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다스페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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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히다스페스 전투는 기원전 326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인도 원정 중 히다스페스 강(현재 젤룸강)에서 포루스 왕과 벌인 전투이다. 알렉산드로스는 기만 전술과 기병을 활용한 측면 공격으로 승리했으며, 포루스의 용맹함에 감탄하여 그를 왕으로 대우하고 영토를 돌려주었다. 이 전투는 알렉산드로스의 뛰어난 전술과 마케도니아 군의 전투력을 보여주는 사례로, 이후 마우리아 제국의 군사 전략에 영향을 미쳤다. 전투는 현재 파키스탄 펀자브 지역의 젤룸강 동쪽에서 벌어졌으며, 알렉산드로스는 승리를 기념하여 니카이아라는 도시를 건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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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다스페스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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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교전 | 히다스페스 전투 |
부분 | 알렉산드로스의 인도 원정 |
![]() | |
위치 | 히다스페스강 (현재 파키스탄) |
날짜 | 기원전 326년 5월 |
결과 | 마케도니아의 승리 |
영토 변경 | 마케도니아가 펀자브 대부분을 합병 (히다스페스에서 히파시스까지)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마케도니아 제국 헬라스 동맹 간다라 |
교전국 2 | 파우라바스 |
지휘관 1 | 알렉산드로스 3세세 크라테로스 코에노스 헤파이스티온 프톨레마이오스 페르디카스 셀레우코스 리시마코스 데모니코스 페우케스타스 탁실레스 |
지휘관 2 | 포로스 스피타케스 포로스의 아들들 |
병력 규모 | |
병력 1 | 총 45,000–47,000명 |
병력 1 (세부) | 보병 40,000명 기병 5,000–7,000기 아시아 차출병 |
병력 2 | 총 22,000–54,000명 |
병력 2 (세부) | 보병 20,000–50,000명 기병 2,000–4,000기 전투 코끼리 85–200마리 전차 1,000대 |
사상자 | |
사상자 1 | 총 ~1,000명 |
사상자 1 (세부) | 보병 전사 80–700명 기병 전사 230–280기 |
사상자 2 | 디오도로스 시켈로스 기준 |
사상자 2 (세부, 디오도로스) | 전사 12,000명 포로 9,000명 |
사상자 2 (세부, 아리아노스) | 보병 전사 20,000명 기병 전사 3,000기 |
2. 배경
기원전 328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베소스와 스피타메네스가 이끄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마지막 군대를 격파했다.[41] 이후 기원전 327년, 알렉산드로스는 제국을 인도로 확장하기 위한 원정을 시작했다.[41] 주력군은 카이버 고개를 통해 진입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소수 병력을 이끌고 북쪽 길로 이동하여 아오르노스 요새를 점령했다.[17] 이곳은 그리스 신화에서 헤라클레스가 점령에 실패한 곳으로, 알렉산드로스에게 신화적으로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히다스페스 강(젤룸 강) 북쪽 강둑에 야영지를 설치하고, 정면 공격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다양한 기만 전술을 사용했다.[18] 그는 강물이 마를 때까지 기다릴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나팔을 불고 함성을 지르게 하여 도하에 대한 적의 주의를 분산시켰다.
알렉산드로스는 은밀하게 상류에서 히다스페스 강을 도하하는 데 성공했다.[35] 포루스는 아들에게 기병대와 전차 부대를 보내 알렉산드로스의 도하를 저지하려 했으나, 알렉산드로스는 이를 격파하고 포루스의 아들을 전사시켰다.[35] 포루스는 알렉산드로스의 도하 소식을 듣고, 크라테루스 부대를 견제하기 위한 소규모 병력을 남겨둔 채 주력 부대를 이끌고 알렉산드로스와의 결전에 나섰다.[35]
포루스 군은 중앙에 전차, 양익에 기병과 보병을 배치하고, 기병 전방에 전투 코끼리를 배치하는 전형적인 인도식 진형을 갖추었다.[20] 알렉산드로스는 포루스 군의 중앙이 가장 강력하다고 판단, 기병으로 양익을 먼저 공격하고, 보병(팔랑크스)은 대기시키는 전술을 사용했다.[20]
알렉산드로스는 포로로 잡힌 포루스에게 어떻게 대우받고 싶냐고 물었고, 포루스는 "왕이 다른 왕을 대하는 것처럼 대우해 주시오"라고 답했다.[29] 알렉산드로스는 이 말에 감명받아 그를 왕처럼 대우하고 영토를 돌려주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젤룸강(당시 히다스페스 강) 북쪽 강둑에 야영지를 설치했고, 기원전 326년 봄, 포루스는 도하를 막기 위해 히다스페스 강 남쪽에 병력을 배치했다.[18] 젤룸 강은 깊고 물살이 빨라 정면 공격은 성공할 가망이 없었기에, 알렉산드로스는 다른 여울을 찾으려 했다. 그는 포루스가 그를 따라다니는 동안 매일 밤 기병대를 강둑 위아래로 이동시켰다.
히다스페스 전투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인도 원정 중 가장 중요한 전투 중 하나로, 그의 군사적 업적을 상징한다. 이 전투는 동서양 문명의 충돌과 교류의 초기 사례 중 하나이며, 이후 헬레니즘 시대의 문화적 융합에 영향을 미쳤다.
전투는 인더스강 삼각주인 현재의 펀자브 서쪽의 젤룸강 동쪽 강변에서 일어났다. 이후 알렉산드로스는 이곳에 니카에아라는 도시를 건설했는데, 이 도시는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40] 오랜 시간을 거치며 지형이 크게 변했기 때문에 고대 전투의 격전지를 찾으려는 시도는 복잡해졌다.[40] 현재 가장 가능성이 있는 위치는 젤룸 시의 남쪽으로, 이곳은 고대의 주요 도로가 강을 가로지르는 곳이었으며, 불교 문헌에는 니카에아로 추정되는 도시에 대한 언급이 있다.[40] 고대에는 이 강이 이 도시들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현대의 잘라푸르 근처를 격전지로 비정한 것은 오류이다.[40]
[1]
서적
Alexander The Great
https://books.google[...]
Ebury Publishing
2012-03-31
이듬해 이른 봄, 알렉산드로스는 탁실라의 왕 탁실레스(현지 이름 암비)와 동맹을 맺었다. 이들은 히다스페스 강 건너편의 왕 포루스에 대항하기 위해 연합했다.[17] 포루스는 알렉산드로스의 항복 요구를 거부하고 전쟁을 준비했다.[17] 포루스는 히다스페스 강 남쪽 강둑에 병력을 배치하여 알렉산드로스의 도하를 저지하려 했다.
3. 전투 준비
포루스는 도하를 저지하기 위해 강 남쪽에 병력을 배치했고, 알렉산드로스는 매일 밤 기병대를 이동시키며 정찰하는 등 적을 혼란시키는 작전을 펼쳤다.[18]
알렉산드로스는 야영지에서 약 27km 상류에 있는 숲으로 덮인 섬을 도하 지점으로 선정하고, 은밀하게 병력을 이동시켰다.[18] 크라테루스에게 본대를 맡겨 포루스를 견제하게 하고,[19] 자신은 정예 부대(보병 6,000명과 기병 5,000명)를 이끌고 상류에서 강을 건너는 기동 작전을 펼쳤다. 멜레아거르, 아탈로스, 고르기아스 등에게는 별동대를 맡겨 다른 지점에서 강을 건너게 하여 포루스 군을 분산시키려 했다.[18]
알렉산드로스는 가짜 왕의 천막을 설치하고, 자신과 닮은 사람을 내세워 권위를 과시하는 등 다양한 기만 전술을 통해 포루스의 경계를 늦추었다. 또한 '건초를 채운 가죽 부대'와 '30개의 노가 달린 갤리선을 반으로 자른 작은 선박'을 사용하여 극비리에 강을 건넜다.
이러한 기만 전술 덕분에 포루스는 알렉산드로스의 도하를 예상하지 못하고 안도감에 빠졌다. 알렉산드로스는 실수로 섬에 상륙했지만 곧 반대편으로 건너갔고, 그날 밤 폭풍이 몰아쳐 도하 소리가 묻힌 덕분에 은밀하게 도하를 마칠 수 있었다.[35]
4. 전투 개시
5. 전투
알렉산드로스는 다하에 기마 궁수 부대를 활용하여 포루스 군 우익을 공격하고, 친위 기병대를 좌익에 투입하여 인도 기병대를 압박했다.[20] 코에누스는 포루스 군 우익 배후를 공격하여 인도 기병대를 혼란에 빠뜨렸다. 인도 기병대는 양면 공격에 혼란스러워하며 후퇴했고, 전투 코끼리 부대가 전면에 나서 마케도니아 기병과 보병을 공격했다.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는 전투 코끼리의 공격에 큰 피해를 입었지만, 경보병과 중보병의 협공으로 코끼리 부대를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20] 인도 기병대는 다시 한번 돌격을 시도했으나, 알렉산드로스의 기병대에 의해 격퇴되었다. 전투 코끼리 부대는 마케도니아 군의 공격에 혼란에 빠져 아군 진영으로 돌진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마케도니아군은 팔랑크스를 전진시키고 기병대의 후방 공격을 통해 포루스 군을 패주시켰다. 히다스페스 강을 건넌 크라테로스의 본대가 패주하는 포루스 군을 추격하여 섬멸했다.[21] 포루스는 용감하게 싸웠으나 결국 알렉산드로스에게 항복했다.[22]
아리아누스(Arrian)에 따르면, 마케도니아의 손실은 보병 80명, 기마 궁수 10명, 친위대 20명, 기타 기병 200명에 달했다.[23] 그러나 군사 역사가 J.F.C. 풀러는 디오도로스(Diodorus)의 전사자 1,000명이라는 수치가 더 현실적이라고 보았다.[24] 아리아누스에 따르면 인도군의 손실은 23,000명에 달했고, 디오도로스에 따르면 12,000명이 사망하고 9,000명 이상이 포로로 잡혔다.[25][26][27]
6. 전투의 결과 및 영향
알렉산드로스는 전투 후 부케팔라와 니카이아라는 두 도시를 건설하여 자신의 승리를 기념했다. 부케팔라는 전투 중 또는 직후에 죽은 그의 애마 부케팔로스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고,[29] 니카이아는 승리를 뜻하는 그리스어 '니케(Nike)'에서 이름을 따와 전투가 벌어진 장소에 세워졌다.[29]
알렉산드로스는 히다스페스 전투 이후 동쪽으로 더 진군하려 했으나, 병사들의 반대로 인해 바빌론으로 귀환하게 되었다. 인도군은 "기병 80,000명, 보병 200,000명, 전차 8,000대, 전차 6,000마리"를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다는 소문[36]과, 알렉산드로스 군의 피해가 컸던 점, 병사들이 고향을 그리워했던 점 등이 이유였다.
히다스페스 전투는 알렉산드로스의 뛰어난 전술과 마케도니아 군의 전투력을 보여준 대표적인 전투로 평가받는다. 포루스가 패배한 주요 원인은 알렉산드로스의 영리한 전술 사용과 마케도니아 군의 우수한 규율 및 기술이었다.[17] 인도군은 그리스 기병대보다 열등한 전차를 사용했고, 정규군을 갖추지 못했으며, 보병과 기병대는 금속 갑옷이 부족하여 제대로 무장하지 못했고, 그들의 칼은 마케도니아 군의 사리사에 견줄 수 없었다.[17]
이 전투는 이후 마우리아 제국의 군사 전략에 영향을 미쳤다.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는 히다스페스 전투를 교훈 삼아 전투 전에 군사 훈련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정규군을 유지하고 전투 코끼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17]
한국의 관점에서 이 전투는 서양 세력이 동양의 강력한 제국에 맞서 승리한 초기 사례 중 하나로 해석될 수 있다.
7. 전력 및 사상자
구분 포루스 군 알렉산드로스 군 병력 기병 4,000명, 전차 300대, 전투 코끼리 200마리, 보병 30,000명[37] 자료에 따라 135,000명[30], 41,000명[31], 46,000명[32]으로 차이가 있지만, 전투 참가 병력은 보병 40,000명, 기병 5,000명 사상자 보병 20,000명 전사, 기병 3,000명 전사, 9,000명 포로[37], 전차 모두 파괴 보병 80명 전사, 궁병 10명 전사, 기병 220명 전사[38]
포로스의 두 아들과 스피타케스를 포함하여 병사 12,000명이 전사하고 9,000명이 포로가 되었다는 기록과[36] 알렉산드로스 군은 보병 4,000명, 궁병 200명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하고, 그 외 8,000명 가까이가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8. 전술 분석
결국 알렉산드로스는 야영지에서 상류 지점에서 적절한 도하 지점을 찾아 사용했다. 이곳은 숲으로 덮인 섬이 강을 가로지르는 곳이었다.[18] 그는 부대를 이끌고 건너면서 섬에 상륙했고, 병사들은 물을 건넜다. 그의 계획은 포위 공격과 유사했다. 그는 포루스의 주력 부대의 양쪽 측면을 공격하여 인도 기병대를 오른쪽에서 포위하려 했다.[19] 그는 크라테루스 장군에게 대다수의 군대를 맡겨 포루스가 그의 도하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했다. 2세기 그리스 역사가 아리아노스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는 보병 6,000명과 기병 5,000명(아마 더 많았을 것이다)으로 구성된 강력한 병력을 이끌고 상류로 강을 건넜다. 크라테루스는 포루스가 모든 병력을 이끌고 알렉산드로스를 상대하면 강을 건너 공격하고, 포루스가 군대의 일부만 이끌고 알렉산드로스를 상대하면 자리를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멜레아거르, 아탈로스, 고르기아스가 지휘하는 다른 병력들은 기동 과정에서 여러 지점에서 강을 건너라는 명령을 받았다.[18]
알렉산드로스는 수많은 기만 전술과 속임수를 사용하여 도하를 위한 복잡한 준비를 했다. 포루스는 계속해서 움직이도록 유도되었고, 결국 그것이 허세라고 판단하고 경계를 늦추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도하지점에 방문할 때마다 계획의 은밀성을 유지하기 위해 내륙으로 우회했다. 또한 기지 근처에 가짜 왕의 천막을 치고 알렉산드로스와 닮은 사람이 권력을 잡고 있다는 보고도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조용히 군대의 일부를 상류로 이동시킨 다음 '건초를 채운 가죽 부대'와 '30개의 노가 달린 갤리선을 반으로 자른 작은 선박'을 사용하여 극비리에 강을 건넜다.[35] 게다가 크라테루스는 그가 강을 건널 수도 있다는 빈번한 기만 전술을 펼쳤다. 그 결과 포루스는 '어둠 속에서 갑작스러운 공격을 더 이상 예상하지 않고 안도감에 빠졌다'. 알렉산드로스는 실수로 섬에 상륙했지만 곧 반대편으로 건너갔다. 포루스는 적의 기동을 감지하고 아들인 포루스에게 기병대와 전차 부대를 보내 그들을 격퇴하여 알렉산드로스의 도하를 막으려 했다. 마침 그날 밤 폭풍이 몰아쳐 도하 소리가 묻혔다.
강을 건넌 알렉산드로스는 모든 기병대와 궁병을 이끌고 포루스의 야영지 방향으로 진격했고, 팔랑크스는 뒤따랐다.[33] 젊은 포루스의 부대와 마주친 그의 기마 궁병들은 그들에게 화살을 퍼부었고, 그의 중기병대는 전투 대형을 갖추지 않고 즉시 돌격했다. 젊은 포루스는 예상치 못한 불리함에 직면했다. 그의 전차는 강가 근처의 진흙에 갇혔다.[20] 그의 소규모 부대는 알렉산드로스의 기병대에 의해 완전히 격파되었고, 그는 사망했다. 이 소식이 노장 포루스에게 전해지자 그는 알렉산드로스가 그의 강을 건넜다는 것을 깨닫고 그의 군대 중 가장 뛰어난 부대를 이끌고 그를 맞이하러 달려갔으며, 크라테루스의 부대가 강을 건너려 할 경우 그들의 상륙을 방해하기 위해 소규모 병력을 남겨두었다.
결국 두 군대는 만나 전투를 벌이기 위해 대열을 갖추었다. 인디아군은 양쪽 측면에 기병을 배치하고, 그 앞에 전차를 배치했으며, 중앙에는 보병을 배치하고, 그 앞 50피트마다 전투 코끼리를 배치하여 마케도니아 기병을 저지했다. 포루스는 전차에서 싸우는 인도 왕들의 일반적인 전통을 따르지 않고, 가장 큰 전투 코끼리 위에 올라탔다.
알렉산드로스는 포루스의 배치가 중앙에서 가장 강력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우선 기병으로 양쪽 측면을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인도 기병이 무력화될 때까지 팔랑크스를 억제했다. 마케도니아 중보병 팔랑크스는 인도 보병에 비해 1:5의 수적 열세였다. 그러나 후자는 갑옷이 부족하고 상대의 사리사가 길어서 근접전에서 상당한 불리함을 겪었다. 심지어 그들의 중장갑 관통 활도 미끄러운 땅 때문에 정확하지 않았다. 비록 진흙투성이 땅이 가벼운 갑옷을 입은 인도인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했지만 말이다.
알렉산드로스는 그의 다하에 기마 궁수를 인도 우익 기병을 괴롭히도록 보내면서 전투를 시작했다. 그의 갑옷을 입은 친위 기병은 수적으로 열세인 인도군을 공격하기 위해 좌익으로 보내졌고, 알렉산드로스 자신이 평소처럼 선두에 섰다.[20] 나머지 인도 기병은 고전을 면치 못하는 우익의 동족을 돕기 위해 질주했지만, 코에누스의 부대는 즉시 그들의 움직임을 따라 뒤에서 공격했다. 인도 기병은 두 번의 공격에 맞서기 위해 이중 팔랑크스를 형성하려 했지만, 필요한 복잡한 기동으로 인해 대열에 더욱 혼란이 야기되었고, 마케도니아 기병이 그들을 격파하기 더 쉬워졌다. 인도 기병은 이렇게 패주하여 코끼리의 안전한 곳으로 도망쳤다.
전투 코끼리는 이제 마케도니아 기병을 향해 진격했지만, 마케도니아 팔랑크스에 직면하게 되었다. 강력한 짐승들은 마케도니아 보병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케도니아 보병은 용감하게 공격에 저항했고, 경보병은 코끼리의 마후트와 눈에 투창을 던졌으며, 중보병은 양날 도끼와 코피스로 코끼리의 힘줄을 끊으려 했다. 한편, 인도 기병은 또 다른 돌격을 시도했지만, 다시 한번 알렉산드로스의 기병대에 의해 격퇴되었고, 그들은 모두 함께 집결했다. 코끼리는 결국 격퇴되어 자신들의 대열로 후퇴했다. 마지막으로, 마케도니아 페제타이로이는 방패를 잠그고 혼란스러운 적 무리를 향해 진격했고, 마케도니아 기병은 고전적인 "망치와 모루" 기동으로 후방에서 돌격하여 인도군 전체를 패주시켰다. 한편, 크라테루스와 기지의 부대는 강을 건너는 데 성공했고, 바로 적절한 순간에 도착하여 도망치는 인도인들을 철저히 추격했다.[21]
9. 역사적 의의
알렉산드로스는 포루스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그의 용맹함에 감탄하여 "왕이 다른 왕을 대하는 것처럼 대우해 주시오"라는 포루스의 말대로 그를 왕처럼 대우하고 영토를 유지하도록 허락했다.[29] 알렉산드로스는 이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부케팔라와 니카이아라는 두 도시를 세웠다. 부케팔라는 전투 중 또는 후에 죽은 그의 충실한 말 부케팔로스를 기리기 위해, 니카이아는 승리를 뜻하는 그리스어 '니케(Nike)'에서 이름을 따와 전투가 벌어진 장소에 세워졌다.
알렉산드로스는 히다스페스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계속되는 원정에 지친 병사들이 히파시스(현대 비아스 강)에서 더 이상 진군하지 않고 서쪽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역사가들은 알렉산드로스 군대의 이러한 행동을 단순한 반란이 아니라, 군대 내의 군사적 불안이 커진 결과로 보았다.[17]
포루스가 패배한 주요 원인은 알렉산드로스의 뛰어난 전술과 마케도니아 군의 훌륭한 규율 및 기술 덕분이었다.[17] 인도군은 그리스 기병대보다 성능이 떨어지는 전차를 사용했고, 제대로 된 군사 기반 시설이나 정규군을 갖추지 못했다. 인도 보병과 기병은 금속 갑옷이 없어 제대로 무장하지 못했고, 그들의 칼은 마케도니아 군의 사리사에 상대가 되지 못했다. 포루스는 전투에서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주로 상대방의 움직임에 대응하려 했다.[17]
마우리아 제국의 카우틸리야는 히다스페스 전투를 교훈 삼아 전투 전에 군사 훈련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는 정규군을 유지했지만, 전차 부대는 마우리아 군사 기반 시설에서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17]
알렉산드로스는 히다스페스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두 개의 도시를 건설했다. 하나는 알렉산드로스의 군마 부케팔라스를 기려 "'''알렉산드리아 부케팔리아'''"(en)로, 다른 하나는 승리의 여신 니케를 기려 "'''알렉산드리아 니카이아'''"(en)로 명명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더 진군하려 했으나, 인도군의 규모(기병 80,000명, 보병 200,000명, 전차 8,000대, 전차 6,000마리)에 대한 소문[36]과 병사들의 피로, 향수병 때문에 바빌론으로 귀환했다.
10. 전장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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