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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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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통일민주당은 1987년 4월 21일 김영삼과 김대중에 의해 창당된 대한민국의 정당이다. 신한민주당의 분열로 창당되었으며, 김영삼이 총재를 맡았다.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후보가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1988년 총선에서는 59석을 얻어 제3당으로 후퇴했다. 이후 1990년 민주정의당, 신민주공화당과 합당하여 민주자유당이 되면서 소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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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민주당 - [정당]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통일민주당
로마자 표기Tongilminjudang
한자 표기統一民主黨
영문 이름Reunification Democratic Party
로고
창당일1987년 5월 1일
해산일1990년 1월 1일
분당 전 정당신한민주당
합병 정당민주자유당
후계 정당민주당
중앙 당사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마포구 만리재로 15(공덕동, 제일빌딩)
정치
총재김영삼
이념자유주의
중도개혁주의
민주화
포괄정당
정치 성향중도 ~ 중도우파
색깔}} 빨간색 (관례)
파란색
기타
깃발

2. 역사

1987년 김영삼김대중신한민주당에서 분당하여 통일민주당을 창당했다. 창당 과정은 순탄치 않았는데, 1987년 4월 '용팔이'로 불리던 김용남이 깡패들을 동원해 통일민주당 지구당 창당을 방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3]

1987년 전두환 대통령의 4·13조치에 맞서 통일민주당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결성, 6월 항쟁을 주도하여 노태우6·29 선언을 이끌어냈다.

통일민주당 로고


그러나 198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후보 단일화에 실패, 김대중평화민주당을 창당하며 분열되었다. 통일민주당은 김영삼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으나, 제13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에게 패배하였다.

1988년 대한민국 총선에서는 59석을 확보하여 민주정의당, 평화민주당에 이어 제3당이 되었다. 이후 여소야대 국회에서 평화민주당, 신민주공화당 등과 공조하여 노태우 정부를 견제하였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창당되면서 통일민주당은 소멸하였다. 3당 합당에 반대한 잔류파들은 민주당을 창당하였다.

2. 1. 창당 배경

당시 제1야당이던 신한민주당은 "이민우 구상"과 이철승 등의 의원내각제 개헌 주장으로 내분에 빠졌다.[3] 김영삼김대중은 새로운 야당을 만들기로 합의하고 1987년 4월 21일에 통일민주당을 창당하였다. 창당 후 상도동계, 동교동계 의원들을 신한민주당으로부터 탈당시켜 입당하게 하였다. 양김은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구성해 민주진영을 구축하기도 했다.

1986년 12월 24일 "이민우 구상"이 공개되면서 이 문제는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민우는 의원내각제 헌법 개정을 수용할 의사를 밝혔다. 이 계획은 김영삼과 김대중 모두에게 독재정권에 대한 굴복으로 비판받았고, 이민우가 사전에 그들과 논의하지 않은 것에 대해 개인적으로 모욕감을 느꼈다. 갈등이 심화되면서 김대중과 김영삼의 추종자들이 신한민주당에서 분당하여 1987년 4월 통일민주당을 창당하게 되었다.

신민당을 탈당한 의원 75명 중 69명(상도동계[1]=김영삼계 37명, 동교동계[2]=김대중계 32명)에 의해 1987년 5월 1일, 신당 “통일민주당”이 결성되었다. 4월 9일에는 결당준비위원회, 13일에는 결당발기인대회, 5월 1일에는 결당대회라는 다급한 속도로 결성되었다.

2. 2. 용팔이 사건

1987년 4월 '용팔이'로 불리던 김용남이 깡패들을 동원해 통일민주당 지구당 창당을 방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3] 정체불명의 20대 청년 150여 명이 도끼로 지구당 출입문을 부수고 난입해 당원들을 무차별 폭행하고 사무실 집기를 불태운 일명 '용팔이 사건'으로, 김용남 등은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았다.[3]

2. 3. 6월 민주항쟁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

1987년 전두환 대통령이 개헌 논의 중지를 선언한 4·13 조치는 통일민주당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통일민주당은 이 조치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5월 27일 비제도권 사회단체들과 함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여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위한 장외 투쟁을 강화했다.[3]

6월 10일, 통일민주당은 국민운동본부와 공동으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전국적인 집회와 시위를 이끌었다. 이어 6월 26일에는 '민주헌법쟁취국민평화대행진'을 통해 전국적인 시위를 유발하며 민주화 열기를 고조시켰다.

이러한 국민적 압력에 민주정의당 대표였던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는 6·29 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통일민주당이 주도한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성과였다.

2. 4. 분열과 평화민주당 창당

198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후보 단일화 문제로 김영삼김대중이 갈등을 겪었다. 결국 협상이 결렬되면서 1987년 10월 29일, 김대중의 동교동계 의원들이 통일민주당을 집단 탈당하여 평화민주당을 창당했다.[2]

이러한 분열은 야권 표 분산으로 이어져, 198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가 36.6%의 득표율로 당선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2. 5. 1987년 대선과 김영삼 후보

제13대 대통령선거에서 통일민주당은 상도동계가 중심이 되어 김영삼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1] 그러나 야권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김대중평화민주당을 창당하고 독자 출마를 선언하여 야권 표가 분열되었다.[2] 결국, 1987년 12월 16일 실시된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후보는 유효투표의 28.0%를 획득하는 데 그쳐, 36.6%를 획득한 민주정의당노태우 후보에게 패배하였다.

이는 6월 항쟁과 6·29 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야당 후보들의 표 분산으로 인해 독재정권의 후계자인 노태우가 당선되는 결과를 낳았다. 김영삼과 김대중의 갈등은 1986년 이민우 당시 신한민주당 총재가 의원내각제 개헌 수용 의사를 밝힌 "이민우 구상"(이민우 구상한국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두환 정권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취했던 김영삼과 김대중은 이민우의 온건한 태도에 반발하였고, 결국 1987년 4월 신한민주당에서 분당하여 통일민주당을 창당하게 되었다.

1987년 대선에서 김영삼 후보의 패배는 지역주의 심화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듬해 1988년 총선에서 통일민주당은 부산에서 15석 중 14석을 차지하는 등 경상남도에서 지지층을 유지했지만, 소선거구제로 인해 평화민주당보다 90만 표 이상을 더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석 수에서는 3위에 그쳤다.

2. 6. 1988년 총선과 제3당으로의 후퇴

1988년 대한민국 총선에서 통일민주당은 실망스러운 결과를 얻었다. 부산에서 15석 중 14석을 차지하는 등 경상남도에서 지지층을 유지했지만, 소선거구제로 인해 평화민주당보다 90만 표 이상을 더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석 수에서는 3위에 그쳤다.

정당지역구전국구합계
민주정의당125석
평화민주당70석
통일민주당59석



이는 198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 야권 후보 단일화 실패로 김영삼김대중이 모두 출마하여 야권 표가 분산되었고, 결과적으로 노태우가 36.6%의 득표율로 당선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소선거구제의 영향과 지역주의 심화 등이 통일민주당의 패인으로 분석된다.

2. 7. 3당 합당과 민주자유당 창당

1990년 이른바 3당 합당을 통해 민주자유당이 창당되면서 통일민주당은 소멸하였다. 당시 통일민주당은 여소야대 국회에서 평화민주당, 신민주공화당 등과 공조하여 노태우 정부를 견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1988년 대한민국 총선에서 경상남도 지역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소선거구제로 인해 김대중의 평화민주당보다 90만 표 이상을 더 얻었음에도 의석 수에서 3위에 그치는 실망스러운 결과를 얻었다.

이에 통일민주당은 집권 여당인 민주정의당 및 보수 성향의 신민주공화당과의 합당 제안을 수용하였다. 이러한 3당 합당은 박정희 (신민주공화당)와 전두환 (민주정의당)의 군사독재 잔재들과 손을 잡은 것으로 여겨져 당 안팎에서 "반역"과 다름없다는 비판을 받았다. 김영삼은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로 이러한 비판에 답했다.[1]

3당 합당에 반대한 노무현, 이기택 등은 1990년 새로운 민주당을 결성했고, 이후 김대중의 평화민주당과 합쳐 민주당을 만들었다.[1] 통일민주당은 1990년 1월 22일 해산되어 새롭게 결성된 민주자유당에 합류했다.[1]

2. 8. 3당 합당 반대파의 행보

1990년 이른바 3당 합당을 통해 민주자유당이 창당되면서 통일민주당은 소멸하였다. 3당 합당에 반대한 잔류파들은 민주당을 창당하였다.[1][2]

노무현, 이기택 등을 포함한 합당 반대파들은 1990년 민주당을 결성했고, 이후 김대중평화민주당과 합쳐 민주당을 만들었다.[1][2]

3. 역대 총재

대수역대 총재직함임기
1김영삼총재1987년 5월 1일 ~ 1988년 2월 8일
(임시)김명윤총재권한대행1988년 2월 8일 ~ 1988년 5월 12일
2김영삼총재1988년 5월 12일 ~ 1990년 1월 31일


4. 역대 선거 결과

역대 선거 결과
구분날짜후보득표수득표율의석수결과
대통령 선거1987년 12월 16일김영삼6,337,581표28.0%-낙선 (2위)
국회의원 선거1988년 4월 29일-4,680,175표23.8%59석 (지역구 46석, 비례대표 13석)제3당



1987년 대선과 1988년 총선 결과는 위 표와 같다. 김영삼은 대통령 후보로 나섰으나 낙선했고, 총선에서는 제3당의 위치에 머물렀다.

4. 1. 대통령 선거

198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 통일민주당은 김영삼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그러나 야당 지지표가 김대중과 분열되면서, 민주정의당노태우 후보에게 패배하였다. 김영삼은 6,337,581표를 얻어 28.0%의 득표율로 2위를 기록하며 낙선하였다.

선거후보득표수득표율(%)결과
198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김영삼6,337,58128.0낙선 (2위)


4. 2. 국회의원 선거

1988년 총선에서 통일민주당은 소선거구제 도입으로 인해 평화민주당보다 90만 표 이상을 더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석 수에서는 3위에 그치는 실망스러운 결과를 얻었다. 다만, 부산에서 15석 중 14석을 차지하는 등 경상남도 지역에서는 지지 기반을 유지했다.

선거지도자득표수%의석수순위상황
지역구비례대표합계
1988년김명윤4,680,17523.834613593위야당


5. 평가

통일민주당은 한국 현대 정치사에 있어 다양한 시각으로 평가받고 있다.
긍정적 평가


  • 6월 민주항쟁 주도: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주도하며 민주화 운동에 크게 기여했다.[1][2]
  • 대통령 직선제 쟁취: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내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부정적 평가

  • 야권 분열: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과의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여 야권이 분열되었고, 이는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의 당선에 영향을 미쳤다.[1][2]
  • 지역주의 심화: 1988년 총선에서 지역주의에 기반한 정당 구도를 심화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
  • 3당 합당: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에 합류하며 보수 정당화되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 과정에서 이기택, 노무현 등은 3당 합당에 반발하여 민주당을 결성했다.[1][2]

종합적 평가통일민주당은 6월 민주항쟁을 주도하고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는 등 민주화에 기여했으나, 야권 분열, 지역주의 심화, 그리고 3당 합당과 같은 한계점도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6. 같이 보기

참조

[1] 일반 상도동
[2] 일반 동교동
[3] 웹사이트 Daum 미디어다음 - 뉴스 http://media.daum.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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