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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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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건국동맹은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4년 8월 10일, 여운형을 중심으로 결성된 비밀 독립운동 단체이다. 일제의 패망을 예상하고 민족 해방과 자주독립 국가 건설을 목표로, 각 계층을 아우르는 조직을 구축하고, 해외 독립운동 단체와의 연계를 시도했다. 건국동맹은 3가지 강령과 '3불' 원칙을 채택하여 활동했으며, 농민동맹, 학병·징병 거부자 조직, 청년·학생 그룹 등 다양한 조직과 연계했다. 1945년 8월, 일제의 패망 직전 조선총독부로부터 치안 유지를 위임받아 조선건국준비위원회로 발전하며, 일제 말 국내에서 유일한 독립운동 단체로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2. 조직 배경

여운형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을 계기로 일제 패망을 확신했다. 그는 경성부, 도쿄에서 오가와 슈메이, 다나카, 고노에 후미마로 등 일본 정계, 군부 고관들과 접촉해 고급 정치, 군사 정보를 입수했다. 또 중국 옌안, 베이징, 만주에 있던 이영선(李永善), 최근우 등과 연락하며 국제정세와 제2차 세계대전 전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또한 1940년대 국내에는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를 비롯한 단파방송 청취가 여러 경로로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여운형도 이러한 정보에 접하고 있었다. 1942년 4월부터 8월까지 두 차례 일본 도쿄를 방문, 미군기의 최초 도쿄공습을 직접 목격하고 일본의 패망이 목전에 왔음을 확신했다. 이를 통해 일제 패망에 대비할 활동을 계획하는 한편, '일제의 패망=조선의 독립'이라는 논리에 근거해 건국준비작업을 세웠다.[1]

1942년 12월 도쿄에서 귀국하는 길에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치안유지법’,‘육해군형법’,‘조선임시보안령’ 위반혐의로 경성헌병대에 연행, 구속되었다. 여운형은 1943년 7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고, 이때 약 반년간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조선건국동맹에 대한 구상은 이 기간에 구체화되었다.[1] 이 구상은 1930년대 중반부터 지속된 조선중앙일보 사장 시절 관련자, 체육, 무술계 관련자, 진보적 청년, 학생층, 결혼식 주례 인맥 등 지인들의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다.[1]

1947년판 《조선연감》 기록에 의하면 1943년 8월 10일 여운형을 중심으로 ‘조선민족해방연맹’이 결성되었고, 1944년 8월에 조직, 정보연락, 대책연구 등 3부문의 횡적 조직하에 조선건국동맹으로 발전, 강화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

3. 초기 활동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을 계기로 여운형은 미군기의 도쿄 공습을 목격하고 일본 제국의 패망을 확신하여 건국 준비 작업을 시작했다. 1942년 12월 일본에서 귀국하던 중 체포되었으나, 1943년 7월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이 기간 동안 건국동맹에 대한 구상이 구체화되었다.[1]

1947년판 《조선연감》에 따르면, 1943년 8월 10일 여운형을 중심으로 ‘조선민족해방연맹’이 결성되었다.[2] 조선민족해방연맹은 동지 획득, 자기 완성, 조직 준비를 목표로 활동했다. 이후 1944년 8월 10일 경성부에서 여운형, 현우현, 조동호, 김진우, 황운, 이석구 등 온건 사회주의자와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했다.

건국동맹은 조직의 종적 연계를 방지하고, 친일파를 제외한 민족적 양심가를 포섭하여 공장, 회사, 학교 등에 세포 조직을 구축하고자 했다. 또한 일제 패망 가속화와 해방 후 주체 세력 조직을 목표로, 민족해방투쟁과 건국 준비 사업을 위한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고자 했다.

1943년~1944년 무렵 여운형은 조직 명칭으로 '조선해방연맹', '조선민족해방연맹', '인민전선', '인민위원회' 등을 구상하다가 건국동맹이라는 명칭을 확정하였다. 이는 1942년 옌안에서 조직된 화북조선독립동맹과 통일성을 의식하고,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의 '반파쇼인민전선', '반제민족통일전선' 강조 흐름과도 연관이 있었다. 최종적으로는 민족해방투쟁보다는 해방 후 '건국준비사업'에 더 중점을 둔 '조선건국동맹'이라는 명칭이 확정되었다.

4. 강령 및 원칙

건국동맹은 1944년 10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강령을 채택하였다.[1]


  • 각인, 각 파를 대동단결하여 거국일치로 일본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내고 조선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한다.
  • 추축국에 반대하는 여러 나라들과 협력하여 대일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방해하는 모든 반동세력을 박멸한다.
  • 건설 부문에서 모든 정책을 민주주의적 원칙에 의거하고, 특히 노동자, 농민 대중의 해방에 중점을 둔다.


이 강령의 첫째 항은 건국동맹이 반일 민족 역량을 모아 민족 해방 투쟁과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완수해야 한다는 민족통일전선체로서의 성격과 목적을 명확히 한 것이다. 또한 해외 독립운동단체들과의 연합을 포함한 거국일치를 의미하였다.[1]

둘째 항은 연합국과 반제 연합 전선을 형성해서 일제를 타도하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국제적 지원을 받는다는 내용이다. 또한 일본제국주의자뿐만 아니라 친일파, 민족반역자도 배제한다는 점이다.[1]

셋째 항은 국가 건설 문제를 다루었다. 이는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정책을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해 실시하고 그에 근거한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건국동맹이 구상한 '인민적 민주주의' 국가는 '무산계급혁명'을 통해 수립될 사회주의적 국가와는 일정한 차이가 있었다.[1]

건국동맹은 '3불(三不)'이라는 세 가지 원칙을 규약으로 채택하였다. 이는 건국동맹에 대해 '일체 말하지 않는다'(不言), '문서로 남기지 않는다'(不文),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不名)는 것이었다. 3불 원칙은 비합법단체로서 일제 탄압 하에서 조직을 보존, 보호하기 위한 강한 조직 규율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조직 성원이 준수해야 할 원칙이었다.[1]

5. 조직 구성

1944년 8월 여운형, 현우현, 황운, 이석구, 김진우, 조동호 등이 참여했고, 같은 해 10월에는 여운형의 추천으로 이기석, 최병철, 김세용, 박승환, 김문갑, 이상백, 허규, 이만규, 이여성, 이수목, 정재철 등이 가입했다. 1944년 10월경 작성된 중앙조직은 위원장 여운형, 내무부 조동호, 현우현(국내 동지 규합 및 조직 관리 활동), 외무부 이걸소, 이석구, 황운(국외 독립운동 단체와 연락 활동), 재무부 김진우, 이수목(자금 조달 및 관리 활동)이었다.[1]

직업별로는 화가(김진우), 군인(박승환), 한의사(현우현), 문필가(김세용, 이여성), 체육인(이상백) 등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했다. 이념적으로는 구한말 의병장 유인석을 따랐던 민족주의자(김진우)부터 모스크바공산대학을 나온 공산주의자까지 폭넓게 망라되었다. 건국동맹 중앙은 좌우 이념을 포괄하며 당면한 민족적 과제를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맹원 대부분은 1920~1930년대 항일투쟁 경험과 투옥 경험이 있었다.[1]

건국동맹 중앙은 여운형 개인의 영향력이 컸고, 조직원 확보도 그의 개인적 관계에 의존했다. 참가자들은 지사적 입장이 강한 중장년층이 중심이어서, 건국동맹 중앙은 우국지사들의 비밀결사 형태에 가까웠다. 또한 조직적 훈련이나 활동 경험이 부족했고, 이념적으로 통일되지도 않았다. 건국동맹은 탁월한 정치 노선, 조직 노선, 세련된 활동 전술을 구사하지 못하고, 개인적 연락에 치중하는 수공업적 조직화 방식을 택했다. 그러나 1940년대 국내 민족해방운동의 중요한 성과였다.[1]

건국동맹은 중앙조직뿐만 아니라 지방 조직망 구축에도 노력했다. 1943년 조선민족해방연맹 결성 이후 하부 조직 구축을 위해 연락 인물을 배치했고, 1년에 걸친 준비 작업 끝에 1944년 10월 각 도 대표 책임위원을 선임했다.[1]

책임 위원
충청남북도신표성, 김종우, 유웅경, 장준
경상남도명도석, 김명규
경상북도이상훈, 정운해, 김관제
강원도정건화, 정재철
전라남북도황태성
황해도여권현
평안남도김유창
평안북도이유필
함경남도이증림
함경북도최주봉



중앙의 이석구, 현우현, 황운, 이걸소, 김문갑 등은 각 지방을 왕래하며 연락을 담당했다. 중앙조직을 기반으로 지방조직을 만들기 위해 2~3명의 지방조직 책임자가 임명되었지만, 어려움이 있었다.[1]

지방조직은 사람만 지명된 경우도 있었고, '농민동맹', '농민협회' 등 다른 이름을 사용하거나 무형의 그룹으로 운영되기도 했다. 이는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조직 노출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이었다. 지방조직 책임자들은 대부분 일제강점기 민족해방투쟁에 참가한 경력이 있으며, 신간회, 조선노농총동맹 등에서 활동했다. 공산주의 운동 관련자들은 1920년대 1, 2차 조선공산당에 참가한 경우가 많았다. 광복 후 이들은 대부분 건국준비위원회, 인민위원회에서 활동했다.[1]

6. 참가 조직

건국동맹은 산하에 다양한 계급과 계층을 아우르는 조직들을 두거나 조직할 준비를 하였다. 농민동맹, 학병·징병·징용 거부자 조직, 청년·학생 조직, 군사 조직, 노동자, 부녀자, 사무원 조직 등이 있었다. 이들 중 농민동맹, 학병·징병 거부자 세력과 연계, 청년·학생 그룹은 실제로 조직되어 활동했고, 노농군 편성을 포함한 군사 조직은 계획 단계에 있었다. 노동자, 부녀자, 사무원 조직을 위한 시도는 있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6. 1. 농민동맹

1944년 10월 8일 경기도 용문산에서 여운형, 김용기 등 13인이 참여하여 농민동맹이 조직되었다.[1] 농민동맹은 조선 해방을 위한 투쟁을 목표로, 징용 및 징병 방해, 민심 선동, 징용 및 징병자 도피, 공출 반대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1]

농민동맹은 학병, 징용, 징병 대상 청년 수십 명을 용문산, 예봉산 일대에 피신시켰다.[1] 의사를 통해 부정 진단을 받게 하거나, 정신 이상을 가장하게 하여 징병, 징용을 면제받도록 지원했다.[1] 이러한 지원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로는 광복 이후 조선청년총동맹 중앙위원이 된 전사옥, 이혁기, 염윤구, 국군준비대 부사령이 된 박승환 등이 있다.[1]

또한, 공출을 반대하기 위해 논농사 대신 고구마, 감자 등 밭농사를 지어 식량으로 대체했다.[1] 마을 내 재경중학교 학생들을 통해 경성부 시내 소학교 직원과 전문 학생 30여 명을 규합하여 민족 의식을 고취하고 배일 사상을 불어넣는 선전, 선동 활동을 벌였다.[1]

농민동맹은 점차 활동 범위를 확대하여 여주, 양평, 이천, 광주, 양주, 홍천, 고양, 경성 등지로 확대되었다.[1] 농민동맹은 농민들이 주요 구성원이었지만, 단순한 농민 조직이라기보다는 지하 통일전선체로서 건국동맹의 근거지 역할을 수행했다.[1] 즉, 농민들의 반일 투쟁 단체일 뿐만 아니라 건국동맹의 조직, 선전, 군사 활동을 위한 조직 거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1]

6. 2. 학병·징병 거부자 세력과 연계

건국동맹은 학병, 징용, 징병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조직과 연계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보광당(普光黨), 조선민족해방협동단, 산악대(山岳隊) 등이 있다.

하준수(일명 남도부)는 학병을 피하기 위해 덕유산에 숨어 있다가 1945년 3월경 징용 거부자 73명을 모아 보광당을 조직했다. 보광당은 일제의 후방을 교란하고 무장 투쟁을 하는 것을 목표로 주재소를 습격하고 군사 훈련을 실시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하준수는 광복 이후 자신이 '건국동맹과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얘기하고 다녔으며, 강동정치학원 입교시 자신의 자서전, 이력서에 '건국동맹원'이었음을 밝혔다고 한다.

'성대(城大) 의학부 사건'으로 불리는 조선민족해방협동단 사건 역시 건국동맹과 관련된 학병, 징병 거부자 조직 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주도자는 광복 후 국군준비대의 특무부대장을 지낸 염윤구인데, 이기형과 함께 여운형의 지도를 받아 경기도 포천 일대에 근거지를 두고 학병, 징병 거부자들을 모아 군사 훈련과 무장 투쟁 준비를 하였다. 이 과정에서 징병되지 않은 경성제대 의학부 학생들이 상당수 관련되었고, 일제의 탄압으로 관련자 상당수가 체포되었다.

조직적 실체는 확인되지 않지만 광복 후 국군준비대 총사령을 지낸 이혁기가 주도한 산악대는 강원도 설악산, 속초를 중심으로 한 학병 거부자 조직이었다. 여기에도 여운형의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하였다고 한다. 이 외에도 비조직적인 형태였지만 건국동맹 혹은 여운형과 직, 간접적으로 연결된 학병, 징병, 징용 거부자는 상당수에 달했고, 이들은 광복 후 '학병거부자동맹', '학병동맹', '국군준비대', '청년총동맹' 등 청년 운동의 중추가 되었다.

6. 3. 청년·학생 그룹 가담

1944년 말~1945년 초 건국동맹에는 수많은 청년, 학생 그룹이 가담했다. 이들은 광복 후 대중적 청년운동 발전에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광복 후 초기 청년운동의 핵심 전위는 이호제, 조희영, 조용구, 김용국 등이었다. 이들은 일제 탄압이 심한 당시 조건에서 무형의 그룹 형태로 건국동맹에 관계했다. 학병, 징병, 징용을 거부하고 도피한 학병 거부자들 대다수는 광복 후 '건국동맹원'이었다고 자처했다. 광복 후 학병거부자동맹, 학병동맹의 주요 구성원은 왕익권(학병동맹위원장, 청총부위원장), 이춘영(학병동맹부위원장, 청총간부) 등이었다. 이들은 무형의 그룹을 형성, 조건만 허락하면 대중적 청년조직을 꾸려 조직 역량을 확대, 발전시킬 수 있는 핵심들이었다. 이들은 그룹으로 행동하면서 등산, 독서, 동지 조직 등의 활동을 하는 한편 지방의 연고를 통해 청년 그룹을 지속적으로 조직했다.

6. 4. 노농군 편성 계획

1945년 3월, 건국동맹은 후방 교란과 노농군 편성을 계획하고 조동호, 이석구, 이걸소 등이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군사위원회를 조직했다. 국내 무장 봉기와 철도 파괴 등을 통해 일본군의 후방 교란을 목표로 했다. 군사위원회는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등지에 책임자를 파견하고, 대구, 부산, 목포, 흥남, 청진, 평양, 진남포 등 각 지구에서 책임자를 물색했다.

건국동맹은 다음 세 가지 방향으로 군사 문제 대책을 세웠다.

  • 공산주의자들과 군사위원회를 설치해 노농군 편성을 계획하는 방안
  • 만주군관학교를 중심으로 한 만군 조직을 활용하는 방안
  • 옌안의 조선의용군, 충칭의 한국광복군과 연합 작전 시도 방안


국사편찬위원회이화여자대학교 교수였던 정병준은 건국동맹에서 논의된 노농군은 정규군 편제를 갖춘 군사조직이 아니라, 항일 폭동 과정에서 노농군을 편성해 일본 군대 및 관공서를 공격하려는 구상이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한편, 여운형은 무기 획득을 위해 경기도 주안 조병창의 채병덕 중좌와 접촉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6. 5. 기타 활동

건국동맹은 노동자, 부녀자, 사무원 조직을 위한 시도를 지속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청년 노동자 포섭 활동(전사옥, 최현국, 변재철, 이인규), 전국 철도 종업원 연락 조직체 준비 활동(조윤환, 여용구, 홍성철), 부녀 운동 준비(이각경, 이정구), 국민학교 교원 활동대인 지도별동대 조직(조흥환, 김기원, 기몽호)이 준비되었다.

7. 주요 활동

1944년 8월 10일 경성부 경운정 삼광한의원 현우현(玄又玄)의 집에서 여운형, 현우현, 조동호, 김진우, 황운, 이석구 등 온건 사회주의자들과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했다. (이 가운데 김진우는 구한말 의병장 유인석의 제자였다.)

건국동맹은 조직이 희생되어도 연쇄적 검거와 조직 붕괴를 막기 위해 종적 연계를 방지했으며,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제외한 민족적 양심가를 중심으로 공장, 회사, 학교, 대중단체에 세포조직을 두기로 결정하였다. 이들은 일제 패망을 가속화하고 해방 이후 주체세력을 조직적으로 준비, 편성하여 민족해방투쟁과 건국준비사업을 위한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고자 했다.

1943년~1944년 무렵 여운형은 '조선해방연맹', '조선민족해방연맹', '인민전선', '인민위원회' 등 여러 조직 명칭을 구상하다가 건국동맹이라는 명칭을 확정하였다. 조선민족해방연맹과 조선해방연맹은 민족해방이라는 과제에 중점을 둔 명칭으로, 1930년대 후반~40년대 초반 공산주의자들이 많이 사용하던 조직명과 1942년 옌안에서 조직된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일정한 통일성을 의식한 것이었다. 인민전선과 인민위원회는 각계각층을 망라한 통일전선적 형태를 띤다는 점에 강조점을 두었다. 인민전선은 1935년 코민테른 제7차대회에서 결성된 '반파쇼인민전선', '반제민족통일전선' 강조 흐름과 연관되었고, 인민위원회는 정권 형태 또는 국가 건설 방향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최종적으로 결정된 조선건국동맹이라는 명칭은 민족해방투쟁보다는 해방 후 '건국준비사업'에 더 큰 비중을 둔 것이었다.

7. 1. 해외 독립운동 단체 세력과의 연락

건국동맹은 조직 활동과 함께 해외 혁명 단체와의 연락 및 연대 관계 수립을 중시했다. 이를 위해 건국동맹은 조직 후 북만주(최근우. 당시 최근우는 만주협화회에서 활동했다.), 베이징(이영선, 이상백, 박승환, 엄태섭), 옌안(이영선, 이상백, 박승환) 등지에 연락원을 선임, 파견하였다.

가장 주된 대상은 화북조선독립동맹의 조선의용군과의 연락이었는데, 1942년에 결성된 옌안의 화북조선독립동맹은 국내의 운동 세력과 연계 노력을 계속했고 여러 차례 걸쳐 조선공산당 재건과 항일운동을 위해 여운형 측에 사람을 파견한 바 있었다. 여운형 역시 1940년대 초반부터 독립동맹 세력과 연결을 시도하고 있었다. 독립동맹과의 연결 계획에는 군대 편제 계획, 유격대의 국경 침투 계획, 조선의용군 사령관 무정(武亭)과의 연락, 만주 군대 지휘 계획 수립, 만주 군인의 입국 시를 대비한 은신처, 식사 공급 계획 등이 포함되었다. 건국동맹과 독립동맹의 연락 관계는 1944년 말부터 본격화되어 광복 직전에는 본격적인 연대 차원으로 발전할 전망을 보이고 있었다.

1944년 12월 조선의용군 사령관 무정의 연락원이 베이징에 도착해 이영선, 이상백과 회견한 후, 1945년 4월에는 옌안에 건국동맹 대표를 파견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김순자(박승환의 부인), 이영선을 통해 독립동맹 주최 '국치기념대회'에 국내 정세 보고서, 통계 등의 자료를 전달했고(1945년 6월), 8월에는 옌안의 전조선민족대회에 건국동맹 대표 김명시, 이영선 파견 등이 잇달았다. 독립동맹과의 연계는 단순히 항일투쟁뿐만 아니라 광복 후 건국동맹과 독립동맹이 동일한 노선 하에 민주주의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연대한다는 국가 건설 문제에까지 이어졌다.

건국동맹은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락을 맺기 위해 1945년 4월 최근우를 베이징으로 파견했으나 접촉하지 못했다. 김일성은 '항일 무장 투쟁 시기에 여운형과 접촉하기 위해 연락원을 파견했으나 만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8. 주요 간부들 검거와 재선출

1945년 7월 부민관 폭탄 의거와 함경남도에서 공산당 비밀조직 검거사건이 발생하였고, 그 여파로 8월 4일 조선총독부 경찰에 건국동맹의 존재가 드러나 이걸소, 황운, 이석구, 조동호 등이 검거되었다. 이에 여운형최근우, 김세용, 이여성, 이상백, 김기용, 이만규 등을 중앙위원으로 재선출했으나, 비밀 유지를 위해 개인 접촉 방식으로 운영하였다.

9. 일제 패망과 치안권 이양

1945년 8월 초, 소련군이 한반도로 진격하고 일본의 패전이 임박하면서, 조선총독부한국인들의 폭동과 무질서를 우려했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한국인 지도자를 내세워 과도기 치안 유지를 담당하게 하는 방안을 구상했다.[1]

8월 15일 아침, 조선총독부는 여운형에게 치안 유지 협조를 요청했고, 여운형은 5가지 조건을 제시하며 이를 수락했다. 엔도 류사쿠 정무총감은 여운형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전국의 정치범(독립운동지사)들이 석방되었다.

8월 16일, 여운형은 '치안유지대' 대신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하고, 자주적인 독립 국가 건설을 추진했다. 건국준비위원회는 짧은 기간 동안 집회, 결사 및 정치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행정권 접수와 통치권 행사를 추진했다. 지방에서는 사회주의, 민족주의 등 이념을 떠나 지역 유지와 지주들도 건준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반면, 경성부에서는 조선군사령부의 방해로 혼란이 야기되기도 했다.

10. 의의

건국동맹은 일제강점기 말기 국내에서 거의 유일한 독립운동 단체였다.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국외에서의 독립운동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일제가 패망할 경우 바로 입국 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한국인 대다수가 거주하는 국내의 상황이 더 중요했다. 이런 점에서 1940년대 거의 유일한 독립운동 단체였던 건국동맹은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고 평가했다.[2]

참조

[1] 문서 1.전국적으로 정치범, 경제범을 즉시 석방할것. 2.서울 3개월 분 식량을 확보할 것. 3.치안 유지와 건국 운동을 위한 정치 운동에 대하여 절대로 간섭하지 말것. 4.학생과 청년을 조직, 훈련하는 데 대하여 간섭하지 말 것. 5. 노동자와 농민을 건국 사업에 동원하는 데 대하여 절대로 간섭하지 말 것.
[2] 서적 지배자의 국가/민중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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