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전함 비스마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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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스마르크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이 건조한 전함으로, 1936년 기공하여 1940년 취역했다. 41,700톤의 기준 배수량과 38cm 주포 8문을 장착했으며, 1941년 라인 연습 작전 중 덴마크 해협 해전에서 영국 해군과 교전했다. 이 해전에서 후드를 격침시켰으나, 이후 추격전을 벌이다가 연료 손상과 방향타 손상으로 조종 불능 상태가 되었다. 결국 영국 해군의 집중 포격과 어뢰 공격을 받고 자침했으며, 2,200여 명의 승무원 중 114명만이 생존했다. 비스마르크의 잔해는 1989년 해양 고고학자 로버트 밸러드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침몰 원인을 두고 논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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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전함 비스마르크 - [배(Ship)]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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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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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명 | 비스마르크 |
함명 유래 | 오토 폰 비스마르크 |
함종 | 전함 |
급 | 비스마르크급 전함 |
소속 국가 | 나치 독일 |
함대 | 전쟁해군 |
함번 | (불명) |
슬로건 | (정보 없음) |
약칭 | (정보 없음) |
별명 | (정보 없음) |
기공 | 1936년 7월 1일 |
진수 | 1939년 2월 14일 |
취역 | 1940년 8월 24일 |
건조 조선소 | 블롬 운트 포스, 함부르크 |
제작자 | 블롬 플루스 포스 |
발주 | 1935년 11월 16일 |
최종 운명 | 1941년 5월 27일, 전투 중 손상 후 자침 (북대서양) 좌표: |
휘장 | [[File:Bismarck (1939) ship badge.svg|50px]] |
자매함 | 티르피츠 |
함장 | 에른스트 린데만 대령 |
제원 | |
배수량 | 기준: 표준 만재: |
길이 | 수선: 전체: |
흘수 | (표준), 풀로드 시 |
추진 | 3 x 기어 증기 터빈 3 x 스크류 프로펠러 |
동력 | 12 x 바그너 과열 수관 보일러 |shp|kW|abbr=on|lk=on}} |
속력 | 시험 운행 중 |
항속 거리 | (19노트) |
승무원 | 장교 103명 사병 1,962명 |
센서 | FuMO 23 Seetakt 레이더 하이드로폰 |
레이더 | FuMO 23 Seetakt |
무장 | |
주포 | 8 x SK C/34 (4 x 2) |
부포 | 12 x SK C/28 (6 x 2) |
대공포 | 16 x SK C/33 (8 x 2) 16 x SK C/30 (8 x 2) 12 x FlaK 30 (12 x 1) |
기타 무장 | 20mm 4연장 기관포 2정 20mm 단장 기관포 12정 (1941년 5월 기준) |
장갑 | |
기타 장갑 정보 | 현측: 320mm (수선면 상부), 145mm (제1갑판 현측부), 170mm (수선면 하부) 상갑판: 50mm - 80mm 장갑갑판: 80mm - 120mm 주포탑: 360mm (전면), 220mm (측면), 320mm (후면), 130mm (천개) 부포탑: 100mm (전면), 80mm (측면), 40mm (후면), 40mm (천개) 버베트부: 340mm 사령탑: 350mm (전면), 350mm (측면), 200mm (후면), 220mm (천개) |
함재기 | |
항공기 | 4 x 아라도 Ar 196 수상기 |
항공 시설 | 양방향 항공기 사출기 1기 |
작전 | |
주요 작전 | 라인위붕 작전 |
참가 함선 | |
기타 |
2. 건조 배경 및 설계 특징
1930년대 중반, 독일 해군은 프랑스 해군의 확장에 대응하기 위해 비스마르크급 전함의 1번함인 비스마르크호를 설계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한 바덴급 전함의 설계를 계승하여 원거리 포격전에는 불리하고 근거리 포격전에 유리하도록 설계되었다. 이는 발트해를 주축으로 하는 독일 해군의 활동 해역 특성상 시야가 좋지 않아 근거리 포격전이 자주 발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설계는 이미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부정되었고, 독일 해군은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 경험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
배수량만 보면 당시 세계 최대 크기의 전함이었으나, 대공 사격 관제나 장갑판 배치, 승무원 숙련도 등에는 여러 문제가 있었다.
2. 1. 건조 배경
1934년에 설계가 시작되어, 영국과 합의된 공표된 설계 배수량 35,000톤을 넘어선 41,700톤까지 배수량이 증가했다. 1936년 7월 1일에 독일 함부르크의 블롬 + 포스사에서 건조를 시작하여 1939년 2월 14일에 진수되었고, 1940년 8월에 취역했다.이는 1930년대 중반 독일 해군de이 프랑스 해군의 확장, 특히 1935년에 건조를 시작한 두 척의 리슐리외급 전함프랑스어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1935년 영독 해군 협정 체결 이후 건조된 ''비스마르크''와 자매함인 티르피츠de는 표면적으로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에 의해 부과된 약 35561645.00kg 제한 내에 있었다. 그러나 이 함선들은 비밀리에 이 수치를 훨씬 초과했으며, 1937년 일본의 조약 탈퇴로 인해 국제 조약 시스템이 붕괴되면서 서명국들은 약 45722115.00kg까지의 배수량을 허용하는 "에스컬레이터 조항"을 발동할 수 있었다.[1]
2. 2. 설계 특징
1934년에 설계가 시작되었으며, 영국과의 합의였던 35,000톤을 초과하여 기준 배수량은 41700ton, 만재 배수량은 50300ton까지 증가했다. 1936년 7월 1일에 함부르크의 블롬 운트 포스사에서 기공, 1939년 2월 14일에 진수, 1940년 8월에 취역했다.
배수량만 보면 당시 세계 최대급의 전함이었지만, 대공 사격 통제나 장갑판의 방어 배치, 승무원의 숙련도 등에 문제도 많았다. 제1차 세계 대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원거리 포격전에 대한 방어를 고려하지 않아 근거리 포격전에 유리하고 원거리 포격전에 불리한 설계였다.
주포는 4기의 2연장 포탑에 배치된 8문의 38cm SK C/34 포를 장착했다. 부포는 12문의 15cm L/55 포로 구성되었다.[1] 주포와 부포는 3개의 사격 통제 장치에서 조준되었으며, 기계식 컴퓨터를 사용하여 표적 거리와 항로를 계산하고 포의 각도를 계산했다. 각 사격 통제 장치 상단에는 회전 돔에 거리 측정기가 장착되었고, 1941년 3월까지 세 돔 모두 전면에 FuMO 23 제트타크트 레이더가 설치되었다.[2]
대공포는 8개의 2연장 마운트에 장착된 16문의 10.5cm C/33 포, 16문의 3.7cm C/30 포, 그리고 처음에는 12문의 2cm C/30 대공포로 구성되었다. 1941년 4월, 앞돛대의 탐조등 플랫폼에 장착된 2문의 단포신 2cm 포 2문이 2문의 4연장 2cm C/38 포로 교체되었다.
함선의 주요 벨트는 320mm 두께였으며, 각각 50mm 및 100mm 에서 120mm 두께의 상부 및 주 갑판으로 덮여 있었다. 38cm 포탑은 360mm 두께의 전면과 220mm 두께의 측면으로 보호되었다.
세 개의 블롬 운트 포스 기어식 증기 터빈과 12개의 연료유를 사용하는 바그너 과열 증기 수관 보일러를 사용했다. 추진 시스템은 138000PS의 출력을 내도록 설계되었으나, 실제로는 150170PS의 출력으로 30.01kn의 속도를 기록했다.
3. 라인 연습 작전과 덴마크 해협 해전
1941년 5월, 비스마르크는 중순양함 프린츠 오이겐과 함께 영국 해상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한 라인 연습 작전에 투입되었다.
5월 19일 02:00시,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은 폴란드의 정박지에서 출항했다. 이들의 출항은 이미 영국 해군에 탐지되고 있었다.
5월 23일 저녁 19:22시, 독일 함대는 덴마크 해협을 초계 중이던 영국 해군 중순양함 노포크와 서포크에 발각되었다. 비스마르크의 레이다가 노포크(또는 서포크)를 포착했고, 20:30시 에른스트 린데만 함장은 "적이 시야에 들어왔다. 발포하라!"라고 명령했다. 비스마르크는 6발을 발사했지만, 거리가 멀어 타격을 주지 못했다. 이 포격의 진동으로 비스마르크의 레이다가 고장났고, 귄터 뤼첸스 제독은 프린츠 오이겐에게 선두에서 레이다 초계를 제공하라고 명령했다.
밤 사이, 린데만 함장은 뤼첸스 제독에게 노포크와 서포크에 대한 발포 허가를 요구했고, 뤼첸스는 이를 허가했다. 비스마르크의 함미 측 함포 4문은 밤 사이 노포크와 서포크가 잡힐 때마다 발포하였다.
5월 25일 03:00, 비스마르크는 영국 해군 중순양함 HMS 서포크의 수색 레이다에서 벗어났지만, 뤼첸스 제독이 전투 상세보고를 위해 독일 해군 본부에 무전을 발신했기 때문에 다시 위치가 발각되었다. 뤼첸스와 린데만은 영국 함대가 U-보트의 기습 공격에 대비해 지그재그 항로로 운항한다는 점을 이용, 비스마르크와 영국군의 거리가 최대가 되었을 때 크게 변침하여 영국 함대를 선회한 뒤 프랑스 쪽으로 향했다. 이 때문에 영국 정찰기들은 비스마르크를 놓치게 되었다.
5월 26일 10:30, 영국 해군 함정이 프랑스 서쪽 해상에서 비스마르크를 발견했지만, 영국 주력함대는 비스마르크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결국 영국 해군은 항공모함을 이용한 격침을 시도하게 된다.
3. 1. 라인 연습 작전
영국의 보급선을 차단하기 위한 라인 연습 작전은 원래 전함 비스마르크, 중순양함프린츠 오이겐 외에 순양전함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도 참여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작전 직전 샤른호르스트는 기관 고장으로, 그나이제나우는 영국 뇌격기의 공격으로 추진축이 손상되어 참가가 불가능해졌다. 이 때문에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 두 척으로 작전을 수행하게 되었다.[3]1941년 5월 18일, 비스마르크 전대는 출항했다. 이 출항은 영국 첩보원에 의해 보고되었고, 스카게라크 해협에서 스웨덴 해군 항공 순양함 고틀란드에 발견되어 영국군에 보고되었다.
비스마르크는 마르스틴 섬으로 방향을 틀었고, 그림스타 협만에서 정박 중 영국 공군 정찰기에 발견되어 그 위치가 보고되었다. 5월 21일에는 순양함 노포크 및 서포크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때 비스마르크는 주포를 발사했지만, 그 충격으로 전방 경계 레이더가 고장나 프린츠 오이겐과 위치를 교대해야 했다.
영국군 사령부는 비스마르크 발견 보고를 받고 존 토비 제독이 이끄는 본국 함대를 출동시켰다. 이 함대는 순양전함 후드,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 항공모함 빅토리어스를 주력으로 하고 있었다.
3. 2. 덴마크 해협 해전
1941년 5월 24일 이른 아침, 프린츠 오이겐과 함께 덴마크 해협을 통과하던 비스마르크는 순양전함 후드와 프린스 오브 웨일스로 구성된 영국 함대와 마주쳤다.[3]- 05:55, 귄터 뤼첸스 중장은 수송선 파괴 임무를 우선시하여 응사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포술 장교 아달베르트 슈나이더 소령의 거듭된 요청에, 에른스트 린데만 함장은 "내 전함이 포탄에 맞게 할 수는 없다."라며 약 20,300m 거리에서 포격을 개시했다.
- 05:57, 비스마르크의 포탄 중 1발이 후드의 대공포 갑판에 명중하여 화재가 발생했다.
- 06:01, 비스마르크는 약 17,000m 거리에서 일제 사격을 가했고, 그 중 1발이 후드의 상갑판을 관통하여 탄약고에서 폭발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후드는 3분 만에 침몰했으며, 승무원 1,415명 중 단 3명만이 생존했다.[3]
후드 격침 이후,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사령탑이 포격당하고 흘수선 아래에 비스마르크의 주포 세 발이 맞아 침수가 시작되어 퇴각하였다. 비스마르크 역시 프린스 오브 웨일스의 포격으로 연료 탱크가 손상되어 2,000톤의 해수가 유입되는 피해를 입었다. 린데만 함장은 작전 수행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고, 뤼첸스는 이를 잠시 보류했지만 결국 항로 변경은 불가피했다.

4. 비스마르크 추격전과 최후
덴마크 해협 해전 이후, 영국 해군은 후드 격침에 대한 복수로 가용한 모든 함선을 동원하여 비스마르크를 추격했다.
포트 방향타가 고장난 비스마르크는 큰 원을 그리며 항해할 수밖에 없었고, 영국 함대의 추격을 피하기 어려웠다. 5월 26일 21시 40분, 륏옌스는 사령부에 "함선은 기동 불능 상태입니다. 마지막 포탄까지 싸우겠습니다. 총통 만세."라는 신호를 보냈다.[1] 승무원들의 사기는 점점 떨어졌지만, 해군 사령부의 격려 메시지는 오히려 절망적인 상황을 강조했다.[2]
아크 로열에서 소드피시 뇌격기가 출격하여 비스마르크를 공격하는 동안, 비스마르크는 셰필드를 감시하던 중 주포를 발사했다. 셰필드는 포탄 파편으로 3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당한 후 연막 엄호 아래 후퇴했다.[3][4] 셰필드와 연락이 끊긴 후, 필립 비안 함장의 구축함 5척은 밤새 비스마르크와 접촉을 유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5]
구축함들은 22시 38분에 비스마르크와 조우했고, 비스마르크는 즉시 주포로 공격했다. 밤새도록 비안의 구축함들은 비스마르크를 괴롭혔지만, 어뢰 공격은 모두 실패했다.[6] 05시에서 06시 사이, 비스마르크 승무원들은 아라도 196 수상기를 발사하려 했으나, 프린스 오브 웨일스의 포격으로 손상된 사출기 때문에 실패했다.[7] 륏옌스는 07시 10분에 U-556에게 중요 문서를 가져가도록 요청했으나, U-556은 잠수 중이어서 명령을 놓쳤고 연료도 부족했다.[8][9]
4. 1. 비스마르크 추격전
영국 해군은 HMS 후드 (HMS Hood) 침몰 소식에 본국 함대는 물론, 지중해 함대 소속인 순양 전함 HMS 리나운 (HMS Renown)과 항공모함 HMS 아크 로열 (HMS Ark Royal)까지 동원하여 비스마르크 추격에 나섰다.[5] 비스마르크는 연료 탱크 손상으로 프린츠 오이겐과 헤어져 프랑스로 향했다.- 5월 24일:
- 22:00, 영국 해군 항공모함 HMS 빅토리어스 (HMS Victorious)에서 소드피시 뇌격기 9대가 발진하여 비스마르크를 공격, 어뢰 1기를 명중시켰으나 피해는 경미했다.
- 5월 25일:
- 03:00, 비스마르크는 영국 해군 중순양함 HMS 서포크의 수색 레이다에서 벗어났으나, 귄터 뤼첸스 제독의 보고 때문에 위치가 다시 노출되었다.
- 비스마르크는 영국 함대의 지그재그 항로를 역이용, 크게 선회하여 따돌리고 프랑스로 향했다.
- 5월 26일:
- 10:30, 영국 해군 카탈리나 비행정이 프랑스 서쪽 해상에서 비스마르크를 발견했다. 영국 주력함대는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항공모함 공격이 결정되었다.
- 14:40, HMS 아크 로열에서 발진한 1차 공격대(소드피시 뇌격기 15기)는 셰필드를 오인 공격하여 실패했다.
- 19:10, HMS 아크 로열에서 2차 공격대(소드피시 뇌격기 15기)가 발진했다.
- 20:53, 2차 공격대가 셰필드의 유도로 비스마르크를 공격했다.
- 비어 중위(기체 번호: 2P)의 어뢰가 좌현 중앙부에 명중, 소량의 침수가 발생했다.
- 포셋 대위(기체 번호: 2B) 또는 패티슨 중위(기체 번호: 2A)의 어뢰가 우현 후부에 명중, 방향타가 손상되어 조종 불능 상태가 되었다.
- 21:30, 비스마르크는 셰필드에 포격을 가해 손상을 입혔다.
4. 2. 최후
5월 27일, 영국 해군 전함 킹 조지 5세와 로드니, 중순양함 노퍽 및 도싯셔와의 88분간의 격전으로 비스마르크는 약 400발의 포탄과 3발의 어뢰 공격을 받았다.[5] 잔여 연료도 공격을 회피할 만큼은 없었기 때문에 비스마르크는 자침을 선택, 오전 10시 40분에 침몰했다. 도싯셔는 U-보트 접근을 이유로 구조를 단념했고, 결국 승무원 2,200여 명 중 114명만이 구조되었다.[5]다행히 비스마르크는 영국 함대와 근거리 포격전으로 시종일관했기 때문에 원거리 포격전은 발생하지 않았다.
침몰 원인은 아직 불분명하다. 어뢰 3발에 명중되어 침몰했다는 설과 자침했다는 설이 대립하고 있는데, 어뢰 3발을 맞기 직전까지만 해도 내부의 방탄벽은 거의 관통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함선의 양 끝 부분에는 방탄벽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어뢰로 인해 심각한 손상을 입은 비스마르크가 자침을 선택했고, 그로 인해 침몰이 가속화된 것으로 보인다.
2,200여 명의 승무원 중 114명만이 구조되었으며, 이 중 에른스트 린데만 함장은 없었다. 그는 함과 운명을 함께 했다.[5]

5월 27일 날이 밝은 후, 킹 조지 5세가 공격을 이끌었고 로드니는 포트 측을 따라갔다. 08시 43분, 킹 조지 5세의 망루병들이 약 23000m 떨어진 곳에서 비스마르크를 발견했다. 4분 후, 로드니의 전방 포탑이 발포했고, 킹 조지 5세의 포가 발포하기 시작했다. 비스마르크는 08시 50분에 전방 포로 반격했다.
거리가 좁혀지면서, 함선의 부포들이 전투에 참여했다. 노퍽과 도싯셔는 접근하여 약 20.32cm 포를 발사하기 시작했다. 09시 02분, 로드니에서 발사된 16인치 포탄이 비스마르크의 전방 상부 구조에 명중하여 수백 명의 사상자를 발생시키고 두 개의 전방 포탑을 심각하게 손상시켰다. 주포 사격 통제 장치도 파괴되었다. 후방 통제소에 있던 륄레하임-레히베르크 중위는 후방 포탑의 사격 통제를 맡았지만, 09시 31분까지 네 개의 주포 포탑 모두가 작동 불능 상태가 되었다.

지휘부 요원들이 더 이상 응답하지 않자, 부사령관인 한스 외르스 대령이 함선을 지휘했다. 외르스는 09시 30분경 비스마르크를 자침시키기로 결정했다. 비스마르크는 메인 갑판의 손상으로 인해 함선에 물이 유입되면서 점점 기울어졌고, 상당한 자유 수면 효과가 발생하면서 서서히 침몰하고 있었다. 09시 30분경 외르스는 갑판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함선을 포기하라고 명령했다.
10시까지 토비의 두 전함은 700발이 넘는 주포탄을 발사했고, 그 중 많은 수가 매우 근거리에서 발사되었다. 비스마르크는 엉망이 되었고, 뱃머리에서 선미까지 불타고 있었다. 그녀는 통제할 수 없는 침수로 인해 선미 방향으로 서서히 가라앉았고, 포트 방향으로 20도의 경사를 보였다.
자침 폭약은 10시 20분경에 폭발했다. 10시 35분까지, 함선은 심하게 포트 측으로 기울어져 천천히 전복되고 선미로 침몰했다. 연료가 부족해지자, 토비는 순양함 도싯셔에게 어뢰로 비스마르크를 침몰시키라고 명령하고, 자신의 전함에게 항구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도싯셔는 비스마르크의 우현에 한 쌍의 어뢰를 발사했는데, 그 중 하나가 명중했다. 도싯셔는 그런 다음 그녀의 포트 측으로 이동하여 또 다른 어뢰를 발사했는데, 이 또한 명중했다. 비스마르크는 10시 40분에 수면 아래로 사라졌다.
도싯셔와 구축함 마오리가 접근하여 생존자를 구조했다. 11시 40분에 도싯셔의 함장은 망루병들이 U보트를 발견했다고 생각한 후 구조 노력을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도싯셔는 현장을 떠날 때까지 85명을 구조했고, 마오리는 25명을 구조했다.
5. 침몰 원인 논쟁
비스마르크의 침몰 원인에 대해서는 영국 해군의 공격에 의한 것인지, 독일 해군의 자침에 의한 것인지 논쟁이 있다.
오전 10시 20분경, 자침용 폭약이 함저에서 기폭했다고 여겨진다. 같은 시각, 도르셋셔에서 3발의 어뢰가 발사되어 우현 함교 아래, 우현 기계실, 좌현 사령탑 아래에 명중했다. 이 충격으로 비스마르크의 함미가 절단되었고, 도르셋셔의 뇌격이 비스마르크의 최후를 장식했다. 비스마르크는 급속히 침하하여 좌현으로 기울어지면서 함수를 들어 올리고 오전 10시 40분에 침몰했다. 이는 후드 침몰 76시간 후의 일이었다.[5]
도르셋셔 및 구축함은 표류 중인 승무원 구조에 나섰지만, 유보트 접근으로 보이는 청음(실제로는 당시 그 해역에 없었음)에 의해 도중에 구조를 단념했다. 2,206명의 승무원 중 115명만이 구조되었다. 에른스트 린데만 함장은 갑판에 남아 비스마르크와 운명을 함께 했다.
최신예 함정을 잃은 독일 해군은 큰 충격을 받았고, 이후 대형 수상함에 의한 통상 파괴는 자취를 감췄다. 후드를 격침당한 영국 해군의 분노는 비스마르크 격침 후에도 가라앉지 않아, 독일 해군에 대한 공격은 더욱 철저하게 이루어졌다.[6] 1941년 6월 이후 영국 해군이 대서양 수역의 선단 호위에 전함을 투입할 필요가 없어진 점은 독일 해군 수상함의 괴멸적인 상황을 보여준다.[7]
5. 1. 어뢰 격침설
영국 해군은 비스마르크가 어뢰 공격으로 인해 침몰했다고 주장한다. 5월 27일 벌어진 격전에서 비스마르크는 약 400발의 포탄과 3발의 어뢰 공격을 받았다.[5]도르셋셔는 비스마르크에 어뢰 공격을 명령받고 두 차례에 걸쳐 3발의 어뢰를 발사했다. 어뢰는 우현 함교 아래와 우현 기계실, 좌현 사령탑 아래에 명중했다. 이 어뢰 명중으로 비스마르크의 함미가 절단되어 떨어져 나가는 것이 목격되었다. 도르셋셔의 어뢰 공격이 비스마르크의 최후를 장식했고, 비스마르크는 격침되었다.[5] 비스마르크는 급속히 가라앉아 좌현으로 기울어지면서 함수를 들어 올리고, 오전 10시 40분에 침몰했다.
5. 2. 자침설
5월 27일, 영국 해군 전함 HMS 킹 조지 V와 HMS 로드니, 중순양함 HMS 노포크 및 HMS 도셋셔와의 88분간의 격전으로 비스마르크는 약 400발의 포탄과 3발의 어뢰 공격을 받았다. 잔여 연료도 부족했기에, 비스마르크는 자침을 선택하여 오전 10시 40분에 침몰했다.침몰 원인은 아직 불분명하다. 어뢰 3발에 명중되어 침몰했다는 설과 자침했다는 설이 대립하고 있는데, 어뢰 3발을 맞기 직전까지만 해도 내부의 방탄벽은 거의 관통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함선의 양 끝 부분에는 방탄벽이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어뢰로 인해 심각한 손상을 입은 비스마르크가 자침을 선택했고, 그로 인해 침몰이 가속화된 것으로 보인다.
오전 10시 20분경, 자침용 폭약이 함저에서 기폭했다고 여겨진다. 같은 시각, 도르셋셔에서 발사된 3발의 어뢰가 우현 함교 아래, 우현 기계실, 좌현 사령탑 아래에 명중했다. 이 충격으로 비스마르크의 함미가 절단되었고, 도르셋셔의 뇌격이 비스마르크의 최후를 장식했다. 비스마르크는 급속히 침하하여 좌현으로 기울어지면서 함수를 들어 올리고 오전 10시 40분에 침몰했다.
5. 3. 절충설
5월 27일, 영국 해군 전함 HMS 킹 조지 V와 HMS 로드니, 중순양함 HMS 노포크 및 HMS 도셋셔와의 88분간의 격전으로 비스마르크는 약 400발의 포탄과 3발의 어뢰 공격을 받았다. 침몰 원인은 아직 불분명하나, 어뢰 3발에 명중되어 침몰했다는 설과 자침했다는 설이 대립하고 있다. 어뢰 3발을 맞기 직전까지만 해도 내부의 방탄벽은 거의 관통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지만, 함선의 양 끝 부분에는 방탄벽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어뢰로 인해 심각한 손상을 입은 비스마르크가 자침을 선택했고, 그로 인해 침몰이 가속화된 것으로 보인다.[5]6. 해저 탐사와 발견
1989년 6월 8일, 타이타닉 호를 탐사했던 로버트 밸러드가 프랑스 해안 서쪽 650km, 수심 4700m 지점에서 비스마르크의 선체를 발견했다.[8] 함체 분석 결과 포격과 수뢰 타격으로 인한 광범위한 파괴와 자침을 위해 열린 구멍이 확인되었다. 밸러드는 유품 도난을 우려하여 정확한 위치는 발표하지 않았다.[8]
비스마르크가 침몰한 해역은 해저 화산 사면이었고, 선체는 해저에 착저한 후 긴 거리를 미끄러져 내려갔다.[8]
6. 1. 로버트 발라드의 발견
1989년 6월 8일, 타이타닉호를 탐사했던 해양 고고학자 로버트 밸러드가 이끄는 탐사팀이 비스마르크호를 발견했다.[8] 비스마르크호는 프랑스 브레스트 서쪽 약 650km, 수심 4791m 지점에 침몰해 있었다.[8]밸러드는 선체 손상이 적은 점을 근거로, 승무원들이 해수 밸브를 열어 자침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다. 그는 유품 도난을 우려하여 정확한 침몰 위치를 공개하지 않았다.[8]
비스마르크호는 해저 화산 사면에 침몰해 있었으며, 선체는 해저에 닿은 후 긴 거리를 미끄러져 내려갔다.[8] 탐사선은 이 흔적을 따라가며 함교와 선체를 발견했다.[8] 선체는 올바른 방향으로 해저에 있었지만, 4개의 주포 포탑은 모두 탈락한 상태였다.[8]
관측 결과, 어뢰로 인해 변형된 스크루 샤프트와 작동 불능이 된 키가 확인되었다.[8] 영국군의 포격으로 함교를 포함한 상부 갑판 구조물이 광범위하게 파괴되었지만, 현측 수직 장갑을 관통한 포탄은 몇 개에 불과했다.[8]
이후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비스마르크호의 수중 촬영을 진행하고, 그 영상을 토대로 프로그램을 제작했다.[8] 2001년의 정밀 조사에서도 선체 손상이 적다는 밸러드의 보고를 뒷받침하는 결과가 나왔다.[10]
해군사 연구자 스티브 와이퍼는 "상부 구조물이나 포탑 등이 파괴되어도 여전히 선체는 강도를 유지했다"고 말했다.[10] 카메론 감독 조사반은 선체 전체에서 포탄 관통 흔적이 4곳밖에 발견되지 않았다고 보고하며, 선체가 "아직 거의 손상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10] 또한, 승무원 증언대로 함의 수선 아래에 자침 작업 흔적도 발견되었다. 와이퍼는 이것이 "함의 침몰을 앞당겼을 뿐"이라고 말했다.[10]
6. 2. 추가 탐사
1989년 6월 8일, 타이타닉호를 발견했던 해양 고고학자 로버트 밸러드가 비스마르크호를 발견했다.[8] 비스마르크호는 프랑스 브레스트 서쪽 약 650km 지점, 수심 약 4791m 지점에 있었다.[8] 밸러드는 유품 도난을 우려하여 정확한 위치는 공개하지 않았다.[8]이후 여러 차례 추가 탐사가 이루어졌다. 2001년 6월, 우즈홀 해양연구소와 제휴한 딥 오션 익스페디션은 러시아제 잠수정을 이용하여 추가 조사를 실시했다. 이들은 선체에 여러 개의 긴 찢어진 부분을 발견했지만, 해저 충격으로 인한 것으로 판단했다.[10]
2001년 7월, 영국 TV 채널이 지원한 영국-미국 탐험대가 원격 조작 수중 차량(ROV)을 사용하여 선체를 촬영했다. 탐험대장 데이비드 미언스는 선체에서 상당한 찢어진 부분을 발견하고, 어뢰 공격으로 인해 배가 침몰했다고 결론 내렸다.[10]
2002년에는 영화감독 제임스 카메론이 이끄는 탐사팀이 미르 잠수정을 이용하여 비스마르크호 내부를 촬영하고 침몰 과정을 재구성했다.[8] 카메론의 조사 결과, 주 장갑대 아래 갑판은 3~4미터 압축되어 있었고, 선체의 찢어진 부분은 전투 피해보다는 해저 충격에 의한 것으로 보았다.[8]
카메론은 포격과 어뢰 공격이 비스마르크호를 압도했지만, 독일 승무원들의 자침이 침몰을 앞당겼다고 결론지었다.[8] 미언스는 이후 자신의 저서에서 자침이 "불가피한 일을 몇 분 정도 늦추었을 뿐"이라고 인정했다.[10] 밸러드는 "영국 해군이 마지막 일격을 가했든 아니든, 결국 배를 침몰시켰다"고 결론 내렸다.[8]
7. 비스마르크호의 유산
비스마르크호는 영화,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그 이야기가 재조명되고 있다.
7. 1. 영화
1960년 루이스 길버트 감독, 케네스 모어, 다나 윈터 주연의 영국 영화 비스마르크호를 격침하라!가 제작되었다. 촬영에는 영국 해군의 뱅가드가 사용되었다.다음은 비스마르크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들이다.
- "대서양에 잠든 전함 비스마르크"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 2001년) - DVD판은 도시바 디지털 프론티어에서 판매.
- "나치 초전함 비스마르크 격침의 수수께끼"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 2011년)
- "나치 독일의 거대 건조물" 시리즈 시즌 2 제2회 "전함 비스마르크"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 2015년)
- "제임스 캐머런 해저의 전함 비스마르크" (디스커버리 채널)
- "독파이트 - 화려한 공중전" 시리즈 제9회 "비스마르크를 추격하라" (히스토리 채널)
7. 2. 다큐멘터리
-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 다큐멘터리 "대서양에 잠든 전함 비스마르크" (2001년) - DVD판은 도시바 디지털 프론티어에서 판매.[1]
-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 다큐멘터리 "나치 초전함 비스마르크 격침의 수수께끼" (2011년)[2]
-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 다큐멘터리 "나치 독일의 거대 건조물" 시리즈 시즌 2 제2회 "전함 비스마르크" (2015년)[3]
- 디스커버리 채널 다큐멘터리 "제임스 캐머런 해저의 전함 비스마르크"[4]
- 히스토리 채널 다큐멘터리 "독파이트 - 화려한 공중전" 시리즈 제9회 "비스마르크를 추격하라"[5]
참조
[1]
간행물
Unterlagen und Richtlinien zur Bestimmung der Hauptkampfentfernung und der Geschoßwahl
Heft a
[2]
서적
Schlachtschiffe und Schlachtkreuzer 1921–1997. Internationaler Schlachtschiffbau
[3]
방송
世界の戦艦(双葉社)
2013-02-09
[4]
간행물
世界の艦船No.553
[5]
서적
Engineers of Victory
[6]
방송
FightingShips
[7]
간행물
世界の艦船増刊第67集
[8]
방송
ジェームズ・キャメロン 海底の戦艦ビスマルク
[9]
뉴스
'[ワシントン]小泉特派員'
読売新聞
1989-06-22
[10]
방송
ナチス超戦艦ビスマルク撃沈の謎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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