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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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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나나 전쟁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미국이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의 정치와 경제에 개입한 일련의 사건들을 지칭한다. 미국은 파나마 운하 건설과 자국 기업의 이익 보호를 명분으로 군사적 개입을 정당화했으며,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UFC)와 같은 미국 과일 회사들이 주요한 역할을 했다. 미국은 파나마, 쿠바, 도미니카 공화국, 니카라과, 멕시코, 아이티, 온두라스 등 여러 국가에 군대를 파견하여 정치적 안정을 꾀하고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이러한 개입은 해당 국가들의 정치적 불안정을 심화시키고 미국의 경제적 지배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스메들리 버틀러 소장의 고백을 통해 미국의 개입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제기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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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니카라과, 1932년, 1927년 - 1981년의 아우구스토 세사르 산디노의 깃발
1932년 니카라과에서 미국 해병대가 노획한 아우구스토 세사르 산디노의 깃발
목표중앙아메리카와 카리브해에서 미국 및 사적 이익을 강제하는 것
실행 기간1898년 4월 21일 – 1934년 8월 1일 (36년 3개월 1주 3일)
실행 주체미국
결과산토도밍고 사건
국경 전쟁 (1910년~1919년)
니그로 반란
미국의 니카라과 점령
미국의 아이티 점령
미국의 도미니카 공화국 점령 (1916년~1924년)
제1차 온두라스 내전
제2차 온두라스 내전
설탕 개입
교전 세력
교전국 1미국
동맹 세력
아이티
쿠바 공화국
니카라과
온두라스
지원국
영국
프랑스
교전국 2쿠바 (1898년~1922년)
스페인
독립색당
니카라과 (1912년~1933년)
민주당
국가주권방위군
아이티 (1915년~1934년)
카코스
도미니카 공화국 (1916년~1924년)
도미니카 공화국
멕시코
지원국
독일 제국
주요 전투
쿠바미국-스페인 전쟁
제1차 미국 점령
제2차 미국 점령
니그로 반란
설탕 개입
푸에르토리코푸에르토리코 전역
온두라스미국의 온두라스 점령
니카라과미국의 니카라과 점령
그라나다
마사야
코요테페 고지
1926–1927년 내전
라파스센트로
오코탈
산페르난도
산타클라라
텔파네카
사포틸랄
1차 라스크루세스
2차 라스크루세스
퀼랄리
엘브라마데로
라플로르
아추아파
아구아카르타
엘소스
멕시코국경 전쟁
베라크루스
아이티디피티 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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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포르토프랭스
도미니카 공화국산토도밍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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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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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런 G. 하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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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유진 로이
스테니오 빈센
쿠바마리아 크리스티나
파스쿠알 세르베라
에바리스토 에스테노즈
니카라과벤하민 셀레돈
루이즈 메냐 바도
아우구스토 세사르 산디노
아이티샤를마뉴 페랄테
도미니카 공화국데시데리오 아리아스
멕시코포르피리오 디아스
프란시스코 레온 데 라 바라
프란시스코 마데로
페드로 라스쿠라인
빅토리아노 우에르타
프란시스코 S. 카르바할
베누스티아노 카란사

2. 배경

미 해병대와 1915년 포트 디피티 전투 중 정글을 순찰하는 아이티인 안내원


미국은 자국의 세력권을 유지하고 1914년 개통된 파나마 운하를 확보하기 위해 카리브해, 중앙 아메리카, 북부 남아메리카 지역에서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이익을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있었다. 이는 세계 무역 증진과 해군력 투사를 위한 파나마 운하 건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또한, 이 지역에서 활동하는 미국 기업들의 경제적 이해관계도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미국의 정책과 경제적 동기는 이후 여러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에 대한 군사적 개입으로 이어지는 배경이 되었다.

2. 1. 경제적 배경



미국은 자국의 세력권을 유지하고 파나마 운하(1914년 개통)를 확보하기 위해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이익을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있었다. 파나마 운하는 세계 무역 증진과 해군력 투사를 위해 미국이 건설한 중요한 시설이었다.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현재 치키타)나 스탠다드 프루트 컴퍼니(현재 돌 plc)와 같은 미국 기업들은 카리브해, 중앙 아메리카, 그리고 남아메리카 북부 지역에서 바나나, 담배, 사탕수수 등의 상품 생산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고 있었다. 특히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는 1898년 하와이 왕국 전복에 관여하는 등 정치적 개입의 전례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은 이러한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에 대한 개입을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정당화했다. 특히 파나마 운하는 북반구 무역과 안보에 필수적이라는 명분 아래 개입의 주요 근거로 활용되었다. 1901년 헤이-폰스포트 조약을 통해 파나마 운하 건설 통제권을 확보한 미국은 이 지역에서 자국의 경제적, 전략적 목표를 보호해야 할 필요성을 더욱 강하게 느꼈고, 이는 이후 바나나 전쟁의 배경이 되었다.[3]

다양한 농작물 생산에 이해관계를 가진 미국 기업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미국의 군사적 지원을 필요로 했다. 미국으로 바나나를 대량 수출하던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UFC)는 광대한 농장과 철도를 잠재적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미군의 지원을 요청했다.[4] 미국 정부가 자국 기업들을 지원하면서, 이들 기업은 해당 지역 정부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통해 미국은 라틴 아메리카에서 경제적 기반을 다지고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관철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다.[2]

당시 니카라과는 혁명의 중심지가 되고 있었는데, 주요 인물로는 과테말라의 통치자 마누엘 에스트라다 카브레라(1900년 집권)와 니카라과의 자유주의 지도자 호세 산토스 셀라야가 있었다. 카브레라는 원주민 노동력을 동원하여 경제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미국에게 자신이 과테말라를 현대 시대로 이끌려는 진보적 지도자임을 내세웠다. 반면, 셀라야는 미국을 비롯한 외부 세력의 라틴 아메리카 문제 개입에 강하게 반대하며 자국의 주권을 강조했다. 이러한 이유로 미국은 카브레라보다 셀라야에게 더 큰 반감을 가졌다.[2]

미국은 셀라야가 라틴 아메리카 경제에 관여하는 방식과 자국의 이익을 위해 다른 나라의 문제에 간섭하는 태도를 문제 삼았다. 또한 셀라야는 미국 정부가 원하는 위치에 파나마 운하를 건설한 것에 대해서도 불만을 품고 있었다.[2]

3. 주요 분쟁 지역

윌리엄 앨런 로저스의 만평,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강력한 지팡이 외교를 묘사


미국 군함, 1914년 베라크루스 점령에서 베라크루스 앞바다에 정박


바나나 전쟁은 카리브해와 중앙아메리카의 여러 지역에서 미국의 군사적 개입과 점령을 동반했다. 주요 분쟁 지역은 다음과 같다.

  • '''파나마''': 미국은 1846년 말라리노-비들락 조약을 통해 파나마 지협에 개입하기 시작했으며, 파나마 운하 건설과 운영을 위해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03년 콜롬비아로부터의 파나마 분리 과정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았고, 이후 미국은 파나마 운하 지대에 대한 주권을 확립했다.[2][5]
  • '''쿠바''': 미국-스페인 전쟁의 결과로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했으나, 사실상 미국의 보호국 상태에 놓였다. 미국은 군정을 실시하고(1898–1902, 1906–1909), 이후에도 여러 차례(1912, 1917–1922) 군사적으로 개입했으며[8], 관타나모 만 해군 기지에 대한 영구 임대권을 확보했다.[6][7]
  • '''도미니카 공화국''': 1903년, 1904년(산토 도밍고 사건), 1914년 등 미국의 군사적 개입이 있었으며[9], 특히 1916년부터 1924년까지는 미국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는 주로 미국 소유의 설탕 농장 등 경제적 이권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이루어졌다.[10]
  • '''니카라과''': 미국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보호하고 친미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1912년부터 1933년까지 장기간 미군이 주둔하며 사실상 점령 상태에 있었다.[11][2]
  • '''멕시코''': 멕시코 혁명 기간 동안 미국은 국경 지역의 안정을 도모하고 독일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기 위해 군사적으로 개입했다. 1914년 베라크루스 점령과 1916-1917년 판초 비야 원정이 대표적인 사례이다.[12]
  • '''아이티''': 정치적 불안정과 미국의 전략적 이해관계에 따라 1915년부터 1934년까지 미국의 점령 하에 있었다. 이 기간 동안 미국은 아이티의 내정에 깊숙이 관여하며 친미 헌법을 제정하는 등 영향력을 강화했다.[13]
  • '''온두라스''':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와 같은 미국 과일 회사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1903년, 1907년, 1911년, 1912년, 1919년, 1924년, 1925년에 미군이 투입되었다.[14]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온두라스는 '바나나 공화국'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15]


이러한 미국의 개입은 1904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선언한 루스벨트 수정안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이는 먼로 독트린을 확장하여 카리브해 및 중앙아메리카 국가들이 외채 상환 불능 등 불안정한 상태에 놓일 경우 미국의 개입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제공했다. 또한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행정부(1909-1913)는 군사력 사용과 더불어 경제적 영향력을 앞세운 달러 외교 정책을 추진하기도 했다.

3. 1. 쿠바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 결과, 스페인쿠바에 대한 통제권을 포기하고 푸에르토리코미국에 할양했다. 이 전쟁의 종결은 바나나 전쟁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1899년 12월, 미국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미국 육군 장군 레너드 우드를 쿠바의 최고 권력자로 선포했다.[6][7] 미국은 스페인으로부터 쿠바에 대한 통제권을 넘겨받았다. 쿠바의 미국 군정 하에서 우드는 1898년부터 1902년까지 군정 총독으로 쿠바를 점령했다. 이후에도 미국은 쿠바 임시 정부 시기인 1906년부터 1909년까지, 1912년 전쟁 중인 1912년, 그리고 설탕 개입으로 알려진 1917년부터 1922년까지 쿠바를 점령했다.[8] 이러한 점령은 1934년까지 쿠바-미국 관계 조약 (1903년)의 조항에 따라 지속되었다. 1903년, 미국은 관타나모 만 해군 기지에 대한 영구 임대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3. 2. 아이티

아이티는 1915년부터 1934년까지 미국에 점령되었다. 이 점령으로 인해 1917년 새로운 아이티 헌법이 제정되었는데, 여기에는 비(非) 아이티인의 토지 소유 금지 조항이 폐지되는 등의 변화가 포함되었다. 이 기간 동안 제1차 및 제2차 카코 전쟁이 일어났다.[13]

3. 3. 도미니카 공화국

미국 해병대 점령에 맞서 싸운 '가빌레로'로 알려진 농민 게릴라 그룹


미국은 도미니카 공화국에 여러 차례 개입했다. 1903년과 1904년(산토 도밍고 사건)에 활동했으며, 1914년에는 미 해군이 산토 도밍고 시에서 전투를 벌였다.[9] 이후 1916년부터 1924년까지는 미국에 의해 점령되었다.

1916년 점령의 명분은 도미니카 공화국 내 반란으로 미국 소유의 사탕수수 농장이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었다. 미국 군대는 산토 도밍고의 포르탈레자 오사마 요새를 점령하고 그곳의 사람들을 살해한 뒤, 자국의 사업 이익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주둔시켰다.

기관총이나 현대식 포병 장비가 부족했던 도미니카 군대는 재래식 전투에서 미 해병대에 맞섰으나, 푸에르토 플라타 전투, 라스 트렌체라스 전투, 과야카나스 전투, 산프란시스코 데 마코리스 전투 등에서 패배했다. 그러나 미 해병대는 압도적인 화력 우위에도 불구하고 엘 세이보와 산페드로 데 마코리스 등 동부 지방에서 벌어진 반란을 진압하는 데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이 과정에서 '가빌레로'로 불리는 농민 게릴라들의 저항이 있었다.

점령 기간 동안 미국 해병대 144명이 작전 중 사망하고 50명이 부상을 입었으며,[10] 도미니카 측에서는 95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10] 미국의 점령은 1924년에 끝났다.

3. 4. 니카라과

니카라과는 이전 수십 년 동안 간헐적인 미군 상륙과 해군 포격이 있었으며, 1912년부터 1933년까지 거의 지속적으로 미국의 점령 하에 있었다. 미국은 니카라과 지도자들이 자국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군대를 주둔시켰다. 대표적인 예로 1912년, 루이스 메나 장군이 미국이 지지하던 아돌포 디아스 대통령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미국은 디아스 대통령을 복위시키고 자국의 사업 이익과 이상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군사적으로 개입했다.[11]

미국이 니카라과를 침략한 또 다른 이유는 태프트 대통령과 쿨리지 대통령 시기, 니카라과 정부에 조약 체결을 압박하기 위함이었다.[2] 이 기간 동안 수병해병대가 약 15년 동안 니카라과에 주둔했다.[2] 미국은 니카라과가 미국의 이익을 해치지 않을 "좋은 사람들"을 선출하기를 원한다고 주장하며 내정 간섭을 정당화했다.[2]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대통령과 미국 국무장관 필랜더 C. 녹스는 1909년부터 1913년까지 니카라과와 같은 국가에 대해 무력을 동반한 보다 "평화적이고 경제적인" 달러 외교 정책을 추진했다.

3. 5. 멕시코

이 기간 동안 멕시코에 대한 미국의 군사 개입은 다른 중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상업적, 정치적 이해관계에 기반했지만, 몇 가지 독특한 측면을 지닌다. 미국은 멕시코 혁명의 여파로 발생하는 이민자와 난민 유입을 통제하고(''pacificos''), 반군 세력이 미국 영토를 침범하는 것을 막기 위해 1910년부터 1919년까지 멕시코와 국경 전쟁을 벌였다.

1914년 멕시코 항구 도시 베라크루스를 점령하는 동안 미국 상륙 부대에 소속된 세 명의 미국 해군의 시신


그러나 1914년 미국의 베라크루스 점령은 국경 문제와는 별개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인정하지 않던 멕시코 지도자 빅토리아노 우에르타 정부에 독일 제국탄약을 공급하는 것을 차단하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진 무력 행사였다.[12]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 미국은 이 지역에서 독일과의 세력 균형 문제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독일은 1914년 이피랑가(Ypiranga) 호를 이용한 무기 운송 시도, 멕시코 시티에서의 독일인 로타르 비츠케의 사보타주 활동, 1917년 치머만 전보 사건, 그리고 1918년 아모스 노갈레스 전투에 독일 고문관을 파견하는 등 멕시코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조언했다.

멕시코 혁명 기간 동안 미국 군대가 멕시코 영토를 점령한 주요 사례는 두 차례 있었다. 첫 번째는 1914년 베라크루스를 일시적으로 점령한 것이고, 두 번째는 1916년부터 1917년까지 미국 육군 존 퍼싱 장군이 판초 비야를 추격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이끌고 멕시코 북부를 침공한 판초 비야 원정이다.

3. 6. 온두라스

온두라스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와 스탠다드 프루트 컴퍼니 같은 미국 기업들이 국가의 주요 바나나 수출 부문과 관련 토지 및 철도를 장악했던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들 기업의 이익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미국은 여러 차례 군대를 파견했는데, 1903년, 1907년, 1911년, 1912년, 1919년, 1924년, 1925년에 미군이 온두라스에 투입되었다.[14] 작가 O. 헨리는 1904년 이러한 상황의 온두라스를 묘사하며 '바나나 공화국'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15]

온두라스 역사 초기는 정치 및 경제적 불안정으로 점철되었다. 독립 이후 카리아스 정부가 집권하기 전까지 세 차례의 주요 무력 충돌이 발생했는데,[16] 이러한 불안정에는 미국의 개입이 부분적인 원인으로 지목된다.[16]

온두라스 정부와 계약을 맺은 주요 미국 기업으로는 바카로 형제 회사(Standard Fruit Company),[16] Cuyamel Fruit Company, 그리고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자회사인 텔라 철도 회사(Tela Railroad Company)와 트루지요 철도 회사(Truxillo Rail Road Company)를 통해) 등이 있었다.[16] 이들 기업과의 계약은 주로 온두라스 내 철도 건설을 대가로 광대한 토지에 대한 독점권을 부여하는 방식이었다.[16]

미국 기업들은 생산에서 유통까지 바나나 무역 전반을 통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며, 이를 위해 특정 정치 세력이나 게릴라를 지원함으로써 온두라스 내 무력 충돌을 심화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16] 이들 기업이 제공한 것으로 추정되는 현대적인 무기는 파벌 간 전쟁을 더욱 치명적으로 만들었다.[16]

한편, 바나나 생산은 토양 매개 곰팡이인 파나마병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기도 했다. 이 병은 광대한 지역의 생산량을 감소시켰으며,[17] 기업들은 종종 황폐화된 농장을 버리고 농장과 함께 사용했던 철도 및 기타 시설들을 파괴하기도 하여, 정부와 회사 간의 계약 조건이 항상 지켜지지는 않았다.[17]

3. 7. 파나마

미국은 1846년 말라리노-비들락 조약을 통해 파나마 지협에 개입하기 시작했으며, 1856년 소위 수박 폭동 이후 개입을 더욱 강화했다. 1885년, 미국은 파나마 운하 건설 시도를 명분으로 군사 개입을 정당화했다. 이 첫 운하 건설 사업은 1889년 파산, 관리 부실, 질병 등으로 중단되었으나, 20세기 들어 재개되었다.[2]

1903년, 파나마는 콜롬비아로부터의 파나마 분리를 선언했는데, 이는 미국 정부의 지지를 받았다. 당시 파나마는 콜롬비아의 천일 전쟁 중이었다. 당시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1903년 12월 연설에서 파나마에서 지난 57년간 53건의 "혁명, 반란, 폭동, 봉기 및 기타 소요"가 있었다고 언급하며[5] 파나마의 불안정한 상황을 지적하기도 했다. 헤이-폰스포테 조약은 미국이 파나마 운하를 건설하고 관리할 권한을 부여했다. 같은 해 미국은 파나마 운하 지대에 대한 주권을 확립했다. 미국은 세계 무역 증진과 해군력 투사를 위해 파나마 운하 건설을 추진했으며[3], 이는 바나나 전쟁 시기 미국의 중앙아메리카 정책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4. 미국 과일 회사들의 역할

온두라스 초기에는 정치 및 경제적 불안정이 심각했으며, 독립 이후 카리아스 정부가 집권하기 전까지 세 차례의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16] 이러한 불안정한 상황은 부분적으로 미국의 개입, 특히 미국 과일 회사들의 활동과 관련이 있었다.[16]

온두라스 정부와 계약을 맺은 대표적인 미국 회사로는 바카로 형제 회사(Standard Fruit Company), Cuyamel Fruit Company, 그리고 United Fruit Company(자회사인 텔라 철도 회사와 트루지요 철도 회사 포함) 등이 있었다.[16] 이들 회사와 온두라스 정부 간의 계약은 주로 온두라스 내 철도 건설을 대가로 광대한 토지에 대한 독점권을 회사에 부여하는 방식이었다.[16]

그러나 바나나 농장들은 토양 매개 곰팡이인 파나마병으로 인해 큰 피해를 보았고, 이는 광범위한 지역의 생산량 감소로 이어졌다.[17] 회사들은 병으로 황폐화된 농장을 버리고 철수하면서, 농장 운영에 필요했던 철도 및 기타 시설까지 파괴하는 경우가 많았다.[17] 이로 인해 정부와의 계약이 제대로 이행되지 못했다.

이들 미국 회사는 생산에서 유통까지 바나나 무역 전반을 통제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다. 이를 위해 이들 회사는 특정 게릴라 세력, 대통령 후보, 정부 등을 지원하며 정치에 깊숙이 개입했다.[16] 이러한 미국 회사들의 간접적인 개입은 온두라스 내 파벌 간 무력 충돌을 더욱 격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16] 또한 이들이 제공한 더 위험하고 현대적인 무기는 전쟁을 더욱 치명적으로 만들었다.[16]

한편, 인접한 영국령 온두라스(현재 벨리즈)의 상황은 다소 달랐다.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가 이곳의 유일한 바나나 수출업체였고 현지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지만, 벨리즈는 주변국들과 같은 극심한 정치적 불안정이나 무력 충돌은 겪지 않았다.[17]

4. 1.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 (UFC)

이 시기 라틴 아메리카에서 미국 정부 외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주체는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United Fruit Company, UFC)였다. "바나나 맨"으로 알려진 CEO 샘 제머레이는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미국 군대를 이용하여 라틴 아메리카에 영향력을 행사했다.[4] UFC는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 걸쳐 방대한 토지와 철도, 항구를 소유하며 사실상 이들 국가를 지배했다.[4] 특히 철도망 소유는 운송 비용을 낮춰 다른 과일 회사들보다 경쟁 우위를 확보하게 해주었다.[18] 제머레이는 수직적 통합 전략을 통해 생산부터 유통까지 공급망의 모든 단계를 통제하여 이윤을 극대화했다. UFC와 제머레이는 사업적 이익을 위해 정치적 영향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으며, 이는 라틴 아메리카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온두라스에서는 UFC 외에도 스탠다드 프루트 컴퍼니(Standard Fruit Company, 이전 바카로 형제 회사)와 쿠야멜 프루트 컴퍼니(Cuyamel Fruit Company) 등이 활동했다.[16] UFC는 자회사인 텔라 철도 회사(Tela Railroad Company)와 트루지요 철도 회사(Truxillo Rail Road Company)를 통해 온두라스 정부와 계약을 맺었다.[16] 이 계약들은 주로 철도 건설을 대가로 토지에 대한 독점권을 회사에 부여하는 방식이었다.[16] 그러나 파나마병과 같은 토양 매개 곰팡이로 인해 바나나 농장들이 황폐화되는 문제가 발생했고, 회사들은 종종 피해 농장과 함께 건설했던 철도 및 기타 시설들을 버리고 떠나 계약 이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17]

UFC를 비롯한 회사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생산에서 유통까지 바나나 무역 전반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이들은 특정 게릴라 세력, 대통령 후보, 정부를 지원하며 정치에 깊숙이 개입했다.[16] 이러한 미국 회사들의 간접적인 개입은 온두라스 내 무력 충돌을 더욱 격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16] 특히 이들이 제공한 더 위험하고 현대적인 무기는 파벌 간 전쟁을 더욱 치명적으로 만들었다.[16]

온두라스에서 UFC는 노골적으로 정권 교체에 개입했다. 1911년, 제머레이는 UFC의 이익에 반하는 법률을 추진하던 미겔 R. 다빌라 대통령을 축출하기 위해 반군에게 무기를 제공하고 미국 해군의 도움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켰다.[4] 쿠데타 성공 후 전 대통령 프란시스코 보닐라가 다시 집권했으며, 그는 제머레이와 UFC가 온두라스 내에서 자유롭게 사업을 운영하도록 허용하고 심지어 국가 재정 관리까지 맡겼다.[4]

반면, 영국령 온두라스(현재 벨리즈)의 상황은 다소 달랐다. UFC가 이곳의 유일한 바나나 수출업체였고 현지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지만, 주변국들과 같은 극심한 정치적 불안정이나 무력 충돌은 겪지 않았다.[17]

4. 2. 스탠다드 프루트 컴퍼니

온두라스의 정치 및 경제적 불안정이 심했던 초창기에 정부와 계약을 맺은 최초의 미국 회사 중 하나가 바로 바카로 형제 회사(Vaccaro Brothers Company), 즉 Standard Fruit Company였다.[16] 당시 온두라스는 독립 이후 카리아스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세 차례나 무력 충돌이 발생하는 등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는데, 이러한 불안정성에는 미국의 개입 또한 부분적인 원인이었다.[16]

이후 Cuyamel Fruit Company가 뒤를 이었고, United Fruit Company 역시 자회사인 텔라 철도 회사(Tela Railroad Company)와 트루지요 철도 회사(Truxillo Rail Road Company)를 통해 정부와 계약을 맺었다.[16] 이들 미국 회사와 온두라스 정부 간의 계약은 대부분 온두라스에 철도를 건설해주는 대가로 광활한 토지에 대한 독점권을 받는 형태였다.[16]

그러나 이러한 계약 관계는 순탄치만은 않았다. 중앙 아메리카 지역의 바나나 농장들은 토양을 통해 전염되는 곰팡이인 파나마병 때문에 큰 피해를 보았고, 광대한 지역의 생산량이 급감했다.[17] 이 과정에서 회사들은 병으로 황폐해진 농장을 포기하고 철수하면서, 함께 건설했던 철도나 다른 기반 시설까지 파괴하는 경우가 많았다.[17] 결과적으로 정부와 회사 간에 약속했던 서비스 교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셈이다.

궁극적으로 스탠다드 프루트 컴퍼니를 포함한 미국 회사들은 바나나의 생산부터 유통까지 모든 과정을 장악하려 했고, 이를 위해 현지의 게릴라 조직이나 특정 정치 세력(대통령 선거 운동 지원 포함), 심지어 정부 자체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정치에 깊숙이 개입했다.[16] 이러한 미국 회사들의 직간접적인 개입은 온두라스 내 파벌 간의 갈등을 부추기고 무력 충돌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는 비판이 있다.[16] 특히 이들이 제공한 더 위험하고 현대적인 무기는 파벌 간의 전쟁을 더욱 치명적으로 만들었다.[16]

한편, 인접한 영국령 온두라스(현재의 벨리즈)의 상황은 상당히 달랐다.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가 이곳의 유일한 바나나 수출업체였고 현지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지만, 벨리즈는 주변국들처럼 극심한 불안정이나 무력 충돌을 겪지는 않았다.[17]

5. 스메들리 버틀러의 고백

미 해병대 제복을 입은 스메들리 버틀러 소장


바나나 전쟁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군 장교 중 한 명은 "이단아 해병"이라는 별명을 가진 미국 해병대의 소장 스메들리 버틀러였다. 그는 1903년 온두라스에서 전투에 참전했고, 1909년부터 1912년까지 미국의 정책을 시행하기 위해 니카라과에서 복무했다. 또한 1914년 베라크루스에서의 역할로 명예 훈장을 받았으며, 1915년 아이티에서의 용감한 행동으로 두 번째 명예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버틀러는 무모한 발언으로 인해 강제 퇴역당한 후,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좌익 단체에서 연설하는 경력을 쌓았다. 1933년 이후 그의 대표적인 연설은 ''전쟁은 사기다''였는데, 이 연설에서 그는 자신이 과거에 수행했던 역할을 강하게 비판했다. 스스로를 "거대 기업, 월가와 은행을 위한 고급 근육맨... 자본주의를 위한 깡패, 갱스터"라고 묘사하며, 제국주의적 군사 개입의 실체를 폭로했다.[19]

참조

[1] 서적 The Second Century: U.S.-Latin American Relations Since 1889
[2] 서적 The Banana Wars: United States Intervention in the Caribbean, 1898–1934 https://archive.org/[...] University Press of Kentucky
[3] 학술지 Panama Canal tolls legislation and the Hay-Pauncefote Treaty http://dx.doi.org/10[...] 1913
[4] 학술지 Bananas: how the United Fruit Company shaped the world http://dx.doi.org/10[...] 2008-08-01
[5] 위키소스 Theodore Roosevelt's Third State of the Union Address 1903-12-07
[6] 서적 Leonard Wood: Rough Rider, Surgeon, Architect of American Imperialism https://books.google[...] New York University Press 2006
[7] 서적 The Banana Wars: A History of United States Military Intervention in Latin America from the Spanish–American War to the Invasion of Panama https://books.google[...] Macmillan 2021-02-02
[8] 웹사이트 History of U.S. Interventions in Latin America https://www.yachana.[...]
[9] 웹사이트 US Military and Clandestine Operations in Foreign Countries – 1798–Present https://www.globalpo[...]
[10] 웹사이트 Congressional Bills 117th Congress https://www.govinfo.[...] 2022-12-04
[11] 논문 The Last Banana War: United States Policy and the Second United States Intervention in Nicaragua, 1927–1933 ProQuest 2024-11-12
[12] 웹사이트 Mexican Revolution: Battle of Veracruz https://www.thoughtc[...] Dotdash 2015-08-04
[13] 학술지 War and the Trade Orientation of Haiti 1947-01
[14] 웹사이트 History of U.S. Interventions in Latin America https://www.yachana.[...]
[15] 뉴스 Where did banana republics get their name? https://www.economis[...] Economist Group 2013-11-21
[16] 학술지 Honduras. Productive security and economic growth: the economic function of the cariato https://revistas.ucr[...] 2021-02-02
[17] 학술지 Crown Colony as Banana Republic: The United Fruit Company in British Honduras, 1900–1920 https://www.jstor.or[...]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1-02-02
[18] 서적 The United Fruit Company in Latin America https://archive.org/[...] Washington, National Planning Association 1958
[19] 연설 War is a Racket https://fas.org/man/[...]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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