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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테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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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크라테로스는 알렉산드로스 3세의 동방 원정에 참여하여 주요 전투에서 중장보병 부대를 지휘한 마케도니아의 장군이다. 알렉산드로스 사후에는 바빌론 회의에서 후견인으로 임명되었으며, 라미아 전쟁에서 승리하고 안티파트로스의 딸과 결혼했다. 페르디카스에 대항하여 반 페르디카스 동맹을 맺고 에우메네스와 전투를 벌이다 헬레스폰투스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는 알렉산드로스의 친구이자 마케도니아 지상주의를 주창하며 존경을 받았으며, 에우메네스와의 우정 또한 기록되어 있다.

2.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

크라테로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에 참여하여 그라니코스 전투, 이수스 전투, 가우가멜라 전투 등 주요 전투에서 중장보병 부대를 지휘했고, 테에로스 공성전에서는 함대를 이끌었다. 히르카니아에서 독립된 마케도니아 군을 이끄는 사령관으로 임명되기도 했으며, 여러 차례 별동대를 지휘하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신임을 받았다. 파르메니온 사후 원정군의 부장 격으로 활동했고, 히다스페스 강 전투에서는 별동대를 지휘했다. 귀환길에는 별동대를 이끌고 내륙을 통해 카르마니아로 이동하여 왕의 부대와 합류했다.

기원전 324년 수사에서 열린 집단 결혼식에서 페르시아 왕족 출신의 아마스트리네와 결혼했다. 이후 퇴역 군인들을 이끌고 마케도니아로 귀환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임무 수행 도중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바빌론에서 사망했다.

2. 1. 초기 군사 활동

크라테로스는 알렉산드로스 3세의 동방 원정에 참여하여, 그라니코스 전투, 이수스 전투, 가우가멜라 전투와 같은 주요 회전에서 중장보병 부대를 지휘했다.[10][11] 기원전 332년 테에로스 공성전에서는 프뉴타고라스와 함께 함대를 이끌었다.[12]

기원전 330년 히르카니아에서 타푸리아 인에게 특사로 파견되었는데, 이것은 그가 최초로 독립된 마케도니아 군을 이끈 사령관이 된 자리였다.[13] 기원전 327년 소그디아나에서는 카타네스와 아우스타네스(함께 팔라이타케네 지방의 호족)를 모두 물리쳤다.[13] 크라테로스는 여러 차례 별동대를 이끌었으며, 왕의 신임이 두터운 장군 중 한 명이었다. 파르메니온 사후에는 동방 원정군의 부사령관 격이 되었다. 기원전 326년 히다스페스 강 전투에서는 강 건너편에서 별동대를 지휘했다.[14] 귀환길에서 크라테로스는 별동대를 이끌고 왕이 해안을 따라 이동한 것과는 달리 내륙 경로로 카르마니아까지 향했고, 그곳에서 왕의 부대와 합류했다.[15]

기원전 324년 수사에서의 집단 결혼식에서 크라테로스는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3세의 동생 옥시아트레스의 딸인 아마스트리네와 결혼했다.[16] 그 후, 크라테로스는 폴리페르콘과 함께 퇴역병 11,500명을 이끌고 마케도니아 본국으로 귀환하는 임무를 맡았다(그 후에는 안티파트로스의 섭정직을 본국에서 계승할 것을 약속받았다).[17][18] 그러나 그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알렉산드로스는 바빌론에서 병사했다.

2. 2. 알렉산드로스의 신임

크라테로스는 알렉산드로스 3세의 동방 원정에 참가하여, 그라니코스 강 전투, 이소스 전투, 가우가멜라 전투와 같은 주요 회전에서 중장보병 부대를 지휘했다.[10][11] 기원전 332년 티레 포위전에서는 푸니타고라스와 함께 함대를 이끌었다.[12]

히르카니아에서 타푸리인(기원전 330년), 소그디아나에서 카타네스와 아우스타네스(모두 파라이타케네 지방의 호족)에 대항하여(기원전 327년)와 같이, 크라테로스는 여러 차례 별동대를 이끌었으며, 왕의 신임을 받는 장군 중 한 명이었다.[13] 파르메니온 사후에는 동방 원정군의 부사령관 격이 되었다. 기원전 326년 히다스페스 강 전투에서는 강 건너편에서 별동대를 지휘했다.[14] 귀환길에서 크라테로스는 별동대를 이끌고 왕이 해안을 따라 이동한 것에 반해 내륙 경로로 카르마니아까지 향했고, 그곳에서 왕의 부대와 합류했다.[15]

기원전 324년 수사에서의 집단 결혼식에서 크라테로스는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3세의 동생 옥시아트레스의 딸인 아마스트리네와 결혼했다.[16] 그 후, 크라테로스는 폴리페르콘과 함께 퇴역병 11,500명을 이끌고 마케도니아 본국으로 귀환하는 임무를 맡았다(그 후에는 안티파트로스의 섭정직을 본국에서 계승할 것을 약속받았다).[17][18] 하지만, 그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알렉산드로스는 바빌론에서 병사했다.

2. 3. 주요 전투

크라테로스는 알렉산드로스 3세의 동방 원정에 참가하여, 그라니코스 강 전투, 이소스 전투, 가우가멜라 전투 등 주요 회전에서 중장보병 부대를 지휘했다.[10][11] 기원전 332년 티레 포위전에서는 푸니타고라스와 함께 함대를 이끌었다.[12]

기원전 330년 히르카니아에서 타푸리인을 상대로, 기원전 327년 소그디아나에서 카타네스와 아우스타네스를 상대로 하는 등, 크라테로스는 여러 차례 별동대를 이끌었으며, 왕의 신임을 받는 장군 중 한 명이었다.[13] 파르메니온 사후에는 동방 원정군의 부사령관 격이 되었다. 기원전 326년 히다스페스 강 전투에서는 강 건너편에서 별동대를 지휘했다.[14] 귀환길에서 크라테로스는 별동대를 이끌고 왕이 해안을 따라 이동한 것과 달리 내륙 경로로 카르마니아까지 향했고, 그곳에서 왕의 부대와 합류했다.[15]

2. 4. 아마스트리네와의 결혼

기원전 324년 수사에서 열린 집단 결혼식에서 크라테로스는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3세의 동생 옥시아트레스의 딸 아마스트리네와 결혼했다.[16]

2. 5. 마케도니아로의 귀환 임무

기원전 324년 수사의 집단 결혼식에서 크라테로스는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3세의 동생 옥시아트레스의 딸 아마스트리네와 결혼했다.[16] 이후 크라테로스는 폴리페르콘과 함께 퇴역 군인 11,500명을 이끌고 마케도니아 본국으로 돌아가는 임무를 맡았으며, 안티파트로스섭정 자리를 이어받기로 약속받았다.[17][18] 그러나 임무 수행 도중, 알렉산드로스 대왕바빌론에서 병사했다.

3. 알렉산드로스 사후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후 열린 바빌론 회의에서 크라테로스는 레온나토스, 페르디카스, 안티파트로스와 함께 왕비 록사네가 낳을 예정인 아이(알렉산드로스 4세)의 후견인이 되었고,[19] 마케도니아 본국의 여러 일들과 방어를 맡게 되었다.[20][21]

이후 크라테로스는 라미아 전쟁디아도코이 전쟁에 참전하여 활약하였으나, 헬레스폰투스 전투에서 에우메네스에게 패배하여 죽음을 맞이했다.

3. 1. 라미아 전쟁

기원전 322년,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의 여러 도시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을 틈타 마케도니아의 지배에 반란을 일으켰다. (라미아 전쟁) 당시 그리스를 지배하고 있던 안티파트로스는 그리스 연합군에게 패하여 라미아에 갇혀 있었다. 안티파트로스는 레온나토스와 당시 소아시아의 킬리키아에 있던 크라테로스에게 원군을 요청했다.[20][21] 먼저 도착한 레온나토스는 안티파트로스를 라미아에서 탈출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그 대가로 자신은 전사했다. 이어서 도착한 크라테로스는 휘하 군대를 안티파트로스의 군대와 합류시켜, 크란논 전투에서 안티파트로스와 함께 그리스 연합군을 격파하여 전쟁은 마케도니아의 승리로 끝났다. 이후, 지원에 대한 답례로 안티파트로스는 크라테로스에게 명예와 선물을 수여하고, 딸 필라를 아내로 주었다.[22]

3. 2. 디아도코이 전쟁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바빌론 회의에서 크라테로스는 레온나토스, 페르디카스, 안티파트로스와 함께 록사네 왕비의 뱃속에 있던 아이(알렉산더 4세)의 후견인이 되어,[19] 마케도니아 본국의 제반 사항과 방위를 맡았다.[20][21]

이듬해 기원전 322년,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여러 도시들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을 틈타 마케도니아에 반기를 들면서 라미아 전쟁이 일어났다. 당시 그리스를 지배하던 안티파트로스는 그리스 연합군에게 패해 라미아에 고립되었고, 레온나토스와 소아시아의 킬리키아에 있던 크라테로스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먼저 도착한 레온나토스는 안티파트로스를 라미아에서 빼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자신은 목숨을 잃었다. 뒤이어 도착한 크라테로스는 자신의 군대를 안티파트로스의 군대와 합쳐 크란논 전투에서 그리스 연합군을 격파, 마케도니아의 승리로 전쟁을 끝맺었다. 이후 안티파트로스는 크라테로스에게 명예와 선물을 내리고, 자신의 딸 필라와 결혼시켰다.[22]

3. 2. 1. 에우메네스와의 갈등

기원전 321년, 왕의 섭정으로 제국 최고의 지위에 있었던 페르디카스에게 경계심을 품은 크라테로스는 안티파트로스 등과 함께 반(反) 페르디카스 동맹을 맺었다. 페르디카스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를 정벌하기 위해 원정을 떠나자, 크라테로스는 안티파트로스와 함께 소아시아로 건너가 페르디카스로부터 소아시아의 방위를 위임받은 에우메네스를 치려고 했다.[23][21] 이때 페르디카스 측의 장군 네오프톨레모스는 에우메네스를 배신하려고 했지만, 그것을 발각한 에우메네스에 패해 크라테로스에게로 피신해 왔다. 그 후, 크라테로스와 안티파트로스는 군대를 양분하여 크라테로스는 소아시아에서 에우메네스와 전투를 벌였고, 안티파트로스는 이집트를 지원하기 위해 킬리키아로 향했다.[24][21]

그리고 크라테로스와 네오프톨레모스는 에우메네스와 소아시아 북서부의 헬레스폰토스 근교에서 싸웠다. (헬레스폰토스 전투) 이때 에우메네스는 크라테로스의 명망 때문에, 부하들이 스스로를 배반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크라테로스 앞에 그의 얼굴을 모르는 외국 병력을 배치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적들이 어떤 말도 할 틈을 주지 않고 즉시 돌격하라고 명령했다.[25] 에우메네스의 계략은 성공했고, 크라테로스는 모자를 벗고 스스로 크라테로스라고 알렸지만, 낙마해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말에 짓밟혀 죽었다.[26][21] 전쟁 후 코르넬리우스 네포스에 따르면 예전부터 이어졌던 우정 때문에, 에우메네스는 크라테로스를 위해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주었고 그 유골은 마케도니아에 있는 크라테로스의 처에게로 보냈다.[27] 아이러니하게도, 에우메네스는 기원전 316년에 안티고노스에게 패배해 죽었을 때, 오랜 친구였던 안티고노스도 똑같이 장엄한 장례를 치르고 조의를 표했다.

3. 2. 2. 헬레스폰투스 전투와 죽음

기원전 322년,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의 여러 도시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을 틈타 마케도니아의 지배에 반란을 일으켰다. (라미아 전쟁) 당시 그리스를 지배하고 있던 안티파트로스는 그리스 연합군에게 패하여 라미아에 갇혀 있었다. 안티파트로스는 레온나토스와 당시 소아시아의 킬리키아에 있던 크라테로스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먼저 도착한 레온나토스는 안티파트로스를 라미아에서 탈출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그 대가로 자신은 전사했다. 이어서 도착한 크라테로스는 휘하 군대를 안티파트로스의 군대와 합류시켜, 클라논 전투에서 안티파트로스와 함께 그리스 연합군을 격파하여 전쟁은 마케도니아의 승리로 끝났다.[22] 이후, 지원에 대한 답례로 안티파트로스는 크라테로스에게 명예와 선물을 수여하고, 딸 필라를 시집보냈다.

기원전 321년, 왕의 섭정으로서 제국 최고의 지위에 있던 페르디카스에게 경계심을 품은 크라테로스는 안티파트로스 등과 함께 페르디카스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었다. 페르디카스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를 정벌하기 위해 원정을 떠나자, 크라테로스는 안티파트로스와 함께 소아시아로 건너가 페르디카스로부터 소아시아 방어를 위임받은 에우메네스를 치려고 했다.[23][21] 이때 페르디카스 측의 장군 네오프톨레모스는 에우메네스를 배신하려고 했지만, 이를 눈치챈 에우메네스에게 패하여 크라테로스에게 도망쳐 왔다. 그 후, 크라테로스와 안티파트로스는 군대를 둘로 나누어 크라테로스는 소아시아에서 에우메네스와 전투를 벌였고, 안티파트로스는 이집트를 지원하기 위해 킬리키아로 향했다.[24][21]

크라테로스와 네오프톨레모스는 에우메네스와 소아시아 북서부의 헬레스폰토스 근교에서 싸웠다. (헬레스폰토스 전투) 이때 에우메네스는 크라테로스의 명망 때문에 휘하 군대가 자신을 배신할 것을 두려워하여, 크라테로스의 정면에는 그의 얼굴을 모르는 외국인 병사를 배치하고, 그들에게 적이 무언가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즉시 돌격하라고 명령했다.[25] 에우메네스의 계략은 성공하여, 크라테로스는 모자를 벗어 자신이 크라테로스임을 알렸지만, 낙마하여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말에 짓밟혀 죽었다.[26][21] 전투 후, 코르넬리우스 네포스에 따르면 평소의 우정 때문에 에우메네스는 크라테로스를 위해 장대한 장례식을 거행하고, 그의 유해는 마케도니아에 있는 크라테로스의 처자에게 보내졌다.[27] 아이러니하게도, 에우메네스는 기원전 316년에 안티고노스에게 패하여 죽었을 때, 오랜 친구였던 안티고노스도 똑같이 장엄한 장례를 치르고 조의를 표했다.

3. 2. 3. 장례

코르넬리우스 네포스에 따르면, 에우메네스는 평소의 우정 때문에 크라테로스를 위해 장대한 장례식을 거행하고 그의 유해는 마케도니아의 크라테로스의 처자식에게 보냈다.[27] 이후 기원전 316년에 에우메네스는 안티고노스에게 패하여 살해되었는데, 오랜 친구였던 안티고노스도 마찬가지로 그를 위해 장엄한 장례를 치르고 조의를 표했다.

4. 인물됨

크라테로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친한 친구이자, 유능하고 신뢰할 수 있는 가신이었다. 헤파이스티온이 ‘알렉산더의 친구’라고 불렸지만, 크라테로스는 ‘왕의 친구’라고 불렸다.[30] 그는 마케도니아인 장병들 사이에서 신망이 두터웠고, 존경을 받았다.[31]

4. 1. 마케도니아 전통주의

크라테로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친한 친구이자, 유능하며, 신뢰할 수 있는 가신이었다. 헤파이스티온이 '알렉산더의 친구'라고 불렸지만, 크라테로스는 '왕의 친구'라고 불렸다.[30] 한편 크라테로스는 왕의 역정을 살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케도니아의 습속을 유지하면서도 페르시아 풍의 풍속을 도입하는 등 알렉산드로스에게 정면으로 반대되는 마케도니아 지상주의를 주창했다. 따라서 마케도니아인 장병들 사이에서 그에게 신망은 두터웠고, 존경을 받고 있었다.[31] 이런 사정으로 인해 크라테로스를 전사시킨 에우메네스는 가장 먼저 적의와 반감을 샀다. 또한 네포스에 따르면 크라테로스는 나중에 자신을 죽이게 되는 에우메네스와 친하게 교제하고 있었다고 전한다.[32]

4. 2. 에우메네스와의 관계

크라테로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친한 친구이자 유능하고 신뢰할 수 있는 신하였다. 헤파이스티온이 '알렉산드로스의 친구'로 불린 반면, 크라테로스는 '왕의 친구'로 불렸다.[30] 크라테로스는 왕의 비위를 거스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케도니아의 습속을 유지하며 페르시아풍의 풍속을 받아들이는 알렉산드로스에게 정면으로 반대하며 마케도니아인 지상주의를 주창했다. 이 때문에 마케도니아인 장병들의 그에 대한 인망은 두터웠고, 그는 존경을 받았다.[31] 이러한 사정으로, 크라테로스를 전사시킨 에우메네스는 가장 먼저 적의와 반감을 사게 되었다. 또한, 네포스에 따르면, 크라테로스는 후에 스스로를 죽이게 될 에우메네스와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32]

5.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음성학적으로 정확한 철자인 '크라테로스'로 명명된 크라테로스는 A.J. 케이브의 역사 소설 《록사나 로맨스》에 등장하는 조연 중 한 명이다.[1] '크라테로스'로 불리는 크라테로스는 메리 르노의 두 알렉산드로스 소설인 《페르시아 소년》과 《천국의 불꽃》의 주요 등장인물이다.[2] 영화 《알렉산더》에서 크라테로스는 영국 배우 로리 맥칸이 연기했다.[3]

참조

[1] 서적
[2] 서적 2017-05
[3] 서적 A History of the Hellenistic World Blackwell Publishing
[4] 간행물 Hostile inaction? Antipater, Craterus, and the Macedonian regency https://www.cambridg[...] 2017-05
[5] 서적 Alexander's Heirs: The Age of the Successors https://books.google[...] John Wiley & Sons 2014-07-14
[6] 서적 2017-05
[7] 서적
[8] 서적 2017-05
[9] 문서 アッリアノス, I. 25
[10] 문서 ibid, I. 14, II. 8, III. 11
[11] 문서 ディオドロス, XVII. 57
[12] 문서 アッリアノス, II. 8
[13] 문서 アッリアノス, III. 23, IV. 22
[14] 문서 ibid, V. 18
[15] 문서 ibid, VI. 15, 27
[16] 문서 ibid, VII. 4
[17] 문서 ibid, VII. 12
[18] 문서 クルティウス, X. 4. 3
[19] 문서 ユスティヌス, XIII, 2
[20] 문서 フォティオス, cod. 82
[21] 문서 フォティオス, cod. 92
[22] 문서 ディオドロス, XIII. 12-18
[23] 문서 ネポス, 「エウメネス」, 3
[24] 문서 ディオドロス, XIII. 29
[25] 문서 プルタルコス, 「エウメネス」, 6, 7
[26] 문서 ディオドロス, XIII. 30
[27] 문서 ネポス, 「エウメネス」, 4
[28] 문서 プルタルコス, 「アレクサンドロス」, 47
[29] 문서 プルタルコス, 「エウメネス」, 6
[30] 문서 플루타르코스, "알렉산더" 47
[31] 문서 플루타르코스, 《에우메네스》 6
[32] 문서 네포스, 《에우메네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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