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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주딘 막사 포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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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라주딘 막사 포위전은 1991년 9월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중 바라주딘에서 일어난 전투이다. 크로아티아 정부는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에 병영으로 철수할 것을 요구했고, 이에 응하지 않자 국가방위군이 바라주딘의 유고 인민군 시설을 봉쇄했다. 며칠간의 교전 끝에 유고 인민군은 항복했고, 크로아티아군은 막대한 양의 무기를 노획했다. 이 전투는 크로아티아군의 무장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유고 인민군 지휘관 블라디미르 트리푸노비치는 전쟁 범죄 혐의로 기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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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주딘 막사 포위전 - [전쟁]에 관한 문서
바라주딘 막사 포위전
바라주딘 막사 포위전
1991년 9월 22일 당시 유고 인민군 제32군단의 주요 막사 위치
기본 정보
분쟁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중 막사 전투
날짜1991년 9월 14~22일
장소크로아티아 바라주딘 인근 지역
결과크로아티아의 승리
교전 세력
지휘관
유고슬라비아블라디미르 트리푸노비치
크로아티아이반 루클리치
젤리미르 슈카레츠
라디미르 차치치
군사력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유고슬라비아 인민군
유고슬라비아 육군
크로아티아군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
크로아티아 경찰
병력 규모
유고슬라비아군1,000명
크로아티아군1,000~2,000명
사상자
유고슬라비아군2명 사망
15명 부상
1,000명 포로
크로아티아군2명 사망
24명 부상
민간인2명 사망

2. 배경

1990년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열린 민주 총선에서 크로아티아 민주연합(HDZ)이 승리하자 크로아티아 내 크로아트인세르브인 사이 민족 갈등이 심화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은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 크로아티아 내 영토방위군(TO)의 무기를 압수했다.[4] 8월 17일에는 민족 분쟁이 세르브계 크로아티아인대대적인 반란으로 번져 주로 세르브계가 다수 거주하는 달마티아고원 내륙 크닌(스플리트에서 동북쪽으로 60 km 떨어짐) 주변 지역, 리카, 코르둔, 바노비나, 크로아티아 동부 일부 지역에 반란이 일어났다.[5]

1991년 1월, 몬테네그로와 세르비아 내 자치주인 보이보디나, 코소보의 지원을 받은 세르비아는 크로아티아 보안군을 무장 해제시키기 위한 유고 인민군의 작전을 유고슬라비아의 대통령직단에게 승인을 받으려 시도했으나 실패했다.[6] 3월에는 세르브계 반군과 크로아티아 특수경찰인 루치코 대테러부대 사이 유혈 충돌이 발생했고, 유고 인민군은 연방 대통령직에게 전시 권한을 부여하고 비상사태를 선포하라고 요청했으나 거부되었다.[7]

세르비아의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유지하는 것보다 세르비아를 확대하는 방향을 선호하면서 유고 인민군을 세르비아군으로 바꿔버리겠다고 공개적으로 위협하고 연방 대통령직의 권위를 더 이상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 위협으로 유고 인민군은 연방 존속 계획을 포기하고 세르비아 확대 정책을 추진하는 밀로셰비치 통제 하로 들어갔다.[6] 3월 말에는 첫 충돌 사망자가 발생하며 분쟁이 격화되었다.[8] 4월 초 크로아티아 내 세르브인 반군 지도자들은 자신이 통제하는 지역을 세르비아와 합병하겠다고 발표했고, 크로아티아 정부는 이들을 분리독립 반란군으로 규정했다.[9]

2. 1. 크로아티아의 군사력 강화

1991년 초 크로아티아에는 정규군이 없었다. 크로아티아는 국방력 강화를 위해 경찰 병력을 2만 명으로 늘렸다. 이 중 가장 강력한 부대는 3천 명 규모의 특수경찰이었으며, 12개 대대가 군사적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또한 9천~1만 명 규모의 예비경찰이 16개 대대와 10개 중대로 조직되었으나, 무기는 부족했다.[1]

상황이 악화되자 크로아티아 정부는 5월에 특수경찰 부대를 기반으로 4개 전문근위여단을 창설하여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ZNG)을 창설했다. 크로아티아 국방부 통제 하에 퇴역한 유고 인민군 장군 마르틴 슈페겔이 ZNG를 지휘했으며, 약 8천 명의 병력이었다.[2] 예비경찰도 4만 명으로 확대되어 ZNG에 편입, 19개 여단과 14개 독립대대로 재편되었다. 근위여단은 ZNG에서 유일하게 소화기를 갖춘 부대였지만, ZNG 전체적으로 중화기가 부족했고, 여단급 이상 지휘통제구조도 미흡했다.[1]

ZNG는 중화기 부족이 심각하여 박물관이나 영화 스튜디오에서 가져온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무기까지 사용해야 했다.[3] 당시 크로아티아는 해외에서 구입한 소화기 약 3만 정과 경찰이 보유했던 소화기 15,000정 정도만 보유하고 있었다. 근위여단의 병력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 약 1만 명 규모의 새로운 경찰 병력이 충원되었다.[1]

3. 전조

1990년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열린 민주 총선에서 크로아티아 민주연합(HDZ)이 대승을 거두자 크로아티아 내 크로아트인세르브인 사이 민족 갈등이 심화되기 시작했다.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은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 크로아티아 내 영토방위군(TO)의 무기를 전부 압수했다.[1] 8월 17일에는 민족 분쟁이 세르브계 크로아티아인대대적인 반란으로 번져 주로 세르브계가 다수 거주하는 달마티아고원 내륙 크닌(스플리트에서 동북쪽으로 60 km 떨어짐) 주변 지역, 리카, 코르둔, 바노비나, 크로아티아 동부 일부 지역에 반란이 일어났다. 1991년 1월 몬테네그로와 세르비아 내 자치주인 보이보디나, 코소보의 지원을 받은 세르비아는 크로아티아 보안군을 무장 해제시키기 위한 유고 인민군의 작전을 유고슬라비아의 대통령직단에게 승인을 받으려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3월에는 세르브계 반군과 크로아티아 특수경찰인 루치코 대테러부대 사이 유혈 충돌이 발생하자 유고 인민군은 연방 대통령직에게 전시 권한을 부여하고 비상사태를 선포하라고 요청했으나, 3월 15일 세르비아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거부되었다. 세르비아의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유지하는 것보다 세르비아를 확대하는 방향을 선호하면서 유고 인민군을 세르비아군으로 바꾸겠다고 공개적으로 위협하고 연방 대통령직의 권위를 더 이상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 위협으로 유고 인민군은 유고슬라비아 연방 존속 계획을 포기하고 밀로셰비치 통제 하에 들어갔다. 3월 말에는 분쟁이 격화되며 첫 충돌 사망자가 발생했다. 4월 초 크로아티아 내 세르브인 반군 지도자들은 자신이 통제하는 지역을 세르비아와 합병하겠다고 발표했고, 크로아티아 정부는 이들을 분리독립 반란군으로 규정했다.

1991년 초 크로아티아에는 군대가 없었다. 크로아티아는 국방력 강화를 위해 경찰을 2만 명으로 증원했다. 가장 강력한 부대는 12개 대대 3천 명 규모의 크로아티아 특수경찰이었고, 16개 대대, 10개 중대로 된 9천~1만 명 규모의 예비경찰부대도 있었으나 무기가 부족했다. 5월, 크로아티아 정부는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ZNG)을 창설, 마르틴 슈페겔이 지휘하는 4개 여단 약 8천 명 병력으로 구성했다. 예비경찰도 4만 명으로 확대되어 ZNG에 편입되었다. 근위여단은 소화기를 갖춘 유일한 부대였으나, 국가방위군 전체에 중화기가 부족했고 지휘통제구조도 열악했다. 중화기 부족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무기도 사용했다. 당시 크로아티아의 무기 비축량은 해외 구입 소화기 약 3만 정과 기존 보유 소화기 15,000정뿐이었다. 근위여단 병력 손실을 대체하기 위해 약 1만 명 규모의 신규 경찰 병력도 충원되었다.

3. 1. 막사 전투의 시작

1991년 1월부터 9월까지 크로아티아는 세르비아계의 반란에 대한 유고 인민군(JNA)의 역할에 대해 점차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프라뇨 투지만 크로아티아 대통령은 초기에는 미국유럽 경제 공동체의 지원을 받는 것을 목표로 하였고, 크로아티아 내 유고 인민군 막사와 무기고를 점령하라는 조언을 무시했다. 마르틴 슈페겔은 1990년 말 유고 인민군 막사와 무기고 점령을 처음 주장했고, 1991년 초중반 투지만에게 이 계획을 다시 촉구했으며, 1991년 6~7월 열흘 전쟁 당시 유고 인민군이 슬로베니아 국토방위군과 교전할 때 이를 시행하자고 주장했다.[2] 7월에는 슈페겔의 후임 국방장관 시메 조단도 이 요청에 적극 호응했으며, 슈페겔은 이후에도 국가방위군을 계속 지휘했다.[2]

투지만은 크로아티아가 유고 인민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생각에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다. 유고 인민군의 행동은 세르브계 군사와 조율된 것처럼 보였으나, 국가방위군은 방어에만 집중했다.[2] 세르브계 민병대와 국가방위군 간 무력 충돌 이후 유고 인민군이 완충지대를 설정할 때, 세르브계 군사가 국가방위군 영토를 잃은 후에야 유고 인민군이 개입하고, 완충지대 설정 후에는 세르브계 군사가 사실상 점령 지역을 통제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이러한 인식이 강화되었다. 유고 인민군은 세르브계 민병대에게 무기를 제공했으며, 민병대 무기의 대부분은 세르비아 국토방위군과 내무군 무기고에서 유입되었다.[3]

1991년 7월, 슈페겔과 조단의 요구는 의회 토의에 회부되었고, 많은 크로아티아 국회의원이 이를 지지했다. 투지만 대통령은 조단을 국방장관으로 임명한 같은 달에 해임했고, 슈페겔도 8월 3일 군 지휘관직에서 사임했다. 그러나 유고 인민군이 버러녀에서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을 축출하고 오시예크, 부코바르, 빈코브치 주변에서 간헐적인 전투가 일어나는 등[4] 크로아티아 동부 상황이 악화되고 유고 인민군이 세르브계 군사를 적극 지원했다는 확신이 커지면서 투지만은 행동에 나섰다.[2] 8월 22일, 투지만은 유고슬라비아 연방군에게 이달 말까지 모든 군사를 병영으로 철수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유고 인민군이 이에 응하지 않으면 크로아티아는 이를 점령군으로 간주하고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2] 9월 1일, 유럽 공동체는 휴전을 제안했고, 투지만은 최후통첩에도 불구하고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직과의 평화 회담을 수락했다. 9월 7일 회담이 시작되었으나, 나흘 후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직의 크로아티아측 대표이자 의장인 스체판 메시치는 유고 인민군에게 48시간 내에 병영으로 복귀하라고 명령했다.[5] 이는 국가방위군이 영토를 잃으면 더 이상 회담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는 투지만의 인상을 보고 내린 결정이었다. 이 명령에 대통령직 다른 위원들이 이의를 제기했으나, 크로아티아는 유고 인민군에 공개적으로 맞설 명분을 얻게 되었다.[6]

크로아티아의 총리 프라뇨 그레구리치는 투지만에게 슈페겔의 계획을 실행하자고 제안했다.[7] 안톤 투스 장군에 따르면, 투지만은 9월 12일 국가방위군에게 유고 인민군 막사를 점령하라고 명령했지만 다음 날 취소했다. 이 명령은 9월 14일 투스가 시간이 부족하다며 투지만에게 재승인을 요청하면서 다시 내려졌다.[8] 같은 날,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과 경찰은 접근 가능한 모든 유고 인민군 시설을 봉쇄하고 전기, 수도 등을 차단하며 막사 전투가 시작되었다.[9] 이와 동시에 크로아티아 내 33곳의 대규모 유고 인민군 주둔지가 봉쇄되었고,[10] 국경초소와 무기 및 탄약고 같은 수많은 소규모 시설도 봉쇄되었다.[9]

4. 전투 서열

바라주딘에는 소장 블라디미르 트리푸노비치가 지휘하는 유고 인민군(JNA) 제32군단 본부가 있었다. 도시 안팎에는 여러 인민군 시설이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시설은 다음과 같다.[1]


  • 칼니치키 파르티자니 막사: 베리슬라브 포포브 대령의 제32기계화여단 주둔
  • 얄코베치케 주르트베 막사: 블라디미르 다비도비치 중령의 제32혼성포병연대 주둔


제32군단의 작전책임구역은 바라주딘과 그 인근 지역으로 확대되어 다른 주요 전투부대도 주둔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부대는 다음과 같다.[1]

바라주딘 내에는 인민군 약 1천명의 병력이 주둔했으며,[3] 바라주딘의 유고 인민군은 크로아티아 내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의 주둔군이었다.[4] 그럼에도 유고 인민군은 모든 군 시설을 확보하기에 충분한 병력을 가지지 못했다.[5]

바라주딘과 차코베츠 인근의 크로아티아군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6]

부대병력비고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ZNG)640명 (자그레브에서 증원된 60명 포함)제104여단, 제1근위여단 제5대대 산하, 무장 빈약
경찰100명
인민보호군단(나로드나 자슈티타)300명
무장 민병대수백명



크로아티아군은 소화기 외에 박격포 17문, 9M14 말륫카 대전차 미사일 2개, 12.7 mm 대공기관총 2문, 병력수송장갑차 4대만 보유했다.[6] 처음에는 도시 내 크로아티아군의 지휘권이 통합되지 않았고, 크로아티아군 참모총장인 젤리미르 슈카레츠 중장은 조정 역할만 했다.[7]

5. 전개

1991년 9월 13일 바라주딘과 인근의 유고 인민군(JNA) 시설에 대한 봉쇄 명령이 내려졌고,[1] 다음 날부터 군 시설과 막사 봉쇄가 시작되었다. 이에 유고 인민군 군단 사령부는 크로아티아군에게 봉쇄 해제를 요구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평화를 보장할 수 없다고 선포했다. 9월 15일, 군단은 방어가 어려운 소규모 군 시설 철수 준비를 시작했고, 같은 시각 군단 사령부와 바라주딘 지방 정부 간 협상이 시작되었다.[1]

9월 15일 15시 30분, 유고슬라비아 공군이 헝가리 너지커니저에서 무기를 운송하던 1.5ton An-2 농업기의 비행을 방해하기 위해 바라주딘 비행장을 공격했다.[3][4] 젤랴바 공군기지에서 이륙한 2대의 항공기가 음속장벽을 돌파하며 소닉붐을 일으켰고, 비행장에 폭탄을 투하하여 An-2 1기가 파괴되고 활주로가 손상되었으며, 다른 폭탄은 인근 풀밭에 떨어졌다.[5]

16시 50분에서 17시 7분 사이, 군단 사령부와 인근 경찰 검문소 간 소화기 교전이 발생했고, 17시 35분에는 제32기계화여단이 박격포 공격을 시작했다. 박격포는 경찰서와 주변 건물, 네델랴네츠 인근 변전소를 목표로 했다.[3] 바라주딘 지방 정부는 즉시 유럽 공동체 구유고슬라비아 감독 활동에 도시 공격 사실을 보고했다.[6]

9월 16일부터 유고 인민군의 포격은 바라주딘–차코베츠 도로의 드라바강 다리로 이어지는 교차로와 접근로로 확대되었다. 드라바강 접근로 포격은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 박격포 부대에 대한 대포병사격이었다.[7] 같은 날 밤까지 유고 인민군 제32기계화여단 장교와 병사 42명이 탈영했다. 인민군은 차코베츠에서 루드브레그까지 헝가리 국경을 따라 배치된 국경수비대에게 군 시설 주변에 지뢰를 매설하고 헝가리로 넘어가 항복하라고 명령했다.[6]

9월 17일 이반 루클리치 대령이 바라주딘 내 모든 크로아티아군 지휘를 시작했고,[1] 같은 날 유고슬라비아 공군은 차코베츠 비행장을 공습했다.[2] 이날 저녁 바라주딘 포위전 중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며,[3] 104여단은 봉쇄 유지에 어려움을 겪었다.[4] 한편, 크로아티아군은 차코베츠, 크리제브치, 비로비티차에서 항복한 유고 인민군에게서 노획한 무기로 증원받았다.[3] 같은 날 바라주딘에서는 15. 마이 막사에 주둔한 유고 인민군 제32군단 예하 부대가 국가방위군에 항복했다.[5]

9월 18일, 크로아티아군은 바라주딘 내 소규모 유고 인민군 시설을 점령하며 전투를 이어갔다. 유고 인민군이 장악한 기지는 군단 사령부, 칼니치키 파르티자니 막사, 얄코베치케 주르트베 막사만 남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 병사 1명이 사망하고, 유고 인민군 장교 9명과 병사 30명이 포로로 잡혔다.[1]

9월 19일, 크로아티아군은 제32기계화여단 포병과 포병관측반 사이의 무선 통신을 차단하고 자체 송신기를 설치, 유고 인민군 포병에게 얄코베치케 주르트베 막사 포격을 지시하는 속임수를 썼다. 이는 다비도비치에게 국가방위군이 실제보다 강력한 화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 계획은 성공하여, 당일 국가방위군이 막사 건물에 진입하자 제32혼성포병연대(장교 4명, 병사 196명)가 항복했다.[6] 같은 날 밤늦게, 크로아티아 경찰과 제104여단 제3대대는 바라주딘 인근 반슈치나 마을의 바라주딘브레그 무기고를 확보했다. 유고 인민군 사령관은 무기고와 주둔군 60여 명을 저항 없이 넘겨주었다.[7] 이 무기 탈취는 제32군단 지휘관에게 항복을 설득할 때 크로아티아 측의 협상력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3]

크로아티아군은 바라주딘 막사를 장악하고 BVP M-80 보병전투차 48대를 노획했다.


9월 21일까지 봉쇄는 이어졌고 크로아티아군과 인민군 부대 간 충돌이 계속되었다. 제32군단은 무기고와 탄약고를 전부 잃었고 제32기계화여단 기지를 제외한 모든 막사도 점령되어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다고 보고했다. 또한 남은 병력이 집단 탈영할 가능성도 있다고 언급했다.[1] 트리푸노비치에 따르면 자신의 직속상관이자 제5군구 사령관인 중장 지보타 아브라모비치에게 항복 의사를 여러 차례 알렸으나, 아브라모비치는 트리푸노비치에게 알아서 판단해서 행동하라고 명령했다.[2]

9월 22일 아침 크로아티아군은 최후통첩을 발표해 도시 내 인민군 부대에게 항복하고 병사들이 크로아티아를 "명예롭게" 떠날 기회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트리푸노비치는 11시에 크로아티아군의 조건을 모두 수락했다.[3]

크로아티아군은 M-63 플라멘 다연장 로켓 발사기 6대를 노획했다.

5. 1. 첫 교전

1991년 9월 13일 바라주딘과 인근의 유고 인민군(JNA) 시설 봉쇄 명령이 내려졌고,[1] 다음 날 군 시설과 막사가 봉쇄되기 시작했다. 이에 대응해 군단 사령부는 크로아티아군에게 군 시설 봉쇄를 풀고 인민군 군용 차량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다면 더 이상 평화를 보장할 수 없다고 선포했다. 9월 15일, 군단은 방어할 수 없는 모든 소규모 군 시설에서 철수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2] 같은 시각 군단 사령부와 바라주딘 지방 정부 간 협상이 시작되었다.[1] 15시 30분에는 유고슬라비아 공군이 바라주딘 비행장을 공격했다.[3] 이 공습은 헝가리 마을인 너지커니저에서 무기를 운송하던 수송 능력 1.5ton의 개조된 An-2 농업기 비행을 방해하기 위해 시행했다.[4] 공습은 젤랴바 공군기지에서 이륙한 항공기 2대로 이루어졌으며 바라주딘 마을 바로 위에서 음속장벽을 뚫고 소닉붐을 일으키며 비행장을 폭격했다. 폭탄 하나가 지상에 주기되어 있던 An-2 1기를 파괴하고 활주로를 손상시켰고, 두 번째 폭탄은 인근 풀밭에 떨어졌다.[5]

16시 50분에서 17시 7분 사이에는 군단 사령부와 인근 경찰 검문소 사이 소화기 교전이 일어났고, 17시 35분에는 제32기계화여단이 박격포 공격을 시작했다. 박격포는 경찰서와 주변 건물, 인근 네델랴네츠 마을에 있는 변전소를 표적으로 떨어졌다.[3] 바라주딘 지방 정부는 즉시 유럽 공동체 구유고슬라비아 감독 활동에 도시가 공격받았음을 보고했다.[6] 9월 16일부터는 유고 인민군의 시가지 포격이 바라주딘–차코베츠 도로의 드라바강 다리로 이어지는 여러 거리의 교차로와 접근로로 확대되었다. 드라바강 접근로 포격의 경우 전체 작전 기간 유고 인민군을 향해 약 150발의 포탄을 발사한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 박격포 부대를 향한 대포병사격에 해당한다.[7] 9월 16일 밤까지 유고 인민군 제32기계화여단의 장교와 병사 42명이 탈영했다. 인민군은 차코베츠에서 루드브레그까지 헝가리 국경을 따라 배치된 국경수비대에게 군 시설 주변에 지뢰를 매설한 다음 헝가리로 월경해 헝가리 정부에 항복하라고 명령했다.[6]

5. 2. 격화되는 전투

9월 17일 이반 루클리치 대령이 바라주딘 내 모든 크로아티아군 지휘를 시작했다.[1] 같은 날 유고슬라비아 공군은 며칠 전 바라주딘에서와 같이 차코베츠 비행장을 공습했다.[2] 이날 저녁 바라주딘 포위전 중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며,[3] 104여단은 봉쇄 유지 기간에 대해 불확실하다고 보고했다.[4] 한편, 크로아티아군은 차코베츠, 크리제브치, 비로비티차에서 항복한 유고 인민군에게서 노획한 무기로 증원받았다.[3] 이날 바라주딘에서는 15. 마이 막사에 주둔한 유고 인민군 제32군단 예하 부대가 국가방위군에 항복했다.[5]

다음 날인 9월 18일, 크로아티아군은 바라주딘 내 소규모 유고 인민군 시설을 점령하며 전투를 이어갔다. 이로써 유고 인민군이 장악한 기지는 군단 사령부, 칼니치키 파르티자니 막사, 얄코베치케 주르트베 막사만 남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 병사 1명이 사망하고, 유고 인민군 장교 9명과 병사 30명이 포로로 잡혔다.[1]

9월 19일, 크로아티아군은 제32기계화여단 포병과 포병관측반 사이의 무선 통신을 차단하고 자체 송신기를 설치, 유고 인민군 포병에게 얄코베치케 주르트베 막사 포격을 지시하는 속임수를 썼다. 이는 다비도비치에게 국가방위군이 실제보다 강력한 화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 계획은 성공하여, 당일 국가방위군이 막사 건물에 진입하자 제32혼성포병연대(장교 4명, 병사 196명)가 항복했다.[6]

같은 날 밤늦게, 크로아티아 경찰과 제104여단 제3대대는 바라주딘 인근 반슈치나 마을의 바라주딘브레그 무기고를 확보했다. 유고 인민군 사령관은 무기고와 주둔군 60여 명을 저항 없이 넘겨주었다.[7] 이 무기 탈취는 제32군단 지휘관에게 항복을 설득할 때 크로아티아 측의 협상력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3]

5. 3. 유고 인민군 주둔군의 항복

봉쇄는 이틀 더 이어졌고 크로아티아군과 인민군 부대 간 충돌이 계속 이어졌다. 9월 21일 제32군단은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무기고와 탄약고를 전부 잃었고 제32기계화여단 기지를 제외한 모든 막사도 점령되어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다고 보고했다. 또한 남은 병력이 집단 탈영할 가능성도 있다고 언급했다.[1] 트리푸노비치에 따르면 자신의 직속상관이자 제5군구 사령관인 중장 지보타 아브라모비치에게 항복 의사를 여러 차례 알렸으나, 아브라모비치는 트리푸노비치에게 알아서 판단해서 행동하라고 명령했다.[2] 크로아티아군은 9월 22일 아침 최후통첩을 발표해 도시 내 인민군 부대에게 항복하고 병사들이 크로아티아를 "명예롭게" 떠날 기회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트리푸노비치는 11시에 크로아티아군의 조건을 모두 수락했다.[3]

6. 여파

전투 결과, 유고 인민군 장교 1명과 부사관 1명이 사망하고, 병사 15명이 부상을 입었다.[1] 크로아티아군은 2명이 사망하고 24명이 부상을 입었으며,[2] 민간인 2명도 사망했다.[3] 유고 인민군 장교와 병사 약 1천여 명은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에 항복했다.[4] 바라주딘에 거주하는 장교와 그 가족, 크로아티아를 떠나길 원하는 병사 450명은 12대의 버스와 여러 승용차로 구성된 호송대를 타고 세르비아로 이동했다.[5] 호송대는 경찰이 호위했고, 바라주딘 지방 정부 대표단 2명이 안전 보장을 위해 인질로 동행했다. 인질 중 한 명은 라디미르 차치치였으며,[1][3] 그는 20년 후 크로아티아의 부총리가 되었다.[6]

바라주딘 막사에서 크로아티아군이 노획한 2S1 자주포 6대.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은 T-55 전차 75대, PT-76 수륙양용 경전차 등 특수목적차량 10여 대, 장갑구난차 1대, 가교전차 1대, BVP M-80 보병전투차 48대, 자주대공포 18문, 2S1 자주포 6대, M-63 플라멘 6대, M-77 오간 MRL 4대, 155mm 포 18문, 152mm 포 12문, 견인차량, 100mm 이하 구경 포 180여 문, 60mm, 82mm, 120mm 박격포 여러 문, 소화기 25,000정, 차량 및 공병장비 250대, 대량의 통신 장비 및 수십만 톤의 탄약을 노획했다.[4] 항복 직전 트리푸노비치의 명령에 따라 일부 무기는 파괴되었다.[1] 노획된 무기는 동슬라보니아, 리카, 달마티아에 배치된 부대에 전해졌고, 일부는 신규 국가방위군 부대 무장에 사용되었다.[7]

유고 인민군이 장악한 마지막 막사와 32군단 사령부가 항복하면서, 군단 작전책임지역 내에는 벨로바르와 코프리브니차 2개 대형 기지만 남게 되었다. 벨로바르 막사는 일주일 후 국가방위군이 점령했고, 코프리브니차 막사는 하루 만에 항복했다.[8] 바라주딘과 주변 인민군 막사, 특히 32군단 무기고 점령은 크로아티아군 무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9] 바라주딘에서는 막사 점령일을 매년 기념하며, 현지에서는 "바라주딘의 전쟁의 날"이라고 부른다.[10]

크로아티아는 트리푸노비치에게 전쟁 범죄 혐의를 제기, 군인과 민간인 총 6명 사망, 37명 부상 혐의로 기소했다. 1991년 크로아티아 법원에서 궐석재판 결과 유죄가 인정되어 징역 15년형이 선고되었다. 1994년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트리푸노비치를 32군단 전체를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에 넘긴 혐의(반역죄)로 기소, 징역 11년형을 선고했다. 1996년 초 트리푸노비치는 사면 및 석방되었고,[3]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2년간의 수감 보상금으로 62000EUR를 지급했다. 2013년 트리푸노비치는 크로아티아에 재심을 요청했으나, 2017년 1월 재심 절차 종료 전 사망했다.

참조

[1] 웹인용 Oficir koji je odbio sravniti Varaždin sa zemljom https://express.24sa[...]
[2] 서적
[3] 서적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서적
[8] 뉴스 Jutarnji list 2011-05-28
[9] 서적
[10]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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