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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잔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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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산잔 시대는 14세기 오키나와 본섬에 존재했던 세 개의 정치 세력을 일컫는 말로, 북쪽의 호쿠잔, 중앙의 추잔, 남쪽의 난잔으로 구성되었다. 각 세력은 구스쿠를 중심으로 성장했으며, 1429년 추잔의 쇼하시에 의해 통일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명나라와의 조공 관계를 맺고 외교 활동을 펼쳤으나, 삼산 통일의 역사적 사실 유무에 대한 논쟁이 존재한다. 산잔 시대 이후 각 세력의 영지는 3개의 군으로 나뉘었고, 현재 오키나와 지역 구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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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잔 시대
개요
시기1187년 ~ 1429년
주요 특징오키나와섬에 여러 군웅이 할거했던 시대
명칭
일본어三山時代 (さんざんじだい, Sanzan jidai)
한자三山時代
의미'세 개의 산' 시대
지리적 구분산호쿠 (山北): 북부
츄잔 (中山): 중부
산난 (山南): 남부
역사적 배경
이전 시대구스쿠 시대
이후 시대류큐 왕국
주요 세력
북산 (호쿠잔)일본어: 北山 (ほくざん, Hokuzan)
지배 지역: 오키나와 북부
중산 (츄잔)일본어: 中山 (ちゅうざん, Chūzan)
지배 지역: 오키나와 중부
주요 왕조: 에이소 왕조
남산 (난잔)일본어: 南山 (なんざん, Nanzan)
지배 지역: 오키나와 남부
주요 사건
1314년경각 지역에서 아지(按司)들이 할거하며 북산, 중산, 남산 세력 형성
1416년쇼하시가 북산을 멸망시킴
1429년쇼하시가 남산을 멸망시키고 류큐를 통일, 류큐 왕국 건립
참고
관련 용어아지 (按司)

2. 명칭과 기원

산잔(三山)은 문자 그대로 "세 개의 산"을 의미하며, 오키나와 본섬을 기반으로 한 세 개의 주요 정치 세력을 가리킨다. 이 세력은 각각 북쪽의 호쿠잔(北山), 중앙의 츄잔(中山), 남쪽의 난잔(南山)으로 불린다.[3]

이 명칭은 14세기 후반 명나라의 기록에서 처음 등장한다. 1372년 명나라는 새로 건국된 후 주변국과의 조공 관계 수립을 위해 "유구국(琉球國)"이라 부르던 오키나와에 사신을 파견했다. 이에 츄잔의 왕 삿토가 처음으로 조공했으며[1], 이후 1380년에는 산난(山南)의 왕 쇼삿토가, 1383년에는 산호쿠(山北)의 왕 하니시가 각각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 관계를 맺었다.[2] 명나라는 1383년 기록에서 오키나와에 세 명의 왕이 분쟁 중이라고 인식하고 이들을 각각 왕으로 인정하며 평화를 요구했다.[2] '산호쿠'와 '산난'이라는 명칭은 츄잔을 중심으로 방위를 나타낸 것으로 보이며, 누가 처음 사용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원래 명나라 기록에는 山北|산호쿠일본어, 츄잔(中山), 山南|산난일본어으로 기록되었으나, 후에 사이 온이 1724년 이후 편찬한 『추잔 세이후』 개정판에서 산호쿠를 北山|호쿠잔일본어, 산난을 南山|난잔일본어으로 표기하면서[3] 오늘날에는 이 명칭들이 함께 사용된다. 따라서 산난과 난잔, 산호쿠와 호쿠잔은 같은 대상을 가리킨다.

'산잔'의 '산(山)'은 오키나와 본섬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류큐에서는 야에야마(八重山), 미야코야마(宮古山), 구메야마(久米山)처럼 섬 이름에 '야마(山)'를 붙여 부르는 경우가 있었으며[3], 이는 섬을 '산'으로 칭하는 중국의 관습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실제로 당시 명나라가 '류큐(琉球國)'라고 부른 것도 처음에는 오키나와 본섬만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그러나 류큐 왕국 시대에 편찬된 역사서와 달리, 오키나와 고유의 노래집인 『오모로 소시』(1623년 편찬)에는 '산잔', '호쿠잔', '츄잔', '난잔'과 같은 명칭이 전혀 등장하지 않으며, 섬이 세 개의 세력으로 나뉘었다는 인식도 보이지 않는다. 이 기록에서는 북부 지역의 통치자를 '나키진의 아지', 남부 지역 통치자를 '오자토의 아지' 또는 下の世の主|시모노 요노 누시일본어 등으로 칭하고 있어[7], 후대의 역사서에서 정립된 '삼산' 개념과는 차이를 보인다.

또한, 후대의 일부 연구자들은 삼산 시대의 구분이나 통일 과정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제시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와다 히사노리는 명나라 기록에 삼산 통일이 명확히 언급된 것이 아니라 단지 난잔과 호쿠잔의 조공이 중단된 사실만 기록되었을 뿐이라며, 통일이라는 역사적 사실 자체의 존재에 의문을 제기했다.[8] 이시이 노조무는 삼산 시대 구분이 명나라 측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을 수 있으며, 소위 '통일' 역시 실제 통일이라기보다는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 변화를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9] 심지어 15세기 후반부터 17세기까지의 기록 중에는 류큐인 스스로 삼산 분립이나 통일에 대해 알지 못했음을 시사하는 내용도 존재한다.[10]

3. 각 세력의 성립과 발전

14세기 초 오키나와 본섬에서는 각 지역에서 구스쿠(성)를 기반으로 세력을 키운 안지(按司)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점차 통합되어 14세기 중반에는 북부의 호쿠잔(北山), 중부의 츄잔(中山), 남부의 난잔(南山)이라는 세 개의 정치 세력으로 나뉘어 경쟁하는 산잔 시대(三山時代)가 시작되었다.[6] 이 세력들은 약 100년간 공존하며 각축을 벌였다.

세력의 명칭에 대해, 명나라 기록에는 주로 山北|산호쿠일본어, 츄잔, 山南|산난일본어으로 기록되었으나, 후대 류큐 왕국의 역사서 『추잔 세보』 등에서는 호쿠잔, 난잔으로 표기하면서 두 명칭이 함께 사용되었다.[3] '산(山)'은 오키나와 본섬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여겨진다.

류큐의 공식 역사서들은 본래 에이소 왕조의 타마구스쿠 왕 통치하에 단일 왕국이었으나, 그의 사후 지배력이 약화되면서 북부의 하니지가 호쿠잔(나키진 거점)을, 남부의 오사토가 난잔(오자토 성 거점)을 세웠다고 설명한다.[3] 츄잔은 우라소에를 중심으로 발전하다 슈리로 중심지를 옮겼으며[3], 1372년 명나라와 가장 먼저 조공 관계를 맺었다.[3] 그러나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15세기 통일 이전의 단일 왕국 존재 여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3], 고대 가요집인 『오모로 소시』에도 삼국 분립에 대한 명확한 인식은 보이지 않는다.[7]

각 세력은 독자적으로 주변국과 교류했으나, 15세기 초 츄잔의 쇼하시가 세력을 키워 1416년 호쿠잔, 1429년 난잔을 정복하고 오키나와 본섬을 통일하여 류큐 왕국 시대를 열었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통일 과정과 시기, 그리고 삼산 시대의 종결 자체에 대해서는 명나라 기록 해석의 차이 등으로 인해 다른 견해도 존재한다.[8][9][10]

3. 1. 호쿠잔 (北山, 산호쿠)

호쿠잔은 산잔 시대에 오키나와 본섬 북부를 지배했던 세력이다.[3] 나키진을 거점으로 삼았다. 중국 측 기록에는 주로 산호쿠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지만, 18세기 류큐 왕국의 학자 사이 온이 편찬한 역사서 『추잔 세이후』에서 호쿠잔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이후 함께 쓰이게 되었다.[3]

1322년?부터 1416년까지 하니지 왕조가 통치했다고 알려져 있다. 류큐에서 편찬된 주요 역사서인 『추잔 세이칸』(1650)이나 사이 타쿠의 『추잔 세이후』(1701) 초기 판본에는 초대 왕인 하니지 외의 구체적인 왕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3] 이후 사이 온이 중국 측 사료를 바탕으로 『추잔 세이후』를 개정하면서 한안치라는 왕의 이름을 추가했다.[3] 그러나 류큐 고유의 노래와 시가를 모은 『오모로 소시』(1623)에서는 호쿠잔의 지배자를 '나키진의 아지'라고만 칭할 뿐, 별도의 왕국이나 왕조로 인식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7]

『추잔 세이칸』에 따르면 호쿠잔의 세력 범위는 하네지, 나고, 쿠니가미, 킨, 이에, 이헤야 등 오키나와 북부 지역을 포함했다.[3]

호쿠잔의 멸망 시점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차이가 있다. 사이 온은 중국과의 마지막 조공 기록(1416년)을 근거로, 1416년 추잔의 쇼하시에게 정복되었다고 기록했다.[1][3] 반면,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추잔 세이칸』은 1422년에 쇼하시가 호쿠잔 왕을 살해했다고 기술하고 있다.[1][3] 현대의 일부 연구자들은 중국 기록에 의존한 사이 온의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1][3]

3. 2. 츄잔 (中山)

츄잔(中山)은 오키나와 본섬 중부에 위치했으며, 우라소에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츄잔을 통치한 주요 왕조는 다음과 같다.

츄잔을 포함한 산잔 시대의 역사는 주로 수 세기 후 류큐 왕국 시대에 편찬된 역사서들을 통해 전해진다. 주요 기록으로는 ''추잔 세이칸''(1650), 사이 타쿠의 ''추잔 세이후''(1701), 사이 온이 개정한 ''추잔 세이후''(1724년 이후), ''큐요''(1745) 등이 있다.[6] 이 사서들은 오키나와의 역사적 전통을 반영하려 했으나, 상반된 자료를 조화시키는 과정에서 내용이 수정되기도 했다. 특히 사이 온은 중국 자료를 바탕으로 아버지 사이 타쿠의 ''추잔 세이후''를 대폭 수정하여 현대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그 역사적 가치가 일부 훼손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6] 한편, 시집인 ''오모로 소시''(1623) 역시 당시 오키나와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역사서에 따르면, 츄잔의 왕 타마구스쿠 사후 왕위 계승 과정에서 혼란이 있었고, 1350년 우라소에의 통치자였던 삿토가 왕위에 올랐다.[3] 삿토는 미천한 농부와 백조 처녀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신화적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그의 존재 자체는 동시대 자료에서도 확인된다.[3] 삿토 왕은 1372년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 관계를 맺기 시작했으며[3], 이는 류큐 역사상 중요한 외교적 전환점이었다. 또한 그의 통치 기간에 처음으로 남쪽의 미야코 제도야에야마 제도로부터 조공을 받았다.[3] 삿토는 1395년 아들 부네이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3]

1405년 혹은 1406년, 츄잔 남부 사시키 지역의 아지였던 쇼하시가 세력을 키워 츄잔 왕 부네이를 몰아내고 츄잔 왕국의 실권을 장악했다. 쇼하시의 츄잔 정복 시기와 과정에 대해서는 역사서마다 기록이 조금씩 다르다.

  • 가장 오래된 ''추잔 세이칸''은 쇼하시가 1421년에 부네이를 몰아내고 츄잔 왕이 되었다고 기록한다.[1][3]
  • 사이 타쿠의 ''추잔 세이후''는 이 시기를 1405년으로 앞당겨 기록하며, 쇼하시가 직접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니라 아버지 쇼시쇼를 왕으로 세웠다고 주장한다. 쇼하시는 쇼시쇼가 사망한 1421년에야 왕위를 계승했다고 한다.[1][3]
  • 사이 온의 ''추잔 세이후''는 쇼하시가 1406년에 츄잔을 정복하고 아버지 쇼시쇼를 왕위에 앉혔으며, 쇼시쇼 사후 왕위를 계승했다고 기록한다.[1][3]


이러한 기록 차이는 후대 편찬자들이 중국 측 기록과 오키나와 자체 전승을 조화시키려 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1][3]

''추잔 세이칸''에 따르면 츄잔 왕은 나하, 토마리, 우라소에, 차탄, 나카구스쿠, 고에쿠, 요미탄잔, 구시카와, 카츠렌 등을 통치했으며, 결국 슈리를 정복하여 수도로 삼았다.[3] 문헌 및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슈리가 수도가 되기 전에는 우라소에가 츄잔의 중심지였다.[3]

3. 3. 난잔 (南山, 산난)

오키나와 본섬 남부를 지배했던 세력으로, 산잔 시대의 삼국 중 하나이다. 오사토 왕조(1337년? ~ 1429년)가 통치했으며, 오자토 성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중국의 기록에는 山南|산난일본어으로 표기되었으나, 18세기 사이 온이 편찬한 『추잔 세이후』에서 南山|난잔일본어으로 변경하면서 두 명칭이 혼용되었다.[3] 류큐의 공식 역사서인 『추잔 세이칸』(1650), 『추잔 세이후』(1701, 1724년 이후 개정판), 『큐요』(1745) 등은 후대에 기록되었으며, 특히 사이 온은 중국 자료를 바탕으로 내용을 상당 부분 수정하여 역사적 가치에 대한 논란이 있다.[6] 이들 역사서는 타마구스쿠 왕의 통치력이 약화되자 남부의 아지들이 오자토 아지를 중심으로 독립하여 난잔을 세웠다고 설명하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15세기 통일 이전 오키나와에 단일 왕권이 존재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3] 한편, 고대 가요집인 『오모로 소시』(1623)에는 삼국 분립에 대한 인식이 나타나지 않으며, 난잔의 왕은 '오자토의 아지' 또는 下の世の主|시모노 요노 누시일본어 등으로 불렸다.[7]

난잔의 중심지인 오자토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현대의 난조시에 있는 시마소에오자토(島添大里)와 이토만시에 있는 시마지리오자토(島尻大里) 두 곳이 거론된다. 『추잔 세이후』는 시마소에오자토 아지를 난잔 왕으로 언급하면서도, 수도는 시마지리오자토로 기록하는 모순을 보인다.[3]

『추잔 세이칸』 등 초기 류큐 역사서에는 오자토 아지의 개인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명나라와의 교류 기록에는 쇼삿토(承察度), 오오소(汪応祖), 타로마이(達勃期) 등의 이름이 남아있으나[3], 이 중 오오소와 타로마이는 사이 온이 중국 기록을 바탕으로 『추잔 세이후』에 추가한 이름이다.[3]

『추잔 세이칸』에 따르면 난잔은 다음과 같은 11개 지역을 지배했다고 한다.[3]

지역 구분해당 지역
남부 지역사시키, 치넨, 타마구스쿠, 구시키미, 코친다, 시마지리오자토, 캰, 마부니, 마카베, 카네구스쿠, 토미구스쿠



난잔의 멸망 시점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차이가 있다. 『추잔 세이칸』은 추잔의 쇼하시가 1402년에 난잔 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위를 칭했다고 기록한 반면[1][3], 사이 온의 『추잔 세이후』는 쇼하시가 1429년에 난잔을 정복했다고 기록했다.[1][3] 이는 명나라와의 마지막 조공 기록(1429년)을 근거로 추정한 것으로 보인다.[1][3] 일반적으로는 1429년 쇼하시에 의해 멸망하고 류큐 왕국으로 통일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와다 히사노리[8]나 이시이 노조무[9] 등 일부 연구자들은 명나라와의 조공 기록 단절이 곧 멸망이나 통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며 삼산 통일 자체의 실재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10] 난잔은 오사토 왕조(1337년? ~ 1429년)가 다스렸다.

4. 대외 관계

산잔 시대의 대외 관계는 주로 동시대 중국과 일부 한국의 외교 기록을 통해 파악할 수 있으며, 오키나와 자체의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이 기록들은 단편적이며 외교적 목적에 따라 실제 상황과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1]

14세기 후반, 명나라류큐국(琉球國)으로 칭한 오키나와에 사신을 보내 조공 관계를 요구했고, 이에 추잔, 난잔, 호쿠잔의 세력이 각각 명나라와 독자적인 외교 관계를 맺었다. 명나라는 이 세 세력을 '왕'으로 인정하고 상호 평화를 요구하기도 했다.[2] 이들 중 추잔이 가장 활발하게 명나라와 교류했으며, 각 세력의 조공 기록에는 선박 지원 여부나 사절단 구성 등에서 의문점도 제기된다.[1][2][4][5]

조선의 ''조선왕조실록''에도 산잔 시대 류큐와의 교류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는 때때로 중국 측 기록과 상충되는 내용을 담고 있어 당시 외교 문서의 신뢰성에 대한 논의를 불러일으킨다.[2] 일본과의 관계는 아시카가 막부 쇼군이 '류큐국의 요노누시'(りうきう國のよのぬし|류큐코쿠노 요노누시jpn)에게 보낸 답장 기록 등 매우 제한적으로 확인된다.[3]

이러한 단편적인 기록들을 바탕으로 산잔 시대의 대외 관계를 재구성하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으나, 특히 1429년 쇼하시에 의한 삼산 통일설에 대해서는 명나라 기록에 명확한 언급이 없고 후대 기록과도 모순되는 점이 있어, 통일의 실재 여부나 그 성격에 대해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다양한 해석과 논쟁이 존재한다.[1][8][9][10]

4. 1. 중국과의 관계

명실록에 따르면, 1372년 새로 건국된 명나라는 "류큐국(琉球國)"이라 부른 오키나와에 사신을 보내 조공 관계를 맺으려 했다.[1] 이에 추잔(中山)의 왕 삿토(察度)가 가장 먼저 동생 타이키(泰期)를 보내 조공을 시작했다. 이후 1380년에는 난잔(山南)의 왕 쇼삿토(承察度)가, 1383년에는 호쿠잔(山北)의 왕 하니시(怕尼芝)가 명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산난', '산호쿠'라는 명칭은 추잔 중심적인 시각에서 붙여진 것으로 보이며, 누가 처음 사용했는지는 불분명하다.

명나라는 1382년 오키나와를 방문한 사신의 보고를 통해 이 지역에 세 명의 통치자가 분쟁 중임을 인지했다. 1383년 명실록 기록에 따르면, 명나라는 이들 세력 모두를 '왕'으로 인정하고 평화를 요구했다.[2]

각 왕국의 교류 양상은 다음과 같았다.

  • 호쿠잔: 하니시(怕尼芝), 민(珉), 한안치(攀安知) 세 왕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나 혈연관계는 불명확하며, 1416년을 마지막으로 명나라와의 외교 기록이 끊긴다.[2]
  • 난잔: 쇼삿토 왕의 이름으로 된 사절은 1380년부터 1396년까지 이어졌고, 이후 왕의 숙부(王叔) 오에이시(汪英紫), 쇼삿토의 동생 또는 사촌이라 주장한 오오소(汪応祖), 그리고 오오소를 살해했다고 보고한 태자 타로마이(他魯毎) 순으로 왕위를 이으며 1429년까지 사신을 보냈다.[2]
  • 추잔: 호쿠잔이나 난잔보다 훨씬 자주 명나라에 사신을 보냈으며, 1382년 이후로는 거의 매년 한두 차례 조공을 바쳤다. 또한 왕 대신 태자가 사신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삿토 사후에는 분(武寧), 시쇼(思紹), 쇼하시(尚巴志) 순으로 왕위 계승을 명나라에 보고하고 책봉을 받았다.[3]


그러나 이러한 삼국 각자의 조공 외교 기록에는 의문점도 제기된다. 명나라는 추잔과 난잔 왕에게는 선박과 선원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호쿠잔 왕에게는 그러한 기록이 없다. 이는 호쿠잔 사절단이 대부분 추잔 사절단과 같은 시기에 파견된 이유를 설명할 수 있으며, 두 세력 간의 독립성에 의문을 갖게 한다. 심지어 사절단 구성원이 공유된 정황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1392년 난잔 왕 쇼삿토의 조카(姪) 자격으로 파견된 상구루미(三吾良亹)라는 인물은 1403년에는 추잔 왕 삿토의 조카(従子)로, 1404년에는 추잔 왕 분의 조카(姪)로 다시 등장한다. 역사학자 와다 히사노리는 이를 동명이인으로 보기도 했지만, 난잔 왕 타로마이가 보낸 사절과 선박이 추잔의 것과 명백히 겹친다는 점은 인정했다.[1][2][4][5]

1429년 난잔의 조공 중단 이후, 명나라 기록에서는 호쿠잔과 난잔의 사신 파견이 중단되었다는 사실만 나타날 뿐, '삼산 통일'에 대한 명시적인 언급은 없다. 추잔 왕은 이후에도 계속 '추잔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1] 역사학자 와다 히사노리는 이를 근거로 삼산 통일이라는 사건 자체가 실재하지 않았을 수 있으며, 단지 호쿠잔과 난잔이 명나라와의 직접적인 외교를 중단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8] 이시이 노조무는 더 나아가, 삼산 시대라는 구분 자체가 명나라 측의 시각, 특히 정화와 같은 이슬람 환관들이 주도한 무역 네트워크의 관점에서 형성된 것일 수 있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1429년 이후 조공이 중단된 것은 오키나와의 통일보다는 명나라 내부의 정치·무역 정책 변화(이슬람 환관 세력 약화)를 반영할 뿐이며, 실제 류큐는 이후에도 오랫동안 분쟁이 계속되었다고 해석한다.[9] 실제로 후대의 기록들, 예를 들어 1461년 명나라의 『대명일통지』에서 "근래에는 추잔만 조공하니 삼산은 추잔에 통일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성 기록이나, 1466년 복건 출신 인사가 류큐인이 "류큐는 삼산이다"라고 말했다고 기록한 것, 1523년 류큐 승려가 삼산에 대해 들어본 적 없다고 말한 것, 1683년 청나라 책봉사가 류큐인들에게 삼산에 대해 물었을 때 아는 이가 없었다는 기록 등은 삼산 시대나 통일에 대한 인식이 류큐 내부에서 보편적이지 않았거나 시간이 지나며 희미해졌을 가능성을 시사한다.[10]

4. 2. 한반도와의 관계

조선의 ''조선왕조실록''에는 산잔 시대 류큐 왕국과 조선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기록이 일부 남아있다. 1394년, 추잔의 왕 삿토조선에 사신을 보내 난잔의 왕자 쇼삿토(承察度)가 조선으로 도망쳤으니 송환해 달라고 요청했다.[2] 1398년에는 난잔의 왕 온사도(温沙道)가 추잔 왕에게 쫓겨나 조선으로 망명했으나 그 해에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다.[2]

이러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명실록중국 측 기록과 명백히 모순되는 부분이 있어, 당시 류큐 각 세력이 작성한 외교 문서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2]

또한, 1418년에는 추잔 왕의 둘째 아들인 가쓰렌(嘉津宇)이 조선과의 교역을 요청하며 중국동남아시아 상품을 실은 배를 보냈다는 기록도 ''조선왕조실록''에 남아있다. 다만, 이 가쓰렌이라는 인물의 정확한 정체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4. 3. 일본과의 관계

1416년, 아시카가 쇼군은 ''유구국(琉球國)의 요노누시''(りうきう國のよのぬし|류큐코쿠노 요노누시일본어)에게 답장을 보냈다. 이 기록은 일본 측에만 남아 있는 희귀한 자료이다.[3]

5. 류큐 통일

츄잔의 사시키 안지(按司)였던 쇼하시(尙巴志)는 세력을 점차 확장하여 1405년경 츄잔 지역을 장악했다.[1][3] 이후 1416년에는 호쿠잔(北山, 또는 산호쿠 山北)을 멸망시켰고,[1][3] 1429년에는 난잔(南山, 또는 산난 山南)마저 정복하여 마침내 오키나와 본섬을 통일하고 류큐 왕국의 기틀을 다졌다.[1][3] 이로써 약 1세기 동안 이어져 온 삼산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류큐의 통일 과정에 대한 기록은 역사서마다 차이를 보인다.


  •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추잔 세이칸』(1650)에 따르면, 쇼하시는 1402년 아버지 시쇼(尙思紹)의 뒤를 이어 사시키 안지가 된 후, 먼저 난잔을 정복하고 그 칭호를 얻었다. 이후 1421년에 츄잔 왕 부네이를 몰아내고 츄잔 왕이 되었으며, 마지막으로 1422년에 호쿠잔 왕을 살해했다고 한다.[1][3]
  • 사이 타쿠가 편찬한 『추잔 세이후』(1701)는 대체로 『추잔 세이칸』의 내용을 따르지만, 쇼하시가 츄잔을 정복한 시기를 16년 앞당겨 기록했다. 또한 쇼하시 자신이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니라 아버지 시쇼를 츄잔 왕으로 추대했으며, 쇼하시는 아버지 시쇼가 사망한 1421년 이후에야 츄잔 왕위를 계승했다고 서술한다.[1][3]
  • 사이 온이 개정한 『추잔 세이후』(1724년 이후)에서는 쇼하시가 1406년에 츄잔을 정복하고 아버지 시쇼를 왕위에 앉혔으며, 이후 1416년에 호쿠잔을, 1429년에 난잔을 정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명나라와의 마지막 조공 기록(호쿠잔 1416년, 난잔 1429년)을 근거로 각 세력이 멸망한 시기를 추정한 것으로 여겨진다.[1][3]


한편, 쇼하시에 의한 1429년 삼산 통일은 일반적으로 통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이에 대한 의문과 반론도 제기된다.

  • 역사학자 와다 히사노리는 초기 『명실록』이나 『역대보안』과 같은 중요한 동시대 사료에 삼산 통일 사실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했다. 단순히 난잔에서 보내는 사신 기록이 1429년 이후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통일이 이루어졌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8]
  • 이시이 노조무는 삼산 통일설 자체가 1456년 중국에서 편찬된 『환우통지』에서 "츄잔 왕만이 계속 조공을 바치니, 산난과 산호쿠는 츄잔에 병합되었을 것이다"라고 추측한 기록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것이 실제 통일이라기보다는, 정화의 원정 등으로 대표되는 명나라 초기 환관 중심의 해외 무역 시대가 끝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일 뿐이며, 1429년 이후에도 류큐 내부에서는 여전히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고 본다. 류큐의 실질적인 통일성 강화는 가네마루(훗날의 쇼엔 왕)가 집권하고 사쓰마번의 무역 통제가 강화된 제2차 쇼씨 왕조 시대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다는 견해이다.[9]
  • 이 외에도 삼산 통일설과 배치되는 기록들이 존재한다. 1461년 명나라의 『대명일통지』에서는 여전히 통일을 추측하는 수준으로 기술했고, 1466년 복건 출신 문인 황택은 자신의 저서 『기산옹문집』에서 류큐 출신 통역관 양응에게 "류큐는 삼산이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기록했다. 또한 1523년 류큐의 승려 쓰루오는 교토에서 삼산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으며(쓰루오 자명 기록), 1683년 류큐에 파견된 청나라 책봉사 왕즙(王楫)은 구메무라의 중국계 후손(통역관)들을 통해 삼산 시대 왕들에 대해 물었으나 아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고 기록했다(왕즙, 『사류큐잡록』 권2).[10] 이러한 기록들은 1429년 통일설에 대한 의문을 더한다.

6. 산잔 시대에 대한 논쟁

산잔 시대와 쇼하시에 의한 삼산 통일의 실체에 대해서는 현대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다양한 해석과 논쟁이 존재한다.

사이 온과는 달리, 와다 히사노리는 류큐의 역사서 『추잔 세이후』 기록에 더 무게를 두어 해석했다. 그는 타로마이를 쇼하시의 장남으로 보고, 산난(山南) 왕 타로마이가 실제로는 추잔(中山)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고 주장했다. 와다에 따르면, 쇼하시는 1403년에 산난 왕을 교체하고, 1405년에는 추잔 왕 부네이를 몰아낸 뒤 아버지 시쇼를 왕위에 앉혔다. 이후 1415년 아들 타로마이에게 산난 왕 칭호를 주었고, 1422년 시쇼의 뒤를 이어 추잔 왕이 되었다. 그는 쇼하시가 1429년경 타로마이 사망 후 산난을 공식적으로 폐지했으며, 그전까지 명목상 유지한 이유는 산난 왕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던 명나라와의 조공 무역 이익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고 보았다.[1]

이쿠타 시게루는 더욱 급진적인 해석을 내놓았다. 그는 오키나와의 후대 기록들을 단순한 전설로 간주하며, 산난 왕은 처음부터 추잔 왕의 지배하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산호쿠(山北)와 추잔의 관계는 명확히 규정하지 않았지만, 이들 '왕'의 존재 자체가 명나라해금 정책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명나라 시기 제한된 조공 무역 체제 하에서, 실제로는 추잔 세력이 산난과 산호쿠라는 명의를 빌려 중국과의 무역을 독점했으며, 오키나와의 국제 무역 중요성이 줄어들면서 이 이름들이 점차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2]

한편, 류큐 측 기록과 명나라 측 기록에서 삼산의 명칭 표기에 차이가 나타난다. 중국의 『명실록』, 『명사』 등에는 추잔(中山), 산난(山南), 산호쿠(山北)로 기록되어 있으나, 후대의 류큐 역사서인 『추잔 세보』 등에서는 추잔의 표기에 맞춰 난잔(南山), 호쿠잔(北山)으로 쓰기도 했다. 따라서 사료에 따라 두 명칭이 혼용되어 나타나며, 어느 쪽을 사용해도 무방하다. 또한 '산(山)'이라는 명칭은 당시 야에야마(八重山), 미야코야마(宮古山)처럼 오키나와 본섬 자체를 가리키는 표현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는 섬을 '산'으로 칭하는 중국의 관습과도 연관이 있을 수 있다.

1429년 삼산 통일설 자체에 대해서도 사료 해석의 차이와 부족 등을 근거로 그 실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비판적인 견해가 존재한다.[8][9] 일부 후대 기록에서는 통일 이후에도 삼산이 병존하는 듯한 정황이 나타나기도 한다.[10] 이처럼 다양한 해석과 상반되는 기록들은 산잔 시대의 실체와 그 종결 과정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6. 1. 삼산 통일 부정론

와다 히사노리는 1429년 삼산 통일설에 대해, 초기의 『명실록』이나 『역대보안』과 같은 주요 사료에 삼산 통일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는 단지 난잔(산난)이 명나라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1429년 이후 사라졌을 뿐이며, 이를 근거로 삼산 통일이라는 역사적 사실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8]

이시이 노조무 역시 삼산 통일설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인다. 그는 삼산 통일설이 처음 등장한 것은 1456년에 편찬된 『환우통지』 권백십육 류큐국조의 기록이라고 본다. 해당 기록에는 "영락 연간에 책봉을 받았지만, 이후 오직 추잔왕(中山王)만이 조공을 계속해왔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끊이지 않으니, 산난과 산호쿠 두 왕은 아마도 추잔왕에게 병합되었을 것이다"라는 추측성 내용이 담겨 있다. 이시이는 이를 근거로 당시 명나라에서는 류큐의 실제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했고, 단지 난잔과 호쿠잔의 조공이 끊겼다는 사실만을 인지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그는 삼산 시대가 명나라 측에서 보면 정화와 같은 이슬람 출신 환관들이 주도한 무역 시대였으며, 1429년의 소위 '통일'은 이러한 환관 주도의 무역 시대가 끝났음을 의미할 뿐, 실제적인 정치적 통일과는 거리가 멀다고 해석한다. 그는 1429년 이후에도 류큐 내에서는 분쟁이 계속되었으며, 진정한 의미의 통일성은 쇼엔 시대 이후 사쓰마의 무역 통제 강화를 통해 점차 확립되었다고 본다.[9]

이 외에도 삼산 시대와 그 통일을 부정하는 듯한 기록들이 존재한다.

  • 1461년 명나라에서 편찬된 『대명일통지』에는 "근래에는 추잔만이 조공하러 오니, 삼산은 추잔에 통일되었을 것이다"라고 추측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 1466년 복건성 출신 문인 황택(黃澤)이 쓴 글에는, 구메무라 출신의 통역관 양응(梁應)이 복주에서 "류큐는 삼산이다"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당시에도 삼산이 병존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 1523년 류큐의 선승(禪僧) 쓰루오(鶴翁)가 헤이안쿄에 갔을 때, 삼산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 1683년 책봉사로 류큐에 파견된 왕협(汪楫)이 구메무라의 통역관들에게 삼산의 왕들에 대해 물었으나,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기록했다.[10]

6. 2. 삼산 통일 긍정론

오키나와의 주요 역사서들은 산잔 시대가 실존했으며, 쇼하시에 의해 삼산(三山)이 통일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삼산 시대와 통일의 존재를 긍정하는 주요 근거이다. 대표적인 역사서로는 『추잔 세이칸』(1650), 사이 타쿠의 『추잔 세이후』(1701), 사이 온이 개정한 『추잔 세이후』(1724년 이후), 그리고 『큐요』(1745) 등이 있다.[6] 이 문헌들은 쇼하시가 각지의 안지(按司) 세력을 통합하여 류큐 왕국의 기초를 다진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다만, 삼산 통일의 구체적인 과정에 대해서는 역사서마다 기록의 차이가 나타난다.

  • 가장 오래된 『추잔 세이칸』에 따르면, 쇼하시는 1402년 아버지 시쇼의 뒤를 이어 사시키의 아지가 된 후, 먼저 山南|산난일본어 왕을 정복했다. 이후 1421년에는 추잔의 왕 부네이를 몰아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으며, 마지막으로 1422년에 山北|산호쿠일본어 왕을 살해함으로써 통일을 완수했다고 한다.[1][3]
  • 사이 타쿠가 편찬한 『추잔 세이후』는 대체로 『추잔 세이칸』의 내용을 따르지만, 쇼하시가 추잔을 정복한 시점을 1405년경으로 앞당겨 기록했다. 또한 쇼하시가 직접 왕위에 오르지 않고 아버지 시쇼를 추잔의 왕으로 세웠으며, 쇼하시 본인은 1421년 시쇼가 사망한 후에야 왕위를 계승했다고 설명한다.[1][3]
  • 사이 온이 개정한 『추잔 세이후』는 앞선 두 기록과 차이가 크다. 이 책에서는 쇼하시가 1406년에 추잔을 정복하여 아버지 시쇼를 왕위에 앉혔고, 이후 1416년에 北山|호쿠잔일본어(사이 온이 사용한 명칭[3])을, 1429년에 南山|난잔일본어(사이 온이 사용한 명칭[3])을 차례로 정복했다고 기술한다. 이는 명나라와의 마지막 조공 기록(호쿠잔 1416년, 난잔 1429년)을 근거로 각 세력의 멸망 시점을 추정한 것으로 여겨진다.[1][3]


이처럼 통일 과정에 대한 세부적인 기록에는 차이가 있지만, 오키나와의 주요 역사서들이 공통적으로 쇼하시에 의한 삼산 통일이라는 역사적 사건 자체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은 삼산 시대의 존재와 그 통일을 긍정하는 중요한 논거로 작용한다. 비록 후대에 기록되었고, 상반된 자료를 조화시키려는 시도나 중국 측 자료의 영향[6] 등으로 인해 기록의 완전한 정확성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검토가 필요하지만, 통일이라는 큰 틀의 역사적 사실은 오키나와 자체의 기록을 통해 전승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7. 산잔 시대 이후

산잔 시대 각 왕국의 영지는 1896년 군제 시행에 따라 구니가미군, 나카가미군, 시마지리군의 3개 으로 재편되었다. 이는 본토와 달리 오키나와에 군이 설치된 첫 사례이다. 현재 군의 범위는 다소 변경되었지만, 구니가미, 나카가미, 시마지리라는 지역 구분은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또한, 오키나와의 북부·중부·남부 3개 광역 시정촌 권역 역시 이 구분과 거의 일치한다.

한편, 16세기 포르투갈 지도에 나타나는 Reyes Magos|레이스마고스por 또는 Reys Mages|레이스마고스por는 일반적으로 동방 박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시이 노조무는 이것이 류큐 삼산을 가리킨다는 새로운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다.[11]

참조

[1] 서적 Ryūkyū-ōkoku no keisei
[2] 논문 Ryūkyū-koku no "Sanzan tōitsu"
[3] 서적 Okinawa-ken no rekishi
[4] 서적 Chūsei Nantō tsūkō bōekishi no kenkyū
[5] 서적 Ryūkyū-ōkoku no keisei
[6] 서적 Okinawa kinsei-shi no shosō
[7] 서적 Koe to katachi no Ainu Ryūkyū-shi
[8] 서적 琉球王国の形成・三山統一とその前後 榕樹書林
[9] 논문 驚愕の古琉球史 https://ci.nii.ac.jp[...]
[10] 뉴스 小チャイナと大世界 https://www.shimbun-[...] 八重山日報 2024-11-10
[11] 논문 驚愕の古琉球史 https://ci.nii.ac.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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