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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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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회주의협회는 일본의 마르크스주의 연구 단체로, 1951년 사회주의연구회에서 발전하여 창립되었다. 창립 초기에는 사회당 정치인과 노동조합 간부 등이 참여했으나, 다카노 미노루와의 갈등, 사회당 통일, 미쓰이 미이케 쟁의 등을 거치며 사회주의협회 내 노선 대립과 분열을 겪었다. 1960년대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채택하고 실천적 단체로 변모했으며, 사회당 내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영향력을 행사했다. 1970년대 이후 중국과의 대립, 내부 노선 차이로 인한 분열을 겪으며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현재는 사토 협회, 사카우시 협회, 호소카와 협회 등 여러 단체로 분열되어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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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협회
개요
명칭사회주의협회
영문 명칭The Socialist Association
약칭사협 (社協)
설립
창립1947년 12월
해산1997년
주요 활동
활동 내용마르크스주의 연구 및 보급
사회주의 운동 이론 개발
관련 인물
주요 인물사키사카 이쓰로
오타 가오루
조직
주요 관련 조직사회당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 (총평)
이념 및 노선
지도 이념마르크스주의
주요 노선일본자본주의 분석
사회주의 운동 이론 정립
역사
주요 사건1947년 12월: 사회주의협회 창립
1997년: 사회주의협회 해산

2. 역사

사회주의협회는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마르크스주의의 일본 적용을 둘러싼 일본자본주의 논쟁 과정에서 형성된 노농파에 기원을 두고 있다. 패전 후 야마카와 히토시 등을 중심으로 재결집하여 활동을 재개했으나 내부 노선 갈등을 겪었고, 1951년 오우치 효에, 사키사카 이쓰로 등 지식인과 일본 사회당 및 총평 계열 노동운동가들이 참여하여 정식으로 창립되었다. 초기에는 사회당 좌파의 이론적 지주 역할을 했으며, 동구권의 민주화 운동 탄압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1955년 사회당 좌우파 통일 이후 당내 입지가 변화했으며, 1958년 야마카와 사후 대표가 된 사키사카의 지도 아래 1960년 미쓰이 미이케 쟁의에 깊숙이 관여하였다. 이 투쟁은 패배로 끝났지만, 협회가 일본사회주의청년동맹(사청동) 내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60년대에 들어 협회는 단순 이론 연구 단체를 넘어 실천적 활동을 강화하며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공식 이념으로 채택했고, 1968년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명시한 「사회주의협회 테제」를 발표하며 노선을 명확히 했다.

1967년, 활동 방식을 둘러싼 내부 이견으로 이론 중심의 사키사카파와 실천 중심의 오타파로 분열되었다. 이후 사키사카파는 사회당과 사청동 내 조직 활동에 집중하여 세력을 확장했고, 1970년대에는 사회당 내 최대 파벌로 성장했다. 이 시기 협회는 소련프라하의 봄 무력 진압을 지지하고 반합리화 투쟁 노선을 내세우며 국철 등 관공 노조에서 영향력을 키웠으나, 당내 다른 파벌과의 갈등으로 1977년 협회 규제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1980년대에 들어 서구식 사회민주주의로의 전환을 모색하는 내부 움직임이 나타나고, 1985년 사키사카 사망, 1986년 사회당의 노선 전환을 담은 「신선언」 채택 등으로 협회의 영향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1989년 혁명냉전 종식, 일본 사회당의 쇠퇴 및 총평 해산 등 국내외 환경 변화는 협회의 활동 위축과 조직 분산으로 이어졌다.

1996년 사회당이 사회민주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일부가 신사회당을 창당하는 등 당이 사실상 해체되는 과정에서 협회는 통일된 대응을 하지 못하고 회원들이 여러 정당으로 흩어졌다. 결국 1998년 협회는 사회민주당 및 구 민주당 계열 중심의 사토파와 신사회당 계열 중심의 사카우시파로 다시 분열되었다. 이후 2014년에는 사카우시파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고수하는 호소카와파가 분리되어 나오면서, 현재 사키사카 계열 사회주의협회는 사토 협회, 사카우시 협회, 호소카와 협회의 세 흐름으로 나뉘어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각기 다른 정당과의 관계 속에서 과학적 사회주의 또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기반으로 사회주의 정당 재건을 목표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2. 1. 창립

협회의 전신은 제2차 세계 대전 이전부터 마르크스주의의 일본 적용 방식과 자본주의 성격 규정을 놓고 강좌파(현재 일본 공산당 계열)와 일본자본주의 논쟁을 벌여온 노농파이다. 노농파라는 이름은 1927년 창간된 잡지 『노농』에서 유래했다. 태평양 전쟁 전야의 인민전선 사건 등 탄압으로 조직이 와해되었으나, 패전야마카와 히토시를 중심으로 다시 모여 1947년 이론지 『전진』을 창간했다. 그러나 『전진』은 출판사의 경영난과 동인 간의 노선 대립으로 1950년 11월 폐간되었다. 폐간 1년 전인 1949년 7월 13일, 『전진』의 동인들은 사회주의연구회를 발족시켰다.

1951년 4월 13일, 이 사회주의연구회를 발전시켜 사회주의협회가 창립되었다. 폐간된 『전진』을 대신할 기관지로 『사회주의』가 창간되었으며, 이름은 오우치 효에가 지었다. 창간 당시 발행 부수는 약 3,500부였다. 협회 초기에는 지식인으로 오우치 효에, 야마카와, 사키사카 이쓰로, 다카하시 마사오 등이 참여했으며, 일본 사회당의 정치가인 스즈키 모사부로, 에다 사부로총평 계열의 노조 간부들도 다수 참여했다. 『사회주의』의 동인 대표는 오우치와 야마카와가 맡았다.

그러나 『사회주의』 창간 과정에서 총평의 다카노 미노루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초기 편집 방침에는 다카노의 영향력이 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당 좌파 강령 초안 및 그것에 대한 시미즈 안의 취급, 협회의 일상 운영을 둘러싸고 야마카와 등과 다카노의 대립이 깊어졌고, 결국 1953년 12월 다카노와 시미즈 신조 등이 협회를 탈퇴했다.

이후 협회는 야마카와 등과 오타 가오루 등 총평 내 반(反)다카노 그룹이 손을 잡고 사회당 좌파의 이론적 지주로서 역할을 강화해 나갔다. 이러한 사회당의 좌파 우위 노선은 일본형 사회민주주의로 평가되기도 한다. 협회는 1950년대에 다양한 사상을 가진 인물들을 포용했으며, 소련동유럽 등 기존의 공산주의 국가들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특히 1953년 동독 봉기, 1956년 포즈난 시위, 1956년 헝가리 혁명 등 동구권 민중 봉기 당시에는 봉기한 민중에게 동정적인 입장을 보였고, 소련의 점령 정책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2. 2. 사회당 통일과 안보·미이케 투쟁

1955년 10월 사회당 좌파와 사회당 우파가 통일하여 통일 사회당이 출범했으나, 사회주의협회는 이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로 인해 당시 사회당 좌파의 주류였던 스즈키파와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스즈키파와 대립하던 와다파에 접근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사회당 내 발언권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협회의 야마카와는 통일에 반대하면서도 통일 후에는 당 집행부에 협력할 것을 호소하는 유연성을 보였으나, 1958년 사망했다.

야마카와 사후 협회 대표가 된 사키사카는 사회당이 좌파 강령의 정신을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와다파와 관계가 깊었던 총평의 실력자 오타, 이와이 아키라 등과 연대했다.

1960년, 사키사카가 양성한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미쓰이 미이케 쟁의가 벌어졌다. 사키사카는 직접 현지를 방문하여 활동가들을 격려했으며 협회 차원에서도 쟁의를 적극 지지했으나, 투쟁은 결국 패배로 끝났다. 하지만 미쓰이 미이케 쟁의를 주도했던 협회의 사상은 안보 투쟁과 미이케 투쟁 과정에서 사회당 청년부를 기반으로 결성된 일본사회주의청년동맹(사청동) 내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협회는 1961년 제3회 총회에서 실천적 과제에도 부응할 수 있는 조직으로 성장할 것을 선언하고, 당, 노조, 사청동의 활동가 영입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이 시기 전국적인 올그제가 도입되기도 했다. 이 무렵부터 다카하시 등 사키사카와 노선을 달리하는 일부 인사들이 협회를 떠나기 시작했다.

2. 3. 실천 단체 지향과 마르크스-레닌주의화

1960년경부터 사회당 내에서는 개혁을 통해 점진적으로 사회주의를 실현하자는 구조개혁론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이 흐름을 주도한 에다 사쓰키와 대립 관계에 있던 사사키 코조는 협회를 지원하며 세력 균형을 꾀했다.[1][2] 당시 사회당 지도부는 활동가들을 외면한 채 파벌 다툼에 집중하고 있었으나, 협회는 대표 사키사카가 직접 자택에서 『자본론』 강의를 여는 등 활동가 교육에 힘을 쏟았다. 또한, 과거 좌파 사회당 계열 학교였으며 양당 통합 후 독립 단체가 된 노동대학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이를 활동가 교육의 장으로 활용했으며, 활동가 대상 잡지 『배움』을 창간하여 조직의 내실을 다졌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협회는 활동가들의 신망을 얻을 수 있었다.[1][2]

1964년 사청동 제4회 대회에서 협회의 이론적 입장을 반영한 "개헌 저지·반합리화 기조" 안건이 통과되었고, 이를 계기로 협회 소속 활동가들이 사청동 집행부를 장악하면서 이후 세력 확장의 중요한 발판을 마련했다.[1][2]

이후 협회는 단순한 이론 연구 단체를 넘어 실제적인 정치 활동을 전개하는 실천 단체로 변모해갔다. 기존의 총회를 대회로 바꾸고, 독자적인 활동 방침을 결정하기 시작한 것이 그 예이다.[1][2] 1966년 열린 제7회 대회에서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협회의 공식적인 기초 이론으로 삼기로 결정했다. 다만, 당시 소련과의 관계를 중시하면서도 스탈린 체제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했다.[2] 이러한 노선 변화는 1961년과 1965년 두 차례에 걸쳐 소련을 방문했던 사키사카의 경험과, 협회의 실천적 역할을 강조했던 그룹(훗날 오타파의 중심 세력이 됨)의 영향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분석된다.[1][2]

협회의 핵심적인 이론은 1967년 임시 결정 후 1968년에 정식으로 채택된 「사회주의협회 테제」에 집약되어 있다. 이 문서는 평화 혁명을 기본적인 혁명 방식으로 제시하면서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필요성을 명확히 밝혔다.[1][2] 협회의 이러한 이론적 입장은 사회당의 강령 문서인 「일본에서의 사회주의로의 길」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1964년 강령 제정 과정과 1966년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긍정하는 내용으로 수정될 당시, 협회 계열 당원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1][2]

2. 4. 협회의 분열

1967년 6월 26일부터 27일까지 열린 제8회 정기 전국대회에서 사회주의협회는 규약 개정 문제를 둘러싸고 사키사카파와 오타파로 분열되었다.[4] 분열의 배경에는 활동 방식에 대한 견해 차이가 있었다. 사키사카파는 이론 학습을 중시한 반면, 오타파는 이론 학습에만 머무르지 않고 직장이나 지역에서의 실천 활동에 더 힘을 쏟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회 대의원 중 다수는 오타파였으나, 사키사카는 오우치와 함께 새로운 협회를 '재건'하고 별도의 기관지 『사회주의』를 창간했다.[5]

분열 초기에는 사키사카파가 소수였지만, 이들은 사회당의 조직 활동에 더욱 열성적으로 참여하며 세력을 넓혔고, 몇몇 국회의원을 배출하기도 했다. 반면 오타파는 1970년 말, 내부에서 일본 노동자계급 해방 투쟁 동맹(이후 '인민의 힘')이나 공산주의 연구회(이후 '청년 공산주의자 동맹(준)'을 거쳐 『국제주의』 편집 회의) 등이 분리되어 나가면서 세력이 약화되었다. 오타파에서도 국회의원이 나왔지만, 오타파 좌파 세력의 대규모 이탈로 인해 현장 활동가 기반에서는 사키사카파가 점차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이후 '사회주의협회'는 주로 사키사카파가 재건한 협회를 가리키는 명칭이 되었다.

한편, 협회파의 영향력이 강했던 일본사회주의청년동맹 (사청동) 역시 1960년대 후반에는 사키사카파, 오타파, 그리고 신좌익의 가입전술 그룹 등을 포함한 반전파로 나뉘어 분열된 상태였다. 1971년에 열린 사청동 제10회 대회에서 사키사카파 계열 활동가들이 집행부를 장악하고 반전파를 제명했다. 오타파 계열 동맹원들은 이 대회에 참여하지 않고 이후 별도의 조직인 '사청동 전국협'을 결성했다. 그러나 사회당은 사키사카파 계열 집행부의 사청동만을 유일한 당 지지 협력 청년 단체로 승인했다. 그 결과 사청동 내에서 사키사카파 협회의 영향력은 더욱 강화되었고 조직도 빠르게 성장했다.

2. 5. 사회당의 파벌로서

사키사카파 사회주의협회는 당과 사청동 활동가층의 지지를 배경으로 사회당 내에서 세력을 확장해 사실상 사회당의 한 파벌로서 기능하게 되었다.[4][5]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프라하의 봄이라 불리는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지만 바르샤바 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으로 강제 진압되자, 사키사카파는 무력 침공을 주도한 소련을 지지했다. 협회는 일본공산당을 포함한 모든 야당이 공투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공산당 배제를 주장하며 서유럽 사민주의 성향을 보이던 에다 사부로와 격렬하게 대립했다. 한편, 공산당과는 자치체 노동자의 주민에 대한 태도나 교사의 노동자성 등을 둘러싸고 논쟁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을 보이는 협회를 당시 언론에서는 사회당 극좌파로 불렀지만, 마르크스 경제학자이기도 했던 사키사카는 극좌는 사회주의가 아니라며 이를 비판했다.

협회가 1960년대~1970년대에 사회당에 대한 영향력을 높일 수 있었던 배경에는, 사회당이 독자적인 당 조직을 가지지 않았고 지방 조직의 주요 부분이 협회계 활동가에게 장악된 상황에서 선거 활동 등을 협회계 당원이나 사청동 동맹원에게 의존해야 했던 점이 있다. 또한 비협회계 활동가들이 힘을 상실하면서 당 대회 대의원의 40%가 협회계로 채워지는 상황에 이르렀다.

협회는 노동운동 이론으로서 반합리화 투쟁 노선을 취했는데,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합리화노동자의 불이익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모든 자본주의적 합리화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노무 관리가 엄격한 민간 기업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방해했지만, 일본국유철도의 생산성 향상 운동 저지에 큰 역할을 수행했고 재판소 역시 생산성 향상 운동에 종사하는 관리직의 부정 행위를 인정하면서 국철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한 관공 노조에 대한 협회의 영향력은 상당히 커졌다. 일본전신전화공사 노조(전전통)에서는 반합리화 투쟁에 소극적인 노조 집행부를 급성장한 협회계 활동가가 강하게 비판하여 통제 처분을 받았는데, 이 사건은 1977년 협회 규제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전까지 협회와 어느 정도 협력 관계를 구축했던 사사키파친중적인 성격이 강했지만, 중소 분쟁의 진전과 함께 협회가 자기 세력을 능가하게 되자, 소련·협회에 대항하여 더욱 중화인민공화국에 접근하고, 과거 대립하던 에다 등과 7인 위원회를 만들어 협회에 대항했다. 1977년 2월의 당 대회에서 협회계 대의원들이 부위원장인 에다나 전 위원장인 사사키 등 중국파나 사공민 노선을 비판하여 과반수에 육박하자, 당내 각 파벌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고 "사회주의 협회를 규제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당 치바현 본부처럼 협회계와 반협회계로 분열되는 지방 조직도 나타났다. 당 대회가 끝난 뒤 에다가 사망하고, 노사 협조 노선으로의 전환을 모색하던 총평도 협회 규제에 찬성하는 입장을 보였다. 결국 1978년의 제11회 대회(총회)에서 협회는 이론 연구 집단에 전념하고 정치 활동은 하지 않을 것을 인정하며, "사회주의 협회 테제"를 부분 개정하여 "사회주의 협회의 제언"으로 하고, 대회를 다시 총회로 개칭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협회 규제는 이루어지지 못했고 활동의 실태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이 당시 사키사카파 협회에는 공칭 1만 수천 명의 협회원이 있었고, 기관지 『사회주의』의 발행 부수는 6만 2,000부에 달했다고 한다.

2. 6. 협회 규제와 활동 정체

사회당 내 협회의 영향력이 커지자, 사사키파에다와 연대하여 협회에 대항했다. 1977년 2월 당대회에서 협회계는 에다와 사사키를 친중파로 비판하며 사공민 노선을 공격했고, 이에 협회 규제 목소리가 높아졌다. 지바현 본부처럼 내부 분열이 나타나기도 했다. 에다 사망 후, 노사 협조 노선 전환을 모색하던 총평도 협회 규제에 동조했다. 결국 1978년 제11회 대회에서 협회는 이론연구집단으로 돌아가 정치 활동을 중단하고 테제를 개정하기로 했으나, 실질적인 규제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당시 협회원은 1만 명 이상이었고, 기관지 『사회주의』 발행 부수는 6만 2,000부에 달했다.

협회 규제는 실패했지만, 1982년 11월 『사회주의』 편집장 후쿠다 유타카 등이 『현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상』을 출판하며 사키사카 문하 학자들이 서구식 사회민주주의로 입장을 바꾸기 시작하면서 내부 변화가 일어났다. 1987년 6월에는 당 중앙 본부 서기 그룹 다수가 협회에서 이탈해 '새로운 사회당을 만드는 모임'을 결성하는 등 협회의 영향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1985년 1월 사키사카가 사망하고 가와구치 다케히코가 새 대표가 되었다. 1986년 「일본사회당 신선언」 결정 과정에서 협회는 강하게 반발했지만, 내부에서도 신선언에 찬성하거나 묵인하는 흐름이 생겨 통일된 대응을 하지 못했다. 이후 사회당 내 온건 좌파 그룹은 협회와 관계를 유지하며 점차 서구식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를 넓혀갔으나, 기존 노선을 고수하려는 회원들과의 갈등도 존재했다. 노동 운동 노선을 둘러싼 내부 대립도 심화되었다.

1989년 혁명서구식 자유주의가 사회주의보다 우위에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으며, 사회주의 협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 사회당의 쇠퇴, 총평 해산 및 연합 발족 등 외부 환경 변화와 맞물려 1990년대부터 협회 조직의 분산이 가속화되었다.

한편, 오타파 협회는 국철분할민영화 당시 국철노조 우파가 분열하여 철산총련(후에 JR연합)을 결성하는 것을 지지했다. 그러나 오타 가오루는 이에 반대하여 1987년 5월 오타파 협회를 탈퇴하고, 같은 해 12월 사회주의노동운동연구회를 결성했다[6]. 오타 탈퇴 후, 오타파 협회는 1988년 4월 기관지 『사회주의』를 『진보와 개혁』으로 변경하고 조직명도 진보와 개혁 연구회로 바꾸었다. 이후 사회민주주의를 적극적으로 표방하며 사회당 및 사회민주당과의 관계를 이어갔다. 오타파가 사회주의협회 명칭을 포기하면서, 사키사카파가 유일한 사회주의협회로 남게 되었다.

2. 7. 사회당 해체와 협회의 두 번째 분열

1996년 1월 사회당사회민주당으로 당명을 변경했지만, 이에 반발하는 좌파의 일부는 신사회당을 창당했다. 같은 해 9월 민주당이 창당되자 사회당의 우파 의원들이 대거 합류하면서 사회당은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았다.

이러한 격변 속에서 사회주의협회는 통일된 방침을 정하지 못했고, 소속 협회원들은 사회민주당, 신사회당, 민주당 등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협회가 소멸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속에서 재건위원회가 구성되었으나, 내부 대립으로 인해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1998년 2월, 사토 다모쓰가 대표 자격으로 제31회 총회를 소집했으나 신사회당 계열의 협회원들은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이 총회에서 사토 측 협회(사토파)는 가와구치 다케히코, 사토 다모쓰, 고지마 쓰네히사를 공동 대표로 선출했다. 한편, 총회에 불참했던 신사회당 계열은 다음 달인 3월에 사카우시 데쓰로와 우에노 겐이치를 대표로 하는 별도의 사회주의협회(사카우시파)를 재건하였다.

이 1998년의 분열은 과거 사키사카파와 오타파의 분열과 달리 격렬한 상호 비판은 적었으며, 분야나 지역에 따라서는 공동 투쟁이나 상호 교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사토파에서는 가와구치가 1998년에 사망했고, 사토는 2012년, 고지마는 2014년에 각각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사카우시파에서는 사카우시와 우에노가 2016년에 함께 대표직을 사임했다.

분열 이후 사카우시파는 2001년에 '사회주의협회 신 테제'를, 사토파는 2002년에 '사회주의협회 제언의 보강'을 채택하여 각자의 노선을 정리했다. 두 협회 모두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용어 대신 과학적 사회주의를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과학적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 본질적인 차이가 크지 않으며, 여전히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을 유지하고 있어, 이념적으로 사회민주주의로 완전히 전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평가가 있다.

2. 8. 현재

2010년 참의원 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이 신사회당 부위원장(당시) 하라 가즈미를 비례대표 후보로 공천하면서, 하라의 규약 위반인 이중 당적(신사회당과 사회민주당 소속) 용인 문제가 불거졌고, 이는 사회민주주의로의 전환이라는 비판을 받았다.[7] 이 과정에서 전 신사회당 중앙집행위원이던 호소카와 다다시 등이 이끄는 그룹은 2012년 5월 과학적 사회주의 연구회를 창립하여 협회 재건을 결정했고, 2014년 12월 독자적인 사회주의협회를 "재건"했다.[7] 호소카와 협회는 규약에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명기하고 있다. 또한, 신사회당 전 중앙집행위원인 하라 노진 등도 사카우시 협회에서 이탈하여, 『사회 통신』을 기반으로 기본 소득 등의 정책을 둘러싸고 신사회당 중앙과 사카우시 협회를 비판했다.[8]

이러한 과정을 거쳐, 사키사카 계열 협회는 2023년 현재 크게 세 단체로 나뉘어 있으며, 모두 "사회주의 협회"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각 분파의 통칭은 분열 당시 대표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 타치마츠 키요시를 대표로 하고(2014년 함께 선출된 스기타 켄도는 2017년 사망), 『사회주의』를 발행하는 구 입헌민주당·사민당 계열 (일부 신사회당, 정당 무소속 포함)은 통칭 "사토 협회"로 불린다.
  • 이시카와 야스쿠니, 카와무라 요지, 이시카와 이치로를 대표로 하며[9], 『과학적 사회주의』를 발행하는 신사회당 주류파는 통칭 "사카우시 협회"(또는 재건 협회)로 불린다.
  • 호소카와 다다시를 대표로 하고, 격월간 기관지 『연구 자료』를 발행하는 신사회당 비주류파는 통칭 "호소카와 협회"로 불린다.


사토 협회는 2020년 입헌민주당 합류 문제로 사민당이 사실상 분열될 당시, 협회 내에서도 합류 찬반으로 의견이 나뉘어 분열 가능성이 제기되었으나, 조직 분열에는 이르지 않았다. 기관지 『사회주의』에는 입헌민주당과 사민당 양측의 입장을 반영하는 논문이 게재되고 있다. 입헌민주당에 합류한 사회주의 협회 회원들은, 같은 당에 합류한 구 사민당원들이 2021년 2월 28일 결성한 사회민주주의포럼의 핵심 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사회주의협회 자체는 21세기의 임무를 "우리는 협회의 목적(규약 제2조), 임무(규약 제6조)에 따른 연구·조사·토의를 적극적으로 진행하며, 자본주의의 발전에서 만들어지는 모순이, 반드시 노동자 운동의 전진을 만들어낸다는 법칙성에 확신을 갖고, 여기에 확실하게 결합하여 노동 운동의 계급적 강화를 기둥으로 광범위한 통일 전선을 담당하는 사회주의 정당의 재확립을 전망하여 전력을 다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3. 중국과의 대립

1975년까지 사회주의협회와 중화인민공화국 간에는 특별히 문제가 되는 점은 없었다. 1968년에 결정된 사회주의협회 테제에서는 문화대혁명에 대해서도 비교적 냉정한 관점에서 기술하고 있었다.[10]

그러나 1975년 5월 '일본사회당 제6차 방중단과 중일 우호 협회 대표단의 공동 성명' 발표 이후 관계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중국 측은 당시 중소 관계를 반영하여 소련미국을 동등하게 보는 '양 초강대국의 패권주의'라는 문구를 성명에 포함할 것을 강하게 요구했고, 당시 사회당 위원장 나리타 도모미는 이를 수용했다.[11]

이에 대해 사회주의협회는 강하게 반발하며 기관지 『사회주의』 등을 통해 당시 중국을 직접 비판했다. 중국 측도 『인민일보』 등 공식 매체를 통한 직접적인 반론은 삼갔지만, 방중단과의 담화 등에서 사회주의협회를 지목하며 비판했다. 이 공동 성명은 일본사회당 내 대립을 격화시켜 나리타·이시바시 마사시 체제가 무너지는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인 1977년에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 랴오청즈는 사회주의협회를 '중국을 적대시하는 세력'으로 규정하며 비판했다. 사회주의협회 측 역시 중국 정부와 중국의 지지를 받던 폴 포트 정권 등을 비판했다.

1982년 9월 중국공산당 제1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소련패권주의로 간주하던 세 개의 세계론이 철회되면서, 중국과 사회주의협회 간의 대립도 완화될 기미를 보였다. 1983년 일본사회당중국공산당과 공식적인 당 관계를 수립했을 때, 당시 총서기였던 후야오방일본사회당 위원장 이시바시 마사시에게 1975년 공동 성명 당시 중국 측의 태도에 대해 사과한 것으로 알려졌다.[12] 1985년 중일 청년 3,000명 교류 행사에는 사회주의협회의 영향력이 강했던 사청동(사회주의청년동맹)도 대표단을 파견했다.

이후 사회주의협회와 중국 간의 조직적인 교류는 특별히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중국사회과학원과의 학술 교류는 이어졌다. 이는 2001년 사회주의협회(사토 협회)가 당시 중국 사회과학원 마르크스-레닌주의-마오쩌둥 사상 연구소의 방일 대표단을 맞이한 것을 계기로 시작되어, 후신인 중국 사회과학원 마르크스주의 연구원과 정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한편, 분화된 사회주의협회 내에서는 중국에 대한 시각차가 존재한다. 사토 협회는 '사회주의 협회의 제언의 보강'에서 중국을 문제점이 있는 사회주의 국가로 규정하고 있다.[13] 반면, 사카우시 협회 계열의 『사회 통신』이나 호소카와 협회의 『연구 자료』에서는 중국 체제에 의문을 제기하는 논문이 실리기도 한다.[14][15][16]

4. 조직

사회주의 협회의 전신은 제2차 세계 대전 이전부터 강좌파(현재의 일본 공산당 계열)와 마르크스주의의 일본 적용 및 자본주의 성격을 둘러싼 논쟁(일본 자본주의 논쟁)을 벌인 노농파이다. 1927년 창간된 잡지 『노농』에 기반하여 이름 붙여졌다. 태평양 전쟁 직전 탄압(인민전선 사건)으로 흩어졌으나, 일본 패전야마카와 히토시를 중심으로 재결집하여 1947년 이론지 『전진』을 창간했다. 『전진』은 1950년 11월 내부 사정으로 폐간되었고, 그 이전인 1949년 7월 13일 『전진』 동인들이 사회주의 연구회를 발족시켰다.

1951년 4월 13일, 사회주의 연구회를 발전시키는 형태로 사회주의 협회가 창설되었다. 『전진』을 대신할 기관지로 『사회주의』가 창간되었으며, 명칭은 오오우치 효우에가 지었다. 초기 협회에는 오오우치 효우에, 야마카와, 사키사카 이쓰오, 다카하시 마사오 등 지식인과 스즈키 시게사부로, 에다 사부로 등 일본 사회당 정치인, 총평 간부들이 다수 참여했다. 초기 『사회주의』 편집 방침에는 총평의 다카노 미노루의 영향이 컸으나, 1953년 12월 다카노, 시미즈 신조 등은 협회를 탈퇴했다. 이후 협회는 야마카와 등과 오오타 가오루 등 총평 내 반 다카노 그룹이 결합하여 사회당 좌파의 이론적 지주로 발전해 나갔다. 1950년대 협회는 다양한 사상을 포용했으며, 소련·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1953년 동베를린 봉기와 1956년 포즈난 폭동·헝가리 사태 당시 소련의 정책을 비판했다.

1955년 사회당 재통일에 반대하면서 사회당 내 발언력이 약화되었으나, 1958년 야마카와 사망 후 대표가 된 사키사카는 사회당에 좌파 강령 정신으로 돌아갈 것을 호소하며 오타 가오루, 이와이 아키라 등 총평 실력자들과 연대했다. 1960년 미이케 투쟁을 계기로 협회의 사상은 일본 사회주의 청년 동맹(사청동) 내에서 영향력을 넓혔다. 협회는 1961년 실천 조직화를 선언하고 전국 올그제를 도입하여 당, 노조, 사청동 활동가 확보에 힘썼다. 이 과정에서 사키사카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은 점차 협회에서 멀어졌다.

1960년대 초반 구조개혁론이 대두하자, 이에 반대하는 사사키 코조는 협회를 지원하여 에다 사쓰키에게 대항했다. 협회는 사키사카 자택에서 『자본론』 강의를 여는 등 활동가 교육에 힘쓰며 지지를 얻었다. 노동대학과의 관계 강화, 활동가 잡지 『배움』 창간 등으로 조직을 다졌다. 1964년 사청동 제4회 대회에서 협회의 이론에 기초한 "개헌 저지·반합리화 기조"가 가결되어, 협회 계열 활동가가 사청동 집행부를 장악하며 세력 확장의 기초를 마련했다.

협회는 점차 실천 단체화되어 1966년의 제7회 대회에서는 마르크스-레닌주의(소련 추종 경향으로 스탈린에는 부정적)를 협회의 기본 이론으로 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이는 1961년과 1965년 두 차례 소련을 방문한 사키사카와, 실천 단체화를 목표로 한 그룹(후일 오타파의 중심) 모두의 영향으로 여겨진다. 평화 혁명론을 중심으로 하는 협회의 기본 이론은 1967년 분열 직전에 한 번 결정되었고, 1968년에 정식 결정된 「사회주의 협회 테제」에 상세히 서술되어 있으며, 이 안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명기했다. 사회당의 강령적 문서인 「일본에서의 사회주의로의 길」에 대해서도 1964년의 결정과 1966년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긍정하는 수정에 협회 계열 당원이 큰 역할을 했다.

1967년 6월 제8회 대회에서 규약 개정 문제를 놓고 '''사키사카파'''와 '''오타파'''로 분열되었다[4]. 이론 학습을 중시한 사키사카파와 달리 오타파는 현장 활동을 강조하는 등 운동 형태의 차이가 배경에 있었다. 대회 대의원 다수파는 오타파였기 때문에 사키사카는 오우치와 함께 새로운 협회를 '재건'하고 별도로 『사회주의』를 창간했다[5]. 분열 초기에는 사키사카파가 소수파였지만, 사회당 조직 활동에 더 열성적으로 참여하여 세력을 확장했고, 국회의원도 배출했다. 반면 오타파는 1970년 말 대규모 분열과 탈퇴(일본 노동자계급 해방 투쟁 동맹, 공산주의 연구회 등 결성)로 세력이 약화되었다. 현장 활동가층에서 사키사카파가 우위를 점하면서 이후 '사회주의협회'는 주로 사키사카파를 지칭하게 되었다. 사청동은 1971년 10회 대회에서 사키사카파 계열이 집행부를 독점하고 반전파를 제명했으며, 오타파 계열은 불참 후 별도 조직(사청동 전국협)을 만들었으나 사회당은 사키사카파 계열 사청동만을 지지 단체로 승인했다. 이로써 사청동은 사키사카파 협회의 영향력이 매우 강한 조직이 되었다.

사키사카파 사회주의협회는 당과 사청동 활동가의 지지를 바탕으로 사회당 내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사실상 파벌로 기능했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프라하의 봄이 일어나자 소련의 군사 개입을 지지했으며, 일본 공산당을 포함한 모든 야당 연대를 주장하며 서구 사민주의 지향의 에다 사부로 및 친중파와 격렬하게 대립했다. 당시 언론은 협회를 사회당 최좌파로 불렀으나, 마르크스 경제학자이기도 했던 사키사카 자신은 극좌를 사회주의가 아니라고 비판했다. 협회가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영향력을 높인 배경에는 사회당 자체의 독자적인 당 조직론 부재, 지방 조직의 주요 부분을 협회 계열 활동가가 장악한 상황, 선거 활동 등에서 협회 계열 당원이나 사청동 동맹원에 대한 의존 등이 있었다. 비협회계 활동가의 쇠퇴로 당 대회 대의원의 40%를 협회계가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협회는 노동 운동 이론으로 반합리화 투쟁 노선을 취했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합리화노동자에게 불이익이라는 관점에서 모든 자본주의적 합리화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노무 관리가 엄격한 민간 기업에서는 영향력 확대에 한계가 있었으나, 국철 내부에서는 생산성 향상 운동 저지에 협회가 큰 역할을 했고, 재판소도 관련 관리직의 부정 행위를 인정하면서 국철노조를 중심으로 한 관공 노조에서 사키사카파 협회가 세력을 확장했다. 전전공사(현재의 NTT) 노조인 전전통에서는 급성장한 협회 계열 활동가가 반합리화 투쟁에 소극적인 조합 집행부를 강력하게 비판하여 통제 처분을 받았다. 이 사건은 1977년 협회 규제의 복선 중 하나가 되었다.

그 전까지 협회와 일정 정도 협력 관계였던 사사키파는 친중 성향이 강했으나, 중소 분쟁의 진전과 협회 세력 확대에 따라 소련·협회에 대항하여 중국에 더 접근하고, 숙적인 에다 등과 7인위원회를 만들어 대항했다. 1977년 2월 당 대회에서 협회 계열 대의원들이 부위원장 에다, 전 위원장 사사키 등 중국파나 사공민 노선을 비판하며 과반수에 육박하자 당내 각 파벌의 경계심이 커졌고, "사회주의 협회를 규제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당 치바현 본부처럼 협회계·반협회계로 분열되는 지방 조직도 나타났다. 당 대회 후 에다가 탈당 직후 급사하고, 노사 협조 노선으로 전환을 모색하던 총평도 협회 규제에 찬성했다. 결국 1978년 제11회 대회(총회)에서 협회는 이론 연구 집단에 전념하고 정치 활동은 하지 않기로 했으며, "사회주의 협회 테제"를 부분 개정하여 "사회주의 협회의 제언"으로 하고, 대회를 다시 총회로 명칭 변경했다. 그러나 활동의 실태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이 당시 사키사카파 협회에는 공칭 1만 수천 명의 회원이 있었고, 『사회주의』 발행 부수는 6만 2천 부에 달했다고 한다.

협회의 쇠퇴는 외부 규제가 아닌 내부 변화에서 시작되었다. 1982년 11월 당시 『사회주의』 편집장이었던 후쿠다 유타카 등이 『현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상』을 출판하는 등, 사키사카 문하의 학자들이 서유럽사회민주주의로 점차 입장을 바꾸어 갔고, 당 중앙 본부 서기 그룹의 많은 이들도 1987년 6월 협회에서 분열하여 『새로운 사회당을 만드는 모임』을 결성하면서 협회의 힘은 점차 약화되었다. 1985년 1월 사키사카가 사망하자 가와구치 다케히코가 대표가 되었다. 1986년의 「일본사회당의 신선언」 결정에 즈음하여 협회는 강하게 저항했지만, 협회 내부에서도 「신선언」에 찬성하거나 묵인하는 부분이 나타나 의사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협회 안에서도 사회당과 관계가 깊은 부분은 점차 당내 온건 좌파로서 집행부를 지지하는 그룹이 되어 서유럽형 사회민주주의에도 일정한 이해를 보이게 되었지만, 1970년대의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회원도 있었다. 노동 운동에서도 노동 전선 통일을 둘러싸고 내부 대립이 깊어졌다. 1989년부터 1991년에 걸친 소련·동유럽 사회주의 체제 붕괴는 서유럽적 리버럴을 우위에 서게 했다. 게다가 사회당의 정권 참여나 기본 노선 전환 등 사회당 자체의 혼미, 총평 해산, 연합 발족의 영향도 협회에 파급되어 1990년대에 들어 조직의 분산이 진행되었다.

한편, 오타 협회는 국철 분할 민영화 당시 국철 노조 우파가 분열하여 철산총련(후에 JR연합)을 결성하는 것을 지지했다. 오타는 이에 반대하여 1987년 5월 1일자로 오타 협회를 탈퇴하고, 같은 해 12월에 사회주의 노동 운동 연구회를 결성했다[6]. 오타 탈퇴 후 오타 협회는 기관지 『사회주의』를 1988년 4월호부터 『진보와 개혁』으로, 조직명도 진보와 개혁 연구회로 변경했다. 그 후에는 사회민주주의를 적극적으로 표방하는 단체가 되어, 사회당 및 사회민주당 안에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오타 협회가 사회주의 협회의 이름을 버리면서, 이 시점에서는 사키사카파가 유일한 사회주의 협회가 되었다.

1996년 1월 사회당이 사회민주당으로 개칭했지만, 이에 반발한 좌파 일부가 신사회당을 결성했고, 같은 해 9월 민주당 결성 시 약 절반의 우파 의원이 참가하면서 사회당은 해체되었다. 이 과정에서 협회는 통일된 방침을 제시하지 못했고, 협회원은 사회민주당, 신사회당, 민주당으로 분산되어 소속하게 되었다. 이후 협회의 조직 위기는 심화되었고, 위기 극복을 위해 만들어진 재건위원회는 내부 대립으로 기능 마비되었다. 사토 타모츠가 대표 자격으로 소집한 1998년 2월의 제31회 총회에 신사회당 계열 협회원 다수가 참가하지 않았고, 같은 해 3월 사카우시 테츠로, 우에노 켄이치를 대표로 하는 다른 사회주의 협회를 "재건"했다. 사토 대표의 사회주의 협회는 제31회 총회에서 가와구치·사토 외 코지마 츠네히사를 대표로 선출했다. 이후 가와구치는 1998년에 사망했고, 사토는 2012년에, 코지마는 2014년에 각각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한편 사카우시 협회도 창립 당시 대표였던 사카우시·우에노는 2016년에 함께 은퇴했으며, 이후 대표가 된 이마무라 미노루도 2019년에 은퇴했다.

1998년의 분열은 과거의 사키사카·오타 파 분열과 달리 격렬한 비판 공세는 거의 없었으며, 분야·지역에 따라서는 공투·상호 교류도 이루어지고 있다. 사카우시 협회는 2001년에 "사회주의 협회 신 테제"를, 사토 협회는 2002년에 "사회주의 협회 제언의 보강"을 결정하여 사회당·총평 해체, 소련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 붕괴 등에 대한 일정한 총괄을 실시했다. 사토·사카우시 협회 모두 오늘날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용어로는 사용하지 않고, 과학적 사회주의를 사용하고 있다. 다만 과학적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의 다른 표현이며, "사회주의 협회의 제언"은 현재도 유효하며, 프롤레타리아 독재 주장은 포기되지 않았다. 실태는 그렇다 하더라도 사상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사회민주주의로 전향했다고는 할 수 없다(레닌주의만 포기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 후 사카우시 협회에서는 2010년 참의원 선거에서 신사회당 부위원장(당시)인 하라 카즈미를 사회민주당에서 비례구로 입후보시키는 것과, 하라의 규약 위반인 이중 당적 용인(신사회당과 사회민주당 당적)을 둘러싸고, 사회민주주의로의 전환이라는 비판이 일어났다. 전 신사회당 중앙 집행 위원이었던 호소카와 타다시 등의 그룹이 2012년 5월에 과학적 사회주의 연구회를 창립하여 협회 재건을 결정하고 분리되어, 2014년 12월에 독자적인 사회주의 협회를 "재건"했다[7]. 호소카와 협회는 규약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명기하고 있다. 게다가 신사회당 전 중앙 집행 위원인 하라 노진 등도 사카우시 협회에서 이탈하여, 하라 등은 『사회 통신』에 근거하여 기본 소득 등의 정책을 둘러싸고 신사회당 중앙, 사카우시 협회를 비판하고 있다[8].

이러한 경위로, 사키사카파 협회는 2023년 현재 3단체로 나뉘어 있으며, 모두 "사회주의 협회"를 칭하고 있다. 또한 아래의 통칭은 각각 분열 당시의 대표 이름에 기인한다.


  • 타치마츠 키요시를 대표로 하고 (2014년 함께 대표로 선출된 스기타 켄도는 2017년 1월 사망), 『사회주의』를 발행하는 구 입헌민주당·사민당 계(일부에 신사회당, 정당 무소속 포함) - 통칭 "사토 협회"
  • 이시카와 야스쿠니, 카와무라 요지, 이시카와 이치로를 대표로 하고[9], 『과학적 사회주의』를 발행하는 신사 주류파 - 통칭 "사카우시 협회(또는 재건 협회)"
  • 호소카와를 대표로 하고, 격월간 기관지 『연구 자료』를 발행하는 신사 비주류파 - 통칭 "호소카와 협회"


사토 협회는, 2020년 입헌민주당 합류 문제에 따른 사민당의 사실상의 분열에 즈음하여, 대응이 합류 찬성·반대로 나뉘어, 1996년 사회당 소멸 때와 마찬가지로 분열이 소문났지만, 사토 협회에서는 분열에 대한 기피감이 강하여 조직 분열에는 이르지 않았다. 『사회주의』에는 입헌민주당, 사민당 쌍방의 입장을 반영하는 논문이 게재되어 있다. 입헌민주당에 합류한 사회주의 협회 회원은, 동 당에 합류한 사민당원이 2021년 2월 28일에 결성한 사회민주주의 포럼의 중심적 멤버가 되고 있다.

사회주의 협회 자체는 21세기의 자기 임무를 "우리는 협회의 목적(규약 제2조), 임무(규약 제6조)에 따른 연구·조사·토의를 적극적으로 진행하며, 자본주의의 발전에서 만들어지는 모순이, 반드시 노동자 운동의 전진을 만들어낸다는 법칙성에 확신을 갖고, 여기에 확실하게 결합하여 노동 운동의 계급적 강화를 기둥으로 광범위한 통일 전선을 담당하는 사회주의 정당의 재확립을 전망하여 전력을 다한다."("재건 10년의 경과와 연구 활동")라고 규정하고 있다.

5. 평가 및 영향

사회주의협회는 사회당 좌파의 중요한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며 일본노동운동과 사회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1960년 무렵 사회당 내에서 구조개혁론이 부상하자, 이에 반대하던 사사키 코조는 에다 사쓰키에 맞서기 위해 협회에 힘을 실어주었다. 당시 사회당 지도부가 파벌 항쟁에 몰두하는 동안, 협회는 대표였던 사키사카의 자택을 개방하여 『자본론』을 강의하는 등 활동가 교육에 힘쓰며 지지 기반을 넓혔다. 협회는 노동대학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활동가 대상 잡지 『배움』을 창간하는 등 조직을 다져나갔다. 1964년에는 사청동 제4회 대회에서 협회의 이론에 기반한 수정안("개헌 저지·반합리화 기조")이 가결되면서, 협회 계열 활동가들이 사청동 집행부를 장악하는 등 세력을 확장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협회는 점차 이론 연구 단체를 넘어 실천 단체로 변화하며 운동 방침을 갖게 되었다. 1966년 제7회 대회에서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협회의 기본 이론으로 채택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1961년1965년 두 차례 소련을 방문했던 사키사카와 협회의 실천 단체화를 추진했던 그룹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평화 혁명론을 중심으로 한 협회의 기본 이론은 1968년에 정식 결정된 「사회주의 협회 테제」에 상세히 기술되었으며, 이 문서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명기되었다. 또한, 사회당의 강령적 문서인 「일본에서의 사회주의로의 길」이 1964년에 결정되고 1966년에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긍정하는 방향으로 수정되는 과정에서도 협회 계열 당원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키사카파 사회주의 협회는 당과 사청동 활동가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사회당 내에서 영향력을 키워 사실상의 당내 파벌로 자리 잡았다. 1968년 소련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사건이 발생했을 때, 사키사카파는 소련의 입장을 지지했다. 협회는 일본공산당을 포함한 모든 야당의 연대를 주장하며, 공산당 배제를 내세우는 서구 사회민주주의 지향의 에다 사부로나 친중파와 격렬하게 대립했다. 당시 언론은 이러한 협회를 사회당 내 최좌파로 지칭하기도 했으나, 정작 협회 자신은 극좌를 사회주의가 아니라고 비판했다.

협회가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사회당 내에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사회당 자체의 당 조직론 부재와 지방 조직의 상당 부분을 협회 계열 활동가가 장악하고 있었던 점이 작용했다. 선거 운동 등에서 협회 계열 당원과 사청동 동맹원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으며, 비협회 계열 활동가들의 쇠퇴와 맞물려 당 대회 대의원의 40%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노동 운동 측면에서 협회는 반합리화 투쟁 노선을 견지했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합리화가 필연적으로 노동자의 불이익으로 이어진다는 인식하에 모든 자본주의적 합리화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노선은 노무 관리가 엄격한 민간 기업에서는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 어려웠으나, 국철 내부에서는 생산성 향상 운동을 저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재판소 역시 생산성 향상 운동 과정에서 관리직의 부당 행위를 인정하면서 국철노조(국노)를 비롯한 관공서 노동조합(관공노)에서 협회의 세력이 커졌다. 한편, 전전공사(현재 NTT)의 노동조합인 전전통에서는 급성장한 협회 계열 활동가들이 반합리화 투쟁에 소극적인 조합 집행부를 강하게 비판하다 통제 처분을 받기도 했는데, 이는 1977년 협회 규제의 한 원인이 되었다.

협회의 세력 확대는 사회당 내 다른 파벌들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1977년 2월 당 대회에서 협회 계열 대의원들이 부위원장 에다나 전 위원장 사사키 등 중국파나 사공민 노선(사회당-공명당-민사당 연립 구상)을 비판하며 과반수에 육박하는 세를 보이자, "사회주의 협회를 규제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총평 역시 노사 협조 노선으로의 전환을 모색하며 협회 규제에 동조했다. 결국 1978년 제11회 대회(총회)에서 협회는 이론 연구 집단에 전념하고 정치 활동을 하지 않기로 했으며, "사회주의 협회 테제"를 "사회주의 협회의 제언"으로 개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규제에도 불구하고 협회 활동의 실질적인 내용은 크게 변하지 않았으며, 당시 협회원은 공칭 1만 수천 명, 기관지 『사회주의』 발행 부수는 6만 2천 부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협회의 실질적인 쇠퇴는 외부 규제보다는 내부 변화에서 비롯되었다. 1982년 이후 후쿠다 유타카 등 사키사카 문하의 학자들이 서유럽사회민주주의로 입장을 바꾸기 시작했고, 1987년에는 당 중앙 본부 서기 그룹 다수가 협회에서 분열하여 '새로운 사회당을 만드는 모임'을 결성하면서 협회의 힘은 약화되었다. 1985년 사키사카 사망 후 가와구치 다케히코가 대표가 되었으나, 1986년 사회당의 「일본사회당의 신선언」 결정 과정에서 협회는 강하게 반발했지만 내부 의견 통일에 실패했다. 이후 협회 내에서도 사회당과 관계가 깊은 그룹은 점차 당내 온건 좌파로서 집행부를 지지하며 서유럽형 사회민주주의에 유연한 태도를 보였지만, 기존 노선을 고수하려는 회원들과의 갈등은 지속되었다. 노동 전선 통일을 둘러싼 내부 대립도 심화되었으며, 1989년부터 1991년까지 이어진 소련·동유럽 사회주의 체제 붕괴는 협회의 입지를 더욱 좁혔다. 사회당의 정권 참여와 노선 전환, 총평 해산 및 연합 발족 등 외부 환경 변화도 협회에 영향을 미쳐 1990년대 들어 조직 분화가 가속화되었다.

한편, 오타파 협회는 국철 분할 민영화 당시 국철 우파의 분열과 철산총련(후의 JR연합) 결성을 지지했다. 오타 본인은 이에 반대하여 1987년 협회를 탈퇴하고 사회주의 노동 운동 연구회를 결성했다.[6] 오타가 떠난 후 오타 협회는 기관지명을 『진보와 개혁』으로 바꾸고 조직명도 진보와 개혁 연구회로 변경했으며, 이후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며 사회당 및 사회민주당 내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현재 사회주의협회는 여러 그룹으로 나뉘어 있다. 사키사카파 협회는 3개 단체로 분열되었고, 사토파 협회는 입헌민주당 입당 문제를 놓고 내부 대립을 겪었다. 2014년에는 호소카와 다다시 그룹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명기한 독자적인 사회주의협회를 재건했다. 입헌민주당에 합류한 일부 협회원들은 2021년 결성된 사회민주주의포럼의 핵심 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사회주의협회는 21세기의 임무로서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순이 노동운동의 전진을 필연적으로 만든다는 확신을 가지고, 노동운동의 계급적 강화를 기반으로 광범위한 통일 전선을 담당할 사회주의 정당의 재확립을 위해 전력을 다한다"고 밝히고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向坂逸郎(サキサカイツロウ)とは? 意味や使い方 https://kotobank.jp/[...] 2024-12-01
[2] 웹사이트 社会主義協会(しゃかいしゅぎきょうかい)とは? 意味や使い方 https://kotobank.jp/[...] 2024-12-01
[3] 웹사이트 太田薫(オオタ カオル)とは? 意味や使い方 https://kotobank.jp/[...] 2024-12-01
[4] 간행물 社会主義 사회주의협회 1967-09
[5] 논문 法政大学大原大原社会問題研究所雑誌2016年12月号「証言:戦後社会党・総評史 社会主義政党の確立をめざして― 上野建一氏に聞く」 http://oisr-org.ws.h[...]
[6] 웹사이트 日本労働年鑑 第58集 1988年版 http://oisr-org.ws.h[...]
[7] 논문 大原社会問題研究所雑誌716号(2018年6月)所収、細川正「証言:戦後社会党・総評史「もう一つの日本社会党史」 ――党中央本部書記局員としてマルクス・レーニン主義の. 党を追求 細川 正氏に聞く」 http://oisr-org.ws.h[...]
[8] 뉴스 『社会通信』NO.1308(2020年3月15日号)所収、原野人「社会主義協会の退廃と変質」 http://shakaitsuushi[...]
[9] 간행물 청년의 소리 2023-01-02
[10] 웹사이트 『社会主義協会の提言』第一章 日本における社会主義革命の条件と形態、第一節 世界情勢の基本的特徴 http://roudousyaundo[...]
[11] 웹사이트 「日本社会党第六次訪中団と中日友好協会代表団との共同声明」 http://roudousyaundo[...]
[12] 웹사이트 労働者運動資料室「日本社会党第六次訪中団と中日友好協会代表団との共同声明]」管理者解題 http://roudousyaundo[...]
[13] 웹사이트 『社会主義協会提言の補強』「第五章 20世紀の社会主義体制-ソ連・東欧社会主義崩壊の総括と現存社会主義国」 http://roudousyaundo[...]
[14] 뉴스 『社会通信』NO.1303(2020年1月1日号)所収、原野人「ソ連等崩壊から30年―民主的な社会主義を創る―」 http://shakaitsuushi[...]
[15] 뉴스 『社会通信』NO.1285(2019年4月1日号)所収、伊勢太郎「不均等発展は一つの法則 ―情勢の特徴について(二)―」 http://shakaitsuushi[...]
[16] 연구자료 '연구노트: 중국은 사회주의인가' 細川正 20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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