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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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천성 전투는 1598년 임진왜란 시기 조명 연합군과 시마즈 요시히로가 이끄는 일본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조명 연합군은 사천을 공격하여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려 했으나, 시마즈군은 사천고성 전투와 사천 선진리왜성 전투에서 연합군을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 시마즈군은 소수의 병력으로 조총, 지뢰 등을 활용하여 승리했으며, 이로 인해 명나라 군은 사기를 잃고 철수하게 되었다. 사천성 전투는 임진왜란의 주요 전투 중 하나로, 일본군의 철수를 돕고, 명나라의 강화 교섭을 이끌어내는 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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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성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개요 | |
분쟁 | 정유재란 |
시기 | 1598년 10월 1일 (양력 10월 30일) |
장소 | 조선 경상도 사천선진리성 |
결과 | 조명연합군 패배, 일본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조선 왕국 명 제국 |
교전국 2 | 도요토미 정권 |
지휘관 | |
지휘관 1 | 동일원 정기룡 |
지휘관 2 | 시마즈 요시히로 도고 시게타카 |
병력 규모 | |
병력 1 | 명나라 26,800명 조선 2,215명 총병력 29,015명 (泗川の戦い 문서 기준으로는 30,000명 약) Battle of Sacheon (1598) 문서 기준으로는 15,000명 |
병력 2 | 7,000명 ~ 10,000명 (Battle of Sacheon (1598) 문서 기준으로는 8,000명) |
사상자 | |
사상자 1 | 7,000명 ~ 8,000명 (조선왕조실록) (Battle of Sacheon (1598) 문서 기준으로는 7,000명) |
사상자 2 |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음 (Battle of Sacheon (1598) 문서 기준으로는 미상) |
관련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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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1598년 9월 말부터 10월 초, 조·명 연합군은 서로군·중로군·동로군을 편성하여 순천왜성(고니시군), 사천 선진리왜성(시마즈군), 울산왜성(가토군)을 향해 동시에 남진했다. 이들은 육상 삼로군과 수로군을 함께 진격시켜 일본군을 공격하는 '사로병진작전(四路竝進作戰)'을 펼쳤다.[17]
1598년 정유재란 당시,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사로병진책"이라는 전략을 세웠다. 이는 한반도 남해안에 흩어져 있는 일본군을 동시에 공격하여 섬멸하는 작전이었다. 이 중, 총병 동일원이 이끄는 중로군은 경상남도 사천시에 있는 사천 왜성을 공격 목표로 삼았다. 사천은 일본군의 주요 거점인 부산과 서쪽의 순천 왜성, 남해 왜성을 잇는 중요한 위치였기 때문에, 이곳을 점령하면 일본군의 보급 및 연락을 끊을 수 있었다.
이 중 명나라 장수 동일원이 이끄는 중로군 4만 명의 조·명 연합군은 시마즈군이 주둔한 사천으로 진격했다. 사천은 일본군의 근거지인 부산과 일본군 좌측 끝인 순천왜성, 남해왜성의 중간 지점으로, 이곳이 함락되면 서쪽 일본군과의 연락이 끊길 위험이 있었다.
당시 사천 일대의 일본군은 시마즈 요시히로를 중심으로 한 시마즈 가문의 5개 부대가 느슨한 지휘체계로 결합해 있었다. 1597년 시마즈 요시히로는 모리 가쓰노부가 축성한 사천 선진리왜성에 주둔하며 사천에서 진주에 이르는 요충지에 진영을 설치했다. 진주성에는 미하라 시게다네(三原重鍾)를, 망진왜성에는 데라야마 히사가네(寺山久兼)를 배치하여 중로군이 남강을 건너 남진하는 것을 막았다. 또한, 영춘과 사천에 성을 쌓거나 보수하여 영춘왜성과 사천구성[17]에는 가와카미 히사토모(川上久智)와 가와카미 다다자네(川上忠実)를 배치하여 진주 남강을 최전방 방어선으로 삼고, 망진왜성·영춘왜성·사천구성을 사천 선진리왜성의 전진 방어진지로 삼았다. 시마즈군의 병력은 시마즈 요시히로와 그의 아들 시마즈 다다쓰네(島津忠恒)가 이끄는 7천 명뿐이었다.
소군이나 다치바나군이 원군을 요청했으나, 요시히로는 이를 거절하고[18] 시마즈 가문의 군세만으로 조·명 연합군을 상대했다. 동이원과 정사룡의 연합군은 1598년 11월 6일 사천으로 진격했다.
3. 전개
당시 사천에는 시마즈 요시히로와 그의 아들 시마즈 타다츠네가 이끄는 시마즈 군 1만 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소 요시토시 등 다른 일본군의 지원 요청을 거절하고, 자신의 군대만으로 명나라-조선 연합군에 맞서기로 결정했다.
명나라-조선 연합군의 움직임을 파악한 시마즈 요시히로는 사천고성, 영춘, 곤양, 망진에 있던 병력을 사천신성으로 집결시켰다.
3. 1. 사천 고성 전투 (1598년 음력 9월 27일)
1598년 9월 20일 조·명 연합군 중로군 본대는 시마즈 요시히로가 이끄는 일본군이 주둔한 진주의 망진왜성과 영춘왜성을 점령하고, 사천 선진리왜성과 함께 사천고성으로 진격하여 공세를 펼쳤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가와카미 다다노리(川上忠実)에게 수백 명의 군사를 주어 사천고성을 지키게 하고, 약 1만 석의 식량을 비축해 두었다. 이들은 소수 병력이었음에도 완강히 저항하며 연합군을 도발했다.[9]
9월 28일 밤, 경상우병사 정기룡이 이끄는 조선군이 사천고성을 포위하고 야습을 감행했다. 일본군은 성문을 열고 포위망을 돌파하려 했으나, 많은 병력 손실을 입고 사천 선진리왜성으로 철수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사천신성으로 병력을 집결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사천고성에 배치되었던 병력은 철수가 늦어져 명나라-조선 연합군에게 포위되었다. 가와카미 다다자네를 주장으로 하는 사천고성에는 약 1만 석의 식량이 있었으나, 병력은 수백 명에 불과했다. 1598년 9월 27일, 명나라 군은 사천고성을 공격했고, 가와카미 다다자네는 소수 병력으로 저항하며 명나라 장수 이녕, 노득공 등 십여 명을 베었다. 그러나 사상자가 많아 위기에 처하자, 가와카미 다다자네의 군대는 명나라-조선 연합군의 포위를 뚫고 사천고성을 포기, 사천신성으로 철수했다. 이 과정에서 가와카미 다다자네는 36개의 화살을 맞는 중상을 입었고, 150여 명이 전사했지만 철수에 성공했다.[9]
한편, 가와카미 다다자네는 세토구치 시게하루에게 명하여 적의 식량고를 불태우게 했고, 이에 성공했다. 이로 인해 식량이 부족했던 연합군은 더욱 궁지에 몰려 단기 결전을 강요받게 되었다.[9]
3. 2. 사천 선진리왜성 전투 (1598년 음력 10월 1일)
1598년 9월 20일 조·명 연합군 중로군 본대는 시마즈 요시히로가 이끄는 일본군이 주둔한 진주의 망진왜성과 영춘왜성을 점령하고, 사천고성과 사천 선진리왜성으로 진격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병력을 사천 선진리왜성에 집중시켜 조명 연합군의 공세를 막으려 했다.
9월 28일 밤, 경상우병사 정기룡이 이끄는 조선군이 사천고성을 야습하여 일본군은 큰 피해를 입고 사천 선진리왜성으로 철수했다. 10월 1일 조·명 연합군은 사천 선진리왜성 공격을 시작했다.
전투 도중, 가와카미 다다노리는 세토구치 시게하루에게 명하여 적의 식량창고를 불태웠다. 식량이 부족했던 연합군은 더욱 궁지에 몰렸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사천 선진리왜성 뒤에 튼튼한 진을 치고 복병을 배치했다. 요시히로는 대량의 조총과 지뢰, 쇳조각과 철정을 장전한 대포를 사용하여 연합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연합군이 지치자 요시히로는 복병을 출동시켜 적을 교란하고, 본대도 공세로 전환하여 연합군을 격퇴했다.
농성전으로 맞선 시마즈 군은 적군에게 집중 사격을 가하며 버텼고, 오후까지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전투가 계속되는 가운데, 명나라 군의 화약고에 불이 붙어 폭발하면서 명·조선 연합군은 혼란에 빠졌다. 마침 흰색과 붉은색의 두 마리 여우가 성 안에서 명군 진영 쪽으로 달려갔다. 이를 본 시마즈 군은 이나리 대명신의 승리를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 사기가 크게 높아졌다고 한다.[10] 이 기회를 틈타 시마즈 군은 성문을 열고 쳐들어갔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복병을 출동시켜 적의 대열을 끊어 혼란에 빠뜨렸고, 요시히로 본대도 공세로 전환했다. 혼란에 빠진 연합군은 피로가 겹쳐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시마즈 군은 남강 우안까지 추격하여, 혼란에 빠져 도주하는 연합군은 남강에서 무수한 익사자를 냈다. 10월 1일 밤, 시마즈 군은 사천의 평원에서 개선식을 거행하며 전투는 막을 내렸다.[11]
이 전투로 시마즈 요시히로는 "귀석만자(おにしまづ・グイシーマンズ)"라고 불리며 두려움을 받았고, 그 명성은 조선뿐만 아니라 명나라까지 널리 알려졌다.[12]
4. 결과 및 영향
시마즈 군은 전력 차이로 인해 장기전이 불리했고, 명나라군은 식량이 부족하고 시마즈 군의 기습으로 식량 창고를 소실하여 양측 모두 단기 결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심리적으로 명나라·조선 연합군은 지휘 통제가 어려웠고, 적군이 7천 명으로 열세였기에 승리를 낙관하여 연합군의 약점이 되었다. 반면, 시마즈 군은 패배하면 일본군의 연계가 붕괴되고 많은 아군이 도망갈 곳을 잃는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고, 쓰리노부세 전술 경험과 시마즈 가문 병사들만의 전투로 결속력이 강했다.
이러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시마즈 군의 기습과 복병이 성공하고, 다량의 조총을 방어에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연합군이 혼란에 빠져 붕괴되어 시마즈 군이 승리할 수 있었다. 사천에서 명나라 중로군이 패배하면서 서로군과 동로군도 공세를 포기했고, 명나라-조선 연합군의 사로 병진책은 실패로 끝났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사천 전투 이전인 8월 18일에 사망했지만, 이 사실은 은폐되었고 10월 15일에 일본군에게 철수 명령이 내려졌다. 시마즈 가문은 이 전투에서 명나라 군을 격퇴하고 아군의 조직적인 철수를 가능하게 했으며, 노량 해전에서 고니시 군의 탈출을 가능하게 한 공적으로 오대로에게 높이 평가받아 임진왜란 참전 다이묘 중 유일하게 가증을 받았다. 반면, 명나라 군은 지휘관을 엄중히 문책하여 둥이위안은 3등급 강등, 하오싼핑과 마청원은 참형에 처해졌다.[13][14] 사천 전역 이후, 명나라는 교전을 회피하고 일본군과 강화 교섭을 진행했다.
고야산에 건립된 게이초의 역 공양비에는 남원성 전투 전과로 "대명국 군병 수천 기를 토벌하여 포획한 중 당수 전 420인을 베었다"라고 기록하고, 사천 전투 전과로 "같은 해 10월 1일 경상도 사주에서 대명인 8만여 병을 격멸했다"라고 기록했다. 아군 피해는 "여러 번의 전장에서 아군 병졸이 활과 칼, 창에 맞아 3천여 명이 사망했으며, 바다와 육지 사이에서 횡사하거나 병사한 자들의 수는 모두 기록하기 어렵다"라고 기록되어 있다.[15]
현재 미야자키현 고바야시시에는 사천성 전투 승전을 기념하는 "와타이코 오도리"라는 무용이 전해지고 있다.
5. 평가
포위된 시마즈 군은 전력 차이로 인해 장기전으로 가면 불리해질 위험이 있었다. 반면, 포위 측의 명나라 군 역시 최소 수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대군을 장기간 주둔시킬 식량이 부족했고, 시마즈 군의 기습으로 식량 창고를 소실했다. 그 결과, 쌍방 모두 단기 결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심리적인 면에서 명나라·조선 연합군은 지휘 통제가 어려웠고, 한 번의 불측의 사태로 혼란이 발생하면 수습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적군이 불과 7천 명으로 압도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에 승리를 낙관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요인들은 연합군의 약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시마즈 군은 이 전투에서 패배하면 일본군의 연계가 붕괴되고, 많은 아군이 도망갈 곳을 잃는다는 것을 강하게 인식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시마즈의 전통적인 쓰리노부세 전술로 열세를 뒤집은 경험이 여러 번 있었기 때문에, 전 군의 의지도 통일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더욱이 아군의 원군을 거절하고 시마즈 가문의 병사들만으로 싸웠기 때문에, 소수이면서도 군으로서의 결속력이 매우 강했을 것으로 보인다.
위의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시마즈 군의 기습 작전이나 복병 등이 성공하여 연합군이 혼란에 빠져 붕괴되었기 때문에, 소수의 병력인 시마즈 군이 승리할 수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시마즈 군이 다량의 조총을 방어에 사용하여 효과를 거둔 것도 큰 요인이다.
참조
[1]
문서
唐入軍役人数船数等島津家分覚書
島津家文書
1596-12-05
[2]
문서
このうち非戦闘員を除く実際の兵力は約8千人程度だった
[3]
웹사이트
『朝鮮宣祖実録』三十一年(1598)十月十二日
http://sillok.histor[...]
[4]
웹사이트
『朝鮮宣祖実録』三十一年(1598)十月十日
http://sillok.histor[...]
[5]
웹사이트
『朝鮮宣祖実録』
https://sillok.histo[...]
[6]
백과사전
泗川の戦い
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小項目事典
[7]
서적
泗川新寨戦捷之偉蹟
薩藩史料調査会
1918-10
[8]
웹사이트
明史 朝鮮伝
http://zh.wikisource[...]
明史
[9]
서적
島津歴代略記
島津顕彰会編
1986-10
[10]
문서
この時の2匹の狐にまつわる踊りが「吉左右踊り」で、鹿児島県無形民俗文化財に指定されている
[11]
서적
島津義弘のすべて
新人物往来社
1986-07
[12]
문서
『朝鮮宣祖実録』三十一年(1598)十月十二日
[13]
문서
『明神宗実録』巻328, 萬暦二十六年十一月一日
[14]
웹사이트
『朝鮮宣祖実録』三十一年(1598)十月十七日
http://sillok.histor[...]
[15]
서적
月峯海上録攷釈
1961
[16]
문서
도전중흥기(島津中興記) 등의 일부 일본 역사서에서는 명군의 병력을 20만이라 서술하여있지만, [[조선왕조실록]] 등 다른 사서에는 약 4만명으로 서술되어있다
[17]
문서
사서에는 사천읍성을 사천구성이라 서술하고 있으며 사천왜성(선진리왜성)을 사천신성으로 서술하고 있다
[18]
문서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적은 병력으로 적을 물리치기 위해서 다양한 전술을 구사할 생각에, 다른 집안의 군대의 인원이 섞이는 것으로 제휴가 흐트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랬다는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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