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치와 모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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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망치와 모루 전술은 한 부대가 적의 공격을 막는 동안(모루), 다른 부대가 적의 측면이나 후방을 공격하여(망치) 적을 포위 섬멸하는 군사 전술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중장 보병과 기병을 조합하여 처음 사용되었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 군을 격파하는 데 활용하여 널리 알려졌다. 이 전술은 충분한 기동력과 제병 연합이 중요하며, 아군 병력 분산 및 연계 부족 시 각개 격파될 위험이 있다.
망치와 모루 전술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다양한 시대와 전쟁에서 활용되었으며, 현대전에서는 보병, 전차, 공군 등의 병력을 조합하여 사용되기도 한다. 걸프 전쟁 당시 헤일메리 기동 작전, 한국 전쟁 중 국군의 대 게릴라 작전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또한, 영화, 게임, 스포츠 등 다양한 대중문화에서도 이 전술의 개념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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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치와 모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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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술 개요 | |
정의 | 망치와 모루 전술은 두 가지 보완적인 부대가 적을 포위 섬멸하는 군사 전술이다. |
망치 부대 | 강력한 공격력을 가진 부대로, 적을 강하게 압박하여 특정 위치에 고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
모루 부대 | 방어력이 뛰어난 부대로, 적의 공격을 받아내며 망치 부대가 공격할 수 있도록 적을 붙잡아두는 역할을 한다. |
목표 | 적을 고정시킨 후, 다른 부대가 측면이나 후방을 공격하여 포위하고 섬멸하는 것이다. |
역사적 맥락 | |
기원 | 고대부터 사용된 전술로, 기원전 6세기의 키루스 대왕의 군대에서 찾아볼 수 있다. |
발전 | 알렉산드로스 대왕: 기병대를 망치로, 보병 팔랑크스를 모루로 활용하여 전술을 발전시켰다. 한니발: 칸나에 전투에서 이 전술을 사용하여 로마군을 격파했다. |
중세 시대 | 바이킹: 방패벽을 모루로, 다른 바이킹 전사들을 망치로 사용하여 전투를 벌였다. 노르만족: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이 전술을 변형하여 잉글랜드군을 격파했다. |
현대 | 현대전에서도 유사한 개념이 사용되며, 기갑 부대와 보병 부대의 협동 작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
주요 전투 사례 | |
칸나에 전투 (기원전 216년) | 한니발의 카르타고군이 로마군을 포위 섬멸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카르타고군은 중앙 보병을 모루로, 양익의 기병을 망치로 사용하여 로마군을 격파했다. |
가우가멜라 전투 (기원전 331년) |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마케도니아군이 페르시아군을 격파한 전투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기병대를 망치로, 보병 팔랑크스를 모루로 사용하여 페르시아군을 무너뜨렸다. |
헤이스팅스 전투 (1066년) | 노르만족이 잉글랜드군을 격파하고 잉글랜드를 정복한 전투이다. 노르만족은 중앙의 보병 방어선을 모루로, 기병을 망치로 사용하여 잉글랜드군을 격파했다. |
전술의 변형 및 응용 | |
기동전 | 기갑 부대를 활용하여 적의 측면을 빠르게 우회하고 포위하는 전술이다. |
공지 합동 작전 | 공수 부대를 활용하여 적의 후방을 공격하고, 지상 부대가 전면에서 압박하는 전술이다. |
사이버전 | 사이버 공격을 통해 적의 정보 시스템을 마비시키고, 동시에 물리적인 공격을 가하는 전술이다. |
추가 정보 | |
관련 개념 | 포위 섬멸, 측면 공격, 기동전, 협동 작전 |
2. 고대
고대 그리스와 페르시아에서 고안되어 널리 사용되었다. 고대에는 중장 보병과 기병 (특히 중장 기병)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장 보병이 팔랑크스 대형을 갖추고 적 보병과 돌격하여 백병전을 벌이며 적의 진격을 붙잡아 두는 동안, 아군 기병이 적의 후방이나 측면으로 우회하여 공격해 적의 대열을 무너뜨리는 방식이었다. 팔랑크스는 전방 공격에는 강했지만, 측면이나 후방 공격에는 취약했기 때문에 이 전술은 적의 팔랑크스를 격파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알렉산드로스 3세는 이 전술을 즐겨 사용했으며, 페르시아 군을 여러 번 격파했다. 그의 후계자들도 이 전술을 계승했는데, 예를 들어 에우메네스는 파라에타케네 전투에서, 데메트리오스는 가자 전투에서 사용했다.
2. 1. 마케도니아의 망치와 모루 전술
고대 그리스의 전장에서는 밀집대형(팔랑크스)을 갖춘 중장보병이 주축이었다. 이들은 정면에 강했지만 측면과 후방은 취약했다. 측면이 무너지면 전선 전체가 붕괴될 수 있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러한 팔랑크스 대형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있었다. 페르시아 전쟁 당시 아테네군은 마라톤 전투에서 좌우익을 보강해 승리했고, 스파르타군은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지형을 이용해 페르시아군의 측면 우회를 막았다.망치와 모루 전술은 기동력이 뛰어난 경기병을 활용했기에 고대 시대에 널리 사용되었다. 이 전술은 동방의 중기병인 카타프락토이에게도 효과적이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전투뿐만 아니라, 제2차 포에니 전쟁 중 칸나이 전투와 자마 전투 등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이 벌인 많은 전투에서 나타났다.
이 전술은 적을 유인하는 역할은 기동력이 낮고 내구력이 높은 병과가 맡고, 후방으로 우회하는 부대는 기동력이 높은 병과가 맡는다. 반고정된 부대에 적을 유인하고, 기동력 있는 부대가 공격하는 모습이 대장간의 망치와 모루를 닮았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이 전술을 사용하려면 충분한 기동력을 가진 부대가 필요하며, 제병 연합이 잘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병력 분산으로 인해 "망치"와 "모루"의 연계가 부족하면 적에게 각개 격파될 위험도 있다.
고대 그리스와 페르시아에서 고안되어 널리 사용된 이 전술은, 중장 보병과 기병(특히 중장 기병)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장 보병이 팔랑크스 대형을 갖추고 적 보병과 돌격하여 백병전을 벌이며 적의 진격을 붙잡아 두는 동안, 아군 기병이 적의 후방이나 측면으로 우회하여 공격해 적의 대열을 무너뜨리는 방식이다. 팔랑크스는 전방 공격에는 강하지만 측면이나 후방 공격에 취약하기 때문에, 이 전술은 적의 팔랑크스를 격파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알렉산드로스 3세는 이 전술을 즐겨 사용했으며, 페르시아 군을 여러 번 격파했다. 그의 후계자들도 이 전술을 계승했다. 예를 들어 에우메네스는 파라에타케네 전투에서, 데메트리오스는 가자 전투에서 이 전술을 사용했다.
현대에도 진지를 구축하고 지구전을 펼치는 보병 부대에 적을 유인하고, 전차 부대가 후방으로 우회하는 전법 등을 이 전술에 비유하기도 한다. 한국 전쟁에서 유엔군이 발동한 슬레지해머 작전은 인천 상륙 작전에 호응하여 북한군을 협공하려 한 것으로, 이 전술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2. 1. 1. 이소스 전투
필로포스 2세의 마케도니아군은 팔랑크스가 정면에서 적을 저지하는 동안(모루) 기병대가 기동성을 살려 적 팔랑크스 대형의 측면과 후방으로 우회하여 강타하는(망치) 전술을 처음 확립하였다. 이 전술의 핵심은 기병의 충격력와 기동력에 있다. 필리포스 사후 마케도니아군식 전술을 계승하여 완성시켜 꽃을 피운 사람이 바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다.[24]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처음으로 완성된 마케도니아식 망치와 모루 전술을 선보인 전투는 이소스 전투이다. 수적으로 열세임에도 페르시아를 격파하였다. 망치와 모루 전술은 고대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중장보병과 기병을 사용했기 때문에 고대 전쟁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이 전술은 동방 세계의 중국 기병에도 효과가 있었으며 고대 그리스와 로마인이 벌인 수많은 전투에서 등장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많은 전투에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제2차 포에니 전쟁 중 칸나이 전투와 자마 전투에서도 사용되었다.[24]
2. 1. 2. 파르살루스 전투
기원전 48년, 폼페이우스는 로마 내전의 결정적인 전투가 될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카이사르를 상대로 망치와 모루 전술을 사용하려 했다. 폼페이우스는 중장보병을 이용해 카이사르 군단 중앙을 견제하는 동안, 우측 측면 기병대를 '망치'로 활용하려 했다.
카이사르는 이에 대응하여 숨겨둔 네 번째 보병 부대를 매복시켜 폼페이우스의 '망치' 부대를 기습했다.[25] 카이사르에 따르면 두 군대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26]
카이사르의 보병이 전진하자, 폼페이우스는 부하들에게 돌격하지 말고 카이사르 군이 근접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명령했다. 폼페이우스의 참모 가이우스 트리라리우스는 카이사르의 보병이 예상 행군 거리의 두 배를 감당해야 하기에 피로에 지쳐 무질서하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고정된 부대가 더 방어를 잘 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27]
폼페이우스 군이 진격하지 않자, 카이사르의 보병은 마크 안토니우스와 그나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 휘하에서 진격을 시작했다.[28] 카이사르의 병사들은 투척 거리에 가까워지자 명령 없이 휴식을 취하고 전열을 정비한 후 돌격을 계속했고, 두 군대가 충돌하는 동안 폼페이우스의 우측과 중앙선은 유지되었다. 카이사르는 4번째 라인의 예비 병력을 배치해 공격하는 기병대를 가로막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폼페이우스 보병이 싸우는 동안, 라비에누스는 왼쪽 측면의 폼페이우스 기병에게 카이사르 기병을 공격하라고 명령했고, 예상대로 기병은 카이사르의 기병을 성공적으로 밀어냈다. 그러자 카이사르는 숨겨둔 네 번째 보병 전열을 공개하고 폼페이우스 기병대의 돌격을 기습했다. 카이사르의 병사들은 폼페이우스 기병대에게 뛰어들지 말고 필라[29]를 사용해 돌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폼페이우스의 기병대는 당황하여 수백 명의 사상자를 냈고, 카이사르의 기병대가 뒤따라 돌격해 왔다.[30] 기습에 실패한 나머지 폼페이우스 기병대는 언덕으로 후퇴했고, 폼페이우스 군단의 왼쪽 날개는 카이사르의 기병대가 측면을 돌면서 숨어 있던 병력에게 노출되었다. 카이사르는 전투로 단련된 베테랑들로 구성된 제3 진영에 공격을 명령했다. 이에 폼페이우스의 좌익 부대는 전장에서 도망쳤다.[31]
폼페이우스의 기병대를 격파한 카이사르는 마지막 남은 예비 병력을 투입했다.[32] 폼페이우스는 자신이 지휘하는 병력들이 진형을 깨고 도망치는 것을 보면서 전투 의지를 잃었고, 중앙과 우측 측면의 나머지 병력은 각자 알아서 싸우도록 내버려둔 채 진영으로 후퇴했다. 폼페이우스는 주둔하고 있던 보조 병사들에게 자신이 탈출하는 동안 진영을 방어하라고 명령했다. 폼페이우스의 나머지 군대가 혼란에 빠지자 카이사르는 부하들에게 폼페이우스의 나머지 군대를 몰아내고 폼페이우스 진영을 점령하여 전투를 끝내자고 독려했다. 병사들은 폼페이우스 병사들의 유해를 모두 처리한 후 맹렬히 진영 성벽을 공격했다. 폼페이우스 진영에 남아있던 트라키아군과 다른 지원군들은 총 7개 집단으로 나뉘어 용감하게 방어했지만 공격을 막아내지는 못했다.[33]
2. 2. 한니발의 변형된 망치와 모루 전술

한니발이 칸나에 전투에서 사용한 전술은 변형된 형태의 망치와 모루 전술이었다. 한니발의 망치와 모루 전술과 알렉산드로스 3세의 망치와 모루 전술의 가장 큰 차이는 조공 부대인 보병대의 역할에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3세의 전술과 비교했을 때, 한니발의 전술에서 보병대는 더 능동적으로 움직였다. 이 전술에서 보병대는 단순히 정면에서 적을 막는 것뿐만 아니라, 의도적으로 후퇴하여 적을 깊숙이 유인하고 U자형 포위망을 형성하여 적 대형에 균열을 만들고 혼란을 일으키는 역할을 했다. 이후 기병대가 빠르게 포위망을 완성했다.
한니발은 카르타고 군이 보병에서는 로마군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기병은 오히려 우세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전력의 비대칭성을 활용하여 망치와 모루 전술을 사용했다.
결과적으로 카르타고 군의 조공 부대는 로마군을 깊숙이 유인하여 수적 우위에 있던 로마군의 대형을 무너뜨리고 고착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 후 기병대의 수적 우세를 활용하여 양쪽 측면에서 우회 기동을 통해 로마군을 포위했다. 로마군을 완벽하게 포위한 카르타고 군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로마군을 섬멸하여 칸나에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3. 전술의 전개
망치와 모루 전술은 기동력이 낮고 내구력이 높은 병과가 적을 유인하고, 기동력이 높은 병과가 후방으로 우회하여 공격하는 전술이다. 이 모습이 대장간의 망치와 모루를 닮았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이 전술을 사용하려면 충분한 기동력을 가진 부대와 제병 연합이 잘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병력이 분산되기 때문에 "망치"와 "모루"의 연계가 부족하면 병력 집중에서 우세한 적군에게 각개 격파될 위험이 있다.
고대 그리스와 페르시아에서 고안되어 널리 사용되었으며, 고대에는 중장 보병과 기병 (특히 중장 기병)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장 보병이 팔랑크스 대형을 갖추고 적 보병, 특히 중장 보병과 돌격하여 백병전을 벌이면서 적의 진격을 저지한다. 그 사이 아군 기병이 적의 후방이나 측면으로 우회하여 공격함으로써 적의 대열을 무너뜨리고 괴멸시킨다. 팔랑크스는 전방 공격에는 강하지만 측면이나 후방 공격에는 취약하므로, 이 전술은 적의 팔랑크스를 격파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알렉산드로스 3세가 이 전술을 즐겨 사용하여 페르시아 군을 여러 번 격파했다. 그의 후계자들도 이 전술을 계승했는데, 에우메네스는 파라에타케네에서, 데메트리오스는 가자에서 사용했다.
현대에도 보병 부대가 진지를 구축하고 지구전을 펼치는 동안 전차 부대가 후방으로 우회하는 전법을 모루 전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국 전쟁에서 유엔군이 인천 상륙 작전 (크로마이트 작전)에 호응하여 조선인민군을 협공하기 위해 계획한 슬레지해머 작전이 그 예이다.
3. 1. 전술의 단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자주 사용한 전술로 유명한 망치와 모루 전술은 한 제대를 정면에서 적의 공격을 저지하는 조공부대(모루)와 적 부대를 우회기동하여 포위섬멸하는 주공부대(망치)로 나누어 적을 공격하는 전술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끈 이소스 전투의 전개 과정을 통해 설명하자면,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도니아 군과 다리우스 3세의 페르시아 군은 이소스 평원에서 위 그림과 같이 대치했고, 마케도니아 군의 보병부대가 페르시아 군을 정면에서 상대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1800년대의 식민지 전쟁에서 일부 아프리카 군대는 망치와 모루 전술을 사용했다. 1874년, 현대식 소총과 포병으로 무장한 가넷 울즐리 경이 이끄는 영국군이 아산티 제국 영토를 침공했을 때, 아산티 제국 군대는 영국군을 아모아풀 마을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방어 모루를 향해 깊숙이 유인하고, 기동하는 측면 부대가 후방을 돌아 포위하는 전략을 사용했다.[12] 아산티족은 적을 앞으로 유인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영국군의 현대식 화력에 대항할 수 없었다. 비록 아산티족이 영국군의 전선을 거의 포위하고 일부 보병 방진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지만, 영국군이 배치한 현대식 무기에 비해 열세였기 때문에 결국 포위는 격퇴되었다.[13]
울즐리는 아산티족의 "말발굽" 대형을 예측하고, 최고의 부대와 강화된 화력으로 영국군의 측면을 강화하여 적의 기동을 방해하고, 망치와 모루 요소를 격파하여 적에게 후퇴를 강요할 수 있었다.[15]
4. 전술의 유의점
망치와 모루 전술의 핵심 유의점은 다음과 같다.
- 조공부대(보병대)는 주공부대(기병대)가 적군을 우회하여 포위할 때까지 적의 공세를 버텨야 한다.
- 주공부대(기병대)는 조공부대(보병대)가 무너지기 전에 빠르게 적을 포위하고, 진형을 측면이나 후방부터 무너뜨려야 한다.
- 지형적 조건을 고려해야 한다.
조공부대인 보병대가 적군을 막지 못하면 아군 중앙이 뚫리고, 양쪽의 기병대는 고립되어 각개격파될 위험이 커진다. 따라서 숙련된 병사들과 팔랑크스 방진대형처럼 밀집 방어 전술, 혹은 방어에 유리한 지형 선택이 필요하다.
또한, 적군이 기병대의 우회 기동에 맹공을 가해 망치와 모루 전술을 역이용할 수도 있다. 카이사르는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 군의 기병대를 역포위하여 격파한 사례가 있다.
지형지물을 활용하면 적은 병력으로도 모루 역할을 수행하고, 한쪽 방향 우회만으로도 적을 포위할 수 있어 유리하다.
망치와 모루 전술이 발전하면서 다양한 변칙 전술과 대응법도 등장했다. 예를 들어:
등, 상황에 따라 적군과 아군의 장단점을 분석하여 전술에 적용해야 한다.
1874년 아산티 제국은 가넷 울즐리 경이 이끄는 영국군을 상대로 망치와 모루 전술을 사용하려 했다. 아산티 군은 영국군을 아모아풀 마을 근처의 방어 진지로 유인하여 발을 묶고, 측면 부대로 포위하려 했다. 그러나 영국군의 현대식 화력에 밀려 실패했다.[12] 아산티족은 영국군의 전선을 거의 포위하고 일부 보병 방진을 돌파했지만, 현대식 무기의 화력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다.[13] 영국군 참전자는 아산티족의 저항과 측면 공격을 높이 평가했다.[14] 울즐리는 아산티족의 전술을 예측하고 화력을 집중하여 적의 기동을 방해하고 망치와 모루 요소를 격파했다.[15] 전사한 아산티 지휘관의 전술적 리더십과 지형 활용은 영국군에게도 경의를 표하게 했다.[16]
망치와 모루 전술에서 적을 유인하는 역할은 방어력이 높은 병과가, 우회하는 역할은 기동력이 높은 병과가 맡는다. 대장간의 망치와 모루를 닮아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이 전술은 제병 연합이 잘 이루어져야 하며, 병력 분산으로 인해 "망치"와 "모루"의 연계가 부족하면 각개 격파될 위험이 있다.
고대 그리스와 페르시아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중장 보병과 기병(특히 중장 기병)을 활용했다. 중장 보병이 팔랑크스 대형을 갖추고 적 보병을 붙잡아두는 동안, 기병이 적의 후방이나 측면을 공격하여 대열을 무너뜨리는 방식이다.
알렉산드로스 3세는 이 전술로 페르시아 군을 여러 번 격파했다. 그의 후계자들도 이 전술을 계승했다. 에우메네스는 파라에타케네에서, 데메트리오스는 가자에서 이 전술을 사용했다.
현대에도 진지를 구축한 보병 부대로 적을 유인하고, 전차 부대가 후방으로 우회하는 전법을 모루 전술이라 부르기도 한다. 한국 전쟁에서 유엔군의 슬레지해머 작전은 인천 상륙 작전과 연계하여 북한군을 협공하려 한 작전으로, 망치와 모루 전술의 좋은 예이다.
5. 망치와 모루 전술이 유효한 이유
고대 그리스와 페르시아에서 고안되어 널리 사용된 망치와 모루 전술은, 중장보병과 기병(특히 중장기병)을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먼저 중장보병이 팔랑크스 대형을 갖추고 적 보병, 특히 중장보병과 돌격하여 백병전을 벌이면서 적의 진격을 저지한다. 그 사이 아군 기병이 적 대열의 후방이나 측면으로 우회하여 공격함으로써 적 대열을 분단, 혼란시켜 괴멸시킨다. 팔랑크스는 전방 공격에는 강하지만 측면이나 후방 공격에는 취약했기 때문에, 이 전술은 적 팔랑크스를 격파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알렉산드로스 3세는 이 전술을 즐겨 사용하여 페르시아 군을 여러 차례 격파했다. 그의 후계자들도 이 전술을 계승했는데, 예를 들어 에우메네스는 파라에타케네에서, 데메트리오스는 가자에서 이 전술을 사용했다.
현대에도 진지를 구축하고 지구전을 펼치는 보병 부대로 적을 유인하고, 그 사이에 전차 부대가 후방으로 우회하는 전법을 망치와 모루 전술에 비유하기도 한다. 한국 전쟁에서 유엔군이 인천 상륙 작전(크로마이트 작전)에 호응하여 조선인민군을 협공하려 했던 슬레지해머 작전이 그 예시이다.
6. 망치와 모루 전술의 파훼
한니발은 칸나이 전투에서 중앙을 오목하게 배치하여 로마군이 중앙 돌파를 시도하게 만들었다. 로마군은 의도적으로 후퇴하는 카르타고 군을 밀어붙이다가 전열이 무너졌고, 측면의 한니발의 정예병과 후방의 기병대에 의해 포위되었다.[37] 이러한 전술은 중무장 장창병보다는 경무장이 필요하며, 적 양쪽을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망치가 필요하다.
이러한 그물망을 찢기 위해서는 한 지점에 집중하여 분쇄하는 것이 최선이다. 일리파 전투에서 스키피오는 양쪽에 로마 정예군을 배치하고 중앙은 에스파냐 보조군에게 맡겼다. 로마 정예군은 카르타고의 양쪽을 압도하여 칸나이에서처럼 후퇴할 여유를 주지 않고 포위했다.[38]
2차 포에니 전쟁의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네로는 지형 때문에 진격이 어려운 우익의 일부를 좌익에 보탰다. 이를 통해 적 우익을 포위하고, 로마군 기병대는 카르타고의 망치를 압도하여 적을 포위했다. 이는 사선진의 메커니즘을 극대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망치와 모루 전술에 맞서 예비대를 활용했다. 폼페이우스의 기병대가 카이사르의 기병대를 압도했지만, 카이사르는 예비대를 투입하여 폼페이우스의 기병대를 격파했다. 이 예비대는 망치가 되어 적을 포위했다.
1874년 아산티 제국은 아모아풀 전투에서 영국군을 유인하여 포위하려 했으나, 영국군의 화력에 밀려 실패했다.[12] 아산티족은 영국군을 포위하려 했지만, 영국군의 현대식 무기에 패배했다.[13] 영국군은 아산티족의 전술을 예측하고 화력을 집중하여 격파했다.[15]
망치와 모루 전술은 아군 병력을 분산시키는 단점이 있으며, 연계가 부족하면 각개 격파될 위험이 있다.
7. 근현대전
현대전에서 망치와 모루 전술은 개인화기, 포병, 공군의 발달로 인해 고대 근접전보다 사용하기 어려워졌지만, 여전히 유효하다. 보병 간 소전투는 기본적으로 망치와 모루의 원리를 따르며,[39] 작전술/전략 단위에서는 포위섬멸전 개념과 함께 유용하게 쓰인다.
1800년대 식민지 전쟁에서 일부 아프리카 군대는 망치와 모루 전술을 사용했다. 1874년 아산티 제국은 영국군을 아모아풀 마을로 유인하여 포위하려 했으나, 영국군의 현대식 화력에 밀려 실패했다.[12] 아산티족은 영국군을 거의 포위할 뻔했지만, 무기의 열세로 인해 격퇴당했다.[13] 영국군은 아산티족의 대형을 연구하고 화력을 집중하여 적의 기동을 방해하고 격파했다.[15] 전사한 아산티 지휘관은 뛰어난 전술적 리더십과 지형 활용 능력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망치와 모루 전술은 기동력이 낮고 내구력이 높은 병과가 적을 유인하고, 기동력이 높은 부대가 후방을 공격하는 방식이다. 제병 연합이 잘 기능해야 하며, 병력 분산으로 인해 각개 격파될 위험성도 있다.
고대 그리스와 페르시아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중장 보병과 중장 기병을 활용한 사례가 많았다. 알렉산드로스 3세가 즐겨 사용했으며, 그의 후계자들도 이 전술을 계승했다.
현대에는 보병 부대가 적을 유인하고 전차 부대가 후방을 우회하는 전법을 망치와 모루 전술에 비유하기도 한다. 한국 전쟁에서 유엔군의 슬레지해머 작전이 그 예이다.
6.25 전쟁에서 유엔군은 슬레지해머 작전을 통해, 국군은 대(對)게릴라 작전을 통해 망치와 모루 전술을 활용했다. 1950년대 초, 북한은 이승만 대통령을 전복하고 공산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남한 내 공산주의 반란을 지원했다. 대한민국군은 여러 차례 반란 진압에 성공했지만, 북한은 게릴라 부대를 파견하여 혁명을 선동하려 했다. 국군 제6사단은 2개 대대 규모의 망치와 모루 기동작전으로 북한 게릴라군을 전멸시켰다. 이 작전으로 북한 게릴라군은 584명(사살 480명, 포로 104명)의 사상자를 냈고, 대한민국군은 69명이 사망하고 184명이 부상당했다.[46] 이는 현대전에서 망치와 모루 전술의 위력을 보여준 사례이자, 남침 전까지 남한을 병합하려는 북한의 마지막 주요 시도였다.
현대 사회에서 전술 단위로는 시위대와 경찰기동대의 대치 상황에서 망치와 모루 전술과 유사한 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민주화 이전 시위가 격렬했을 때, 총기 사용이 엄격히 제한되는 사회 특성상 냉병기 위주의 고대 전투와 비슷한 양상이 나타났다. 무거운 장비를 갖춘 기동부대는 모루, 장구를 가볍게 한 체포 전담중대(백골단)는 망치 역할을 했다.
7. 1. 제1차 세계 대전
제 1차 세계 대전 당시 1940년의 프랑스 전역은 망치와 모루 전술의 고전 중 하나이다. 영불 연합군은 독일의 전략 상 최우익인 벨기에 방면이 망치, 알자스-로렌 지역이 모루였기 때문에 이번에도 비슷한 방식으로 전쟁이 펼쳐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개전 초 독일의 B집단군이 네덜란드/벨기에 방면으로 공세를 펼치자, 연합군은 예측이 맞았다고 판단하고 주력부대들을 B집단군 방면으로 밀어넣었다. 그 사이에 주력인 A집단군과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이 아르덴 숲 지역을 통과, 영불해협까지 내달리면서 포위를 완성한다.[40]
7. 2.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망치와 모루 전술이 활용된 대표적인 사례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캉 전투이다. 노르망디에 상륙한 연합군 지상군 사령관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은 독일군의 강력한 전차 부대에 맞서 영국군을 동쪽 측면에 배치하여 '모루' 역할을 수행하게 했다. 영국군은 독일 기갑 부대를 동쪽으로 유인하여 포병, 탱크, 연합군 항공기의 공격으로 소모시키는 역할을 했다.[41]

독일군은 초기에 기갑 부대와 기동 부대로 반격하여 미군과 영국군 사이를 파고들어 바다로 몰아내려 했다. 이 작전이 실패한 후, 독일군은 전략 도시 캉을 향한 영국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최정예 기갑 부대와 친위대 부대를 투입했다. 이들은 동쪽 측면의 모루에 묶여 서서히 소모되었고, 결국 미군이 서쪽에서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몽고메리의 "망치와 모루" 전술은 캉 안팎에서 두 달 동안의 격렬한 전투 끝에 성공을 거두었다.[42]
독일군 역시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망치와 모루 전술을 응용하여 키이우 포위전, 스몰렌스크 포위전 등 여러 포위전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보병 전력의 기동력 부족으로 포위망 안에 갇힌 소련군 상당수가 탈출하는 것을 허용하기도 했다. 마켓가든 작전 등에서 독일군이 시행한 공수작전도 넓게 보면 망치와 모루 개념으로 볼 수 있다.[43]
1944년 6월 25일 몽고메리 장군은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연합군 최고 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7월 10일 메시지에서 몽고메리의 전략을 확인하며 더 강력한 노력을 촉구했다.
7. 3. 6.25 전쟁
6.25 전쟁에서 유엔군은 슬레지해머 작전을 통해, 국군은 대(對)게릴라 작전을 통해 망치와 모루 전술을 활용했다.7. 3. 1. 유엔군의 슬레지해머 작전
한국 전쟁에서 발동된 유엔군의 슬레지해머 작전은 인천 상륙 작전(크로마이트 작전)에 호응하여 조선인민군을 협격할 것을 기획한 것으로,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1]7. 3. 2. 국군의 대(對)게릴라 작전
1950년 초,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남쪽으로 진격하기 전, 북한은 국경에서 소규모 공세를 자주 펼치고, 게릴라 수천 명을 남한에 침투시켜 이승만 대통령을 전복하고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려 했다. 제주도까지 침투가 이루어졌다.[22] 여러 차례 ROKA의 대게릴라전 성공 이후, 북한은 김상호와 기무현의 지휘하에 두 개의 대대 규모 게릴라 부대를 파견하여 혁명을 일으키려는 마지막 시도를 벌였다. 첫 번째 부대는 ROKA 6사단과의 여러 차례 교전 끝에 생존자 한 명을 제외하고 전멸했다. 두 번째 부대 또한 ROKA 6사단의 두 개 대대가 망치와 모루 전술로 격멸했다. 북한군 게릴라는 584명(사살 480명, 포로 104명)의 피해를 입었고, ROKA군은 69명 사망, 184명 부상으로 보고했다. 이는 한국 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5일까지 공산 북한이 남한을 병합하려는 마지막 주요 시도로 드러났다.[23]7. 4. 현대 사회
걸프 전쟁 당시 다국적군 사령관 노먼 슈워츠코프가 실시한 헤일메리 기동작전(Hail Mary Play)은 현대전에서 망치와 모루 전술이 적용된 대표적인 사례이다. 슈워츠코프는 이 작전을 미식축구에서 쿼터백이 장거리 패스를 던져 득점하는 것에 비유했다. 이 작전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래 명장들이 사용해 온 전술을 현대전에 맞게 적용한 것으로, 해병대로 이라크군을 쿠웨이트에 묶어둔 뒤, 20만 미군 지상군을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라크 영내를 통해 기동시켜 쿠웨이트에서 후퇴하는 이라크군 주력을 포위, 섬멸하는 데 성공했다.[44]
1950년대 초, 한국에서도 망치와 모루 작전이 응용된 사례가 있다. 북한은 이승만 대통령을 전복하고 공산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남한 내 공산주의 반란을 지원했다. 대한민국군은 여러 차례 반란 진압에 성공했지만, 북한은 게릴라 부대를 파견하여 혁명을 선동하려 했다. 국군 제6사단은 2개 대대 규모의 망치와 모루 기동작전으로 북한 게릴라군을 전멸시켰다. 이 작전으로 북한 게릴라군은 584명의 사상자를 냈고, 대한민국군은 69명이 사망하고 184명이 부상당했다.[46] 이는 현대전에서 망치와 모루 전술의 위력을 보여준 사례이자, 남침 전까지 남한을 병합하려는 북한의 마지막 주요 시도였다.
현대 사회에서 전술 단위로는 시위대와 경찰기동대의 대치 상황에서 망치와 모루 전술과 유사한 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민주화 이전 시위가 격렬했을 때, 총기 사용이 엄격히 제한되는 사회 특성상 냉병기 위주의 고대 전투와 비슷한 양상이 나타났다. 무거운 장비를 갖춘 기동부대는 모루, 장구를 가볍게 한 체포 전담중대(백골단)는 망치 역할을 했다.
1980년대에는 전투경찰대에 대항하는 사수대라는 조직이 시위대에 존재했다. 이들은 시위대 측의 중보병으로, 각목과 쇠파이프로 전경대 대열을 뚫는 것을 목표로 했다. 때로는 소규모 집단으로 산개하여 게릴라처럼 전경대 대열을 무너뜨리기도 했다. 이는 망치와 모루 전술에서 모루의 역할을 강화시킨 형태라고 볼 수 있다.
8. 대중문화
대중문화에서 망치와 모루 전술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영화에서는 글래디에이터(2000)의 오프닝 전투 장면과 알렉산더(2004)의 가우가멜라 전투 장면에서 이 전술이 묘사된다.[47] 전자는 본대(모루)가 게르만족과 대치하고 기병대(망치)가 뒤를 공격하는 방식이고, 후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기병을 활용해 틈을 만들고 본대를 투입하는 응용된 형태이다.
게임에서는 측면 우회(Flanking)라는 용어로 자주 사용되며, 월드 오브 탱크와 같이 방어력이 좋은 유닛(모루)이 전선을 형성하는 동안 기동성이 좋은 유닛(망치)이 측후면을 공격하는 방식이다.[6] 냉병기 시대 배경 게임에서는 이 전술이 기본 전략으로, 측후면 공격을 통해 적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사기를 떨어뜨리는 것이 중요하다.[6] 토탈 워: 워해머 등에서는 다양한 유닛과 마법이 등장하지만, 여전히 망치와 모루 전술이 기반이 된다.[6]
리그 오브 레전드, 오버워치, 브롤스타즈 등 딜러, 탱커, 힐러 개념이 있는 게임에서도 탱커(모루), 딜러(망치), 힐러(예비대) 형태로 개념이 응용된다.[6]
스포츠에서는 미식축구의 패싱 전술에서 라인맨(모루)이 쿼터백을 보호하는 동안 와이드 리시버(망치)가 침투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축구의 카테나치오 전술은 강력한 수비(모루)를 바탕으로 역습(망치)을 통해 공격하는 방식으로, 네레오 로코 감독이 발전시켰다.[48] 2006년 월드컵에서 이탈리아가 이 전술로 우승했다.[48]
8. 1. 영화
다음은 영화 글래디에이터(2000)의 오프닝 전투 장면이다. 여기서 나오는 전투가 전형적인 망치와 모루 전술이라고 볼 수 있다. 궁수, 공병(투석기와 노포), 보병으로 이루어진 본대(모루)가 게르만족의 앞에서 대적하였고 막시무스 장군의 기병대(망치)가 게르만족의 뒤를 치는 망치와 모루 전술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명장면이다.[47]다음은 영화 알렌산더(2004)에 등장한 전투씬이다. 이 장면은 가우가멜라 전투를 그리고 있다. 가우가멜라 전투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 제국 아케메네스 왕조의 다리우스 3세를 물리친 전투이다. 이소스 전투의 2년 후에 벌어진 이 전투 장면에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망치와 모루 전술을 응용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중앙에 팔랑크스, 중장보병을 중심으로 두고 좌우익에 기병을 배치하여 기병은 페르시아의 기병을 좌우 날개쪽으로 유인하여 틈을 만들고 그 생긴 틈으로 팔랑크스를 투입하여 다리우스의 본진으로 침투해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 후 기병대가 급선회 하여 포위 및 섬멸하는 작전이 드러난다.[47]
8. 2. 게임
게임 내에서는 측면 우회(Flanking)라고 흔히 부른다. 방어력이 좋지만 둔한 중전차가 맞붙어서 전선을 형성하면(모루) 기동성이 좋은 중형전차나 경전차가 측후면을 우회하여(망치) 장갑이 얇을 수밖에 없는 옆구리와 뒤를 때리는 식이다. 당연히 서로 측면을 때리고 싶어하기 때문에 측면이 뚫리는 것을 저지하려는 중형전차끼리의 교전, 이런 중형 전차를 멀리서 저격하여 견제하는 구축전차 등이 긴밀하게 연계되어야 승리를 장담할 수 있다. 현재에는 중전차의 전면장갑을 그냥 뚫어버릴 수 있는 고관통 포가 많아졌기에 모루가 멀리서 박살나는 경우도 왕왕 발생하며, 양 팀 간 실력 차이가 나게 되면 방어가 약한 곳을 찾아낸 뒤 중형전차들이 우르르 몰려가서 적 방어선을 뚫어버리는 소련식 종심교리에 밀리는 경우도 많다.[6]냉병기 시대 및 초기 화약무기 시대의 전쟁을 시뮬레이션하는 게임의 특성상, 망치와 모루 전술은 플레이의 기본 중 기본이다. 일방적인 양학이거나 영웅 유닛의 맹활약이 아닌 이상 전투에서 모루와 망치를 사용하지 않으면 이길 수 없다. 특히, 측후면을 공격당하면 포위되거나 순식간에 큰 피해를 입은 판정을 받아 사기가 떨어지고, 사기가 떨어지면 병사들이 전의를 잃고 도주하며, 사기가 떨어져서 도주하는 부대가 생기면 그 옆의 부대도 그 영향으로 또 사기가 떨어져서 도주하는 식의 연쇄반응이 일어나는 게임 시스템상, 측후면을 확보한 쪽이 어느 쪽인지 여부가 대부분 전투의 승패를 정할 정도로 중요하다. 따라서 별다른 이유가 없으면 망치와 모루 전술을 채용하는 것은 필수에 가깝다.[6]
당연히 AI를 비롯한 적도 같은 생각을 하므로, 이를 저지하기 위한 다양한 전술이 동원된다. 강이나 절벽 등의 지형을 통한 기병의 우회 저지, 기병의 이동을 방해하는 울타리 설치, 우회하는 적 기병을 저지하기 위한 보병의 매복, 측후면을 포위당할 것을 대비한 방진 형태의 부대 배치, 적 기병이 도착하기 전에 빈약한 적 보병진을 짓밟는 정면돌파, 우회하다가 만난 기병대 간의 전투 등 망치와 모루에 관련된 모든 상황을 겪어볼 수 있다.[6]
옛 작품의 AI는 우회에 대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로마2부터 AI가 점진적으로 발전하면서 기병대를 이용한 우회를 시도하거나, 보병과 사격병과를 이용해 망치에 대한 견제를 시도하는 등 전술 면에서 옛 작품보다 많은 생각을 할 필요가 생겼다. 토탈 워: 워해머로 넘어가면 보병진 모루를 정면에서 무너뜨리는 역할을 맡는 괴수나 지형을 무시하는 비행 유닛, 마법 등으로 모루가 쉽게 무너질 수 있지만, 여전히 망치와 모루가 전술의 기반을 맡고 있다. 오행 시스템을 채용해 장수의 중요성이 높아진 토탈 워: 삼국에선 충격 기병에 특화된 선봉장, 창병에 특화된 용장, 원거리 병력에 특화된 책사 조합을 자주 활용하는데, 이 조합이 가장 자주 쓰이는 이유는 모루와 망치 전술을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조합이기 때문이다.[6]
포괄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딜러, 탱커, 힐러 개념이 있는 게임은 모두 망치와 모루의 기본적인 개념을 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딜러, 탱커, 힐러 개념이 있는 게임에는 매우 대중적인 게임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데, 리그 오브 레전드, 오버워치, 브롤스타즈 등이 있다. 이때, 탱커가 적의 공격을 버티는 모루, 딜러가 적에게 피해를 입히는 망치, 힐러가 병력의 손실을 보충하는 예비대 위치라고 할 수 있다.[6]
8. 3. 스포츠
모루의 역할을 하는 라인맨들이 최전방에 해당하는 스크리미지 라인에서 포켓을 만들어 버티면서 쿼터백이 적진 깊숙이 침투한 와이드 리시버들에게 공을 전달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버는 것이 패싱 전술의 주된 얼개이다. 반대로 수비 진영의 경우에는 라인맨들이 전방을 압박하는 사이 아웃사이드 라인배커, 디펜시브 엔드들이나(패스러쉬) 라인배커, 코너백을 포함한 수비진 전원이 쿼터백을 직접 공격하는 전술을 쓴다.
축구의 전술 중 하나인 카테나치오 역시 망치와 모루의 전술개념을 대중문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예시 중 하나이다. 카테나치오 전술은 이탈리아어로 자물쇠 또는 빗장이라는 뜻으로,[48] 강력한 수비 즉, 모루를 기본으로 하여 상대보다 골을 많이 넣어도 승리할 수 있지만 상대보다 골을 적게 허용해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에서 탄생한 이탈리아의 상징과도 같은 전술이다. 흔히 화려하고 강력한 브라질과 같은 남미 선수들에게 유럽선수들은 고전을 면치못했고, 이를 대비하기 위해 고안한 전술이 카테나치오였다. 이 전술은 네레오 로코 감독에서 시작되었는데 기존에 존재하던 최후방 미드필더 리베로 앞에 세명의 센터백을 배치하고 그에 더하여 수비형 미드필더까지 배치하여 리베로 앞에 4명 또는 5명의 수비수를 두었다. 그리고 측면의 윙어와 윙백에게 높은 위치로의 오버래핑 역할을 부여하여 역습을 공격전술로 사용하였다. 이렇게 시작되며 발전된 카테나치오는 현대에 들어와서는 2006년에 빛을 보게되는데 2006년 월드컵에서 칸나바로와 부폰이 지키는 이탈리아 수비진은 7경기를 치루었음에도 단 2실점만을 허용하며 월드컵을 우승하게 되었다. 물론, 역사가 깊은 전술이고 현대축구 전술이 발전하면서 이탈리아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기본적인 전술개념은 중앙의 수비수와 미드필더들이 단단히 상대의 공격을 잠궈놓고 측면에서 순식간에 역습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카테나치오 역시 현대 축구장에 구현된 일종의 망치와 모루 전술이라 볼 수 있겠다.[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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