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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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막사 전투는 1991년 9월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중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ZNG)과 경찰이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 시설을 봉쇄하고 무기를 탈취한 작전이다. 1990년 크로아티아 총선 이후 크로아티아 내 민족 갈등이 심화된 가운데, 크로아티아 정부는 군사력 강화를 위해 유고 인민군 막사 공격을 계획했다. 9월 14일 시작된 막사 전투는 크로아티아군의 승리로 이어져 대량의 무기를 확보하고 군사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이 전투는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의 철수를 가속화하고,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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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사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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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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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1991년 9월 14일 ~ 1991년 11월 23일 |
장소 | 크로아티아 |
결과 | 크로아티아의 승리 |
관련 분쟁 |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의 일부 |
교전 세력 | |
지휘관 | |
지휘관 1 | 안톤 투스 |
지휘관 2 | 벨코 카디예비치 |
부대 | |
부대 1 |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 (~1991년 11월) 크로아티아 육군 (1991년 11월~) 크로아티아의 경찰 |
부대 2 | 유고슬라비아 육군 유고슬라비아 공군 유고슬라비아 해군 |
병력 규모 | |
병력 1 | 미상 |
병력 2 | 미상 |
사상자 및 손실 | |
사상자 1 | 미상 |
사상자 2 | 사상자 미상 포로: 전차 250대, 포 400~500문, 해군 선박 36척, 소화기 18만정, 유고 인민군 장교 3천명 |
2. 배경
1990년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열린 민주 총선에서 크로아티아 민주연합(HDZ)이 승리하자 크로아트인과 세르브인 사이 민족 갈등이 심화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은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 크로아티아 내 영토방위군(TO)의 무기를 전부 압수했다.[1] 1990년 8월 17일, 민족 분쟁은 세르브계 크로아티아인의 대대적인 반란으로 번져[5] 주로 세르브계가 다수 거주하는 달마티아고원 내륙 크닌(스플리트에서 동북쪽으로 60km 떨어진 곳) 주변 지역,[3] 리카, 코르둔, 바노비나, 크로아티아 동부 일부 지역에서 일어났다.[4] 1991년 1월 몬테네그로와 세르비아 내 자치주인 보이보디나, 코소보의 지원을 받은 세르비아는 크로아티아 보안군을 무장 해제시키기 위한 유고 인민군의 작전을 유고슬라비아의 대통령직단에게 승인을 받으려 시도했으나 실패했다.[5]
1991년 9월 14일, 프라뇨 그레구리치 크로아티아 총리의 제안과 안톤 투스 장군의 요청으로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ZNG)과 경찰은 유고 인민군(JNA) 시설에 대한 봉쇄를 시작했다. 이를 막사 전투라고 한다.[19] 이 조치로 크로아티아 내 33개의 대규모 유고 인민군 주둔지가 봉쇄되었고,[20] 국경 초소, 무기 및 탄약 저장소 등 수많은 소규모 시설도 봉쇄되었다.[19]
이 요청은 거부되었고, 3월에는 세르브계 반군과 크로아티아 특수경찰인 루치코 대테러부대 사이 유혈 충돌이 발생하자[6] 유고 인민군은 연방 대통령직에게 전시 권한을 부여하고 비상사태를 선포하라고 요청했다. 이 요청은 세르비아와 동맹의 지지를 받았으나 3월 15일 유고 인민군의 요청도 거부되었다. 세르비아의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크로아티아와 함께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유지하는 것보다 세르비아를 확대하는 방향을 더 선호하면서 유고 인민군을 세르비아군으로 바꿔버리겠다고 공개적으로 위협하고 연방 대통령직의 권위를 더 이상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 위협으로 유고 인민군은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존속시키는 계획을 포기하고 세르비아를 확대하는 밀로셰비치 통제 하로 들어갔다.[7] 3월 말에는 분쟁이 격화되며 첫 충돌 사망자가 발생했다.[8] 4월 초 크로아티아 내 세르브인 반군 지도자들은 자신이 통제하는 지역을 세르비아와 합병하겠다고 발표했다. 크로아티아 정부는 이들을 분리독립 반란군으로 규정했다.[9]
1991년 초 크로아티아에는 정규군이 없었다. 크로아티아는 국방력 강화를 위해 경찰 수를 2만 명으로 증원했다. 크로아티아 경찰에서 가장 강력한 부대는 사실상 군사 부분을 따라 조직된 12개 대대 3천 명 인원의 크로아티아 특수경찰이었다. 또한 16개 대대, 10개 중대로 된 9천~1만 명 규모의 각 지역별 예비경찰부대도 있었으나 무기가 부족했다.[10] 상황이 악화되자 크로아티아 정부는 5월에 특수경찰 부대를 4개의 전문근위여단으로 확대하여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ZNG)을 창설했다. 국가방위군은 크로아티아 국방부의 통제 하에 퇴역했던 유고 인민군 장군 마르틴 슈페겔이 지휘했으며 4개 여단 약 8천 명 병력으로 구성되었다.[11] 예비경찰도 4만 명으로 확대되어 ZNG 소속으로 편입되어 19개 여단과 14개 독립대대로 조직되었다. 근위여단은 ZNG 중 소화기를 완벽하게 갖춘 유일한 부대였으나 국가방위군 전체에 중화기는 부족했고 여단급 이상 지휘통제구조는 열악했다.[10] 중화기 부족이 너무 심각해서 국가방위군은 박물관이나 영화 스튜디오에서 가져온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무기도 사용했다.[12] 당시 크로아티아의 무기 비축량은 해외에서 구입한 소화기 약 3만 정과 경찰이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소화기 15,000정이 있었다. 근위여단에서 손실한 병력을 대체하기 위해 약 1만 명 규모의 신규 경찰 병력도 충원되었다.[10]
3. 전개
ZNG와 경찰은 플로체[27], 고스피치, 페루시치[23], 오토차츠[28], 자그레브 인근 소프니차, 피토마차[30]의 유고 인민군 시설을 점령했다. 부코바르 막사 봉쇄에 대응하여 유고 인민군은 병력을 파견했다.[31] 9월 15일에는 자그레브 서쪽 포포베츠와 슬라본스키브로드 인근의 유고 인민군 무기고를 점령했고,[29][32] 바라주딘에서 전투가 벌어졌으며, 비로비티차 북쪽 유고 인민군 국경초소 두 곳이 점령되었다.[33][34]
9월 16일, 크로아티아군은 슬라본스키브로드의 유고 인민군 막사와 무기고, 오굴린의 막사 2곳을 점령하고, 오슈타리예 유고 인민군 초소 주변에서 전투가 벌어졌다.[32][35] 주르노브니차 미사일 기지와 다루바르,[30][39] 오토차츠,[28] 크리제브치, 비로비티차[36] 인근의 유고 인민군 무기고를 점령했다. 9월 17일에는 다루바르,[37] 오굴린,[35] 차코베츠, 크리제브치, 비로비티차,[36] 포제가,[38] 시베니크-로고즈니차 지역의 유고 인민군 막사 2곳과 바라주딘의 막사 1곳, 자그레브 인근 두보키야라크의 유고 인민군 무기고를 점령했다.[39][40][29]
9월 18일, 바라주딘의 막사 3곳, 로고즈니차 인근 막사 1곳, 자코보의 막사 2곳, 고스피치의 남은 유고 인민군 시설, 인근 무기고, 가레슈니차 인근 통신 시설, 국경 초소 수십 곳이 크로아티아군에게 항복했다.[23][39][41][42][43] 9월 19일에는 카를로바츠 인근 로고리슈테 막사에서 유고 인민군 주둔군과 교전했고,[44] 리예카 인근 플라타크의 통신시설,[45] 바라주딘 인근 유고 인민군 막사와 무기고를 추가로 점령했다.[40]
9월 20일까지 크로아티아는 60곳 이상의 유고 인민군 시설(막사 15곳, 무기고 11곳)을 점령했다.[47] 9월 21일, 나시체의 유고 인민군 막사가 항복했다.[48] 9월 22일, 바라주딘 막사가 항복하여[40] 국가방위군은 대량의 무기를 획득했다.[49] 스플리트에서는 소규모 유고 인민군 초소 여러 곳을 점령했다.[50] 9월 중순, 자다르에서 막사 3곳을 포함한 유고 인민군 시설 7곳이 점령되었고,[51] 유고슬라비아 공군은 공습을 통해 무기 전용을 막으려 했다.[52] 9월 23일, 스베티로크의 대규모 유고 인민군 무기고 공격은 실패했다.[53]
9월 26일, 빈코브치와 오시예크의 유고 인민군 막사는 유고 인민군이 포기했다. 오시예크 주둔군은 탈출하여 유고 인민군에 합류했고, 빈코브치 막사는 협상 끝에 해산되었다.[54] 코르출라섬의 유고 인민군 시설은 장비를 넘겼다.[55] 9월 29일, 벨로바르의 막사 2곳과 무기고 3곳을 점령했고, 4번째 무기고는 밀란 테피치 소령이 폭파시켜 11명이 사망했다.[43][56] 같은 날, 코프리브니차의 무기고와 비로비티차 인근 국경초소를 점령했다.[43] 9월 30일, 유고 인민군 제73자동차여단이 코프리브니차에서 항복했다.[36]
9월 14일/15일, 벨라루카 조선소에서 수리 중이던 유고슬라비아 해군의 상륙정 DJČ-612함을 노획하여 체티나강에 띄웠다.[57] 9월 16일에서 22일 사이, 시베니크의 쿨리네 막사와 유고 해군 함정 15척, 벨리미르 슈코르피크 조선소에서 정비 중이던 함정 19척을 노획했다. 여기에는 콘차르급 미사일고속정 블라도 체트코비치(시베니크 (RTOP-21)로 개명), 오사급 미사일고속정 벨리미르 슈코르피크(RČ-310), 세르센급 어뢰정 파르티잔 II(TČ-222), 미르나급 경비정 비오코보(PČ-171), 체르(PČ-180), 두르미토르(PČ-181)가 포함된다.[58] 크랄레비차 조선소에서 건조가 거의 끝난 크로아티아 미사일고속정 크랄 페타르 크레시미르 (RTOP-11)도 노획되었다.[45] 9월에는 시베니크 인근과 숄타섬, 브라치섬, 코르출라섬의 해안포 진지 7곳이 점령되었다.[58]
1991년 10월 3일, 크로아티아군은 코프리브니차에 있는 "요자 블라호비치" 유고 인민군(JNA) 막사와 도시 인근 통신소 및 국경 초소를 점령했다.[141] 다음 날, 신에 있는 유고 인민군 막사와 인근의 지뢰 저장 시설은 협상된 합의에 따라 폐쇄되었다.[170] 10월 초, 자다르 근처 "셰푸리네" 막사에 주둔한 유고 인민군 포병 연대 2개는 기지 포위를 뚫고 도시를 공격하는 유고 인민군에 합류했다. 10월 5일까지 자다르는 유고 인민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었고, 크로아티아 당국은 휴전과 협상을 모색했다.[171] 같은 날 휴전이 합의되었고, 10월 7일부터 9일까지 열린 협상을 통해 유고 인민군은 자다르 포위를 풀고 남은 유고 인민군 수비대와 장비를 도시에서 철수시켰다.[172] 7개 유고 인민군 시설 철수는 10월 11일에 시작되어 15일이 걸렸다.[173] 이 합의는 철수 부대가 크로아티아 영토를 떠나야 한다고 규정했고, 유고 인민군은 대체로 이 의무를 준수했지만,[174] 20대의 무기 트럭이 자다르 주변 내륙의 세르비아인들에게 남겨졌다.[175]
10월 7일 반스키 드보리 폭격 이후, 크로아티아 당국은 자그레브 지역 지휘관 판단에 따라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에게 유고 인민군 막사 공격 및 점령을 지시했다. 이 지시는 자그레브 자체 공격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176] 사모보르에 있는 유고 인민군 막사는 폭격 당일 크로아티아군에 의해 점령되었다.[177] 다음 날 크로아티아 독립 선언이 발효되었다.[176]
10월 13일, 유고 인민군은 오스타리에 있는 막사를 대부분 파괴하고 버렸으며,[146] 리예카에 있는 유고 인민군 무기 저장 시설은 뇌우로 인한 화재로 손상되었다.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은 소방관이 개별 저장 구조를 구하기 위해 투입되는 동안 일부 무기를 제거했다. 다음 날, 유고 인민군은 손상된 저장소에서 남은 무기를 도시 다른 곳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18대의 트럭으로 구성된 호송대가 리예카를 통과하는 동안 무기를 실은 15대의 차량이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에 의해 우회 및 점령되었다.[156] 동시에, 자그레브의 보론가이 막사에 있는 유고 인민군 인력은 부코바르 전투가 진행 중이던 부코바르로 인도주의적 지원을 운반하는 호송대의 자유로운 통행을 대가로 대피할 수 있었다.[178]
카를로바츠 지역 로고리슈테 막사에 있던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 부대는 11월 4일부터 6일까지 이어진 로고리슈테 전투에서 도시 동쪽의 유고 인민군 점령 지역으로 봉쇄망을 돌파했다. 막사를 포위한 크로아티아군은 더 많았지만, 유고 인민군은 장갑과 포병에서 우위를 점했다.[179] 유고 인민군이 막사를 포기한 후에도 무기가 남아 있었고, 11월 13일까지 크로아티아군이 이를 가져갔다.[180] 11월 초,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은 크로아티아 육군(HV)으로 개칭되었다. 크로아티아군은 로고리슈테 막사 주변에서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11월 4일 카를로바츠의 야마돌 막사와 저장 시설을 점령했다.[181] 다음 날, 크로아티아 육군은 델니체에서 유고 인민군 막사와 여러 무기 저장 시설을 점령했다.[182] 이 공격은 크로아티아 육군이 보유한 비축량이 줄어들면서 필요한 탄약을 확보하기 위해 명령되었다.[183]
11월 8일, 크로아티아 대표 다보린 루돌프와 유고 인민군 제13(리에카) 군단 사령관 마리얀 차드 중장은 크로아티아에서 군단 인력과 장비를 철수하는 데 동의했다. 유럽 공동체 감시 임무(ECMM)의 감독과 지원을 받아 체결된 이 합의는 이후 크로아티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사한 합의의 모델이 되었다.[184] 차드는 유고슬라비아 참모총장 블라고예 아지치 대장으로부터 리예카의 유고 인민군 시설을 파괴하고 도시 안팎의 산업 시설과 기반 시설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은 후, 유고 인민군 제5군 관구의 지원을 받아 자신의 주도로 이 합의를 체결했다.[185] 이 합의는 11월 9일 크로아티아 육군이 드라가 막사와 그곳에 보관된 무기를 점령한 것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유고 인민군 제13(리에카) 군단은 11월 18일 몬테네그로 항구로 해상 철수를 시작했다.[156]
협상 후 유고 인민군은 11월 13일 야스트레바르스코 막사를 철수했다. 수비대는 유럽 공동체 감시단의 호위를 받으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로 떠났다.[186] 다음 날, 드르니시 근처 지트니치 마을에서 유고 인민군을 시베니크에서 철수하기로 합의했다.[187] 11월 15일 유고슬라비아 해군의 스플리트, 숄타, 브라치 폭격(순찰정 무코스(PČ-176) 손실에 대한 대응)과 그 이후의 달마티아 해협 해전은 지트니치 합의를 무산시킨 것으로 보였다.[188]
11월 21일 지트니치에서 유고 인민군과 유고슬라비아 해군을 시베니크-스플리트 지역에서 철수시키고 그곳에 보관된 압수된 영토 방위군(TO) 무기를 인도하는 또 다른 합의가 루돌프와 유고 인민군 해군-군사 관구 사령관 니콜라 믈라데니치 소장에 의해 서명되었다. 믈라데니치와 크로아티아 스베토 레티차 제독이 이틀 후 스플리트에서 서명한 이 합의는 30일 이내에 철수를 완료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또한 북부 달마티아의 휴전과 유고슬라비아 해군의 크로아티아 해안 봉쇄 해제를 규정했다. 이 합의에는 비스와 라스토보 섬에 있는 유고슬라비아 해군 기지 철수는 포함되지 않았다.[189] 이 과정에서 긴장이 고조되었고, 유고 인민군은 크닌에서 시베니크와 스플리트로 돌파하여 그곳에 있는 부대의 포위를 풀기 위한 비상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각각 해안-91 작전(Operacija Obala-91)과 허리케인-91 작전(Operacija Orkan-91)으로 명명되었다.[187]
유고 인민군 자그레브 주둔군 포위를 종료하라는 국제적 압박 속에서,[190] 크로아티아 당국과 유고 인민군은 11월 22일 크로아티아에 남은 모든 유고 인민군 병력을 철수하기로 합의했다. 이 협정은 자그레브에서 크로아티아 육군 임라 아고티치 대령과 유고 인민군 안드리야 라셰타 중장이 유럽 공동체 감시단 입회하에 서명했다. 이 합의는 다음 날 스위스 제네바에서 프라뇨 투지만,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유고슬라비아 국방부 장관 겸 유고 인민군 벨코 카디예비치 대장이 제네바 협정에 서명하면서 확정되었다.[191]
3. 1. 전조
1991년 1월부터 9월까지 크로아티아는 유고 인민군(JNA)의 역할에 대한 시각이 점차 변화했다. 프라뇨 투지만 대통령은 초기에는 국제적 지원 확보를 우선시하며 유고 인민군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려 했다. 1990년 말, 마틴 슈페겔은 유고 인민군 막사 및 무기고 점령을 처음 주장했고, 1991년 초중반 투지만에게 이를 다시 촉구하며 열흘 전쟁 당시 슬로베니아에서 유고 인민군이 슬로베니아 영토방위군과 교전할 때, 이를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7월에는 슈페겔의 후임 국방장관 시메 조단도 이 주장에 적극 호응했다.[122]
투지만은 크로아티아가 유고 인민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방어적인 전략을 취했다. 유고 인민군은 세르비아계 군사와 협력하는 듯 보였고, 세르비아계 민병대와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ZNG) 간 무력 충돌 이후 유고 인민군이 완충지대를 설치하면서 세르비아계가 점령 지역을 통제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유고 인민군은 세르비아계 민병대에게 무기를 제공했으며, 이 무기들은 대부분 세르비아 국토방위군과 내무군 무기고에서 유입되었다.[123]
1991년 7월, 슈페겔과 조단의 주장은 크로아티아 의회 토의에 회부되었고, 많은 의원들의 지지를 받았다. 투지만은 같은 달 조단을 국방장관에서 해임하고 슈페겔도 8월 3일 지휘관직에서 사임했다. 그러나 버러녀에서 ZNG가 축출되고 오시예크, 부코바르, 빈코브치 주변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등[124] 동부 크로아티아 상황이 악화되면서 투지만은 행동에 나섰다.[122] 8월 22일, 투지만은 유고슬라비아 연방군에게 8월 말까지 병영으로 철수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고, 불응 시 점령군으로 간주하겠다고 밝혔다.[122] 9월 1일, 유럽 공동체는 휴전을 제안했고, 투지만은 최후통첩에도 불구하고 평화 회담을 수락했다. 9월 7일 회담이 시작되었으나, 9월 11일 스체판 메시치는 유고 인민군에게 48시간 내 병영 복귀를 명령했다.[125] 이는 ZNG가 영토를 뺏기면 회담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는 투지만의 인상을 보고 내린 결정이었다. 이 명령은 크로아티아에게 유고 인민군에 맞설 명분을 주었다.[126]
3. 2. 1991년 9월 ~ 12월: 막사 전투의 본격화
1991년 9월 14일, 프라뇨 그레구리치 크로아티아 총리의 제안과 안톤 투스 장군의 요청으로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ZNG)과 경찰은 유고 인민군(JNA) 시설에 대한 봉쇄를 시작했다. 이를 막사 전투라고 한다.[19] 이 조치로 크로아티아 내 33개의 대규모 유고 인민군 주둔지가 봉쇄되었고,[20] 국경 초소, 무기 및 탄약 저장소 등 수많은 소규모 시설도 봉쇄되었다.[19]
같은 날, ZNG와 경찰은 플로체[27], 고스피치, 페루시치[23], 오토차츠[28], 자그레브 인근 소프니차, 피토마차[30]의 유고 인민군 시설을 점령했다. 부코바르 막사 봉쇄에 대응하여 유고 인민군은 병력을 파견했다.[31]
9월 15일, ZNG와 경찰은 자그레브 서쪽 포포베츠와 슬라본스키브로드 인근의 유고 인민군 무기고를 점령했다.[29][32] 바라주딘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비로비티차 북쪽 유고 인민군 국경초소 두 곳이 점령되었다.[33][34]
9월 16일, 크로아티아군은 슬라본스키브로드의 유고 인민군 막사와 무기고, 오굴린의 막사 2곳을 점령하고, 오슈타리예 유고 인민군 초소 주변에서 전투가 벌어졌다.[32][35] 주르노브니차 미사일 기지와 다루바르,[30][39] 오토차츠,[28] 크리제브치, 비로비티차[36] 인근의 유고 인민군 무기고를 점령했다.
9월 17일, 크로아티아군은 다루바르,[37] 오굴린,[35] 차코베츠, 크리제브치, 비로비티차,[36] 포제가,[38] 시베니크-로고즈니차 지역의 유고 인민군 막사 2곳과 바라주딘의 막사 1곳, 자그레브 인근 두보키야라크의 유고 인민군 무기고를 점령했다.[39][40][29]
9월 18일, 바라주딘의 막사 3곳, 로고즈니차 인근 막사 1곳, 자코보의 막사 2곳, 고스피치의 남은 유고 인민군 시설, 인근 무기고, 가레슈니차 인근 통신 시설, 국경 초소 수십 곳이 크로아티아군에게 항복했다.[23][39][41][42][43]
9월 19일, 국가방위군은 카를로바츠 인근 로고리슈테 막사에서 유고 인민군 주둔군과 교전했고,[44] 리예카 인근 플라타크의 통신시설,[45] 바라주딘 인근 유고 인민군 막사와 무기고를 추가로 점령했다.[40]
9월 20일까지 크로아티아는 60곳 이상의 유고 인민군 시설(막사 15곳, 무기고 11곳)을 점령했다.[47] 9월 21일, 나시체의 유고 인민군 막사가 항복했다.[48] 9월 22일, 바라주딘 막사가 항복하여[40] 국가방위군은 대량의 무기를 획득했다.[49] 스플리트에서는 소규모 유고 인민군 초소 여러 곳을 점령했다.[50]
9월 중순, 자다르에서 막사 3곳을 포함한 유고 인민군 시설 7곳이 점령되었다.[51] 유고슬라비아 공군은 공습을 통해 무기 전용을 막으려 했다.[52] 9월 23일, 스베티로크의 대규모 유고 인민군 무기고 공격은 실패했다.[53]
9월 26일, 빈코브치와 오시예크의 유고 인민군 막사는 유고 인민군이 포기했다. 오시예크 주둔군은 탈출하여 유고 인민군에 합류했고, 빈코브치 막사는 협상 끝에 해산되었다.[54] 코르출라섬의 유고 인민군 시설은 장비를 넘겼다.[55]
9월 29일, 벨로바르의 막사 2곳과 무기고 3곳을 점령했고, 4번째 무기고는 밀란 테피치 소령이 폭파시켜 11명이 사망했다.[43][56] 같은 날, 코프리브니차의 무기고와 비로비티차 인근 국경초소를 점령했다.[43] 9월 30일, 유고 인민군 제73자동차여단이 코프리브니차에서 항복했다.[36]
9월 14일/15일, 벨라루카 조선소에서 수리 중이던 유고슬라비아 해군의 상륙정 DJČ-612함을 노획하여 체티나강에 띄웠다.[57] 9월 16일에서 22일 사이, 시베니크의 쿨리네 막사와 유고 해군 함정 15척, 벨리미르 슈코르피크 조선소에서 정비 중이던 함정 19척을 노획했다. 여기에는 콘차르급 미사일고속정 블라도 체트코비치(RTOP-402, 시베니크 (RTOP-21)로 개명), 오사급 미사일고속정 벨리미르 슈코르피크(RČ-310), 세르센급 어뢰정 파르티잔 II(TČ-222), 미르나급 경비정 비오코보(PČ-171), 체르(PČ-180), 두르미토르(PČ-181)가 포함된다.[58] 크랄레비차 조선소에서 건조가 거의 끝난 크로아티아 미사일고속정 크랄 페타르 크레시미르 (RTOP-11)도 노획되었다.[45] 9월에는 시베니크 인근과 숄타섬, 브라치섬, 코르출라섬의 해안포 진지 7곳이 점령되었다.[58]
이러한 일련의 전투를 통해 크로아티아는 상당한 양의 무기와 장비를 확보하게 되었으며, 이는 이후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3. 3. 1991년 10월 ~ 1992년 1월: 휴전 협상과 유고 인민군 철수
1991년 10월 3일, 크로아티아군은 코프리브니차에 있는 "요자 블라호비치" 유고 인민군(JNA) 막사와 도시 인근 통신소 및 국경 초소를 점령했다.[141] 다음 날, 신에 있는 유고 인민군 막사와 인근의 지뢰 저장 시설은 협상된 합의에 따라 폐쇄되었다.[170] 10월 초, 자다르 근처 "셰푸리네" 막사에 주둔한 유고 인민군 포병 연대 2개는 기지 포위를 뚫고 도시를 공격하는 유고 인민군에 합류했다. 10월 5일까지 자다르는 유고 인민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었고, 크로아티아 당국은 휴전과 협상을 모색했다.[171] 같은 날 휴전이 합의되었고, 10월 7일부터 9일까지 열린 협상을 통해 유고 인민군은 자다르 포위를 풀고 남은 유고 인민군 수비대와 장비를 도시에서 철수시켰다.[172] 7개 유고 인민군 시설 철수는 10월 11일에 시작되어 15일이 걸렸다.[173] 이 합의는 철수 부대가 크로아티아 영토를 떠나야 한다고 규정했고, 유고 인민군은 대체로 이 의무를 준수했지만,[174] 20대의 무기 트럭이 자다르 주변 내륙의 세르비아인들에게 남겨졌다.[175]
10월 7일 반스키 드보리 폭격 이후, 크로아티아 당국은 자그레브 지역 지휘관이 가능하다고 판단하면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에게 유고 인민군 막사를 공격하고 점령하도록 지시했다. 이 지시는 자그레브 자체 공격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176] 사모보르에 있는 유고 인민군 막사는 폭격 당일 크로아티아군에 의해 점령되었다.[177] 다음 날 크로아티아 독립 선언이 발효되었다.[176]
10월 13일, 유고 인민군은 오스타리에 있는 막사를 대부분 파괴하고 버렸으며,[146] 리예카에 있는 유고 인민군 무기 저장 시설은 뇌우로 인한 화재로 손상되었다.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은 소방관이 개별 저장 구조를 구하기 위해 투입되는 동안 일부 무기를 제거했다. 다음 날, 유고 인민군은 손상된 저장소에서 남은 무기를 도시 다른 곳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18대의 트럭으로 구성된 호송대가 리예카를 통과하는 동안 무기를 실은 15대의 차량이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에 의해 우회 및 점령되었다.[156] 동시에, 자그레브의 보론가이 막사에 있는 유고 인민군 인력은 부코바르 전투가 진행 중이던 부코바르로 인도주의적 지원을 운반하는 호송대의 자유로운 통행을 대가로 대피할 수 있었다.[178]
카를로바츠 지역 로고리슈테 막사에 있던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 부대는 11월 4일부터 6일까지 이어진 로고리슈테 전투에서 도시 동쪽의 유고 인민군 점령 지역으로 봉쇄망을 돌파했다. 막사를 포위한 크로아티아군은 더 많았지만, 유고 인민군은 장갑과 포병에서 우위를 점했다.[179] 유고 인민군이 막사를 포기한 후에도 무기가 남아 있었고, 11월 13일까지 크로아티아군이 이를 가져갔다.[180] 11월 초,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은 크로아티아 육군(HV)으로 개칭되었다. 크로아티아군은 로고리슈테 막사 주변에서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11월 4일 카를로바츠의 야마돌 막사와 저장 시설을 점령했다.[181] 다음 날, 크로아티아 육군은 델니체에서 유고 인민군 막사와 여러 무기 저장 시설을 점령했다.[182] 이 공격은 크로아티아 육군이 보유한 비축량이 줄어들면서 필요한 탄약을 확보하기 위해 명령되었다.[183]
11월 8일, 크로아티아 대표 다보린 루돌프와 유고 인민군 제13(리에카) 군단 사령관 마리얀 차드 중장은 크로아티아에서 군단 인력과 장비를 철수하는 데 동의했다. 유럽 공동체 감시 임무(ECMM)의 감독과 지원을 받아 체결된 이 합의는 이후 크로아티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사한 합의의 모델이 되었다.[184] 차드는 유고슬라비아 참모총장 블라고예 아지치 대장으로부터 리예카의 유고 인민군 시설을 파괴하고 도시 안팎의 산업 시설과 기반 시설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은 후, 유고 인민군 제5군 관구의 지원을 받아 자신의 주도로 이 합의를 체결했다.[185] 이 합의는 11월 9일 크로아티아 육군이 드라가 막사와 그곳에 보관된 무기를 점령한 것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유고 인민군 제13(리에카) 군단은 11월 18일 몬테네그로 항구로 해상 철수를 시작했다.[156]
협상 후 유고 인민군은 11월 13일 야스트레바르스코 막사를 철수했다. 수비대는 유럽 공동체 감시단의 호위를 받으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로 떠났다.[186] 다음 날, 드르니시 근처 지트니치 마을에서 유고 인민군을 시베니크에서 철수하기로 합의했다.[187] 11월 15일 유고슬라비아 해군의 스플리트, 숄타, 브라치 폭격(순찰정 무코스(PČ-176) 손실에 대한 대응)과 그 이후의 달마티아 해협 해전은 지트니치 합의를 무산시킨 것으로 보였다.[188]
11월 21일 지트니치에서 유고 인민군과 유고슬라비아 해군을 시베니크-스플리트 지역에서 철수시키고 그곳에 보관된 압수된 영토 방위군(TO) 무기를 인도하는 또 다른 합의가 루돌프와 유고 인민군 해군-군사 관구 사령관 니콜라 믈라데니치 소장에 의해 서명되었다. 믈라데니치와 크로아티아 스베토 레티차 제독이 이틀 후 스플리트에서 서명한 이 합의는 30일 이내에 철수를 완료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또한 북부 달마티아의 휴전과 유고슬라비아 해군의 크로아티아 해안 봉쇄 해제를 규정했다. 이 합의에는 비스와 라스토보 섬에 있는 유고슬라비아 해군 기지 철수는 포함되지 않았다.[189] 이 과정에서 긴장이 고조되었고, 유고 인민군은 크닌에서 시베니크와 스플리트로 돌파하여 그곳에 있는 부대의 포위를 풀기 위한 비상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각각 해안-91 작전(Operacija Obala-91)과 허리케인-91 작전(Operacija Orkan-91)으로 명명되었다.[187]
유고 인민군 자그레브 주둔군 포위를 종료하라는 국제적 압박 속에서,[190] 크로아티아 당국과 유고 인민군은 11월 22일 크로아티아에 남은 모든 유고 인민군 병력을 철수하기로 합의했다. 이 협정은 자그레브에서 크로아티아 육군 임라 아고티치 대령과 유고 인민군 안드리야 라셰타 중장이 유럽 공동체 감시단 입회하에 서명했다. 이 합의는 다음 날 스위스 제네바에서 프라뇨 투지만,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유고슬라비아 국방부 장관 겸 유고 인민군 벨코 카디예비치 대장이 제네바 협정에 서명하면서 확정되었다.[191]
4. 밴스 계획
유고 인민군의 전역이 교착 상태로 끝나자 각 교전 당사국은 국제사회가 감독하는 휴전을 받아들이게 되었고,[208] 유엔 사무총장 특사인 사이러스 밴스가 미국 외교관 허버트 S. 오쿤,[209] 유엔 특별정치담당 사무차장인 마라크 굴딩[210]의 도움을 받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내 크로아티아에서의 적대 행위를 종식하기 위한 평화안인 밴스 계획을 세웠다. 밴스 계획은 휴전, 유엔 보호군의 유엔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특정 지역의 민간인 보호, 크로아티아 내 유엔 평화유지군 배치 등을 담았다. 또한 밴스 계획에는 크로아티아군의 유고 인민군 막사 봉쇄 종료, 크로아티아 내 모든 유고 인민군 병력과 장비 철수, 휴전 이행 및 인도주의적 지원 전달 촉구 등도 포함되었다.[211] 협정 서명국은 11월 27일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721호를 통해 시작된 크로아티아 내 유엔 평화 유지 임무단을 배치하는 데 동의했다.[210] 하지만 군 조직 문제와 마지막 정전 협정 위반 문제로 유엔 평화유지군은 1992년 3월 8일에서야 처음으로 배치되기 시작했다.[212]
5.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의 철수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당시, 크로아티아 정부와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은 11월 22일 크로아티아에 남아 있던 모든 유고 인민군을 철수시키기로 합의했다.[190] 이 합의는 임라 아고티치 크로아티아 육군(HV) 대령과 안드리야 라셰타 유고 인민군 중장이 유럽 공동체 감시 임무(ECMM) 요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그레브에서 서명했다. 다음 날, 프라뇨 투지만 크로아티아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대통령, 벨코 카디예비치 유고슬라비아 국방장관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제네바 협정에 서명하면서 이 합의가 확정되었다.[191]
제네바 협정 체결 후에도 유고 인민군은 계속 철수했다. 리예카 지역에 남아 있던 7개 유고 인민군 시설은 11월에 철수했으며, 마지막으로 12월 10일 트르사트의 막사가 철수했다.[156] 시베니크의 유고 인민군은 11월 25일부터 12월 24일까지 2개 막사와 4개 무기고에서 철수했으며, 크로아티아 국토방위군으로부터 압수한 무기는 12월 10일 크로아티아 육군에게 넘겼으나 이 무기는 지트니치 협정에 따라 12월 25일까지 ECMM의 감독 하에 밀폐된 무기고에 보관되었다. 철수 대부분은 크닌을 경유하는 철도로 이어졌으며 일부 병력은 해상을 통해 몬테네그로로 이동했다. 철수 협정은 자다르 철수와 마찬가지로 크로아티아 영토 밖으로 철수 부대를 전부 빼야 했지만 유고 인민군은 철수 시 일부만 이 협정을 부분적으로만 만족했다.[213] 트로기르 인근의 디불레 유고 인민군 막사는 다보린 루돌프와 니콜라 믈라데니치가 국토방위군 무기를 크로아티아 육군에게 넘기고 스플리트에 있는 로라 해군기지 철수에 합의한다는 추가 협정을 맺은 12월 4일부터 해상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214]
스플리트의 유고 인민군 시설에서 국토방위군의 무기 중 일부가 누락된 것으로 밝혀지자 철수가 중단되었다. 이 문제는 12월 18일 라셰타와 아고티치 간 합의를 통해 유고 인민군의 자체 재고에서 누락된 무기를 크로아티아 육군에 제공하기로 규정하면서 철수가 재개되었다. 스플리트에 있는 무기만으로는 이 기준을 만족하기에 충분한 무기가 없었기 때문에 1992년 1월 1일 유고 인민군은 몬테네그로 쿰보르에서 250ton의 무기와 탄약을 스플리트로 함선을 통해 운송했다.[215] 마지막 유고 인민군은 1992년 1월 4일 스플리트에서 철수했다.[216]
유고 인민군은 크로아티아 다른 지역에서도 철수하기 시작했다. 11월 30일에는 자그레브의 마르샬티토와 케레스티네츠 막사는 11월 30일부터 유고 인민군이 철수하기 시작했으며[217] 1991년 말 철수를 완료했다.[218] 이스트라반도에서는 12월 15일 유고 인민군과 유고슬라비아 해군이 철수하기 시작하면서 크로아티아 국토방위군의 무기를 크로아티아 육군에게 넘겼다. 유고 인민군이 철수한 78개 시설에서 넘겨받은 국토방위군의 무기는 2개 전투여단을 무장시키기에 충분했다.[219] 그럼에도 1991년 12월에서 카를로바츠의 메쿠슈예 막사에 대한 크로아티아 육군의 실패한 작은 공격과 같이 여전히 크로아티아군 봉쇄 하에 있던 유고 인민군 시설 주변에서 계속 작은 충돌이 이어졌다.[220] 제네바 협정에서 유고 인민군 인력과 장비의 즉각적인 철수를 명시했음에도[211] 유고 인민군은 최장 8개월간 크로아티아 내에 남았다.[221] 유고 인민군이 전부 크로아티아에서 철수했을 당시에는 12월 19일 유고 인민군이 장악한 크로아티아 영역 내 수립된 자칭 국가인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에 유고 인민군이 장비를 전부 넘겼다.[221] 비스섬과 라스토보섬의 유고 인민군과 유고슬라비아 해군은 1992년 6월 초까지 기지를 계속 유지하다 일방적으로 철수했다.[223]
6. 전쟁 범죄 혐의
크로아티아 정부는 벨로바르 막사 항복 당시 유고 인민군 포로 5명의 사망 사건과 민간인에 대한 총격 사건 혐의로 벨로바르 경찰작전국 부국장과 특수경찰 3명을 기소했다. 크로아티아 대법원에서 두 차례 재심을 거친 후 12년간의 법적 절차 끝에 이들은 전부 무죄 판결을 받았다.[226] 벨로바르 위기센터장도 2012년 전쟁 범죄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몇 달 구금된 후 정식 재판 없이 풀려났다.[227]
크로아티아는 봉쇄된 주둔지에서 보직을 맡았던 수많은 유고 인민군 장교도 기소했다. 오시예크에서는 유고 인민군 장교 13명이 민간인 307명 사망, 171명 중상에 대한 전쟁 범죄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이 중 체포된 사람은 없다.[228]
유고 인민군 제32(바라주딘)군단 군단장 블라디미르 트리푸노비치 장군에게도 전쟁 범죄 혐의가 제기되었다. 트리푸노비치는 크로아티아에서 민간인 6명 사망, 37명 부상에 대한 전쟁 범죄 혐의로 기소되었다. 1991년 궐석재판 끝에 유죄가 인정되어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229] 3년 후인 1994년, 트리푸노비치는 유고슬라비아에서도 휘하 인민군 병력 전체를 국가방위군에게 항복한 반역죄로 기소되어 11년형을 선고받았다. 1996년 초 트리푸노비치는 사면되어 석방되었고,[230]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2년 가까이 감옥에 보낸 것에 대한 보상금 62000EUR를 지급했다.[231] 2013년에는 크로아티아에서도 트리푸노비치가 공식적으로 재판을 요구했다.[229] 2017년 1월 트리푸노비치는 베오그라드에서 사망했다.[232]
7. 결과 및 영향
막사 전투의 결과, 크로아티아는 유고 인민군(JNA) 제32군단(바라주딘)의 모든 물자와 크로아티아 영토방위군(TO)에서 압수한 거의 모든 무기를 포함한 대량의 무기를 확보하여 군사력을 크게 강화했다.[129][19] 이로 인해 유고 인민군은 8개 여단(1개 기갑여단, 2개 기계화여단, 3개 포병연대)의 통제권을 상실했고, 제5군구와 해군 지구의 추가 병력은 봉쇄되어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192]
1991년 9월 25일 유엔의 무기 금수 조치가 시행되면서, 막사 전투를 통해 확보한 무기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193] 크로아티아는 이 전투를 통해 기존 부대를 완전히 무장시키고, 40~42개 여단을 추가로 창설하여 연말까지 20만 명의 병력과 4만 명의 경찰을 배치할 수 있게 되었다.[131]
크로아티아군은 막사 전투에서 전차 250대, 중포 400~500문, 소화기 18만 정, 탄약 200만 톤을 노획했다. 또한, 유고 인민군에서 3천 명의 장교가 이탈하여 크로아티아군에 합류했다.[194]
이러한 군사력 강화는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러나 전쟁 이후 세르비아와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전쟁 범죄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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