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황제 숭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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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의 황제 숭배는 로마 제국 시기에 황제를 신격화하여 숭배하는 현상으로, 공화정 시대에는 없었으나 헬레니즘 시대의 영향을 받아 시작되었다. 로마인들은 처음에는 개선 장군이나 영웅을 숭배하는 형태로 나타났으며, 이후 카이사르가 살아있는 동안 신격화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황제 숭배를 제도화하여 '게니우스' 숭배를 장려했고, 이후 황제들은 '디부스'로 신격화되거나 '누멘' 숭배를 받기도 했다. 황제 숭배는 제국의 동방과 서방 속주에서 다르게 나타났으며, 사두정치 시기에 이르러서는 황제의 권위를 강화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황제 숭배는 제물의 희생, 점복, 가문 숭배, 군대의 역할, 재단, 신전, 사제단 등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로마의 정치, 사회, 종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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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황제 숭배 | |
---|---|
개요 | |
유형 | 종교적-정치적 제도 |
목적 | 황제 숭배, 제국의 통합 및 정당성 강화 |
기원 | 로마 공화정 말기, 로마 제국 초기 |
절정기 | 로마 제국 (기원후 1세기 ~ 4세기) |
쇠퇴 | 기독교의 부상과 로마 제국의 쇠퇴 |
역사적 배경 | |
기원 | 헬레니즘 군주 숭배의 영향 |
로마 공화정 | 승리한 장군 숭배 (일시적) |
율리우스 카이사르 | 신격화 (Deificatio) |
아우구스투스 | 황제 숭배의 제도화 |
숭배의 형태 | |
신전 | 황제 숭배를 위한 신전 건립 |
제물 | 황제를 위한 제물 봉헌 |
맹세 | 황제의 이름으로 맹세 |
동상 | 황제의 동상 숭배 |
사제 | 황제 숭배를 위한 사제 임명 |
축제 | 황제를 기리는 축제 개최 |
정치적 기능 | |
제국의 통합 | 다양한 문화를 가진 제국민을 하나로 묶는 역할 |
황제의 권위 강화 | 황제를 신성한 존재로 인식시켜 권위에 복종하도록 유도 |
충성심 고취 |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고취하여 반란을 예방 |
정당성 확보 | 황제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수단 |
지역별 특징 | |
로마 | 황제 숭배의 중심지 |
속주 | 지역 특성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발전 |
동방 속주 | 헬레니즘 문화와 결합하여 독특한 형태로 발전 |
서방 속주 | 로마 문화의 영향으로 로마식 숭배 형태 유지 |
비판과 저항 | |
기독교인 | 유일신 사상에 어긋나 황제 숭배 거부 |
유대인 | 신성 모독으로 간주하여 황제 숭배 거부 |
철학자 | 황제 숭배의 허구성을 비판 |
영향 | |
로마 문화 | 로마 문화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매김 |
정치 사상 | 군주 숭배 사상에 영향 |
미술 | 황제의 업적을 기리는 미술 작품 제작 |
기타 | |
관련 용어 | 신격화 (Deificatio), 군주 숭배 |
2. 배경
아우구스투스가 제시한 정치 체제, 즉 아우구스투스의 합의안은 당시 사람들에게 혁명적인 변화라기보다는 과거 공화정 질서의 회복과 보존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선전되었다.[428] '동등한 자들 가운데 첫 번째 인물' Princeps inter paresla을 의미하는 프린켑스로서 살아있는 아우구스투스의 게니우스(수호령)에 대한 공식 숭배는, 그의 압도적인 권력과 스스로를 절제하는 능력, 그리고 공화정 전통에 대한 존중을 인정한 결과였다. 이후 '훌륭한' 황제들은 살아있는 동안 신으로서 공식적인 숭배를 받는 것을 거부하고, 대신 좀 더 겸손한 형태인 '게니우스' 숭배를 받아들였다. 반면, 후대의 일부 황제들이 로마에서 신적인 영예를 추구하고 얻어낸 것은 로마 원로원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테르툴리아누스 시대에도 "죽기 전에 신이라 불리는 것은 나쁜 징조"라는 인식이 남아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황제의 초상이 제국 곳곳에 널리 퍼져 있었던 점을 고려할 때, 살아있는 황제에 대한 개인적인 숭배는 로마에서도 공공연히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라델(Gradel)에 따르면, 어떤 로마인도 자신의 황제에게 제물을 바쳤다는 이유로 처벌받지는 않았다.[429][430]
2. 1. 로마
5세기 동안 로마 공화정은 신성하거나 반신적인 군주국에 둘러싸여 있었음에도, 역사적 인물이나 살아있는 사람에게 공식적인 숭배를 하지 않았다. 로마의 전설적인 왕들조차 숭배 대상이 아니었으며, 공화정은 도시 건설자 로물루스를 신 퀴리누스와 동일시하고, 영웅 조상 아이네아스를 유피테르 인디게스로 숭배하면서도 공화정의 자유를 지켜나갔다.[1][253] 로마인들은 인간이었던 신과 반신들을 숭배했고 모든 신이 인간에서 유래했다는 이론도 알고 있었지만, 공화정의 전통인 '모스 마이오룸'은 확고하게 보수적이고 반군주적이었다. 귀족 계층은 대부분의 정무직과 로마 원로원 의석을 차지하며 자신들보다 우월한 인간을 인정하지 않았다. 어떤 시민도 공식적으로 신성하게 여겨지지는 않았으나, 국가가 수여하는 영예[2][254](왕관, 화환, 조각상, 행렬 등)는 신들에게도 적합한 것으로 신성성이 가미되어 있었다. 훗날 황제에게 국가 숭배가 부여될 때도 이는 원로원의 칙령을 통해 이루어졌다.[3][255]공화정 시기 최고의 영예 중 하나는 개선식이었다. 장군이 병사들에게 '임페라토르'로 추대받으면, 원로원은 그에게 개선식을 허락할지 결정했다. 개선식에서 개선 장군은 포로와 전리품을 병사들과 함께 카피톨 언덕으로 행진했으며, 법에 따라 모든 참가자는 비무장 상태였다. 개선 장군은 고대 로마 왕에게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지는 신성한 상징이 새겨진 전차를 탔고, 유피테르 카피톨리누스에게 승리를 봉헌하며 마무리했다. 일부 학자들은 개선 장군이 개선식 당일 왕이나 신을 상징하거나 그 자체가 된다고 보기도 하지만, 개선식의 절차와 이후 의식들은 그의 지위를 제한하는 역할을 했다. 개선 장군의 개인적인 야망과 관계없이, 그의 승리와 개선식은 로마의 원로원, 민중, 신들을 위한 것이었고 이들의 동의 하에서만 인정되었다.[4][5][256][257]
공화정 전통은 사적인 영역에서 특정 인물에 대한 숭배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는 주로 가족 내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표하는 존경에서 비롯되었다. 모든 가주(pater familias)는 선조로부터 이어진 '게니우스'(수호령이자 생성 원리)를 지닌 존재로 여겨졌으며, 가족 구성원과 노예들은 그에게 숭배를 표하고 맹세했다.[6][258] 예속된 평민(클리엔테스)은 자신의 후원자를 '지상의 유피테르'라고 부르기도 했다.[7][259] 죽은 자들은 집단적으로나 개별적으로 지하 세계의 신들인 '마네스'로 여겨졌다. 그라쿠스 형제의 어머니인 코르넬리아 아프리카나는 자신이 죽으면 아들들이 자신을 부모의 신성성을 지닌 존재, 즉 '데우스 파렌스'(deus parens)로서 숭배해주기를 기대했는데, 이는 효심 깊은 아들에게 기대되는 당연한 도리였다.[8][260]
유력 가문들은 가문의 지도자에게 신적인 영향력과 준신적인 영예를 부여하기도 했다. 유명 로마인의 데스 마스크('이마기네스')를 제작하여 저택의 아트리움에 전시했고, 이는 가문의 장례식에서 고인의 영적인 존재감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코르넬리아의 아버지이자 한니발을 격파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데스 마스크는 유피테르 신전에 보관되었으며, 엔니우스가 쓴 그의 비문에는 스키피오가 천상으로 승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스키피오 사후 수 세기 동안, 그가 예지몽의 영향을 받았으며 유피테르의 아들이었다는 전승이 생겨나기도 했다.[9][261]
군사적, 정치적 인물을 구원자로 여기는 비공식적인 숭배 사례도 나타났다.
- 기원전 70년대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에서는 프로콘술 메텔루스 피우스가 평민파(populares) 소속 세르토리우스가 이끈 루시타니아 반란을 진압하려 하자, 충성파 로마인들이 그를 구원자로 환영하며 "마치 신에게 하듯이" 향을 피웠다. 재무관[10][262] 가이우스 우르비누스가 주관한 이 행사에서는 화려한 만찬이 열렸고, 개선 장군의 복장('토가 픽타')을 불법적으로 착용한 메텔루스에게 빅토리아 여신의 기계 장치 조각상이 월계관을 씌워주는 장면도 연출되었다. 메텔루스 자신은 이를 즐겼지만, 당시 원로들이나 보수적인 인사들은 이를 오만하고 용납할 수 없는 행태로 여겼다.[11][12][263][264]
- 개혁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가이우스 그라쿠스 형제가 정적들에게 살해된 후, 지지자들은 "마치 신들의 성소에 방문한 것처럼" 그들의 조각상에 엎드려 매일 공물을 바쳤다.[13][265] 그라쿠스 형제는 민중의 지지를 받은 개혁가로서, 사후에도 추앙받았다.
-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튜튼족을 격퇴하자, 평민들은 가정의 수호령(게니우스)과 함께 마리우스에게 음식과 음료를 바쳤다. 그는 로물루스, 카밀루스에 이어 로마의 세 번째 설립자로 불렸다.[14][266]
- 기원전 86년, 마리우스의 조카인 마르쿠스 마리우스 그라티디아누스가 법무관 시절 화폐 개혁으로 큰 인기를 얻자, 사람들은 교차로의 성소에 세워진 그의 조각상에 향을 피우고 포도주를 바쳤다.[15][267]
2. 2. 그리스
2. 3. 그리스인들 사이의 로마인
헬레니즘 시대 그리스 세계를 정복한 로마의 정무관들은 기존의 통치자 숭배 전통에 자연스럽게 편입되었다. 이는 외부 세력에 대한 충성을 표현하는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확립된 방식이었다.제2차 포에니 전쟁 말 시칠리아를 정복한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를 기리기 위해 올림피아 제전이 제우스에게 열리듯 경기가 개최되었다. 이 경기는 베레스 총독이 자신의 영예를 위해 폐지할 때까지 150년간 지속되었다. 티투스 큉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가 그리스 본토로 로마의 영향력을 확장했을 때, 그를 위한 신전들이 세워졌고 도시들은 그의 초상을 주화에 새겼다. 그는 델포이의 한 금석문에서 '신과 같다'(ἰσόθεος|isotheosgrc)라고 칭해졌으나, 이는 라틴어 기록이나 로마 본토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표현이었다.
그리스인들은 또한 여신 로마를 만들어 플라미니누스와 함께 숭배했으며 (이 둘의 공동 숭배는 기원전 195년에 확인된다), 여신 로마는 이후 로마 속주들에서 이상적인 로마니타스의 상징이자 지속적인 연결고리가 되었다. 이는 단지 몇 년간 권력을 행사했던 마르켈루스나 플라미니누스와는 대조적이다.
비티니아의 프루시아스 1세 국왕은 로마 원로원과 면담할 때 자신을 낮추며 원로원을 '구원자 신들'이라 칭했는데, 이는 그의 궁정에서 통용되던 예법이었을 수 있다. 리비우스는 폴리비오스의 이러한 기록에 충격을 받았으며, 해당 사건에 대한 로마 측 기록이 없고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20]
숭배와 신전 건립은 그리스인들이 로마 총독들에게 주기적으로 제안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에 대한 로마인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키케로는 아시아의 도시 관료들이 자신과 그의 형제 퀸투스에게 신전을 봉헌하겠다는 제안을 다른 로마인들의 질투를 피하기 위해 거절했다고 밝혔다. 또한 킬리키아 총독 시절에는 어떠한 조각상, 성소, 또는 전차도 받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반면 그의 전임자였던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킬리키아인들이 자신을 위해 신전을 짓는다는 소식에 매우 기뻐했으며, 임기 말까지 신전이 완공되지 않자 키케로에게 공사를 마무리하도록 편지를 보내고, 키케로가 충분히 적극적이지 않다며 불평하기도 했다.[21]
이처럼 로마인들과 그리스인들은 숭배 대상자를 반드시 완전한 신으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인간에게 신적인 경의를 표하는 방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훗날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공식적인 신격화가 이루어지는 토대가 되었다.
2. 4. 중간 형태
로마인들과 그리스인들은 숭배받는 대상이 반드시 완전한 신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에게 종교적인 존경과 숭배를 표하는 다양한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관행은 그리스 세계에서 시작된 신격화의 초기 형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며, 이후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공식화된 황제 숭배의 토대가 되는 중간적인 형태들로 나타났다.[274]
그리스인들은 일반적으로 죽은 사람이 신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특정 인물들에게는 특별한 의례를 통해 경의를 표했다. 이는 올림포스 12신에게 바치는 제사와는 구별되는 것이었다. 특히 도시의 창건자나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이들처럼 예외적인 인물들은 사후에 '영웅'으로 불리며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스의 영웅 숭배는 본질적으로 존경받는 가문이 고인이 된 가족 구성원을 기리는 장례 및 기념 행사의 성격을 띠었으며, 때로는 해당 인물이 속한 도시 전체가 이러한 숭배를 이어가기도 했다.[274] 영웅 숭배의 대상은 고대 전설 속 인물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역사적 인물도 포함되었다. 예를 들어, 아테네인들은 참주정으로부터 도시를 해방시킨 하르모디오스와 아리스토게이톤을 영웅으로 숭배했으며, 마라톤 전투에서 전사한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정치가가 영웅이 되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극작가이자 장군이었던 소포클레스는 아테네가 아스클레피오스 숭배를 받아들일 당시 그의 신상을 자신의 집에 임시로 안치했던 공로로 '덱시온'(Dexion, 영웅 자격의 수여자)이라는 영웅 칭호를 받았다. 또한, 암피폴리스를 건설한 아테네의 지도자 하그논은 도시 건립자로서 영예를 누렸으나, 13년 후 스파르타의 장군 브라시다스가 암피폴리스를 아테네로부터 해방시키고 전사하자, 암피폴리스 시민들은 브라시다스를 제2의 건립자로 선포하고 영웅으로 안치하며 하그논에 대한 기록은 가능한 한 지워버렸다(기록말살형).
살아있는 인물에 대한 숭배 역시 존재했다. 하그논의 경우처럼 도시 건립자들은 생전에도 존경을 받았다. 이러한 경향은 도시를 위기에서 구하거나 큰 공을 세운 인물들에게도 확장되었다. 시라쿠사에서는 시라쿠사의 디온이 참주를 몰아내자 시민들이 그에게 '영웅의 칭호'를 부여했으며, 이후 티몰레온에게도 같은 영예가 주어졌다. 이는 개인의 '선한 영혼' 또는 수호 정령인 '아가토다이몬'(ἀγαθοδαίμων|아가토다이몬grc)을 숭배하는 것으로 표현되기도 했다.[275] 모든 그리스인은 자신만의 아가토다이몬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졌으며, 축배를 들 때 자신의 아가토다이몬에게 술을 바치는 것이 관례였다. 구원자로 불린 티몰레온은 자택에 운명의 여신(Automatia)을 위한 성소를 지었고, 그의 생일은 그의 아가토다이몬을 기리는 축일로 기념되었다.[276]
어떤 인물들은 특정 신들의 후원을 받거나 신의 총애를 받는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알키비아데스는 에로스와 키벨레를 자신의 후원자로 내세웠을 가능성이 있으며,[277] 헤라클레이아의 참주 클레아르코스는 스스로 제우스의 아들이라 주장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디오니소스를 비롯한 여러 신과 영웅들의 후원을 받고 있다고 주장했으며,[278] 박트라에서 열린 연회에서는 자신의 '아가토스 다이몬'에 대한 경배와 디오니소스에 대한 헌주(獻酒)를 결합시키기도 했다. 이는 연회 참석자들이 제단이나 화덕 대신 알렉산드로스를 향해 건배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279]
이처럼 영웅적 영예, 아가토다이몬 숭배, 수호신 숭배, 도시의 운명(Tyche) 숭배, 그리고 인물 자체에 대한 숭배는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웠으며 종종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했다. 이집트에서는 알렉산드로스가 신이자 알렉산드리아의 건설자로서 숭배받았고,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는 프톨레마이스 헤르미오우의 건설자로서 별도의 숭배를 받았다. 이 숭배는 처음에는 그의 '다이몬'에 대한 것이었다가 영웅적 영예로 발전했고, 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의 통치 시기에는 알렉산드로스를 모시던 사제들이 프톨레마이오스 1세와 그의 아내 이집트의 베레니케 1세를 '구원자 신'(θεοὶ σωτῆρες|테오이 소테레스grc)으로 함께 숭배하게 되었다.[280] 페르가몬의 아탈로스 왕조는 초기에는 자신들을 신으로 칭하지 않고 선조인 디오니소스 카테게몬(Διόνυσος Καθηγεμών|디오뉘소스 카테게몬grc) 숭배를 후원하며 초대 국왕 필레타이로스의 초상을 주화에 새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셀레우코스 왕조처럼 자신들을 위한 사제들을 두었고 주화에 자신들의 초상을 새겼으나, 여전히 죽기 전까지는 신으로 불리지 않았다. 로마와 긴밀한 동맹 관계였던 페르가몬의 이러한 점진적인 신격화 방식은 이후 로마의 황제 숭배 관습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281]
로마 공화국 시기에도 비록 공식적인 인물 숭배는 없었지만, 유사한 '중간 형태'의 관행들이 존재했다. 사적인 영역에서는 가장의 아버지(pater familias)가 조상의 수호 정령인 '게니우스'(genius)를 구현한다고 여겨져 가족 구성원과 노예들로부터 숭배를 받았고,[6] 죽은 조상들은 집단적으로 '마네스'(Manes)라 불리며 지하 세계의 신으로 여겨졌다. 그라쿠스 형제의 어머니 코르넬리아 아프리카나는 아들들이 자신이 죽은 뒤 자신을 부모 신(deus parens)으로 숭배하기를 기대했다.[8] 유명 가문은 조상의 신성한 기원이나 특별한 업적을 강조하기도 했다. 한니발을 물리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사망 마스크(imago)는 유피테르 신전에 보관되었고, 그의 묘비명에는 그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기록되었다. 후대에는 그가 유피테르의 아들이라는 전승까지 생겨났다.[9]
또한 공화정 말기로 갈수록 특정 인물을 구세주처럼 여기는 비공식적인 숭배 사례가 나타났다. 히스파니아 울테리어에서는 메텔루스 피우스가 세르토리우스의 반란을 진압하려 할 때 지역 로마인들이 그에게 "신에게 하듯이" 향을 피우며 환영했다.[11][12] 개혁가였던 그라쿠스 형제가 살해된 후, 지지자들은 매일 그들의 조각상에 제물을 바쳤다.[13]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테우토네스족을 물리치자 시민들은 가정의 수호신들과 함께 그에게 음식과 음료를 바쳤으며,[14] 그의 조카 마르쿠스 마리우스 그라티디아누스가 화폐 개혁으로 인기를 얻자 사람들은 교차로의 신사(콤피탈리아)에 세워진 그의 조각상에 향과 포도주를 바쳤다.[15] 이러한 그리스와 로마의 다양한 인간 숭배 관행들은 절대적인 신으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뛰어난 인물에게 신성성을 부여하는 유연한 방식을 보여주며, 이는 로마 제정 시대 황제 숭배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3. 공화정의 종말
로마 공화국 말기 수십 년 동안 로마의 정치 지도자들은 헌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막대한 권력을 손에 쥐는 일이 잦아졌다. 본래 로마의 전통적인 정치 규범인 모스 마이오룸은 최고위직인 집정관직을 여러 명이 공동으로, 그리고 짧은 임기 동안만 맡도록 규정하고 있었다.[30] 하지만 이 시기의 새로운 권력자들은 스스로 권력을 장악했으며, 수년에 걸쳐 그 권력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종종 특별한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개선식은 점점 더 화려해졌으며, 로마 최초의 내전에서 서로 맞섰던 마리우스와 술라는 각자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를 건설하기도 했다. 술라는 자신의 이름을 딴 연례행사를 로마에서 열도록 했으며, 마리우스의 경우 테우토네스족을 물리친 후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그를 가정의 수호신처럼 여기며 제물을 바치는 등 비공식적인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14]
다음 세대의 폼페이우스 역시 이러한 경향을 이어갔다. 그는 키르쿠스 막시무스 경기장에 갈 때마다 개선식 때 입는 화려한 장식의 복장을 착용하는 것이 허용되었다.[31] 이들 강력한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신들과 특별한 관계에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술라는 베누스 여신의 가호를 받는다고 내세우며 자신의 이름에 '펠릭스'(Felix, 행운아)를 덧붙였고, 마리우스는 자신에게 특별한 운명이 주어졌다고 믿었다. 폼페이우스 또한 베누스 여신의 총애를 받는다고 주장하며 그녀를 위한 신전을 건설했다. 하지만 이러한 흐름 속에서 군주제를 지향하며 스스로 신격화의 길을 걸었던 최초의 로마인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였다.
3. 1. 디부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자신의 혈통과 관직을 통해 신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그는 아이네아스와 그의 어머니 베누스 여신의 후손을 자처하는 율리우스 씨족 출신이었다. 또한 숙모 율리아의 장례 연설에서는 자신이 로마 왕들의 후손이자 마르스 신의 후손임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32] 젊은 시절 마리우스에 의해 유피테르 신의 특별 사제인 플라멘 디알리스로 임명되었으나 술라에 의해 취소된 경험도 있었다. 이후 비교적 이른 나이에 로마의 최고 사제직인 폰티펙스 막시무스가 되어 고대 왕들의 종교적 의무 대부분을 수행하게 되었다.[33] 또한 젊은 시절을 헬레니즘 시대 동방 군주국들 사이에서 보냈고, 비티니아와도 관계가 있었다.[34] 이러한 배경은 그가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활용되었지만, 처음부터 경쟁자들보다 특별히 더 내세운 것은 아니었다.기원전 45년, 카이사르의 내전에서 경쟁자들을 모두 물리치고 로마의 최고 권력자가 되자, 카이사르는 이전보다 훨씬 노골적으로 자신의 특별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내전 기간부터 그는 동방 지역에서 자신을 신이자 구원자로 칭했으며, 스스로를 여신으로 여겼던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와도 가까운 관계를 맺었다. 그는 파르살루스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념하여 베누스 여신에게 신전을 바치겠다고 약속했고, 기원전 46년에는 베누스를 로마 민족의 어머니이자 자신의 조상으로 모시는 베누스 게네트릭스 신전을 건설했다. 새롭게 구성된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반신(半神)으로 칭하는 비문과 함께 그의 조각상을 세우려 했으나, 카이사르 본인이 이를 원치 않아 제거하게 했다.[36] 그는 폼페이우스가 그랬던 것처럼 개선식 복장을 착용할 권리를 얻었고, 대머리를 가린다는 명분으로 월계관을 항상 쓰고 다녔다. 개선 장군에게만 허용되던 붉은 신발과 자주색 토가인 toga picta|토가 픽타la를 평상시에도 입었을 가능성이 있다. 문다 전투에서의 최종 승리 소식이 전해지자, 로마 건국 기념 축제인 파릴리아가 카이사르에게 헌정되었으며, 마치 그가 로마의 새로운 창건자인 것처럼 여겨졌다. "카이사르의 자유"를 상징하는 조각상과 함께 "무적의 신" 카이사르를 위한 조각상도 세워졌다.[37] 그는 공공 비용으로 신전처럼 꾸며진 저택을 받았고, 그의 형상은 신들의 형상과 함께 가두 행진에 등장했으며,[38] 살아있는 인물로는 최초로 그의 초상이 로마 주화에 새겨졌다.

기원전 44년 초에는 Parens Patriae|파렌스 파트리아에la(조국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았고,[39] 사람들은 그의 게니우스에 맹세했으며, 그의 생일은 공휴일이 되었고, 퀸틸리스(Quintilis) 달은 그의 이름을 따 율리우스(Iulius, 7월)로 바뀌었다. 마침내 그를 위한 특별 사제직인 플라멘이 신설되었고, 첫 플라멘으로는 그의 충실한 부관이자 당시 집정관이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임명되었다. 플라멘의 봉사를 받는다는 것은 카이사르가 퀴리누스, 유피테르, 마르스와 같은 로마의 주요 신들과 동등한 반열에 올랐음을 의미했다. 키케로는 당시 카이사르가 로마에서 누렸던 영예들이 이미 완전한 신(deusla)의 수준에 도달했다고 비판적으로 기록했다.[40]
살아있는 신으로서 카이사르의 이름은 Divus Iulius|디부스 율리우스la 또는 Iuppiter Iulius|유피테르 율리우스la로 불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아직 원로원의 공식적인 승인을 받지는 않은 상태였다. 당시 '디부스'는 deus|데우스la(신)의 고풍스러운 형태로, 신성함과 하늘과의 연관성을 나타내는 표현이었다. 그의 조각상은 로마의 고대 왕들 조각상 옆에 세워졌다. 카이사르는 파르티아 원정에서 돌아온 후, 헬레니즘 군주들처럼 스스로 왕위에 오르려 했던 것으로 보이나, 기원전 44년 3월 15일 원로원 회의장에서 암살당하며 계획은 무산되었다.[41][42][43][44]

카이사르의 암살 이후, 분노한 로마 시민들은 포로 로마노에 모여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추도 연설을 들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신성함을 강조하며 암살자들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다. 이후 '디부스 율리우스'에 대한 자발적인 민간 숭배가 확산되었다. 처음에는 이를 억누르려던 원로원도 결국 카이사르파의 압력에 밀려 그를 로마의 공식적인 '디부스'로 인정했다. 때마침 나타난 카이사르 혜성은 카이사르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간 증거로 여겨져 sidus Iulium|율리우스의 별la이라 불렸다. 기원전 42년,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의 지지 속에 카이사르의 양자이자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는 공식적으로 카이사르 신격화 의식을 거행했다.[45] 기원전 40년, 안토니우스는 '디부스 율리우스'의 플라멘이 되었다. 코린토스와 같은 카이사르가 건설한 식민 도시들에는 Caesareum|카이사레움la이라 불리는 디부스 율리우스 숭배 중심지가 세워졌다.[46] 그러나 카이사르에 대한 안토니우스의 충성심은 그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에게까지 이어지지 않았고, 결국 두 사람은 최후의 내전을 벌여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하게 된다.
4. 카이사르의 후계자
악티움 해전 이후 로마의 유일한 권력자가 된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후계자로서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기원전 30년–29년, 아시아와 비티니아의 코이나(지방 의회)는 그를 '구원자'로 숭배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300] 이는 동방 헬레니즘 세계의 관행이었으나, 로마의 공화정 전통과 충돌할 수 있었고, 특히 살아있는 인물을 신격화하려다 암살당한 카이사르의 전례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큰 부담이었다.[298]
옥타비아누스는 동방의 요청을 완전히 거절하지 않으면서도 로마 내에서의 정치적 위험을 피하기 위해 신중한 해결책을 모색했다. 그는 동방 속주인 페르가몬과 니코메디아에서는 데아 로마(로마 여신)와 함께 자신을 숭배하는 것을 허용하되, 로마 시민권을 가진 속주민들에게는 살아있는 자신 대신 신격화된 카이사르, 즉 '디부스 율리우스'(Divus Julius)를 숭배하도록 유도했다.[301][302][303]
결정적으로 기원전 29년,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가 화장된 로마 포룸에 카이사르 신전을 봉헌했다. 이를 통해 카이사르를 로마 국가의 공식적인 '디부스'(신격화된 존재)로 선포하고, 자신은 그의 양자로서 '디비 필리우스'(divi filius, 신의 아들)임을 강조했다.[304] 이는 카이사르의 신성한 권위를 계승하고 자신의 통치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중요한 조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정치적, 종교적 유산을 성공적으로 이어받았으며, 이는 훗날 원수정 체제를 확립하고 '아우구스투스'라는 존칭을 받으며[306] 제국의 초석을 다지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305]
4. 1. 아우구스투스 시기 종교와 '임페리움'
기원전 30년에서 29년 사이, 아시아와 비티니아의 '코이나'(지방 의회)는 옥타비아누스를 자신들의 '구원자' 또는 '구세주'로 숭배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48] 이는 완전히 새로운 요청은 아니었지만, 옥타비아누스를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했다. 그는 대중주의자와 전통주의자 양쪽의 기대를 만족시켜야 했는데, 이들의 입장은 서로 상반되는 경우가 많았다. 과거 마리우스 그라티디아누스가 대중적 지지와 숭배를 받다가 기원전 82년 원로원 내 정적들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고, 마찬가지로 카이사르의 암살 역시 살아있는 통치자를 신격화하려 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오만함과 그 위험성을 보여주었다.[46] 옥타비아누스는 동방 동맹들의 제안을 존중하면서 헬레니즘 문화권의 영예 수여 방식과 그 의도를 인정해야 했고, 동시에 잠재적 경쟁자들 사이에서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공식화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로마 내에서 군주와 같은 신성성을 추구한다는 인상을 주어 정치적으로 위험한 상황에 처하는 것을 피해야만 했다. 결국 그에 대한 숭배는 페르가몬과 니코메디아에 세워질 숭배 중심지에서 '데아 로마'(로마 여신)와 함께 공동으로 이루어지도록 결정되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진 속주민들은 살아있는 황제를 직접 숭배하는 것이 금지되었지만, 에페소스나 니카이아 같은 곳에서는 '데아 로마'와 '디부스 율리우스'(신격화된 율리우스)를 함께 숭배할 수 있었다.[49][50][51]
기원전 29년,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가 화장된 장소에 '디부스 율리우스'를 모시는 카이사르 신전을 봉헌했다. 그는 양아버지 카이사르를 로마 국가의 공식적인 '디부스'(신격화된 존재)로서 충실하고 합법적으로 기렸을 뿐만 아니라, 율리우스의 별을 통해 자신이 "태어났다"고 주장하며 스스로를 '디비 필리우스'(divi filius, 신의 아들)로 내세웠다.[52] 카이사르가 실패했던 지점에서 옥타비아누스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로마의 전통적인 신들과의 관계인 '팍스 데오룸'(pax deorum, 신들의 평화)을 회복시키고, 점복을 통해 로마를 재건했다고 선언했다.[53] 기원전 27년, 원로원은 투표를 통해 그에게 '아우구스투스'(존엄한 자)라는 존칭을 부여했고, 그는 이를 받아들였다.[54]
아우구스투스는 스스로 새로운 것을 만들거나 주장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신격화된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대한 숭배조차 로마의 전통적인 조상 숭배 의식인 '파렌탈리아'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었다.[55] 원로원 내에서 그의 독특하면서도 전통적인 지위인 '프린켑스'(제1시민) 또는 '프리무스 인테르 파레스'(동등한 자들 중 첫 번째)는 최근까지 지속된 내전의 원인이었던 야심과 경쟁을 억제하는 역할을 했다. 그는 감찰관이자 폰티펙스 막시무스(최고 제사장)로서 신들의 뜻과 '로마 원로원과 인민(Senatus Populusque Romanus)'의 의지에 따라 로마의 전통적 관습인 '모스 마이오레스'(조상들의 관습)를 회복할 도덕적 의무를 지녔다. 호민관으로서는 관대한 공공 지출을 장려했고, 원로원의 '프린켑스'로서는 과도한 사치를 억제했다. 그는 내전 시기의 군대를 해산하고 새로운 군단들과 개인 경호대인 친위대를 창설했다. 정치, 군사, 종교 권력의 상층부를 차지하고 있던 전통적인 귀족 계층은 점차 제국 전역의 야심차고 재능 있는 기사 계급 출신 인물들로 대체되었다. 처음으로 원로원 의원 신분이 세습 가능하게 되었다.[56]
일반 시민들은 복잡한 국가 행정 체계를 거치지 않고 마치 개인 시민에게 하듯 황제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었다. 황제의 이름과 모습은 국가가 발행하는 주화, 거리, 신전 안팎, 특히 법원과 민간 및 군사 행정 관청 등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었다. 그의 형상을 증인으로 삼아 그의 이름으로 서약이 이루어졌다. 그의 공식적인 업적 기록인 '레스 게스타이'(Res Gestae Divi Augusti)에는 기원전 28년 한 해에만 82개의 신전을 수리하고, 생전에 로마에 14개의 다른 신전을 새로 짓거나 수리했으며, 새로운 도로, 수로, 원로원 건물, 극장 등 공공 편의 시설을 정비하거나 건설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57] 무엇보다도 그의 군사적 성공은 지속적이고 신성한 평화를 가져왔으며, 이는 그에게 영구적인 '임페라토르'(개선장군, 황제) 칭호를 부여했고 개선식을 황제만의 특권으로 만들었다.[58] 그는 이러한 모든 성과를 개인적인 역량, 교묘하게 감추어진 위협, 그리고 스스로를 "단지 또 한 명의 원로원 의원일 뿐"이라고 낮추는 자기비하를 조합하여 합법적인 절차 안에서 이루어낸 것으로 보인다.[59][60]
로마 내에서는 아우구스투스의 공식적인 직책, 그가 베푼 막대한 기부, 그의 개인적인 권위인 '아욱토리타스', 그리고 그의 가문인 '겐스 율리아'가 로마 사회의 모든 법적, 종교적, 사회적 제도와 동일시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만약 '외국인'이나 일반 시민들이 그를 더 높은 존재로 존경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적절한 범위 내에서 그들의 자유였다. 그들의 충성심을 인정하는 것은 황제로서 그의 도덕적 책임감과 관대함을 보여주는 행위였다. '그의' 제국 수입은 신전, 원형 경기장, 극장, 목욕탕, 축제, 그리고 정부 운영 자금을 지원했다. 이러한 단일한 원칙은 오늘날 '황제 숭배'라고 알려진 것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이는 다양한 문화를 가진 제국 전역에서 각기 다른 형태와 강조점을 가지고 표현될 것이었다.
4. 2. 동방 속주

동방 속주에서는 헬레니즘 시대 통치자 숭배의 문화적 선례 덕분에 황제 숭배가 빠르고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이러한 경향은 멀리 오늘날 나지란에 위치했던 아우구스투스의 군사 거점까지 확산되었다.[61] 동방 속주에서는 개인 및 공공의 주도로 자금을 지원받아 황제 숭배와 토착 종교가 결합된, 가장 다양하고 복잡한 형태의 숭배 양상이 나타났다. 이는 살아있는 황제에게 신과 같은 영예를 바치는 것에서부터, 일부 학자(Harland, 2003)가 사적으로 자금을 지원하는 공동 신비 의식으로 해석하는 것까지 다양했다.[62][63]
아시아 속주의 그리스 도시들은 높은 지위의 황제 숭배 중심지(네오코로스)를 유치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였다. 오랜 경쟁 관계였던 에페소스와 사르디스는 서기 3세기 초까지 각각 두 개의 네오코로스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에페소스는 당시 황제였던 카라칼라를 위한 추가 신전을 허가받기도 했다. 그러나 카라칼라 사후, 에페소스는 이러한 종교적 특별함으로 얻었던 일시적 우위를 잃었다.[64]
동방 속주에서는 황제의 가문, 즉 '도무스'(domus)와 '파밀리아'(familia)를 신성한 미덕과 도덕적 올바름의 공식적인 본보기로 여기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페르가몬, 레스보스, 키프로스 같은 중심지에서는 아우구스투스와 황후 리비아에게 숭배 의례를 바쳤다. 특히 키프로스의 역법은 매달 황실 가족 구성원, 그들의 조상신, 그리고 로마-그리스 판테온의 주요 신들에게 봉헌하며 아우구스투스 가문 전체에 경의를 표했다. 주화에서는 '테아'(Thea) 리비아를 헤라나 데메테르와 연결하고, 대 율리아를 베누스 게네트릭스(아프로디테)와 동일시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아테네에서는 리비아와 율리아가 헤스티아(베스타)와 함께 숭배의 영예를 나누었고,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은 아레스(마르스)와 연결되었다. 이러한 동방 지역의 숭배 관행은 아우구스투스 생전에 이미 형성되었다. 리비아는 사후 로마에서 공식적으로 신격화되기까지 시간이 걸렸지만, 동방의 숭배는 그와 별개로 독자적인 생명력을 지니고 발전했다.[65]
후대에 이르러서도 이러한 경향은 지속되어, 프로부스 황제 통치기이자 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 직전인 서기 280년경에는 이집트 룩소르 신전의 일부가 황제 숭배 시설로 개조되기도 하였다.[66]
4. 3. 서방 속주

서방 속주는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 이후 비교적 최근에 '라틴화'되었으며, 대부분 그리스-로마 문화권의 영향 밖에 있었다. 일부 예외는 있었지만,[67][68] 전반적으로 서방 지역에는 황제 숭배를 로마화의 도구로 받아들일 만한 토착적인 군주 신격 숭배 전통이나, 그리스의 '코이나'와 같은 정치 조직 기반이 부족했다.[69] 이러한 배경 속에서 서방 속주의 '콩킬리아'(concilia, 속주 회의)는 황제 숭배를 중심으로 직접 형성되었으며, 기존의 토착 군사, 정치, 종교적 전통을 로마의 모델에 맞추어 재구성하는 역할을 했다. 이는 갈리아 등지의 유력자들이 자신과 공동체를 '로마화'하려는 의지를 보이는 통로가 되었다.[70]
알려진 최초의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서방 속주의 숭배는 기원전 19년경, 그의 승인 하에 스페인 북서부 (켈트)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이 숭배 제단은 군사적 설립자인 L. 세스티우스 알바니아누스 퀴리날리스의 이름을 따 '아라이 세스티아나이'(arae sestianae)라고 불렸다.[71] 얼마 지나지 않아 기원전 12년 또는 10년에, 서방 속주 최초의 황제 숭배 중심지가 루그두눔 (오늘날의 리옹)에 세워졌다. 이는 드루수스가 갈리아 코마타를 세 개의 행정 구역으로 나누면서 그 중심지로 삼은 조치와 함께 이루어졌다. 루그두눔은 로마화된 속주 정체성을 형성하는 공식적인 서방 숭배의 모델을 확립했으며, 이는 새롭게 편입된 서방 속주 내 전략적 요충지에 세워진 군사-행정 중심지들로 퍼져나갔다. 이러한 중심지 설립은 대부분 황제 가문 출신의 군사 지도자들이 주도했다.[72]
루그두눔에 세워진 거대한 황제 숭배 성소의 초대 사제 ('아라', Ara)는 갈리아 엘리트 출신인 카이우스 율리우스 베르콘다리둡누스였다. 그는 로마 시민권을 부여받았으며, 사제직을 통해 속주의 정치 기구인 '콘실리움'(Concilium)에 참여할 자격을 얻었다. 이 사제직은 로마 원로원 의원으로 이어지는 자리는 아니었지만, 거의 매년 선출되는 방식(로마의 전통적인 종신 사제직인 플라멘과는 다름)으로 운영되어, 속주 내에서 로마의 전통적인 명예 경력인 '쿠르수스 호노룸'(cursus honorum)에 상응하는 지위를 제공했다.[73] 황제 숭배를 받아들이는 것은 사제직과 시민권을 포함한 '로마니타스'(Romanitas, 로마적인 것)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했다. 반대로 이를 거부하는 것은 로마에 대한 반항으로 여겨질 수 있었는데, 예를 들어 서기 9년, 후일 콜로니아 클라우디아 아라 아그리피넨시움(오늘날 독일 쾰른)이 되는 지역의 황제 숭배 사제였던 세기문두스는 그의 친족인 아르미니우스가 일으킨 반란에 가담하기 위해 사제복을 벗어던졌다.[74]
4. 4. 서방 속주의 아프리카 지역
초기 원수정 시대에, 'Marazgu Aug(usto) Sac(rum)'("마라즈구 아우구스투스에게 헌정")이라 새겨진 제단은 아우구스투스의 최고 권력을 지닌 토착 고대 리비아인(베르베르족) 신을 나타낸다. 아프리카 프로콘술라리스에서는 'Dii Magifie Augusti'에게 바쳐진 제단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황제 숭배가 지역 신앙을 완전히 대체하기보다는 지역적 특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지닌 형태로 나타났음을 보여준다.[75]또한 로마와 신격화된 아우구스투스(디부스 아우구스투스)에게 헌정된 신전 두 곳이 확인되었다. 하나는 티베리우스 황제 시기에 렙티스 마그나에 세워졌고, 다른 하나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기에 멕타르에 세워졌다.[76] 이 외에도 제정 시대 초기에 카르타고에는 아우구스투스 가문(겐스 아우구스타)에게 바쳐진 제단이 있었다.[77]
5. 황제 계승
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는 법적으로 세습되는 원칙이 없었기에, 황제의 계승은 혈연, 양자, 군대의 추대, 원로원의 선출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불안정한 계승 구조 속에서 황제 숭배는 제위 계승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제국의 안정을 유지하는 중요한 기제로 작동했다.
아우구스투스는 공화정의 외형을 유지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양자 티베리우스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원로원의 승인을 얻는 방식을 통해 제위 계승의 중요한 선례를 남겼다.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한 후 원로원에 의해 공식적으로 '디부스'(신격화된 존재)로 선포된 것은[79] 이후 황제들이 신적인 권위를 부여받고 계승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중요한 관행의 시작이 되었다. 그러나 모든 황제가 사후에 신격화된 것은 아니었으며, 이는 해당 황제의 통치에 대한 원로원과 후임 황제의 정치적 평가를 반영하는 것이었다.[82]
초기 왕조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와 플라비우스 왕조 시기에는 혈연에 기반한 계승 시도와 군대의 영향력이 뒤섞이며 네 명의 황제의 해와 같은 정치적 혼란이 발생하기도 했다. 반면,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기에는 유능한 인물을 양자로 삼아 제위를 계승하는 방식이 비교적 성공적으로 정착되어 제국의 안정에 기여했다.
세베루스 왕조 이후로는 군대의 영향력이 더욱 강화되어 황제의 군사적 기반이 계승에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3세기의 위기에는 군인 황제들이 난립하며 제위 계승은 극도로 불안정해졌고, 제국 전체가 큰 혼란을 겪었다.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사두정치를 도입하여 제국을 분할 통치하고 예정된 후계자를 지명하는 시스템을 통해 계승 문제를 안정시키려 시도했다.
이처럼 로마 황제의 계승 방식은 시대에 따라 변화했지만, 황제 숭배는 황제의 권위를 신성하게 포장하고 계승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며 제국의 통합을 유지하는 데 지속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5. 1.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아우구스투스는 양자 티베리우스를 '프린켑스' 역할로 준비시키며 원로원에 그를 뛰어난 후계자로 추천했지만, 왕조적 '임페리움'의 적절성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그에게 유일하게 가능한 선택이었을 것이다.[78]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하자 원로원은 그를 '디부스'로 선포했고, 그의 시신은 호화로운 장례식에서 화장되었다. 그의 영혼은 올림포스의 신들 사이에서 양아버지 카이사르와 합류하기 위해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해진다. 그의 유해는 황실 영묘에 안치되었는데, 이 영묘는 후대의 후손들처럼 '디부스'가 아닌 황제로서의 이름으로 그를 신중하게 나타냈다.[79] 아우구스투스 이후 로마 관료들에게 새로 헌정된 숭배는 오직 황실과 관련된 것들뿐이었다.[80][81][82] 그의 사후, 원로원은 '렉스 데 임페리오'(lex de imperio)를 논의하고 통과시켜, 티베리우스에게 그의 "업무 수행에서 입증된 공로"를 근거로 '프린켑스' 지위를 부여하고,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과 칭호를 수여했다.[83]
티베리우스는 겉으로는 마지못해 황제로서의 지위와 칭호를 받아들였다. 그는 유능하고 효율적인 행정가였지만, 전임자의 비범한 정력과 카리스마에는 미치지 못했다. 로마 역사가들은 그를 침울하고 불신이 많은 인물로 묘사한다. 그는 아버지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숭배는 장려했지만, 자신에 대한 숭배는 억제했다.[84] 많은 논쟁 끝에, 그는 서기 26년 스미르나에 자신과 원로원의 '게니우스'를 위한 신전 단 한 곳만을 허용했다. 11개 도시가 이 영예를 얻기 위해 격렬하게, 심지어 폭력적으로 경쟁했다.[85] 그의 개인적인 '아욱토리타스' 부족은 친위대가 황실, 원로원, 그리고 국가에 미치는 영향력을 증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86] 서기 31년, 당시 사실상의 공동 통치자였던 그의 친위대 사령관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드루수스의 죽음에 연루되어 공공의 적으로 처형되었다. 움브리아에서는 한 황제 숭배 사제('세비르 아우구스탈리스')가 '로마 인민들의 가장 악독한 적' 제거에 대해, 로마 이름의 영원을 위해 태어난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의 섭리를 기념하였다. 크레타에서는 세야누스에 대한 음모를 좌절시킨 것에 대해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와 원로원의 '누멘'과 선견지명에 감사를 표했지만, 그가 사망했을 때 원로원과 그의 후계자인 칼리굴라는 그를 공식적으로 신격화하지 않기로 결정했다.[87]
칼리굴라의 통치는 아우구스투스 시대 '공화정'의 법적, 도덕적 모순을 드러냈다. 그의 계승을 정당화하기 위해 원로원은 그의 역할을 법적으로 정의해야 했지만, 살아있는 황제의 '게니우스'에 대한 의례와 제물은 이미 그의 법적으로 무제한적인 권력을 인정하고 있었다. '프린켑스'는 오직 개인적인 자제력과 품위를 통해서만 '프리무스 인테르 파레스'(동등한 자들 중 첫 번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칼리굴라는 이러한 자질이 부족하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그는 자신의 '게니우스' 숭배를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였으며, 신처럼 행동하거나 여러 신들을 흉내 내는 것을 즐겼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의 악명 높은 주요 신들에 대한 흉내는 단순히 그들의 사제직을 나타내거나, 충격을 주려는 욕망, 개선식 복장에 대한 선호,[88] 또는 정신 질환[89] 때문일 수도 있다. 그의 계획이 무엇이었든, 로마에서 살아있는 '디부스'로서의 공식적인 숭배에 대한 증거는 없으며, 속주 지역 숭배에서도 주요한 변화나 혁신은 없었다.[90] 그가 누이 드루실라와 근친상간 관계를 맺고 그녀가 죽은 뒤 신격화했다는 이야기는 후대 역사가들의 조롱을 샀으며, 칼리굴라 사후 그녀의 숭배는 조용히 사라졌다. 그가 마지못해 하는 원로원 의원들로부터 사제직 비용을 갈취했다는 소문은 엘리트 계층 내에서의 사적인 숭배와 개인적인 굴복을 보여준다. 칼리굴라의 치명적인 잘못은 그를 암살한 고위 군 장교들을 포함하여 "중요한 모든 이들을 의도적으로 모욕하고 불쾌하게 한 것"이었다.[91] 그의 통치에 대한 기록들은 그의 변덕스러운 불경함을 강조한다. 아마 그뿐만이 아닐 수도 있는데, 서기 40년 원로원은 '황제는 원로원 건물에서조차도 높은 연단에 앉아야 한다'는 법령을 통과시켰다.[92] 그의 후계자이자 숙부인 클라우디우스는 황실과 음모자들에게 미칠 피해를 막기 위해 개입하여 칼리굴라의 공공 조각상들을 신중하게 제거했다.[93]
클라우디우스는 칼리굴라의 친위대에 의해 황제로 옹립되었고, 군대에 현금 지급('도나티바')으로 자신의 지위를 굳혔다. 원로원은 이 선택을 비준하고 모욕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클라우디우스는 '카이사르'라는 코그노멘을 채택하고,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리비아를 사망한 지 13년 만에 신격화했으며, 서기 42년에는 '파테르 파트리아이'(국가의 아버지) 칭호를 받았으나, 황제와 원로원 사이의 관계는 회복 불가능해 보였다.[94] 클라우디우스는 칼리굴라와 같은 과도한 행동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게니우스'에 대한 숭배를 완전히 거부한 것으로 보이지만, 숭배 제의는 이를 승인할 수 있는 자들의 높은 지위와 '프린켑스'의 특별한 지위를 인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클라우디우스의 반복적인 거부는 원로원, 속주, 그리고 황제 직위 자체에 대한 모욕으로 해석될 수도 있었다. 그는 또한 자신이 신뢰하는 해방 노예들을 황제 직속 프로쿠라토르로 임명하며 전통적인 위계 사회에 불쾌감을 주었는데, 황제와 가까운 이들은 이 관계를 통해 높은 관직을 얻었다.[95]
브리타니아 정복 이후 그가 브리타니아 내에서 자신의 숭배를 위한 신전 한 채를 허용했다고 추정되기도 한다.[96] 그 신전은 브리타니아의 주요 '콜로니아'인 카물로두눔(오늘날 콜체스터)에 있었던 것이 확실하며, 서기 60년 부디카의 반란 기간 브리튼족의 분노가 집중된 곳이었다.[97] 그러나 살아있는 클라우디우스에 대한 숭배는 가능성이 낮다. 그는 이미 알렉산드리아의 숭배 영예를 '저속하고 불경하다'며 거부한 적이 있었고, 살아있는 황제들에 대한 숭배는 신전이 아닌 '아라이'(arae, 제단)와 관련되어 있었다.[98] 살아있는 '디부스'로서 그에게 바쳐진 브리튼 숭배는 황제로서 그의 가치에 대한 잔혹한 문학적 평가에 불과했을 수도 있다. 공화정 규범에 대한 그의 분명한 존중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계층에게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세네카의 아첨하는 네로 시대 소설에서는 로마의 신들이 그를 '디부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반면, 야만적인 브리튼인들은 더 쉽게 속을 수 있다고 풍자한다.[99] 실제로 브리튼인들은 반란을 일으킬 만큼 분개했지만, 이는 신으로서의 클라우디우스보다는 잔혹한 학대와 신전을 통해 나타난 재정적 부담 때문이었을 것이다.
클라우디우스는 서기 54년에 사망했고, 양자이자 후계자인 네로에 의해 신격화되었다.[100] 겉으로는 화려한 장례식이 치러진 뒤, '디부스' 클라우디우스는 로마에서 평판이 좋지 않은 카일리우스 언덕에 신전을 받았다.[101] Fishwick는 이 장소 선정의 악의적인 유머는 아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잊혀지지 않았을 것이며, 브리타니아의 클라우디우스 신전 위치(그의 '애처로운 개선식'이 열린 곳)도 같은 맥락이었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102]
권력을 잡은 네로는 클라우디우스의 숭배를 약화시켰다. 그는 완공되지 않은 클라우디우스 신전 부지 위에 자신의 도무스 아우레아를 건설하고, 자신의 쾌락적이고 미적인 성향을 마음껏 펼쳤으며, 자신의 '게니우스'를 로마 인민들의 '파테르 파밀리아스'로서 숭배하도록 했다.[103] 그에 대한 원로원의 태도는 대체로 부정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네로는 군사 쿠데타로 폐위당했고, 그의 죽은 아내 포파이아와 딸 클라우디아 아우구스타 등에 대한 숭배 관습은 폐지되었다. 한편, 그는 특히 동방 속주들에서 인기 있는 황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타키투스는 살아있는 '디부스'로서 네로에게 신전을 봉헌하자는 한 원로원 의원의 제안이 "황제가 살아있는 사람들 속에 있을 때까지는 신적인 영예가 주어지지 않는다"라는 이유로 불길하게 여겨졌다고 기록하였다.[104]
5. 2. 플라비우스 왕조
네로 황제의 죽음은 로마의 오랜 귀족 가문들이 제국 통치권을 독점하던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이후 혼란스러운 시기 동안 네 명의 황제가 폭력적으로 권력을 주고받았다. 이들 중 일부는 자신의 게니우스 숭배를 장려하거나 네로를 복권시키려 시도하기도 했다.[357]이 혼란을 수습하고 등장한 인물은 레아테 지역 기사 계급 출신의 베스파시아누스였다. 그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원수정으로 복귀하고 '디부스 율리우스'에 대한 황제 숭배를 재개하며 플라비우스 왕조를 열었다.[357][358] 하지만 베스파시아누스는 이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처럼 율리우스 카이사르나 신화적 조상에게 혈통을 연결하여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플라비우스 왕조는 황제 숭배 전통에 익숙한 로마인들을 다스리기 위해 새로운 정책 기준을 세워야 했다.[359]
베스파시아누스는 로마의 전통과 아우구스투스의 겸손함을 '복원'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존경을 얻었다. 그는 국가 제례를 '로마 인민의 게니우스'(genio populi Romani)에게 바치고, 원로원의 '공화정적' 가치를 존중했으며, 네로 시대에 남발되었던 축제들을 정리했다. 타키투스는 이러한 축제들이 "시대의 아첨에 의해 부정하게 더럽혀졌다"고 비판한 바 있다.[360] 또한 베스파시아누스는 서기 75년경 네로의 거상의 머리를 태양신의 모습으로 바꾸거나 새로 조각하게 했을 가능성이 있다.[361][362][363] 한편, 서기 70년 유대 반란 진압과 제2성전 파괴 이후, 유대인들에게 '디드라크몬'(성전세)을 부과했는데, 이는 과거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성전에 내던 세금을 로마의 주신 유피테르 카피톨리누스에게 바치도록 변경한 것이었다. 이 세금을 내는 유대인들은 로마 국교 숭배 의무에서 면제되었으나, 동족 공동체에서는 배척받는 결과를 낳았다.[364] 베스파시아누스는 자신에 대한 신격화 가능성에 대해 무덤덤한 유머 감각을 보였는데,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임종 시 "내가 신이 되어가는 것 같다"(puto deus fio)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는 2년간 성공적으로 통치한 후 자연사했고, 그의 동생 도미티아누스가 티투스를 신격화하고 황제 자리를 계승했다.

도미티아누스는 즉위 직후 살아있는 황제의 '게니우스' 숭배를 복원했다.[365] 그는 스스로를 살아있는 '디부스'로 칭했다는 논란이 있는 인물로, 황실 문서에서 '주인이자 신'(dominus et deus)이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이 근거로 제시된다. 그러나 도미티아누스 본인이 직접 이 칭호를 사용했다는 명확한 기록은 없으며, 주로 그의 재위 후반기 해방 노예 출신 프로쿠라토르들이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366] 이 칭호는 로마의 가장(pater familias)이나 후원자(patronus)가 자신의 노예나 해방 노예, 피후견인 등 확장된 가족(familia)에게 사용하던 표현과 유사한 맥락으로 볼 수도 있다. 소 플리니우스가 묘사한 카피톨리누스 언덕에서의 도미티아누스 제의 역시 살아있는 황제에게 허용되던 일반적인 '사적이고 비공식적인' 의식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도미티아누스는 강압적인 성격의 전통주의자였으나 군대와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아우구스투스를 존경하고 모방하려 했을 수 있지만, 원로원을 동등한 파트너가 아닌 하급자처럼 대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는 칼리굴라와 유사한 문제였다. 결국 그는 궁정 내부의 음모로 암살당했고, 그의 이름은 비문 등에서 제거되었다(기록말살형).[367]
5. 3.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원로원은 노령에 자녀가 없고 내키지 않아 하던 네르바를 황제로 선택했다. 네르바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및 플라비우스 왕조와 오랜 관계를 맺은 유서 깊은 가문 출신이었지만, 위험할 정도로 온화하고 우유부단한 '프린켑스'(제1시민)임이 드러났다. 그는 트라야누스를 지지하며 퇴위하도록 설득되었다. 서기 100년 소 플리니우스의 송덕문은 트라야누스 치하에서 제국 전역에 걸쳐 원로원의 권위와 위엄이 눈에 띄게 회복되었다고 주장하지만, 플리니우스는 황제의 겸손함을 칭찬하면서도 이러한 자치 군주의 선물이 지닌 위태로운 본질을 숨기지 않는다.[116] 트라야누스의 매우 유능한 민간 및 군사적 지도력 아래, 황제의 직위는 점차 신성한 질서의 지상 대리인으로 해석되었다. 그는 로마 제국의 미덕에 대한 영속적인 본보기가 될 것이었다.[117][118]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히스파니아계 로마인이라는 기원과 뚜렷한 친그리스 성향은 황제 숭배의 초점을 바꾸었다. 그의 표준 주화는 여전히 '로마 인민의 게니우스'(genius populi Romani)와 동일시되지만, 다른 발행물들은 '헤르쿨레스 가디타누스'(가데스의 헤라클레스)와의 동일시와 그리스 문명에 대한 로마 제국의 수호자로서의 역할을 강조한다.[119] 기념 주화는 그가 속주 신들을 "일으키는"(즉, 속주를 고양시키고 '회복시키는') 모습으로 묘사한다. 그는 그리스 피시디아의 사갈라소스를 제국의 주요 황제 숭배 중심지로 승격시켰고, 서기 131-2년에는 배타적인 그리스 '판헬레니온'을 후원했다.[120] 그는 젊은 연인 안티누스가 사망했을 때 "여자처럼 울었다"고 전해지며, 그의 신격화를 주선했다. 디오는 하드리아누스가 이러한 감정적 관용 때문에 조롱을 받았다고 주장하는데, 특히 그가 자신의 누이 파울리나가 사망한 후 그녀의 신격화를 미루었기 때문이라고 한다.[121]

안티누스 숭배는 특히 동방 속주들에서 놀라운 지속성과 헌신을 보여주었다. 그의 출생지인 비티니아에서는 카라칼라 치세(211-217년) 말까지 주화에 그의 형상이 등장했다. 그의 대중적인 숭배는 4세기까지 번성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때 그는 기독교 논쟁에서 '이교도 숭배의 희생양 소년'이 되었다. 바우트(2007)는 그의 미천한 출신, 이른 죽음, '테오스'(theos)로서의 '부활', 그리고 아폴론, 디오니소스/바쿠스, 후대에는 오시리스 등과의 모습 및 종교적 기능과의 동일시(때로는 후대 학문에 의해 오인되기도 함)를 주목한다.[122] 로마 시 자체에서도 그는 현존하는 테오스에 관한 금석문 세 개 중 두 개의 주인공이었지만, '고위 신들'에 대한 그의 중재를 직접적으로 호소할 수 있는 영웅 숭배와 좀 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123][124] 하드리아누스는 바르 코크바의 난 이후 유대 지역에 자기 자신과 유피테르에 대한 황제 숭배를 결합하여 부과했다. 그는 아내 비비아 사비나보다 먼저 사망하였는데, 둘 다 신격화되었지만 하드리아누스의 경우는 그의 후임자인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애원이 있어야만 했다.[125]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스승인 프론토는 황제의 초상이 사적 및 공적인 영역에서 거의 모든 곳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증거를 제시한다.[126] 이 시기의 사적인 황제 숭배에 대한 증거가 다른 시대와 마찬가지로 희박하기는 했으나, 프론토의 서신들은 살아있는 현직 황제에 대한 '게니우스' 숭배가 공인된 것이고, 한 집안 내의 문제이자, 개인적인 관습이었으며, 아마 이 시기 그리고 다른 시기의 '디비'(divi, 신격화된 황제)에 대한 숭배보다 한층 더 일반적이었음을 암시한다.[127]
마르쿠스의 아들 콤모두스는 방탕이라는 유혹, 손쉬운 포퓰리즘, 측근 통치의 유혹에 굴복하였다.[128][129] 그는 자신의 집권기를 '황금기'라 평하였고, 자기 자신을 새로운 로물루스이자 로마의 '재건자'라고 묘사하였지만, 원로원에 대해서는 깊이 적대적이었는데, 그는 표준적인 "공화주의" 황실 공식을 '로마 인민과 원로원'(populus senatusque romanus)으로 뒤집었다. 그는 조상, 신전, 그리고 경기장에서 반신 헤라클레스와 점점 더 동일시했으며, 그곳에서 그는 아침에는 '베스티아리우스'(bestiarius, 맹수 사냥꾼)로, 오후에는 검투사로 즐겨 오락을 했다. 그의 생애 마지막 해에 그는 공식 칭호 '로마누스 헤라클레스'(Romanus Hercules)를 받았다. 헤라클레스에 대한 국가 숭배는 그를 영웅적이고, 신성 또는 반신성(하지만 '디부스'는 아님)이었던 한때 필멸의 존재로 인정했다.[130] 코모두스는 아마 서기 192년 자신의 마지막 날 암살되기 전에 자신이 살아있는 신이라고 선언할 의도가 있었을 수 있다.[131]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는 혼란 속에서 끝났다. 원로원은 코모두스에게 '기록말살형'(damnatio memoriae)을 선언했으며, 그의 수도 행정관 페르티낙스는 매우 많은 '기부금'(donativum)을 약속하는 대가로 친위대에 의해 황제로 선언되었다.[132] 페르티낙스는 군사적 재능과 행정적 효율성을 통해 기사 계급에서 원로원, 집정관, 그리고 마지막으로 잠시 황제까지 올랐다. 그는 봉급을 삭감하려다 친위대에 의해 살해되었다.[133] 페르티낙스는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로 교체되었으며, 그는 친위대에게 현금과 원로원 권력 회복을 약속했다. 율리아누스는 코모두스의 기억에 대한 부적절한 호소, 대중에게 '일괄적으로' 뇌물을 주려는 매우 불쾌한 시도, 그리고 그들에 대한 친위대 무력 사용으로 통치를 시작했다. 이에 항의하여, 반항적인 도시 군중은 '키르쿠스 막시무스'에서 원로원 자리를 점거했다.[134] 경쟁자들 사이의 내전의 배경 속에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유력한 승자로 부상했다. 원로원은 곧 율리아누스의 죽음, 페르티낙스의 신격화, 셉티미우스의 황제 추대를 투표했다.[135] 코모두스가 죽은 지 불과 1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5. 4. 세베루스 왕조
서기 193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개선식을 거행하며 로마에 입성하여 전임자 페르티낙스를 신격화하였다.[135] 그는 콤모두스에 대한 원로원의 기록말살형 선포를 취소하고, 그를 '프라테르'(frater, 형제)로서 신격화하여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자신의 조상으로 삼는 경건한 행위를 보였다.[137] 세베루스의 주화는 세베루스 왕조를 권위 있는 안토니누스 왕조 및 '게니우스 포풀리 로마니'(로마 백성의 수호신)와 연결시키려는 의도를 보여주었다.[138][139]
세베루스의 통치는 원로원, 황제, 군부 간의 관계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140] 이전까지 원로원의 동의는 신성한 '임페리움'을 로마 인민을 위한 공화정의 허가로 정의했고, 황제의 신격화는 원로원 권력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세베루스는 군 고위직에 원로원 의원을 선호하던 관례를 무시하고, 로마 내 평민의 특권을 늘렸으며, 충성스러운 수비대를 주둔시키고 자신의 지휘관을 직접 선택했다. 그는 제국의 수입원, 군사력, 그리고 불안의 원천이었던 속주에 개인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경쟁자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를 루그두눔에서 물리친 후, 그는 그곳의 황실 숭배 중심지를 재건하고 개혁했다. '데아 로마'(dea Roma)는 제단에서 제거되었고, 신격화된 아우구스투스 황제들과 함께 신전으로 제한되었다.[141] 이는 황제의 권위를 더욱 강화하려는 조치로 해석된다.[142] 세베루스 자신의 수호신이었던 멜카르트/헤르쿨레스와 리베르/바쿠스는 서기 204년 백년제에서 세베루스 자신과 두 아들과 함께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143] 세베루스는 서기 211년 브리타니아 원정 중 에보라쿰(현대 요크)에서 자연사하였다. 그는 아들 카라칼라와 그의 형 게타에게 제국을 동등하게 물려주면서, "조화롭게 지내고, 군인들을 부유하게 하며, 다른 모든 사람을 경멸하라"는 조언을 남겼다.[144]

그러나 형제간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서기 212년, 카라칼라는 동생 게타를 살해하고 그의 모든 기록을 없애는 '기록말살형'을 선포했다. 같은 해 카라칼라는 '안토니누스 칙령'을 발표하여 제국의 모든 자유 거주자에게 완전한 로마 시민권을 부여했다.[145] 이는 표면적으로 게타의 "음모"를 좌절시킨 "로마 백성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관대한 초청으로 표현되었지만, 실제로는 만성적인 현금 및 징병 부족에 직면한 카라칼라가 수입 확보와 신병 모집을 위해 내린 조치였다. 그의 "선물"은 수혜자 대부분이 농민 신분과 직업을 가진 '후밀리오레스'(전체 인구의 약 90%)였기에 그리 인기 있는 조치는 아니었다. 그들은 여전히 '후밀리오레스'로 남았지만, 이제 세금을 납부하고, 군단에서 복무하고, 그들의 "해방자"의 이름을 받아들여야 했다. 다른 황제들이 '게니우스' 숭배와 같은 상징적인 수준에서 가족 의무의 '모스 마이오룸'을 사용했던 반면, 카라칼라는 자신의 개인적인 생존을 국가 및 "그의" 시민들과 문자 그대로 동일시했다.[146] 카라칼라는 아버지의 군대의 헌신을 물려받았지만, 그의 새로운 시민들은 이를 기념하려는 의향이 없었고, 콤모두스 방식으로 인기를 얻으려는 그의 시도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147] 필로스트라토스의 평가에 따르면, 제국을 포용하려는 그의 시도는 그의 억지스럽고 편협한 사고방식 때문에 좌절되었다. 그는 서기 217년, 그의 친위대 사령관 마크리누스의 암묵적인 공모로 암살당했다.[148]
군대는 마크리누스를 '임페라토르'로 칭했고, 그는 카라칼라의 신격화를 준비했다. 기사 계급에서 황제로의 전통적인 '쿠르수스 호노룸'을 벗어난 전례 없는 도약의 부적절함을 인식한 그는, 자신의 "자천"에 대한 원로원의 승인을 정중하게 구했다. 그것은 허가되었다. 새로운 황제는 '임페리움'에 대한 변호사의 접근 방식을 가지고 있었지만,[149] 그의 외교 정책은 군부에 너무 신중하고 유화적인 것으로 판명되었다.[150] 1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그는 쿠데타로 암살당하고, 시리아 출신이자 세베루스 혈통의 황제 바리우스 아비투스 바시아누스로 대체되었다. 그는 일반적으로 그의 신과 그의 사제의 라틴화된 이름인 엘라가발루스로 알려져 있다.[151]
14세의 황제는 그의 고향 에메사에서 태양 산 신 엘라가발을 로마로 데려와 공식적인 황실 숭배에 들였다.[152] 시리아에서 엘라가발루스 숭배는 대중적이고 잘 정착되어 있었다. 로마에서는 그것은 외래의(일부 고대 자료에 따르면) 혐오스러운 동방의 새로운 것이었다. 서기 220년, 사제 엘라가발루스는 유피테르를 신 엘라가발루스로 대체하여 '솔 인빅투스'(정복되지 않은 태양)로 만들었고, 그 후 그의 황제 역할을 '폰티펙스 막시무스'로 소홀히 했다. 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그는 전차 운전사, 자물쇠 제조공, 이발사, 요리사를 포함한 총독들을 통해 그의 타락한 "도무스"에서 통치했다.[153] 적어도 그는 원로원과 군대 모두에게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여성적이고 기이한 인물로 여겨진 것 같다. 그는 18세에 친위대에 의해 암살되었고, '기록말살형'의 가장 완전한 굴욕을 겪었으며, 그의 젊은 사촌이자 그의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로 대체되었다. 그는 서기 235년 반란으로 살해될 때까지 13년 동안 통치했다.
세베루스 왕조의 멸망은 중앙 '제국(imperium)'의 붕괴를 의미했다.
6. 내전과 전제정
세베루스 왕조의 종말은 중앙 정부의 '임페리움' 붕괴로 이어졌다. 경제적으로는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했고, 고질적인 전염병이 뒤따랐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속주에서는 황제 자리를 두고 경쟁자들이 패권을 다투었으며, 여기서 실패한 이들은 자신의 속주에 독자적인 제국을 세우기도 했다. 대부분의 황제들은 로마에 거의 방문하지 않았고, 원로원과는 명목상의 관계만을 유지했다. 제국 차원의 군사적 대응이 부재하자, 외세는 침략과 약탈의 기회를 포착했다.
막시미누스 트락스 (재위: 235–238년)는 자신의 군대에 임금을 지불하기 위해 로마시 내 국가 신전들의 재원을 분리시켰다. '디부스'들의 신전들이 이 조치에 첫 번째 대상이었다. 이는 그의 후세에 있어 좋지 않은 조치였는데, 신격화를 부여하거나 부여하지 않는 것은 황제의 옳고 그름에 대한 공식적인 판단으로서 남아 있었지만, 국가의 신들의 신전을 벗겨내는 것은 더욱 더 큰 모욕을 야기하였다. 막시미누스의 행동은 불경함보다는 극심한 위기 상황에서의 필요성을 더 잘 보여주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그는 아내가 사망했을 때 그녀를 신격화했지만,[406] 원로원이 드물게도 그가 살해한 전임자를 신격화하고, 대대적으로 반발하였다.[407] 그의 후임자인 고르디아누스 1세는 잠시 재위했지만 성공적이었고 그가 죽은 뒤 '디부스'가 되었다. 그 후에 단기간의 군인 황제들의 계승이 이어졌다.
황제 숭배의 추가적인 발전은 필리푸스 아라부스 때까지 멈춘 것으로 보이며, 필리푸스는 고향 도시인 필리포폴리스에 아버지를 신으로 모신 조각상을 세웠고 어린 전임자인 고르디아누스 3세의 시신을 신격화를 위해 로마로 데려왔다. 필리푸스의 주화는 태양관을 쓴 모습으로 보여지며 (태양 숭배 또는 제국의 군주정에 대한 헬레니즘화 된 형태를 암시), 뒷면에는 베누스와 '데아 로마'에 대한 로마 신전이 나타나 있다.[408]
서기 249년, 필리푸스는 그의 친위대 사령관이었던 데키우스에게 살해당하고 제위를 찬탈당했다. 데키우스는 전통주의자이자 전직 집정관 및 총독이었다. 의심스러운 합법성을 띠는 제위를 이어받은 뒤, 데키우스는 자기 자신을 제국의 적법한 ‘복원자이자 구원자’ 및 제국의 종교라며 정당화하였다. 재위 초기에 그는 태양관을 쓴 디부스로서의 황제들의 담긴 여러 주화들을 발행했다.[409] 필리푸스, 세 명의 고르디아누스, 페르티낙스, 클라우디우스 등은 제외되었는데 아마 데키우스는 이들이 이러한 영예를 받을 가치가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410][411] 이집트 내 종교적 소요 사태에 대응하여, 그는 제국의 모든 신하들에게 '조상의 신들'에 대한 확인되고 허용받은 제물을 통하여 국가에 이익이 되도록 적극적 활동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불이익을 받을 것이라는 칙령을 반포하였는데, 로마를 위해 충성스러운 신하들이 주도하는 제물은 그들과 그들의 신을 로마인이고 로마의 신이라 정의하는 것이었다.[412] 유대인들만이 이 의무에서 제외되었다.[413] 데키우스의 칙령은 제물의 거부에 대해 프로콘술급에서 시행하고 처벌하도록 하게 했고 사형보다는 배교를 하도록 했다.[414] 이 칙령의 기한이 지나간 뒤, 기간의 연장이 이뤄졌고 얼마 안 되어 데키우스 본인이 죽음을 맞이 했다.[415]
발레리아누스 (재위 253–260년)는 기독교를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고집 세며 이기적인 비로마적 종교로 여겼고, 기독교 모임을 불법화하고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로마의 전통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게 끔 강제했다.[416][417] 그의 아들이자 공동 황제이며 엘레우시스 밀의종교의 신도 갈리에누스는 스스로를 전통적인 로마의 신들이자 군사적 행위의 미덕이라 여겼다.[418] 아우렐리아누스 (270–275년)는 병사들간의 화합 (''concordia militum'')을 호소하였으며, 제국과 국경을 안정화시키고 로마의 캄푸스 마르티우스에 팔미레네의 '솔 인빅투스'에 대한 공식적이며 헬레니즘 형태의 단일 종교를 설립하였다. 원로원은 그를 '세계의 구원자'(restitutor orbis) 및 '신이자 타고난 지배자'(deus et dominus natus)라며 떠받쳤지만 그는 친위대원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그의 후임자들인 그의 업적을 강화시켰으며 프로부스 (재위 276-282년)의 주화는 태양관을 쓴 그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고, 그의 풍부한 종류의 주화들에는 로마시 내 베누스와 '데아 로마'의 신전을 보여주고 있다.[419][420]
이러한 정책들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사두정치 때 절정에 이르렀다. 제국은 서방과 동방이라는 행정 블록으로 분리되었고, 이 각각은 예비 황제격인 카이사르(부제)의 도움을 받는 아우구스투스 (정제)가 위치했다. 속주들은 쪼개져 재분할이 이뤄졌으며 이러한 제국의 행정 체계는 규모, 범위, 세부적인 사항들에 대한 관심 사항 등에서 예외적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종교적으로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서기 284년 재위 때, 그는 '디부스' 안티누스를 기념하는 경기들을 열었다.[421] 그의 전임자들이 저항 세력들에 대해 박해와 강압을 가하듯이,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기독교 역사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라고 알려진 여러 차례의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락탄티우스에 의하면, 이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도무스'에서 불길한 창자점으로 시작되었고 그 후에 전 부대에 이 불길함을 달래는 희생 의식 명령이 알려지지 않은 시기에 떨어졌다.[422] 302년이 이 시기라 여겨지며 에우세비우스 역시도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군대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였다.[423] 역시나 막시밀리아누스의 순교 (295년)가 군 복무 거부에서 비롯한 것이었고, 마르켈루스' 순교 (298년)도 군 복무를 철회한 데에서 그런 것이었다. 법적으로, 이러한 행위는 군사적 반란이었고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칙령은 이러한 일들과 양심과 신앙에 대한 유사한 행위들 이후에 벌어진 것일 수 있다.[416] 알려지지 않은 수의 기독교인들이 전통적으로 반란자들과 반역자들에게 적용되는 극도의 가혹한 처벌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확장된 '콜레기아' 체계에서, 제국의 영예는 정제와 부제를 구별하고 그의 동료인 막시미아누스와 디오클레티아누스를 구분하였다.[424] 제국과 '임페리움'의 분할이 평화와 안정된 계승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제국의 단일성은 단 한 명에게 최고 권력과 지위를 부여가 필요하였다. 정교한 예법이 제국의 인물과 그 과정에 접근하는 데 둘러싸고 있었으며, 특히나 아우구스투스 (정제)는 독립적이고 별도의 인물로 만들어졌는데, 그에게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의 가장 가까운 측근들뿐이었다.[425]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공언한 보수주의는 '신성성을 띠는 군주'로서 개인의 상승에 대한 체계적인 구조를 거의 완전히 불가능케 하였다. 오히려 그는 제국의 신성한 질서에 대한 징후이자 신적 의지의 절대적 도구로서 정식적으로 황제 의식을 정교하게 만들었다. 이 생각은 스토아 철학과 아우렐리아누스 시기에 두드러진 태양신 숭배에서 분명하게 표현된 아우구스투스 시대 즉 이전 시기의 것이었다. 사두정치가 시작되기도 이전인 그의 재위 아주 초창기 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요비우스'의 '별칭'(signum)을 도입하고, 그의 부제는 '헤르쿨리우스'라는 칭호를 도입하였다. 사두정치 당시에, 이러한 칭호들은 늘어났지만, 명백한 신성성의 우선순위를 반영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한 가지 예로, 정의 신적인 '별칭'(signum)은 그의 부제의 별칭에 비해 낮은 것이었다. 이러한 신적 관계성은 신적 존재에 대한 '코메스' 또는 황제에 대한 '코메스'라고 하는 황제들의 군사적 전례를 따른 것일 거이다. 게다가, 신적인 '별칭'은 궁정의 송덕문 그리고 민간 예절이라고 하는 꽤나 좁은 맥락에서 나타난다. 일반적인 주화 또는 제국의 권력과 통일성을 상징하는 비인격적이고 거의 동질적인 추상물로 표현되는 사두정치의 조각상 등에서 그 외관이 들어나지 않는다.[426][427]
7. 배경과 선례
5세기 동안 로마 공화정은 주변의 신성하거나 반신적인 군주국들과 달리, 역사적 인물이나 살아있는 사람 누구에게도 공식적인 숭배를 하지 않았다. 로마의 전설적인 왕들이 있었지만, 공화정 로마인들은 도시 건설자인 로물루스를 신 퀴리누스와 동일시하면서도 공화정의 자유를 지켜나갔다. 마찬가지로 로마의 선조 영웅인 아이네아스는 유피테르 인디게스로 숭배받았다.[1] 로마인들은 인간이었던 신들과 반신들을 숭배했고, 모든 신이 인간에서 비롯되었다는 이론도 알고 있었지만, 공화정의 전통(모스 마이오룸)은 확고하게 보수적이고 반(反)군주적이었다. 귀족 계층은 거의 모든 정무직을 차지하고 원로원의 다수를 이루었으며, 자신들보다 우월한 인간을 인정하지 않았다. 어떤 시민도 공식적으로 신성하게 여겨지지 않았지만, 국가가 수여하는 명예[2](화관, 조각상, 왕좌, 행렬 등)는 신들에게도 적합한 신성성을 띤 행위들이었다. 훗날 황제들에게 국가적 숭배가 부여될 때도 이는 다른 영예와 마찬가지로 원로원의 칙령을 통해 이루어졌다.[3]
최고 영예 중 하나는 개선식이었다. 장군이 병사들에게 '임페라토르'로 선언받으면, 원로원은 그에게 개선식을 허락할지 결정했다. 개선식에서 개선 장군은 법에 따라 비무장한 병사들, 전쟁 포로, 전리품과 함께 카피톨리노 언덕으로 행진했다. 개선 장군은 고대 로마 왕들에게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지는 신성한 상징이 새겨진 전차를 탔고, 유피테르 카피톨리누스에게 승리를 봉헌하며 마무리했다. 일부 학자들은 개선 장군이 그날 왕이나 신을 모방하거나 심지어 신이 되었다고 보기도 하지만, 개선식의 수여 과정과 의식 자체가 그의 지위를 제한하는 역할을 했다. 그의 개인적인 야망이 무엇이었든, 그의 승리와 개선식은 로마 원로원, 민중, 신들에게 봉사하는 것이었고 이들의 동의를 통해서만 인정받았다.[4][5]
사적인 영역에서는 전통적으로 일부 인간에게 신성성이 부여되었다. 가정 내에서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숭배를 표했다. 모든 가주(paterfamilias)는 선조의 '게니우스'(수호령)를 지녔고, 가족과 노예들은 그를 숭배하며 그에게 맹세했다.[6] 예속된 평민(cliens)은 자신의 후원자(patronus)를 '지상의 유피테르'라고 부를 수 있었다.[7] 죽은 자들은 집단적으로나 개별적으로 지하 세계의 신들인 '마네스'로 여겨졌다. 그라쿠스 형제의 어머니 코르넬리아 아프리카나는 편지에서 자신이 죽으면 아들들이 자신을 부모의 신성성을 지닌 '데우스 파렌스'(deus parens)로 숭배해주기를 기대한다고 썼다. 이는 충실한 아들에게 기대되는 효심이었다.[8]
유력 가문들은 가문의 지도자에게 신적인 영향력과 준신적인 영예를 주장하기도 했다. 유명 로마인들의 데스 마스크('이마기네스')는 저택의 '아트리움'에 전시되었고, 가문 장례식에서 고인의 영적인 존재감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코르넬리아의 아버지이자 한니발에게 승리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데스마스크는 유피테르 신전에 보관되었고, 그의 비문(엔니우스 작)에는 그가 천상으로 승천했다고 기록되었다. 스키피오 사후 수 세기 동안, 그가 예지몽의 영향을 받았으며 유피테르의 아들이었다는 전승이 생겨났다.[9]
군사적 또는 정치적 인물을 구원자로 여기는 비공식적인 숭배 사례도 있었다. 기원전 70년대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에서는 충성파 로마인들이 프로콘술 메텔루스 피우스를 구원자로 환영하며, 세르토리우스가 이끄는 루시타니아 반란 진압 노력에 대해 "마치 신에게 하듯이" 향을 피웠다. 스페인에서 열린 행사에는 화려한 만찬과 함께, 개선 장군의 '토가 픽타'(불법적 착용)를 입은 메텔루스에게 월계관을 씌우는 빅토리아 여신의 기계 장치 조각상이 등장했다. 이는 재무관[10] 가이우스 우르비누스가 기획한 사적인 행사였으며, 로마 정부의 공식 지침은 아니었다. 메텔루스는 이를 즐겼지만, 연장자들과 독실한 동시대인들은 이를 거만하고 참을 수 없는 것으로 여겼다.[11][12] 토지 개혁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반대파에게 살해된 후, 지지자들은 "마치 신들의 성소에 방문한 것처럼" 그들의 조각상에 '엎드리고' 매일 공물을 바쳤다.[13]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튜튼족을 격퇴하자, 평민들은 자신들의 게니우스와 함께 그에게 음식과 음료를 바쳤고, 그는 로물루스와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에 이어 로마의 세 번째 설립자로 불렸다.[14] 기원전 86년에는 교차로의 성소에 마리우스의 조카이자 살아있는 인물인 마르쿠스 마리우스 그라티디아누스의 조각상에 향과 포도주 공물이 바쳐졌는데, 그는 법무관 시절 화폐 개혁으로 로마 경제 위기를 완화시켜 큰 인기를 얻었다.[15]
로마가 그리스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로마 고위 대표자들은 그리스에서 헬레니즘 시대의 지배자들처럼 신성한 영예를 받았다. 이는 그리스 폴리스들이 외부 세력에 충성을 나타내는 확립된 방식이었다. 이러한 숭배는 도시가 아폴론이나 다른 신들에게 복종하고 존경을 표하듯 왕에게 복종하고 존경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오니아의 그리스 도시들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직후 그리스를 지배했던 스파르타 장군 리산드로스를 숭배했는데,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이는 그리스 역사상 통치자 숭배의 첫 사례였다. 같은 시기 다른 인간 숭배 사례도 있었지만, 아게실라오스 같은 일부 지도자들은 이를 거부했다.[16] 헤라클레이아의 클레아르코스는 제우스처럼 차려입고 스스로 신이라 주장했지만, 헤라클레이아인들이 그를 살해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이소크라테스는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가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면 신이 되는 것 외에는 얻을 것이 없다고 했으며, 암피폴리스와 아테네의 한 비밀 조직은 정복 없이도 그를 숭배했다. 필리포스는 신처럼 차려입은 자신의 조각상을 올림포스 12신의 13번째 신으로 설치하기도 했다.[17]
그러나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왕의 신성성을 표준 관행으로 만든 것은 필리포스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었다. 이집트인들은 그가 페르시아인들을 몰아내자 그를 파라오이자 신으로 받아들였고, 다른 민족들도 그가 자신들을 정복할 때마다 각자의 전통에 따라 신 또는 반신적 지배자로 받아들였다. 기원전 324년, 그는 그리스 도시들에 자신을 신으로 인정하라고 요구했고, 도시들은 무관심하게 따랐으나[18] 다음 해 그의 죽음 소식을 듣고 라미아 전쟁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들인 디아도코이들은 알렉산드로스에게 제물을 바치고, 스스로 왕이라 칭하기 전에 신의 지위에 올랐다. 그들은 그리스인들이 신이나 도시 상징을 새겼던 주화에 자신들의 초상을 넣었다. 알렉산드로스 신격화 18년 뒤 아테네인들이 데메트리오스 폴리오르케테스와 동맹을 맺었을 때, 그들은 아테나 여신과 함께 파르테논에 그를 모셨고, 다른 신들은 귀 기울이지 않지만 현존하는 신으로서 자신들의 말을 듣는다며 찬송가를 불렀다.[19]
알렉산드로스와 동시대인인 에우헤메로스는 제우스와 다른 그리스 신들이 알렉산드로스처럼 신이 된 필멸자들이었다는 내용의 가상 역사서를 썼고, 엔니우스는 이를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시대에 라틴어로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셀레우코스 제국은 신성성을 계속 주장했는데, 이는 페르시아와 이집트의 신성한 왕 전통의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파라오로서 이집트 다신교 및 그리스와 별도의 숭배 방식을 가졌다. 모든 그리스 왕조가 같은 주장을 한 것은 아니었으며,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본토를 지배했던 데메트리오스의 후손들은 신성성이나 알렉산드로스 숭배를 주장하지 않았다.
로마 공화정이 끝나기 몇 십 년 전부터 로마 지도자들은 정기적으로 막대한 권력을 행사했다. '모스 마이오룸'은 정무관들이 공동으로 짧은 기간 동안 직무를 수행하도록 요구했지만,[30] 이 새로운 지도자들은 스스로 권력을 잡고 수년간 유지했다.
이들은 종종 특별한 영예를 받았다. 개선식은 점점 화려해졌고, 로마 최초 내전의 라이벌이었던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술라는 각자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를 건설했다. 술라는 로마에서 자신을 기념하는 경기를 열었고, 마리우스에 대한 비공식적 숭배는 이미 언급되었다. 다음 세대인 폼페이우스는 키르쿠스 경기에 갈 때 개선식 장식을 착용하는 것이 허용되었다.[31] 이들은 또한 신들과의 특별한 관계를 주장했다. 술라의 후원자는 베누스 펠릭스였고, 그는 권력 정점에서 이름에 펠릭스를 더했다. 그의 반대자 마리우스는 자신이 운명을 지녔고 보통 사람은 자신을 죽일 수 없다고 믿었다. 폼페이우스는 베누스의 개인적인 총애를 주장하며 그녀를 위한 신전을 세웠다. 군주제를 목표로 신이 되려 했던 최초의 로마인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였다.
카이사르는 출생과 관직을 통해 신들과의 개인적인 연관성을 주장할 수 있었다. 그는 아이네아스와 그의 어머니 베누스의 후손이라고 주장한 율리우스 씨족 출신이었다. 숙모 율리아에 대한 찬사에서 그는 간접적으로 안쿠스 마르키우스와 로마 왕들, 더 나아가 마르스의 후손임을 주장했다.[32] 십대 시절 마리우스는 그를 유피테르의 특별 사제인 '플라멘 디알리스'로 임명했으나 술라가 취소시켰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로마 최고 사제인 '폰티펙스 막시무스'가 되어 고대 왕들의 종교적 의무 대부분을 수행했다.[33] 그는 20대를 동방의 신성 군주국에서 보냈고 비티니아와 가까웠다.[34] 그는 권력 상승 과정에서 이러한 연관성을 이용했지만, 경쟁자들 이상은 아니었다. 기원전 69년 숙모 율리아의 장례식 추도문에서 그는 그녀가 로마 왕들의 후손이라며 자신도 그렇다고 암시했고, 그녀가 마리우스의 아내임을 상기시켜 자신이 몇 안 되는 마리우스 가문의 생존자임을 강조했다.
기원전 45년 경쟁자들을 제압하고 로마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자 그는 더욱 자신의 특별함을 드러냈다. 내전 중 기원전 49년부터 그는 동방에서 자신을 신이자 구원자로 칭하게 했고, '클레오파트라 테아'로 불린 프톨레마이오스 이집트 왕조와 친밀했다. 그는 원로원을 자신의 지지자들로 채웠는데, 이들 중 일부만이 옛 로마 방식을 따랐고 일부는 이탈리아 출신도 아니었다. 카이사르가 권력과 부를 로마에서 동방, 아마도 알렉산드리아나 일리움으로 옮기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35]
내전 중 그는 수호신 베누스에게 파르살루스 전투 승리를 기원하며 베누스 빅트릭스 신전을 약속했지만, 기원전 46년에는 자신의 조상, 로마인의 어머니, 철학 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여신 속성을 결합
7. 1. '디부스', '데우스', '누멘'

'디부스'(Divus)는 신격화된 황제를 칭하는 용어로, 그 기원은 로마의 전통적인 조상 숭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로마인들은 파렌탈리아와 같은 중요한 가정 행사에서 조상의 영혼인 '마네스'(Manes, 지하세계의 신들) 또는 '디 파렌테스'(Di Parentes, 신적인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디부스' 숭배는 이러한 전통과 유사한 측면을 지닌다.[179][180] 하지만 '디 파렌테스'의 권한은 제한적이었는데, 죽은 인간은 일반적으로 고위 신들이 지닌 신성한 힘, 즉 '누멘'(Numen)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179][180]
황제가 죽는다고 해서 자동으로 '디부스'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디부스' 칭호는 특별한 영예로서, 원로원에서 신격화 여부를 논의하고 투표를 통해 결정해야만 부여될 수 있었다.[181][182] 적절한 의식과 제물을 통해 '디부스'가 되면, 그는 천상의 신들에게 받아들여지지만, 신들 자신보다는 낮은 존재인 '코일리콜라'(coelicola, 천상의 거주자)로 여겨졌다.[183] 일반 대중들은 '디부스' 아우구스투스가 유피테르 신에게 직접 환영받았을 것이라고 믿기도 했다. 반면, 세네카는 그의 풍자극 '호박화'(Apocolocyntosis divi Claudii)에서 신격화된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갑작스러운 등장이 올림포스 신들에게 혼란을 일으키는 모습을 묘사하며, 신들이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 장면을 통해 '디부스'의 지위를 비꼬았다. 이는 '디부스' 클라우디우스를 단순히 죽은 인간이자 우스꽝스러운 황제로 묘사한 것이다.[184] 신격화된 황제들의 형상은 신성불가침으로 여겨졌고 그들에 대한 의식 역시 신성성을 띠었지만,[185] '디부스'의 지위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거나 폐기될 수 있었고, 때로는 강화되거나 잊혀지기도 했다.[186] 아우구스투스와 트라야누스는 다른 황제들보다 오랫동안 이상적인 '디부스'로 여겨졌으며, '훌륭한' 황제들에 대한 숭배는 제국 후기까지도 비교적 잘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살아있는 황제에 대한 숭배는 '디부스'와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살아있는 황제의 막강한 권력은 제국의 방대한 국가 기관들을 통해 행사되었다. 황제가 제국의 '파테르 파밀리아스'(가부장)로 인정받으면, 그는 자연스럽게 제국의 모든 계층으로부터 '게니우스'(Genius, 수호신 또는 본질) 숭배를 받을 자격을 얻게 되었다. 살아있는 황제의 '누멘'에 대한 숭배는 또 다른 문제였는데, 이는 황제를 신성성을 띤 군주로 직접 표현하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의 '누멘'에 대한 숭배 제안이 처음 나왔을 때 제국의 반응은 매우 조심스러웠다.[187] 시간이 지나면서 살아있는 황제를 공개적으로 '누멘 프레젠스'(numen praesens, 현존하는 신성)라고 부르는 경우도 생겨났다.[188]
황제 숭배에서 '데우스'(Deus, 신), '디부스', '누멘' 사이의 관계는 다소 모호하게 나타난다. 이는 황제 숭배 자체가 명확한 신학 체계보다는 실용적이고 존경을 표하며 때로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를 회피하려는 제국의 해결책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일 수 있다. 즉, 상황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는 폭넓은 용어들이 사용된 것이다. 비어드(Beard) 등 일부 학자들은 로마의 황제 숭배가 가진 핵심적인 특징 중 하나로, 헤라클레스, 아이네아스, 로물루스와 같은 반신적 영웅들처럼 필멸자도 충분한 '누멘'을 통해 자신의 지위를 신들의 영역으로 끌어올릴 수 있지만, 동시에 로마 전통주의자들의 관점에서는 여전히 필멸자로 남아 있다는 역설적인 인식에 기반한다고 설명한다.[189]
7. 2. 사크리피키움

제물을 바치는 의식(사크리피키움)은 공직에 대한 서약, 조약의 맹세, 사업 계약 및 혼인에 대한 준수 등 공공과 사적 영역의 계약을 형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사크리피키움'에 참여하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 행위를 넘어, 자신의 서약과 그 가치를 더 넓은 공동체에 알리고 인정받는 과정이었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데키우스 황제 시절에는 모든 신민에게 강제적으로 요구되기도 하였다.[190] 리비우스는 군사적, 민간적 재앙이 점술의 오류(비티움), 적절한 희생 의식의 소홀, 그리고 '외국' 종교와 수페르스티티오의 불경스러운 확산 때문이라고 보았다.[191] 로마의 종교법은 특정 상황에서 특정 신들에게 어떤 희생 의식을 요구하는지에 대해 상세히 규정하였다.[192]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에는 아르발레스 사제단이 황제 일가의 안녕을 기원하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은 황제 일원의 생일이나 즉위 기념일, 또는 반란 음모 진압과 같은 특별한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여러 신전에서 로마의 국가 신들에게 제물을 바쳤다. 특히 매년 1월 3일에는 연례 서약을 봉헌하는 의식을 치렀는데, 만약 신들이 약속한 기간 동안 황가를 안전하게 지켜주었다면 전년에 약속했던 제물을 바쳤고, 그렇지 않다면 트라야누스 황제가 사망한 후의 서약 의식처럼 제물 봉헌을 보류하기도 했다.[193]
폼페이의 사례를 보면, 살아있는 황제의 '게니우스'에게 황소를 바치는 것이 당시 황제 숭배에서 일반적인 행위였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포도주, 케이크, 향과 같은 비교적 가벼운 제물들도 바쳐졌으며, 이러한 경향은 후기 제국 시대로 갈수록 더욱 두드러졌다. 신격화된 황제(디비)나 살아있는 황제의 '게니우스'에게 바치는 제물은 국가 신들에게 바치는 것과 동일한 종류였으며, 이러한 점은 로마 당국이 기독교인들에게 황제에게 제물을 바치도록 요구할 때, 상대적으로 덜 부담스러운 방식으로 참여할 여지를 제공했을 수도 있다.[194][195]
7. 3. 점복, '이라 데오룸', '팍스 데오룸'
고대 전통에 따르면, 선임 정무관들은 제물을 바치는 신성한 장소 (templum|템플룸la)에서 자연의 신호들을 관찰함으로써 신의 의지를 읽어내는 아우구르를 통해 계획한 행동들에 대한 신의 의견을 물었다.[196] 정무관들은 법정 과정을 중단하거나 뒤집기 위해 점복에 관한 자신들의 권한 (ius augurum|이우스 아우구룸la)을 사용할 수가 있었지만, 아우구르의 관찰과 조언 하에 그들의 결정을 근거로 해야만 했다. 키케로 같은 경우, 이러한 관례가 아우구르를 공화정 후기 시절에 가장 강력한 권위 기관으로 만들게 했다.[197][198]공화정 후기에 점복은 점차 pontifex|폰티펙스la 사제단들의 감독 하에 있게 되었다. pontifex|폰티펙스la는 쿠르수스 호노룸 과정으로 이어지던 성직-관료였다. pontifex maximus|폰티펙스 막시무스la 직위는 마침내 사실상의 집정관과 동일한 직위가 되었다.[199] 레피두스가 사망했을 당시, pontifex maximus|폰티펙스 막시무스la라는 그의 직위는 아우구스투스에게 넘어갔는데, 그는 국가의 신탁들 (시불라의 서 포함)에 대한 성직적 권한을 차지하였고, 감찰관으로서 권력으로 허가받지 않은 신탁들을 억누르는 데 사용했다.[200] 옥타비아누스의 아우구스투스라는 명예직은 신의 의지의 표현이라는 그의 업적을 보여주는데, 후기 공화정의 불경함이 천상의 무질서와 분노(ira deorum|이라 데오룸la)를 불러일으켰고, 신의 명령에 대한 그의 순종은 신의 의지를 담은 평화 (pax deorum|팍스 데오룸la)를 가져왔다는 것이었다.
7. 4. 게니우스 및 가문 숭배
'''모스 마이오룸'''(mos maiorumla, 조상의 관습)은 로마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개념이었다. 이는 가정의 아버지이자 가문 재산의 주인인 '''파테르 파밀리아스'''(pater familiasla)에게 거의 군주에 가까운 가정 내 권위를 부여했다. 파테르 파밀리아스는 가족과 지역 사회에 대한 의무를 지녔으며, 가문의 수호신인 '''라레스'''(Laresla)와 '''페나테스'''(Penatesla)에 대한 제사 등 종교적 의무를 수행해야 했다. 그의 지위는 공화정 시대의 정무관처럼 선출되거나 임기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세습되는 혈통적 권위였다. 그의 가족 구성원, 특히 노예나 해방 노예는 그 보답으로 파테르 파밀리아스의 '''게니우스'''(Geniusla)를 숭배할 의무가 있었다.[452][453]'게니우스'는 개인 또는 그가 속한 씨족('''겐스''', gensla)의 본질적인 생명력과 정신을 의미했다. 이는 종종 뱀이나 영원히 젊은 소년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예를 들어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속한 '율리우스'(Juliila) 가문에도 그들만의 게니우스가 있었다. 파테르 파밀리아스는 자신이 받아들인 사람에게 자신의 이름과 함께 게니우스의 일부를 나누어 줄 수 있었고, 이는 가정 내 제사에서의 역할, 의무, 명예 등을 포함했다. 카이사르의 양자였던 옥타비아누스는 이러한 방식으로 카이사르의 게니우스, 재산, 명예 등을 물려받았다.[454] 특히 황제의 게니우스는 매우 강력한 힘을 지닌 것으로 여겨졌으며, 황제의 행동을 통해 신들의 뜻이 드러난다고 믿었다.[455] 기원전 30년부터는 옥타비아누스(훗날 아우구스투스)의 게니우스에 대한 제물 봉헌이 공공 및 사적인 연회에서 의무화되었고, 기원전 12년부터는 살아있는 황제의 게니우스를 두고 국가적인 맹세를 하게 되었다.[456]
로마의 파테르 파밀리아스는 집안의 작은 제단(라라리움)과 화로 앞에서 매일 '라레스'와 '페나테스', 그리고 조상신인 '디 파렌테스'(Di Parentesla) 또는 '디비 파렌테스'(Divi Parentesla)에게 제사를 지냈다.[457] 모든 화로의 여신이자 국가의 공식적인 화로를 주관하는 베스타 여신은 이처럼 시민들의 공적 의무와 사적 의무를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베스타 여신에 대한 국가 제사는 베스타 신전 근처의 국가 시설에서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 최고 제사장)가 주관했다. 아우구스투스가 기원전 12년에 폰티펙스 막시무스가 되자, 그는 팔라티노 언덕에 있는 자신의 저택을 베스타 여사제들에게 기증했다. 그의 페나테스는 여전히 그의 집안 신으로 그곳에 남았고, 곧 라레스도 합류했다. 이 기증을 통해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가문 숭배를 신성한 베스타 여사제들과 로마의 신성한 화로에 연결시켰으며, 자신의 집('''도무스''', domusla)을 국가 전체와 그 주민들에게 상징적으로 확장시켰다. 그는 또한 전통적으로 플레브스(평민)들이 주로 참여했던 콤피탈리아(Compitaliala) 축제를 장려하고 확대했는데, 이 축제의 라레스는 이후 '라레스 아우구스티'(Lares Augustila), 즉 '아우구스투스의 라레스'로 알려지게 되었다.[458][459][460][461][462]
로마 군대에서도 황제 숭배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로마 시민으로 구성된 군단병들은 마리우스 시대의 군사 전통을 이어받아, 황제의 안녕을 위해 유피테르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국가, 지역, 개인의 신들을 정기적으로 숭배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황제 개인과 그의 가족('''파밀리아''', familiala)에 대한 숭배가 황제의 즉위 기념일, 생일, 매년 충성 맹세 갱신 행사 등에서 점차 중요해졌다. 현직 황제의 흉상은 군단의 신성한 장소에 보관되었고, '이마기니페르'(imaginiferla)라는 특정 병사가 이를 관리했다. 세베루스 왕조 초기에는 군단들이 국가의 신들, 신격화된 황제들('''디비''', divila), 현직 황제의 '''누멘'''(numenla, 신성한 힘), 게니우스, '도무스'(또는 파밀리아) 등을 숭배했고 '주둔지의 어머니'(mater castrorum)로서 황후에 대해서도 특별한 숭배를 하였다. 이 시기 무렵, 미트라교(Mithrasla) 숭배가 군대에서 큰 인기를 끌었는데, 이는 미트라를 솔 인빅투스(Sol Invictusla) 및 스토아 학파의 일원론적 신관과 연결하여 군대의 콩코르디아(질서, concordiala)와 충성심의 기반을 다지는 혼합주의적 황제 숭배의 토대를 마련해주었다.[463][464][465]
7. 5. 군대에서 역할
- -|]]|thumb|right|미트라교 숭배는 점차 황제 태양 일원론에 흡수되었다. 그림 왼쪽에는 솔 인빅투스가 있다. 이 석판은 부유한 황실 노예가 의뢰했다. 바티칸 박물관.]]
로마 시민으로 구성된 군단병들은 마리우스의 군사 전통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황제의 안녕을 위해 유피테르를 숭배했으며, 국가, 지역, 개인의 신들에게 정기적인 숭배를 바쳤다. 황제의 즉위, 기념일, 연례 서약 갱신 시에는 일반적으로 황제와 familia|파밀리아la(가족)에 대한 숭배가 이루어졌다. 통치하는 황제의 흉상은 그 목적을 위해 군단 징표 신사에 보관되었으며, 지정된 군사 imaginifer|이마기니페르la(상이병)가 이를 관리했다. 초기 세베루스 왕조 시대에 이르러 군단은 국가 신, 황실 divi|디비la(신격화된 황제), 현 황제의 numen|누멘la, genius|게니우스la, domus|도무스la(또는 familia|파밀리아la)를 숭배했으며, "진영의 어머니"로서 황후에 대한 특별한 숭배를 바쳤다. 이 무렵, 미트라교 숭배는 군대에서 매우 인기를 얻었고, 미트라를 솔 인빅투스 및 스토아 일원론으로 흡수하여 군사적 concordia|콩코르디아la와 충성의 초석이 되는 혼합주의적 황제 숭배의 기반을 제공했다.[212][213][214]
7. 6. 재단, 신전, 사제단
황제 숭배 신전은 '카이사리움' (라틴어) 또는 '세바스테이온'(그리스어)으로 알려져 있다. Fishwick의 분석에서, 로마 정부의 '디부스'(신격화된 황제)들에 대한 숭배는 신전 건축과 관련이 있고, 살아있는 황제의 '게니우스'(수호 영혼)에 대한 숭배는 그 황제의 재단(arae)과 관련성을 띤다고 하였다.[466] 황제의 형상 및 신전 내 그 위치 등은 인물 그 자체와 속성, 신성성 및 인간 계층에서의 위치에 대한 관심을 집중시켰다. 황제 숭배에 대한 물질적인 표현의 지출은 막대했으며 3세기의 위기 때에야 비로소 억제되었다. 알려진 바로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통치 이후로는 국가 차원의 신격화된 황제를 위한 새로운 사원이 건설되지 않았다고 한다.[466]
신격화 된 황제들인 '디부스'와 현직 황제의 '게니우스' 등은 별개의 의식과 사제단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황제 직접 본인이 국가의 신들, '디부스' 및 '게니우스' 등 숭배 집단의 사제가 될 수도 있었다. 후자의 경우 황제의 '게니우스'를 그 소유자의 천성이면서도 존경과 숭배의 대상으로서는 분리할 수 있는 것으로 묘사하였는데, 이는 황제, 원로원, 로마 인민 등의 '게니우스'를 접목시켜 행운 ('포르투나'), 평화 ('팍스'), 승리 ('빅토리아') 등과 같은 사상 및 이상을 인격화 시킨 것을 숭배하는 것과 형식상으로 일치하였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관용('클레멘티아')이라는 덕목과 자신의 관련성을 보여줌으로써, 한 개인의 특성을 본인의 선조이자 수호신인 베누스와 연관시켜냈다.
사제들은 자신들의 '데우스'(신)에 대한 외관과 특성 등을 드러냄으로써 본인들의 기능을 특징적으로 그리고 정중하게 확인시켜주었다. 황제 숭배 사제들의 임무는 종교적이면서 정무적인 것이었는데, 여기에는 허용된 황제의 초상, 조각상, 제물 등에 대한 공급, 정기적인 연간 숭배 확립, 공공사업과 황제 주최 경기 ('루디') 및 인가를 받은 '무네라'의 개관 등이 있었다. 실질적으로, 제국의 전역에 있는 사제들은 황제들의 예외적인 선물, 권력, 카리스마 등을 재탄생시키고, 설명해내며, 찬양하는 일을 맡았었다.[467]
아우구스투스는 종교 개혁의 일환으로서, '비쿠스'(지역, 지방)의 라레스에 헌신하는, 콤피탈리아 행사와 사제단을 재건, 재조직, 확장시켜내어 본인의 라레스 (또는 대중들의 후원자로서 그의 게니우스에 대한)에 대한 숭배로 포함시켜냈다. 이에 따라, 라레스 콤피탈레스는 라레스 아우구스티로도 알려져 있다. 티베리우스는 사망하여 신격화 된 황제 숭배에 전념하는 소달레스 아우구스탈레스라는 특별 사제단을 만들어냈다. 이 사제단 및 콤피탈리아 숭배 집단과 황제 일가의 관계 등은 황제 숭배 그 자체만큼이나 오랜 기간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468]
참조
[1]
문서
It is unclear whether the worship of Aeneas as Jupiter Indiges was an official (and thus, state sponsored) cult.
[2]
문서
As opposed to offices
[3]
문서
Gradel, pp. 32–52, as is much of this section.
[4]
문서
A summary of disparate viewpoints regarding the status of the triumphator (and thus the meaning of the Triumph) can be found in Versnel, 56–93
https://books.google[...]
[5]
문서
Beard, 272-5: the very few accounts of a public slave (or other figure) who stands behind or near the triumphator to remind him that he "is but mortal" or prompts him to "look behind" are open to a variety of interpretations; moreover, they are post-Republican. Nevertheless, they imply a tradition that the triumphator, whatever his kingly appearance, temporary godlike status or divine associations, was publicly reminded of his mortal nature. There is no reason to assume this an innovation of Empire.
[6]
문서
Taylor, p.67
[7]
문서
Gradel, p.46, citing Plautus – this is Plautus' addition to the Greek originals; Gradel also suggests that the ''[[corona civica]]'' began as an acknowledgement by A.A. that N.N. had saved his life – as a god might – by crowning N.N. with the leaves of Jupiter's tree.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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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ylor, p. 55
[9]
문서
Walbank, 120-37
https://books.google[...]
[10]
문서
most likely an [[aide-de-camp]] of Metellus, and not a provincial official.
[11]
문서
Taylor, p.48; she cites [[Macrobius]], ''Saturnalia'', 3.13.9, which is largely an otherwise unknown quotation from [[Sallust]]; ''quasi deo supplicabatur'' is from Sallust. The year is uncertain, possibly 77 BC, after a battle at Saguntum.
[12]
문서
This incident is also mentioned by [[Valerius Maximus]], ''Facta et dicta memorabilia'' 9.1.5
[13]
문서
Vout, 119: citing Plutarch, Gaius Gracchus, 10, 18.2
https://penelope.uch[...]
[14]
문서
Taylor, p.48, citing Plutarch's ''Marius'', 27
[15]
문서
Gradel, 51, citing Cicero, ''De officiis'', 3.80
http://www.stoics.co[...]
[16]
문서
When the messengers of [[Thasos]] announced to him that the city had declared him a god, he told them that if they could make men into gods, they should make ''themselves'' into gods; he would then believe that they could make him into one. Taylor, p. 12, citing Plutarch, ''Moralia'', 210d.
[17]
문서
Taylor, pp. 12–13
[18]
문서
The Spartan decree was "Since Alexander wishes to be a god, let him be a god"; at Athens, [[Demades]] argued against provoking Alexander over this: don't protect Heaven and lose the earth; [[Demosthenes]] said "Let him be the son of Zeus – and Poseidon too, if he likes."
[19]
문서
[[Athenaeus]]
https://books.google[...]
[20]
문서
Taylor, pp. 40–41, citing Polybius 30.16, Livy, 45.44; also, as a parallel case, [[Corpus Inscriptionum Latinarum|CIL]] VI 374, from the [[Laodicea (Arcadia)|Laodicea]]ns to the Roman people.
[21]
문서
In general, see Price, 48; Fishwick, Vol 1, 1, 6–20; for details, Taylor, Chapter 2 and 3, ''passim''. Attested statuary of Roman magistrates in Rome may well have been largely commissioned by Greek allies, unaware of the potential for controversy aroused by public display of "Hellenised" images of the Roman military aristocracy. See Christopher Hallett, ''The Roman Nude'',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https://books.google[...]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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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ylor, p. 8
[23]
문서
Taylor, Appendix II, citing [[Athenaeus]], Book 10, ''passim''.
[24]
문서
Taylor, pp. 9–10, citing [[Diodorus]], 16.20; [[Cornelius Nepos]], ''Timoleon'' 5, [[Plutarch]], ''Moralia'' 542 E, ''Dion'' 46 and ''Timoleon'' 36,39; Timoleon is the first Greek whose birthday is recorded.
[25]
문서
Mark H. Munn, ''The School of History: Athens in the Age of Socrates'', pp. 11,172
[26]
문서
Chiefly Zeus, as identified with Ammon, and his ancestors [[Achilles]] and [[Hercules]].
[27]
문서
Taylor, Appendix 2; this was the ritual in which [[Callisthenes]] declined to take part, one of the offenses for which Alexander killed him.
[28]
문서
Taylor, 31-2. A papyrus survives which has a man swearing by the ''daimones'' of Ptolemy II and his queen.
[29]
문서
Taylor, p. 33
[30]
문서
Taylor, p. 57
[31]
문서
Taylor, p.57, citing Cicero, ''To Atticus'', 1.18.6; [[Velleius Paterculus]], 2.40.4. He only exercised the privilege once, and was attacked for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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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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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문서
Taylor, 58–60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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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Nicomedes IV of Bithynia]] was intimately familiar with Caesar, or so rumor sang about the streets of Rome. [[Suetonius]], ''Divus Julius'' 49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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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aac, B., (2006), "The invention of racism in Classical antiquity", Princeton University Press, p. 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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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ēmitheos
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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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yl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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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rcus (buil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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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esar's "kingly" stat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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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aves formally adopted the name of the master who freed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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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ke Commodus, he participated in [[Chariot racing|chariot races]] and beast-fights, with minimal risk to him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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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ing Philostratus, V. Soph, 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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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s of careful negotiation had preceded his "spontaneous" acclamation as ''imperator'' by the milit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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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o disapproves of Macrinus' equestrian status, but not his integrity or manner of govern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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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문서
See also (with due caveat) ''Historia Augusta'', ''Vita Taciti'', XIII 1–2
[169]
서적
[170]
문서
II.6.10.1–4
[171]
문서
II.8.1.8
[172]
서적
[173]
서적
[174]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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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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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Brent
[177]
서적
Fishwick
[178]
서적
Gradel
[179]
서적
Gradel
[180]
서적
Fishwick
[181]
서적
Pr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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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Pr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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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Javier A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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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shw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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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Beard ''et 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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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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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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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
서적
Beard ''et al''
[193]
서적
Gradel
[194]
서적
Gradel
[195]
서적
Price
[196]
서적
Beard et al
[197]
서적
Br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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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Beard ''et al''
[199]
서적
Br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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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Br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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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Gradel
[202]
서적
Severy
[203]
서적
Beard ''et 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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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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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Br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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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Br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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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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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Grad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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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Lo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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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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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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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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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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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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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xon & Rodg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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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harf, R., Zu einigen daten der Kaiser Libius Severus und Maiorian, Heidelberg University (pdf)
http://www.rhm.un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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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Pr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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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Price
[241]
논문
Honours and Worship: Emperors, Imperial Cults and Associations at Ephesus (First to Third Centuries C.E.)
[242]
간행물
Tacitus, Annals, 6.8
Gradel
[243]
기타
Roman (and Greek) justifications of Rome's hegemony
[244]
간행물
Price
[245]
간행물
Harland
[246]
문서
Brent
[247]
서적
1998
[248]
서적
[249]
서적
[250]
서적
[251]
서적
[252]
서적
[253]
문서
유피테르 인디게스로서 아이네아스에 대한 숭배가 공식적인 숭배 (이에 따른 국가의 후원을 받았는가에 대해)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254]
문서
해당 직위에 대응하는 정도
[255]
서적
[256]
웹사이트
개선 장군의 지위 (그리고 개선식의 의미)에 대해서 이질적인 관점들의 요약
https://books.google[...]
[257]
서적
개선 장군의 뒤 또는 근처에서 그에게 "단지 인간에 불과하다"라고 상기 시켜주거나 "뒤돌아 보거라"라고 유도하던 국가의 노예 (또는 다른 형태로서)들에 대한 아주 적은 기록들은 다양한 해석들이 열려 있다. 게다가 이 기록들은 공화정 이후의 것들이다. 그럼에, 이 기록물들은 개선 장군은 왕과 같은 외관, 잠깐의 신과 같은 지위나 신성성의 연관성 등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간에 그의 필멸자로서의 성격을 공공연하게 상기되었다. 이런 방식이 제정 시대에 새롭게 도입된 것이라 추측할 이유는 없다.
[258]
서적
[259]
서적
citing Plautus – this is Plautus' addition to the Greek originals; Gradel also suggests that the ''[[corona civica]]'' began as an acknowledgement by A.A. that N.N. had saved his life – as a god might – by crowning N.N. with the leaves of Jupiter's tree.
[260]
서적
[261]
서적
https://books.google[...]
[262]
문서
아마 메텔루스 [[전속부관]]으로, 속주의 관료는 아니었을 것이다.
[263]
서적
Taylor는 [[살루스티우스]] 외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용문인 [[마크로비우스]]의 'Saturnalia' 3.13.9를 인용하였다. 'quasi deo supplicabatur'는 살루스티우스한테서 비롯한 것이다. 정확한 시기는 불분명하며 사군툼 전투가 벌어진 뒤인 기원전 77년로 추정한다.
[264]
문서
이 사건은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의 'Facta et dicta memorabilia' 9.1.5에서도 언급된다
[265]
서적
citing Plutarch, Gaius Gracchus, 10, 18.2
https://penelope.uch[...]
[266]
서적
플루타르코스의 '마리우스'편, 27 인용
[267]
서적
citing Cicero, ''De officiis'', 3.80
http://www.stoics.co[...]
2009-08-02
[268]
문서
[[타소스]]의 전령들은 자신들의 도시가 그를 신이라 선포하였다는 사실을 알리자, 그는 그들에게 당신네들이 인간을 신으로 만들 수 있다면 자기 자신들도 신으로 만들어야만 한다고 하였다. 그 뒤에 그는 그들이 그를 신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 Taylor, p. 12, 플루타르코스의 '모랄리아' 210d 인용.
[269]
서적
[270]
문서
스파르타의 방침은 "알렉산드로스가 신이 되길 원했기에 그가 신이 되도록 하라"라는 것이었으며, 아테네의 경우 [[데마데스]]는 "신을 지키지 말고 현세를 잃지 말라" 라며 이 문제로 알렉산드로스를 자극하기 말 것을 주장했고, [[데모스테네스]]는 "그가 제우스의 아들이 되도록 둘 것이며 그가 괜찮다면 포세이돈의 아들도 되게 하라"라고 하였다."
[271]
웹사이트
[[아테나이오스]]
https://books.google[...]
[272]
서적
citing Polybius 30.16, Livy, 45.44; also, as a parallel case, [[Corpus Inscriptionum Latinarum|CIL]] VI 374, from the [[Laodicea (Arcadia)|Laodicea]]ns to the Roman people.
[273]
서적
In general, see Price, 48; Fishwick, Vol 1, 1, 6–20; for details, Taylor, Chapter 2 and 3, ''passim''. Attested statuary of Roman magistrates in Rome may well have been largely commissioned by Greek allies, unaware of the potential for controversy aroused by public display of "Hellenised" images of the Roman military aristocracy. See Christopher Hallett, ''The Roman Nude'',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https://books.google[...]
[274]
서적
[275]
서적
Appendix II, citing [[Athenaeus]], Book 10, ''passim''.
[276]
서적
[[디오도로스]]의 16.20, [[코르넬리우스 네포스]]의 ''Timoleon'' 5, [[플루타르코스]]의 ''Moralia'' 542 E, ''Dion'' 46, ''Timoleon'' 36,39 등을 인용, 티몰레온은 생일이 기록된 최초의 그리스인이다.
[277]
서적
The School of History: Athens in the Age of Socrates
[278]
문서
주로 암몬과 동일시 여겨지는 제우스, 그의 조상들인 [[아킬레스]], [[헤라클레스]] 등.
[279]
서적
Appendix 2; 이는 [[칼리스테네스]]가 참여를 거부했던 행사였는데, 알렉산드로스가 그를 살해했던 원인 중 하나였다.
[280]
서적
프톨레마이오스 2세와 그의 왕비의 '다이몬'을 두고 맹세한다고 하는 자가 기록되어 있는 파피루스가 남아 있다.
[281]
페이지
[282]
페이지
[283]
인용
[284]
서적
The Caesars
https://books.google[...]
Hackett Publis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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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287]
서적
The invention of racism in Classical antiquity
https://books.google[...]
Princeton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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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eus.tufts.edu
https://www.perse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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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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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299]
문서
The imperial cult in Roman Britain-Google docs
[300]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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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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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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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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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enelope.u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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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documents illustrating early Christianity: Volume 9, A Review of the Greek Inscriptions and Papyri Published in 198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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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el of Imperial C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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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istories
https://penelope.u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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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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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http://mcadams.posc.[...]
[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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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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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Howgego ''et 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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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in Howgego ''et 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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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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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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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굴라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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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als
[350]
기타
[351]
서적
Fishwick
[352]
서적
Fishwick
[353]
문서
카일리우스 언덕은 "애매한 에트루리아와의 관계성" (클라우디우스는 에트루리아 문화 및 언어에 대한 역사가적 관심을 갖고 있었다)을 갖고 있었다. 또한 이곳은 사창가와 정육 가게들로 악명 높았다. 클라우디우스는 '하류 계층 사람들'을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도살업자와 매춘부 등은 '[[인파미아|인파메스]]'로 분류되었다. 수에토니우스는 클라우디우가 [[사투르날리아]] 행사 기간 축일의 날자를 더했다고 하는데, 세네카에게 있어서 그는 [[실정의 군주]]이고, 그가 죽었을 때 "제가 말했잖습니까 사투르날리아는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고" ('호박화' 12)라고 풍자했다.
[354]
서적
Fishwick
[355]
문서
클라우디우스의 카일리우스 언덕 신전은 이후에 재건되었고 그 일부가 후대의 건축물과 합해진 형태로 남아 있다. 네로의 숭배는 '파테르 파트리아이'로서 게니우스 숭배에 대한 클라우디우스의 권리의 부활로 정당화하는 것이라 볼 수 있었다.
[356]
웹사이트
Annals
https://s:The%20Anna[...]
[357]
서적
Potter
[358]
서적
The Imperial Cult Under the Flavians
New York
1975
[359]
학위논문
The Imperial Cult During the Reign of Domitian
Masaryk University, Department of Archaeology and Museology
2017
[360]
웹사이트
Histories
[361]
문서
일부는 그 머리가 네로의 얼굴과 유사하다고 생각하였다. 그 외는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인 [[티투스]]를 떠올렸다: 카시우스 디오의 65.15.1 참조.
[362]
문서
태양신에 대한 거상 헌정은 네로의 도상학과 일치하며 네로와 닮은 것은 [[스토아학파|스토아]]와 [[키니코스 학파|키니코스]] 등의 우주론 속 [[팍스 로마나]]의 두 번째 태양이라는 황제로서의 표현이라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후대의 알아볼 수 있는 조각상들에 대한 변형이나 개조 그리고 재헌정 등은 본래 대상의 [[기록말살형]]이 일어났을 경우 일반적인 대처였다. 한편으로 일부 황제 조각상들의 머리 부분은 법적 또는 도덕적 모욕이나 제거라기보다는 경제적 문제로 잘려나거나 대체된 것으로 보인다.
[363]
논문
Framing the sun: the Arch of Constantine and the Roman cityscape
2006
[364]
서적
Smallwood
[365]
문서
도미티아누스에 대한 '게니우스' 숭배 풍습은 악타 아르발리아이스(Acta Arvaliais)에 나타나 있다.
[366]
문서
Gradel, 159-61: 도미티아누스가 이 칭호를 직접 사용했다거나 그의 요청으로 프로쿠라토르들이 썼다고 하는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은 입증된 바 없다. 그는 도미티아누스의 해방 노예들이 이 칭호를 처음으로 썼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하였다.
[367]
서적
Gradel
[368]
문서
Ando, 167: Pliny ''panegyric'' 75.1–3: Pliny refers to the publication of the senatorial voice in proceedings: Trajan's respect for the Senate can only be good for the "dignity" of the state.
[369]
서적
Gradel
[370]
웹사이트
Sage, (in discussion of Tacitean themes) in Haase & Temporini (eds)
https://books.google[...]
[371]
서적
Gradel
[372]
서적
Howgego
[373]
문서
하드리아누스의 '그리스'적 주정주의는 호메로스의 문학 속 파트로클루스에 대한 아킬레우스의 슬픔 속에서 문화적으로 동감적인 울림을 찾아볼 수 있다: see Vout, 52–135.
[374]
문서
카시우스 디오 또는 그의 저서에 대한 요약자들은 안티누스가 하드리아누스가 주장했었던 익사로 죽은 것이 아닌 불멸성에 대한 내기의 일종으로 황제의 의지에 따른 제물 의식의 피해자라고 주장하였지만 이는 확실히 않다.
[375]
문서
Vout, 118-9, ''contra'' Price, 68 등에서 이들 두 명은 안티누스가 로마시 자체에서는 신격화에 대해선 완전한 숭배를 받는 영예를 얻지 못하였다고 여겼다. 또한 그들은 안티누스가 로마의 다른 황제 '디부스' 등과 공식적으로 동등한 지위를 갖고 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에 대해 동의하였다.
[376]
문서
Vout, 52–135에서 바우트는 안티누스 숭배에 대한 성격, 배경, 지속성, 전통 종교 숭배에 대한 기독교의 논쟁 그 중에서도 특히 [[아타나시오스]]와 관련하여 안티누스 숭배에 대한 기능, 때로는 오해를 불러일으킨 오늘날의 상상을 이끌어낸 그 자체에 대한 능력 등에 대한 검토를 하였다. Limited preview available
https://books.google[...]
[377]
문서
Vout, 111. 안토니누스 황제의의 경건함은 전임자인 하드리아누스의 신격화를 위해 원로원을 향한 그의 끊임없으나, 인간적으로 겸손한 간청에 있었으며 이는 공화정 시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메텔루스 피우스]]의 자식으로서의 헌신과 도덕적으로 필적한 것이었다.
[378]
서적
Gradel
[379]
문서
Gradel, 199: see also [[Imperial cult (ancient Rome)#The context and precedents for Imperial Cult|The context and precedents for Imperial Cult]]. 현직 황제에 비해서, '디비우스'들은 아마도 신에 대한 중재자라는 자격이 없을 경우 숭배에 있어 직접적인 힘이 적거나 없었을 것이다.
[380]
서적
Potter
[381]
문서
디오의 평가는 직설적이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매정한 것은 아니었는데 그는 콤모두스가 게으르고, 잘 속아 넘어가며 멍청하다고 하였다. Potter, 85-6: citing Cassius Dio
https://penelope.uch[...]
[382]
문서
서기 193년 1월 1일, 로마 군단들은 원치 않게 죽은 황제에 대한 충성의 맹세를 갱신하였다: Potter, 92-6. 디오의 '서한집' 참조.
[383]
문서
이 주장은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의 서술을 근거로 하며, 그가 여전히 살아있는 데도 자체적인 '플라멘'을 두려는 계획을 했다고 주장한다. 그 외 카시우스 디오는 상세한 기록에서, 이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See Gradel, 160-1.
[384]
서적
Potter
[385]
서적
Potter
[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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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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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Grad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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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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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Grad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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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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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Potter
[398]
인용
Po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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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전차 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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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Potter
[401]
문서
임페라토르
[402]
문서
마크리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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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Po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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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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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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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Howge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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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Po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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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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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Beard ''et 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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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Po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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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Rees
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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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Bowman ''et al''
https://books.google[...]
[416]
인용
Rees
[417]
인용
Beard ''et al''
[418]
인용
Drinkwater
http://www.roman-emp[...]
[419]
인용
Cascio
[420]
인용
Historia Augusta
[421]
문서
Vout
[422]
문서
Lactantius
[423]
문서
Eusebius
[424]
문서
Bowman et al
[425]
문서
Rees
[426]
문서
Rees
[427]
문서
MacCormack
[428]
문서
Brent
[429]
문서
Fishw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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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Gradel
[431]
문서
Grad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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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Fishwick
[433]
문서
Price
Berlin
1892-1916
[434]
문서
Pr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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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Javier A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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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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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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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Archiv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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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9]
문서
Beard et al
[440]
문서
Beard et al
[441]
문서
Gradel
[442]
문서
Livy
[443]
문서
Beard et al
[444]
문서
Gradel
[445]
문서
Gradel
[446]
문서
Price
[447]
문서
Beard et al
[448]
문서
Brent
[449]
문서
Beard et al
[450]
문서
Brent
[451]
문서
Brent
[452]
문서
Gradel
[453]
문서
Severy
[454]
문서
Beard et al
[455]
문서
Gradel
[456]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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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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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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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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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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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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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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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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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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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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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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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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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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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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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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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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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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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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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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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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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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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ummary of relevant legislation
http://www.fourthcen[...]
2009-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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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ter of St. Ambr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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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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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u einigen daten der Kaiser Libius Severus und Maior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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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2]
간행물
Honours and Worship: Emperors, Imperial Cults and Associations at Ephesus (First to Third Centuries 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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