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기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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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강기덕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이후 정치인이다.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여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신간회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광복 후에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 조선인민공화국 농림부장 등을 역임했으나, 한국 전쟁 중 납북되었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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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대표 48인 - 최남선
최남선은 1890년에 태어나 1957년에 사망한 대한민국의 문인이자 독립운동가, 언론인, 역사학자이며, 《소년》을 창간하고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여 현대 한국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으며, 3·1 운동 독립선언서 기초, 친일 행적, 단군 연구, 《단군론》, 《불함문화론》 저술 등의 활동을 했다. - 민족대표 48인 - 박인호 (1854년)
박인호는 천도교 제4대 교주이자 독립운동가로, 갑오농민전쟁에 참여, 3·1 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 《조선독립신문》 발간을 주도하는 등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헌신하였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독립운동가 - 홍명희
홍명희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소설가, 정치인으로, 장편소설 《임꺽정》으로 유명하며, 독립운동 참여, 언론 및 교육계 활동 후 해방 후 남북협상 참여, 월북하여 북한에서 요직을 역임하며 정치적 역할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독립운동가 - 허헌
허헌은 일제강점기 변호사이자 독립운동가로서 3·1 운동 관련자 변호와 신간회 활동을 했고, 해방 후에는 건준위 부위원장, 민전 공동의장 등을 지내며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했으며, 월북 후 김일성종합대학 총장 등을 지냈다. - 한국민주당 당원 - 김동인
김동인은 '약한 자의 슬픔'으로 시작하여 '감자'와 같은 작품을 통해 사실주의를 개척하고, 《창조》를 창간했으며, 사후 동인문학상이 제정되었다. - 한국민주당 당원 - 허영호 (정치인)
허영호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신간회 활동을 했으나, 중일전쟁 이후 친일로 전향하여 해방 후 혜화전문학교 교장과 동국대학교 학장을 역임했으며, 제헌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지만 한국 전쟁 중 납북되어 사후 친일 행적이 드러나 건국훈장이 취소되고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
강기덕 | |
---|---|
기본 정보 | |
본관 | 신천(信川) |
호 | 덕재(德齋) |
생애 | |
출생 | 1885년 11월 2일 |
사망 | 1950년 9월 28일 (64세) |
주요 활동 |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 한국독립당 활동 해방 후 건국운동 참여 6.25 전쟁 중 납북 |
독립운동 | |
활동 내역 | 1919년 3·1 운동 후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 역임 한국독립당에 가입하여 활동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참여, 건국운동에 힘씀 |
6.25 전쟁 납북 | |
납북 | 6·25전쟁 당시 조선인민군에 의해 납북 |
사망 | 1950년 9월 28일 평양에서 사망 |
사후 | |
대한민국 정부 포상 |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2. 생애
강기덕은 함경남도 원산 출신으로, 아오야마가쿠인 중등부를 거쳐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를 졸업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3·1 운동에 민족대표 48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고, 1927년 함남기자대회 사건에 연루되었으며, 1930년대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광복 후에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전국인민대표대회 위원, 조선인민공화국 농림부장, 민주주의민족전선 함남 지방대표, 근로대중당 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함경남도지사를 지냈다.
1950년 한국 전쟁 중 북한으로 납북되었으며, 1956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 가담한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2. 1. 독립운동
함경남도 원산 출신인 강기덕은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고, 1927년 함남기자대회 사건에 연루되었으며, 1930년대에는 신간회 회원으로 활동하는 등 일제 강점기 동안 꾸준히 독립운동을 전개했다.3.1 운동 이후에도 언론, 사회 단체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1920년대에는 덕원청년회 위원장, 조선청년회연합회 함남지부장, 고려공산동맹 함남대표, 함남 도민대회 집행위원, 원산노동총회 대표, 조선사회운동동맹 발기 준비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3] 1926년 원산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체제와 사회 제도 파괴를 비판하는 연설을 하여 투옥되기도 했다.[1]
이러한 공헌을 기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1][3]
2. 1. 1. 3.1 운동 참여
1919년 3·1 운동에 민족대표 48인 중 한 사람으로 참가했다. 당시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고려대학교의 전신) 재학 중이었으며, 박희도, 이갑성을 통해 민족대표 33인과 연결된 뒤 학생 단체들과 모의하여 탑골공원 시위를 조직했다.3·1 운동 거사 당일, 민족대표들이 당초 탑골공원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로 한 약속을 갑자기 바꾸어 태화관에 모여 있자 학생 대표로 태화관에 찾아가서 항의했다. 이들이 체포된 뒤에도 연희전문학교의 김원벽과 함께 중등학교 학생들을 규합하여 후속 시위를 주동하다가 3월 5일 서울역 시위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했다.[6]
2. 1. 2. 함남기자대회 사건
1927년 함남기자연맹이 기자대회를 주최하려다가 경찰과 충돌하여 시위가 발생한 함남기자대회 사건에 연루되었다.[6]2. 1. 3. 신간회 활동
1919년 3·1 운동 이후 1927년 함남기자연맹이 기자대회를 주최하려다가 경찰과 충돌하여 시위가 발생한 함남기자대회 사건에 연루되었고, 1930년대에는 신간회 회원으로서 독립 운동을 계속했다.[6]1930년 신간회 원산지회 집행위원장,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31년에는 신간회 해소를 위해 개최된 전체 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신간회의 문서 후계 조직으로의 이관을 담당했다.[1]
2. 2. 광복 이후 활동
1945년 광복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전국인민대표대회 위원과 조선인민공화국 농림부장으로 선임되었다.[1] 같은 해 12월에는 신탁통치 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을 맡았다.[1] 1946년 2월부터 민주주의민족전선 준비위원회 함남 지방대표를, 1947년 3월부터 근로대중당 감찰위원장, 9월부터는 위원장을 역임했다.[1]1948년 3월 근로대중당을 탈당하고, 같은 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10월에는 정부를 지지하는 대한국민당의 발기 준비위원을 맡았다.[1] 1949년 2월부터 초대 함경남도지사, 3월부터 선거법규 기초위원, 10월부터 조선민주당 최고위원을 역임했다.[1] 이외에도 함남 도민회장, 건국대학교 초대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3]
2. 3. 한국 전쟁과 납북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후 북한에 납북되었다. 1956년 6월까지 교화소 분소에 구금되어 있다가[6] 1956년 7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결성에 가담했다.[6]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1950년 7월 10일 11시경 안암동에서 납치되었으며[4], 같은 해 7월에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회의에 참석한 기록이 있다. 그 후 함경북도 방면으로 이주하였다는 설 외에는 행적이 알려지지 않았다.[6][5]3. 평가
3·1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함남기자대회 사건, 신간회 활동 등 독립운동에 헌신한 점은 높이 평가받는다. 그러나 한국 전쟁 중 입북하여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 가담한 행적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6]
3. 1. 긍정적 평가
1919년 3·1 운동 당시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고려대학교 전신) 재학생으로서 민족대표 48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였다. 박희도, 이갑성을 통해 민족대표 33인과 연결, 학생 단체들과 탑골공원 시위를 조직하였다.[3]3·1 운동 당일, 민족대표들이 탑골공원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로 한 약속을 어기고 태화관에 모이자, 학생 대표로 태화관에 찾아가 항의하였다. 이들이 체포된 후에도 연희전문학교 김원벽과 함께 중등학교 학생들을 모아 후속 시위를 주도하다 3월 5일 서울역 시위 현장에서 체포,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1927년 함남기자대회 사건에 연루되었고, 1930년대 신간회 회원으로서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1945년 광복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전국인민대표대회 위원, 조선인민공화국 농림부장, 신탁통치 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 민주주의민족전선 준비위원회 함남 지방대표, 근로대중당 감찰위원장 및 위원장 등 정치 활동을 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대한국민당 발기 준비위원을 맡았고, 1949년 초대 함경남도지사, 선거법규 기초위원, 조선민주당 최고위원을 역임하였다.[1]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1][3]
3. 2. 부정적 평가
한국 전쟁 중 북한으로 넘어가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 참여한 점은 비판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6] 1950년 7월 10일 안암동에서 납북되어[4] 1956년 6월까지 교화소에 구금되었다가,[5] 같은 해 7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 가담한 기록이 있다.[6]그러나 당시 시대적 상황과 강제적인 납북 정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4. 서훈
1990년 대한민국 정부는 강기덕의 공헌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1][3]
참조
[1]
웹사이트
독립운동인명사전 -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https://search.i815.[...]
2023-09-21
[2]
웹사이트
882.강기덕 -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http://www.kwafu.org[...]
2023-09-21
[3]
웹사이트
강기덕(康基德)
https://encykorea.ak[...]
2023-09-21
[4]
웹사이트
5246.강기덕 -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http://www.kwafu.org[...]
2023-09-21
[5]
웹사이트
북한총람 중 납북인사명단(1)-가1 -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http://www.kwafu.org[...]
2023-09-21
[6]
웹사이트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납북인사 명록
http://www.korwarabd[...]
2006-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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