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극동인민대표회의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극동인민대표회의는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회의로, 코민테른의 동아시아 전략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다. 이 회의는 동아시아 지역의 공산주의 운동과 민족 해방 운동을 지원하고, 워싱턴 회의에 대항하기 위한 목적으로 열렸다. 한국, 중국, 일본, 몽골 등에서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 144명(또는 148명)이 참가했으며, 특히 한국 대표단이 가장 큰 규모를 차지했다. 회의에서는 일본 혁명의 중요성이 강조되었으며, 한국 독립을 지지하는 결의가 이루어졌다. 이 회의는 일본 공산당 창당의 계기가 되었으며, 일제강점기 조선의 독립운동에 소련과 코민테른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922년 - 워싱턴 회담
    워싱턴 회담은 제1차 세계 대전 후 미국 주도로 1921년부터 1922년까지 워싱턴 D.C.에서 개최된 9개국 국제 회의로, 해군 군비 제한, 태평양 지역 질서 재편, 중국 문제 등을 논의하여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 등 일련의 조약을 체결하고 만주사변 이전까지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규정하는 워싱턴 체제를 성립시켰다.
  • 아시아의 사회주의 - 동방노력자공산대학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은 1921년 코민테른이 설립한 모스크바 소재 교육기관으로, 식민지 출신 공산주의 운동가 양성을 목표로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과 실질적인 훈련을 제공했으나, 스탈린의 대숙청 시기에 폐쇄되고 졸업생들이 숙청당했으며 한국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극동인민대표회의
개요
명칭극동 인민 대표 회의
다른 명칭극동 제민족 대회 (極東諸民族大會)
태평양 노동자 대회
시기1922년 1월 21일 ~ 2월 2일
장소모스크바 및 페트로그라드
주최코민테른
목적
목표극동 지역의 민족 해방 운동 지원 및 공산주의 확산
반제국주의 투쟁 및 사회주의 건설 도모
주요 의제극동 지역의 정치, 경제 상황 분석
민족 해방 운동의 전략 및 전술 논의
코민테른과의 협력 강화 방안 모색
참가자
대표한국
중국
일본
몽골
부랴트
인도네시아
미국
기타 극동 지역 민족 대표
주요 인물김규면
여운형
김성도
조봉암
한명세
최창식
장지락
김약수
박헌영
김단야
이영준
고경흠
정송
주세죽
황애덕
김산 (본명 장지건)
린위난
센카타야마
사이토 다키오
결과 및 영향
결의문 채택극동 지역 민족 해방 운동 지원 및 코민테른과의 협력 강화
영향극동 지역 공산주의 운동 확산에 기여
민족 해방 운동의 방향 제시
코민테른의 영향력 강화
평가
긍정적 평가극동 지역 민족 해방 운동의 연대 강화
제국주의에 대한 공동 투쟁 의식 고취
부정적 평가코민테른의 통제 강화
민족주의 운동의 자율성 훼손 우려

2. 배경

극동인민대표대회는 1920년 '제2차 코민테른 국제대회'에서 채택된 '민족, 식민지 문제에 관한 테제'에 따라 극동의 피압박 민족 문제를 다룬 회의였다. 이 회의는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린 워싱턴 회의에 대응하여 개최되었다.[1] 코민테른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동아시아 각국 공산당 및 민족 혁명 단체 대표자들을 모스크바로 불렀다. 이 대회는 “약소민족은 단결하라”는 표어를 내걸고, 동아시아 지역의 공산주의 운동과 민족 해방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열렸으며, 처음에는 이르쿠츠크에서 개최될 예정이었지만, 대표자들의 도착이 늦어지면서 모스크바에서 개최되었다.[1]

회의에는 일본, 조선, 중국, 몽골을 중심으로 인도, 자바 등에서 총 148명이 참가했다.

2. 1. 코민테른의 동아시아 전략

코민테른1920년에 열렸던 '제2차 코민테른 국제대회'에서 '민족, 식민지 문제에 관한 테제'를 채택하여, 식민지 및 피압박 민족의 해방 운동을 지원하는 전략을 채택했다.[1] 1921년 12월부터 개최된 워싱턴 회의에 대항하여, 동아시아 각국의 혁명 운동과 연대를 강화하고 열강의 식민 지배를 약화시키기 위해 "동방 피압박 민족 대회"를 이르쿠츠크에서 개최할 것을 기획했다. 그러나 "피압박국"이라고 할 수 없는 일본에서도 많은 참가자가 있다는 것이 밝혀지자, 개최 직전에 "'''극동 공산주의적·혁명적 조직 제1차 대회'''"로 명칭을 변경하고, 회장을 모스크바로 변경했으며, 일정도 당초 예정보다 다소 늦게 개회되었다.

회의에서 지노비예프는 의장 보고에서 "일본의 혁명 없이는 극동에서의 어떤 혁명도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지방적인 사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여, 중국·조선에 비해 혁명당의 조직화가 늦었던 일본에서의 운동을 중시하는 인식을 보였다. 또한 중국·조선에서의 공산주의와 부르주아 세력과의 제휴의 필요성, "제국주의 국가 간의 거래"인 워싱턴 회의의 기만성 등이 논의·결의되었다. 회기 중, 일본 대표단은 부하린이 기안한 "일본에서의 공산주의자의 임무"를 채택했는데, 이는 일본 혁명의 성격을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으로 규정하는 내용이었다.

2. 2. 한국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 모색

1920년에 열렸던 '제2차 코민테른 국제대회'에서 채택한 (민족, 식민지 문제에 관한 테제)에 입각하여, 극동의 피압박 민족 문제를 다룬 회의로서,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린 워싱턴 회의에 대응하여 극동인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1]

파리 강화회담과 워싱턴 회의에서 서구 열강이 일본 식민 통치를 묵인하고 한국 독립 문제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자, 이에 실망한 많은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새로운 지원 세력을 찾고 있었다. 소련코민테른은 식민지 민족 해방 운동에 대해 적극적인 지원을 표명하였고, 이에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이들의 원조를 받기 위한 기대를 품고 이념을 떠나 회의에 상당수 참여하였다.[1]

이러한 배경 때문에 극동인민대표대회에서는 한국 문제에 대해 워싱턴 회의와는 다른 결론이 도출되었다. 극동인민대표대회는 워싱턴 회의에서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가 체결한 ‘4국 조약’을 일본 제국주의와 결탁한 ‘흡혈귀 동맹’으로 규탄하며,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첫째, 한국은 농업국으로 농민 가운데 민족주의에 동조하는 자를 움직여 민족 운동을 일으킬 것과 둘째,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지지하며 이를 개량하고 촉진시킬 것을 결의하였다.[1]

일제강점기 조선의 민족주의자들은 종래 미국을 통해 국제 사회에 호소하여 독립 회복을 목표로 하고 있었지만, 워싱턴 회의에서 미국 등 열강이 냉담한 태도를 보인 것에 비해, 이 회의에서는 한국 독립 문제가 호의적으로 다루어졌기 때문에, 이후 독립 운동에서 소련・코민테른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3. 참가자 및 대표단 구성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열린 극동인민대표회의에는 중국, 한국, 일본, 몽골, 인도네시아 등 9개국에서 144명의 대표가 참가했다. 한국 대표단은 23개 단체 52명으로, 전체 대표단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며 가장 큰 규모였다.

당시 소련코민테른은 식민지 민족 해방 운동에 대해 적극적인 지원을 표명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은 이들의 원조를 받아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특히 파리 강화회담과 워싱턴 회담에서 서구 열강이 일본의 식민 통치를 묵인하고 한국 독립 문제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공산주의와 관계없이 이 회의에 대거 참여하였다.[1]

의장단에는 김규식여운형이 선출되었다.

3. 1. 주요 참가자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열린 극동인민대표회의에는 중국, 한국, 일본, 몽골, 인도네시아 등 9개국에서 144명이 참가했다.

국가주요 참가자
한국김규식, 여운형, 이동휘, 박진순, 장건상, 박헌영, 임원근, 김단야, 나용균, 김시현, 김원경, 권애라
일본가타야마 센, 다구치 운조, 노나카 세이지, 니카이도 우메키치, 마니와 스에키치, 스즈키 모사부로, 와타나베 하루오, 다카세 키요시, 도쿠다 큐이치, 요시다 하지메 등
중국중국 공산당의 장타이레이, 펑수즈, 장궈타오, 류사오치, 취추바이와 중국 국민당의 장추바이 등


  • 한국 대표단은 23개 단체 대표 52명으로 구성되어 전체 대표단의 3분의 1을 넘는 큰 비중을 차지했다.
  • 이동휘는 폐회 무렵에 도착했다.[1]

3. 1. 1. 한국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인민대표대회는 1920년 '제2차 코민테른 국제대회'에서 채택된 (민족, 식민지 문제에 관한 테제)에 입각하여 극동의 피압박 민족 문제를 다룬 회의였다. 이 회의는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린 워싱턴 회담에 대응하는 성격을 가졌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동아시아 각국 공산당 및 민족 혁명 단체 대표자들을 모스크바로 초청하여 연석회의를 개최하였다.[1]

9개국에서 144명의 대표가 참가했으며, 한국대표단은 23개 단체 대표 52명으로 구성되어 전체 대표단의 3분의 1을 넘는 큰 비중을 차지했다. 김규식여운형이 의장단에 선출되었으며, 주요 참가 인물로는 이동휘, 박진순, 여운형, 장건상, 박헌영, 임원근, 김단야, 김규식, 나용균, 김시현, 김원경, 권애라 등이 있었다. 이동휘는 폐회 무렵에 도착했다.[1]

한국인 참석자가 많았던 이유는 소련코민테른이 식민지 민족 해방 운동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표명했기 때문이다.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이들의 원조를 받아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특히 파리 강화회담과 워싱턴 회의에서 서구 열강이 일본의 식민 통치를 묵인하고 한국 독립 문제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공산주의 이념과 관계없이 이 회의에 참여하였다. 그 결과, 극동인민대표대회에서는 워싱턴 회의와 달리 한국 문제에 대해 긍정적인 결론이 도출되었다. 즉,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가 체결한 '4국 조약'을 일본 제국주의와 결탁한 '흡혈귀 동맹'으로 규탄하고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였다. 구체적으로는 농업국인 한국의 농민 중 민족주의 동조자를 움직여 민족 운동을 일으키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지지하며 개량, 촉진시킬 것을 결의하였다.[1]

3. 1. 2. 일본

가타야마 센, 다구치 운조, 노나카 세이지, 니카이도 우메키치, 마니와 스에키치, 스즈키 모사부로, 와타나베 하루오 (이상 재미 일본인 사회주의자 단 소속)와 다카세 키요시, 도쿠다 큐이치, 요시다 하지메 등 16명이 일본에서 참가하였다.

3. 1. 3. 중국

중국에서는 중국 공산당의 장타이레이, 펑수즈, 장궈타오, 류사오치, 취추바이와 중국 국민당의 장추바이 등 총 37명이 참가했다.

4. 회의 진행 및 주요 의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동아시아 각국 공산당 및 민족 혁명 단체 대표자들을 모스크바로 불러 연석회의를 개최하였다.[1] 회의는 당초 이르쿠츠크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대표자들의 도착이 늦어지면서 장소가 모스크바로 변경되었다.[1]

회의에는 일본, 조선, 중국, 몽골 등(그 외 인도, 자바)에서 총 148명의 사회주의자(공산당원) 및 민족주의자가 참가했다. 일본에서는 가타야마 센 등 16명, 조선에서는 이동휘, 박진순, 여운형, 박헌영, 김규식 등 52명, 중국에서는 중국 공산당의 장타이레이, 펑수즈 등과 중국 국민당의 장추바이 등 37명이 참가했다.

일본 대표단은 회기 중 부하린이 기안한 "일본에서의 공산주의자의 임무"를 채택했는데, 이는 일본 혁명의 성격을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으로 규정하는 내용이었다.

4. 1. 주요 의제

1920년에 열렸던 제2차 코민테른 국제대회에서 채택된 '민족, 식민지 문제에 관한 테제'에 입각하여, 극동의 피압박 민족 문제를 다룬 회의였다. 이 회의는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린 워싱턴 회의에 대응하여 개최되었다.[1] “약소민족은 단결하라”는 표어를 내걸고, 동아시아 지역의 공산주의 운동과 민족 해방 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 회의에서 한국 문제에 대해서는 워싱턴 회의와는 다른 결론이 도출되었다. 워싱턴 회의에서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가 체결한 ‘4국 조약’을 일본 제국주의와 결탁한 ‘흡혈귀 동맹’으로 규탄하며,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였다. 구체적으로는 다음 두 가지를 결의하였다.[1]

  • 첫째, 한국은 농업국이므로 농민 가운데 민족주의에 동조하는 자를 움직여 민족 운동을 일으킬 것
  • 둘째,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지지하며 이를 개량하고 촉진시킬 것


회의에서는 지노비예프가 의장 보고에서 "일본의 혁명 없이는 극동에서의 어떤 혁명도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지방적인 사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여, 중국·조선에 비해 혁명당의 조직화가 늦었던 일본에서의 운동을 중시하는 인식을 보였다. 또한 중국·조선에서의 공산주의와 부르주아 세력과의 제휴의 필요성, "제국주의 국가 간의 거래"인 워싱턴 회의의 기만성 등이 논의·결의되었다.

5. 결의 내용 및 영향

1920년에 열렸던 '제2차 코민테른 국제대회'에서 채택한 (민족, 식민지 문제에 관한 테제)에 입각하여, 극동의 피압박 민족 문제를 다룬 회의였다. 이 회의는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린 워싱턴 회의에 대응하여 개최되었다.[1]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동아시아 각국 공산당 및 민족 혁명 단체 대표자들을 모스크바로 불러 연석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는 “약소민족은 단결하라”는 표어를 내걸고, 동아시아 지역의 공산주의 운동과 민족 해방 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1]

당시 소련코민테른이 식민지 민족 해방 운동에 대해 적극적 지원을 표명하였기 때문에, 한국 독립운동에 이들의 원조를 받기 위한 기대로 많은 한국인이 이 회의에 참석하였다. 특히 파리 강화회담과 워싱턴 회의에서 보인 서구 열강의 일본 식민 통치 묵인과 한국 독립 문제에 대한 무관심에 실망한 많은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공산주의에 동의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념을 떠나 이 회의에 참여하였다.

상하이로 돌아온 여운형 등은 극동인민대표대회 결의에 따라 민족통일전선 결성을 위해 1923년 1월 23일 국민대표회의를 열어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진로를 비롯한 독립운동 방안에 대해 논의하였으나, 임시 정부 개조 문제를 둘러싸고 창조파와 개조파 의견이 대립하여 결렬되었다.

5. 1. 한국 독립 지지

극동인민대표대회는 워싱턴 회의에서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가 체결한 ‘4국 조약’을 일본 제국주의와 결탁한 ‘흡혈귀 동맹’으로 규탄하며,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였다. 구체적으로 다음 두 가지를 결의하였다.[1]

첫째, 한국은 농업국이므로 농민 가운데 민족주의에 동조하는 자를 움직여 민족 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둘째,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지지하며 이를 개량하고 촉진시켜야 한다.

5. 2. 영향

일제강점기 조선 민족주의자들은 미국을 통해 국제 사회에 호소하여 독립을 회복하려 하였으나, 워싱턴 회의에서 미국 등 열강이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반면 극동인민대표회의에서는 한국의 독립 문제가 호의적으로 다루어졌기 때문에, 이후 한국 독립 운동에서 소련코민테른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1]

5. 2. 1. 일본 공산당 창당에 영향

일본 공산당(제1차 공산당)은 1922년 7월 15일에 창립되었는데, 일본 공산당의 공식적인 입장에서는 극동인민대표회의가 공산당 결성의 계기가 되었다고 여겨진다.[1] 실질적으로는 1921년 4월에 결성된 "코민테른 일본 지부 준비회"를 창립 시점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