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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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타치는 일본의 전통적인 도검으로, 일본도(日本刀)의 한 종류이다. 헤이안 시대에 와라비테토(蕨手刀)를 개량하여 개발되었으며, 기병 전투에 적합하도록 날을 아래로 향하게 허리에 차는 것이 특징이다. 가마쿠라 시대에 전성기를 맞았으며, 이후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다. 타치는 칼자루의 서명 위치로 카타나(刀)와 구분되며, 날의 길이, 코시라에(拵え, 칼 장식) 등에 따라 여러 종류로 나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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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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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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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류 | 칼 |
칼집 종류 | 일본 옻칠 목재 |
원산지 | 일본 |
제작 시기 | 헤이안 시대 (794–1185)부터 현재까지 |
칼날 길이 | 약 70–80 센티미터 |
칼날 형태 | 휨, 외날 |
명칭 | |
일본어 | たち |
로마자 표기 | tachi |
추가 정보 |
2. 역사
타치(太刀)는 주로 기병이 사용했으며, 형태와 절삭력이 말 위에서 보병을 베기에 적합했다. 근접전에서도 사용할 수 있었지만, 말 위에서 사용할 때보다 어색했다. 이러한 점 때문에 현대 일본도의 대명사인 타도가 개발되었다.
타치는 타도가 등장하기 전까지 봉건 무사 계급의 주무장이었다. 이후 칼을 차는 방식과 칼날 형태에 따라 두 가지로 분화되었다. 일본 봉건 말기(센고쿠와 에도)에는 유명한 전사들이 대부분 칼날을 아래로 향하게 차는 타치 스타일을 애용했다.
어원은 ‘끊다(斷ち)’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태도”는 일반적으로 헤이안 시대 이후 시노기(鎬)가 있고, 휨이 있는 일본도를 가리킨다.
말 위에서의 전투를 상정하여 발전했기 때문에, 휨이 강하고 길이가 긴 것이 특징이다. 헤이안 시대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가마쿠라 시대, 남북조 시대를 거치며 계속 사용되었다.
2. 1. 초기 발전
일본에서 검 제작은 특정 시대별로 나뉜다.[4]- (고대의 검, 900년경까지)
- (옛날 검, 900년경~1596년)
- (새로운 검, 1596년~1780년)
- (새로운 새로운 검, 1781년~1876년)
- (현대의 검, 1876년~현재)
일본도의 전신은 로 불린다.[5][6][7] 헤이안 시대(794년~1185년) 중반, 사무라이들은 를 개량하여 (초기 일본도)를 개발했다.[5][6]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가 를 개량하여 손잡이에 구멍이 있는 와 손잡이 끝에 장식이 없는 를 개발했고, 사무라이들이 이 검들을 바탕으로 를 개발했다고 생각된다.[8]

10세기 전반에 개발된 는 라고 불리는 길쭉한 오각형 또는 육각형 칼날의 3차원 단면 모양과 부드럽게 휘어진 단면 날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일본도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에는 나무 손잡이가 없으며, 칼날과 일체형인 탕(nakagola)를 직접 잡고 사용한다. kenukigatala라는 용어는 탕의 중앙 부분이 고대 일본 족집게(kenukila) 모양으로 파여 있는 데서 유래한다.[9]

이후에 개발된 에서는 라는 핀으로 탕()에 손잡이를 고정하는 구조가 채택되었다. 그 결과, 의 단면 모양, 부드럽게 휘어진 단면 날, 그리고 의 구조라는 일본도의 세 가지 기본적인 외부 요소를 갖춘 검이 완성되었다.[2][10] 그 형태는 일본에서 전쟁 양식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기병이 주요 전투 부대가 되었고, 이전의 직선형 는 기마전투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휘어진 검은 말을 탄 전사가 사용하기에 훨씬 효율적인 무기이다. 칼날의 곡선은 베는 동작의 하향력을 크게 증가시킨다.[10]
역사가 칼 프라이데이에 따르면, 13세기 이전에는 어떤 종류의 검이 기마전투에 사용되었다는 서면 자료나 그림이 없다.[11] 그러나 콘도 요시카즈에 따르면, 활과 화살은 분명 기병전에서 주요 무기였지만, 12세기 겐페이 전쟁 무렵부터 말을 타고 를 사용하는 경우가 증가했다.[12] 초기 모델은 곡선이 고르지 않고 곡선의 가장 깊은 부분이 손잡이에 있었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곡선의 중심은 칼날 위쪽으로 이동하는 경향이 있었다.[13]

헤이안 시대(794년~1185년) 11세기 무렵에는 가 아시아 인근 국가로 수출되었다. 예를 들어, 중국 송나라의 고관이었던 오양수의 시 "일본도가(일본도의 노래)"에는 일본도가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향나무로 만든 칼집에 생선 가죽을 씌우고, 놋쇠와 구리로 장식하여 악령을 쫓을 수 있는 귀한 검이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수입된다."[14][15]
2. 2. 가마쿠라 시대: 일본도의 황금기
헤이안 시대 중반, 사무라이들은 와라비테토|蕨手刀|와라비테토일본어를 개량하여 초기 일본도를 개발했다.[5][6]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에미시|蝦夷|에미시일본어가 와라비테토|蕨手刀|와라비테토일본어를 개량하여 손잡이에 구멍이 있는 Kenukigata-warabitetō|毛抜形蕨手刀|케누키가타와라비테토일본어와 손잡이 끝에 장식이 없는 kenukigatatō|毛抜形刀|케누키가타토일본어를 개발했고, 사무라이들이 이 검들을 바탕으로 케누키가타 타치|毛抜形太刀|케누키가타 타치일본어를 개발했다고 생각된다.[8] 10세기 전반에 개발된 케누키가타 타치|毛抜形太刀|케누키가타 타치일본어는 시노기즈쿠리|鎬造|시노기즈쿠리일본어라고 불리는 길쭉한 오각형 또는 육각형 칼날의 3차원 단면 모양과 부드럽게 휘어진 단면 날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일본도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케누키가타 타치|毛抜形太刀|케누키가타 타치일본어에는 나무 손잡이가 없으며, 칼날과 일체형인 탕(nakagola)를 직접 잡고 사용한다. kenukigatala라는 용어는 탕의 중앙 부분이 고대 일본 족집게(kenukila) 모양으로 파여 있는 데서 유래한다.[9]케누키가타 타치|毛抜形太刀|케누키가타 타치일본어 이후에 개발된 타치|太刀|타치일본어에서는 메쿠기|柄釘|메쿠기일본어라는 핀으로 탕(나카고|茎|나카고일본어)에 손잡이를 고정하는 구조가 채택되었다. 그 결과, 시노기즈쿠리|鎬造|시노기즈쿠리일본어의 단면 모양, 부드럽게 휘어진 단면 날, 그리고 나카고|茎|나카고일본어의 구조라는 일본도의 세 가지 기본적인 외부 요소를 갖춘 검이 완성되었다.[2][10] 그 형태는 일본에서 전쟁 양식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기병이 주요 전투 부대가 되었고, 이전의 직선형 쵸쿠토|直刀|쵸쿠토일본어는 기마전투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휘어진 검은 말을 탄 전사가 사용하기에 훨씬 효율적인 무기이다. 칼날의 곡선은 베는 동작의 하향력을 크게 증가시킨다.[10] 역사가 칼 프라이데이에 따르면, 13세기 이전에는 어떤 종류의 검이 기마전투에 사용되었다는 서면 자료나 그림이 없다.[11] 그러나 콘도 요시카즈에 따르면, 활과 화살은 분명 기병전에서 주요 무기였지만, 12세기 겐페이 전쟁 무렵부터 말을 타고 타치|太刀|타치일본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증가했다.[12] 초기 모델은 곡선이 고르지 않고 곡선의 가장 깊은 부분이 손잡이에 있었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곡선의 중심은 칼날 위쪽으로 이동하는 경향이 있었다.[13]
가마쿠라 시대(1185년~1333년)에는 고위 사무라이들이 효고 구사리 타치|兵庫鎖太刀|효고 구사리 타치일본어(효고 쿠사리노 타치|兵庫鎖の太刀|효고 쿠사리노 타치일본어)라고 불리는 검을 차고 다녔는데, 이는 무기고에 사슬이 있는 검을 의미한다. 타치|太刀|타치일본어의 칼집은 금박을 입힌 구리판으로 덮여 허리에 사슬로 매달았다. 가마쿠라 시대 말기에 간소화된 효고 구사리 타치|兵庫鎖太刀|효고 구사리 타치일본어가 신토 신사의 카미|神|카미일본어에게 봉납용으로 만들어지면서 무기로서의 사용은 줄어들었다.
몽골의 일본 원정은 가마쿠라 시대(13세기)의 일본도 디자인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마사무네를 중심으로 한 소슈(相州) 유파의 검 제작자들은 전투에서 부러지거나 휘어진 폐기된 타치|太刀|타치일본어를 연구하여 새로운 제작 방법을 개발하고 혁신적인 검을 만들었다. 그들은 부드러운 강철과 단단한 강철을 결합하여 칼날의 가열 및 냉각 온도와 시간을 최적화하여 더 가볍고 매우 견고한 칼날을 만들었다. 또한 칼날의 곡선을 부드럽게 하고, 끝을 직선으로 길게 하며, 날카로운 면에서 반대쪽으로 폭을 넓히고, 단면을 얇게 하여 칼날의 관통력과 절삭력을 향상시켰다.[18][19]
역사적으로 일본에서는 일본도의 이상적인 칼날은 가마쿠라 시대의 코토|古刀|코토일본어로 여겨지며, 신토|新刀|신토일본어 이후 에도 시대부터 현재까지의 검 제작자들은 가마쿠라 시대의 일본도 칼날을 재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일본의 국보로 지정된 일본도는 100개가 넘는데, 그중 가마쿠라 시대의 코토|古刀|코토일본어가 80%, 타치|太刀|타치일본어가 70%를 차지한다.[20][21] 가마쿠라 시대는 일본도의 황금기로 여겨지고 있으며, 이 시대의 태도에 국보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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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 무로마치 시대와 전국 시대: 변화의 시기
무로마치 시대와 전국 시대는 일본도 역사에 큰 변화를 가져온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전쟁 방식의 변화와 함께 타치(太刀)의 역할과 형태도 변화했다.헤이안 시대 말기까지는 기사(騎射)가 주류였으며, 타도는 말에서 내렸을 때나 싸움, 강도 등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무기, 화살이 다 떨어졌을 때의 예비 무기라는 인식이 강했다.[50]
지쇼·주에이 내란 무렵이 되면 전투에서 말 위에서 타도를 사용하는 비율이 증가했지만, 어느 쪽인가 하면 도보(말에서 내렸을 때·낙마했을 때) 사용을 권장했다고 한다.[50]
구체적인 사용법은 적의 투구 鉢(갓)을 내리쳐 뇌진탕으로 비틀거리는 틈을 타 뛰어들어 옆에 차고 다니는 칼(腰刀)로 목을 베는 등의 사용법이 많았으며, 남북조 시대가 되면 투구 안쪽에 부장(浮張)이라는 쿠션을 설치하고, 투구를 착용할 때 묶는 끈도 복잡해져 안정성을 높이는 대책이 취해졌다.[51]
공격력이 높기 때문에 창이나 나기나타, 활을 주력으로 하는 전투의 보조 무기로도 귀하게 여겨졌다.[52] 그러나 말 위에서는 나기나타 등의 장병기보다 다루기 쉬웠기 때문에,[53] 남북조 시대~무로마치 시대(전국 시대 제외)에는 기마 무사(타격 기병)의 주력 무기로도 이용되었다.[54]
이 시대는 대도에 상징되는 것처럼 타도가 나기나타와 함께 전란 속에서 크게 활약했다.[55] 창이나 나기나타를 든 적과 싸울 경우 무기의 가벼움을 이용하여 빠르게 움직일 필요가 있다. 상대는 사정거리가 긴 만큼 틈도 커지므로 그 틈을 타 반격할 수 있는 장점이 전투에서 두드러져 표준화되었다.[52]
또한, 경무장의 아시가루·잡병이라면 몰라도 기마 무사를 베어 죽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타격 효과가 중시되었다. 그 때문에 남북조 시대에는 일반적인 타도도 대형화되었다.[54] 그러나 대형화된 일반적인 타도는 대도나 대나기나타와 마찬가지로 남북조 시대의 20여 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유행이 사라졌다.[56] 대도는 큰 타도나 대나기나타와 달리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다시 유행했다.[59][55][57]
타도와 대도라는 두 종류의 칼은 「베는 것」보다 「치는 것」이었다.[58] 타도와 「타격 무기」가 동의어라는 것에는 의미가 있다. 즉, 타도는 적을 베는 것보다 때리는 무기였던 것이다.[58] 말 위에서의 타도 타격은 남북조 시대의 특징이며, 타도의 끝으로 적을 베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았다.[58] 적을 때리려면 힘이 필요했지만, 부러지거나 적의 몸에 걸려 빠지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58]
허리에 차는 형식이기 때문에 지상에서의 이동에 방해가 된다는 결점이 있었다.[59] 그 때문에 전국 시대에는 우치가타나로 대체되어 갔다.[52]
오닌의 난 이후 전국 시대에는 아시가루들이 창이나 화승총 등으로 무장하여 다량으로 동원되었고, 아시가루에 의한 도보 집단전이 주가 되면서, 타도보다 짧고 가벼우며 보병전(徒戦: 도보에 의한 전투)에 적합한 우치가타나가 대두되었다. 또한 우치가타나의 유행과 에도 막부에 의한 도검의 길이 규제 등에 맞춰 많은 태도의 경이 잘려 짧아지고 뿌리 부분의 날이 뭉개져 우치가타나로 개조되었다. 이러한 단축을 ‘스리아게(磨上)’라고 한다.[46]
우치가타나가 무사의 칼로서 주류가 된 이후, 태도는 상급 무사의 권위의 상징으로서의 역할을 강화해 갔다.[47] 의식 시에는 무가도 태도를 차고 있었다.
15세기가 되면 타치를 포함한 일본도는 이미 중국과 한국으로 수출되어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22] 예를 들어, 한국은 일본에 검 제작자를 파견하고 일본의 검 제작자를 한국으로 초청하여 일본도 제작법을 배웠다. 조선왕조실록 1430년 6월 1일 기록에 따르면, 일본에 가서 일본도 제작법을 익힌 한국의 검 제작자가 일본도를 조선왕에게 바쳤고, 일본도와 다름없는 뛰어난 작품으로 상을 받았다.[22][23]
몽골의 일본 원정은 가마쿠라 시대(13세기)의 일본도 디자인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마사무네를 중심으로 한 소슈(相州) 유파의 검 제작자들은 전투에서 부러지거나 휘어진 폐기된 타치를 연구하여 새로운 제작 방법을 개발하고 혁신적인 검을 만들었다. 그들은 부드러운 강철과 단단한 강철을 결합하여 칼날의 가열 및 냉각 온도와 시간을 최적화하여 더 가볍고 매우 견고한 칼날을 만들었다. 또한 칼날의 곡선을 부드럽게 하고, 끝을 직선으로 길게 하며, 날카로운 면에서 반대쪽으로 폭을 넓히고, 단면을 얇게 하여 칼날의 관통력과 절삭력을 향상시켰다.[18][19]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1596년경부터 시작된 신토(新刀) 시대에는 코토(古刀) 시대의 전통적인 기법이 사라졌고, 가마쿠라 시대의 타치를 재현할 수 있는 대장장이는 없었다. 그러나 2014년에 카와치 쿠니히라가 가마쿠라 시대의 타치를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검 제작자로서 최고의 영예인 마사무네 상을 수상했다. 그가 제작한 타치에는 가마쿠라 시대 비젠 유파의 특징인 과 사이에 희미한 흰색 그림자가 나타나는 가 있다. 뛰어난 업적 없이는 마사무네 상을 받을 수 없었고, 타치와 분야에서는 카와치가 수상하기 전까지 18년 동안 아무도 수상하지 못했다.[36]
2. 4. 에도 시대 이후
일본도의 전신은 蕨手刀|와라비테토일본어로 불린다.[5][6][7] 헤이안 시대(794년~1185년) 중반, 사무라이들은 蕨手刀|와라비테토일본어를 개량하여 毛抜形太刀|케누키가타 타치일본어 (초기 일본도)를 개발했다.[5][6] 좀 더 정확히 말하면, 蝦夷|에미시일본어가 蕨手刀|와라비테토일본어를 개량하여 손잡이에 구멍이 있는 毛抜形蕨手刀|케누키가타 와라비테토일본어와 손잡이 끝에 장식이 없는 毛抜形刀|케누키가타토일본어를 개발했고, 사무라이들이 이 검들을 바탕으로 毛抜形太刀|케누키가타 타치일본어를 개발했다고 생각된다.[8] 10세기 전반에 개발된 毛抜形太刀|케누키가타 타치일본어는 鎬造|시노기즈쿠리일본어라고 불리는 길쭉한 오각형 또는 육각형 칼날의 3차원 단면 모양과 부드럽게 휘어진 단면 날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일본도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毛抜形太刀|케누키가타 타치일본어에는 나무 손잡이가 없으며, 칼날과 일체형인 탕(nakago|나카고la)를 직접 잡고 사용한다. kenukigata|케누키가타la라는 용어는 탕의 중앙 부분이 고대 일본 족집게(kenuki|케누키la) 모양으로 파여 있는 데서 유래한다.[9]毛抜形太刀|케누키가타 타치일본어 이후에 개발된 太刀|타치일본어에서는 柄釘|메쿠기일본어라는 핀으로 탕(茎|나카고일본어)에 손잡이를 고정하는 구조가 채택되었다. 그 결과, 鎬造|시노기즈쿠리일본어의 단면 모양, 부드럽게 휘어진 단면 날, 그리고 茎|나카고일본어의 구조라는 일본도의 세 가지 기본적인 외부 요소를 갖춘 검이 완성되었다.[2][10] 그 형태는 일본에서 전쟁 양식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기병이 주요 전투 부대가 되었고, 이전의 직선형 直刀|쵸쿠토일본어는 기마전투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휘어진 검은 말을 탄 전사가 사용하기에 훨씬 효율적인 무기이다. 칼날의 곡선은 베는 동작의 하향력을 크게 증가시킨다.[10] 역사가 칼 프라이데이에 따르면, 13세기 이전에는 어떤 종류의 검이 기마전투에 사용되었다는 서면 자료나 그림이 없다.[11] 그러나 콘도 요시카즈에 따르면, 활과 화살은 분명 기병전에서 주요 무기였지만, 12세기 겐페이 전쟁 무렵부터 말을 타고 太刀|타치일본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증가했다.[12] 초기 모델은 곡선이 고르지 않고 곡선의 가장 깊은 부분이 손잡이에 있었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곡선의 중심은 칼날 위쪽으로 이동하는 경향이 있었다.[13]
헤이안 시대(794년~1185년) 11세기 무렵에는 太刀|타치일본어가 아시아 인근 국가로 수출되었다. 예를 들어, 중국 송나라의 고관이었던 오양수의 시 "일본도가(일본도의 노래)"에는 일본도가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향나무로 만든 칼집에 생선 가죽을 씌우고, 놋쇠와 구리로 장식하여 악령을 쫓을 수 있는 귀한 검이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수입된다."[14][15]
헤이안 시대(794년~1185년)부터 일반 사무라이들은 黒漆太刀|쿠로우루시 타치일본어(国質の太刀|코쿠시츠노 타치일본어)라고 불리는 스타일의 검을 차고 다녔는데, 이는 검은 칠을 한 太刀|타치일본어를 의미한다. 太刀|타치일본어의 손잡이는 가죽이나 가오리 가죽으로 감싸고, 검은 실이나 가죽 끈으로 감싸며, 칼집은 검은 칠을 한다. 반면에 궁정 귀족들은 의식용으로 정교하게 조각된 금속과 보석으로 장식된 太刀|타치일본어를 차고 다녔다. 고위 궁정 귀족들은 飾り太刀|카자리 타치일본어 또는 飾剣|카자 타치일본어라고 불리는 스타일의 검을 차고 다녔는데, 이는 장식용 太刀|타치일본어를 의미하며, 하급 궁정 귀족들은 細太刀|호소다치일본어라고 불리는 스타일의 간소화된 飾り太刀|카자타치일본어 검을 차고 다녔다. 이는 가는 太刀|타치일본어를 의미한다. 귀족들이 차는 飾り太刀|카자타치일본어와 細太刀|호소다치일본어는 처음에는 直刀|쵸쿠토일본어처럼 곧았지만, 가마쿠라 시대부터 太刀|타치일본어의 영향을 받아 부드러운 곡선을 가지게 되었다. 궁정 귀족들이 차는 太刀|타치일본어는 의식용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칼날 대신 철판을 사용했다.[16][17]
가마쿠라 시대(1185년~1333년)에는 고위 사무라이들이 兵庫鎖太刀|효고 구사리 타치일본어(兵庫鎖の太刀|효고 쿠사리노 타치일본어)라고 불리는 검을 차고 다녔는데, 이는 무기고에 사슬이 있는 검을 의미한다. 太刀|타치일본어의 칼집은 금박을 입힌 구리판으로 덮여 허리에 사슬로 매달았다. 가마쿠라 시대 말기에 간소화된 兵庫鎖太刀|효고 구사리 타치일본어가 신토 신사의 神|카미일본어에게 봉납용으로 만들어지면서 무기로서의 사용은 줄어들었다. 반면에 가마쿠라 시대에는 금속으로 덮인 칼집을 가진 蛭巻太刀|히루마키 타치일본어라고 불리는 太刀|타치일본어가 있었는데, 이것은 무로마치 시대까지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의미는 거머리로 감싼 검이었고, 얇은 금속판이 칼집에 나선형으로 감겨 있어 튼튼하고 장식적이었으며, 칼집을 허리에 매달기 위해 사슬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특징이 있었다.[2][17]
몽골의 일본 원정은 가마쿠라 시대(13세기)의 일본도 디자인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마사무네를 중심으로 한 소슈(相州) 유파의 검 제작자들은 전투에서 부러지거나 휘어진 폐기된 太刀|타치일본어를 연구하여 새로운 제작 방법을 개발하고 혁신적인 검을 만들었다. 그들은 부드러운 강철과 단단한 강철을 결합하여 칼날의 가열 및 냉각 온도와 시간을 최적화하여 더 가볍고 매우 견고한 칼날을 만들었다. 또한 칼날의 곡선을 부드럽게 하고, 끝을 직선으로 길게 하며, 날카로운 면에서 반대쪽으로 폭을 넓히고, 단면을 얇게 하여 칼날의 관통력과 절삭력을 향상시켰다.[18][19]
역사적으로 일본에서는 일본도의 이상적인 칼날은 가마쿠라 시대의 古刀|코토일본어로 여겨지며, 新刀|신토일본어 이후 에도 시대부터 현재까지의 검 제작자들은 가마쿠라 시대의 일본도 칼날을 재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일본의 국보로 지정된 일본도는 100개가 넘는데, 그중 가마쿠라 시대의 古刀|코토일본어가 80%, 太刀|타치일본어가 70%를 차지한다.[20][21]
가마쿠라 시대 말기부터 무로마치 시대(1333년~1573년) 말기까지는 가죽으로 감싼 太刀|타치일본어를 뜻하는 革包太刀|카와츠츠미 타치일본어가 유행했다. 革包太刀|카와츠츠미 타치일본어는 손잡이가 가죽이나 가오리 가죽으로 감싸고, 그 위에 칠을 하고, 가죽 끈과 끈으로 감싸며, 칼집과 때로는 鍔|츠바일본어(손잡이 보호대)도 가죽으로 감쌌기 때문에 黒漆太刀|쿠로우루시 타치일본어보다 더 튼튼했다.[2]
15세기가 되면 太刀|타치일본어를 포함한 일본도는 이미 중국과 한국으로 수출되어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22] 예를 들어, 한국은 일본에 검 제작자를 파견하고 일본의 검 제작자를 한국으로 초청하여 일본도 제작법을 배웠다. 조선왕조실록 1430년 6월 1일 기록에 따르면, 일본에 가서 일본도 제작법을 익힌 한국의 검 제작자가 일본도를 조선왕에게 바쳤고, 일본도와 다름없는 뛰어난 작품으로 상을 받았다.[22][23]
전통적으로 일본에서는 弓|유미일본어(활)가 주요 전쟁 무기였고, 太刀|타치일본어와 薙刀|나기나타일본어는 근접전용이었다. 무로마치 시대 말기 15세기의 오닌 전쟁은 대규모 내전으로 확대되었고, 足軽|아시가루일본어라고 불리는 농민들이 대량으로 동원되었다. 그들은 太刀|타치일본어보다 짧은 刀|카타나일본어를 사용하여 보병전을 벌였다. 무로마치 시대 말기의 센고쿠 시대(전국 시대)에는 전쟁이 더욱 커졌고, 足軽|아시가루일본어는 빌려온 槍|야리일본어(창)를 사용하여 밀집 대형으로 싸웠다. 또한 16세기 말에는 포르투갈에서 種子島|타네가시마일본어(조총)가 도입되었고, 일본 검 제작자들은 개량품을 대량 생산하여 足軽|아시가루일본어가 임대받은 총으로 싸웠다. 일본 전장에서는 활 외에도 총과 창이 주요 무기가 되었다. 이러한 전쟁에서 전투 스타일의 변화로 인해 사무라이들 사이에서는 太刀|타치일본어와 薙刀|나기나타일본어가 쇠퇴하고 휴대가 간편한 刀|카타나일본어가 주류가 되었다. 눈부신 太刀|타치일본어는 점차 고위 사무라이의 권위를 상징하는 존재가 되었다.[24][25][26]
15세기부터 대규모 전쟁의 영향으로 저급의 검이 대량 생산되었다. 이러한 검들은 창과 함께 足軽|아시가루일본어라고 불리는 고용된 농민들에게 빌려주었고, 검은 수출되었다. 이러한 대량 생산된 검을 数打物|카즈우치모노일본어라고 하며, 비젠(備前) 유파와 미노(美濃) 유파의 검 제작자들이 분업으로 생산했다.[24][27] 일본도 수출은 무로마치 시대에 절정에 달했는데, 일본 무기 생산을 흡수하고 해적의 무장을 어렵게 하려는 시도로 공식 무역을 통해 최소 20만 자루의 검이 명나라 중국으로 수출되었다. 중국 명나라에서는 해적을 막기 위해 일본도와 그 전술을 연구했고, 일본도를 기반으로 倭刀|워다오일본어와 苗刀|미아오다오일본어가 개발되었다.[14][28][29]
이 시대부터 많은 오래된 太刀|타치일본어의 탕(茎|나카고일본어)은 잘라내어 刀|카타나일본어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개조를 摺上|스리아게일본어라고 한다.[30] 예를 들어, 가마쿠라 시대에 마사무네가 제작한 많은 太刀|타치일본어가 刀|카타나일본어로 개조되었기 때문에 그의 현존하는 작품은 刀|카타나일본어와 短刀|탄토일본어뿐이다.[31]
16세기 무렵부터 太刀|타치일본어를 포함한 많은 일본도가 태국으로 수출되었는데, 그곳에서는 刀|카타나일본어 스타일의 검이 만들어져 전투와 예술 작품으로 귀하게 여겨졌으며, 그중 일부는 태국 왕실 소장품에 있다.[32]
센고쿠 시대(1467년~1615년) 또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1568년~1600년)에는 실로 감싼 太刀|타치일본어를 뜻하는 糸巻太刀|이토마키 타치일본어가 등장하여 그 이후 太刀|타치일본어의 주류가 되었다. 糸巻太刀|이토마키 타치일본어는 많은 蒔絵|마키에일본어와 화려한 색깔의 실로 장식된 칠 장식으로 장식되었고, 선물, 의식, 또는 신토 신사의 神|카미일본어에게 봉납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2]
후대 일본 봉건 사회의 센고쿠 시대와 에도 시대에는 지배 계급의 일부 고위 무사들이 칼집을 칼날이 위로 향하게 허리띠에 꽂는 것이 아니라 太刀|타치일본어 스타일(칼날이 아래로 향하게)로 검을 차고 다녔다.[33] 이러한 스타일의 검을 半太刀|한다치일본어라고 하며 "반 太刀|타치일본어"를 의미한다. 半太刀|한다치일본어에서는 종종 스타일이 혼합되었는데, 예를 들어 오비에 고정하는 것은 刀|카타나일본어 스타일이었지만, 칼집의 금속 세공은 太刀|타치일본어 스타일이었다.[34]
쇼와 시대의 국가주의의 부상과 함께 일본 제국 육군과 일본 제국 해군은 太刀|타치일본어 스타일(칼날이 아래로 향하게)로 차는 新軍刀|신 군도일본어라고 불리는 검을 채택했다.[35]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1596년경부터 시작된 신토(新刀) 시대에는 코토(古刀) 시대의 전통적인 기법이 사라졌고, 가마쿠라 시대의 太刀|타치일본어를 재현할 수 있는 대장장이는 없었다. 그러나 2014년에 카와치 쿠니히라가 가마쿠라 시대의 太刀|타치일본어를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검 제작자로서 최고의 영예인 마사무네 상을 수상했다. 그가 제작한 太刀|타치일본어에는 가마쿠라 시대 비젠 유파의 특징인 刃紋|하몬일본어와 鎬|시노기일본어 사이에 희미한 흰색 그림자가 나타나는 乱れうつり|미다레 우츠리일본어가 있다. 뛰어난 업적 없이는 마사무네 상을 받을 수 없었고, 太刀|타치일본어와 刀|카타나일본어 분야에서는 카와치가 수상하기 전까지 18년 동안 아무도 수상하지 못했다.[36]
2. 5. 한국과의 관계
는 11세기 무렵부터 아시아 인근 국가로 수출되었다. 중국 송나라의 고관이었던 오양수는 "일본도가(일본도의 노래)"에서 일본도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14][15]>향나무로 만든 칼집에 생선 가죽을 씌우고, 놋쇠와 구리로 장식하여 악령을 쫓을 수 있는 귀한 검이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수입된다.
15세기에 이르면 를 포함한 일본도는 이미 중국과 한국으로 수출되어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22] 한국은 일본에 검 제작자를 파견하고 일본의 검 제작자를 한국으로 초청하여 일본도 제작법을 배웠다. 조선왕조실록 1430년 6월 1일 기록에 따르면, 일본에 가서 일본도 제작법을 익힌 한국의 검 제작자가 일본도를 조선왕에게 바쳤고, 일본도와 다름없는 뛰어난 작품으로 상을 받았다.[22][23]
무로마치 시대에는 일본도 수출이 절정에 달했는데, 최소 20만 자루의 검이 공식 무역을 통해 명나라 중국으로 수출되었다. 이는 일본 무기 생산을 흡수하고 해적의 무장을 어렵게 하려는 시도였다. 중국 명나라에서는 해적을 막기 위해 일본도와 그 전술을 연구했고, 일본도를 기반으로 와 가 개발되었다.[14][28][29]
16세기 무렵부터는 많은 일본도가 태국으로 수출되었는데, 그곳에서는 스타일의 검이 만들어져 전투와 예술 작품으로 귀하게 여겨졌으며, 그중 일부는 태국 왕실 소장품에 있다.[32]
3. 종류
태도는 주로 기병들이 사용했는데, 그 형태와 절삭력은 말 위에서 보병들을 베기에 적합했다. 근접전에서도 사용할 수는 있었지만, 말 위에서 사용할 때보다 어색했다. 이러한 점 때문에 현대 일본도의 대명사인 타도가 개발되었다.
태도는 타도가 등장하기 전까지 봉건 무사 계급의 주무장이었다. 나중에는 칼을 차는 방식과 칼날의 형태에 따라 두 가지로 분화되었다. 일본 봉건 말기(센고쿠와 에도)에 유명한 전사들은 대부분 칼날이 아래로 향하게 차는 태도 스타일을 애용했다.[46]
어원은 ‘끊다(斷ち)’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참고로, “태도”는 일반적으로 헤이안 시대 이후 시노기(鎬)가 있고 휨이 있는 일본도를 가리킨다.
말 위에서의 전투를 상정하여 발전했기 때문에 휨이 강하고 길이가 긴 것이 많다는 특징이 있다. 헤이안 시대 무렵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가마쿠라 시대, 남북조 시대를 거치며 계속 사용되었다.
그러나 오닌의 난을 거쳐 무로마치 시대 후기, 전국 시대가 되면서 궁술, 나기나타, 태도를 사용한 기승 중심의 무사 간 전투에서 창이나 화승총 등으로 무장한 다량으로 동원된 아시가루에 의한 도보 집단전이 주가 되면서, 태도보다 짧고 가벼우며 보병전에 적합한 우치가타나가 대두되었다. 또한 우치가타나의 유행과 에도 막부에 의한 도검 길이 규제 등에 맞춰 많은 태도의 경이 잘려 짧아지고 뿌리 부분의 날이 뭉개져 우치가타나로 개조되었다.
우치가타나가 무사의 칼로서 주류가 된 이후, 태도는 상급 무사의 권위 상징으로서 역할을 강화해 갔다.[47] 의식 시에는 무가도 태도를 차고 있었다.
가마쿠라 시대는 일본도의 황금기로 여겨지며, 이 시대의 태도에 국보가 많다. 21세기 시점에서 일본도는 100점 이상이 국보로 지정되어 있지만, 그 중 8할이 가마쿠라 시대의 도검이며, 7할이 태도이다.[48][49]
운쇼는 비젠국의 도공. 칼끝은 흔히 볼 수 있는 가마쿠라 시대의 타치 모습이다.
가네우지는 미노국의 도공. 칼끝이 크게 뻗은 남북조 시대의 타치 모습이다.
(『集古十種』에서)
- '''털뽑이형 다치'''는 태도의 전신으로 여겨지는 실전용 도검으로, “케누키가타타치”라고 읽는다. 헤이안 시대 중기부터 말기까지 위부의 무관이 사용했던 것에서 “위부태도(衛府太刀, 에후타치, 에후다치)” 또는 “야검(野剣, 노다치)”[69]라고도 불린다. 일본 도검 중에서는 특이한 형식의 칼로, 목제 손잡이에 자루를 끼워 꽂이못으로 고정하는 형식이 아니라, “토모가네(共金)”라고 불리는 칼날과 손잡이가 일체형 구조이다.[70] 칼날은 칼등 부근만 휘어지는 극단적인 요반리이고, 측면에 능이나 홈이 없는 평조리이다. 손잡이에는 고대의 털뽑개와 같은 형태의 구멍이 투각으로 새겨져 있다. 이러한 구조로부터 나라 시대의 정이 시대에 에조로부터 전래된 왈수도와의 관련성이 지적되고 있으며, 일본도가 왈수도의 영향을 받아 변화해 온 실례 중 하나로 여겨진다. 실전 외에 의장용으로도 사용되었고, 후에는 일반적인 자루 형식과 같은 구조의 태도에 손잡이 감개를 하지 않고 상어가죽 손잡이로 만들어 대목관을 털뽑이형으로 한 것을 “'''털뽑이형(목관) 다치'''”라고 불렀으며, 에도 시대에는 공가가 이 형식의 꾸밈새 태도를 평상시용으로 차고 다녔다.
3. 1. 길이에 따른 분류
; 타치: 현대에는 칼날 길이가 2척(약 60cm) 이상, 3척(약 90cm) 미만인 것을 가리킨다. 칼날 길이가 2척 6촌(약 76cm) 이상인 것이 많다.[60]
; 대태도(大太刀)
: 야태도(野太刀)라고도 불리며, 칼날 길이가 3척 이상인 타치를 가리킨다. 대형의 경우에는 10척(약 3.3m) 이상 되는 것도 존재한다.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에 애용되었지만, 나중에 숫돌로 갈아서 일반적인 길이로 만들어진 것이 많아 현존하는 것은 적다.
; 소태도(小太刀)
: 칼날 길이가 2척 미만인 것. 형태는 직선적인 것이 많다. 현대에는 와키자시(脇差)와의 차이가 모호하며, 그 존재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칼날 길이에 따른 분류 방법에는 문헌이나 연구자에 따라 차이가 있으며, 대태도(大太刀)가 칼날 길이가 5척(약 150cm) 정도인 것을, 야태도(野太刀)가 칼날 길이가 3척 이상인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는 대형의 타치를 통틀어 대태도라고 부르고, 별칭으로 “야태도”라고 부르는 것이 주류이다.
3. 2. 코시라에(拵え)에 따른 분류
- '''위부다치(衛府太刀)'''
육위부(六衛府)에 소속된 무관들이 차고 다녔던 太刀(다치)이다. 검소한 병장용과 화려한 의장용이 있었는데, 병장용은 엄물조다치(厳物造太刀)나 흑칠다치(黒漆太刀)로 발전했고, 의장용은 세다치(細太刀)와 동일시되었다. 의장용 츠바(鍔)는 장식다치(飾太刀)나 세다치와 같은 분동츠바(分銅鍔)이다. 털뽑이형 다치(毛抜形太刀)는 사용 시기상 거의 이 "위부다치"의 코시라에(拵え)로 만들어졌으며, "위부다치"라고 하면 털뽑이형 다치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 '''장식다치(飾太刀)(장식검(飾剣), 가자리다치(飾り太刀)), 세다치(細太刀)'''

높은 지위의 공가(公家)는 위부다치의 의장용을 더욱 화려하게 만든 장식다치(장식검, 가자리다치)를 의장용으로 착용했다. 츠바가 "분동츠바(分銅鍔)"라고 불리는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지위가 낮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공가는 장식다치의 간소한 버전인 세다치를 의장용으로 장비했다. 의장용이므로 무기로서의 기능은 요구되지 않고, 칼날은 얇고 평평한 철심으로 대용되었다. 이러한 다치는 처음에는 모양이 곧게 뻗었지만,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부터 무용 다치의 영향을 받아 굽어졌다.[61]
- '''엄물조다치(厳物造太刀)'''
가마쿠라 시대의 "병고사다치(兵庫鎖太刀)", "나가후쿠린다치(長覆輪太刀)", "히루마키다치(蛭巻太刀)" 등, 무용으로 사용하기 위한 "'''병장다치(兵仗太刀)'''"를 총칭하여 이렇게 불렀다.
::;병고사다치(兵庫鎖太刀)

:::가마쿠라 시대 전기부터 높은 지위의 무가(武家)에 유행했던, 다치오(太刀緒)와 다치 본체를 잇는 "아시오(足緒)"라고 불리는 부품을 가죽이 아닌 가늘게 꼰 쇠사슬을 여러 가닥 평조직으로 엮은 것으로 한 다치. "'''나가후쿠린다치(長覆輪太刀)'''"라고 불리는, 칼집 전체를 판금으로 감싸고, 조각을 한 판상의 금구로 칼집의 상하를 끼워 고정한 형태의 것이 많다. 가마쿠라 시대 후기부터 실전용으로는 사용되지 않게 되고, 사찰에 봉납용으로 다수가 제작되었다.[62] 또한 장식성을 중시한 코시라에로서 의장용 다치의 대표적인 코시라에가 되었다.
:::참고로, 원래의 글자는 "병구(兵具)"였지만, 후세에 와전되어 "병고(兵庫)"로 변화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히루마키다치(蛭巻太刀)
:::칠로 바탕칠한 손잡이 및 칼집에 짧은 띠 모양으로 한 금속판을 나선형으로 감아 칠을 칠해 마무리한 다치.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말기, "엄물조(厳物造)"가 유행함에 따라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 무렵까지 만들어졌다.
- '''니시키츠츠미다치(錦包太刀)'''
칼집을 금포(錦布)로 감싼 다치로, 헤이안 시대 무렵부터 장식용 도장(刀装)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칼집뿐만 아니라 손잡이도 금포로 감싼 것도 있으며, 일반적으로는 금포로 감싼 위에 금구로 고정하지만, 금구를 포함하여 전체를 금포로 감싼 만들기도 있다. 금포로 감싼 위에 등나무로 묶은 양식 및 꼰 끈으로 묶은 양식의 것도 있으며, 각각 "'''니시키츠츠미토우마키다치(錦包籐巻太刀)'''", "'''니시키츠츠미이토마키다치(錦包糸巻太刀)'''"라고 불린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금포의 도장은 아시카가 쇼군가(足利将軍家) 및 쇼군가로부터 하사받은 도장에만 허용되었지만, 무로마치 시대 중기를 지나 오닌의 난(応仁の乱) 이후 아시카가 막부(足利幕府)의 권세가 쇠퇴하자 금지령은 무시되었고, 무사들은 잇따라 금포의 다치를 차고 다녔다.[63]
- '''쿠로우루시다치(黒漆太刀)'''

:"고쿠시츠노다치(黒漆の太刀)"라고도 부르는, 검은 칠로 금구를 포함하여 전체를 칠한 다치. 가마쿠라 시대에는 실전에 사용하는 다치의 가장 일반적인 코시라에였으며, 가마쿠라 시대 후기까지 상위 무사가 병고사다치, 일반 무사는 흑칠 다치를 장비하였고, 승병(僧兵)들이 애용했다. "가와츠츠미다치(革包太刀)"가 가마쿠라 시대 말기에 등장하여 무로마치 시대에 일반화되었기 때문에 점차 쇠퇴했지만, 무로마치·전국 시대에 이르러서도 실전용 도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금구나 손잡이 감개를 포함하여 전체를 칠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금구를 칠하지 않고 남긴 만들기도 있으며, 그것을 특히 "'''시라즈쿠리다치(白造太刀)'''"라고 한다.
- '''가와츠츠미다치(革包太刀)'''
손잡이[64]와 칼집을 가죽으로 감싸고, 검은 칠을 칠해 마무리한 다치. 감싼 가죽 위에 금구로 가죽을 고정하지만, 일반적인 다치의 만들기 위에 전체를 가죽으로 감싸 버리는 것도 있으며, 이쪽 양식이 널리 사용되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또한, 츠바도 "츠바부쿠로(鍔袋)" 또는 "츠바가케(鍔掛)"라고 불리는 칠한 가죽 주머니를 걸어 덮는다. 가마쿠라 시대 말기에 등장하여, 그 이전의 흑칠다치를 대신하여 무로마치 시대에 다치 이외의 코시라에를 포함하여 보급되어 일반화되었다.[65] 이 형태는 칼집을 비바람이나 상처로부터 보호하는 데 뛰어나고, 그 이전에는 야외에서 다치를 차고 다닐 때는 "시리사야(尻鞘)"를 사용하여 칼을 빗물 등으로부터 보호했지만, 이 가와츠츠미다치의 등장으로 시리사야를 필요로 하지 않고 더욱 실전에 적합한 것이 되었다.
:특히, 전체를 가죽으로 감싼 위에 손잡이 감개와 와타리마키(渡巻)(후술)를 실시하고 츠바부쿠로를 갖춘 것은, 천하오검(天下五剣)의 명검 중 하나인 "오니마루 쿠니츠나(鬼丸国綱)"의 도장으로 유명한 "'''오니마루 코시라에(鬼丸拵)'''"이다.
:"가와츠츠미다치"의 등장으로, "이토마키다치(糸巻太刀)"의 양식과 조합하는 형태로 실전용 다치 코시라에는 일단 성숙했지만, 제작에 수고와 비용이 드는 데다, 다치 자체가 무사의 전장에서의 주력 무기로서는 사용되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이후 "다치 코시라에"는 의례용 도장으로서의 위치가 강해졌다. 전국 시대에도 가와츠츠미다치 양식의 도장은 계속 사용되고 있었지만, 츠바에 가죽 주머니를 거는 것은 빗물이 주머니 안쪽에 고이기 쉽고, 칼날과 도장을 손상시키기 때문에 장식 용도 이외에는 사용되지 않게 되고 있다.

- '''가와마키다치(革巻太刀)'''
실용을 중시하고, 손잡이와 칼집에 미끄럼 방지 및 갑옷과 칼이 심하게 접촉하는 것에 의한 손상을 방지하기 위해 가죽 끈을 묶은 다치. 처음에는 손잡이와 칼집 위에 직접 감았지만, 차츰 금포로 감싼 위에 감는[64] 양식이 일반화되어 간다. 가마쿠라 시대에 등장하여, "흑칠다치"나 "가와츠츠미다치"의 양식과 조합하는 형태로 보급되어 "진다치(陣太刀)"로 발전했다.
:감는 것 중 손잡이에 감는 부분을 "츠카마키(柄巻)", 칼집에 감는 부분을 "와타리마키(渡巻)"라고 한다.
- '''이토마키다치(糸巻太刀), 진다치(陣太刀)'''
손잡이와 칼집 상부를 같은 재질의 끈 등으로 엇갈리게 감은 다치이다. 코시라에에 이토마키를 실시하게 된 것은 무로마치 시대 무렵부터이며, 전국 시대 무렵부터는 진다치라고도 불리게 되었다.[66] 아즈치모모야마 시대(安土桃山時代)에 크게 발전하고, 모모야마 문화(桃山文化)의 영향을 받아 도장에는 화려한 마키에(蒔絵)를 한 칼집이나 정교한 금구와 화려한 꼰 끈이나 감은 실이 베풀어지게 되어, 현대 잘 알려진 형태가 되었으며, 이 시대를 이토마키다치의 등장으로 하는 경우도 있다.[46][67] 처음에는 높은 지위의 무가의 의장용으로 사용되었지만, 에도 시대(江戸時代)부터는 의장용 이외에도 증답용이나 봉납용으로도 자주 사용되었다.[68] 또한 에도 시대에는 양식이 막부에 의해 정해지고, 무가(武家)의 정장 시에 차는 칼로 되었다.
:현대에도 진검의 장식용 코시라에로서 제작되고 있다. 대장경(大相撲)의 요코즈나 도효이리(横綱土俵入り)에서 다치모치(太刀持ち)가 들고 있는 것도, 진다치 양식의 다치이다.
4. 특징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 서명이 있는 경우 와 는 칼자루에 있는 서명()의 위치로 구분할 수 있다. 는 날이 아래로 향하게 차고, 는 날이 위로 향하게 차기 때문에, 두 종류의 검 칼자루에 있는 는 반대쪽에 위치하게 된다.[37]
진품 의 평균 날 길이()는 70~80cm(~인치)였으며, 카타나와 비교하여 길이에 비해 일반적으로 가볍고, 손잡이에서 칼끝으로 갈수록 더 가늘어지며, 더 휘어져 있고, 두꺼운 옷을 뚫기 위한 칼끝 부분이 더 작았다.[38]
를 차는 전통적인 방식과 달리, 는 날이 아래로 향하게 벨트에 걸어 차고,[39] 주로 기병이 사용하는 데 효과적이었다.[40] 의 평균 길이에서 벗어나는 경우에는 "짧다"는 의미의 접두사 ''ko-''와 "크다"는 의미의 접두사 ''ō-''가 붙는다. 예를 들어, 는 크기에 가까우며 라고 불렸다. 현존하는 가장 긴 (15세기 로 여겨짐)는 총 길이가 3.7m이고 날 길이가 2.2m이지만, 의식용으로 여겨진다. 1500년대 후반과 1600년대 초반에는 많은 칼날이 로 개조되었고, 자른 칼자루() 때문에 대장장이의 서명이 검에서 제거되었다.[41]
스타일로 검을 차려면 에 장착해야 했다. 에는 두 개의 걸이(아시)가 있어서 검을 날이 아래로 향하게 수평으로 찰 수 있다.[42] 에 장착되지 않은 검은 가죽 장치인 를 사용하여 스타일로 찰 수 있었다.[43]
어원은 ‘끊다(斷ち)’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참고로, “태도”는 일반적으로 헤이안 시대 이후의 시노기(鎬)가 있고, 휨이 있는 일본도를 가리킨다.
말 위에서의 전투를 상정하여 발전한 것이기 때문에, 휨이 강하고 길이가 긴 것이 많다는 특징이 있다. 헤이안 시대 무렵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가마쿠라 시대, 남북조 시대를 거치며 계속 사용되었다.
그러나 오닌의 난을 거쳐 무로마치 시대 후기, 전국 시대가 되면서 궁술, 나기나타, 태도를 사용한 기승 중심의 무사들 간의 전투에서, 창이나 화승총 등으로 무장한 다량으로 동원된 아시가루에 의한 도보 집단전이 주가 되면서, 태도보다 짧고 가벼우며 보병전(徒戦: 도보에 의한 전투)에 적합한 우치가타나가 대두되었다. 또한 우치가타나의 유행과 에도 막부에 의한 도검의 길이 규제 등에 맞춰 많은 태도의 경이 잘려 짧아지고 뿌리 부분의 날이 뭉개져 우치가타나로 개조되었다. 이러한 단축을 ‘스리아게(磨上)’라고 한다.[46]
가마쿠라 시대는 일본도의 황금기로 여겨지고 있으며, 이 시대의 태도에 국보가 많다. 21세기 시점에서 일본도는 100점 이상이 국보로 지정되어 있지만, 그 중 8할이 가마쿠라 시대의 도검이며, 7할이 태도이다.[48][49]
지쇼·주에이 내란 무렵이 되면 전투에서 말 위에서 타도를 사용하는 비율이 증가했지만, 어느 쪽인가 하면 도보(말에서 내렸을 때·낙마했을 때) 사용을 권장했다고 한다.[50]
구체적인 사용법은 적의 투구 鉢(갓)을 내리쳐 뇌진탕으로 비틀거리는 틈을 타 뛰어들어 옆에 차고 다니는 칼(腰刀)로 목을 베는 등의 사용법이 많았으며, 남북조 시대가 되면 투구 안쪽에 부장(浮張)이라는 쿠션을 설치하고, 투구를 착용할 때 묶는 끈도 복잡해져 안정성을 높이는 대책이 취해졌다.[51]
공격력이 높기 때문에 창이나 나기나타, 활을 주력으로 하는 전투의 보조 무기로도 귀하게 여겨졌다.[52] 그러나 말 위에서는 나기나타 등의 장병기보다 다루기 쉬웠기 때문에,[53] 남북조 시대~무로마치 시대(전국 시대 제외)에는 기마 무사(타격 기병)의 주력 무기로도 이용되었다.[54]
타도와 대도라는 두 종류의 칼은 「베는 것」보다 「치는 것」이었다.[58] 타도와 「타격 무기」가 동의어라는 것에는 의미가 있다. 즉, 타도는 적을 베는 것보다 때리는 무기였던 것이다.[58] 말 위에서의 타도 타격은 남북조 시대의 특징이며, 타도의 끝으로 적을 베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았다.[5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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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日本刀」の文化的な価値を知っています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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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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