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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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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이 15세는 1710년 베르사유 궁전에서 태어난 프랑스 왕으로, 부르고뉴 공작 루이와 사보이의 마리 아델라이드의 손자였다. 그는 루이 14세의 뒤를 이어 1715년 5세의 나이로 즉위했으며, 오를레앙 공 필리프 2세의 섭정을 거쳐 친정을 시작했다. 플뢰리 추기경의 통치 시기에는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으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하며 해외 식민지를 잃었다. 퐁파두르 부인과 뒤바리 부인을 비롯한 여러 애첩을 두었고, 말년에는 사법 개혁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774년 천연두로 사망했으며, 그의 손자인 루이 16세가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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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5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루이 15세의 초상화
루이-미셸 반 로, 1763년경
이름루이 15세
로마자 표기Louis XV
바스크어 표기Luis IV.a
프랑스어 표기Louis XV
왕위
프랑스 국왕프랑스 국왕
나바라 국왕나바라 국왕
재위 기간1715년 9월 1일 – 1774년 5월 10일
대관식1722년 10월 25일 랭스 대성당
선임자루이 14세
후임자루이 16세
섭정필리프 2세 도를레앙 공작(1715–1723)
수석 국무 장관기욤 뒤부아(1715–1723)
루이 앙리 드 부르봉(1723–1726)
앙드레 에르퀼 드 플뢰리(1726–1743)
에티엔 프랑수아 드 슈아죌(1758–1770)
개인 정보
출생명루이 드 앙주
출생일1710년 2월 15일
출생지베르사유 궁전, 프랑스 왕국
사망일1774년 5월 10일
사망지베르사유 궁전, 프랑스 왕국
매장일1774년 5월 12일
매장지생드니 대성당, 생드니
배우자마리 레슈친스카(1725–1768)
자녀엘리자베트
앙리에트
마리 루이즈
루이 페르디낭
필리프
아델라이드
빅투아르
소피
테레즈
루이즈 마리
가문
왕가부르봉 왕가
아버지루이 드 부르고뉴 공작
어머니마리 아델라이드 드 사보이
종교가톨릭교
기타 정보
서명
인용 정보
참고 문헌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루이 15세 2004 도서출판 범한

2. 어린 시절

어린 루이 15세가 주재한 사법 재판 (lit de justice), 옆에는 방타두르 부인이 앉아 있다.


1715년 9월 1일, 증조부 루이 14세가 서거하자 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3] 샤를 5세의 1374년 칙령에 따라 국왕이 13세가 될 때까지는 섭정이 통치해야 했다.[5] 가장 가까운 성인 남자 친척은 숙부인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였으나,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포기한 상태였기에, 루이 14세의 조카이자 루이 15세의 종조부인 오를레앙 공 필리프 2세가 섭정이 되었다.

그러나 루이 14세는 필리프를 불신하여, 자신의 사생아인 메인 공 루이 오귀스트가 실질적 권력을 행사하도록 유언장을 작성했다. 유언장은 14명으로 구성된 섭정 평의회가 국가를 통치하도록 규정했으며, 필리프는 의장에 불과했고 모든 결정은 다수결로 이루어져 메인 공 측이 필리프를 압도할 수 있었다.[3] 필리프는 즉시 파리 의회에 접근하여 이 유언을 무효화해달라고 요청했고, 그 대가로 루이 14세가 폐지했던 의회의 항의권(droit de remontrance), 즉 국왕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권리를 복원해주기로 약속했다. 의회는 유언을 무효화했고 필리프는 완전한 권한을 가진 섭정이 되었다. 하지만 항의권의 부활은 이후 왕권과 의회 간의 갈등을 심화시켜 프랑스 혁명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6]

1838년경 그려진, 러시아의 차르 표트르 대제가 어린 루이 15세(1717년)를 안아 올리는 모습.


섭정 필리프는 1715년 9월, 어린 왕을 베르사유 궁전에서 파리로 옮겨 튀일리 궁전에 거처하게 했다. 9월 12일, 루이 15세는 왕궁에서 자신의 통치 기간 첫 사법 재판 (lit de justice)을 주재하며 첫 공식 행사를 치렀다. 1717년 2월, 7세가 된 루이 15세는 자신을 돌봐주었던 방타두르 부인과 헤어지고, 루이 14세의 유언에 따라 총독으로 임명된 빌레루아 공의 보살핌을 받게 되었다. 빌레루아 공은 어린 왕에게 궁정 예절, 군대 사열, 외국 귀빈 접견 방법 등을 가르쳤다. 1717년에는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가 방문했는데, 거구의 차르는 어린 루이 15세를 번쩍 들어 올려 키스하며 인사했다고 전해진다. 루이 15세는 승마와 사냥 기술도 배웠는데, 이는 평생의 열정이 되었다.[7] 반면, 1720년과 1721년에 두 차례 발레 공연에 참여했지만, 수줍음이 많았던 그는 이를 계기로 다시는 공개적으로 춤을 추지 않았다.[8][9]

8세의 루이 15세가 직접 편집하고 인쇄한 ''Cours des principaux fleuves et rivières de l'Europe'' (유럽 주요 강의 흐름). 어린 왕의 교육에는 지리와 인쇄가 포함되었다.


왕의 가정교사는 프레주스 주교(훗날 추기경)인 앙드레 에르퀼 드 플뢰리였다. 플뢰리는 루이 15세에게 라틴어, 이탈리아어, 역사, 지리, 천문학, 수학, 그림, 지도 제작 등을 가르쳤다. 특히 루이 15세는 지리와 과학에 큰 흥미를 보여, 1717년 방문한 표트르 대제 앞에서 러시아의 지리에 대해 설명하여 깊은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이러한 관심은 훗날 그가 콜레주 드 프랑스에 물리학(1769)과 역학(1773) 강좌를 신설하고, 프랑스 최초의 정확한 지도인 카시니 지도 제작을 후원하는 것으로 이어졌다.[10][11] 학문 외에도 1720년부터는 섭정 평의회 회의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며 통치에 대한 실질적인 교육을 받았다.

섭정 시대에는 경제적인 어려움도 있었다. 스코틀랜드 출신 경제학자 존 로가 재무 총감으로 임명되어 프랑스 최초의 지폐 발행 은행인 '방크 로얄'을 설립하고, 북미 루이지애나 식민지 개발을 위한 미시시피 회사 주식 투자를 유도했다. 처음에는 주가가 폭등했지만 1720년 거품이 꺼지면서 회사는 파산했고 은행도 문을 닫았다. 이 사건은 많은 투자자들에게 큰 손실을 안겼고 프랑스 경제에 혼란을 야기했다.[12][13]

외교적으로는 1719년 영국, 네덜란드와 동맹을 맺고 스페인과 짧은 전쟁을 벌여 승리했다. 이후 1721년 스페인과 평화 조약을 맺고, 관계 개선을 위해 루이 15세와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의 어린 딸 스페인의 마리아나 비토리아 공주와의 약혼을 추진했다. 마리아나 비토리아는 프랑스로 왔지만, 너무 어려 후사를 잇기 어렵다는 이유로 1725년 결국 스페인으로 돌려보내졌다.[13] 섭정 시대 후반기는 비교적 평화로웠으며, 몽테스키외볼테르 같은 사상가들이 활동을 시작하며 프랑스 계몽주의가 시작되었다.[14]

2. 1. 탄생

루이 15세는 증조부인 루이 14세의 통치 기간 중인 1710년 2월 15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루이 14세의 손자인 부르고뉴 공 루이이고, 어머니는 마리 아델라이드 드 사부아 왕녀이다. 그는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셋째 아들이었으며,[3] 태어나면서 왕위 계승자가 받을 수 있는 직위 중 하나인 앙주 공작 칭호를 받았다. 또한 왕세손의 아들로서 피스 드 프랑스이기도 했다.

당시 루이 15세가 왕위에 오를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였다. 루이 14세에게는 유일한 적자이자 왕세자인 그랑 도팽 루이(1661-1711)가 있었고, 그에게는 세 아들, 즉 루이 15세의 아버지인 부르고뉴 공 루이(1682-1712), 훗날 스페인의 왕이 되는 앙주 공 필리프(1683-1746), 그리고 베리 공 샤를(1686-1714)이 있었다. 왕위 계승 서열은 그랑 도팽 루이, 부르고뉴 공 루이, 그리고 루이 15세의 형인 브르타뉴 공 루이 순서였다. 이처럼 부르봉 왕가에는 3대에 걸쳐 여러 명의 직계 왕위 계승권자가 있어 왕위 계승은 안정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루이 15세의 어머니 마리 아델라이드 드 사부아 왕녀는 사보이 공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와 안나 마리아의 장녀였다. 그녀는 1696년 토리노 조약에 따라 부르고뉴 공 루이와 약혼하고 1697년 결혼했다. 당시 왕족 간의 결혼에서는 드물게 두 사람은 진심으로 사랑했으며, 행복한 결혼 생활은 귀족들 사이에서도 이야깃거리가 될 정도였다. 루이 14세는 젊고 활기찬 성격의 며느리 마리 아델라이드를 매우 아꼈고, 그녀는 베르사유 궁정에 활력을 불어넣는 인기 있는 인물이었다.

유아기 루이 15세(가운데 고삐를 잡힌 아이)와 그의 방타두르 부인,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부. 배경에는 앙리 4세루이 13세의 흉상이 있다.


그러나 1711년 루이 15세가 한 살 때 할아버지인 그랑 도팽 루이가 천연두로 갑자기 사망하면서[3]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부르고뉴 공 루이가 새로운 왕세자(도팽)가 되었지만, 이듬해인 1712년 2월 12일, 어머니 마리 아델라이드 드 사부아 왕녀가 홍역으로 사망했다. 병든 아내를 헌신적으로 간호했던 아버지 부르고뉴 공 역시 같은 병에 걸려 6일 뒤인 2월 18일 세상을 떠났다.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어린 루이 15세와 그의 형 브르타뉴 공 루이도 같은 병에 걸렸다. 당시의 일반적인 치료법이었던 사혈을 받은 형 브르타뉴 공은 병세가 악화되어 3월 8일 사망했다. 하지만 루이 15세의 보모였던 방타두르 부인은 의사들이 어린 앙주 공(루이 15세)에게 사혈하는 것을 완강히 막았고, 덕분에 루이 15세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4]

이 비극적인 사건들로 인해, 불과 2살이었던 앙주 공 루이는 직계 왕위 계승자 중 유일하게 살아남아 새로운 왕세자(도팽)가 되었다. 1714년에는 작은아버지인 베리 공 샤를마저 사냥 중 사고로 사망하면서, 어린 루이 15세는 루이 14세의 유일한 직계 후계자가 되었다. 1715년 9월 1일 증조부 루이 14세가 사망하자, 5살의 어린 나이로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로 즉위하게 된다.[3]

2. 2. 유년기와 비극적인 죽음들

1710년 2월 15일, 루이 15세는 증조부인 루이 14세의 통치 기간 중 베르사유 궁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루이 14세의 손자이자 왕위 계승 서열 2위였던 부르고뉴 공 루이였고, 어머니는 사보이 공국의 공녀 마리 아델라이드였다. 그는 부르고뉴 공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세 아들 중 막내였으며, 유아기를 무사히 넘긴 둘째 아들이었다. 태어나면서 그는 관례에 따라 '앙주 공작'이라는 의례 칭호를 받았고, 국왕의 증손자로서 프티피스 드 프랑스(Petit-Fils de France)이기도 했다.

루이 15세의 할아버지인 그랑 도팽 루이는 루이 14세의 유일한 적자였으며, 그에게는 루이 15세의 아버지인 부르고뉴 공 루이, 훗날 스페인의 펠리페 5세가 되는 앙주 공 필리프, 그리고 베리 공 샤를까지 세 아들이 있었다. 루이 15세의 어머니 마리 아델라이드는 사보이 공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의 딸로, 활기차고 젊은 여성이었기에 루이 14세의 총애를 받았다. 아버지 부르고뉴 공과 어머니 마리 아델라이드는 당시 왕족 간의 결혼에서는 드물게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으며 행복한 부부 생활을 했다.

앙주 공 루이(루이 15세)의 탄생으로 부르봉 왕조는 루이 14세의 아들, 손자 셋, 증손자 둘(루이 15세의 형과 루이 15세) 등 3대에 걸쳐 여섯 명의 직계 왕위 계승자를 보유하게 되어, 왕조의 미래는 매우 안정적으로 보였다. 루이 14세1704년 부르고뉴 공의 첫 아들(루이 15세의 첫째 형)이 태어났을 때, 자신이 프랑스 역사상 최초로 건강하게 통치하면서 증손자를 본 왕이라며 기뻐하기도 했다.

그러나 1700년, 루이 15세의 숙부인 앙주 공 필리프가 스페인 왕위를 계승하여 스페인의 펠리페 5세가 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루이 14세가 펠리페 5세의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유지시키자, 프랑스와 스페인의 통합을 우려한 유럽 국가들이 반발하여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

왕실의 비극은 1711년부터 시작되었다. 그해 4월, 할아버지인 그랑 도팽 루이가 천연두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3] 그의 아들이자 루이 15세의 아버지인 부르고뉴 공 루이가 새로운 도팽(왕세자)이 되었다. 하지만 이듬해인 1712년 2월 12일, 루이 15세의 어머니 마리 아델라이드가 천연두 (또는 홍역)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아내를 헌신적으로 간호했던 아버지 부르고뉴 공 역시 같은 병에 걸려 엿새 뒤인 2월 18일에 사망했다.

불과 2주가 조금 지난 3월 7일, 어린 루이 15세(당시 앙주 공)와 그의 형이자 새로운 도팽이 된 브르타뉴 공 루이도 같은 병에 걸린 것이 확인되었다. 당시의 전통적인 치료법인 사혈을 계속 받은 형 브르타뉴 공은 결국 3월 8일 밤에 다섯 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러나 앙주 공 루이의 가정교사였던 방타두르 부인은 의사들이 두 살배기 앙주 공에게 사혈하는 것을 강력히 막고, 궁전 벽장에 숨겨 직접 간호했다. 그녀의 노력 덕분에 어린 앙주 공은 매우 아팠음에도 불구하고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왕위 계승자(도팽)가 되었다.[4]

부르봉 왕가의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714년, 루이 15세의 유일하게 남은 삼촌이었던 베리 공 샤를마저 사냥 중 사고로 후사 없이 사망했다.

이리하여 루이 14세는 불과 3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아들(그랑 도팽), 손자며느리(마리 아델라이드), 큰손자(부르고뉴 공), 증손자 둘(브르타뉴 공, 첫째 증손자), 막내 손자(베리 공)까지 연이어 잃는 엄청난 비극을 겪었다. 왕위 계승자는 이제 네 살밖에 안 된 증손자, 앙주 공 루이 한 명만 남게 되었다. 왕조의 운명과 유럽의 평화가 어린 아이의 생존 여부에 달리게 된 것이다.

홀로 남은 어린 루이 15세는 왕가의 유일한 희망으로서 철저한 감시와 보호 속에서 자랐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의 무게를 일찍부터 인지해야 했다. 그는 부모와 형제를 모두 잃은 고아였고, 스페인에 있는 숙부 펠리페 5세 외에는 가까운 친척도 없어 평생 의지할 만한 가족 없이 외롭게 지내야 했다. 이러한 외로운 유년기 환경은 훗날 그의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1715년 9월 1일, 증조부 루이 14세가 사망하자, 그는 다섯 살의 나이로 프랑스의 국왕 루이 15세로 즉위했다.[3]

3. 오를레앙 공의 섭정 정치

1715년 9월 1일, 72년간 프랑스를 통치했던 루이 14세가 서거하자 그의 증손자인 5세의 앙주 공이 루이 15세로 즉위하였다. 루이 15세가 나랏일을 하기에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루이 14세의 조카이자 사위이며 루이 15세의 재종조부인 오를레앙 공 필리프 2세가 1723년까지 섭정을 맡아 프랑스를 통치하게 되었다.


  • -그러나 오를레앙 공은 루이 14세 치하에서 국정에서 배제되었던 대귀족(noblesse d'épée)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또한 루이 14세에 의해 건의권을 빼앗겼던 파리 고등법원, 그리고 예수회로마 교황 중심 정책에 반대하던 장세니스트와 갈리카니스트들도 오를레앙 공을 지지했다. 루이 14세 서거 다음 날인 9월 2일, 파리 고등법원에서 열린 회의에서 오를레앙 공은 자신에게 전권을 부여할 것을 요구했고, 고등법원은 이를 지지하여 루이 14세의 유언을 사실상 무효화시켰다. 오를레앙 공은 그 대가로 고등법원의 간주권(Remonstrance, 국왕의 칙령 등록을 거부하고 이의를 제기할 권리)을 회복시켜 주었다. 이 조치는 이후 고등법원이 왕권에 저항하는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메느 공은 왕위 계승권을 박탈당하고 실각했으며, 스페인 왕 펠리페 5세와 결탁하여 음모를 꾸미다 발각되어 투옥되었다.


오를레앙 공의 섭정 정치는 여러 면에서 루이 14세 시대에 대한 반동적인 성격을 띠었다. 그는 고등법원과 귀족의 권력을 회복시켰으며, 루이 14세가 탄압했던 얀센주의자들을 해방시켰다. 외교적으로는 프랑스와 적대 관계였던 오스트리아와 화해하고, 1717년에는 영국과 동맹을 맺어, 루이 15세 사후 프랑스 왕위를 주장할 가능성이 있는 스페인의 펠리페 5세를 견제했다.

섭정 정부는 1715년 대신 제도를 폐지하고 대귀족들을 국정에 참여시키는 다원적 의회제(Polysynody|폴리시노디영어)를 도입했으나, 국정 운영 능력이 부족했던 귀족들로 인해 3년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재정 문제 해결을 위해 스코틀랜드 출신 경제학자 존 로를 재무총감으로 임명하여 프랑스 최초의 지폐를 발행하고 북아메리카 식민지 개발 및 무역 회사(미시시피 계획)를 설립했지만, 이는 투기 열풍을 일으킨 끝에 버블 경제 붕괴로 이어져 많은 귀족들이 파산하는 결과를 낳았다.

오를레앙 공과 자유를 되찾은 귀족들은 방탕과 스캔들로 시대를 물들였다. 환락을 즐겼던 오를레앙 공은 100여 명의 애첩을 두었고, 궁정에는 추잡한 정사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도덕적 타락 속에서 왕권은 크게 실추되었다.[169] 한편, 오를레앙 공은 방탕한 사생활과 별개로 공과 사를 구분하며 정치가로서는 유능했다는 평가도 있다.[136]

어린 루이 15세는 선왕의 유언에 따라 처음에는 뱅센느 성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곧 파리 중심부의 튀르리 궁전으로 이주했다.[134] 7세가 되자 왕가의 전통에 따라 남성 양육자에게 맡겨지면서, 정들었던 양육자 뱅타돌 부인과 눈물로 헤어졌다.[135] 새로운 양육자는 루이 14세의 유언에 따라 빌르로와 공과 플뢰리 주교가 맡았다. 빌르로와 공은 루이 15세에게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하고 내성적인 성격을 부추긴 반면, 온화한 성품의 플뢰리 주교는 훌륭한 교육을 제공하여 루이 15세의 깊은 존경을 받았다.

1721년, 루이 15세는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의 딸이자 자신의 사촌인 마리아나 비크토리아와 약혼했다. 당시 3세였던 스페인 공주는 양육을 위해 파리로 왔지만, 11세의 루이 15세는 어린 약혼녀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722년 6월, 루이 15세는 어린 시절의 행복한 기억이 있는 베르사유 궁전으로 돌아와 평생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같은 해 10월 25일, 루이 15세는 랭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렀다.[15]

루이 15세의 랭스 대성당 대관식 (1722)


1723년 2월 15일, 파리 고등법원이 루이 15세의 성년(13세)을 선포하면서 오를레앙 공의 섭정 시대는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 오를레앙 공은 계속해서 정부를 관리하며 그해 8월 수상(Prime Minister) 직함을 얻었으나, 같은 해 12월 애첩의 집을 방문하던 중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루이 15세는 스승 플뢰리의 조언에 따라 오를레앙 공의 후임 수상으로 자신의 사촌인 부르봉 공작 루이 앙리를 임명했다.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


1725년 2월, 루이 15세가 병을 앓자 후계자에 대한 불안감이 커졌다. 당시 수상이던 부르봉 공작은 아직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어린 스페인 공주 마리아나 비크토리아와의 약혼을 파기하기로 결정했다.[137] 마리아나 비크토리아는 스페인으로 돌려보내졌고, 이로 인해 프랑스와 스페인 관계는 일시적으로 악화되었다. 새로운 왕비 후보로는 출산 가능한 나이의 유럽 공주들이 물망에 올랐다. 결국 왕비는 몰락한 전(前) 폴란드 국왕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의 딸인 21세의 마리 레슈친스카로 결정되었다. 왕위를 잃고 망명 중이던 인물의 딸과의 결혼은 격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국민들의 실망을 샀다.[138] 결혼식은 1725년 9월에 거행되었다.

수상 부르봉 공작은 연이은 실정으로 곡물 가격 폭등과 경기 악화를 초래하여 국민들의 원성을 샀다. 1726년, 16세가 된 루이 15세는 부르봉 공작을 해임하고, 자신의 스승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플뢰리 추기경을 사실상의 수상으로 임명하여 국정 운영을 맡겼다.

4. 플뢰리 추기경 시대 (1726-1743)

이아상트 리고가 그린 플뢰리 추기경


1726년부터 1743년 사망할 때까지, 루이 15세의 스승이었던 플뢰리 추기경은 국왕의 전적인 신임 아래 프랑스를 실질적으로 통치했다. 그는 국왕의 우유부단함을 이용하며 정국의 안정을 꾀했고,[21] 루이 14세 시대의 전쟁으로 인한 손실을 복구하는 데 집중하여 이 시기는 '회복기'(''gouvernement "réparateur"'') 또는 루이 15세 치세 중 가장 평화롭고 번영했던 시기로 평가받는다. 플뢰리는 안정적인 정부 운영을 추구하며[22] 중상주의 정책을 통해 경제 부흥을 도모하고 재정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23]

외교적으로는 초기 평화 정책에서 벗어나 1733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1733~1738)에 개입하여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의 아버지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를 지원했고, 전쟁 결과 1738년 빈 조약을 통해 로렌 공국을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로렌은 스타니스와프 사후 1766년 프랑스에 최종 병합).

그러나 플뢰리 통치 말기인 1740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 사망 후 마리아 테레지아의 계승 문제가 불거지면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1748)이 발발했다. 루이 15세는 처음에는 개입을 원치 않았으나,[31]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실레지아를 침공하고 프랑스 내 전쟁 여론이 높아지자, 결국 프랑스는 프로이센 및 바이에른과 동맹을 맺고 오스트리아에 맞서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32] 노령의 플뢰리는 이 전쟁을 막지 못했고, 전쟁이 한창이던 1743년 1월 29일에 사망했다. 이후 루이 15세는 재상을 두지 않고 직접 통치(친정)를 시작했다.[33]

4. 1. 결혼

1723년 2월 15일, 파리 고등법원(Parlement of Paris)이 국왕의 성년을 선포하며 공식적으로 섭정 시대가 종식되었다.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가 사망한 후, 루이 15세는 그의 스승 플뢰리의 조언에 따라 사촌인 부르봉 공작 루이 앙리를 수상으로 임명했다.

부르봉 공작의 최우선 과제 중 하나는 왕의 신부를 찾아 왕위 계승의 연속성을 보장하고, 특히 그의 가문의 라이벌인 오를레앙 가문의 왕위 계승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었다.[16] 이를 위해 99명의 유럽 공주 명단이 작성되었다.[17] 최종적으로 폴란드의 폐위된 국왕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의 딸인 21세의 마리 레슈친스카가 신부로 선택되었다.

프랑스의 마리 레슈친스카 왕비, 칼레 반 로(1747년 작)


결혼식은 1725년 9월에 거행되었는데, 당시 왕은 15세, 마리는 22세였다. 루이 15세는 마리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전해진다.[18] 1727년부터 1737년까지 마리는 루이 15세와의 사이에서 8명의 딸과 2명의 아들, 총 10명의 자녀를 낳았다. 아들 중에서는 장남인 도팽 루이 페르디낭(1729–1765)만이 유년기를 넘겨 살아남았다. 기다려온 후계자의 탄생은 프랑스 사회 전반에서 큰 축하를 받았다. 도팽 루이는 훗날 루이 16세, 루이 18세, 샤를 10세 세 명의 프랑스 국왕의 아버지가 되었다.[16] 루이 15세의 차남인 앙주 공작 필리프는 1730년에 태어나 1733년에 사망했다. 딸들 중에서는 쌍둥이였던 두 명의 장녀만이 베르사유 궁전에서 자랐고, 다른 딸들은 퐁트브로 수도원으로 보내져 양육되었다.

마리 레슈친스카는 독실하고 수줍음이 많은 성격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자신의 궁정 신하들과 함께 조용히 보냈다. 그녀는 음악가였으며 독서를 즐겼고, 궁정 신하들과 사교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잦은 임신과 출산으로 인해 1737년 이후로는 왕과 같은 침실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그녀는 1765년 아들인 도팽 루이 페르디낭의 죽음에 깊은 슬픔에 잠겼고, 1768년 6월 24일에 사망했다.[16]

4. 2. 내치

1722년 6월, 성년을 앞둔 루이 15세는 파리를 떠나 어린 시절을 보낸 베르사유로 돌아왔다. 같은 해 10월 25일, 랭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렀다.[15] 1723년 2월 15일, 파리 고등법원이 국왕의 성년을 공식 선포하며 섭정 시대는 끝났다.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가 수상직을 맡았으나 그해 12월 사망했고, 루이 15세는 스승 플뢰리 추기경의 조언에 따라 사촌인 부르봉 공작 루이 앙리를 수상으로 임명했다.

1726년부터 1743년 사망할 때까지 플뢰리 추기경은 국왕의 전적인 신임 아래 프랑스를 실질적으로 통치했다. 이 시기는 루이 14세 시대의 전쟁으로 인한 손실을 복구하는 데 집중하여 '회복기'로 평가받는다. 플뢰리는 국왕의 우유부단함을 이용하며 정국의 안정을 꾀했고,[21] 중상주의 정책을 채택하여 경제 부흥을 이끌었다. 재정총감 미셸 로베르 르 펠레티에 데 포르(1726-1730)와 필리베르 오리(1730-1745)의 도움으로 1726년 통화를 안정시키고 1738년에는 예산 균형을 달성하기도 했다.[23] 또한 에콜 데 퐁 에 쇼세를 설립하여 국가 도로망을 체계적으로 건설하고, 생캉탱 운하를 개통(1738)하는 등 기반 시설 확충에 힘썼다. 이로 인해 프랑스 해상 무역액은 1716년 8천만 리브르 투르누아에서 1748년 3억 8백만 리브르 투르누아로 크게 증가했다.[24] 그러나 콜베르 시대부터 이어져 온 엄격한 경제 통제는 산업 발전을 더디게 만들었다.

종교적으로 플뢰리는 얀센주의와 갈리카니즘을 억압했다. 교황의 교령 《우니게니투스》(Unigenitus)를 프랑스 법으로 만들고 의회에서의 논쟁을 금지했으며, 이에 반대하는 파리 고등법원 의원 139명을 해임하기도 했다.[25] 이는 귀족 계층의 불만을 키우는 요인이 되었다.

1729년,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가 왕세자 루이 페르디낭을 낳으면서 왕위 계승 문제가 안정되었고 국왕의 인기도 높아졌다. 그러나 루이 15세는 왕비가 딸을 더 많이 낳는 것에 불만을 품었고, 왕비 역시 잦은 임신에 지쳐 부부 관계는 소원해졌다. 1734년경부터 루이 15세는 공공연히 애첩을 두기 시작했는데, 네슬 자매들인 마이이 부인, 방티미유 부인, 샤토루 부인 등이 그의 총애를 받았다. 1739년 이후, 루이 15세는 불륜 때문에 스스로 신성한 의식을 거행할 자격이 없다고 여겨 국왕이 병자의 환부를 만져 병을 고치는 왕의 손길(Royal touch) 의식을 중단했는데, 이는 왕권의 신성성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139][140]

외교적으로 플뢰리는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1733-1738)에 개입하여 왕비의 아버지 스타니슬라스 레슈친스키를 지원했고, 빈 조약을 통해 로렌 공국을 확보했다. 로렌은 스타니슬라스 사후인 1766년 프랑스에 최종 병합되어 부르봉 왕조의 마지막 영토 확장이 되었다. 또한 오스트리아오스만 제국 사이의 벨그라드 조약 체결을 중재하여 오스만 제국 내 프랑스의 카피툴라시옹 특권을 갱신하고 중동 무역의 우위를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1740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자, 노쇠한 플뢰리는 참전을 막지 못했고 프랑스는 프로이센 편에 서서 전쟁에 휘말렸다.[32] 전쟁 중인 1743년 1월 29일 플뢰리가 사망하자, 루이 15세는 루이 14세를 따라 재상을 두지 않고 직접 통치하겠다고 선언(친정)했다.[33] 그러나 전쟁은 프랑스에 큰 실익 없이 끝났고(엑스 라 샤펠 조약, 1748), 막대한 전쟁 비용으로 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정부가 이를 메우기 위해 '5퍼센트세' 신설을 시도했으나 고등법원의 반대로 무산되면서 국민들의 불만은 커져갔다.

1745년부터는 국왕의 애첩인 퐁파두르 후작 부인이 1764년 사망할 때까지 20여 년간 프랑스 정치와 문화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녀는 계몽주의 사상가들을 후원했으며, 쇼아죌을 비롯한 여러 고관 임명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퐁파두르 후작부인


퐁파두르 부인의 후원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로는 국왕의 주치의이자 중농주의 경제학자인 프랑수아 케네와 상무 장관 자크 클로드 마리 뱅상 드 구르네가 있다. 케네는 『경제표』(Tableau Économique, 1758)를 저술했고, 국왕은 그를 "나의 사상가"라고 불렀다.[80] 구르네는 `laissez faire, laissez passer|레세페르, 레세파세르프랑스어`("내버려두라, 지나가게 하라")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80] 이들의 이론에 영향을 받아 재정 감독관 앙리 레오나르 장 밥티스트 베르탱은 1763년1764년 곡물 거래 자유화 조치를 단행했다.[81] 이 정책은 풍년에는 효과가 있었으나, 1766년부터 이어진 흉년에는 곡물 가격 폭등을 유발하여 파리 등지에서 정부가 빈민을 굶겨 죽이려 한다는 "기근 협약"(Pacte de Famine) 소문이 퍼지는 등 사회 불안을 야기했다.[82]

프랑수아 케네(François Quesnay), 의사이자 자유시장 경제학자


재정 문제는 루이 15세 치세 내내 해결되지 못했다. 재무총감 장바티스트 드 마쇼 드 아르누빌은 성직자와 귀족을 포함한 모든 신분에게 부과하는 "20분의 1세" 도입을 추진했으나, 면세 특권을 침해당한 특권층과 파리 고등법원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다. 이러한 얀센주의 문제와 결부된 고등법원과의 계속된 갈등은 왕권의 약화를 초래했다.

1756년 프랑스는 오랜 적대 관계였던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고(외교 혁명) 7년 전쟁에 참전했다. 이 동맹에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를 싫어했던 퐁파두르 부인이 영향을 미쳤다는 설이 있으나, 그 역할은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149][150]

1757년 1월 5일, 루이 15세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마차에 오르려다 실직자인 로베르 프랑수아 다미앵에게 단검으로 옆구리를 찔리는 암살 미수 사건을 겪었다. 국왕은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으나 큰 충격을 받았다.[151] 다미앵은 고등법원 판사 집안의 하인으로, 주인에게서 들은 국왕에 대한 악평 때문에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그는 국왕 살해 미수라는 대역죄로 재판에 넘겨져 능지처참(사지절단형)이라는 잔혹한 공개 처형을 당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육군 장관 달장송 백작과 국새상서 마쇼 드 아르누빌이 파면되었다.[152]

7년 전쟁은 프랑스의 참패로 끝났고, 1763년 파리 조약으로 프랑스는 캐나다미시시피강 동쪽의 루이지애나, 인도 등 광대한 해외 식민지를 영국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이는 프랑스 역사상 가장 큰 외교적 실패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153] 루이 14세 시대의 영광을 크게 실추시켰다. 다만 설탕 산지인 서인도 제도 일부를 유지한 덕분에 국내 여론이 최악으로 치닫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전쟁 패배의 충격 속에서 1764년 4월 15일, 퐁파두르 부인이 사망했다.[154]

퐁파두르 사후, 쇼아죌 공작이 정국을 이끌었다. 그는 파리 조약의 불리함을 최소화하려 노력했고, 국내적으로는 예수회를 탄압하고 얀센주의자, 국교회주의자, 계몽주의자들을 지원했다. 그러나 고등법원과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1770년 해임되었다.[169] 이후 재정총감 아보 테레(Abbot Terray)가 세금 징수를 강화하고 재정 적자를 일부 줄이는 성과를 냈으나,[88] 곡물 가격 통제를 다시 강화하는 등 혼란은 계속되었다.

루이 15세 서거 1년 전 모습 (1773년), 프랑수아 위베르 드루아이 작


말년의 루이 15세 궁정은 새로운 애첩 뒤바리 부인을 둘러싼 파벌 싸움으로 얼룩졌다. 왕세자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뒤바리 부인을 공공연히 경멸했고, 궁정은 그녀를 지지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구 귀족 세력으로 나뉘었다.[91]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루이 15세는 베르사유 궁전의 오페라 극장 완공, 파리의 루이 15세 광장(현 콩코르드 광장) 조성 등 대규모 건축 사업을 계속 추진했다.

1768년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가 사망했고, 루이 15세는 1774년 5월 10일 천연두에 걸려 6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고 전해진다. 유해는 생드니 대성당에 안치되었고, 왕위는 손자인 루이 16세에게 넘어갔다.

4. 3. 외교 및 전쟁

이아생트 리고가 그린 루이 15세의 초상화, 1742년


성년이 되어 국사를 맡게 된 루이 15세는 추기경 플뢰리에게 정책을 위임했다. 플뢰리는 중상주의 정책을 채택해 경제 부흥을 꾀했고, 영토 확장에도 주력했다. 1733년 폴란드 왕 아우구스트 2세가 사망하자, 프랑스는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의 아버지인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를,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작센 선제후를 새 왕으로 지지하면서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1733~1738년)이 발발했다. 이 전쟁은 1738년 빈 조약으로 마무리되었는데, 이 조약에 따라 마리아 테레지아와 로렌 공 프랑수아(훗날 신성 로마 황제 프란츠 1세)의 결혼이 성사되었고, 로렌 지방은 스타니스와프에게 주어졌다가 그가 사망한 1766년 프랑스 영토로 편입되었다. 이는 부르봉 왕조의 마지막 영토 확장이었다. 또한 플뢰리는 오스트리아와 오스만 제국 사이의 분쟁을 조정하여 벨그라드 조약 체결을 도왔고, 이로 인해 오스만 제국 내 프랑스의 카피툴라시옹 특권이 갱신되어 중동 무역에서 우위를 확보했다.

이러한 외교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플뢰리 말기 프랑스는 또 다른 대외 전쟁에 휘말렸다. 1740년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6세가 사망하자 그의 딸 마리아 테레지아의 계승권을 두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1748년)이 발발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실레지아를 침공하자, 프랑스는 전통적인 합스부르크 경쟁 관계에 따라 프로이센 및 바이에른과 동맹을 맺고 오스트리아에 맞섰다. 전쟁 초기 프랑스-바이에른 연합군은 린츠프라하를 점령했으나, 1742년 영국조지 2세가 오스트리아 편으로 참전하고 프로이센이 실레지아를 확보한 후 동맹에서 이탈하면서 전세가 불리해졌다.

갑옷을 입은 루이 15세


1743년 플뢰리 추기경이 사망하자 루이 15세는 직접 통치를 시작했다. 전쟁의 주 무대가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현재의 벨기에)로 옮겨가면서 프랑스는 모리스 드 삭스 원수의 지휘 아래 전세를 역전시켰다. 루이 15세는 1745년 퐁텐루아 전투에 직접 참관하여 프랑스의 승리를 목격했고, 이후 로쿠 전투(1746년)와 라우펠트 전투(1747년)에서도 승리하며 브뤼셀을 점령하는 등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대부분을 장악했다.

루이 15세와 모리스 드 삭스라우펠트 전투 (1747년 7월 2일)에 참가한 모습


1748년 아헨 조약(Treaty of Aix-la-Chapelle) 이후 몇 년 동안의 유럽


그러나 계속되는 전쟁과 영국과의 해상전으로 인한 무역 손실 때문에 루이 15세는 빠른 종전을 원했다. 1748년 체결된 엑스라샤펠 조약에서 루이 15세는 놀랍게도 점령했던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 니스, 사보이아 등을 모두 반환하고, 인도의 마드라스를 영국에 돌려주는 대신 북아메리카의 루이스버그를 돌려받았다. 실질적으로 프랑스가 전쟁을 통해 얻은 것은 거의 없었으며, 특히 많은 희생을 치르고 점령한 남부 네덜란드를 반환한 것에 대해 국내 여론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평화만큼 어리석다"(Bête comme la paix프랑스어)는 표현이 유행했다.[44] 전쟁으로 인한 재정 손실을 메우기 위해 정부가 모든 소득에 5%를 과세하는 '뱅티엠'(vingtième) 세금을 신설하려 했으나, 성직자와 귀족, 고등법원(Parlement)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은 유럽뿐 아니라 해외 식민지 경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서인도 제도, 북아메리카, 인도 등지에서 영국과의 경쟁이 격화되었는데, 이 전쟁과 이후 7년 전쟁을 거치면서 프랑스는 해외 식민지 경쟁에서 영국에 대한 우위를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북아메리카 대륙의 전투(생트푸아 전투)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실레지아를 차지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강력해지자 프랑스는 불안을 느꼈다. 결국 프랑스는 200년간의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어 프로이센을 견제하려 했다. 이는 외교 혁명이라 불린다. 오스트리아 역시 실레지아 탈환을 노리고 있었기에 동맹은 쉽게 성사되었다. 프랑스는 러시아와도 손을 잡았고, 프로이센은 영국의 지원을 받았다. 1756년 시작된 이 전쟁은 7년간 지속되어 7년 전쟁으로 불린다. 전쟁은 실레지아 영유권을 둘러싸고 시작되었지만, 전 유럽 국가들이 개입하고 해외 식민지 쟁탈전 양상까지 띠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로스바흐 전투 등에서 프로이센군에게 대패했고, 북아메리카에서는 영국군에게 퀘벡몬트리올을 빼앗겼다.

1763년 체결된 파리 조약으로 프랑스는 캐나다와 미시시피 강 동쪽의 루이지애나 영토, 세네갈, 인도에서의 영향력 대부분을 영국에게 넘겨주었고, 미시시피 강 서쪽 루이지애나는 동맹국 스페인에게 양도했다. 프랑스가 유지한 것은 설탕 산지인 서인도 제도의 일부 섬들뿐이었다. 이 조약은 "프랑스 역사상 가장 비참한 조약"으로 평가받으며,[153] 프랑스는 루이 14세 시대의 영광을 상당 부분 상실했고, 영국은 세계 제국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대관식 복장을 입은 성년 루이 15세


7년 전쟁 이후, 쇼아죌 공작이 외무대신과 육군대신을 겸하며 국정을 주도했다. 그는 영국에 대한 복수를 목표로 프랑스 군대와 해군 재건에 힘썼다. 새로운 군사 학교들을 설립하고, 프로이센을 모델로 군제를 개혁했으며, 해군 조선소를 확충하여 1772년까지 상당한 규모의 함대를 재건했다.[81] 그는 영국 본토 침공 계획까지 세웠으며, 영국이 아메리카 식민지에 과세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이것이 혁명으로 이어질 가능성에 주목하기도 했다.[83] 쇼아죌은 또한 부르봉 왕가가 다스리는 스페인, 나폴리, 토스카나와 가족 동맹(Pacte de Famille)을 맺어 외교적 기반을 다졌다. 그러나 영국에만 집중한 나머지 폴란드, 프로이센, 러시아 등 동유럽 외교에는 소홀하여, 1772년 제1차 폴란드 분할 당시 프랑스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다.[89] 반면, 스웨덴에서는 구스타프 3세가 쿠데타를 일으켜 왕권을 강화할 때 프랑스가 자금과 정보(비밀 외교기관 ''Secret du Roi'')를 지원하여 성공을 도왔다.[90] 쇼아죌은 1770년 궁정 내 정쟁으로 해임되었는데, 이후 외교 정책은 다소 혼란을 겪었다. 루이 15세는 스페인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영국과의 포클랜드 제도 위기를 전쟁 없이 해결하도록 중재했다.

5. 친정 시대 (1743-1774)

1743년 플뢰리 추기경이 사망하자, 루이 15세는 루이 14세처럼 총리를 두지 않고 직접 통치를 시작했다. 이 시기 루이 15세는 여러 정부(情婦)를 두었는데, 특히 퐁파두르 부인과 뒤 바리 부인은 그의 치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최애왕'(Bien-Aimé)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으나, 사생활과 정치 운영 방식으로 인해 점차 인기를 잃었다.

'''루이 15세와 마리 레슈친스카 사이의 자녀'''
사진이름생일사망기타
루이즈엘리자베트1727년 8월 14일1759년 12월 6일(32세)파르마 공작 필리포와 결혼. 슬하 1남 2녀.
앙리에트1727년 8월 14일1752년 2월 10일(24세)프랑스의 루이즈엘리자베트와 쌍둥이 자매. 미혼.
루이즈1728년 7월 28일1733년 2월 19일(4세)요절.
루이 페르디낭1729년 9월 4일1765년 12월 20일(36세)왕세자. 후임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 루이 18세, 샤를 10세의 아버지
]]필리프1730년 8월 30일1733년 4월 7일(2세)앙주 공작. 요절
아델라이드1732년 3월 23일1800년 2월 27일(67세)미혼.
빅투아르1733년 5월 11일1799년 6월 7일(66세)미혼.
소피1734년 7월 17일1782년 3월 3일(47세)미혼.
]]테레즈1736년 5월 16일1744년 9월 28일(8세)요절.
루이즈 마리1737년 7월 15일1787년 12월 23일(50세)수녀가 됨.



친정을 시작하며 루이 15세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40-1748)에 휘말렸다. 초기에는 중립을 표방했으나[31], 결국 프로이센, 바이에른 등과 동맹을 맺고 오스트리아와 전쟁에 돌입했다.[32] 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네덜란드 전선에 참전하여 퐁텐느아 전투 (1745) 등의 승리를 목격하기도 했다.[35] 그러나 전쟁은 막대한 비용을 소모시켰고,[33] 1748년 아헨 조약에서 프랑스가 점령했던 영토 대부분을 반환하면서 국내외적으로 큰 실망을 안겼다.[43][44]

1745년부터 퐁파두르 부인이 왕의 공식 정부가 되어 약 20년간 정치와 문화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50] 그녀는 장관 임명 등에 관여했으며, 외교 혁명으로 이어진 오스트리아와의 동맹 체결에도 일정 부분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49][150]

1756년 발발한 7년 전쟁 (1756-1763)은 프랑스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유럽 대륙과 북미, 인도 등지에서 영국, 프로이센 등과 맞서 싸웠으나 연이어 패배했다. 1763년 파리 조약으로 프랑스는 캐나다를 비롯한 북미 대륙의 광대한 영토와 인도에서의 영향력을 영국에 넘겨주며 국제적 위상이 크게 실추되었다.[153]

계속되는 전쟁과 궁정의 사치로 인해 국가 재정은 심각한 난관에 봉착했다. 루이 15세는 장-바티스트 드 마쇼 드 아르누빌 등을 통해 조세 개혁을 시도했으나, 면세 특권을 지키려는 귀족성직자, 그리고 고등법원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번번이 실패했다.[37][38][40]

1764년 퐁파두르 부인이 사망한 후, 쇼아주르 공작이 정국을 주도했으나 고등법원과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1770년 쇼아주르가 실각하고 대법관 모푸가 등용되었다. 모푸는 1771년 고등법원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고 사법 제도를 개혁하는 강경책을 단행하여 일시적으로 왕권을 강화했다.[86][87] 그러나 재정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왕의 새로운 애첩 뒤 바리 부인의 영향력과 사치스러운 생활은 국민들의 원성을 더욱 키웠다. 모푸의 개혁 역시 루이 15세 사후 루이 16세에 의해 폐지되면서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는 이르지 못했다.[169]

이 시기는 볼테르, 몽테스키외, 루소계몽주의 사상가들이 활발히 활동하며 프랑스 사회와 지성계에 큰 영향을 미치던 때이기도 했다.

알렉시스 그리무(Alexis Grimou)가 그린 루이즈 쥘리 드 메이유(Louise Julie de Mailly)로 추정되는 초상화

5. 1.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40년 10월 29일, 퐁텐블로에서 사냥 중이던 루이 15세에게 신성 로마 황제 카를 6세가 사망하고 그의 딸 마리아 테레지아가 왕위를 계승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루이 15세는 처음에는 "이런 상황에서는 전혀 개입하고 싶지 않다"며 중립적인 태도를 보였으나[31], 이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토를 차지할 기회를 노리던 프랑스 동맹국들과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통해 영광을 얻고자 했던 장군들의 생각과는 달랐다. 한편, 프로이센에서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군사적 재능과 영토 확장의 야심을 가진 프리드리히 2세는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7세를 지원하며 마리아 테레지아의 계승에 도전했고, 1740년 12월 17일 오스트리아의 실레시아를 침공하며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프랑스의 실권자였던 노령의 플뢰리 추기경은 전쟁을 막기에는 힘이 부족했다.

플뢰리 추기경은 벨릴 섬 원수를 프랑크푸르트의 제국 의회에 대사로 파견하여 바이에른 선제후를 지지하는 외교적 방법으로 전쟁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에 대한 적개심이 강했던 벨릴 섬 원수는 오히려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고 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32] 프랑스와 바이에른 연합군은 빠르게 린츠를 점령하고 프라하를 포위했다. 1741년 4월 10일, 프리드리히 2세는 몰비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에게 큰 승리를 거두었다. 5월 18일, 플뢰리 추기경은 프랑스, 프로이센, 스페인, 바이에른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동맹을 결성했으며, 이후 폴란드와 사르데냐도 합류했다.

그러나 1742년부터 전세는 프랑스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하노버 선제후이기도 했던 영국 국왕 조지 2세가 오스트리아 편으로 참전하여 직접 군대를 이끌고 독일에서 프랑스군과 맞섰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헝가리 군대는 린츠를 되찾고 바이에른의 뮌헨까지 진격했다. 6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오스트리아로부터 실레시아 공국을 할양받는 조건으로 동맹에서 이탈했다. 벨릴 섬 원수는 8천 명의 병력 손실을 입고 프라하에서 철수해야 했다. 프랑스는 이후 7년간 동맹 관계가 계속 변하는 혼란 속에서 막대한 비용이 드는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재무 총감 오리는 매우 비인기 정책이었던 '10분의 1세'(딕시엠)를 부활시켜야 했다. 플뢰리 추기경은 전쟁이 끝나기 전인 1743년 1월 29일 사망했고, 이후 루이 15세는 직접 통치를 시작했다.[33]

독일에서의 전황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노아이유 공작이 이끄는 프랑스-바이에른 연합군은 데팅겐 전투에서 조지 2세가 이끄는 영국, 헤센, 하노버 연합군에게 패배했고, 9월에는 프랑스군이 독일에서 완전히 철수해야 했다.[34]

1744년, 주 전장이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로 옮겨지면서 프랑스의 상황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프리드리히 2세가 다시 프랑스 편에 서기로 결정했고, 루이 15세는 직접 네덜란드로 가 군대를 지휘했다. 프랑스 야전 사령관은 독일 출신의 유능한 원수 모리스 드 삭스가 맡았다. 1745년 5월 11일 퐁텐느아 전투에서 루이 15세는 어린 아들 루이 페르디낭 왕세자와 함께 포화를 겪으며 영국,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연합군에 대한 프랑스의 승리를 지켜보았다. 왕세자가 적군의 시체를 보고 흥분하자, 루이 15세는 "승리의 대가가 무엇인지 보아라. 적의 피도 결국 사람의 피다. 진정한 영광은 그 피를 아끼는 데 있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35] 모리스 드 삭스는 이후 로쿠 전투 (1746년)와 라우펠트 전투 (1747년)에서도 연이어 승리했다. 1746년 프랑스군은 브뤼셀을 포위하여 점령했고, 루이 15세는 개선 장군으로 입성했다. 국왕은 승리의 대가로 삭스 원수에게 루아르 계곡의 샹보르 성을 하사했다.

루이 15세, 모리스-캉탱 드 라 투르(Maurice-Quentin de La Tour) 초상화 (1748)


프랑스 조세 제도 개혁을 시도했던 재무장관 장 바티스트 드 마쇼 다르누빌(Jean Baptiste de Machault D'Arnouville)


1743년 1월 플뢰리 추기경이 사망하자, 루이 15세는 루이 14세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에게 보낸 편지에 적힌 조언("스스로 다스림을 받지 마십시오. 주인이 되십시오. ... 스스로 결정하십시오.")[36]에 따라 총리 없이 직접 통치하기로 결정했다. 재무장관 장 바티스트 드 마쇼 다르누빌과 육군장관 다르장송 백작이 정부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루이 15세는 막대한 전쟁 부채를 해결하고 조세 제도를 개혁하고자 했다. 재무장관 다르누빌은 1749년 5월, 전쟁 부채 상환을 위한 국채 발행과 함께 모든 프랑스 국민의 순수입에 5%의 세금을 부과하는 '20분의 1세'(뱅티엠) 도입을 골자로 하는 개혁안을 발표했다. 이 새로운 세금은 기존의 '10분의 1세'와 달리 면세 특권을 누리던 성직자와 귀족에게도 적용되는 것이었다.[37]

볼테르 등 일부 지식인들은 개혁안을 지지했지만, 귀족과 교회는 즉각적이고 격렬하게 반발했다. 파리 고등법원은 귀족과 부유한 부르주아 법관들의 반대로 법령 등록을 거부했으나, 왕의 강압적인 요구에 마지못해 5월 19일 승인했다.[38] 그러나 브르타뉴, 랑그독 등 지방의 고등법원과 교회 조직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왕실 정부는 일부 고등법원을 폐쇄하거나 의원들을 추방하는 등 강경하게 대응했지만, 저항을 완전히 잠재우지는 못했다.[37]

파리에서는 얀센주의자들이 다수 포함된 오피탈 제네랄(파리의 병원 및 구호 시설 연합체)의 운영권을 둘러싸고 왕과 파리 고등법원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왕이 병원 운영진을 교체하려 하자 고등법원은 이를 거부하며 왕권에 대한 도전을 드러냈다. 이는 입법부가 왕이 아닌 국가의 합법적인 권력 원천이라고 주장하는 초기 사례 중 하나로 평가된다.[39]

교회에 대한 과세 시도 역시 난관에 부딪혔다. 성직자들은 수입 신고를 거부했고, 결국 왕은 1750년 12월 과세를 철회하고 교회가 자발적으로 내는 '자유 기부금'(동 그라튀)에 의존하기로 했다. 이는 왕이 얀센주의자들의 비판으로부터 자신을 옹호해 준 보몽 대주교 등 교회 세력과의 타협을 선택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40]

네덜란드와 이탈리아에서 전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1747년 여름 프랑스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현재의 벨기에) 전역을 장악했다.[41] 1748년 3월, 루이 15세는 전쟁 종식을 위해 아헨에서 평화 회의를 제안했다. 모리스 드 삭스마스트리흐트를 함락시키자 네덜란드 본토 침공을 우려한 영국이 조속한 타결을 압박했다. 해상 전쟁으로 인한 무역 손실 때문에 빠른 종전을 원했던 루이 15세는 놀라울 정도로 관대한 조건을 제시했다. 1748년 10월 체결된 아헨 조약에서 프랑스는 점령했던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 니스, 사보이아, 인도의 마드라스를 모두 반환했다. 대신 오스트리아는 파르마 공국 등을 스페인 왕자 필리포에게 넘겨주었고, 영국은 북아메리카의 루이스버그 요새와 케이프브레턴섬을 프랑스에 반환했다. 또한 프랑스는 재커바이트의 지도자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를 추방하기로 합의했다.[42]

전쟁 종식은 환영받았지만, 조약의 세부 내용이 알려지자 프랑스 내에서는 실망과 분노가 터져 나왔다. 특히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점령한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아무런 대가 없이 반환한 것에 대한 비판이 거셌다. 삭스 원수를 비롯한 군 지휘관들도 격분했다. 루이 15세는 네덜란드가 강대국 간 영구적인 분쟁의 씨앗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고, 프랑스의 영토 확장은 이미 충분하며 번영을 증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플뢰리 추기경에게 배운 종교적 신념에 따라 부당하게 타인의 재산을 빼앗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왕국을 가장 잘 방어하는 방법은 결코 그것을 늘리려 하지 않는 것"이라는 라틴어 격언을 자주 인용했으며, 볼테르 역시 "프랑스가 영원한 질투의 대상이 될 플랑드르의 두세 도시를 얻는 것보다 동맹국의 행복을 생각하는 것이 더 낫고 유용하다"며 왕의 결정을 지지했다.[43] 그러나 루이 15세는 이러한 자신의 결정을 대중에게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고, 그 결과 "Bête comme la paix|평화만큼 어리석다프랑스어" 또는 "Travailler pour le roi de Prusse|프로이센 왕을 위해 일하다프랑스어" (아무 소득 없이 일한다는 의미)와 같은 조롱 섞인 표현이 유행하게 되었다.[44] 전쟁 중 1744년 메츠에서 왕이 중병에 걸렸을 때, 정부(情婦)였던 샤토루 공작 부인을 버리라는 사제의 요구를 따랐다가 회복 후 다시 불러들이려 했으나 그녀가 급사하는 사건이 있었다.[49] 이 사건과 함께 아헨 조약에 대한 불만은 왕의 명성을 크게 실추시켰고, 왕의 사생활과 정책에 대한 비판적인 팜플렛이 널리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5. 2. 7년 전쟁

전쟁으로 인해 악화된 재정을 해결하기 위해 재무총감 장-바티스트 드 마쇼 드 아르누빌은 성직자와 귀족을 포함한 모든 국민에게 "20분의 1세"를 부과하려 했다. 그러나 이는 면세 특권을 침해당하는 성직자와 귀족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고, 파리 고등법원은 왕령의 등기를 거부하며 저항했다. 결국 신세는 도입되었지만 여러 차례 양보를 거듭하며 실질적으로 무력화되었다. 또한 잔세니즘 문제로 국왕과 파리 고등법원이 대립하면서 국왕의 권위가 약화되었다.

1756년, 프랑스는 오랜 숙적이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고 7년 전쟁에 참전했다. 이는 유럽의 전통적인 외교 구도를 뒤엎는 "외교 혁명"으로 불렸다. 프로이센프리드리히 2세를 싫어했던 퐁파두르 부인이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에 영향을 미쳤다는 이야기가 있지만,[149] 실제 역할은 알려진 것만큼 크지 않았을 수 있다.[150]

1757년 1월 5일, 루이 15세가 마차에 오르려던 중 로베르-프랑수아 다미앙이라는 남자에게 단검으로 오른쪽 옆구리를 찔리는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했다. 다미앙은 즉시 체포되었고 국왕의 상처는 치명적이지 않았지만, 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은 루이 15세는 한동안 깊은 침체에 빠졌다.[151] 다미앙은 파리 고등법원 사법관의 하인으로, 주인에게서 들은 국왕에 대한 악평 때문에 범행을 결심했다고 자백했다. 그는 3월에 공개적으로 사지 분시형을 당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육군 장관 달장송 백작과 해군 장관 겸 국새 상서였던 마쇼 드 아르누빌이 파면되었다. 유능한 정치가였던 아르누빌의 실각에는 퐁파두르 부인의 미움을 산 것도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여겨진다.[152]

7년 전쟁에서 프랑스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유럽 전선에서는 프리드리히 2세가 이끄는 프로이센군에게 1757년 11월 로스바흐 전투에서 참패했다. 북아메리카 대륙(프렌치 인디언 전쟁)에서도 영국군에게 연이어 패배하며 퀘벡몬트리올을 상실했다.

1763년 2월, 전쟁을 종결짓는 파리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프랑스는 캐나다, 미시시피 강 동쪽의 루이지애나, 서인도 제도의 일부 섬 등 광대한 해외 식민지를 영국에게 넘겨주었다. 이는 "프랑스 역사상 가장 비참한 조약"이라는 평가를 받았다.[153] 전쟁과 외교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퐁파두르 부인은 이듬해인 1764년 4월 15일에 사망했고, 루이 15세는 그녀의 장례 행렬을 눈물로 지켜보았다고 전해진다.[154]

5. 3. 퐁파두르 후작 부인

퐁파두르 부인


잔느 앙투아네뜨 푸아송(Jeanne-Antoinette Poisson)은 루이 15세의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정부였다. 그녀는 파리의 조세농업인(Ferme générale)의 사생아 딸로 태어나 은행가 샤를 기욤 르노르망 드 에티올과 결혼했다. 왕의 사냥 중 한 번 눈에 띄었으며, 1745년 카니발 축제의 가면무도회에서 왕을 공식적으로 만났다. 같은 해 7월, 그녀는 왕의 정부가 되어 공식적으로 퐁파두르 후작 부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50]

이후 20년 동안 그녀는 왕의 측근이자 조언자로서 장관 임명과 해임에 영향을 미쳤다. 그녀의 의견은 장-바티스트 드 마쇼 드 아르누빌이나 르네 루이 드 보아예 드 폴미 다르장송 같은 유능한 장관들의 실각으로 이어지기도 했고, 일부 무능한 군 지휘관들의 승진에도 관여했다. 그러나 그녀의 가장 성공적인 선택은 왕의 가장 유능한 장관 중 한 명이 된 쇼아죌 공작의 발탁이었다. 1750년 왕과의 성적인 관계는 끝났지만, 그녀는 왕의 가장 가까운 조언자이자 명예 정부(Maîtresse-en-titre)로 남았다. 1752년 공작 부인으로, 1756년에는 왕비 궁정의 숙녀로 승격되었으며, 음악과 예술, 종교 시설의 중요한 후원자였다.[50]

1756년 프랑스가 오스트리아 편에 서서 7년 전쟁에 참전하는 과정에서, 전통적인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적대 관계를 뒤집는 이른바 “외교 혁명”이 일어났다. 퐁파두르 부인은 프로이센프리드리히 2세를 싫어하여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을 중재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알려졌으나,[149] 실제 그 역할은 세간에 알려진 만큼 크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150] 1757년 다미앙의 국왕 암살 미수 사건 이후, 유능한 정치가였던 해군 장관 겸 국새 상서 마튀 드 아르누빌이 파면되었는데, 이는 퐁파두르 부인의 미움을 샀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152]

프랑수아-위베르 드루아의 마담 드 퐁파두르 초상화 (1763-64)


1763년에서 1764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은 유난히 혹독했고, 퐁파두르 부인은 폐렴에 걸려 1764년 4월 15일에 사망했다. 왕은 깊이 슬퍼했지만, 엄격한 궁정 의례에 따라 그녀의 신분이 왕보다 낮다는 이유로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왕은 그녀가 죽은 후 몇 주 동안 은둔 생활을 했다.[50][72] 그녀가 사망하자 궁정에서는 즉시 그녀를 대체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왕은 새로운 정부를 원하지 않았다.[72]

5. 4. 사법 개혁

1766년 1월, 왕세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국왕에게 렌(Rennes)의 고등법원(파르망)은 다시 한번 국왕의 세금 징수 권한을 인정하지 않았다. 국왕이 이를 무시하자, 렌과 루앙(Rouen)의 고등법원은 국왕이 "왕위를 수락할 때 국가에 맹세한 약속"을 어기고 있다고 항의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 내용을 보고받은 루이 15세는 낭독을 중단시키고, 자신은 국가가 아닌 신에게만 맹세했으며 그러한 비난은 거짓이라고 선언했다. 1766년 3월 3일, 그는 갑작스럽게 베르사유를 떠나 파리 시테 궁전에 있는 파리 고등법원 회의에 직접 참석했다. 그의 장관 중 한 명이 대독한 메시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주권은 오직 나에게만 있으며… 입법권은 의존이나 공유 없이 오직 나에게만 속한다… 공공질서는 전적으로 나에게서 나온다… 혼란과 무정부가 합법적인 질서를 대신하고 있으며, 나의 주권에 도전하는 모순적인 광경은 나를 슬프게 만들어, 나의 백성을 이러한 시도의 슬픈 결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신으로부터 받은 모든 권력을 사용해야만 하는 슬픈 필요성에 처하게 한다."[75] 이 연설은 즉시 "채찍질 연설"(Séance de la Flagellation프랑스어)로 불렸고, 공식 언론에 발표되어 모든 정부 기관에 배포되었다. 이는 그의 정치적 유언과도 같았다. 고등법원과 국왕 사이의 갈등은 잠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지만, 근본적으로 해결되지는 않았다.[76]



이후 국왕은 보수적인 세 명의 장관으로 구성된 이른바 "삼두정치(Triumvirate)"에 정부 운영을 맡겼다. 이 삼두정치의 핵심 인물은 1763년부터 1768년까지 파리 고등법원 의장을 지낸 대법관 르네 드 모푸였다. 모푸와 다른 두 보수파 장관, 재무장관 테레 신부 및 외무·전쟁 장관 아이귀용 공작이 정부를 이끌었다.

모푸의 최우선 과제는 왕권에 반항적인 고등법원들을 통제하고 국가 현대화 계획을 계속 추진하는 것이었다. 당시 파리 고등법원 의원 대부분은 사실상 파업 상태에 들어가 사법 업무를 거부하고 국왕의 칙령 승인을 거부하고 있었다. 1771년 1월 21일, 왕실 요원들과 근위병들이 각 고등법원 의원들의 집을 방문하여 그들의 직위를 박탈하고 파리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 그곳을 벗어나지 말 것을 명령했다.[86] 이어 2월에는 더욱 급진적인 조치가 취해졌다. 기존의 지방 고등법원들은 폐지되고, 중대한 형사 및 민사 사건을 심리하는 6개의 새로운 지방 고등 법원으로 대체되었다. 또 다른 칙령은 고등법원이 민사 사건 처리를 위해 부과하던 높은 수수료(이는 의원들의 주요 수입원이었다)를 폐지하고, 민사 재판을 무료로 진행하도록 했다. 파리 고등법원의 권한은 대체로 유지되었다. 지방 고등법원이 사라지자 정부는 별다른 반대 없이 새로운 법률과 세금을 제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루이 15세 사후, 귀족들의 요구에 따라 루이 16세가 지방 고등법원을 복원하면서 원점으로 돌아가게 된다.[87]

5. 5. 루이 15세 강도 상해 사건

앙주-자크 가브리엘(Ange-Jacques Gabriel)이 그린 로베르-프랑수아 다미앵(Robert-François Damiens), 1757년


1757년 1월 5일, 베르사유 궁전의 그랑 트리아농 안뜰에서 루이 15세가 마차에 오르려던 순간, 로베르-프랑수아 다미앵(Robert-François Damiens)이라는 남자가 왕의 경비병들을 뚫고 달려들어 작은 칼(단검)으로 국왕의 오른쪽 옆구리를 찔렀다.[57][151] 왕의 경비병들이 즉시 다미앵을 붙잡았으나, 국왕은 그를 해치지 말라고 명령했다. 루이 15세는 트리아농의 자기 방으로 걸어 올라갔는데, 피를 많이 흘리고 있음을 발견하고 의사와 사제를 불렀으며, 이후 기절했다.[57] 다행히 두꺼운 겨울옷 덕분에 상처는 깊지 않아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151]

이 소식이 파리에 전해지자 불안한 군중들이 거리에 모여들었다. 교황, 오스트리아 대공비, 그리고 당시 프랑스와 전쟁 중이던 영국의 조지 2세 국왕까지 루이 15세의 빠른 회복을 기원하는 메시지를 보냈다.[57]

범인 다미앵은 공범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고문을 당했으며, 파리 고등법원 앞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시중들던 사법관 집 주인으로부터 국왕에 대한 악평을 듣고 범행을 결심했다고 자백했다.[152] 국왕에게 비판적이던 파리 고등법원은 이번 기회에 국왕에 대한 충성심을 보이고자[57] 다미앵에게 가장 극심한 형벌인 사지 분시형을 선고했다. 1757년 3월 28일부터 29일까지 다미앵은 파리의 그레브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사지 분시형에 처해졌고, 그의 시신은 불태워졌다. 또한 그가 태어난 집은 파괴되었고, 그의 아버지와 아내, 딸은 프랑스에서 추방되었으며, 다른 형제자매들은 성을 바꾸도록 강요받았다.[58][59]

루이 15세는 신체적으로는 매우 빨리 회복되었지만, 이 암살 시도는 그의 정신에 깊은 우울감을 남겼다.[151] 그의 신하 중 한 명인 쉬베르니 백작(Duford de Cheverny)은 훗날 국왕이 자신의 회복을 축하하는 궁정 사람들에게 "그래, 몸은 괜찮다"라고 답하면서도 머리를 만지며 "하지만 이곳은 좋지 않고, 치유될 수 없다"라고 말했다고 기록했다.[58] 암살 시도 이후 국왕은 왕세자를 모든 왕실 의회 회의에 참석하도록 했고, 한때 궁녀들과 만나던 베르사유 궁전의 작은 공간들을 조용히 폐쇄했다.[58]

이 사건의 여파로 육군 장관 달장송 백작과 해군 장관 겸 국새 상서였던 장-바티스트 드 마쇼 드 아르누빌이 파면되었다. 특히 아르누빌은 재정 개혁을 추진하던 유능한 인물이었으나, 퐁파두르 부인의 미움을 사서 실각했다는 설도 있다.[152]

6. 말년

전쟁으로 인한 재정난 속에서 루이 15세의 말년 통치가 시작되었다.[155] 퐁파두르 부인 사후 외무대신 겸 육군대신인 쇼아주르 공이 정권을 잡았다. 그는 7년 전쟁 패배 이후 영국의 위협에 맞서 프랑스 해군 재건에 힘썼으며, 이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156] 또한 국내에서는 예수회와 대립하던 파리 고등법원과 손잡고 예수회를 해산시켰으며, 곡물 거래 자유화 등 경제 개혁을 시도했으나 그 효과는 논란이 있다.[157]

1765년 왕세자 루이 페르디낭이 사망하자 그의 삼남 베리 공작(훗날 루이 16세)이 새로운 도팽(왕세자)이 되었다. 쇼아주르 공은 오스트리아와의 동맹 강화를 위해 1770년 새 왕세자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 마리 앙투아네트의 정략결혼을 성사시켰다.

1768년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가 사망한 후, 루이 15세는 뒤 바리 부인을 만나 총애하기 시작했다.[158] 평민 출신인 뒤 바리 부인의 등장은 쇼아주르 공과의 갈등을 유발했고, 그녀는 쇼아주르 공에 반대하는 세력과 결탁하며 정쟁에 휘말리게 되었다.[159]

한편, 국왕과 파리 고등법원 간의 오랜 대립은 계속되었다. 고등법원은 왕의 새로운 세금 부과와 왕권 강화 시도에 사사건건 저항하며 사법 업무를 거부하는 파업을 벌이기도 했다.[60] 왕권의 위기를 느낀 루이 15세는 1770년 12월, 고등법원에 유화적이던 쇼아주르 공을 파면했다. 이후 대법관 모푸(René Nicolas Charles Augustin de Maupeou)를 등용하여 1771년, 고등법원 사법관들을 추방하고 사법관직 매관매직을 폐지하는 등 사법 개혁을 단행하여 고등법원의 힘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이 개혁은 실각한 쇼아주르 공작파와 법복 귀족들의 거센 반발을 샀고, 이들은 뒤 바리 부인을 비방하는 소책자를 퍼뜨리며 국왕의 권위를 더욱 실추시켰다. 쇼아주르 공 실각 후 정권은 모푸, 드 기유옹 공, 아베 텔레(Joseph Marie Terray)의 삼두 정치 체제로 운영되었다.

이 시기 프랑스에서는 계몽사상이 확산되어 볼테르, 몽테스키외, 루소 등이 활동하며 기존 체제에 대한 비판적 논의가 활발해졌다.

루이 15세의 치세를 상징하는 말로 "Après moi le déluge|아프레 무아 르 델뤼주프랑스어(내 뒤에는 홍수가 밀려올 것이다)"라는 문구가 자주 인용되지만, 이는 루이 15세 본인이 직접 한 말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말은 그의 통치 말년과 다가올 왕정의 몰락을 예견하는 듯한 의미로 해석된다.

1774년 4월 말, 루이 15세는 천연두에 걸려 병석에 눕게 되었다. 병세가 악화되자 그는 뒤 바리 부인을 궁정에서 내보내고 5월 10일 64세의 나이로 베르사유 궁전에서 서거했다. 그의 손자인 19세의 베리 공작이 루이 16세로 즉위했다.[160]

6. 1. 로렌과 코르시카 합병

프랑스 혁명 이전 프랑스의 국경은 두 지역이 추가되면서 마지막으로 확장되었다. 국왕의 장인인 스타니슬라스가 통치했던 로렌 공국은 그의 사후 프랑스에 귀속되었고, 1766년 3월 27일부터 28일까지 공식적으로 왕국에 합병되었다.

코르시카 섬의 획득 과정은 더 복잡했다. 이 섬은 공식적으로 제노바 공화국에 속했지만, 1755년 파스칼레 파올리가 독립적인 코르시카 공화국을 선포하면서 반란군이 섬 대부분을 장악했다. 제노바 공화국은 섬을 다시 정복할 군사력이 부족했고, 영국이 섬을 차지하는 것을 막기 위해 루이 15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루이 15세는 프랑스군을 파견하여 항구와 주요 도시를 점령하도록 했다. 전쟁이 끝난 후, 1768년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섬은 공식적으로 프랑스에 할양되었다. 루이는 코르시카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고, 섬에 주둔한 군대는 결국 2만 7천 명에 달했다. 1769년 5월, 코르시카 반란군은 폰테 노부 전투에서 패배했고, 파올리는 영국으로 망명했다. 1770년 코르시카는 공식적으로 프랑스의 한 주(Province)가 되었다.[79]

6. 2. 뒤바리 백작 부인



퐁파두르 부인 사후, 여러 여성이 국왕의 새로운 총애를 얻으려 했으나, 그 자리는 잔 베퀴, 뒤바리 백작 부인에게 돌아갔다. 그녀는 국왕보다 33세 연하였으며, 재봉사 안 베퀴의 사생아였다.[77] 사크뢰쾨르 수녀원에서 교육받은 후 여러 직업을 거쳐 뒤바리 백작의 형인 장 뒤바리의 정부가 되었다. 그녀는 작가와 귀족들이 드나드는 사교 모임을 주최하며 이름을 알렸다. 장 뒤바리에게는 이미 배우자가 있었으므로, 잔에게 합법적인 지위를 부여하기 위해 그는 은퇴한 군인인 동생 기욤 뒤바리 백작과 잔의 결혼을 주선했다. 1768년 9월 1일 결혼했으나 명목상의 결혼이었고, 기욤은 곧 랑그도크의 자택으로 돌아갔다.[78]

귀족들과의 교류를 통해 베르사유 궁전에 초대된 그녀는 즉시 국왕 루이 15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국왕은 그녀를 퐁텐블로로 초대한 뒤 베르사유 궁전에 거처를 마련해주었다. 그녀의 등장은 당시 실권자였던 쇼이외 공작에게는 불쾌한 일이었으나, 궁정 내 그의 정적들에게는 환영받는 일이었다.

뒤바리 부인이 공식적으로 궁정에 소개되기 위해서는 귀족 부인의 도움이 필요했다. 고령의 베른 백작 부인이 거액의 보수를 받고 1769년 4월 22일 그녀를 국왕에게 소개했다. 그러나 이 자리에는 주요 귀부인들이 대부분 불참했으며, 쇼이외 공작은 다음 날 뒤바리 부인을 제외한 모든 궁정 인사를 초청하는 대규모 리셉션을 열어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표시했다.[78]

국왕은 뒤바리 부인에게 베르사유 궁전 내 거처를 마련해주고, 1771년에는 루브시엔에 새로운 파빌리온을 지어 선물했다. 쇼이외 공작은 뒤바리 부인을 공공연히 혐오했으며, 1770년 도팽(훗날 루이 16세)과 결혼하여 베르사유에 온 마리 앙투아네트 역시 그녀를 경멸하여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어리석고 건방진 생물"이라고 묘사했다. 그럼에도 국왕은 임종 직전까지 뒤바리 부인을 곁에 두었으며, 마지막 고해성사를 보기 직전에야 그녀를 궁정에서 내보냈다.

뒤바리 부인의 존재는 전통적인 귀족 사회의 반감을 샀으며, 궁정 밖에서는 파리 고등법원을 중심으로 한 국왕 반대파들이 그녀를 빌미 삼아 국왕을 조롱하는 소재로 이용했다. 그녀는 온갖 부도덕한 행위를 저질렀다는 내용의 음란한 팸플릿의 표적이 되었다.[78]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던 뒤바리 부인은 자신을 혐오하는 쇼이외 공작에 맞서 자연스럽게 그의 반대파와 결탁하며 정쟁에 휘말렸다.[159]

파리 고등법원과의 대립이 격화되자 왕권의 위기를 느낀 루이 15세는 1770년 12월, 고등법원에 영합적인 태도를 보이고 뒤바리 부인과도 대립하던 쇼이외 공작을 파면했다. 실각한 쇼이외 공작파와 법복 귀족들은 뒤바리 부인이 원래 매춘부였다고 비난하는 소책자를 퍼뜨리며 국왕의 권위를 더욱 실추시켰다. 말년의 베르사유 궁정은 뒤바리 부인을 지지하는 세력과 그녀를 경멸하는 쇼이외 공작파 및 마리 앙투아네트 등 구 귀족 세력으로 나뉘어 갈등했다.[91] 국왕은 뒤바리 부인을 위해 자신의 집무실 위층에 호화로운 방을 마련해주었고, 그녀는 국왕이 퐁파두르 부인을 위해 지었던 프티 트리아농과 루브시앵 파빌리옹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수십 년 후, 프랑스 혁명테러 시대에 뒤바리 부인은 구체제의 상징으로 자코뱅의 표적이 되어 1793년 12월 8일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74]

6. 3. 죽음

1774년 4월 26일, 국왕은 뒤 바리 부인과 측근 귀족들과 함께 쁘띠 트리아농으로 떠났고, 몸이 좋지 않다고 알렸다. 그는 다음 날 사냥에 참여했지만 말 대신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그날 저녁에도 여전히 몸이 좋지 않아 궁정 의사를 불렀고, 치료를 위해 베르사유 궁전으로 돌아왔다. 국왕은 여섯 명의 의사와 여섯 명의 외과의에게 진찰을 받았으나, 외과의들은 효과 없이 세 번이나 그의 피를 뽑았다. 피부에 붉은 발진이 나타나자 의사들은 처음에 ‘천연두’(petite variole|프티트 바리올프랑스어)라고 진단했는데, 환자와 의사 모두 이미 이 병을 앓았다고 믿었기 때문에 낙관적인 전망이었다. 특히 도팽(훗날 루이 16세)과 마리 앙투아네트를 포함한 왕족들은 이 병에 대한 면역력이 없었기 때문에 궁을 떠나도록 했다. 뒤 바리 부인은 그와 함께 남았다.[92]

시간이 지나면서 질병의 붉은 발진은 더욱 심해졌고, 의사들은 그의 생명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5월 1일 아침, 파리 대주교가 도착했지만 국왕을 놀라게 할 것을 우려하여 그의 방에 들어가지 못했다. 국왕은 의식이 있고 쾌활했다. 그러나 5월 3일, 그는 자신의 손에 있는 발진을 보고 대주교를 불러 "나는 천연두에 걸렸다."라고 말했다.[92] 대주교는 그에게 마지막 의식을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그날 밤, 국왕은 뒤 바리 부인을 불러 진단 결과를 알리고 "메츠의 추문을 다시 일으킬 수는 없습니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당신은 허락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는 신과 나의 백성에게 빚을 졌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내일 떠나야 합니다."라고 말하고 그녀를 궁정에서 물러나게 했다.[92] 5월 7일, 그는 고해 신부를 불러 마지막 의식을 받았다.[92][160]

병세는 계속 악화되었고, 5월 9일 방문객인 크루아 공작은 천연두 발진이 어두워지면서 국왕의 얼굴이 "청동 가면"처럼 보였다고 기록했다.[92] 루이 15세는 1774년 5월 10일 새벽 3시 15분에 딸들인 아델라이드, 빅투아르, 소피, 루이즈가 곁에 있는 가운데 베르사유 궁전에서 6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92] 그의 손자인 19세의 베리 백작이 루이 16세로 즉위했지만, 그는 “나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는데”라고 한탄했다고 전해진다.[160]

7. 가족 관계



1725년 2월, 루이 15세의 건강이 악화되자 왕위 계승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 이에 당시 섭정을 맡고 있던 부르봉 공작은 아직 나이가 어려 출산이 불가능했던 약혼녀 스페인 공주 마리아나 비토리아와의 약혼을 파기하기로 결정했다.[137] 마리아나 비토리아는 스페인으로 돌려보내졌고, 이 일로 스페인과의 관계가 잠시 악화되었다. 이후 유럽의 여러 왕가에서 출산 가능한 나이의 공주를 물색하게 되었다. 마리아나 비토리아는 훗날 포르투갈 국왕 조제 1세와 결혼했다.

새로운 왕비로는 몰락한 폴란드의 전 국왕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의 딸인 21세의 마리 레슈친스카가 최종적으로 결정되었다. 스타니스와프는 왕위를 잃고 망명 중이었기 때문에, 이 결혼은 프랑스 국왕에게는 격이 맞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으며 국민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었다.[138] 결혼식은 1725년 9월에 거행되었다. 루이 15세는 초기에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를 매우 아꼈으며, 왕비는 거의 매년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여 총 11명의 자녀(사산 1명 포함)를 낳았다. 자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 '자녀' 문단을 참고하라.

7. 1. 자녀

1725년 마리 레슈친스카와 결혼하여[16][138] 1727년부터 1737년까지 11명의 자녀(사산 1명 포함)를 두었다.[16] 왕비는 거의 매년 임신과 출산을 반복했다. 아들 중에서는 장남인 왕세자 루이 페르디낭만이 유년기를 넘겼으며, 그의 탄생은 프랑스 사회 전반에서 크게 축하받았다.[16] 루이 페르디낭은 이후 프랑스의 국왕이 되는 루이 16세, 루이 18세, 샤를 10세의 아버지가 되었다.[16] 차남인 앙주 공작 필리프는 요절했다. 딸들 중에서는 쌍둥이였던 장녀 루이즈 엘리자베트와 앙리에트만이 베르사유 궁전에서 자랐고, 다른 딸들은 퐁트브로 수도원으로 보내져 교육받았다.[16]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는 다음과 같다.

사진이름생일사망기타
루이즈엘리자베트
루이즈 엘리자베트1727년 8월 14일1759년 12월 6일(32세)파르마 공작 필리포와 결혼. 슬하 1남 2녀.
앙리에트
앙리에트1727년 8월 14일1752년 2월 10일(24세)루이즈 엘리자베트와 쌍둥이 자매. 미혼.
마리 루이즈
마리 루이즈1728년 7월 28일1733년 2월 19일(4세)요절.
루이 페르디낭
루이 페르디낭1729년 9월 4일1765년 12월 20일(36세)왕세자.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 라파엘라와 결혼, 이후 작센의 마리 조제프와 재혼하여 루이 16세, 루이 18세, 샤를 10세 등을 낳음.
필리프
필리프1730년 8월 30일1733년 4월 7일(2세)앙주 공작. 요절.
마리 아델라이드
마리 아델라이드1732년 3월 23일1800년 2월 27일(67세)미혼.
빅투아르
빅투아르1733년 5월 11일1799년 6월 7일(66세)미혼.
소피
소피1734년 7월 17일1782년 3월 3일(47세)미혼.
사산아1735년 3월 28일1735년 3월 28일
테레즈1736년 5월 16일1744년 9월 28일(8세)요절.
루이즈 마리
루이즈 마리1737년 7월 15일1787년 12월 23일(50세)수녀가 됨.



루이 15세의 적자 중 현대까지 후손이 이어지는 것은 장녀 루이즈 엘리자베트와 장남 루이 페르디낭 뿐이다.

7. 2. 애첩

루이 15세는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 외에도 여러 명의 공식적인 애첩(Maîtresse-en-titre)과 비공식적인 관계를 가졌다. 그의 애첩들은 궁정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으며, 특히 퐁파두르 후작 부인과 뒤바리 백작 부인은 정치에도 깊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요 애첩들은 다음과 같다.

  • 마이 부인
  • 뱅티미유 부인
  • 샤토루 공작 부인
  • 퐁파두르 후작 부인
  • 뒤바리 백작 부인


루이 15세는 여러 애첩과의 사이에서 다수의 사생아를 두었으며, 정확한 숫자는 파악하기 어렵다. 역사적 연구를 통해 루이 15세의 자녀로 추정되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어머니자녀비고
폴린 펠리시트 드 메이유(Pauline Félicité de Mailly), 뱅티밀 후작 부인샤를 에마뉘엘 마리 마젤롱 드 뱅티밀(1741년1814년), 뤼크 후작생모의 남편에게 인정받았으나, 루이 15세와 매우 닮아 작은 루이(Demi-Louis)라고 불렸다. 마르샬 드 캉프, 포르케롤 총독 역임.
잔 페레이아멜리 플로리몽 드 노르빌(1753년1790년)존재하지 않는 부르주아 루이 플로리몽 드 노르빌의 딸로 등록됨. 후대에 왕의 딸이라는 증거가 제시되었으며, 왕실로부터 연금을 받았다.[123][124]
마리-루이즈 오머피(1737년1814년)아가트 루이즈 드 생-앙투안 드 생-앙드레(1754년1774년)부모가 확실한 첫 사생아였으나 공식적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존재하지 않는 인물의 딸로 등록됨. 왕으로부터 귀족 작위 인정장(귀족과 결혼 허가)과 의 자금을 받았다. 1773년 르네 장 드 라 투르-뒤-팽과 결혼했으나 9개월 만에 사망했다.[125]
마리-루이즈 오머피마르게리트 빅투아르 르 노르망 드 플라가크(1768년1830년)생모의 두 번째 남편에게 공식 인정되었으나, 루이 15세의 사생아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왕이 생모에게 를 지급하고, 루이 16세, 마리 앙투아네트 등 왕족이 결혼 계약서에 서명했으며, 샤를 10세가 연금을 지급한 점 등이 근거로 제시된다.[126]
프랑수아즈 드 샤뤼(Françoise de Châlus)(1734년1821년), 나르본-라라 공작 부인필리프 루이 마리 이노상 크리스토프 쥐스트 드 나르본-라라(1750년1834년), 나르본-라라 공작생모의 남편이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중 부상으로 자녀를 가질 수 없었다는 점과 왕과의 유사성 때문에 루이 15세의 아들로 여겨졌다.
프랑수아즈 드 샤뤼(Françoise de Châlus)루이 마리 자크 아말릭 드 나르본-라라(1755년1813년), 나르본-라라 백작형과 마찬가지로 루이 15세의 아들로 여겨졌다. 프랑스의 마리 아델라이드 공주의 명예 궁정시종이었으며, 나폴레옹 휘하에서 복무했다.
마르게리트 카트린 에누(Marguerite Catherine Haynault)(1736년1823년)아녜스 루이즈 드 몽트뢰유(1760년1837년)존재하지 않는 인물 루이 드 몽트뢰유의 딸로 등록됨. 왕으로부터 귀족 작위 인정장과 의 자본을 받았다.
마르게리트 카트린 에누(Marguerite Catherine Haynault)안 루이즈 드 라 레알(1762년1831년)언니와 마찬가지로 존재하지 않는 인물 앙투안 루이 드 라 레알의 딸로 등록되었으며, 왕으로부터 귀족 작위 인정장과 의 자본 및 추가 연금을 받았다.
루시 마들렌 데스탱(Lucie Madeleine d'Estaing)(1743년1826년), 데스탱 제독의 이복동생아녜스 루시 오귀스트(1761년1822년)존재하지 않는 인물 루이 오귀스트의 딸로 등록됨. 왕으로부터 귀족 작위 인정장과 의 자본을 받았다.
루시 마들렌 데스탱(Lucie Madeleine d'Estaing)아프로디테 루시 오귀스트(1763년1819년)언니와 마찬가지로 존재하지 않는 인물의 딸로 등록되었으며, 왕으로부터 귀족 작위 인정장과 의 자본을 받았다.
안 꼬삐에 드 로망(Anne Coppier de Romans)(1737년1808년), 메이유-쿨롱주 남작 부인루이 에메 드 부르봉(1762년1787년), "부르봉 수도원장"루이 15세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유일한 사생아이다.[127] 메스의 생 뱅상 수도원장이었으며, 로마 주재 프랑스 대사로 임명되었으나 천연두로 사망했다.
잔 루이즈 티에르셀랭 드 라 콜르테리(Jeanne Louise Tiercelin de La Colleterie)(1746년1779년), "본발 부인"베누아 루이 르 뒤크(1764년1837년)존재하지 않는 인물 루이 르 뒤크의 아들로 등록됨. 왕으로부터 귀족 작위 인정장과 의 자본을 받았다. 샤를 10세와 매우 닮았다고 전해지며, 샤를 10세로부터 연금과 도박 빚 변제 등의 지원을 받았다.
마리 테레즈 프랑수아즈 부아슬레(Marie Thérèse Françoise Boisselet)(1731년1800년)샤를 루이 카데 드 가시쿠르(1769년1821년)생모의 남편 루이 클로드 카데 드 가시쿠르에게 인정받았으나, 루이 15세의 아들이라는 주장이 있다.[128][129][130][13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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