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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 민주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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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마 민주 항쟁은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반유신 독재 저항 운동이다. 1978년 총선에서 여당의 낮은 득표율에도 불구하고 농촌 지역에 유리한 선거 제도로 인해 의석수를 확보한 것에 대한 불만, YH 사건, 김영삼 총재 제명, 경제적 어려움 등이 배경이 되었다. 10월 16일 부산대학교와 동아대학교 학생들의 시위로 시작된 항쟁은 시민들의 참여로 격화되었고,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강경 진압했다. 이 사건은 10·26 사건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유신 체제를 위협하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 6월 항쟁에 영향을 미쳤다. 이후 부마 민주 항쟁은 국가 기념일로 지정되었고, 관련 기념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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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 민주 항쟁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명칭부마민주항쟁
다른 이름부마민주화운동
로마자 표기Buma Minjuhangjaeng
날짜1979년 10월 16일 ~ 1979년 10월 20일
장소부산시, 경상남도 마산시
원인박정희의 유신 정권 독재
방법시위, 민간 불복종
목표민주화
결과시위 진압
주요 참가자
시위대부산 및 마산 시민
정부군대한민국 육군
대한민국 육군 특수전사령부
대한민국 해병대 제1사단
대한민국 경찰
피해 규모
시위대 인원8,000명 이상
체포된 인원1,058명
기타
관련 사건10·26 사태에 영향
마산 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 (1979년 10월 20일 촬영)

2. 배경

1978년 12월에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는 금권, 관권선거의 영향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집권 민주공화당은 야당인 신민당에 지지율에서 패배했다. 다만 농촌에 유리한 선거제도로 인해 의석은 더 얻었다. 그 후 민주화 시위가 널리 퍼지면서 당시 민주 인사들에 대한 연행과 투옥 등 탄압 강도가 강화됐다.[18]

1979년 8월에는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점거 농성으로 인해, 집권 공화당은 야당인 신민당김영삼 총재를 국회에서 제명했고,[19] 이는 곧 야당 국회의원 전원 의원직 사퇴로 이어졌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현지 시찰 뒤 당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다.

이처럼 부마항쟁은 정치, 경제, 사회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2. 1. 정치적 배경

197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여당인 민주공화당보다 더 많은 표를 얻었지만, 농촌에 유리한 선거 제도 때문에 의석수는 여당이 더 많았다. 이는 국민들의 정치적 불만을 키웠다.[18]

1979년 8월,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 사건은 정국을 더욱 얼어붙게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김영삼 총재가 국회에서 제명되고,[19] 야당 국회의원 전원이 사퇴하는 등 정치적 탄압이 심해졌다.

9월 10일,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박정희 정권을 불법·무법 정권으로 규탄하고, 정권 타도를 위한 국민적 투쟁을 선언했다. 9월 16일 뉴욕 타임스와의 회견에서 박정희 정권의 퇴진을 위해 미국 정부의 압력을 기대한다고 말하여 여당의 반발을 샀다.[9]

이에 반발한 여당은 10월 4일 국회에서 김 총재의 제명 동의안을 여당 (민주공화당유신정우회) 단독으로 강행 처리했다. 김 총재의 의원직이 상실되자 신민당은 강경한 태도로, 당 소속 의원 66명 전원의 등원 거부와 의원직 사퇴를 결정하고 국회에 사퇴서를 제출했다(13일). 제2야당인 민주통일당도 이에 동조하여 의원 3명 전원의 사퇴서를 함께 제출했다 (이 일련의 사건을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이라고 한다). 이렇게 정국은 긴박감을 더욱 강화하게 되었다.

2. 2. 경제적 배경

1978년부터 부가가치세가 도입되면서 일반 시민들의 납세 부담이 높아졌다. 당시 부산마산 일대는 신발, 식품, 섬유산업과 같은 경공업이 발달한 지역이었지만, 제2차 오일쇼크 발생으로 원유 가격이 급등하면서 수입 원료의 가공무역에 의존하던 지역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다. 이중고로 인해 부산과 마산 일대는 한국 내에서 특히 경기가 악화된 지역이었고, 1979년의 어음부도 발생률은 서울특별시의 3배에 달했다.[8] 따라서 당시 부산, 마산 일대는 광범위한 사회 계층에서 정부에 대한 불만이 쌓이기 쉬운 환경이었다.

3. 전개 과정

1979년 5월 3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온건파 대표 이철승이 탈당하고 김영삼이 당선되었다. 1979년 8월 11일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이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벌이다 경찰에 의해 강제 진압되었고, 이 과정에서 여직원 1명이 사망하였다. 김영삼은 체포되었다. 1979년 10월 4일 여당인 공화당김영삼을 국회의원에서 제명하였다.

1979년 10월 16일 부산과 마산에서 항쟁이 시작되었다. 10월 17일 충무경찰서, KBS, 부산 세무서가 파괴되었고, 경찰 차량이 불타거나 파손되었다. 10월 18일 정부는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 당국은 1,058명을 체포하여 그중 66명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10월 20일 정부는 마산에 계엄법을 발동하였다.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었다.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 시위가 잇달아 발생하면서 한국 정국은 불안정한 상태에 빠졌다. 박정희 정권 내부에서도 부마 사태의 발생 원인과 수습 방법을 놓고 온건파인 김재규 KCIA 부장과 강경파인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 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이는 10·26 사건의 도화선이 되었다.

3. 1. 부산 지역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교동아대학교 학생 3000여 명이 부산 시내에서 시위를 벌였다. 시민들이 합류하면서 시위는 같은 날 오후 8시경 시청 앞에 학생과 시민 3000명 이상이 모여 "유신철폐", "독재타도", "야당탄압 중지" 등의 구호를 외치며 경찰과 충돌하는 양상으로 격화되었다.[8] 시위대는 파출소, 신문사, 세무서 등 관공서 건물에 돌을 던지고, 경찰 차량에 불을 지르는 등 다음 날 17일 오전 2시까지 격렬하게 저항했다. 17일 밤에도 시내 중심부에서 시위가 이어져 경찰 차량과 파출소가 파괴되거나 불에 탔다.[8]

박정희 정권은 시위 직전인 10월 4일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남민전)"를 적발했기 때문에(남민전 사건), 부산 시위 배후에 남민전 잔당이 있다고 판단하고 강경 진압에 나섰다.[8] 정부는 10월 18일 0시를 기해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부산대학교동아대학교에 휴교령을 내렸으며, 야간 통행금지 시간을 2시간 연장하는[10] 등 8개 항의 포고를 발표했다. 동시에 육군 특수전사령부의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시위를 진압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현지를 시찰한 뒤, 시위가 학생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까지 참여한 광범위한 민중 봉기임을 확인했다. 그는 당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다.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도 10월 18일 부산에 와서 계엄사령관과 진압작전 계획을 검토하였다.[33]

3. 2. 마산 지역

1979년 10월 20일, 부산에 인접한 마산에서 경남대학교 학생과 시민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5] 시위대는 반정부 구호를 외치며 전투경찰대와 충돌하고, 공화당 당사와 공공 건물 등에 투석하는 등의 행위를 저질렀다. 이에 박정희 정부는 마산과 창원 일대에 위수령을 발동하고, 군대를 출동시켜 시위를 진압하는 동시에, 경남대학교와 경남산업전문대학교에 무기한 휴교 조치를 내리고, 해당 지역의 야간 통행 금지 시간을 2시간 연장했다.

4. 계엄령 선포와 진압

박정희 정권은 부마 민주 항쟁을 '소요 사태'로 규정하고 강경 진압했다.[8] 공수부대 출동은 차지철 경호실장의 제안이었다고 한다.[33]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도 10월 18일 부산에 와서 계엄사령관과 진압작전 계획을 검토하였다.

10월 16일 부산대학교동아대학교 학생들의 시위에 시민들이 합류하면서 시위가 격렬해졌다. 17일에도 시위가 계속되어 경찰 차량과 파출소가 파괴되거나 방화되었다. 정부는 이틀에 걸쳐 벌어진 시위 배후에 남민전 잔당이 있다고 판단했다.[8]

정부는 10월 18일 0시를 기해 부산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육군 특수전사령부의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시위를 진압했다. 부산대학교동아대학교에는 휴교 조치가 내려졌고, 야간 외출 금지령이 2시간 연장되는[10] 등 8개 항의 포고가 발표되었다.[10] 군 당국은 1,058명을 체포하였고, 그중 66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10월 20일, 부산에 인접한 마산에서 경남대학교 학생과 시민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반정부 구호를 외치며 전투경찰대와 충돌하고, 공화당 당사와 공공 건물 등에 투석하였다. 이에 정부는 마산과 창원 일대에 위수령을 발동하고 군대를 출동시켜 진압하는 동시에, 경남대학교와 경남산업전문대학교에 무기한 휴교 조치를 내리고, 해당 지역의 야간 통행 금지 시간을 2시간 연장했다.

5. 영향 및 결과

부마 민주 항쟁은 유신체제를 위기에 몰아넣었으며, 5·18 광주 민주화 운동, 6월 항쟁 등 이후 한국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27] 서울의 봄, 광주 민주화 운동, 6월 민주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6]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 시위가 잇달아 발생하면서 한국의 정국은 불안정한 상태에 빠졌다. 박정희 정권 내부에서는 부마 사태의 발생 원인과 수습 방법을 놓고 온건파인 김재규 중앙정보부 부장과 강경파인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 사이에 갈등이 심화되었고, 이는 10·26 사건의 도화선이 되었다.

6. 이후

부산광역시에는 부마민주항쟁을 기리는 부산민주공원이 조성되었고, 창원시에도 이를 기리는 기념비가 설치되었다.[7]

2013년 「부마민주항쟁 관련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부마항쟁 보상법)」이 제정되었다. 이를 계기로 부마민주항쟁 기념일 제정을 추진하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12] 2014년 10월 13일 부마항쟁 진상규명·보상위원회가 공식으로 출범하였으나,[28][29] 위원 선정의 공정성과 활동 방안에 대해서 비판을 받고 있다.[31] 2015년 5월 18일에는 관련 법안이 통과되었다.[30]

2017년 2월, 창원시는 10월 18일을 창원시 기념일로 제정하였다.[13] 2018년 10월에는 경상남도지사와 양 시장 등을 중심으로 국가 기념일 제정을 위한 추진위원회가 발족하였다.[14] 날짜에 대해서는 최초의 거리 시위가 있었던 16일을 주장하는 부산 측과 항쟁이 마산으로 확대된 18일을 주장하는 창원 측이 이전부터 대립하였으나, 전문가 의견을 수렴하는 등을 통해 16일로 합의하였다.[15] 창원 측이 양보한 것은 이듬해 40주년을 국가 기념일로 맞이하는 것을 우선시했기 때문이다.[15]

2019년 9월, 행정안전부가 10월 16일을 국가 기념일로 지정하였다.[16] 같은 해부터 기념 행사를 정부 주관으로 개최하게 되었다.[32]

7. 기념 사업

부산광역시에는 부마민주항쟁을 기리는 부산민주공원이 1999년에 조성되었고, 창원시에도 이를 기리는 기념비가 설치되었다.[7] 2013년에는 「부마민주항쟁 관련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부마항쟁 보상법)」이 제정되었다.[12] 이를 계기로 부마민주항쟁 기념일 제정을 추진하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12]

2014년 10월 13일에는 부마항쟁 진상규명·보상위원회가 공식으로 출범하였다.[28][29] 2015년 5월 18일에는 관련 법안이 통과되었다.[30] 그러나 위원 선정의 공정성과 활동 방안에 대해서는 비판을 받고 있다.[31]

2017년 2월, 창원시는 10월 18일을 창원시 기념일로 제정하였다.[13] 2018년 10월에는 경상남도지사와 양 시장 등을 중심으로 국가 기념일 제정을 위한 추진위원회가 발족하였다.[14] 날짜에 대해서는 최초의 거리 시위가 있었던 16일을 주장하는 부산 측과 항쟁이 마산으로 확대된 18일을 주장하는 창원 측이 이전부터 대립하였으나, 전문가 의견을 수렴하는 등을 통해 16일로 합의하였다.[15] 창원 측이 양보한 것은 이듬해 40주년을 국가 기념일로 맞이하는 것을 우선시했기 때문이다.[15]

2019년 9월 17일에 10.16 부마민주항쟁이 공식적으로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32] 같은 해 9월, 행정안전부는 10월 16일을 국가 기념일로 지정하였고,[16] 같은 해부터 기념 행사를 정부 주관으로 개최하게 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부마민주항쟁이란?(What is Busan–Masan Uprising?) http://www.buma.go.k[...] 2015-12-13
[2] 백과사전 부마민주항쟁(釜馬民主抗爭) http://encykorea.aks[...] 2022-10-16
[3] 서적 Developmental Dictatorship and the Park Chung-hee Era: The Shaping of Modernity in the Republic of Korea https://books.google[...] Homa & Sekey Books 2015-12-13
[4] 웹사이트 의원직 제명당한 김영삼(Kim Young-sam issue of the remarks expulsion on a parliamentary seat in detention) http://www.yonhapnew[...] 2015-11-22
[5] 웹사이트 (Busan–Masan Uprising) 부마민주항쟁 [釜馬民主抗爭] https://www.doopedia[...] 2015-12-14
[6] 웹사이트 [역사이야기] 단 한번도 왕의 목을 치지 못한… http://h21.hani.co.k[...] 2001-02-14
[7] 웹사이트 부산 민주공원 (Busan Democratic Park) http://www.demopark.[...] 2015-12-14
[8] 뉴스 (잊혀진 계절)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꿈을 주지만…2015년 10월은 나를 울려요 http://news.khan.co.[...] 경향신문 2015-10-30
[9] 기타
[10] 기타
[12] 뉴스 10월16일 부마항쟁 ‘국가기념일’ 지정 추진된다 http://www.donga.com[...] 동아일보 2018-09-21
[13] 뉴스 제1회 창원시 부마항쟁 기념식... '잊지 말자' 다짐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17-10-18
[14] 뉴스 “부마항쟁 국가기념일 지정” 100만 서명운동 펼친다 http://www.hani.co.k[...] 한겨레 2018-10-25
[15] 뉴스 釜馬民主抗争国家記念日、10月16日指定推進で合意 http://japan.hani.co[...] 한겨레 2018-09-21
[16] 뉴스 文大統領、釜馬民主抗争の国家記念日指定に「とても意味深い」 https://japanese.joi[...] 중앙일보 2018-09-18
[17] 웹사이트 http://www.buma.go.k[...]
[18] 기타
[19] 웹사이트 http://www.yonhapnew[...]
[20] 서적 한국현대사산책
[21] 웹사이트 http://www.doopedia.[...]
[22] 웹인용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20-03-06
[23] 영상 1부 부마를 보았다 https://busanmbc.co.[...] 부산MBC 2019-04-22
[24] 기타
[25]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20-03-06
[26]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20-03-06
[27] 저널 단 한번도 왕의 목을 치지 못한… http://h21.hani.co.k[...] 2007-12-22
[28] 웹사이트 https://news.naver.c[...]
[29] 웹사이트 http://www.buma.go.k[...]
[30] 웹인용 부마 민주 항쟁관련자의명예회복및보상등에관한법률 http://www.law.go.kr[...]
[31] 뉴스 꺼지지 않는 부마항쟁 진실 논란과 과제 https://www.hani.co.[...] 한겨레신문 2019-10-19
[32] 웹인용 10.16 부마민주항쟁이 공식적으로 국가기념일로 지정됐습니다 http://webarchives.p[...] 행정안전부 2019-09-17
[33] 뉴스 [부마항쟁②] 대규모 민주투쟁 …‘유신체제 막을 내리다’ https://www.sisaon.c[...] 시사ON 2019-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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