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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산드로 발리냐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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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레산드로 발리냐노는 1539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예수회에 입회한 후, 동인도 순찰사로 임명되어 동아시아 선교를 이끌었다. 그는 중국어 습득을 중요하게 여겨 마테오 리치를 중국으로 파견하고, 일본 선교를 위해 적응주의 정책을 펼쳤으며, 덴쇼 소년 사절단을 기획했다. 일본인 사제 양성을 위해 신학교를 설립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교류하며 1606년 마카오에서 사망했다. 그는 '일본의 사도'로 칭송받았으며, 동아시아와 유럽의 관계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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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산드로 발리냐노
기본 정보
알레산드로 발리냐노, 1599년경.
알레산드로 발리냐노, 1599년경.
경칭 접두사신부
이름알레산드로 발리냐노
경칭 접미사S.J.
직함예수회 사제
소속 교회로마 가톨릭교회
출생일1539년 2월
출생지키에티, 나폴리 왕국
사망일1606년 1월 20일 (향년 67세)
사망지마카오, 포르투갈령 마카오
인물 정보
로마자 표기Alessandro Valignano
출생 연도1539년
출생 월일2월 15일
출생지아브루초주 키에티
사망 연도1606년
사망 월일1월 20일
사망지마카오, 당시 명나라
묘소성 바울 성당
출신 학교파도바 대학교
종교 정보
기타

2. 생애

1566년 발리냐노는 로마에서 예수회에 가입하고 로마학원의 학생이 되었다. 당시 저명한 수학자였던 클라우디오 아콰비바의 지도로 수학, 물리, 철학, 신학을 공부했다.[13]

1571년 발리냐노는 잠시 성 안드레아 소신학원 원장이 되었다. 그해 가을 젊은 마테오 리치에 대한 시험을 맡았으며, 이를 계기로 마테오 리치의 후견인이 되어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후 발리냐노는 1년간 마자라타 학원의 원장이 되었다.[13]

1573년 예수회 제4대 총장 에버라드 머큐리안의 눈에 들어 4대 서원을 하고, 그해 5월 인도에서 일본에 이르는 예수회 전 교구 사무를 주관하는 시찰원 겸 부주교로 임명되었다.[13]

1574년 1월 1일 포르투갈 국왕 세바스치앙을 접견하고 선교 사업에 큰 영향을 미치는 “국적을 뛰어넘는 대동주의 채택” 건의안을 제출했는데, 이 건의안은 이후 열렸던 예수회 성장회의에서 통과되었다. 3월 23일 발리냐노는 국적이 다른 41명의 예수회 선교사들을 인솔해 차지아스(査加斯)호를 타고 리스본을 출발, 9월 6일 고아에 부임했다.[13]

발리냐노는 1574년 9월 6일부터 32년간 3차례나 일본을 방문했으며, 1606년 1월 20일 갑작스러운 신장 질환으로 사망할 때까지 마카오에 있었다.[13]

2. 1. 초기 생애와 예수회 입회

나폴리 왕국 아브루초주 키에티의 부유한 귀족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그 지역 대주교 지오반니 피에트로 카라파(Giovanni Pietro Carafa, 후의 교황 바오로 4세)의 절친한 친구였다.[2]

1566년 발리냐노는 로마에서 예수회에 가입하고 아울러 로마학원의 학생이 되었다. 당시 저명한 수학자였던 클라우디오 아콰비바의 지도로 수학, 물리, 철학, 신학을 공부했다.

1571년 발리냐노는 잠시 성 안드레아 소신학원 원장이 되었다. 직무관계로 그 해 가을 젊은 마테오 리치에 대한 시험을 맡게 되었으며, 이러한 인연으로 마테오 리치의 후견인이 되어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되었다. 이후 발리냐노는 1년간 마자라타(馬柴拉塔)학원의 원장이 되었다.[13]

1539년 나폴리 왕국 키에티에서 태어난 알레산드로 발리냐노는 파도바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 교황 바오로 4세의 총애를 받아 로마에서 일했다. 교황 비오 4세는 발리냐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더 중요한 임무를 맡기려 했고, 발리냐노는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파도바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1566년 예수회에 입회했다. 로마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할 때, 훗날 예수회 총장이 된 클라우디오 아콰비바가 그의 학우였다.

1570년, 서원을 선포하고 사제 서품을 받았다.

2. 2. 동인도 순찰사 임명과 초기 활동

1566년 발리냐노는 로마에서 예수회에 가입하여 로마학원의 학생이 되었다. 당시 저명한 수학자였던 클라비우스 아콰비바(Claudio Acquaviva)의 지도로 수학, 물리, 철학, 신학을 공부했다.[2]

1571년 발리냐노는 잠시 성 안드레아 소신학원 원장이 되었다. 그 해 가을 젊은 마테오 리치에 대한 시험을 맡았으며, 이러한 인연으로 마테오 리치의 후견인이 되어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후 발리냐노는 1년간 마자라타(馬柴拉塔)학원의 원장이 되었다.[2]

1573년 예수회 제4대 총장 에버라드 머큐리안(Everard Mercurian)의 눈에 들어 4대 서원을 하고, 그 해 5월 인도에서 일본에 이르는 예수회 전 교구 사무를 주관하는 시찰원 겸 부주교로 임명되었다.[2]

1574년 1월 1일 포르투갈 국왕 세바스치앙을 접견하고 선교 사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국적을 뛰어넘는 대동주의 채택” 건의안을 제출하였는데, 이 건의안은 이후 열렸던 예수회 성장회의에서 통과되었다. 3월 23일 발리냐노는 국적이 다른 41명의 예수회 선교사들을 인솔해 차지아스(査加斯)호를 타고 리스본을 출발, 9월 6일 고아에 부임했다.[2]

발리냐노는 1574년 9월 6일부터 32년간 3차례나 일본을 방문하였으며, 1606년 1월 20일 갑자기 신장질환이 발병하여 숨질 때까지 마카오에 있었다.[13]

그는 파도바 대학교에서 뛰어난 학생이었으며, 19세에 법학 박사 학위를 처음 취득했다. 몇 년 동안 로마에 머문 후, 1562년 기독교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파도바로 돌아왔다.[2] 1년 동안 감옥에 수감된 후, 1566년 로마로 돌아와 예수회에 입회했다.[2]

1574년 봄, 발리냐노는 인도 관구의 새로 임명된 방문관으로서 고아로 항해했다.[2] 그리고 다음 해에 고아 근처 초라오 섬에서 인도 관구의 첫 번째 공의회를 소집했다.[2] 포르투갈이 지배하는 아시아를 감독할 나폴리 출신의 인물을 임명한 것은 논란이 되었고, 그의 국적은 선교 인원과의 갈등을 초래했으며, 이후 그의 적응주의적이고 팽창주의적인 정책 또한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방문관으로서 그의 책임은 인도, 중국, 일본 전역의 선교 구조와 방법을 조사하고 필요에 따라 재편하는 것이었다. 그는 매우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자율권과 재량권을 부여받았으며, 예수회 총장에게만 보고했다.

발리냐노는 일반적으로 "적응주의"라고 불리는 가톨릭 개종 전략을 수립했다. 그는 전통적인 기독교적 행동에 대한 준수보다 예수회의 영향력 확대를 우선시했다. 그는 다른 선교사들이 가톨릭 가치와 상충된다고 보는 지역 관습과 타협하여 문화적 마찰을 피하려고 시도했다. 그의 전략은 발리냐노가 일본에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했던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를 포함한 탁발 수도회의 전략과는 대조적이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결국 중국례 논쟁(Chinese Rites controversy)에 기여했다.

발리냐노가 1578년 9월 마카오(Portuguese Macau)에 도착한 직후, 그는 마카오에 주둔한 어떤 선교사도 중국 본토에 정착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예수회의 중국 침투율과 현지인 개종 성공률을 높이려면 먼저 중국어를 말하고 읽고 쓰는 법을 배우는 것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그는 인도의 수장에게 편지를 써서 그 임무를 수행할 사람, 즉 베르나르디노 데 페라리스(Bernardino de Ferraris)(1537~1584)를 마카오로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데 페라리스가 코친(Cochin)의 예수회 신임 학장으로 바빴기 때문에 다른 예수회 학자 미켈레 루지에리(Michele Ruggieri)가 마카오로 파견되었다.[4][5]

발리냐노는 1579년 7월 일본으로 떠나면서 며칠 내에 도착할 루지에리에게 지시 사항을 남겼다. 루지에리가 중국어 공부를 시작하고 그 작업의 방대함을 깨닫자 발리냐노에게 편지를 써서 작업을 공유하기 위해 마테오 리치(Matteo Ricci)를 마카오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1580년 발리냐노가 인도의 수장에게 전달한 루지에리의 요청은 받아들여졌고, 리치는 1582년 8월 7일 그와 함께 마카오에 합류했다.[5]

1539년, 이탈리아 나폴리 왕국의 키에티에서 명문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알레산드로 발리냐노는 명문 파도바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 키에티의 주교를 지낸 인연으로 발리냐노 가문과 친분이 있던 교황 바오로 4세(Paolo IV)의 총애를 받아 로마에서 일하게 되었다. 바오로 4세의 후계자인 교황 피우스 4세(Pius IV) 역시 발리냐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더욱 중요한 임무를 맡기려 했다. 발리냐노는 이에 응하여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파도바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1566년 예수회에 입회했다. 입회 후 철학을 더욱 깊이 공부하기 위해 로마대학에서 수학했는데, 당시 학우 중에는 후일 예수회 총장이 된 클라우디오 아쿠아비바(Claudio Acquaviva)가 있었다.

1570년, 서원을 선포하고 사제 서품을 받았다. 1571년부터 수련원에서 가르쳤는데, 제자 중에는 후에 중국 선교로 유명해진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등이 있었다. 1573년, 총장 에베랄도 메르쿠리아노(Everard Mercurian)의 대리로 광대한 동양 지역을 순회하는 동인도 관구의 순찰사로 대발탁되었다. 이탈리아 출신인 발리냐노가 순찰사라는 중요한 직책에 선택된 것은 당시 예수회 내의 양대 세력이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영향으로 인한 폐해를 완화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그는 1574년 3월 21일 리스본을 출발하여 같은 해 9월 고아(Goa)에 도착했다. 관구 전체를 꼼꼼히 시찰한 후, 발리냐노는 1577년 9월 고아를 떠나 같은 해 10월 19일 말라카(Malacca)에 들어갔다.

2. 3. 마카오와 중국 선교

발리냐노는 1578년 9월 마카오에 도착한 직후, 그곳에 주둔한 어떤 예수회 선교사도 중국 본토에 정착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음을 알게 되었다.[4][5] 그는 예수회의 중국 침투율과 현지인 개종 성공률을 높이려면 먼저 중국어를 말하고 읽고 쓰는 법을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그는 인도의 수장에게 편지를 써서 베르나르디노 데 페라리스(Bernardino de Ferraris)(1537~1584)를 마카오로 보내줄 것을 요청했으나, 데 페라리스가 코친(Cochin)의 예수회 신임 학장으로 바빴기 때문에 다른 예수회 학자 미켈레 루지에리(Michele Ruggieri)가 마카오로 파견되었다.[4][5]

발리냐노는 1579년 7월 일본으로 떠나면서 며칠 내에 도착할 루지에리에게 지시 사항을 남겼다. 루지에리가 중국어 공부를 시작하고 그 방대함을 깨닫자 발리냐노에게 편지를 써서 마테오 리치(Matteo Ricci)를 마카오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1580년 발리냐노가 인도의 수장에게 전달한 루지에리의 요청은 받아들여졌고, 리치는 1582년 8월 7일 마카오에 합류하여 루지에리와 함께 중국과 중국어를 연구한 최초의 유럽 학자가 되었다.[5]

1594년 발리냐노는 마카오에 성 바울 대학을 설립했다.

2. 4. 일본 선교와 적응주의

발리냐노는 일본에서의 예수회 선교 방침으로 "적응주의"를 채택했다. 이는 유럽의 기독교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일본 문화에 자신을 맞추는 방법이었다. 그의 방식은 유럽 방식을 고집하는 프란치스코회도미니코회와 같은 탁발수도회의 방법론과는 정반대였으며, 발리냐노는 이를 이유로 예수회 이외의 수도회가 일본에서 선교하는 것을 막으려 했고, 이는 후일 예수회와 탁발수도회의 대립으로 이어졌다.[2]

1581년(덴쇼 9년), 발리냐노는 예수회원을 위한 선교 지침서인 Il Cerimoniale per i Missionari del Giapponela(일본 선교사를 위한 의례서)를 저술했다. 이 책에서 그는 선교사들이 일본 사회의 계급 질서 속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명확히 제시했다. 그는 예수회원들이 일본 사회에서 행동할 때 사회적 지위에서 동등하다고 여겨지는 고위 승려들의 행동을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일본 사회는 계급 질서에 따라 의복, 음식에서부터 행동까지 모든 것이 세세하게 규정되어 있었다. 구체적으로 예수회원들은 고위 승려들처럼 좋은 음식을 먹고, 나가사키 시내를 걸을 때도 그들처럼 시종을 거느리고 다녔다. 이러한 방식은 "사치"라고 하여 유럽에서 비난을 받았는데, 그러한 비난은 탁발수도회뿐만 아니라 예수회 내부에서도 있었다.

발리냐노는 순찰사로서 일본 각지를 방문하여 오토모 소린, 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등과 면담했다. 1581년(덴쇼 9년) 오다 노부나가를 면담했을 때는 안토쿠 성(安土城)을 그린 병풍(가노 에이토쿠(狩野永徳) 작으로 여겨짐)을 선물 받았고, 그 병풍은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에게 헌상되었지만, 현재까지 그 존재는 확인되지 않고 행방불명이다. 또한, 노부나가가 흑인을 보고 싶어 했기 때문에 데려간 흑인 노예를 노부나가에게 헌상했다.[12] 이 흑인 노예는 야스케(弥助)라는 이름을 얻고 노부나가가 죽을 때까지 15개월 정도 노부나가를 섬겼다고 전해진다.

또한 이 첫 번째 일본 방문 시, 당시 일본 지역 책임자였던 포르투갈인 준관구장 프란시스코 카브랄(フランシスコ・カブラル)의 아시아인 멸시 태도가 포교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격렬하게 대립했다. 1582년(덴쇼 10년) 카브랄을 일본에서 떠나게 했다. 발리냐노는 일본인의 자질을 높이 평가하는 동시에, 카브랄이 인정하지 않았던 일본인 사제 양성이 시급하다고 생각하고, 사제 양성을 위해 교육 기관을 충실히 했다.

발리냐노는 다음과 같은 교육기관들을 설립했다.

설립 연도교육 기관위치설명
1580년(덴쇼 8년)소신학교사가 아리아마(현: 나가사키현(長崎県)미나미시마바라시(南島原市))사제 양성
1580년(덴쇼 8년)소신학교시가 안토쿠(현: 시가현(滋賀県)오미하치만시(近江八幡市)안토쿠정)사제 양성
1581년(덴쇼 9년)대신학교오이타 후나이(현: 오이타현(大分県)오이타시(大分市))사제 양성
1580년(덴쇼 8년)수련원오이타 우스키예수회 입회 제1단계 수련



또한, 일본 포교에 있어서 재정 시스템의 문제점을 수정하고, 덴쇼 遣欧 소년 사절(天正遣欧少年使節) 계획을 발안했다. 이것은 일본인에게 유럽을 보여주는 동시에 유럽에 일본을 알리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1582년(덴쇼 10년), 발리냐노는 인도 고아까지 사절단을 호위했지만, 거기서 헤어져 고아에 남았다.

1587년(덴쇼 1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바테렌 추방령을 내려 예수회 선교사를 일본에서 추방시키는 명령을 내렸다. 예수회의 동인도 순찰사였던 발리냐노는 히데요시의 추방령이 어떻게든 무효가 되도록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는 1590년(덴쇼 18년), 귀국한 덴쇼 소년사절단과 함께 인도 총독의 대사 자격으로서 주라쿠 다이에서 히데요시와 회견했다. 발리냐노는 히데요시에게 황금장식을 붙인 매우 아름답고 훌륭한 밀라노산 백색 갑주 2벌, 모두 은으로 된 매우 훌륭한 장식이 붙은 커다란 검 두 자루, 진귀한 두자루의 총포, 총포로 사용할 수 있는 투리사드(총포이지만 무엇인지 확실치 않음) 하나, 야전용 천막 한세트, 대단히 훌륭한 유화, 괘포 4매, 아라비아산 말 두마리 등을 선물로 바쳤다. 이에 보답으로 히데요시는 발리냐노에게 커다란 쟁반 두개를 주었는데 하나에는 은 100매, 다른 쟁반에는 솜을 둔 비단 옷 4벌이 들어있었다. 또 그를 수행한 예수회 사제들에게도 똑같이 은과 비단 옷을 선물했다.[14] 그 때의 히데요시는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것 같은 코엘료의 태도에 격렬하게 비난하고 있었다. 이러한 히데요시의 분노를 억제하기 위해서 결국 발리냐노는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임진왜란)에 전면 협력을 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실제로 조선에 출병한 그 대부분이 고니시 유키나가를 비롯한 크리스천 영주들이었다.[15]

2. 5. 일본인 사제 양성과 교육 기관 설립

발리냐노는 일본에서의 예수회 선교 방침으로 "적응주의"를 채택했다. 이는 유럽의 기독교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일본 문화에 적응하는 방법이었다. 그는 유럽 방식을 고집하는 프란체스코회나 도미니코회 등의 탁발수도회와는 정반대의 방법을 택했으며, 이를 이유로 예수회 이외의 수도회가 일본에서 선교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이는 훗날 예수회와 탁발수도회 간의 대립으로 이어진다.[2]

1581년, 발리냐노는 예수회 선교사들을 위한 지침서인 Il Cerimoniale per i Missionari del Giappone|일본 선교사를 위한 의례서it를 저술했다. 이 책에서 그는 선교사들이 일본 사회의 계급 질서 속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명확히 제시했다. 그는 예수회원들이 일본 사회에서 동등한 지위로 여겨지는 고위 승려들의 행동을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일본 사회는 계급에 따라 의복, 음식, 행동 등이 세세하게 규정되어 있었다. 예수회원들은 고위 승려들처럼 좋은 음식을 먹고, 나가사키 시내를 다닐 때 시종을 거느리는 등, 당시 기준으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 이러한 방식은 탁발수도회뿐만 아니라 예수회 내부에서도 비판을 받았다.[12]

발리냐노는 일본인 사제 양성이 시급하다고 생각하고, 이를 위한 교육 기관 설립에 힘썼다. 1580년에는 사가 아리마(현: 나가사키현(長崎県)미나미시마바라시(南島原市))와 시가 안토쿠(현: 시가현(滋賀県)오미하치만시(近江八幡市)안토쿠정)에 소신학교(세미나리오(セミナリヨ))를, 1581년에는 오이타 후나이(현: 오이타현(大分県)오이타시(大分市))에 대신학교(콜레지오(コレジオ))를 설립했다. 또한, 1580년 오이타 우스키에는 예수회 입회 전 수련을 위한 시설인 수련원(노비샤도(ノビシャド))을 설치했다.

이러한 교육 기관들은 일본인 사제 양성을 위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아리마와 안토쿠의 세미나리오는 각각 22명, 33명의 신학생을 수용했으며, 이들은 라틴어와 일본어를 비롯하여 윤리 신학, 철학, 기독교 교리 등을 배웠다. 발리냐노는 문화적 적응을 강조하여, 신학교 건물은 개조된 불교 사찰을 사용하고, 학생들은 다다미 위에서 생활하며, 푸른색 목면 기모노와 검은색 망토(도부쿠(ドブク))를 입고, 생선 반찬과 흰 밥을 먹는 등 일본식 생활 방식을 따르도록 했다. 이는 예수회의 인문주의적 교육 및 신학적 탐구와 일본의 감성을 조화시키려는 노력이었다.

발리냐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사제 양성에는 어려움도 있었다. 예수회의 엄격한 가난 규칙과 일본 사회의 선물 문화 간의 충돌, 고백과 양심 성찰에 대한 문화적 차이, 그리고 종교 생활과 세속 생활을 분리하지 않는 일본의 전통 등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2. 6. 덴쇼 소년사절단 기획

발리냐노는 이토 만시오가 이끄는 나가사키 출신 일본 개종자들로 구성된 최초의 공식 일본 사절단인 덴쇼 일본 사절단을 기획하여 고아를 거쳐 마카오로 데려갔다.[7] 사절단은 리스본으로 항해하여 포르투갈, 스페인, 피렌체, 로마, 베네치아, 밀라노 등 유럽 각지에서 예우를 받으며 몇 년간 머물렀다.

당시 일본 지역 책임자였던 포르투갈인 준관구장 프란시스코 카브랄이 아시아인을 멸시하는 태도가 포교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판단한 발리냐노는 카브랄과 격렬하게 대립했고, 1582년 그를 일본에서 떠나게 했다. 발리냐노는 일본인의 자질을 높이 평가하며 일본인 사제 양성이 시급하다고 생각하여 교육 기관을 충실히 했다.

1580년 사가현(현 나가사키현 미나미시마바라시)과 시가현(현 시가현 오미하치만시 안토쿠정 지역자치구)에 설립된 소신학교(세미나리오), 1581년 오이타현(현 오이타현 오이타시)에 설립된 대신학교(콜레지오), 1580년 오이타 우스키시에 설치된 예수회 입회 첫 단계인 수련 기간을 위한 시설, 수련원(노비샤도)이 그것이다.

발리냐노는 일본 포교 재정 시스템의 문제점을 수정하고, 덴쇼 遣欧 소년 사절 계획을 발안했다. 이는 일본인에게 유럽을 보여주는 동시에 유럽에 일본을 알리는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1582년 발리냐노는 사절단을 인도 고아까지 호위했지만, 거기서 헤어져 고아에 남았다.

2. 7.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관계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바테렌 추방령을 내려 예수회 선교사들을 일본에서 추방시키는 명령을 내렸다. 예수회의 동인도 순찰사였던 발리냐노는 히데요시의 추방령을 무효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1590년(덴쇼 18년), 귀국한 덴쇼 소년사절단과 함께 인도 총독의 대사 자격으로 주라쿠 다이에서 히데요시와 회견했다.[14]

발리냐노는 히데요시에게 다음과 같은 선물들을 바쳤다.[14]

품목상세 설명
백색 갑주 2벌황금 장식이 붙은 아름다운 밀라노산
검 두 자루모두 은으로 된 훌륭한 장식이 붙음
진귀한 총포 두 자루
투리사드(총포의 일종) 하나총포로 사용할 수 있음
야전용 천막 한 세트
유화매우 훌륭함
괘포 4매
아라비아산 말 두 마리



히데요시는 이에 대한 답례로 발리냐노에게 다음과 같은 물품을 주었다.[14]

품목상세 설명
큰 쟁반 두 개하나에는 은 100매, 다른 하나에는 솜을 둔 비단 옷 4벌이 들어있음



히데요시는 발리냐노를 수행한 예수회 사제들에게도 똑같이 은과 비단 옷을 선물했다.[14]

당시 히데요시는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듯한 코엘료의 태도에 격분하여 비난하고 있었다. 이러한 히데요시의 분노를 억제하기 위해, 결국 발리냐노는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임진왜란)에 전면적으로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조선에 출병한 이들은 대부분 고니시 유키나가를 비롯한 크리스천 영주들이었다.[15]

2. 8. 재정 문제와 갈등

사업 규모가 커지면서 재정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신학교, 학교, 인쇄소, 선교 사업 등 모든 예수회 기관에는 자금이 필요했다. 발리냐노가 "하느님과 맘몬" 사이의 갈등이라고 묘사한 이 문제는 선교 역사 대부분 동안 계속되었다.

초기에는 일본 다이묘들이 포르투갈 무역선이 자기 지역 항구를 자주 방문하도록 하기 위해 예수회에 환심을 사려고 했다. 그러나 1580년 오무라 스미타다가 나가사키 항을 예수회에 양도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로마의 총장은 이러한 재산 취득에 충격을 받고 나가사키에 대한 예수회의 지배는 일시적이어야 한다고 지시했다. 그러나 발리냐노는 이 지시를 무시했는데, 그 이유는 나가사키가 쫓겨나고 박해받는 기독교인들의 피난처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회의 통치 아래 나가사키는 작은 어촌에서 고아나 마카오와 견줄 만한 국제 항구로 성장했다. 나가사키 항에 대한 예수회의 소유는 예수회에 일본으로 들어오는 모든 수입품에 대한 세금 독점권을 제공했다. 예수회는 일본 무역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는데, 많은 양의 일본 은이 중국 비단과 교환되어 광주로 운송되었다. 그러나 선교 지도자들은 예수회가 상업 거래에 관여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을 알고 있었고, 교역량을 최소한으로 유지하기로 했다.

이러한 교회 관습 위반은 다른 유럽 선교단 책임자들이나 아시아 간 무역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되었다. 결국 교황이 개입하여 1585년 교황청은 예수회의 모든 상업 활동을 즉각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발리냐노는 교황에게 간절히 호소하며, 연간 경비에 필요한 12000두카트가 다른 곳에서 충당되면 모든 무역을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비단 무역을 포기하는 것은 일본 선교를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1580년까지 예수회는 15만 명의 공동체와 200개의 교회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85명의 예수회 신부와 20명의 일본인 형제, 100명의 수사가 있었다. 10년 후에는 일본에 136명의 예수회 신부와 최대 300명의 관리 직원이 있었다. 선교 활동이 절정에 달했을 때, 예수회에 전적으로 자금을 의존하는 약 600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이 모든 것 외에도 교회, 학교, 신학교, 그리고 인쇄소 건설 및 유지에 많은 돈이 들었다. 발리냐노가 나가사키 항에서 제공되는 세금 수입에 의존하도록 선교부에 허가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2. 9. 말년과 죽음

1590년(덴쇼 18년) 발리냐노는 귀국하는 유럽 파견 사절단을 동행하여 두 번째로 일본을 방문했으며, 1591년(덴쇼 19년)에는 주라쿠다이(聚楽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알현하였다. 또한 일본 최초의 활판 인쇄기를 도입하여, 후에 "키리시탄판(キリシタン版)"이라고 불리는 서적들을 인쇄하였다. 1598년(게이초 3년)의 마지막 방문은 일본 선교에서 선발대였던 예수회와 후발대였던 프란치스코회 간의 대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13]

1603년(게이초 8년) 발리냐노는 마지막 순찰을 마치고 일본을 떠났으며, 3년 후 마카오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성 바울 천주당 터의 지하 성당에 매장되었으나, 이후 천주당이 소실되고 황폐화되면서 지하 성당과 함께 행방불명되었다. 그러나 1990년부터 1995년까지 진행된 발굴 조사를 통해 발견되어 현재는 박물관으로 정비되어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13]

발리냐노는 1606년 1월 20일 마카오에서 사망했으며, 성 바울 대학에 매장되었다.[13]

그의 예수회 추종자 중 한 명은 찬사에서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전 방문객이자 아버지일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이 말하듯이, 일본의 사도를 애도합니다."라고 적었다. 발리냐노는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대우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아시아인과 유럽인 간의 더욱 긴밀한 관계를 위한 길을 열었다. 그는 일본 국민을 매우 존경했으며, 일본이 세계에서 선도적인 기독교 국가 중 하나가 될 것이라는 미래를 구상했다. 그는 일본인들이 "다른 모든 동양 사람들뿐만 아니라 유럽인들보다도 뛰어나다"고 썼다.[8] 예수회 역사가 토마스 J. 캠벨은 그를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이후 동방 선교의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칭했다.[9] 루트비히 폰 파스토어는 그를 16세기 일본에서 가톨릭 확산의 주요 설계자로 평가했다.

알레산드로 발리냐노(1599년)

3. 평가 및 영향

알레산드로 발리냐노는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대우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아시아인과 유럽인 사이의 더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길을 열었다. 그는 일본 국민을 매우 존경했고, 일본이 세계에서 주도적인 기독교 국가 중 하나가 될 미래를 상상했다. 그는 일본인들이 "다른 모든 동양 사람들뿐만 아니라 유럽인들보다도 뛰어나다"고 썼다.[8]

토마스 J. 캠벨은 발리냐노를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이후 동방 선교의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평가했고,[9] 루트비히 폰 파스토어는 그를 16세기 일본에서 가톨릭 확산의 주요 설계자로 보았다.

3. 1. 긍정적 평가

발리냐노는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대우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아시아인과 유럽인들 사이의 더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길을 열었다. 그는 일본 국민을 매우 존경했고, 일본이 세계에서 주도적인 기독교 국가 중 하나가 될 미래를 상상했다. 그는 일본인들이 "다른 모든 동양 사람들뿐만 아니라 유럽인들보다도 뛰어나다"고 썼다.[8]

예수회 역사학자 토마스 J. 캠벨은 그를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이후 동방 선교의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9] 루트비히 폰 파스토어는 그를 16세기 일본에서 가톨릭 확산의 주요 설계자로 보았다.

참조

[1] 웹사이트 Novizi Gesuiti - Italia http://www.gesuiti.i[...] 2006-02-01
[2] 서적 Asia in the Making of Europ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5
[3] 서적 Histoire ecclésiastique des isles et royaumes du Japon, Volume 1, book 6, chapter XXVII. https://books.google[...] Cramoisy 1627
[4] 웹사이트 Jesuits' Journeys in Chinese Studies http://www.riccimac.[...]
[5] 서적 Dicionário Português-Chinês : 葡漢詞典 (Pu-Han Cidian) : Portuguese-Chinese dictionary https://books.google[...] Biblioteca Nacional 2001
[6] 논문 The Overlooked Connection between Ricci's: "Tianzhu shiyi" and Valignano's "Catechismus Japonensis" 2013
[7] 웹사이트 Alessandro Valignano http://ricci.bc.edu/[...]
[8] 서적 Historia del Principo y Progresso de la Compania de Jesus en las Indias Orientales (1542-64) 1584
[9] 서적 The Jesuits 1534-1921: A History of the Society of Jesus from Its Foundation to the Present Time http://www.gutenberg[...] The Encyclopedia Press 1921
[10] 웹사이트 Jesuits' Journeys in Chinese Studies http://www.riccimac.[...]
[11] 서적 Dicionário Português-Chinês : 葡漢詞典 (Pu-Han Cidian) : Portuguese-Chinese dictionary https://books.google[...] Biblioteca Nacional 2001
[12] 서적 耶蘇会の日本年報 拓文堂
[13] 논문 발리냐노와 예수회의 적응주의 선교정책 대구가톨릭대
[14] 서적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국립진주박물관
[15] 논문 16세기 예수회의 일본선교 연구 장로회신학대학교 세계선교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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