] 서적 元史 巻一百七十三 列傳第六十 崔彧
[389] 서적 高麗史 巻二十九 世家二十九 忠烈王二 忠烈王九年五月己卯
[390] 서적 元史 巻十二 本紀第十二 世祖九 至元二十年八月丁未の条
[391] 서적 元史 巻十二 本紀第十二 世祖九 至元二十年九月辛未の条
[392] 서적 元史 巻十二 本紀第十二 世祖九 至元二十年十月庚子の条
[393] 서적 元史 巻一百六十二 列傳第四十九 劉国傑
[394] 서적 元史 巻十三 本紀第十三 世祖十 至元二十一年二月辛巳の条
[395] 서적 元史 巻十三 本紀第十三 世祖十 至元二十一年二月丁未の条
[396] 서적 元史 巻十三 本紀第十三 世祖十 至元二十一年五月壬子の条
[397] 서적 薩摩八田家文書 関東御教書
[398] 서적 西園寺公衡『公衡公記』弘安六年七月二日条
[399] 서적 善隣国宝記 巻上
[400] 서적 善隣国宝記 巻上
[401] 서적 元史 巻十三 本紀第十三 世祖十 至元二十一年十月月甲戌の条
[402] 서적 元史 巻十三 本紀第十三 世祖十 至元二十二年四月丙午の条
[403] 서적 元史 巻十三 本紀第十三 世祖十 至元二十二年六月庚戌の条
[404] 서적 元史 巻十三 本紀第十三 世祖十 至元二十二年十月癸丑の条
[405] 서적 元史 巻十三 本紀第十三 世祖十 至元二十二年十月丁卯の条
[406] 서적 元史 巻十三 本紀第十三 世祖十 至元二十二年十一月丙申の条
[407] 서적 元史 巻十三 本紀第十三 世祖十 至元二十二年十一月癸巳の条
[408] 서적 元史 巻十三 本紀第十三 世祖十 至元二十二年十一月戊寅の条
[409] 서적 元史 巻十三 本紀第十三 世祖十 至元二十二年十二月己亥の条
[410] 서적 元史 巻十四 本紀第十四 世祖十一 至元二十三年正月甲戌の条
[411] 서적 元史 巻一百六十八 列傳第五十五 劉宣
[412] 서적 元史 巻二百八 列傳第九十五 外夷一 日本國
[413] 서적 鄭思肖『心史・雑文・大義略叙』
[414] 서적 元史 巻二百八 列傳第九十五 外夷一 日本國
[415] 서적 元史 巻十三 本紀第十三 世祖十 至元二十二年十月丁卯の条
[416] 서적 元史 巻二百九 列傳第九十六 外夷二 安南國
[417] 서적 北条九代記
[418] 서적 元史 巻十七 本紀第十七 世祖十四 至元二十九年六月己巳の条
[419] 서적 元史 巻一百七十三 列傳第六十 燕公楠
[420] 서적 高麗史 巻三十 世家三十 忠烈王三 忠烈王十八年十月庚寅
[421] 書籍 北条九代記 山田安栄編『伏敵篇』 1891
[422] 書籍 高麗史
[423] 書籍 高麗史 忠烈王十八年(九月)壬午(二十四日)
[424] 書籍 高麗史 忠烈王十九年八月
[425] 書籍 高麗史 忠烈王二十年(正月)癸酉(二十二日)
[426] 書籍 元史 成宗大徳二年
[427] 書籍 元史 成宗大徳三年
[428] 書籍 妙慈弘済大師行記 山田安栄編『伏敵篇』 1891
[429] 書籍 元史 世祖至元二十八年九月
[430] 書籍 元史 至元二十九年三月二十九日
[431] 書籍 神風と悪党の世紀 講談社現代新書 1995
[432] 書籍 中国史の中の日本像 人間選書 2000
[433] 書籍 元史 至元二十九年十月戊子朔
[434] 書籍 元史 大徳八年夏四月丙戌
[435] 書籍 元史 大徳七年
[436] 書籍 心史 中興集 元韃攻日本敗北歌 『新訂 旧唐書倭国日本伝・宋史日本伝・元史日本伝―中国正史日本伝』〈2〉岩波文庫 1986
[437] 書籍 中国史の中の日本像 人間選書 2000
[438] 書籍 隣交徴書 二篇巻一 論倭 『新訂 旧唐書倭国日本伝・宋史日本伝・元史日本伝―中国正史日本伝』〈2〉岩波文庫 1986
[439] 書籍 日本一鑑 窮河話海巻六 太田弘毅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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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6] 뉴스 「元寇船」調査終了、新たに沈船探し…琉球大・池田教授 http://www.yomiuri.c[...] 2012-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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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8] 서적 モンゴル帝国史 東洋文庫
[459] 서적 イスラームの騎士と官僚―「剣の人」と「筆の人」 思文閣出版
[460] 서적 マムルークとグラーム 新版岩波講座 世界歴史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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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6] 논문 日蓮伝小考 --『日蓮聖人註画讃』の成立とその系譜-- 立正大学文学部論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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