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하기 (방호순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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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하기는 일본 제국 해군이 1912년 취역한 지쿠마급 경순양함이다. 1907년 해군 확장 계획에 따라 건조되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연합국 측에서 활동했다. 이후 시베리아 출병에 참여했고, 중일 전쟁 발발 후 훈련선으로 사용되다가 1940년 해군 함정 목록에서 제외되었다. 1947년에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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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하기 (방호순양함) - [배(Ship)]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함명 | 야하기 |
원어 함명 | 矢矧 |
함명 유래 | 야하기강 |
함종 | 지쿠마급 방호순양함 |
함번 | 3 |
![]() | |
제원 | |
배수량 | 5,121톤 |
전장 | 144.8m |
선폭 | 14.2m |
흘수 | 5.1m |
추진 | 4축 파슨스식 터빈 엔진, 16개 보일러 |
마력 | 22,500마력 (16,800 kW) |
연료 | 1,128톤 석탄 |
속력 | 26노트 (시속 48 km/h; 30 mph) |
항속 거리 | 10노트(19 km/h)로 19,000km |
장갑 | 갑판: 27-57mm, 사령탑: 100mm |
정원 | 370명 |
무장 | |
주포 | 8 × QF 150mm /45 41년형 포 |
부포 | 4 × QF 12 파운드 12cwt 함포 |
기관총 | 2 × 7.7mm 루이스 경기관총 |
어뢰 | 3 × 18인치 어뢰발사관 |
건조 및 취역 | |
발주 | 1907년 회계년도 |
기공 | 1910년 6월 20일 |
진수 | 1911년 10월 3일 |
취역 | 1912년 7월 27일 |
퇴역 | 1940년 4월 1일 |
최후 | 1940년 해체 |
건조 조선소 | 미쓰비시 중공업 나가사키 조선소 |
소속 | |
국가 | 일본 제국 해군 |
동형함 | 지쿠마, 히라도 |
2. 건조 배경 및 설계
`야하기`는 일본 제국 해군이 러일 전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1907년 해군 확장 계획에 따라 건조한 지쿠마급 순양함 3척 중 하나이다. 이 함급은 일본 해군 순양함 중 최초로 터빈 기관을 채택했으며, 기관 성능 비교를 위해 동급함마다 다른 종류의 기관을 탑재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었다. `야하기`는 이러한 설계 방침에 따라 건조된 함선이다.
2. 1. 건조 과정
지쿠마급 순양함은 러일 전쟁의 교훈을 바탕으로 1907년 일본 해군 확장 계획의 일환으로 설계되었으며, 일본 해군 순양함 중 최초로 터빈 기관을 채용했다. 기관 성능 비교를 위해 동급함 3척(지쿠마, ''야하기'', 히라도)에는 각각 다른 종류의 기관이 탑재되었는데, ''야하기''에는 파슨스식 증기 터빈 4기 4축 추진 방식이 채택되었다.1909년 12월 23일, 나가사키 미쓰비시 조선소에서 건조 예정인 이등 순양함(프로젝트명 궁호(呂號))을 내부적으로 '야하기(矢矧)'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야하기''는 1910년 6월 20일 미쓰비시 중공업 나가사키 조선소에서 기공되었다. 1911년 10월 3일 진수식을 거행하며 정식으로 ''야하기''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후 1912년 7월 27일에 취역하였고, 동시에 이등순양함으로 분류되었다.
2. 2. 설계 특징
지쿠마급 순양함은 일본 해군의 순양함 중 최초로 터빈 기관을 채용한 함급이다. 기관 성능 비교를 위해 동급함 3척(지쿠마, 야하기, 히라도)에는 각각 다른 유형의 기관을 탑재했는데, 야하기는 파슨스식 증기 터빈을 선택했다.야하기는 전체 길이 144.8m, 너비 14.2m의 선체를 가졌으며, 통상 배수량은 5,040톤, 흘수선은 5.1m였다.
주 기관으로는 총 22,500 마력의 출력을 내는 파슨스 증기 터빈 엔진 2기를 탑재하여 2개의 스크루를 구동했다. 보일러는 캄폰 보일러 16기를 장착했으며, 4개의 높은 굴뚝을 통해 배기했다. 이 엔진 덕분에 당시로서는 빠른 27.14노트의 속도를 낼 수 있었으나,[1] 신형 엔진의 기어 재료 강도 문제로 유지 보수가 어려워 제 성능을 발휘하기는 힘들었다.
무장은 15 cm/45 41년식 주포 8문을 장비했는데, 함수와 함미에 각 1문씩, 그리고 선체 양쪽 스폰슨에 3문씩 배치되었다. 지쿠마급 순양함은 측면 무장과 주포에 동일한 구경의 포를 사용한 것이 특징이었다. 부무장으로는 QF 12파운더 12 cwt 해군포 4문과 7.7mm 루이스 기관총 2정을 탑재했다. 또한, 457mm 어뢰를 발사하는 어뢰 발사관 3문을 갖추었다. 1919년 이후에는 대공 방어 강화를 위해 4번 굴뚝의 빔 부분에 8 cm/40 3년식 해군포 2문을 추가로 설치하고, 기존의 12파운더 포 3문을 제거했다.[1]
3. 함력
지쿠마급 순양함의 2번함인 야하기는 일본 해군 순양함 중 최초로 터빈 기관을 채용한 함선 중 하나이다[10]. 기관 성능 비교를 위해 동급함 3척에는 각기 다른 종류의 기관이 탑재되었는데, 야하기에는 파슨스식 증기 터빈 4기와 4축 추진 방식이 채택되었다[10].
야하기는 1910년 6월 20일, 미쓰비시 합자회사 미쓰비시 조선소에서 기공되었고[12], 1911년 10월 3일에 진수식을 거쳐 정식으로 '야하기'로 명명되었다[12][5][9]. 1912년 7월 27일에 준공되었으며, 같은 날 일본 해군의 이등함(경순양함)으로 분류되었다[12][14].
취역 후 야하기는 다양한 임무에 투입되었다. 1915년 12월 4일 요코하마 앞바다에서 열린 특별 관함식에서는 공봉함(供奉艦)으로 참가했다[15][16].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남양 군도 점령 작전에 참가했으며, 남중국해, 인도양, 술루해 등지에서 작전을 수행했다[12]. 1917년에는 연합국 함선 호위 임무를 마치고 호주 프리맨틀에 입항하려다 해안포로부터 경고 포격을 받는 사건이 발생했지만, 이후 호주 총독의 사과로 마무리되었다.
전후에는 시베리아 출병에 참가하여 일본 지상군을 지원했으며, 1918년에는 스페인 독감 유행으로 마닐라에 긴급 입항하여 많은 승무원이 피해를 입기도 했다. 1922년에는 히로히토 황태자의 시코쿠 순행 시 일부 구간에서 어소함(御召艦) 임무를 수행하고 공봉함으로 동행했다[17][21][24]. 1923년부터는 주로 중국 해역 경비 임무에 투입되어 양쯔강 등지에서 활동했다[12]. 1926년 함정 분류 등급 개정에 따라 지쿠마급 순양함의 3번함이 되었다[11].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이후 예비함으로 분류되었고, 1940년 4월 1일에 함적에서 제외되어 '폐함 제12호'로 가칭되었다[26]. 이후 구레 해병단의 연습선으로 사용되다가 1943년에는 오타케로 옮겨져 해군 잠수 학교에서 사용되었다. 태평양 전쟁 종전 후인 1947년 1월 31일부터 7월 8일까지 가사도의 도크에서 해체되었다.
3. 1. 제1차 세계 대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일본 제국은 영일 동맹에 따라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였다. 야하기는 1914년 막시밀리안 폰 슈페 제독이 이끄는 독일 동아시아 전대를 추격하는 일본 함대에 속했다. 야하기는 히라도와 함께 마쓰무라 다쓰오 소장이 지휘하고 전함 사쓰마가 이끄는 연합군 제2 남부 전대에 배속되어, 독일 순양함 엠덴을 수색하기 위해 수마트라 일대를 순찰했으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또한 야하기는 남양 군도 점령 작전에 참가했으며[12], 남중국해, 인도양, 술루해 등지에서 작전을 수행했다[12]. 1914년 12월부터 1915년 1월까지는 치쿠마와 함께 호주 북부 퀸즐랜드 해안에서 순찰 임무를 수행했다.
1917년 2월 7일, 일본 제국 해군은 야하기를 비롯하여 쓰시마, 스마, 니이타카 순양함과 제2 구축대로 구성된 제1 특별 전대를 창설했다. 이 전대는 싱가포르에 기지를 두었으며 오구리 고자부로 소장이 지휘했다. 같은 해 3월 26일, 영국 해군성은 독일의 통상 파괴 작전에 대응하여 연합국 선박 보호 강화를 위해 치쿠마와 히라도를 호주와 뉴질랜드에 추가로 파견해 줄 것을 일본 측에 요청했다. 이에 따라 야하기와 스마는 인도양으로 이동하여 영국 중국 전대와 협력 작전을 지속했고, 쓰시마와 니이타카는 모리셔스로 이동했다. 야하기는 1917년 5월부터 10월까지 호주와 뉴질랜드 동부 해안을 순찰하며 연합군 함선 호위 작전에 기여했다.
1917년 11월 20일, 연합국 함선 호위 임무를 마치고 호주 프리맨틀 항에 입항하려던 야하기는 해안포로부터 포격을 받는 사건이 발생했다. 포탄 한 발이 야하기의 돛대를 스치고 갑판을 넘어 바다에 떨어졌다. 호주 정부는 야하기에 탑승하고 있던 도선사가 입항 시 요구되는 적절한 신호를 보내지 않아 경고 차원에서 포격한 것이라고 해명했으며, 이후 오스트레일리아 총독이 퍼스에 정박 중인 야하기를 직접 방문하여 함장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호주와 뉴질랜드 방어 임무를 수행하던 야하기는 1918년 10월 21일 시드니를 출발하여 일본으로 귀환했다.
3. 2. 시베리아 출병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야하기''는 볼셰비키 적군에 맞선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 기간 동안 러시아 동부 해안에서 순찰 임무를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시베리아에 파견된 일본 지상군에게 보급품을 제공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했다.3. 3. 전간기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야하기''는 볼셰비키 적군에 맞선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 기간 동안 시베리아에 있는 일본 지상군에 보급품을 제공하고 지원하기 위해 러시아 동부 해안에서 순찰 임무를 수행했다.
1918년 12월, ''야하기''의 승무원들은 스페인 독감 대유행으로 인플루엔자에 걸렸고, 이로 인해 필리핀 마닐라 항구에 46일 동안 긴급 입항해야 했다. 이 기간 동안 승무원 300명이 활동 불능 상태가 되었고, 48명이 사망했다. 1938년에 매장지에 세워진 기념비는 오늘날에도 발렌수엘라에 남아 있다.
1922년(다이쇼 11년) 11월, 다이쇼 천황의 황태자(섭정궁 히로히토 친왕, 후의 쇼와 천황)가 특별 기동 훈련 통제를 위해 시코쿠로 향했을 때, ''야하기''는 어소함(御召艦)의 임무를 일부 수행했다[17][18][19]. 11월 22일, 황태자는 가가와현 다카마쓰항에서 ''야하기''(함장 시마 유키치 대좌)에 승선하여 에히메현 이마바리시로 이동했고, 같은 날 오후 다시 ''야하기''를 타고 미쓰하마정으로 이동했다[21]. 이 순행에서 주 어소함은 전함 이세였으며, ''야하기''는 구축함 타니카제와 함께 공봉함(供奉艦)으로도 활동했다[24].
1923년(다이쇼 12년)부터 ''야하기''는 주로 중국 해역의 경비 활동에 투입되었으며[12], 마닐라와 마카오에 자주 입항했다. 1923년부터 1937년까지는 순양함 도네를 대신하여 양쯔강 순찰 임무를 수행하며 중국 내륙 수역에서 해상 경계 임무를 맡았다.
1926년(다이쇼 15년) 11월 29일, 함정 종류 등급 개정에 따라 지쿠마급 순양함이 제정되면서 ''야하기''는 동급의 3번함으로 분류되었다[11].
1935년(쇼와 10년) 3월 27일부터 5월 10일까지 히로시마현 구레시에서 개최된 국방과 산업 대박람회에서는 려호 제53 잠수함과 함께 일반 관람에 제공되었다[25].
1937년 중일 전쟁이 시작된 후, ''야하기''는 예비함으로 분류되어 주로 계류 훈련선으로 사용되었다.
3. 4. 중일 전쟁 및 태평양 전쟁
1940년 4월 1일, 야하기는 함적에서 제외되어 '''폐함 제12호'''로 가칭되었다[26]. 이후 구레 해병단의 연습선으로 사용되었다. 1943년에는 오타케로 옮겨져 해군 잠수 학교에서 사용되다가 태평양 전쟁 종전을 맞이했다. 전후 1947년 1월 31일부터 7월 8일까지 가사토 조선소의 도크에서 해체되었다.3. 5. 최후
1940년 4월 1일 제적되어 '''폐함 제12호'''로 가칭되었고[26], 구레 해병단의 연습선으로 사용되었다. 1943년에는 오타케로 회항하여 해군 잠수 학교에서 사용되다가 종전을 맞이했다. 1947년 1월 31일부터 7월 8일까지 가사토섬 도크에서 해체되었다.4. 1918년 스페인 독감 유행
1918년 세계적으로 유행한 스페인 독감(인플루엔자)은 야하기 함에도 큰 비극을 안겼다. 1918년 10월, 야하기는 군함 치토세와 교대 명령을 받고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를 출항하여 함대 사령부가 있던 싱가포르에 11월 9일 입항했다. 교대함 도착을 기다리며 정박하는 동안, 함장 야마구치 덴이치 대좌는 승무원들의 사기를 고려하여 상륙을 허가했다. 당시 다른 함정에서도 독감 피해가 발생하고 있었으나, 싱가포르 시내를 눈앞에 두고 승무원들을 함내에만 머물게 하는 것이 사기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 판단한 것으로 추측된다.[27]
11월 30일 싱가포르를 출항한 후, 함내에 스페인 독감이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했다. 감염자가 늘어났지만 제대로 된 치료나 간호가 이루어지지 못했고, 식사를 준비할 취사병마저 부족해져 승무원들은 밥과 소금으로 끼니를 때우는 등 처참한 상황에 놓였다. 12월 5일, 야하기는 필리핀 마닐라에 긴급 입항했다. 당시 함선은 닻을 올리거나 밧줄을 내릴 승무원조차 부족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으며, 갑판 곳곳에 쓰러져 신음하는 승무원들의 모습은 방문객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마닐라 입항 후에도 사망자가 속출했다. 12월 9일 후몬 부장이 사망한 것을 시작으로, 10일에는 14명, 11일 5명, 12일 8명, 13일 4명이 사망했다. 총 사망자는 함내에서 6명, 병원에서 42명으로 총 48명에 달했다. 이는 당시 승선 인원 469명(편승자 포함) 중 상당한 비율이었다.[28] 야하기는 마닐라 항구에 46일 동안 머물러야 했으며, 이 기간 동안 승무원 300명이 활동 불능 상태가 되었다.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1921년 1월 19일, 마닐라 교외 산페드로 마카티의 영국인 묘지에 높이 1장 6척(약 4.8m)의 "마닐라 주둔 군함 야하기 병사자 묘비"가 세워졌고, 같은 날 납골식이 거행되었다. 또한, 야하기 신사에 사진 액자를 봉납(1920년 5월 27일)하고, 신사의 분령(分霊)을 함선에 안치(1920년 9월 7일)했으며, 1/100 크기의 함선 모형을 봉납(1921년 10월 말)하고 승무원 전원이 참배하는 등 추모 활동이 이어졌다. 야하기 신사의 분령을 함선에 안치한 것은 일본 해군 내에서 선구적인 사례로 평가되며, 이후 함내 신사 설치가 해군 전체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1937년 3월 4일에는 일본 구레 해군 묘지 내에 유족들의 뜻을 모아 "군함 야하기 순직자지비"가 건립되었다. 이 비석은 이후 일부 변형(표면 제자 및 뒷면 금속판 제거)되었다가, 1982년에 제자만 복원되었다. 뒷면 금속판의 내용은 기록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당시 "구레 신문" 기사에 전문으로 보이는 내용이 실려 있어 복원 설치가 요구되고 있다. 필리핀 발렌수엘라에도 1938년 매장지에 세워진 기념비가 현재까지 남아 있다.
5. 기념물 및 유물
아이치현 야하기 신사 (오카자키시)에는 승무원들이 봉납한 1/100 크기의 군함 모형과 관련 자료들이 보존되어 있다.[1] 또한, 함선 함수를 장식했던 국화 문장은 오사카 호국 신사에 현존하며, 이는 일본 전국적으로도 드문 유물로 평가받는다.
5. 1. 야하기 신사 봉납 모형
아이치현 야하기 신사 (오카자키시)에는 유리 케이스에 보관된 1/100 크기의 야하기 봉납 모형이 현존한다.[1] 이는 1921년(다이쇼 10년) 4월 5일과 6일 양일간, 가마고리항에 정박 중이던 야하기의 전 승무원이 상륙하여 이 신사에 참배한 것을 기념하여 승무원들의 손으로 직접 제작된 것이다.[1] 모형은 같은 해 10월 말에 신사에 봉납되었다.[1]전 승무원의 신사 참배는 이후에도 이어졌는데, 1922년(다이쇼 11년) 4월 4일과 5일, 그리고 1925년(다이쇼 14년)에는 지타군 다케토요항에 정박 중일 때 이루어졌다.[1] 이 외에도 신사에는 1920년(다이쇼 9년) 5월 27일자 봉납 사진 액자, 두 차례의 참배 요령, 함장의 명함, 관련 신문 기사 등의 자료가 권자장(巻子装) 자료로 보존되어 있다.[1]
한편, 1911년(메이지 44년) 10월 3일 나가사키 미쓰비시 조선소에서의 진수 기념 엽서 3점과 야하기 신사 참배 시에 발행된 『야하기의 족자』(16페이지, 19cm)는 오카자키 시립 중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1] 이 중 『야하기의 족자』는 디지털 아카이브를 통해 공개되어 있다.[1]
5. 2. 국화 문장
군함 야하기의 함수를 장식했던 '''국화 문장'''(菊の御紋|키쿠노 고몬일본어, 16엽 팔중)이 현재 오사카 호국 신사 본전에 남아 있다. 이 문장은 철제 프레임에 부착되어 전시 중이다. 크기는 직경 약 75cm, 두께 약 7cm의 목재이며, 금색(금박으로 추정)을 띠고 있다.문장 뒷면에는 먹으로 쓴 글씨가 남아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일본 군함 야하기의 어문장"
"이 어문장은 대동아 전쟁 중 오사카 국방관에 하사되어, 쇼와 20년(1945년) 8월 15일 종전과 동시에 오사카 호국 신사에 봉납되었으며, 이듬해 21년(1946년) 8월 동 신사로부터 배령한 것이다"
"이마이 가이치로"
이 문장은 야하기가 쇼와 15년(1940년) 4월 1일에 제적될 때 함선에서 분리되었다. 이후 어떤 경위로 '오사카 국방관'에 하사되었고, 오사카 대공습으로 국방관이 소실되기 전에 다른 곳에 보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종전일인 쇼와 20년(1945년) 8월 15일에 오사카 호국 신사에 봉납되었다. 당시 신사의 신직이었던 이마이 가이치로(今井嘉一郎일본어)는 진주군에 의해 몰수될 것을 우려하여 문장을 개인적으로 보관해왔다. 이후 헤이세이 27년(2015년) 이후 그의 아들에 의해 신사에 반환되었다.
원래 야하기의 함수는 뾰족한 형태였으며, 뱃머리 좌우 양쪽에 국화 문장이 하나씩 부착되어 있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현재 남아있는 것은 오른쪽에 붙어있던 것이라고 한다. 이 문장은 일본 전국적으로도 보기 드문 유물로 평가받는다.
6. 역대 함장
※『일본 해군사』 제9권·제10권의 「장관 이력」 및 『관보』에 근거함. 계급은 취임 당시 기준.
겸 사세보 해군 공창 의장원 (1912.7.31-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