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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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강위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개화 사상가로, 실학에서 개화파로의 사상적 전환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는 1820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학문을 연마했으며, 김정희의 문하에서 시, 서예, 그림을 배웠다. 1860년대 이후 삼정의 문란을 개혁하고자 노력했으며, 쇄국 정책과 위정척사론을 비판하며 개항론을 주장했다. 그는 《한성순보》 발간에 참여하여 국한문 혼용을 주장했고,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하며 근대적 개혁을 모색했으나, 1884년 사망했다.
강위는 1820년 5월 2일 경기도 광주군 세촌면 복정리(현, 성남시 수정구 복정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무관 가문이었으나, 11대조 강희신이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몰락한 후로는 곤궁한 하급 무관 가문이었다.[2] 어릴 적 이름은 성호(性澔), 문위(文瑋)였으나 성인이 된 뒤 이름을 위(瑋)로 고쳤다. 어려서부터 병약하여 잔병치레를 많이 하였다고 한다.[2]
강위는 스승인 김정희와 마찬가지로 고증학을 학문의 바탕에 두었다.[26] 그는 나이나 신분에 얽매이지 않는 태도를 보였으며, 양반의 특권을 없애고 귀천의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다.
2. 생애
병서와 형전 등을 읽으며 병(兵), 형(刑), 전(錢), 곡(穀) 등 각 방면의 학문을 닦았고, 민노행(閔魯行)의 문하에서 경전과 시문을 배웠다. 소년 시절 과거 시험을 준비할 때 의정부영의정을 지낸 정원용(鄭元容)의 집에서 하숙하였으며, 이때 그의 손자인 정건조(鄭健朝)와 함께 공부하였다. 이 인연으로 훗날 이조판서를 역임한 정건조와는 평생 친구로 지냈다. 1834년 향시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고, 이후 여러 번 문과에 응시하였지만 번번히 낙방하였다.
문벌상의 제약과 곤궁한 가정 형편, 과거 시험의 부정행위, 과거 대리 시험, 매관매직 등으로 환멸감을 느끼고 과거를 포기한 그는 전국을 방랑하다가 정건조의 극력 만류에도 불구하고 비성리학적 이단으로 몰려 은거하던 민노행을 다시 찾아가 4년간 수학하였다. 그러나 과거 시험을 단념하지 못하고 계속 응시했고, 1844년(헌종 10년) 결국 과거를 단념하게 된다. 이후 사근록(近思錄) 등을 탐독하며 시름을 달랬다. 민노행은 그에게 김정희를 찾아가 보라고 권고하였다. 민노행이 사망하기 전 강위는 그의 권고에 따라 제주도 대정현에 귀양가 있던 추사 김정희를 찾아가 그의 문인이 되어 5년간 시, 서예, 그림을 배웠다.
1848년 김정희가 유배에서 풀려나자 그를 따라 한성부로 상경하였다. 1851년(철종 2년) 스승 김정희가 권돈인 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남도 북청으로 유배되자 그를 따라가 시중, 수발을 들었다. 1854년(철종 5년) 김정희가 유배에서 석방되자 김정희를 하직하고 방랑생활로 들어갔다. 그는 오경석, 최한기, 유대치, 김정호, 박규수, 이동인 등과 가깝게 지냈다. 강화도를 방문하여 하곡 정제두의 문인들과 교류하며 양명학을 접하고, 선불교 사상에도 심취했다. 1856년 김정희의 사망 소식을 듣고 만사를 지어 그를 추모하였다.
강위는 시인으로서 먼저 이름을 떨쳤다. 1870년(고종 7년) 봄, 중인, 향리를 포함한 위항문인과 위항시인, 작가 모임인 육교시사(六橋詩社)를 조직하였다. 육교는 한성부 청계천 하류로부터 여섯째 다리인 광교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 곳 주위에는 의관(醫官), 역관(譯官), 중인 등의 집단적 거주지가 있었다. 여기에는 중인, 의관, 역관, 서자와 양반, 평민 등 다양한 계층의 문인, 시인들이 참여하였다.
1862년(철종 13년) 5월 정건조의 주선으로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의 설치에 참여하였다. 그는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 및 위정척사파의 척사론에 대해 '외국의 정형도 모르고 떠드는 소리'라며 깊이 우려했다.[12]
1873년 12월 친구 정건조가 청나라에 동지사로 파견되자 사행길의 수행원으로 북경, 천진을 방문하고, 이듬해 5월에 귀국하였다.[1] 1874년 10월 이전의 문하생이었던 이건창이 청나라 사신의 서장관으로 파견되자 그도 수행원으로 다녀왔다.[1] 이후 실학자에서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자는 개화 사상가로 전환하였다.[1]
1880년 조선 조정에서 김홍집을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할 때 김홍집, 김옥균의 추천으로 수신사의 서기로 수행에 참여하였다. 일본 도착 직후 일본과 중국의 개화파 인사들이 조직한 흥아회(興亞會)에 참석, 가입하여 그들과 교류하였고, 주일본청국대사관의 참찬관으로 근무하던 황준헌(黃遵憲)으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아 귀국 후에 미국과의 수교를 주장하며, 《조선책략》에 나타난 황준헌의 연미거아책(聯美拒俄策)을 적극 옹호하였다.
1883년(고종 20년) 김옥균, 유길준 등의 부탁으로 박문국 설치를 지원, 박영선과 함께 박문국 신설에 참여하고, 일본과 청나라 언론인들의 자문을 얻었으며, 일본인 이노우에 카쿠고로를 초청하여 신문 《한성순보》를 간행하였다. 한성순보 발행 당시 그는 언문을 함께 사용하는 국한문 혼용을 주장하여 성사시켰다.
1884년(고종 20년) 4월 5일 경기도 광주 세촌면의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2. 1. 생애 초반
강위는 1820년 5월 2일 경기도 광주군 세촌면 복정리(현, 성남시 수정구 복정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무관 가문이었으나, 11대조 강희신이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몰락한 후로는 곤궁한 하급 무관 가문이었다.[2] 어릴 적 이름은 성호(性澔), 문위(文瑋)였으나 성인이 된 뒤 이름을 위(瑋)로 고쳤다. 어려서부터 병약하여 잔병치레를 많이 하였다고 한다.[2]
병서와 형전 등을 읽으며 병(兵), 형(刑), 전(錢), 곡(穀) 등 각 방면의 학문을 닦았고, 민노행(閔魯行)의 문하에서 경전과 시문을 배웠다. 소년 시절 과거 시험을 준비할 때 의정부영의정을 지낸 정원용(鄭元容)의 집에서 하숙하였으며, 이때 그의 손자인 정건조(鄭健朝)와 함께 공부하였다. 이 인연으로 훗날 이조판서를 역임한 정건조와는 평생 친구로 지냈다. 1834년 향시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고, 이후 여러 번 문과에 응시하였지만 번번히 낙방하였다.
2. 1. 1. 초기 활동
姜瑋|강위중국어는 1820년 5월 2일 경기도 광주군 세촌면 복정리(현, 성남시 수정구 복정동)에서 강진화(姜鎭華)와 박희혁(朴希赫)의 딸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성호(性澔), 문위(文瑋)였으나 성인이 된 뒤 이름을 위(瑋)로 고쳤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무인 가문으로, 아버지 강진화는 공주영장(營將)과 군수를 역임했고, 형 강문기(姜文璂)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중군, 경력 벼슬을 지냈다. 11대조 강희신(姜熙臣)이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벼슬에서 쫓겨난 뒤 몰락, 이후 무과에 응시하여 대대로 무관 가문이 되었다.
곤궁한 하급 무관 가문 출신으로, 어렸을 적에 잔병치레를 많이 하였다고 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병이 많아 빼빼말랐으며, 옷 조차 주체하지 못했다고 한다.[2] 병서와 형전 등을 읽으며 병(兵), 형(刑), 전(錢), 곡(穀) 등 각 방면의 학문을 닦았다. 민노행(閔魯行)의 문하에서 경전과 시문을 배웠으며, 1834년 향시(鄕試)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이후 여러 번 문과에 응시하였지만 번번히 낙방하였다.
소년 시절 과거 시험을 준비할 때 의정부영의정을 지낸 정원용(鄭元容)의 집에서 하숙하였으며, 이때 그의 손자인 정건조(鄭健朝)와 함께 공부하였다. 이 인연으로 훗날 이조판서를 역임한 정건조와는 평생 친구로 지냈다. 그는 낙방 이후 불우한 나날을 보냈지만 정건조는 그를 계속 찾았고, 인연은 계속되었다.
2. 1. 2. 수학과 청년기
1820년(순조 20년) 5월 2일 경기도 광주군 세촌면 복정리(현, 성남시 수정구 복정동)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성호(性澔), 문위(文瑋)였으나 성인이 된 뒤 이름을 위(瑋)로 고쳤다.[2] 어려서부터 병서와 형전 등을 읽으며 병(兵), 형(刑), 전(錢), 곡(穀) 등 각 방면의 학문을 닦았다. 어려서 민노행의 문하에서 경전과 시문을 배웠으며, 1834년(순조 34년) 향시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이후 여러 번 문과에 응시하였지만 번번히 낙방하였다.
소년 시절 과거 시험에 뜻을 두고 공부할 때 의정부영의정을 지낸 정원용의 집에서 하숙하면서 시험을 준비하였으며, 이때 그의 손자인 정건조와 함께 수학하였다. 이때의 인연으로 훗날 이조판서를 역임한 정건조와는 평생의 친구로 왕래하였다.[3] 그는 낙방 이후 불우한 나날을 보냈지만 정건조는 그를 계속 찾았고, 인연은 계속되었다.
문벌상의 제약과 곤궁한 가정 형편, 부정행위로 이루어지는 과거 시험과 과거 대리 시험, 매관매직 등으로 환멸감을 느끼고 과거를 포기한 그는 전국을 방랑하다가 정건조의 극력 만류에도 불구하고 당시 비성리학적 이단으로 몰려 은거하던 민노행의 문하를 다시 찾아가 4년간 수학하였다. 그러나 그는 과거 시험을 단념하지 못하고 계속 과거에 응시했고, 1844년(헌종 10년) 결국 과거를 단념하게 된다. 이후 사근록(近思錄) 등을 탐독하며 시름을 달랬다. 민노행의 문하에 있을 때 민노행은 그에게 김정희를 찾아가 보라고 권고하였다. 민노행이 사망하기 전 강위는 그의 권고에 따라 제주도 대정현에 귀양가 있던 추사 김정희를 찾아가 그의 문인이 되어 5년간 시, 서예, 그림을 배웠다.
2. 1. 3. 방랑 생활과 학문 활동
문벌상의 제약과 곤궁한 가정 형편, 과거 시험의 부정행위, 과거 대리 시험, 매관매직 등에 환멸을 느껴 과거를 포기하고 전국을 방랑하였다. 정건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비성리학적 이단으로 몰려 은거하던 민노행을 찾아가 4년간 수학하였다. 그러나 과거 시험을 완전히 단념하지 못하고 계속 응시했고, 1844년(헌종 10년)에 결국 과거를 단념하였다. 이후 사근록(近思錄) 등을 읽으며 시름을 달랬다.[3] 민노행은 그에게 김정희를 찾아가 보라고 권고하였고, 강위는 민노행이 사망하기 전 그의 권고에 따라 제주도 대정현에 귀양가 있던 김정희를 찾아가 그의 문인이 되어 5년간 시, 서예, 그림을 배웠다.
학문과 수신에 열정을 지녔으나 무반 출신이라는 한계로 일찍이 입신을 포기하고 시문에 몰두하였다.[3] 민노행과 김정희는 청나라로부터 고증학을 받아들여 자기 학문 체계를 수립하였는데, 경세이용을 주장하던 다른 실학자들과도 차이가 있었다. 특히 성리학적 세계관과 다른 세계관을 가졌기에 민노행, 김정희는 물론이고 이들의 문인들도 심한 박해와 냉대를 당했다. 강위도 현실적으로 많은 어려움과 배척에 직면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공자와 맹자 외에도 노장사상과 역술 등에도 학식이 있었다. 민노행에게 경서와 학문을 배우고, 1844년 제주도에 가 있는 김정희를 방문하여 감화를 받았다. 이후 4년간 그의 시중을 들며 학문과 시, 서예, 그림 등을 배웠다. 박지원의 허생전, 호질 등을 비롯한 연암의 작품을 탐독하였다. 1848년 김정희가 유배에서 풀려나자 그를 따라 한성부로 상경하였다. 1850년에는 친구 이건필(李建弼)이 그의 초상화를 그리고, 동료 문인들이 찬을 지었다.
1851년(철종 2년) 스승 김정희가 권돈인 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남도 북청으로 유배되자 그를 따라가 시중, 수발을 들었다. 1854년(철종 5년) 김정희가 유배에서 석방되자 김정희를 하직하고 방랑생활로 들어갔다. 그는 오경석, 최한기, 유대치, 김정호, 박규수, 이동인 등과 가깝게 지냈다. 강화도를 방문하여 하곡 정제두의 문인들과 교류하며 양명학을 접하고, 선불교 사상에도 심취했다. 이건창이 쓴 그의 묘지명에 의하면 "곳곳을 유랑하며 선불교와 병법, 음양법 등을 공부하였다[4]"고 한다. 1856년 김정희의 사망 소식을 듣고 만사를 지어 그를 추모하였다.
강위는 시인으로서 먼저 이름을 떨쳤다. 추사를 떠난 이후 방랑생활을 하며 많은 시를 남겼고, 그의 문집은 대부분 시문이었을 정도로 당대의 유명한 시인이었다.[26] 고종 초기의 무신 신헌(申櫶)의 식객이 되었으며, 신헌 가의 식객생활 외에 전국을 유랑하였다. 강화도 방문 시 만난 영재 이건창은 한때 그의 문하에 출입하며 시와 서화를 배웠다. 정만조(鄭萬朝) 등도 그의 문하에 출입했다.
평생 집 하나 없이 떠돌아다녔지만, 가을 소리를 듣기 위해 상상 속에 집 하나를 세우고 자신의 호를 청추각이라 할 정도로 마음은 넉넉하였다.[6] 그러나 한때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에 고뇌하기도 했다.[7] 영재 이건창은 항상 월사매를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했다. 한강이 바라다 보이는 이건 창의 사랑채는 강위(姜瑋), 여규형(呂圭亨), 정만조(鄭萬朝), 김택영(金澤榮) 등이 출입하면서 시회를 열던 곳이었고, 자연스럽게 월사매에 대한 명성이 퍼져 나갔다.[8]
2. 2. 개혁 운동
1851년(철종 2년) 스승 김정희가 권돈인 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남도 북청으로 유배되자 그를 따라가 시중, 수발을 들었다. 1854년(철종 5년) 김정희가 유배에서 석방되자 김정희를 하직하고 방랑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오경석, 최한기, 유대치, 김정호, 박규수, 이동인 등과 가깝게 지냈다. 강화도를 방문하여 하곡 정제두의 문인들과 교류하며 양명학을 접하고, 선불교 사상에도 심취했다. 이건창이 쓴 그의 묘지명에 의하면 "곳곳을 유랑하며 선불교와 병법, 음양법 등을 공부하였다[4]"고 한다. 1856년 김정희의 사망 소식을 듣고 만사를 지어 그를 추모하였다.
강위는 시인으로서 먼저 이름을 떨쳤다. 추사를 떠난 이후 방랑생활을 하며 많은 시를 남겼고, 그의 문집은 대부분 시문이었을 정도로 당대의 유명한 시인이었다.[26] 고종 초기의 무신 신헌(申櫶)의 식객이 되었으며, 신헌 가의 식객생활 외에 전국을 유랑하였다. 강화도 방문 시 만난 영재 이건창은 한때 그의 문하에 출입하며 시와 서화를 배웠다. 정만조(鄭萬朝) 등도 그의 문하에 출입했다.
강위는 평생 집 하나 없이 떠돌아다녔지만, 가을 소리를 듣기 위해 상상 속에 집 하나를 세우고 자신의 호를 청추각이라 할 정도로 마음은 넉넉하였다.[6] 그러나 한때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에 고뇌하기도 했다.[7]
2. 2. 1. 현실정치 참여와 서실 운영
그는 일찍이 추사 김정희에게서 배웠고, 박규수 등과도 친분이 있었다. 문인 영재 이건창의 주선으로 매천 황현도 그의 문하에서 시와 글을 배웠다. 전국을 방랑하며 시와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1860년 무렵에는 첨정을 지낸 정문용 가의 식객으로 있었다. 1860년대 이후 민란이 계속 발생하자 현실 문제로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1864년 고종 즉위 이후에는 변진환 집의 식객이 되었다. 청계천 주변에 모여 살았던 역관들은 아들이 10여 세가 되면 가정교사를 두고 역과 시험을 준비하였다. 역관 변진환은 광교 옆에 해당루를 짓고 아들 변정과 조카 변위의 시험 공부를 위해 위항 시인인 강위를 초청하였다.[6] 강위가 해당루에서 역관 자제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뒤, 의원 변태환의 아들인 변위는 17세 되던 1873년 역과에 합격하였다.[6] 황현은 청년 시절 과거를 치르러 한양에 왔다가 강위, 이건창, 김택영 등과 깊은 교분을 쌓았다.[9] 이들은 모두 조정 관료와 세도가문의 부정부패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9] 황현 역시 그의 문하에서 시문을 배웠다. 그는 제도의 근본적 개혁을 주장하면서 부국강병에 초점을 맞추었다. 경서 위주와 성리학적 사고에서 벗어나 병학, 지리, 법률에 밝았다.[10]
개화당의 핵심 요원이었던 변수는 그의 집에서 5년간 기숙하며 배운 제자였으며, 통리아문의 주사로서 우정사업과 순보 발행에 관여한 정만조 역시 강위의 문하였다.[11] 정만조는 강위 사후 시집인 고환당수초를 편집하기도 하였다.[11]
청계천 일대에는 중인 시인 모임이 결성되어 있었다. 변위의 위당서실을 비롯해 김석준의 홍약관, 김경수의 인재서옥, 박승혁의 용초시옥, 김한종의 긍농시옥, 황윤명의 춘파시옥, 이용백의 엽광교사 등이 잇달아 있어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자주 오가며 시를 지었다.[6] 강위는 역관, 의관 자제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이런 시인 모임들에도 참여했다.
2. 2. 2. 삼정 문란에 대한 대책
1862년 친구인 판서 정건조(鄭健朝)와 계속 교류하며 서신을 주고받다가 제주도로 가던 길에 그에게 초빙되어 삼정(三政)의 폐단에 대해 직납 방법과 감독 규찰 등에 대한 장문의 시정책을 적어주었다.[5] 정건조의 강권에 의해 지은 3만 어에 달하는 시무책인 《의삼정구폐책 (擬三政捄弊策)》은 그 내용이 너무 혁신적이라 정건조가 이를 탐독하고는 조정에 제출하는데 난색을 표하자, 그는 즉석에서 이를 불살라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정건조는 보관하고 있던 초안을 수습하여 몇 년 후 강위에게 가져와 다시 서문을 받아, 후일 《의삼정규폐책》이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1862년(철종 13년) 5월 정건조의 주선으로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의 설치에 참여하였다.
2. 2. 3. 위정척사론, 쇄국정책론 비판
그는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 및 위정척사파의 척사론에 대해 '외국의 정형도 모르고 떠드는 소리'라며 깊이 우려했다.[12] 병자수호조약 체결 과정에 참여했던 강위는 아무런 준비도 없는 조선이 일본과 싸워 조금도 승산이 없음을 인정하면서, 무조건적인 대결을 주장하는 척화론자들을 강력하게 비판했다.[13] 오경석과 박규수, 강위는 안으로는 대원군 등 위정척사 세력과 맞서고, 밖으로는 일본군의 무력을 견제하며 자주적 개항을 이룩하기 위해 고군분투하였다.[14]
2. 2. 4. 시인모임 활동
그는 김정희의 제자였고, 박규수 등과도 친분이 있었다. 이건창의 주선으로 황현도 그의 문하에서 시와 글을 배웠다. 1860년대 이후 민란이 계속 발생하자 그는 현실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864년 고종 즉위 이후 변진환 집의 식객이 되었다. 청계천 주변에 살던 역관들은 아들이 10여 세가 되면 가정교사를 두고 역과 시험을 준비시켰다. 역관 변진환은 광교 옆에 해당루를 짓고 아들 변정과 조카 변위의 시험 공부를 위해 위항 시인인 강위를 초청하였다.[6] 강위가 해당루에서 역관 자제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뒤, 변태환의 아들인 변위는 1873년 역과에 합격하였다.[6] 황현은 청년 시절 과거를 보러 한양에 왔다가 강위, 이건창, 김택영 등과 교류했다.[9] 이들은 모두 조정 관료와 세도가의 부정부패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9] 황현 역시 그의 문하에서 시문을 배웠다. 그는 경서 위주와 성리학적 사고에서 벗어나 병학, 지리, 법률에 밝았다.[10]
개화당의 핵심 요원이었던 변수는 그의 집에서 5년간 기숙하며 배운 제자였으며, 통리아문의 주사로서 우정사업과 순보 발행에 관여한 정만조 역시 강위의 문하였다.[11] 정만조는 강위 사후 시집인 고환당수초를 편집했다.[11]
청계천 일대에는 중인 시인 모임이 있었다. 변위의 위당서실을 비롯해 김석준의 홍약관, 김경수의 인재서옥, 박승혁의 용초시옥, 김한종의 긍농시옥, 황윤명의 춘파시옥, 이용백의 엽광교사 등이 있어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자주 오가며 시를 지었다.[6] 강위는 역관, 의관 자제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이런 시인 모임들에도 참여했다.
1870년(고종 7년) 봄, 그는 중인, 향리를 포함한 위항문인과 위항시인, 작가 모임인 육교시사(六橋詩社)를 조직하였다. 육교는 한성부 청계천 하류로부터 여섯째 다리인 광교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 곳 주위에는 의관(醫官), 역관(譯官), 중인 등의 집단적 거주지가 있었다. 여기에는 중인, 의관, 역관, 서자와 양반, 평민 등 다양한 계층의 문인, 시인들이 참여하였다.
육교시사의 참가 동인은 회장인 강위와 그의 친구 변진환(邊晉桓)을 비롯하여 오경석, 백춘배(白春培), 김재옥(金在玉), 이명선(李鳴善), 성혜영(成蕙永), 배전(裵㙉), 이용백(李容白), 박승혁, 유영표(劉英杓) 등이었는데, 이들은 특정한 모임 장소를 가지지 않고 동인들의 집을 돌아다니며 시회를 개최하였다. 그 중에서도 모임이 자주 열리던 곳은 변진환의 별장인 해당루(海棠樓)였는데, 모임에서 나온 작품들을 모은 모음집 《해당루상원첩 (海棠樓上元帖)》을 남겼다. 강위는 육교시사에서 읊은 시를 모아 《육교연음집 (六橋聯吟集)》이라는 시집으로 엮어 출간하였다.
육교시사에는 역관이 많아서 그들이 중국이나 일본에 갈 때마다 송별회가 열렸는데, 추사 문하의 동문인 김석준이 중국으로 갈 때에는 강위가 홍약관에 찾아가 시를 지어주며 전송하였다.[6]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 벼슬까지 했던 이원긍(李源兢)도 육교시사에 자주 드나들었다.[6] 양반인 이원긍이 아들 이능화에게 영어, 중국어, 프랑스어 등을 배우게 하여 국학자로 활동하게 한 것은 이 시절에 역관들과 가깝게 지내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6]
2. 3. 중국 순방과 개화 운동
1873년 12월 친구 정건조가 청나라에 동지사로 파견되자 사행길의 수행원으로 북경, 천진을 방문하고, 이듬해 5월에 귀국하였다.[1] 1874년 10월 이전의 문하생이었던 이건창이 청나라 사신의 서장관으로 파견되자 그도 수행원으로 다녀왔다.[1] 이후 실학자에서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자는 개화 사상가로 전환하였다.[1] 오경석 등 역관 및 중인들과 친숙하여 해외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나, 두 번의 사행길을 통해 그는 서구에 발달된 문명이 존재함을 인식하고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위기가 닥쳤다고 경고하였다.[1] 그리하여 박규수와 함께 적극적인 개항론자가 되어, 서구 문물에 대한 개항을 역설하였으나 묵살당했다.[1]
1875년 5월 귀국 후, 박규수, 오경석, 유대치, 이동인 등과 함께 개항의 필요성을 역설하였고, 조정에 진출한 문하생 김윤식, 김홍집 등에게도 꾸준히 개항의 필요성을 역설, 설득하였다.[1]
강위는 중국을 드나들면서 서양 제국의 침략으로 신음하는 중국의 모습을 보고 위기를 느껴, 청나라를 통해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하던 북학파의 시대가 끝났다고 보았다.[16] 그래서 김옥균 등의 개화파와 어울려 지냈다.[16]
1880년 조선 조정에서 김홍집을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할 때 김홍집, 김옥균의 추천으로 수신사의 서기로 수행에 참여하였다. 일본 도착 직후 일본과 중국의 개화파 인사들이 조직한 흥아회(興亞會)에 참석, 가입하여 그들과 교류하였고, 특히 주일본청국대사관의 참찬관으로 근무하던 황준헌(黃遵憲)으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아 귀국 후에 미국과의 수교를 주장하며, 《조선책략》에 나타난 황준헌의 연미거아책(聯美拒俄策)을 적극 옹호하였다.
강위는 중국에 두 차례, 일본에 세 차례나 다녀왔는데, 벼슬이 없었기에 언제나 비공식 수행원이라 친지들이 여비를 마련해 주었다.[16]
2. 3. 1. 청나라 사행길 동행
1873년 12월 친구 정건조가 청나라에 동지사로 파견되자 청나라 사행길의 수행원으로 북경, 천진을 방문하고, 이듬해 5월에 귀국하였다. 1874년 10월 이전의 문하생이었던 영재 이건창이 청나라 사신의 서장관으로 파견되자 그도 수행원으로 다녀왔다. 이후 실학자에서 적극적으로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개화 사상가로 전환하였다. 오경석 등 역관 및 중인들과 친숙하여 해외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나, 두 번의 사행길을 통해 그는 서구에 발달된 문명이 존재함을 인식하고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위기가 닥쳤다고 경고하였다. 그리하여 박규수와 함께 적극적인 개항론자가 되어, 서구 문물에 대한 개항을 역설하였으나 묵살당했다.[1]
2. 3. 2. 개화 운동
1873년(고종 10년) 12월 친구 정건조가 청나라에 동지사로 파견되자 사행길의 수행원으로 북경, 천진을 방문하고, 이듬해 5월에 귀국하였다. 1874년 10월 이전의 문하생이었던 이건창이 청나라 사신의 서장관으로 파견되자 그도 수행원으로 다녀왔다. 이후 실학자에서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자는 개화 사상가로 전환하였다. 오경석 등 역관 및 중인들과 친숙하여 해외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나, 두 번의 사행길을 통해 서구에 발달된 문명이 존재함을 인식하고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위기가 닥쳤다고 경고하였다. 그리하여 박규수와 함께 적극적인 개항론자가 되어 서구 문물에 대한 개항을 역설하였으나 묵살당했다.[1]
1875년(고종 12년) 5월 귀국 후, 박규수, 오경석, 유대치, 이동인 등과 함께 개항의 필요성을 역설하였고, 조정에 진출한 문하생 김윤식, 김홍집 등에게도 꾸준히 개항의 필요성을 역설, 설득하였다. 1875년 9월 강화도 사건(운요호 사건) 후 강화도 담판에서 일본과의 무력 충돌을 회피하기 위해 노력하였다.[1] 1876년 일본의 조약 체결 요구로 강화도 조약이 체결될 때 전권대신 신헌(申櫶)을 막후에서 보좌하였다.
강위는 중국을 드나들면서 서양 제국의 침략으로 신음하는 중국의 모습을 보고 위기를 느껴, 청나라를 통해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하던 북학파의 시대가 끝났다고 보았다.[16] 그래서 김옥균 등의 개화파와 어울려 지냈다. 스승인 강위까지 중국과 일본을 다녀온 후 육교시사의 역관 동인들은 거의 모두 개화파가 되었다.[16]
1876년(고종 13년) 강화도 조약 당시 조선측 교섭단에서 신헌의 비서 격으로 반당에 강위와 수역 오경석이 참가했다.[17] 조약 체결 당시 그는 필담(筆談)을 책임맡았다. 16일간의 회담 과정에서 강위는 박규수와 긴밀하게 서신을 왕래하며 조약을 성사시켰다.[26]
1880년 조선 조정에서 김홍집을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할 때 김홍집, 김옥균의 추천으로 수신사의 서기로 수행에 참여하였다. 일본 도착 직후 일본과 중국의 개화파 인사들이 조직한 흥아회(興亞會)에 참석, 가입하여 그들과 교류하였고, 특히 주일본청국대사관의 참찬관으로 근무하던 황준헌(黃遵憲)으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아 귀국 후에 미국과의 수교를 주장하며, 《조선책략》에 나타난 황준헌의 연미거아책(聯美拒俄策)을 적극 옹호하였다.
강위는 중국에 두 차례, 일본에 세 차례나 다녀왔는데, 벼슬이 없었기에 언제나 비공식 수행원이라 친지들이 여비를 마련해 주었다.[16] 김옥균이 1882년에 일본으로 가게 되자, 강위도 따라나서며 제자 변수에게 여비를 부탁하였다. 변수는 스승과 함께 일본을 여행하게 된 것이 기뻐서, 아버지 변진환이 예전에 빌려 주었던 돈을 돌려받으러 대구까지 내려갔다. 대구 감영에 있던 채무자가 마침 한양으로 올라가 버리는 바람에 빚을 돌려받지 못하자, 다른 제자에게 융통해 부산까지 가서 김옥균 일행을 만났다.[16] 강위는 이때 기록한 속동유초(續東遊艸)에서 "변수는 내가 그의 집에 머물면서 5년 동안이나 글을 가르쳤던 제자"라고 밝혔다.[16]
2. 4. 일본 순방과 신문 발간
1883년(고종 20년) 김옥균, 유길준 등의 부탁으로 박문국 설치를 지원, 박영선과 함께 박문국 신설에 참여하고, 일본과 청나라 언론인들의 자문을 얻었으며, 일본인 이노우에 카쿠고로를 초청하여 신문 《한성순보》를 간행하였다.
박영효 사행시 동반한 이노우에 카쿠고로는 박문국에서 번역 및 인쇄 사무에 종사했으며, 이언을 번역한 것으로 알려진 강위가 그에게 한글을 가르치며 상해신문과 지지신보를 함께 번역했다.[22]
이노우에 카쿠고로는 후일 "강위를 한글 어학 스승으로 삼았다"고 회고했다. 후쿠자와 유키치로부터 '조선의 가나(가명)'를 사용하라는 권유도 있었고, 조선에 살며 외보를 번역해야 하는 상황에서 한글 연구가 필요했는데, 유대치와 그 외의 2~3인에게 상담한 끝에 이노우에 카쿠고로는 어학에 밝은 강위를 선생으로 모셨다 한다.[23]
한성순보 발행 당시 그는 언문을 함께 사용하는 국한문 혼용을 주장하여 성사시켰다. 김윤식, 강위, 이노우에 카쿠고로 등의 노력과 고종의 재가로 이후 한성주보는 항설(港設)과 조보(朝報)의 교환이 가능한 '언문'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22]
2. 4. 1. 조선책략 사건
1880년(고종 17년) 7월 문인이었던 김홍집이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될 때 강위는 수신사 서기(書記) 직함을 받고 김홍집을 수행하였으며, 그해 9월에 귀국하였다. 이때 김홍집은 청나라의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을 가져왔다. 조선책략은 조선이 러시아의 남진정책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의 외교정책을 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김홍집이 조선책략을 왕에게 바치자 왕이 이에 관심을 가졌고, 이에 재야의 유생들은 크게 반발하며 수신사 일행을 비판하였다.[18] 강위도 이때 개화파로 지목되어 유생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18]
2. 4. 2. 2차 일본 사행길 수행
1882년(고종 19년) 3월 김옥균, 서광범 등 젊은 개화파 관료들이 일본에 파견될 때, 강위는 선공감가감역관에 임명되어 신사유람단 서기의 직함을 받고, 제자인 변수와 함께 이들을 수행하여 일본을 다녀왔다.[19] 강위는 김옥균과 서광범의 일본 사행과 뒤이어질 서양 여행 계획을 접하고, 당시 60세가 넘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애원하다시피 각서를 쓰고 따라나섰다.[11] 김옥균은 "노옹(老翁)이 함께 가기를 빌었으나, 혹 어려움을 만나 후회할까 두려워서 허락치 않았다. 이에 시를 지어 맹세하면서 진심으로 토로했다."라고 회고했다.[20]
1882년 6월 강위는 도일한 김옥균, 서광범, 유길준 등과 함께 흥아회 활동에 참여했다.[21] 이들은 유럽과 아메리카 등을 방문, 견학하였으나, 그해 6월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선 정부의 소환 요청에 따라 모두 서둘러 귀국하였다. 그러나 강위는 나가사키에서 일행과 헤어져 혼자 청나라로 건너가 베이징, 상하이에서 청나라의 개항론자들과 교유하고 열차, 화포 등을 관람한 뒤 그해 9월 말 귀국하였다.
2. 4. 3. 한성순보 발간과 최후
1883년(고종 20년) 김옥균, 유길준 등의 부탁으로 박문국(博文局) 설치를 지원, 박영선(朴永善)과 함께 박문국의 신설에 참여하고, 일본과 청나라의 언론인들의 자문을 얻었으며, 일본인 이노우에 카쿠고로(井上角五郞)를 초청하여 신문 《한성순보 (漢城旬報)》를 간행하였다.
박영효의 사행시 동반한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박문국에서 번역 및 인쇄 사무에 종사했으며, 이언을 번역한 것으로 알려진 강위가 그에게 한글을 가르치며 상해신문과 지지신보를 함께 번역했다.[22]
한성순보를 편찬하며 신문을 보급한 이노우에 카쿠고로는 후일 "강위를 한글 어학 스승으로 삼았다"고 회고했다. 후쿠자와 유키치로부터 '조선의 가나(가명)'를 사용하라는 권유도 있었고, 조선에 살며 외보를 번역해야 하는 상황에서 한글 연구가 필요했는데, 유대치와 그 외의 2~3인에게 상담한 끝에 이노우에 카쿠고로는 어학에 밝은 강위를 선생으로 모셨다 한다.[23]
한성순보 발행 당시 그는 언문을 함께 사용하는 국한문 혼용을 주장하여 성사시켰다. 김윤식, 강위, 이노우에 가쿠고로 등의 노력과 고종의 재가로 이후 한성주보는 항설(港設)과 조보(朝報)의 교환이 가능한 '언문'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22]
1884년(고종 20년) 4월 5일 경기도 광주 세촌면의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일설에는 1894년까지도 살아 있었다는 설도 있다.
3. 사상과 신념
당시 사회 부패를 국가적 위기로 규정하고, 그 원인을 제도와 권력자 두 부류로 나누어 분석했다. 제도의 부정으로는 법의 폐단과 토지 겸병을 지적하며, 특히 토지 겸병을 허용하면 부의 편중과 국가 재정 손실을 초래한다고 보았다.
법의 폐단 중에서도 귀천을 나누는 것을 가장 큰 문제로 보았다. 양반에게도 공평하게 조세와 군역 의무를 부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왕족과 양반 자제에게도 군역을 지워야 한다고 주장했다.[5] 토지대장에 토지를 올리지 않는 양반 부호들의 폐단을 막기 위해 균전소(均田所)를 설치하여 토지 측량을 철저히 해야 한다고 했다.[5]
1883년 한성순보를 발행하면서 국한문 혼용체(한언혼합체)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글을 정음이라 부르며, 훈민정음과 한자를 함께 쓰면 읽기가 편하다고 주장했다.[30] 일본어를 한글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일본어와 조선 언어의 유사성을 지적하기도 했다.
3. 1. 사회적 구속에 대한 반발
그는 스스로 진정한 벗을 4명이라 하였는데, 그 중 3명이 역관이었다. 사실 벗이라 칭하였지만 이들은 강위보다 나이가 20~30년 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럼없이 벗이라 말하는 모습에서 그는 연령이나 신분에 구속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27]
그는 신분상으로는 양반이었지만 역관, 의관, 중인, 서자들과도 어울렸고 그의 지우들 중에는 승려 이동인도 있었다. 그의 신념은 한걸음 나아가 양반의 특권을 없애고, 귀천의 차별을 타파해야 한다는 사상으로 발전하였다.[27] 또, 자신보다 어리고 자신의 문인들의 동료였는데도 김옥균의 인품에 탄복하여 그를 부를 때는 김옥균 대인이라 칭하기도 했다.
그는 늙은 유생이나 높은 벼슬아치들을 꺼려하였고, 주로 젊은이들과의 만남을 좋아하였다.[27] 일부 예외가 있었다면 자신의 문인인 김홍집, 김윤식과 개화파 동지인 박규수 등 소수였다.
3. 2. 국가 위기론
그는 당대의 사회 부패를 국가적 위기로 규정했다. 조선의 軍政|군정중국어과 農政|농정중국어이 문드러져서 위아래가 모두 곤궁하다고 보았다. 백성은 아침저녁의 끼니를 이을 수가 없고, 나라에는 1년의 저축이 없어서 갑작스러운 흉년이나 전쟁이 일어난다면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28]
그는 이러한 위기의 원인을 근본적인 부정에 두고, 제도와 권력자 두 부류로 나누어 보았다. 제도의 부정은 법의 폐단과 토지 겸병 등을 예로 들었다.[28] 토지 겸병을 한없이 허락하면 부의 편중은 물론 국가 재정에도 막대한 손실을 끼친다고 지적했다.[28]
3. 3. 양반 특권 철폐론
그는 법의 폐단으로 보면 갈래가 여러 가지이지만 무엇보다 귀천(貴賤)을 나누는 것이라고 보았다. 양반들은 군역을 지지 않고 전세(田稅)에도 온갖 특권을 누리는데, 이들에게 모두 공평하게 조세를 매기고 군역 의무를 지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28] 그는 군정에 대해서는 왕조 초기처럼 왕족과 양반 자제에게도 군역을 지워야 한다고 주장했다.[5]
전정은 법에 규정된 대로 20년마다 토지측량을 철저히 하여 양반 부호들이 소유 토지를 토지대장에 올리지 않는 폐단을 엄격히 적발해 전세(田稅)를 부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5] 이를 위해 균전소(均田所)를 두어 이를 관리케 하고 부정을 저지르는 관리는 처벌해야 한다고 했다.[5] 또한 그는 특정 부호가 땅과 재물을 독점하는 것도 정부 차원에서 차단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3. 4. 국한문 혼용체
1883년(고종 20년) 신문 한성순보를 발행하면서 국한문 혼용체(한언혼합체)를 사용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그는 한글을 언문이라 부르지 않고 훈민정음의 약칭인 정음이라 불렀으며, 훈민정음과 한자를 병용하면 읽기가 편하다고 주장하였다.[30]
한성순보 발행 당시 그는 언문을 함께 병용하는 국한문 혼용을 주장하여 성사시켰다. 김윤식, 강위, 이노우에 카쿠고로 등의 노력과 고종의 재가로 차후의 한성주보는 항설(港設)과 조보(朝報)의 교환이 가능한 '언문'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22]
그는 신문 발간 시 "옛날 궁중에서 어떤 왕비가 한문에 정음(正音)을 섞어서 문서를 만든 일이 있으나, 그 외에는 실제로 행해진 일을 듣지 못했다. 그러나 실행이 된다면 편리할 것이다"라고 이노우에 카쿠고로 등을 설득시켰다.[24] 그는 한자가 아니면 읽지 않겠다는 사대부들을 설득, 중궁전과 "언문 서신"을 썼던 인목왕후, 인현왕후의 사례, 정조의 친필 서한 등을 언급하며 반박하였다.
또한 그는 일본어를 한글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중국어와는 다르게 단어와 단어 사이를 연결하는 조사, 접속사의 존재를 알아내 일본어와 조선 언어의 유사성을 지적하였다.
4. 평가
강위는 실학에서 개화파로 이어지는 과도기에 해당되는 인물로 평가된다. "이기와 강위 등은 실학사상과 근대변혁사상의 연결고리로 주목받기도 했다.[35]"는 것이다. 또한, "실학파가 사실상 해체된 후 박제가에서 김정희로 이어지는 북학사상을 근대 개화파에 연계해준 선각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1]"라는 평도 있다.
그러나 그는 근본적으로 체제의 변혁을 도모한 혁명가는 아니었다. 그가 난민이 요구하는 격문을 써주지 않은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10] 실천적인 지식인으로서는 한계를 보인다는 평도 있다.[10]
5. 저서
- 《의삼정구폐책 (擬三政捄弊策)》
- 《국문자모분해(國文字母分解)》 (1864)
- 《손무자주평 (孫武子注評)》
- 《경위합벽 (經緯合璧)》
- 《용학해 (庸學解)》
- 《북유일기 (北游日記)》
- 《북유담초 (北游談草)》
- 《북유속담초 (北游續談草)》
- 《충효경예주합벽 (忠孝經集註合璧)》
- 《동문자모분해 (東文子母分解)》
- 《의정국문자모문해 (擬定國文字母文解)》
- 《간독정요 (簡牘精要)》
5. 1. 시집
- 《고환당시초》
- 《청추각수초》
- 강위가 엮은 《한사객시선》
- 《육교연음집》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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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선비의 나라 한국유학 2천년
한길사
[2]
서적
역사인물 이야기
역사비평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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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불교 근대와의 만남
동국대학교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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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학교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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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姜瑋의 三政策
경향신문
1995-05-10
[6]
서적
조선의 르네상스인 중인
랜덤하우스코리아
[7]
서적
역사인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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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소설보다 더 재미난 조용헌의 소설
랜덤하우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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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천자문
포럼
[10]
서적
역사인물 이야기
역사비평사
[11]
서적
근대 네이션과 그 표상들
소명출판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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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회와 문화
서울대학교출판부
[1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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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출판부
[14]
서적
동아시아 불교 근대와의 만남
동국대학교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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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45) 세계일주 나선 역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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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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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계사상과 회계기준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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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네이션과 그 표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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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네이션과 그 표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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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미학산책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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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한국 근대소설의 형성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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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서적
근대 네이션과 그 표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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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대한제국아 망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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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대한제국아 망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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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아 망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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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으로 읽는 한국사
역사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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