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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전투 (19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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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상주 전투는 1950년 한국 전쟁 중 미국 제25보병사단과 조선인민군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북한의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에서 유엔군은 한국을 지원하기 위해 참전했고, 미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한 일환으로 상주 지역에 투입되었다. 전투 과정에서 미군 제24보병연대는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논란이 되었고, 이는 당시 미군 내 인종차별 문제와 연결되어 논의되었다. 전투 결과, 미군은 낙동강 방어선 구축을 위해 철수했으며, 이후 제24보병연대는 흑인 부대라는 이유로 낮은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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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전투 (1950년)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분쟁한국 전쟁
전투명상주 전투 (Sangju Battle)
날짜1950년 7월 20일 – 1950년 7월 31일
장소경상북도 상주
결과북한군의 승리, 상주 함락
교전 세력
유엔군미국
대한민국
조선인민군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휘관
유엔군윌리엄 B. 킨
백선엽
조선인민군박성철
병력 규모
유엔군미국: 13,059명
대한민국: 5,727명
조선인민군7,500명
피해 규모
유엔군27명 전사, 293명 부상, 3명 실종
약 2,500명 사상 및 실종
조선인민군약 2,500명 사상, T-34 전차 17대 손실
참전 부대
유엔군25 보병사단
1 보병사단
조선인민군15 보병사단
지원 정보
미국 포병 부대제8포병대대
제64포병대대
제159포병대대
제90포병대대 A포대
제61포병대대
제77포병대대
제82포병대대
제99포병대대
제92공포대대 A포대
미국 전차 부대제79전차대대 A중대
제71전차대대 A중대
미국 공병 부대제72전투공병대대
제8전투공병대대
미국 기갑 부대제5기갑연대
제7기갑연대
제8기갑연대
관련 전투
좌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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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임진왜란의 전투에 대해서는 상주 전투 (1592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 배경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극동 주둔 미군은 꾸준히 감소했다. 한국에 가장 가까운 병력은 일본에 사령부를 둔 미국 제8군 예하 미국 제24보병사단이었는데, 병력과 장비가 부족한 상태였다.[1] 제24보병사단은 조선인민군의 진격을 막는 임무를 위해 한국으로 출동했다.[1]

미국 제7보병사단, 미국 제25보병사단, 미국 제1기병사단 등 다른 유엔군이 도착하기 전까지 제24보병사단은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 조선인민군의 진격을 지연시켰다.[2] 이 과정에서 한국군은 패배하여 남쪽으로 후퇴했고, 제24보병사단은 오산 전투에서 첫 패배를 겪은 후, 조치원 전투, 천안 전투, 평택 전투 등에서 계속 밀려났다.[3][4] 대전 전투에서 큰 피해를 보았지만, 7월 20일까지 조선인민군의 진격을 늦추었다.

7월 12일 부산에 상륙한 미국 제25보병사단은 미국 제8군의 명령에 따라 중부 전선에서 한국군을 지원하는 임무를 맡았다.[1] 윌리엄 B. 킨 소장의 지휘 아래 7월 22일경부터 전선에 투입되었다.[1] 킨 소장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로 1918년 11월 1일 미국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임관한 "생도 장교" 중 한 명이었다.[1]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오마르 브래들리 장군의 부대에서 참모장으로 근무했고, 1948년 9월, 참모총장이 된 브래들리 장군은 킨 준장을 제25보병사단장에 임명했다.[1]

제25보병사단은 27, 24, 35연대로 구성되었다. 27연대는 우수한 지휘관과 병사들을 보유했지만, 24연대는 흑인 병사와 백인 장교들로 구성되어 전투력 평가가 좋지 않았다. 35연대는 평화 시 점령군 임무에 익숙한 병사들로 구성되었다.[1]

7월 18일 미국 제1기병사단이 포항에 상륙하면서, 제25보병사단은 상주 정면의 한국군 지원 임무에 전념하게 되었다.[1] 월턴 워커 제8군사령관은 제25보병사단의 전투력을 높게 평가하지 않아 제1기병사단에게 경부 본선을 맡도록 했다.[1]

2. 1. 전쟁 발발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극동에 주둔한 미군은 꾸준히 감소해 왔다. 당시 가장 가까운 병력은 일본에 사령부를 둔 미국 제8군의 미국 제24보병사단이었다. 제24보병사단은 병력이 부족했고, 대부분의 장비는 군사비 지출 감소로 인해 노후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4보병사단은 한국으로 출동 명령을 받았다.[1]

제24보병사단은 북한군의 진격을 막는 최초의 "충격 부대"로 투입되어, 몇 주 동안 고립된 채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 싸웠다.[2] 미국 제7보병사단, 미국 제25보병사단, 미국 제1기병사단 및 기타 제8군 지원 부대 등 더 많은 유엔군이 도착하여 위치를 잡는 동안, 제24보병사단은 훨씬 더 큰 규모의 조선인민군 부대의 진격을 지연시켰다. 그동안 한국군은 체계적으로 패배하여 한국 동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후퇴했고, 전 사단이 조선인민군의 우수한 화력과 장비에 의해 붕괴되었다.[2] 제24보병사단의 선두 부대는 7월 5일 오산 전투에서 미국과 북한군 사이의 첫 번째 전투에서 참패했다.[3] 오산 전투 이후 첫 한 달 동안, 제24보병사단 병사들은 조선인민군의 우세한 병력과 장비에 의해 반복적으로 패배하고 남쪽으로 밀려났다.[4] 제24보병사단의 연대들은 조치원 전투, 천안 전투, 평택 전투 주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체계적으로 남쪽으로 밀려났다.[4] 제24보병사단은 대전 전투에서 마지막 방어선을 구축하여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지만, 7월 20일까지 조선인민군의 진격을 지연시켰다. 그 무렵, 제8군 전투 병력은 양측 모두 약 7만 명으로, 이 지역을 공격하는 북한군과 거의 대등해졌으며, 새로운 유엔 부대가 매일 도착했다.

2. 2. 미 제25보병사단 투입

미 제24보병사단에 이어 한국전쟁에 투입된 미군 부대는 제25보병사단이었다. 제25보병사단은 예하에 24, 27, 35연대를 두고 있었으며, 7월 12일 부산에 상륙했다.

7월 13일부터 한국에서 유엔군의 작전을 지휘하게 된 미 제8군사령부는 제25보병사단에게 1개 대대로 포항 비행장을 경비하고, 나머지 병력으로는 중부 전선에서 조선인민군의 진격을 막고 있던 한국군을 지원하는 임무를 부여했다.[1] 이 명령에 따라 윌리엄 B. 킨 소장이 지휘하는 제25보병사단은 27연대를 안동으로 이동시키고(후에 보은~황간 축선에 투입), 35연대의 1개 대대를 차출하여 포항 비행장 경비 임무를 맡기고(후에 27연대 증원 임무 수행), 24연대는 전투단을 편성하여 한국군 6사단과 8사단을 지원하는 임무를 맡겼다.[1] 그리고 사단장은 지휘소를 영천에 이어 상주에 설치하고 독자적인 방어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1]

당시 제25보병사단을 지휘하던 킨 소장은 53세의 노장으로, 제1차 세계 대전 발발로 1918년 11월 1일 1년 4개월 만에 미국 육군사관학교(West Point)를 졸업하고 임관한 "생도 장교" 중 한 명이었다.[1] 이들은 1919년 6월에 육군사관학교를 다시 졸업하여 2년 동안만 생도 생활을 한 장교들이었다.[1]

킨 소장은 낮은 졸업 서열 때문에 미국 육군지휘참모대학에 들어가는 행운을 얻었다.[1] 그의 경력 전망은 밝지 않았지만, 1939년 육군성 인사참모부에서 오마르 브래들리 장군과 근무할 기회를 얻었다.[1]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브래들리 장군은 자신이 지휘하는 부대의 참모장으로 킨 준장을 계속 보직시켰고, 킨 장군은 1군사령부의 참모장이 되었다.[1]

브래들리 장군이 12집단군 사령관이 된 후에도 킨 장군은 1군 참모장으로 남았고, 1군이 태평양 지역 작전에 참전하게 되면서 태평양 지역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1] 1948년 9월, 당시 참모총장까지 오른 브래들리 장군은 킨 준장을 제25보병사단장에 임명하여 별을 하나 더 달아주었고, 제25보병사단은 역전노장인 사단장을 맞이하게 되었다.[1]

그러나 사단의 전력은 강하지 못했다.[1] 7월 10일 부산에 도착한 미하 엘리스 대령이 지휘하는 27연대는 비교적 건실한 지휘관들과 유능한 병사들을 보유하고 있었다.[1] 특히 연대장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동양인들의 전투 전술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으며, 7월 8일 킨 사단장과 함께 한국 전선에 먼저 와서 현지 정찰을 할 정도로 사단의 중추적인 지휘관이었다.[1]

킨 소장은 병사들을 모아놓고 "여러분은 이곳에 죽으러 온 것이 아니고 죽이러 왔다는 것을 명심하라(Remember, you're here to kill and not to be killed.)"라고 연설할 정도로 열정적이었다.[1] 그러나 흑인 병사와 백인 장교들로 구성된 24연대는 전투력 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1]

흑인 병사들은 한국의 무더위와 습기, 비위생적인 환경, 험준한 산악 지형을 싫어했고, 이들을 지휘하는 지휘관들 역시 부연대장 폴 F. 로버츠 중령을 제외하고는 한국전쟁 참전 자체를 꺼리고 있었다.[1] 35연대장 헨리 G. 피셔 대령은 전문 직업군인으로서 다른 지휘관들과 다를 바 없었지만, 그가 지휘하는 병사들 역시 평화 시 점령군 임무에 익숙한 상태였다.[1] 따라서 제25보병사단의 전력은 전반적으로 강하지 못했지만, 그들이 수행해야 할 역할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1]

중부 전선에서 조선인민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있던 한국군 후방의 제2선에서 대기 중이던 제25보병사단은 7월 18일 제1기병사단이 포항에 상륙하자, 제8군이 제1기병사단을 경부 본선의 제24보병사단을 대신하도록 조치함에 따라, 상주 정면의 한국군 지원 임무에 전념하게 되었다.[1]

월턴 워커 제8군사령관은 제25보병사단이 먼저 한국 전선에 도착했지만, 이 사단의 전투력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늦게 포항에 상륙한 제1기병사단으로 하여금 경부 본선을 맡도록 했다.[1] 이에 따라 제25보병사단 예하 각 연대는 7월 22일경부터 본격적으로 전선에 투입되었다.[1]

3. 전투 과정

7월 12일 부산에 상륙한 미 25사단은 중부전선에서 북한군과 싸우던 한국군을 지원하는 임무를 받았다.[2] 윌리엄 B. 킨 소장이 지휘하는 25사단은 예하 27연대를 안동으로 보내고, 35연대 1개 대대는 포항비행장 경비, 24연대는 국군 6사단과 8사단을 지원하도록 했다. 그리고 사단 지휘소를 영천에 이어 상주에 설치했다.[3]

킨 소장은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오마르 브래들리 장군 휘하에서 참모장으로 복무했다. 1948년 참모총장이 된 브래들리는 킨 준장을 25사단장에 임명했다.

7월 18일 1기병사단이 포항에 상륙하면서 25사단은 상주 정면의 한국군 지원에 집중하게 되었다. 킨 소장의 제25사단은 상주를 방어하기 위해 두 개의 주요 접근로를 방어해야 했다. 함창을 거치는 주요 도로에는 제35보병대 2대대가, 서쪽 산악 도로에는 제24보병연대가 배치되었다.

제35보병대 2대대는 함창 북서쪽에서 한국군 부대와 함께 방어선을 구축했다. 제25사단 부사령관 윌슨 준장의 명령으로 F중대가 한국군 방어선에 투입되었으나, 이는 대대장 윌킨스 중령의 반대에 부딪혔다. 윌슨 준장은 미군이 한국군의 방어를 강화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윌킨스 중령은 경험이 없는 중대가 한국군의 안정성에 의존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7월 25일 영동이 북한군에 넘어가고 25사단과 국군의 방어 능력이 한계에 이르자, 7월 26일 8군사령관 월턴 워커 장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구상하고 철수를 계획했다. 7월 27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대구를 방문해 "한국에서의 덩커크는 없다"고 강조하며 방어 의지를 다졌다.

7월 29일 워커 장군은 상주에서 "더 이상의 철수는 없다"며 "우리는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한국 전쟁 최초의 방어선이자 최후의 방어선인 낙동강 방어선으로의 철수를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한국군 제6사단은 문경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지만, 북한군 제1사단에 밀려 후퇴했다. 7월 24일 한국군 제6사단은 북한군 전차 7대를 파괴했고, 3일 후 한국군 제1사단은 전차 4대를 파괴하고 1대를 노획했다. 황간-보은 도로에서 미 제27보병연대에 교대된 한국군 제2사단 잔여 병력은 한국군 제1사단에 통합되었다.

7월 27일까지 문경 분기점은 모두 북한군이 점령했고, 북한군 제1사단은 5,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북한군 제13사단은 약 500명의 사상자를 냈고, 북한군 제15사단이 상주로 이동했다.

7월 22일 제35보병연대 F중대는 함창 북쪽에서 북한군 대대의 공격을 받았으나, 효과적으로 싸워 큰 피해를 입혔다.

3. 1. 예천 전투

A group of men standing around a large gun
미군의 포병이 북한군 목표물을 향해 사격하고 있다.


25사단 병력과 조선인민군 사이의 첫 교전은 1950년 7월 20일 예천에서 벌어졌다.[1][2] 소위 재스퍼 R. 존슨이 지휘하는 제24보병연대 제3대대 K중대가 오후에 마을에 진입했다.[3] 제3대대의 다른 부대가 마을 왼쪽의 능선을 점령하지 못하자 존슨 소위는 밤 동안 마을에서 철수할 수 있도록 허가를 요청했고 승인 받았다.[4]

다음 날 오전 5시, 미군 부대 지휘관들은 대대 지휘소에서 만나 새로운 공격을 계획했다. 포병과 박격포가 보병의 진격에 앞서 마을에 사격을 가했고, 곧 마을은 포탄으로 불타올랐다. 그러나 이때쯤에는 예천은 북한군에 의해 버려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제35보병연대 사령관 대령 헨리 G. 피셔는 함창에서 조선인민군이 제24보병연대를 예천에서 몰아냈다는 잘못된 메시지를 받았다. 피셔 대령은 즉시 예천으로 출발하여 대대 지휘관을 마을에서 약 8.05km 서쪽에서 만났지만, 그에게서 받은 정보에 불만을 품었다. 피셔 대령과 소수의 일행은 불타고 있는 예천으로 진입했으나 북한군이나 대한민국 민간인을 만나지 못했다. K중대에 배속된 제77공병전투중대 제3소대는 보병과 함께 마을에 진입하여 화재 확산을 막으려 했지만, 강하고 변덕스러운 바람 때문에 실패했다. 그 후 제24보병연대는 마을을 반격하는 북한군으로부터 가벼운 저항을 받았지만, 그들을 몰아내고 수 시간의 교전 끝에 2명이 사망하고 12명이 부상당하며 마을을 확보했다. 이 전투에서 북한군 사상자는 추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대전 전투에 집중하던 미군은 이 전투에 거의 주목하지 않았고, 그 승리를 한국군에게 돌렸다. 이 점령 소식은 대부분 흑인 부대 소속 흑인 병사들이 거둔 첫 승리로 미 언론에 보도되었다. 13시, 예천이 확보되었고, 제3대대는 수도사단의 대한민국 제18연대에 마을 통제권을 넘겼다. 수도사단은 그곳에 병력의 대부분을 집중시켰고, 그 달의 나머지 기간 동안 그 부근에서 조선인민군 제8사단에 맞섰다.

3. 2. 상주-안동 축선 전투

7월 13일부터 한국에서 유엔군의 작전을 지휘하게 된 8군사령부는 25사단에게 1개 대대로 포항비행장을 경비하고 나머지 병력으로는 중부전선에서 적의 전진을 막고 있던 한국군을 지원하는 임무를 부여하였다. 이 명령에 근거하여 윌리엄 B. 킨(William B. Kean) 소장이 이끄는 제25사단은 27연대를 안동으로 추진시키고(후에 보은~황간 축선에 투입), 35연대의 1개 대대를 뽑아 포항비행장 경비임무를 맡기고(후에 27연대 증원임무수행), 24연대는 전투단을 편성하여 국군 6사단·8사단을 지원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리고 사단장은 지휘소를 영천에 이어 상주에 두고 독자적인 방어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2]

중부전선에서 조선인민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있는 국군 후방의 제2선에서 대기중이던 25사단은 7월 18일 1기병사단이 포항에 상륙하자, 8군이 1기병사단을 경부본도의 24사단을 대신하도록 조치함에 따라, 상주 정면의 한국군의 지원임무에 전념하게 되었다.[3]

7월 25일 영동이 북한군의 수중에 들어가고 25사단이나 국군의 방어능력 역시 한계가 드러나자, 7월 26일 8군사령관 월턴 워커 장군은 낙동강선에서의 방어작전을 구상하고 철수계획을 세우는 한편, 8군사령부도 대구에서 부산으로 옮기려 했다. 도쿄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이러한 건의를 받자, 7월 27일 10:00시 대구의 군사령부를 방문했다.[4]

7월 29일, 25사단 사령부가 자리 잡고 있는 상주에는 워커 장군이 나타나 "고수냐 아니면 죽음이냐"는 훈령을 내렸다. 이는 한국 전쟁에서의 최초의 방어선이자 최후의 방어선인 낙동강 방어선으로의 철수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국군은 북한군이 호남을 돌아 진주~마산으로 진격하여 부산으로 향하고 있는 시점에서 전선의 축소조정이 없이는 방어선을 방어선답게 유지할 수 없었다.

케인(Kean) 소장은 그의 제25사단을 이끌고 상주가 북한군에게 함락되는 것을 막기 위해 상주로 향하는 두 개의 주요 접근로를 방어해야 했다. 주요 도로는 문경 고원을 지나 함창을 거쳐 상주에서 북쪽으로 약 약 24.14km 떨어진 고원 기슭을 통과했다. 다음으로, 고원을 더 서쪽으로 가로지르고 산을 통과한 후 동쪽으로 상주로 향하는 두 번째 산악 도로가 있었다.

주요 도로에서는 제2대대 제35보병대가 함창 북서쪽에 방어선을 구축했으며, 제78전차대대 A중대의 소대와 제90야전포병대대 A포대의 지원을 받았다. 제1대대는 제2대대와 함께 배치되었지만, 다음 북-남 통신선을 따라 서쪽으로 향하는 제27보병연대를 지원하기 위해 24시간도 채 안 되어 파견되었다. 따라서 사실상, 한 대대의 미군이 함창 접근로에서 대한민국 육군 부대 뒤에 있었다. 두 번째 도로, 즉 서쪽에서 상주로 이어지는 도로에서는 제24보병연대가 두 개 대대를 배치했고, 나중에는 세 개 대대를 모두 배치했다.

제2대대 제35보병대는 함창 북서쪽, 문경 남쪽에 위치한 언덕에 자리를 잡았으며, 상주를 지나 낙동강으로 흘러가는 하천의 남쪽에 있었다. 하천 북쪽에는 대한민국 육군 대대가 최전선을 지켰다. 준장 베나드 윌슨(Vennard Wilson)은 제25사단 부사령관이었으며, 제35보병대대의 F중대를 하천 북쪽의 대한민국 육군 방어선 중앙에 투입하라고 명령했고, 이는 대대장인 중령 존 L. 윌킨스(John L. Wilkins)의 강력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졌다. 윌슨은 미군이 대한민국 육군의 방어를 강화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윌킨스는 경험이 없는 중대가 첫 교전에서 대한민국 육군의 안정성에 의존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육군과 F중대 진지 뒤로는 소화기 사정거리 안에 또 다른 언덕이 솟아 있었다. 폭우로 인해 대한민국 육군과 F중대 진지 뒤의 하천이 급류로 불어나 큰 바위들을 채널을 따라 굴러가게 했다. 한편, 대한민국 육군 제2대대 제17연대는 동관리 근처에서 북한군 대대를 매복하여 퇴각시켰다.

7월 22일, 북한군이 공격을 시작했다. 대한민국 육군 병력은 잠시 저항했지만, 의사를 전달하지 않은 채 F 중대 양쪽의 진지에서 철수했다. 이 철수는 미군 병력을 통합하기 위해 전선을 재편성하기 위한 계획의 일부였지만, F 중대는 그렇게 하기 전에 메시지를 보낼 것으로 예상했고, 방어를 보완하기 위해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북한군은 재빨리 F 중대의 측면을 공격하여 후방에서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조직적이지 못한 철수가 발생했다. 불어난 개울 때문에 F 중대는 남쪽으로 건너 2대대 진지로 갈 수 없었다. 부상병들은 개울가를 따라 몰려 있었고, 그들을 건너게 하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두 명의 장교와 두 명의 부사관은 꼬인 전화선을 몸에 묶고 반대편 강둑으로 헤엄쳐 가서 줄을 묶으려 했지만, 차례로 물살에 휩쓸려 시작했던 같은 강둑에 떠밀려왔다. 일부 병사들은 불어난 강을 건너려다 익사했다. 남쪽에 있던 전차 1개 소대의 엄호 사격으로 북한군을 저지했고, 대부분의 생존자들이 결국 탈출할 수 있었다. F 중대는 37명의 사상자를 냈다: 전사 6명, 부상 10명, 실종 21명.

다음 날 아침, 북한군의 T-34 전차 5대가 강을 건너 함창으로 향했다. 제90야전포병대대 A 포대의 포격으로 전차 4대가 즉시 파괴되었다. 다섯 번째 전차는 강을 건너갔고, 이후 공습으로 파괴되었다.

제2대대 제35보병연대는 7월 23일 상주 북쪽 약 8.05km 지점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7월 28일 대대는 약 3.22km 더 후퇴했고, 다음 날 상주 남쪽으로 이동했다. 7월 마지막 날, 제35보병연대는 금천 도로의 상주 남쪽 약 12.87km 언덕에 방어선을 구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1일 동안 강한 저항 없이, 단지 북한군 순찰대만 마주치면서 상주 전선에서 약 약 48.28km 후퇴했다. 전투 동안 제35보병연대는 주변 전선이 붕괴되면서 사단 명령에 따라 일련의 철수를 했을 뿐, 전투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제6사단은 문경에서 산을 지나는 도로에서 격렬한 전투를 계속했지만, 점차 조선인민군 제1사단 앞에서 후퇴했다. 7월 24일 함창 위의 산에서 대한민국 제6사단은 북한군 T-34 전차 7대를 파괴했다. 3일 후, 미 제24보병연대에 의해 상주 북서쪽에서 교대되어 함창 전선에 재배치된 대한민국 제1사단은 2.36인치 바주카로 거기서 전차 4대를 더 파괴하고 전차 1대를 온전하게 포획했다. 황간보은 도로에서 제27보병연대에 의해 교대된 대한민국 제2사단의 잔여 병력은 대한민국 제1사단에 통합되었다. 따라서 7월 24일까지 미 제25사단은 상주에서 서울–대구 고속도로에 이르는 지역을 대한민국 제1사단과 제2사단으로부터 인수했고, 이들 대한민국군은 함창 전선에서 상주에서 동쪽과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7월 27일까지 문경 분기점은 모두 북한군이 점령했고, 그들의 부대는 함창 부근 상류 낙동강 계곡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당시 포로와 나중에 포획된 다른 사람들은 조선인민군 제1사단이 분기점 점령을 위한 전투에서 부상으로 교체된 사단장을 포함하여 5,000명의 사상자를 냈다고 말했다. 제1사단 뒤를 따르던 조선인민군 제13사단은 문경 아래에서 약 500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이 기간 동안 다른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북한의 약한 사단 중 하나로, 경험이 부족한 청년들로 구성된 조선인민군 제15사단이 상주로 이동했다. 이것은 유엔군이 효과적인 방어선을 조직할 시간을 갖기 전에 남쪽으로 밀어붙이려는 조선인민군의 집중적인 공격의 일부였다.

상주 북쪽 문경 고원 남쪽 기지에 있는 함창 도로에 나타나는 것과 동시에, 북한군은 서쪽의 2차 산길로 접근했다. 7월 22일 제35보병연대 F 중대는 함창 북쪽에서 공격을 받았는데, 세 배나 많은 북한군 대대와 대치했을 때였다. 중대는 효과적으로 싸웠고 막대한 피해를 입혔지만, 다음 날 폭우로 부대의 후방에 있는 강이 범람하여 보급로가 차단되었다. 포병의 지원을 받아, 중대는 교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3. 3. 국군과의 협력 및 혼란

7월 12일 부산에 상륙한 미 25사단은 중부전선에서 북한군과 싸우던 한국군을 지원하는 임무를 맡았다.[2] 윌리엄 B. 킨 소장이 지휘하는 25사단은 예하 27연대를 안동으로 보내고, 35연대 1개 대대는 포항비행장 경비, 24연대는 국군 6사단과 8사단을 지원하도록 했다.[3]

25사단은 7월 18일 1기병사단이 포항에 상륙하면서 상주 정면의 한국군 지원에 집중하게 되었다.[4] 35연대는 함창에서 국군 6사단을 지원했는데, 1개 중대가 북한군에 포위되어 큰 피해를 보기도 했다. 이후 35연대는 상주 북쪽, 김천 북방 등지로 이동하며 방어 임무를 수행했다.

24연대는 상주 서쪽 화령장에서 국군 17연대의 진지를 인수받으려 했으나, 선두 중대가 북한군의 공격을 받아 흩어지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연대는 지연전을 펼쳤지만, 병사들의 사기가 낮아 진지를 무단이탈하는 경우도 많았다.

7월 25일 영동이 북한군에 넘어가고 25사단과 국군의 방어 능력이 한계에 이르자, 7월 26일 8군사령관 월턴 워커 장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구상하고 철수를 계획했다. 7월 27일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대구를 방문해 "한국에서의 덩커크는 없다"고 강조하며 방어 의지를 다졌다.

7월 29일 워커 장군은 상주에서 "더 이상의 철수는 없다"며 "우리는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한국 전쟁 최초의 방어선이자 최후의 방어선인 낙동강 방어선으로의 철수를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킨 소장의 제25사단은 상주를 방어하기 위해 두 개의 주요 접근로를 방어해야 했다. 함창을 거치는 주요 도로에는 제35보병대 2대대가, 서쪽 산악 도로에는 제24보병연대가 배치되었다.

제35보병대 2대대는 함창 북서쪽에서 한국군 부대와 함께 방어선을 구축했다. 제25사단 부사령관 윌슨 준장의 명령으로 F중대가 한국군 방어선에 투입되었으나, 이는 대대장 윌킨스 중령의 반대에 부딪혔다. 윌슨 준장은 미군이 한국군의 방어를 강화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윌킨스 중령은 경험이 없는 중대가 한국군의 안정성에 의존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제35보병연대 2대대는 7월 23일부터 상주 남쪽으로 철수하며, 11일 동안 북한군 순찰대만 마주쳤을 뿐 큰 전투는 없었다.

한국군 제6사단은 문경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지만, 북한군 제1사단에 밀려 후퇴했다. 7월 24일 한국군 제6사단은 북한군 전차 7대를 파괴했고, 3일 후 한국군 제1사단은 전차 4대를 파괴하고 1대를 노획했다. 황간-보은 도로에서 미 제27보병연대에 교대된 한국군 제2사단 잔여 병력은 한국군 제1사단에 통합되었다.

7월 27일까지 문경 분기점은 모두 북한군이 점령했고, 북한군 제1사단은 5,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북한군 제13사단은 약 500명의 사상자를 냈고, 북한군 제15사단이 상주로 이동했다.

7월 22일 제35보병연대 F중대는 함창 북쪽에서 북한군 대대의 공격을 받았으나, 효과적으로 싸워 큰 피해를 입혔다.

3. 4. 미 24연대의 논란

미 24연대는 흑인 병사와 백인 장교들로 구성되어 전투력 면에서 낮은 평가를 받았다.[2][3][4] 흑인 병사들은 한국의 혹서, 습기, 비위생적인 환경, 험준한 산악 지형을 싫어했고, 지휘관들 역시 한국 전쟁 참전을 꺼렸다.

7월 25일 24연대는 화령장 (상주 서쪽 20km 부근)에서 북한군 15사단과 교전하며 지연전을 벌였으나, 선두 2대대가 패배한 후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다. 3대대 L중대는 장교 4명, 부사관과 병 105명 중 장교 1명과 부사관, 병 17명만 남고 나머지는 무단 이탈했다. 상주 서쪽 800m 지점 낙오자 수용소에는 하루 평균 75명의 진지 이탈병이 수습될 정도였다.

Men in trucks driving down a road
24보병연대 병력이 부산 교두보 전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24연대는 낮에는 고지를 지키고 밤에는 후방으로 철수하여 포격으로 적을 견제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7월 22일 ~ 7월 30일 24연대는 전사 27명, 부상 293명, 실종 3명의 손실을 입었지만, 북한군 15사단은 약 5,000명의 손실을 본 것으로 추정되었다. 연대는 7월 31일 상주를 거쳐 철수했다.

상주 서쪽에서 24연대는 공황 상태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병사들은 진지를 이탈하고 무기를 버렸으며, 사격을 받지 않아도 장비를 잃는 경우가 발생했다. 북한군의 사격 조짐만 보여도 부대 대다수가 진지를 버리는 일도 있었다.

7월 26일 24연대 3개 대대는 보급이 어려운 전투 위치에 집결했다. 부족한 병력으로 인해 예비 병력이 거의 없었고, 북한군은 집단 돌격으로 미군 진지에 빠르게 접근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7월 29일 1대대는 박격포 사격으로 약 60명의 사상자를 냈고, 병사들이 방어 진지를 준비하던 중 공황 상태에 빠져 대부분 진지를 버렸다. 허튼 V. 화이트 대령이 직접 대대를 재편성해야 했고, 포병은 북한군 진격을 늦추기 위해 지속적인 포격을 가했다.

3. 5. 낙동강 방어선으로의 철수

7월 25일 영동북한군의 수중에 들어가고 25사단이나 국군의 방어 능력 역시 한계가 드러나자, 7월 26일 미8군사령관 월턴 워커 장군은 낙동강선에서의 방어 작전을 구상하고 철수 계획을 세웠다. 7월 27일 도쿄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대구의 군사령부를 방문하여 90분간 회담을 가졌는데, 이 자리에는 맥아더 장군, 워커 장군, 그리고 유엔군 사령부 겸 극동군 사령부의 참모장 에드워드 M. 알몬드 장군만이 참석했다. 맥아더 장군은 워커 장군의 건의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한국에서의 덩커크는 없을 것이라고 강조하며, 미 24사단과 한국군 수도사단을 칭찬했다.[2]

7월 29일, 25사단 사령부가 있는 상주에 워커 장군이 나타나 다음과 같이 말했다.[3]

워커 장군은 이와 같은 훈령을 다른 사단에도 하달하면서, 한국 전쟁에서의 최초이자 최후의 방어선인 낙동강 방어선으로의 철수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국군은 북한군이 호남을 돌아 진주~마산으로 진격하여 부산으로 향하는 시점에서 전선의 축소 없이는 방어선을 유지할 수 없었다.[4]

"고수냐 아니면 죽음이냐"로 나타난 워커 장군의 고수 의지는 여러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나,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상주 전투의 마지막 며칠 동안, 상주 서쪽에서 존 R. 울리지 소령은 도시 서쪽에 검문소를 설치하고 서쪽에서 오는 모든 차량을 세워 후퇴하려는 낙오병들을 체포했다. 많은 지프들이 위치가 함락된 후 후퇴한다고 주장하는 6~7명의 병사들로 채워졌다. 그는 하루 평균 75명, 전투 마지막 날에는 150명의 낙오병을 체포했다. 헌병대가 특별히 파견되어 진지를 이탈한 병사들을 모아 전선으로 복귀시켰다.

7월 30일 제24보병연대는 상주 서쪽의 마지막 방어 가능한 고지대로 철수했으며, 도심에서 약 4.83km 떨어져 있었다. 조선인민군은 그날 아침 05:00부터 제3대대의 전방 진지를 목표로 격렬한 공격을 가했다. 너무 광범위하게 흩어져 예비 병력이 부족하고 낙오병들로 인해 고통을 받은 연대는 무너지기 시작했고, 고위 지휘관들은 개인적으로 권총을 가지고 최전선으로 이동하여 조선인민군의 진격을 막아야 했다. 이 시점에서 연대는 너무 악화되어 키언 장군은 제1대대 제35보병연대를 소환하여 제24보병연대 뒤에 방어 위치에 배치하여 제24보병연대가 철수할 때 방어선을 유지하도록 했다. 다음날 조선인민군은 다시 연대의 전방 저항선을 압박했다. A중대를 지휘하는 레온 A. 길버트 중위와 약 15명의 병사들이 전방에서 이탈했다. 화이트와 다른 고위 장교들은 길버트에게 제자리로 복귀하라고 명령했지만, 그는 무서워서 갈 수 없다고 말했다. 고위 부사관은 병사들과 함께 전방으로 복귀했다. 연대 지휘관들이 길버트에게 그의 위치로 돌아오라고 설득했지만 실패한 후, 그는 교전 중 탈영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형량은 나중에 17년 징역으로 감형되었지만, 그는 5년만 복역했다.

마침내 7월 31일 밤, 제24보병연대는 상주를 통해 철수했다. 제1대대 제35보병연대가 철수를 엄호했다. 조선인민군 제15사단은 다음날 상주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했고, 제25보병사단은 남쪽의 마산에 대한 증가하는 공격에 대처하기 위해 이동했다.

4. 결과 및 영향

8월 1일 오후, 제8군으로부터 삼랑진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은 제25사단은 밤부터 가용한 모든 수송수단을 동원하여 이동했으나, 도중에 목적지가 마산으로 변경되었다. 사단 선발대는 8월 2일 21시 15분에, 주력 부대는 8월 3일 낮에 마산에 도착했다. 이로써 제25사단은 7월 20일 제27연대가 안동에서 광간으로 이동한 데 이어 두 번째로 36시간 만에 240km를 이동하는 기동성을 보여, 낙동강 서남부 지역의 공백을 메웠다.

7월 말, 낙동강 상류 계곡에 도달한 북한군 사단들은 한국군과의 전투와 유엔군의 공습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문경 고원 전투에서 제6사단과 교전한 제1사단은 지상전과 공습으로 큰 손실을 입어, 병력이 5,500명에서 3,000명으로 감소했다. 제15사단 또한 상주 진격 과정에서 미군 제24보병연대의 포병 및 박격포 사격으로 큰 피해를 입어, 병력이 7,500명에서 약 5,000명으로 줄었다. 반면, 제13사단은 함창 서쪽을 우회하여 한국군 및 미군 제35보병연대 2대대와의 소규모 교전 외에는 큰 전투를 치르지 않아 비교적 피해가 적었다.[1]

4. 1. 인종차별 논쟁과 군 통합

A black soldier rests and reads a newspaper
푸산 교전 중 잠시 휴식을 취하며 신문을 읽는 제24보병 연대 병사.


한국 전쟁 초기, 미 육군 제24보병연대는 상주 지역에서 11일간 전투를 치르며 323명의 사상자(전사 27명, 부상 293명, 실종 3명)를 냈다.[1] 비교적 적은 사상자 수는 북한군의 신중한 진격과 효과적인 요새 사용 덕분이었지만, 일각에서는 제24보병대 병사들이 쉽게 후퇴했기 때문이라는 비판도 있었다.[2] 당시 인종차별적인 미군 시스템 하에서 주로 흑인 병사들로 구성되었던 제24보병연대는 전투 중 부진한 활약으로 비난받았다.[3] 월턴 워커는 제24보병연대를 비효율적인 부대로 판단, 전선에서 "트립 와이어 부대"(경고 부대)로만 활용하고, 이들이 무너질 경우 다른 연대가 지원하도록 하는 방식을 택했다.[4] 일각에서는 이러한 부진한 성과를 군대 내 인종 통합을 가속화해야 할 이유로 보기도 했다.[4] 제24보병연대는 1951년 10월 1일에 완전히 통합되었다.

전쟁 이후, 이 전투는 미 육군 내 인종차별의 대표적인 사례로 연구되었다. 제24보병연대는 공식적으로는 통합 부대였지만, 실제로는 대부분 아프리카계 미국인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역사학자들은 예천에서의 공적은 무시된 채, 제24보병연대를 폄하하고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백인보다 열등한 병사로 묘사하기 위해 단점들이 부각되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제24보병연대의 실제 성과가 좋지 않았더라도, 인종차별로 인해 그 실패가 과장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윌리엄 T. 바우어스, 윌리엄 M. 해먼드, 조지 L. 맥개리글은 1988년 저서 ''Black Soldier, White Army''에서 과도하게 확장된 전선과 경험 부족한 백인 장교들의 미숙함이 제24보병연대의 부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결론내렸다. 한편, 처음 실전을 겪은 제24보병연대가 제24보병사단제1기병사단과 비슷한 수준으로 싸웠다는 주장도 있다.[4] 훈련을 통해 불과 몇 주 만에 많은 병사들이 훌륭한 전투원으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전투에 참전했던 제24보병연대 소속 찰스 M. 버시 중령은 자신의 회고록 ''예천의 화력전: 한국 전쟁의 용기와 인종차별''에서 예천에서의 뛰어난 활약이 무시되었고, 인종차별 때문에 병사들이 훈장을 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5.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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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서적 한국전쟁사 국방부, 전쟁기념사업회
[2] 문서 대한민국 국군에서는 사병이란 단어 대신 이들을 구별하여 부른다.
[3] 문서 대한민국 국군에서는 사병이란 단어 대신 이들을 구별하여 부른다.
[4] 문서 대한민국 국군에서는 사병이란 단어 대신 이들을 구별하여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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