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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마르크급 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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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스마르크급 전함은 1930년대에 설계된 독일의 전함으로, 38cm 주포와 두꺼운 장갑을 갖추고 북해에서의 근접전을 상정하여 설계되었다. 비스마르크와 티르피츠 두 척이 건조되었으며, 비스마르크는 1941년 덴마크 해협 해전에서 영국 해군에 의해 격침되었고, 티르피츠는 노르웨이에서 연합군의 공습으로 침몰했다. 비스마르크급은 당시 최고 수준의 기술을 적용했지만, 제1차 세계 대전의 설계 방식을 벗어나지 못해 수평 및 수중 방어에 취약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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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마르크급 전함 - [배(Ship)]에 관한 문서
개요
비스마르크
블랑케네제 근해에서 운항 중인 비스마르크 (1940년)
함급 명칭비스마르크급 전함
건조 국가나치 독일
운용 국가크릭스마리네
이전 함급샤른호르스트급
이후 함급H급 (계획)
건조 기간1936년–1941년
취역 기간1940년–1944년
계획 함선 수미확인
건조 함선 수2척
취소 함선 수미확인
손실 함선 수2척
특징
함종고속전함
배수량비스마르크:
기준: 41,700 t
만재: 50,300 t
티르피츠:
기준: 42,900 t
만재: 52,600 t
길이수선: 241.60 m
전체: 251 m
36 m
흘수9.30 m (표준), 비스마르크 만재 시 9.90 m, 티르피츠 만재 시 10.60 m
추진3축 기어드 증기 터빈
3엽 프로펠러
동력12 x Wagner 과열 보일러
비스마르크: 110,450 kW
티르피츠: 119,905 kW
속력30 kn
항속 거리비스마르크: 19노트에서 8,525 nmi
티르피츠: 19노트에서 8,870 nmi
승조원103명 장교
1,962명 사병 (최대 108명의 장교와 2,500명의 사병까지 증원 가능)
무장
주포8 × 38 cm SK C/34 (4 × 2)
부포12 × 15 cm SK C/28 (6 × 2)
대공포16 × 10.5 cm SK C/33 (8 × 2)
16 × 3.7 cm SK C/30 (8 × 2)
20 × 2 cm FlaK 30 (20 × 1)
장갑격벽: 220 mm
벨트: 320 mm
포탑: 360 mm
주갑판: 100 ~ 120 mm
함재기4 × 아라도 Ar 196
함재기 시설1 × 양방향 캐터펄트

2. 설계

비스마르크급 전함의 설계는 193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33cm 주포를 탑재한 35,000톤급 전함으로 계획되었으나, 프랑스와 이탈리아 해군이 38cm 주포를 탑재한 신형 전함을 건조한다는 정보에 따라 독일 해군은 설계를 대폭 수정했다. 1934년 6월, 이탈리아가 35cm 주포를 장착한 35,000톤급 전함 2척을 건조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프랑스 역시 1935년에 리슐리외급 전함 2척을 발주하면서 독일은 이에 대응해야 했다.[1]

독일 해군은 제1차 세계 대전을 종식시킨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전함의 최대 배수량이 제한되었으나, 영독 해군 협정을 통해 영국 해군력의 35%까지 전함을 건조할 수 있게 되면서 프랑스와 대등한 해군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1935년 1월, 에리히 레더 해군 사령관은 35cm 주포로의 증강을 승인했고, 3월에는 38cm 주포로의 증강 가능성이 제기되었으나 처음에는 거부되었다. 그러나 4월 1일에 35cm 주포를 공식 승인하면서도 외국의 발전에 따라 주포를 증강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었고, 5월 9일에 아돌프 히틀러의 선호에 따라 38cm 주포를 채택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독일 해군은 북해에서의 근거리 해전을 상정하여 함선의 안정성과 장갑 방호에 중점을 두었다. 이는 수적으로 열세였던 독일 해군이 해상 전투를 북해의 근거리에서 벌일 것이라는 예상에 따른 것이었다. 매우 두꺼운 수직 벨트 장갑이 채택되었고, 상부 격실 장갑 및 선체 앞뒤에 광범위한 파편 방호가 적용되었다.

1940년 다카르에 정박한 프랑스 전함 리슐리외; 비스마르크급 전함은 리슐리외에 대항하기 위해 건조되었다.


1937년 2월 11일, 건설국은 항만 제약과 운하 수심으로 인해 함선의 배수량이 42,000톤을 초과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또한 제2차 런던 해군 조약의 에스컬레이터 조항에 따라 최대 45,000톤까지 함선을 건조할 수 있게 되었고, 최종 설계 배수량은 41,400톤으로 결정되었다.

건조 비용은 비스마르크가 1억 9,860만 라이히스마르크, 티르피츠가 1억 8,160만 라이히스마르크였다.

2. 1. 기능

독일 해군 특유의 낮은 선체와 중후한 디자인으로 안정감을 주는 외관을 가지고 있었다. 선체는 평형 갑판형으로, 함수에는 1934년에 설계된 38.1cm 주포가 장착되었다.[1]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독일 해군은 전함의 최대 배수량을 으로 제한받았다. 그러나 독일1935년 3월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하고, 영독 해군 협정을 체결하여 건함 계획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가상 적국인 영국,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해 비스마르크급 전함이 건조되었다.[1]

초기 설계는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의 제한에 맞춰 8문의 주포, 의 최고 속도, 강력한 장갑 방호를 갖추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후 프랑스 해군의 덩케르크급 전함에 대항하기 위해 규모가 확대되었고, 제1차 세계 대전 때 설계된 초노급 전함 바이에른급의 설계를 유용하여 설계 기간을 단축했다.[2] 이 때문에 "새로운 구식 함"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최종적으로 비스마르크급은 38cm 주포를 탑재하여 영국이나 프랑스의 38cm, 40.6cm(15인치, 16인치)급 포를 탑재한 함선에 필적하는 장갑과 화력을 갖추게 되었고, 바이에른급에는 없었던 고속 항행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비스마르크급 이전에 독일 해군에서 건조된 초노급 전함 "바이에른".


비스마르크급 건조 이전에 독일 해군에서 위협으로 여겨진 프랑스 해군의 "덩케르크".

2. 2. 무장

비스마르크급 전함은 당초 13인치(33cm) 주포를 탑재할 계획이었으나, 프랑스이탈리아 해군의 차기 주력함들이 15인치 주포를 채택한다는 정보에 따라 최종적으로 38cm(15인치) 주포 8문을 4기의 2연장 포탑에 장착했다.[28] 주포 구경이 커지면서 배수량이 증가했지만, 항만 시설과 킬 운하 이용 문제를 고려하여 대외적으로는 35,000톤으로 발표했다.

부포로는 샤른호르스트급 전함에 사용된 것과 같은 15cm(55구경) 포 12문을 6기의 2연장 포탑에 장착했다.

급 전함의 15cm 주포 포탑 중 하나


대공 무장으로는 10.5cm(4.1인치) 고각포 16문, 3.7cm(1.5인치) 대공포 16문, 그리고 다수의 2cm(0.8인치) 기관포를 장비했다. 티르피츠는 추가적으로 53.3cm(21인치) 어뢰 발사관을 장착했다.[10]

2. 2. 1. 주포

8문의 38cm SK C/34 함포는 4기의 2연장 포탑에 배치되었다. 상부 구조물 앞쪽에 Antonde과 Brunode가 겹쳐서 위치하고 뒤쪽에 Caesarde와 Dorade가 배치되었다.[28] 포탑은 최대 30도까지 앙각이 가능하며, 최대 사거리는 36520m였다.[28] 포탄 중량은 800kg이며, 포구 속도는 초당 820m였다.[28] 주포에는 총 940~960발의 포탄이 공급되었으며, 이는 포 1문당 약 115~120발에 해당한다.[28]

다른 독일 대구경 해군포와 마찬가지로 이 포는 크루프에서 설계되었으며, 추진 장약을 위한 황동 탄피를 필요로 하는 슬라이딩 웨지식 폐쇄기를 특징으로 했다. 최적의 조건에서 발사 속도는 18초에 1발, 즉 분당 3발이었다.[28] 포탑은 전기로 선회하고, 포는 유압으로 올렸다. 포의 각도는 원격으로 제어되었다. 포탑은 장전을 위해 각 포를 2.5°까지 내려야 했다.[28] Tirpitzde는 연합군의 반복적인 폭격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 시한 신관 포탄을 제공받았다.[28]

4기의 2연장 포탑(4 × 2 구성) 사용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설계 관행이었다. 1921년 이후 거의 모든 다른 주력함들은 3연장 또는 4연장 포탑을 사용하여 포탑 수를 줄이면서 추가적인 대구경 포를 장착했다. 포탑이 적을수록 전함의 장갑 시타델(특히 탄약고 길이와 이를 보호하는 데 필요한 장갑)의 길이가 줄어들고 함선 자체의 길이가 짧아졌다. 비록 3연장 포탑이 고려되었지만, 추가적인 포신이 각 포탑의 전체 발사 속도를 낮출 것이라는 우려와 함께, 단 한 발의 명중탄으로 함선의 화력의 더 큰 부분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다. 또한 4개의 2연장 포탑이 더 나은 사계와 더욱 효과적인 일제 사격을 가능하게 한다고 여겨졌다.[13]

2. 2. 2. 부포

비스마르크de급 전함의 부포는 6개의 쌍포탑에 장착된 12문의 15cm SK C/28 포로 구성되었다.[12] 이 포탑은 샤른호르스트급에 탑재된 단포신 포탑을 기반으로 했다. 최대 40도까지 앙각, -10도까지 부각이 가능했으며, 분당 발사 속도는 약 6발이었다. 15cm 포는 45.3kg의 포탄을 875m/s의 포구 속도로 발사했다. 최대 사거리에서 이 포는 23000m 떨어진 목표물을 타격할 수 있었다. 주포와 마찬가지로, 티르피츠de급의 15 cm 포에도 나중에 시한 신관 포탄이 공급되었다.[12]

저각 15cm 포를 장착하기로 한 결정은 앤토니 프레스턴을 포함한 해군 역사가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는데, 그는 이 결정이 "심각한 무게 페널티를 부과했다"고 언급하면서, 미국과 영국의 전함은 양용포로 무장하고 있었다고 지적했다.[12] 해군 역사가 윌리엄 가르케와 로버트 덜린은 "양용 무장을 사용했다면 대공포의 수를 늘릴 수 있었을 테지만, 독일 해군 전문가들이 더 중요하다고 여긴 구축함 공격에 대한 방어 능력을 약화시켰을 수도 있다"고 언급했다.[12]

2. 2. 3. 대공포

비스마르크와 티르피츠는 건조 당시 16문의 10.5cm C/33 65구경 대공포, 16문의 3.7cm SK C/30, 12문의 2cm FlaK 30을 장비했다.[10] 10.5cm 포는 샤른호르스트급에 사용된 것과 동일했으며, 상부 구조물의 첫 번째 갑판에 장착되었다. 1941년 비스마르크 침몰 후, 티르피츠의 함 중앙에 위치한 두 문의 포는 더 나은 사격을 위해 앞으로 이동되었다.

3.7cm 83구경 포는 연장으로 장착되어 상부 구조물에 배치되었다. 이 포좌는 수동으로 작동되었으며 롤링(rolling)과 피칭(pitching)에 대해 자동 안정화되었다. 이 포에는 총 32,000발의 탄약이 공급되었다.

비스마르크와 티르피츠는 처음에는 12문의 2cm 포를 단장 포좌로 장비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보강되었다. 두 함선은 처음에 24,000발의 2cm 포탄을 탑재했다. 비스마르크는 2cm 포 20문으로 총 4연장 포좌 2개를 받았다. 티르피츠의 2cm 포는 단장 및 4연장 포좌로 78문으로 증가했다. 1944년까지 90,000발 이상의 2cm 포탄을 탑재했다.

2. 2. 4. 어뢰 무장

티르피츠de는 1941년 말에서 1942년 초 사이에 53.3cm 4연장 어뢰 발사관 2기를 장착했다.[10] 티르피츠는 24발의 어뢰를 탑재했다.

2. 3. 장갑

비스마르크de급 전함의 장갑은 당대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의 설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다. 장갑재는 주로 크루프 경화 강철(Krupp cemented steel)을 사용했다.[1] 주 장갑대는 220~320mm 두께였으며, 중앙 구획은 가장 두꺼운 장갑으로 보호되었다.

수평 방어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보다 조금 강화되었지만, 다른 국가들의 신형 전함에 비해 약했다. 제1갑판 수평면은 25mm, 주갑판은 80mm로, 합계 105mm였다. 현측 장갑의 경사면은 제1갑판은 50mm, 주갑판은 110mm였다. 그러나 이는 대구경포에 의한 대낙하각 포탄의 수평 폭격을 막아내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수면 하부 장갑은 170mm였지만, 상하폭이 짧아 심도 어뢰에 대한 방어는 고려되지 않았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모든 화력 제어와 피해 제어 기능은 2중으로 되어 주 장갑 갑판 아래(citadel 안) 위치하였고, 다리와 측거기로부터의 전선들은 이 장치들과 주 장갑 갑판 아래의 공간 사이에 3중으로 된 축 안에 들어있었다고 한다. 비스마르크de의 구식 장갑 설계의 약점은 흘수선 아래 장갑대가 얕다는 점이었는데, 수중 관통탄에 대응하는 능력이 미흡했고, 추진축 주변 장갑의 층의 두께가 충분치 못하였다.

수중 방어와 관련하여, 장갑은 250kg TNT 폭발물에 대한 내성을 가지고 있었다. 장갑 깊이는 5.5m였으며, 종격벽 두께는 53mm였다. 요새는 10793m에서 21031m 사이의 사거리에서 발사된 1016kg 무게의 38cm 포탄과, 탄약고의 경우 23319m에서 발사된 포탄의 명중을 견딜 수 있었다.[23]

2. 4. 추진 기관

비스마르크de급 전함은 3세트의 기어식 터빈 엔진을 갖추고 있었다. 비스마르크de는 블롬 운트 포스(Blohm & Voss) 터빈을 장착했고, 티르피츠de는 브라운, 보베리 앤 시(Brown, Boveri, and Co.) 엔진을 사용했다. 각 터빈 세트는 직경 의 3엽 스크루를 구동했다. 3축 배열은 무게를 절약하기 위해 선택되었다. 최고 부하 상태에서 고압 및 중압 터빈은 분당 2,825 rpm으로 작동했고, 저압 터빈은 2,390 rpm으로 작동했다. 이 전함의 터빈은 12개의 바그너(Wagner) 초고압, 유류 연소 수관 보일러에 의해 구동되었다. 비스마르크de와 티르피츠de는 원래 각각 을 생산하는 전기 전달 터빈을 사용할 예정이었으나, 기어식 터빈이 더 가볍고 견고하여 대신 채택되었다.[8]

두 전함 모두 최고 속도가 으로 평가되었다. 비스마르크de는 해상 시운전에서 에 도달했고, 티르피츠de는 시운전에서 을 기록했다. 이러한 차이는 티르피츠de의 마력이 으로, 비스마르크de의 보다 높았기 때문이다.[8]

연료 탑재량은 비스마르크de가 최대 7,400톤, 티르피츠de가 최대 7,780톤이었다. 19노트에서 비스마르크de는 를, 티르피츠de는 를 항해할 수 있었다.[8]

로버트 발라드는 3축 배열이 비스마르크de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고 언급했다. 중앙 샤프트는 용골을 약화시켰고, 특히 선체에서 튀어나온 부분에서 문제가 심했다. 1941년 5월 비스마르크de대서양 작전 중, 전함의 방향타는 어뢰에 맞아 손상되었고, 스크루 회전을 변경하여 진로를 수정할 수 없었다.[10][11] 이 문제는 이미 해상 시운전 중에 드러났지만, 수정할 수 없었다.[12]

전력은 2개의 500kW 디젤 발전기, 2개의 690kW 터보 발전기 5개, 460kW 발전기 1개(400kVA 교류 발전기에 연결), 550kVA 교류 디젤 발전기 1개를 포함한 다양한 발전기에 의해 공급되었다. 이 전기 설비는 총 7,910kW를 220볼트로 공급했다.[13][8]

2. 5. 사격 통제 장비

비스마르크de급 전함의 주포와 부포는 3개의 사격 통제소에서 통제되었다. 각 사격 통제소에는 광학 입체 거리 측정기와 FuMO 23 레이더가 장착되었다. 주 사격 통제소는 전방 상부에, 다른 두 곳은 함교와 후방에 각각 설치되었다.[31] 사격 통제 장치, 거리 측정기 및 레이더에서 수집된 데이터는 두 개의 스위치실()로 전송되어 사격 통제 시스템(de)에서 사격 해법을 계산했다.[31] 포는 사격 통제 시스템에 의해 전기적으로 발사되었지만, 문제가 발생할 경우 각 포탑은 현지 제어로 전환할 수 있었다. 현지 제어 하에 사격하기 위해 각 38cm 포탑과 15cm 포탑의 중간 쌍에는 거리 측정기가 장착되었지만, "안톤" 포탑의 거리 측정기는 해수 분무로 인해 쓸모가 없어 제거되었다.

16문의 10.5cm 대공포는 4개의 안정화된 사격 지휘소에서 제어했다. 이 사격 지휘소 중 두 개는 전방 상부의 양쪽에, 나머지 두 개는 함미 중앙선상에, 비행기 격납고 상단과 '카이사르' 포탑 바로 뒤에 설치되었다. 4개의 안정화된 대공 사격 지휘소는 SL-8형으로, 이전의 SL-6형을 개선한 버전이었다. 1941년 5월까지 비스마르크de에 장착된 전방 SL-8 사격 지휘소 두 개에만 표준 거리 측정기가 포함된 원뿔형 큐폴라가 장착되었고, 다른 두 개는 여전히 개방된 위치에 임시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티르피츠의 사격 지휘소 중 하나는 1944년에 뷔르츠부르크 레이더를 받았다. 대공 사격 통제 시스템은 포의 각도와 발사 시간을 계산하는 것 외에도, 포탄에 적용되는 신관 설정을 계산했다. 3.7cm 및 2cm 포에는 어떠한 사격 지휘 통제 장치도 없었다. 이 포의 승무원들은 휴대용 거리 측정기를 장비했다.

3. 건조 전함



비스마르크급 전함은 총 2척이 건조되었다.

건조 데이터
함선건조자함명의 유래기공진수취역운명
비스마르크블롬 운트 포스 (Blohm & Voss),
함부르크
오토 폰 비스마르크1936년 7월 1일1939년 2월 14일1940년 8월 24일1941년 5월 27일, 해상 전투 후 침몰
티르피츠크리그스마리네베르프트 빌헬름스하펜(Kriegsmarinewerft Wilhelmshaven),
빌헬름스하펜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1936년 11월 2일[1]1939년 4월 1일1941년 2월 25일1944년 11월 12일, 트롬쇠에서 공습으로 침몰



1번함 비스마르크는 1936년 7월 1일 함부르크의 블롬 운트 포스 조선소에서 기공되었다.[2] 건조 번호는 509였고, 구식 전함 의 대체함으로 주문되었으며 계약명은 Ersatz Hannoverde였다.[3] 1939년 2월 14일에 진수되었으며,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손녀가 함선의 이름을 명명했다. 다른 독일 주력함과 마찬가지로 비스마르크는 원래 곧은 뱃머리로 건조되었다. 그러나 다른 함선들의 경험을 통해 거친 바다에서 너무 많은 물을 들이치는 것을 막기 위해 클리퍼 뱃머리가 필요하다는 것이 밝혀졌고, 블롬 운트 포스는 비스마르크의 뱃머리를 장비 과정에서 수정했다. 함선은 1940년 8월 24일 에른스트 린데만 해군 대령의 지휘하에 함대에 취역했다.[4]

2번함 티르피츠는 1936년 10월 20일 빌헬름스하펜의 크리그스마리네베르프트 빌헬름스하펜(해군 조선소)에서 기공되었으며,[1] 건조 번호는 128이었다. 이 함은 구식 전함 을 대체하기 위해 계약명 Ersatz Schleswig-Holsteinde으로 주문되었다.[3] 티르피츠는 제1차 세계 대전 전 공해 함대의 설계자인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제독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그의 딸 일제 폰 하셀이 1939년 4월 1일에 함선의 이름을 명명했다. 티르피츠는 1941년 2월 25일에 함대에 취역했다.[5]

4. 운용

비스마르크급 전함은 북해발트해 주변에서의 작전을 상정했기 때문에 긴 항속거리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독일 해군은 수상 함정을 대서양에 투입했고, 비스마르크급도 그러한 목적에 사용하려 했다. 비스마르크가 목표로 했던 브레스트는 독일 해군에게 예상 밖의 조기 대 프랑스전 승리로 사용 가능하게 된 전진 기지였다.[26]

전후 독일 수상 함정과 통상 파괴전과의 연관성이 강조되면서 비스마르크급의 항속 거리에 대한 긍정적 평가도 나타났다. 후쿠이 시즈오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26] 그러나 이후 각국 전함 정보가 더 자세히 알려지면서, 상대적으로 긴 항속력은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1990년대 이후 출판된 책 중에는 비스마르크급에 긍정적 평가를 내리면서도 항속 거리에 대해서는 그다지 길지 않다고 언급하는 경우도 있다.[27] 일본미국태평양을 주 전장으로 상정했기 때문에 항속력이 긴 함급이 많았다.

비스마르크급 전함의 운용 사상 및 예상 전장은 함의 방어에 대한 고려 사항들과 함께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함의 운용 사상 및 예상 전장방어에 할당하는 공간, 중량 배분방어 방식에 관한 생각 (사상, 방식)요소 기술
북해발트해에서의 전투를 전제로 하여, 일본미국처럼 대원거리 교전을 포함한 함대 결전을 강력하게 지향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기관 기술처럼 시대가 내려갈수록 소형화, 고출력화가 진행되어 다른 점에 영향을 주는 기술도 있으므로 방어 관계에 국한되지 않음



비스마르크는 1941년 5월 라인 연습 작전에 참가하여 영국 순양전함 후드를 격침시켰으나, 영국 해군의 추격을 받아 1941년 5월 27일 침몰했다. 티르피츠는 노르웨이에 배치되어 연합군 수송 선단을 위협했으며, 1944년 11월 12일 영국 공군의 톨보이 폭탄 공격을 받고 침몰했다.

4. 1. 비스마르크

비스마르크de는 1941년 5월 라인 연습 작전에 투입되어 북대서양으로 출격했다.[25] 덴마크 해협 해전에서 영국 순양전함 후드를 격침시키고,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에 피해를 입혔다.[25],[26] 그러나 이 해전에서 비스마르크de 역시 피해를 입어 연료가 새어나가 영국 해군에게 추적당하기 쉬워졌다.[26]

영국 해군의 끈질긴 추격 끝에 1941년 5월 27일 비스마르크de는 격침되었다.[27] 5월 26일, 영국군의 PBY 카탈리나 비행정이 비스마르크de를 발견했고, 820 해군 항공대 소속 페어리 소드피시 어뢰 폭격기 15대의 공격으로 방향타가 고정되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33] 다음날, 영국 전함 로드니와 킹 조지 5세의 포격으로 큰 피해를 입고, 결국 침몰했다.[34]

4. 2. 티르피츠

Tirpitzde는 1942년 1월 노르웨이로 이동하여 소련으로 향하는 연합군 수송 선단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25] 3월 6일에는 영국-소련 호송대에 대한 습격을 시작했으나, 악천후로 인해 호송대를 찾지 못했다.[36] 영국 항공모함 ''빅토리어스''에서 발진한 페어리 앨버코어 어뢰 폭격기의 공격을 받았으나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 작전으로 인해 히틀러는 Tirpitzde가 호위 항공모함이 격침되거나 무력화되지 않는 한 다른 호송대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명령했다.

영국 공군은 Tirpitzde가 페텐피오르드에 정박해 있는 동안 여러 차례 폭격 작전을 시도했지만, 독일의 강력한 대공 사격과 악천후로 인해 모두 실패했다.[36] 1942년 말까지 Tirpitzde는 페텐피오르드에서 개장을 받았으며, 해군 역사가 윌리엄 가르케와 로버트 둘린은 "이 함선의 수리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가장 어려운 해군 공학적 위업 중 하나였다"고 평가했다.

1943년 1월, Tirpitzde는 알타피오르드로 이동하여 Scharnhorstde(샤른호르스트) 등과 함께 훈련에 참여했다. 9월 6일에는 스피츠베르겐 섬을 폭격했는데, 이는 Tirpitzde가 주포를 사용해 공격한 첫 번째 사례였다. 9월 22일과 23일에는 영국 소형 잠수함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으나, 1944년 3월까지 수리를 완료했다.[37]

영국군은 수리가 완료된 직후 일련의 공습을 재개했다. 1944년 4월 3일 오퍼레이션 텅스텐 작전에서 15발의 직격탄과 2발의 근접탄을 기록하며 큰 피해를 입혔다.[26] 이후에도 여러 차례 공습이 이어졌으나 기상 조건 등으로 인해 번번이 실패했다.

1944년 8월 말, 영국 해군은 오퍼레이션 굿우드 시리즈를 시작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Tirpitzde를 격침시키는 임무는 영국 공군에게 주어졌으며, 톨보이 폭탄을 사용한 세 번의 공습이 이루어졌다.[26]

오퍼레이션 파라반 (1944년 9월 15일)에서 Tirpitzde는 함수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고 다시 무력화되었다.[39] 10월 15일에는 트롬쇠 인근 하코야 섬으로 이동하여 떠다니는 포병 기지로 사용되었다. 오퍼레이션 옵비에이트 (10월 29일)에서는 근접탄으로 인해 더 많은 물이 유입되었다. 마지막 공격인 오퍼레이션 카테키즘 (11월 12일)에서 32대의 랭커스터가 공격하여 2발의 직격탄과 1발의 근접탄을 기록했다. 폭탄은 Tirpitzde의 탄약고 중 하나를 폭발시켜 배가 전복되었다.[25] 1,204명이 사망하고 806명이 탈출했으며, 82명이 전복된 선체에서 구조되었다. 난파선은 1948년부터 1957년 사이에 고철로 처리되었다.[45]

5. 평가

비스마르크급 전함은 프랑스 해군의 됭케르크급 전함에 대항하기 위해 설계되었다. 초기에는 13인치 주포 8문, 30노트 이상의 속력, 35,000톤의 기준 배수량을 목표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전함 설계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1]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함선 치고는 조금 부족한, 유감스러운 함급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장갑재의 질은 당대 최고 수준이었지만, 수평 방어는 1차 대전 때보다 약간 강화된 정도에 불과했다. 주 갑판의 총 두께는 105mm로 다른 국가의 신형 전함에 비해 약했다. 현측 장갑 경사면은 주 갑판 기준 110mm였으나, 대구경 포탄의 수평 폭격을 막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1]

방어 장갑은 수면에서 측정했을 때 320mm였고, 상부는 145mm 장갑으로 덮여 있었다. 수면 하부는 170mm였지만, 이마저도 상하 폭이 짧아 심도 어뢰 방어는 기대하기 어려웠다.[1]

최근 연구에 따르면, 모든 화력 제어 및 피해 제어 기능은 이중으로 주 장갑 갑판 아래에 위치했고, 다리와 측거기로부터의 전선은 3중으로 된 축 안에 들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흘수선 아래 장갑대가 얕아 수중 관통탄에 대한 대응 능력이 미흡했고, 추진축 주변 장갑층 두께가 충분하지 못했다는 약점이 지적된다.[1]

구식 설계 요소 중 하나는 12문의 15cm 부포와 16문의 10.5cm 대공포를 따로 탑재했다는 점이다. 당시 신형 전함들은 부포로 대공/대수상 양용포를 채택하여 무게를 절감하고 화력 제어 시스템을 간소화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급은 단독으로 구축함과 맞서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에 15cm 급 대수상 부포가 방어에 필수적이었다.[1]

1932년 Reichsmarinede(제국 해군)은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의 제한에 맞춰 건조할 전함의 이상적인 특징을 결정하기 위해 일련의 개념 설계를 시작했다. 이 초기 연구를 통해 이 함선은 8문의 주포를 장착하고, 최고 속도는 30노트이며, 강력한 장갑 방호를 갖춰야 한다는 점이 결정되었다.

비스마르크급은 독일1935년 3월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하고 영독 해군 협정을 체결하면서 건함 계획의 일환으로 건조되었다. 가상 적국인 영국, 프랑스의 저지 공격으로부터 통상 파괴 작전을 방어하기 위해 전함 함대의 필요성이 인식되었고, 덩케르크급 전함에 대항하기 위해 설계되었다.[1]

사카이 미치오, 미쓰비시 중공업의 기술자였던 아베 야스오 등은 본급에 대해 특별히 부정적인 평가를 하지 않았다.[4] 그러나 대전 당시 연합국에 위협으로 여겨졌던 본급도 일본 국외에서는 1970년대에 부정적인 평가가 나오게 되었다.[5]

시야 확보가 어려운 북해발트해에서의 전투를 전제로 하고 있어, 일본미국처럼 대원거리 교전을 포함한 함대 결전을 강력하게 지향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라고 여겨진다.

방어 관련 주요 요소 기술에 관해서는, 크루프 사에서 개발한 보탄 강(Wotan Stahl)의 채용이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수밀성에 관해서는 선체의 대부분이 용접으로 되어 있다는 점도 관련이 있다.

보탄 강은 크루프 사에서 개발된 합금강으로 "Wh강"이라고 칭하며, 배합된 것은 Ni, Cr이었다. 샬른호르스트급에 채용되었고, 본급에서는 격벽 장갑재에 사용되었으며, 그 두께는 110mm~220mm였다. "Wh85"와 "Ww"의 2종의 강이 개발되었다. Wh85는 단단하고 대탄성이 우수하여 상부 데크 부분에 사용되었다. Ww는 유연성이 높은 강재로, 어뢰 대책으로 수선 하의 격벽에 사용되었다. 양자의 중간 특성을 가진 Ww38 강도 사용되었다.

부정적인 견해에 따르면,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순양전함이 가지고 있던 주적보다 대폭 강력한 방어력은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이 언급되었으며, 연합국의 신형 전함과 싸우기에는 방어력에 불안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46]

오쓰카는 본급의 방어력이 신화화되었다고 언급하며, 영국 해군의 판단 실수와 해전 후의 선전 활동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견해를 보였다.

6. 한국의 관점

비스마르크급 전함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해군의 주력함이었지만, 한국의 근현대사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그러나 비스마르크급의 건조와 운용은 당시 국제 정세와 군비 경쟁의 심화를 보여주는 사례로, 한국의 안보 환경과 국제 관계를 이해하는 데 참고할 수 있다.

비스마르크급의 건조 배경에는 1930년대 독일의 재무장과 영독 해군 협정 등 복잡한 국제 역학 관계가 얽혀 있다. 이는 강대국 간의 군사력 경쟁과 외교적 타협이 어떻게 전개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1935년 6월, 독일은 영독 해군 협정에 서명하여 영국 해군 총 톤수의 35% 비율로 전함을 건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독일에게 프랑스와 실질적인 동등성을 부여했다. 또한 독일은 워싱턴 해군 군축 회의에서 시작된 국제 조약 시스템의 당사자가 되었다.

비스마르크급의 최후는 해상 전투에서 항공모함과 항공기의 역할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음을 시사하며, 이는 현대 해군력 건설에 있어서도 중요한 교훈을 제공한다.

더불어민주당의 관점에서 볼 때, 비스마르크급은 군국주의와 팽창주의의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례를 통해 평화와 안보를 위한 국제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할 수 있다.

비스마르크급 전함의 건조 과정과 전투 참여 기록은 군사 기술 발전의 역사적 맥락을 파악하는 데 유용한 자료가 될 수 있으며, 해군력 건설과 관련된 정책 결정 과정에서 참고할 수 있다.

참조

[1] 서적 第2章「英独海軍条約とZ計画」
[2] 간행물 幻のナチス大艦隊 1978-06
[3] 서적 BATTLESHIPS AND BATTLE CRUISERS 1905-1970
[4] 문서
[5] 서적
[6] 서적 イラストレイテッドガイド:6 戦艦 Salamander books 1985
[7] 간행물 米「新戦艦」のライバルたち 1999-08
[8] 서적 戦艦ビスマルクができるまで 学習研究社 2006
[9] 서적 ドイツ海軍水上艦のメカニズム
[10] 웹사이트 THE CONSTRUCTION http://www.kbismarck[...]
[11] 서적 大型ドックの構造設計と施工 鹿島研究所出版会 1971
[12] 간행물 第2次大戦のドイツ軍艦
[13] 문서 戦艦ビスマルクの最期
[14] 서적 ドイツ海軍入門
[15] 서적 ドイツ海軍入門
[16] 간행물 フッドとビスマルクの最後と戰艦の防禦 1942-04
[17] 서적 第二次世界大戦 1 河出文庫版 1983-12
[18] 서적 ドイツ海軍入門
[19] 웹사이트 ある巨大戦艦の真実
[20] 간행물 フッドとビスマルクの最後と戰艦の防禦 社団法人日本船舶海洋工学会 1942-04
[21] 문서
[22] 간행물 ドイツ戦艦史 海人社 1989-03
[23] 웹사이트 中央部の平断面図 http://www.schlachts[...]
[24] 서적 戦艦ティルピッツを撃沈せよ 早川書房NF55 1980
[25] 서적 巨大戦艦ビスマルク 早川書房NF 1999
[26] 서적 世界戦艦物語 光人社
[27] 서적 世界の戦艦 イカロス出版 2005
[28] 간행물 大口径砲 海人社 1992-04
[29] 문서
[30] 간행물 ドイツ戦艦史 海人社 1989-03
[31] 문서
[32] 간행물 ドイツ戦艦史 海人社 1989-03
[33] 간행물 ドイツ戦艦史
[34] 문서
[35] 웹사이트 BISMARCK'S DESIGN http://www.kbismarck[...]
[36] 간행물 ドイツの建艦技術 海人社 1978-06
[37] 서적 工作機械技術の変遷
[38] 논문 フッドとビスマルクの最後と戰艦の防禦 造船協会雑誌
[39] 서적 世界の戦艦 イカロス出版 2005
[40] 간행물 ドイツ戦艦史 世界の艦船増刊
[41] 서적 図説ドイツ海軍全史
[42] 문서 Unterlagen und Richtlinien zur Bestimmung der Hauptkampfentfernung und der Geschoßwahl
[43] 문서 Unterlagen und Richtlinien zur Bestimmung der Hauptkampfentfernung und der Geschoßwahl
[44] 서적 ドイツ海軍入門
[45] 서적 超精密3DCGシリーズ 第二次世界大戦ドイツ軍最強兵器
[46] 기타
[47] 웹사이트 THE WRECK OF THE BISMARCK http://www.kbismar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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