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미노 미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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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미노 미후네는 722년에 태어나 785년에 사망한 일본 나라 시대의 관료이자 학자이다. 그는 승려 생활을 거쳐 환속한 후 관직에 나아가,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난을 진압하는 데 기여하여 관위가 올랐다. 이후 도산도 순찰사, 다자이쇼니 등을 역임했으며, 대학두와 문장박사를 지냈다. 또한, 한시와 서예에 능했으며, 일본 천황의 시호 제정에 기여하고, 《당대화상동정전》 등의 저술 활동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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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노 미후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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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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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미후네 왕 (御船王) |
기타 이름 | 모토히라 (元開, 법명) 오우미노 미후네 (淡海三船) |
출생 | 722년 |
사망 | 785년 8월 26일 |
사망 장소 | 알 수 없음 |
안장 장소 | 알 수 없음 |
국적 | 알 수 없음 |
신분 | |
직업 | 문인 |
시대 | 나라 시대 |
장르 | 한시 |
언어 | 고전 중국어 |
활동 기간 | 나라 시대 |
가족 관계 | |
조상 | 고분 천황 (고조부), 가도노 왕 (조부), 이케베 왕 (부) |
자녀 | 다치바나노 시마다마로의 배우자 |
관직 | |
최종 관위 | 종4위 하 형부성 경 |
섬긴 천황 | 고켄 천황 준닌 천황 쇼토쿠 천황 고닌 천황 간무 천황 |
2. 생애
오미노 미후네는 나라 시대 후기의 귀족이자 뛰어난 문인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본래 황족이었으나 751년 신적강하하여 오미노 마히토(淡海眞人)라는 씨성을 받고 신하가 되었다. 젊은 시절에는 잠시 출가하여 원개(元開)라는 법명으로 활동하기도 했다.[5]
관료로서는 식부소승 등을 시작으로 지방관과 중앙 관직을 두루 거쳤다. 756년 조정을 비방했다는 혐의로 잠시 투옥되기도 했으나[5][6], 764년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난 때는 고켄 상황 측에 가담하여 난 진압에 공을 세워 관위가 오르고 훈공을 받았다.[7] 이후 순찰사로 활동하다가 지나치게 엄격한 감찰 방식으로 인해 다자이쇼니로 좌천되기도 했으나, 고닌 천황 대에 중앙 정계로 복귀하여 형부대보, 대학두, 문장박사 등을 역임했다. 간무 천황 대에는 형부경까지 올랐으며, 785년 향년 64세로 사망했다.[1][2][3][4][6]
《속일본기》(續日本紀)는 그를 총명하고 박학하며 글쓰기를 즐겼다고 평가하며[7], 당대 최고의 문장가 이소노카미노 야카쓰구와 함께 '문인의 으뜸'(文人の首)으로 불렸다.[8] 그는 한시에 뛰어나 현존하는 일본 최고(最古)의 한시집 《회풍조》(懐風藻)의 편찬자로 유력시되며, 그의 시 5수가 《경국집》(経國集)에 실려 있다. 또한 신라 승려 원효의 《금강삼매경론》에 감명받아, 779년 방일한 원효의 손자 설중업에게 시를 지어 선물하는 등 신라와의 문화 교류에도 관심을 보였다. 이 외에도 역대 천황들의 중국풍 시호 제정, 당나라 승려 간진의 전기 《당대화상동정전》(唐大和上東征伝) 저술[9], 《속일본기》 편찬 참여 등 다방면에 걸쳐 문인으로서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2. 1. 출생과 가계
미후네는 722년에 태어났다.[1][2][3][4]그의 아버지는 이케베 친왕( 池辺王|이케베노 오키미일본어 )이었으며, 이케베 친왕은 카도노 친왕( 葛野王|카도노노 오키미일본어 )의 아들이었다. 카도노 친왕은 고분 천황의 아들이다.[1][2] 그는 본래 황족으로, '''미후네 친왕'''( 御船王 or 三船王|미후네노 오키미일본어 )으로 알려졌으나,[1] 751년 정월에 신분이 평민으로 강등되어 성씨 '오미'(淡海)와 가바네 중 하나인 ''마히토''( 真人일본어 )라는 칭호를 받았다.[1][2]
관계 | 이름 |
---|---|
아버지 | 이케베 친왕 |
어머니 | 불명 |
자녀 | 딸: 다치바나노 시마다마로의 아내 |
2. 2. 초기 경력
요로 6년(722년)에 태어났다. 덴표 연간에 당나라의 승려 도센(道セン)을 따라 출가하여 법명을 '''원개(元開)'''라 칭하였다.고켄 천황 시대인 덴표쇼호 3년(751년) 정월, 30명 가량의 여러 왕(王)들에 대한 신적강하가 이루어졌을 때, 칙령에 따라 환속하여 '미후네 왕(御船王)'으로 돌아갔다. 이후 오미노 마히토(淡海眞人)라는 씨성을 받고 '''오미노 미후네'''(淡海三船)로 이름을 고쳤다. 이와 함께 식부소승 및 내시에 임명되었다.
덴표쇼호 8년(756년) 5월, 조정을 비방하였다는 죄목으로 이즈모노카미였던 오토모노 고시비(大伴古慈斐)와 함께 위사부(衛士府)에 투옥되었으나[5], 얼마 지나지 않아 방면되었다.[6]
준닌 천황 시대에는 오와리노스케와 산인도 순찰사를 거쳤다. 덴표호지 5년(761년)에는 종5위하의 관위와 함께 스루가노카미에 임명되는 등 지방관을 역임했다. 덴표호지 6년(762년)에는 문부소보가 되었다. 덴표호지 8년(764년) 8월, 미마사카노카미로 임명되어 다시 지방관으로 나갔다.
같은 해 9월, 에미노 오시카쓰의 난이 일어났다. 당시 후지와라노 나카마로는 우지에서 오미국으로 도망쳐 병력을 모으려 했다. 이때 조이케사(造池使)로서 오미국 세타에 머물고 있던 미후네는 판관 사에키노 미노(佐伯三野)와 함께 나카마로가 보낸 사자와 그 일당을 체포하고 세타 다리(勢多橋)를 불태워 나카마로 군의 도산도 진격을 막았다. 이 공으로 미후네는 세 단계 승진하여 정5위상이 되었고, 훈3등의 훈장을 받았으며, 오미노스케에 임명되었다.[7] 덴표진고 2년(766년)에는 공전 20정을 받았다.
쇼토쿠 천황 시대에는 병부대보와 시종을 역임했다. 덴표진고 2년(766년) 9월에는 도산도 순찰사에 임명되었다. 순찰사로서 자신의 명예와 영달을 중시하여 지방관에 대한 감찰을 엄격하게 수행했다. 특히 시모쓰케국 국사들의 부정 행위(세금 미납, 관유물 횡령 등)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시모쓰케노스케 유게노 사쓰마(弓削薩摩)에게만 외출 금지 및 직무 정지 처분을 내리고, 그가 은사를 받은 후에도 다시 죄를 따지려 했던 것이 문제가 되었다. 이로 인해 진고케이운 원년(767년) 6월 순찰사에서 해임되었고, 8월에는 다자이쇼니로 좌천되었다. (일설에는 당시 고켄 천황의 총애를 받던 승려 도쿄와의 관계 때문에 해임되었다고도 한다.)
고닌 천황 시대에 들어 호키 2년(771년) 형부대보로 중앙 관직에 복귀했으며, 이후 대학두, 문장박사 등을 역임하며 학문 분야에서도 활동했다. 호키 11년(780년)에는 종4위하에 올랐다.
간무 천황 시대인 엔랴쿠 3년(784년) 형부경으로 승진했으나, 이듬해 엔랴쿠 4년(785년) 7월 17일에 사망하였다. 향년 64세였으며, 최종 관위는 형부경 종4위하 겸 이나바노카미였다.
연도 (일본 연호) | 연도 (서력) | 관직 및 품계 | 비고 |
---|---|---|---|
덴표쇼호 3년 | 751년 | 식부소승, 내시 | 신적강하, 오미노 미후네로 개명 |
시기 불상 | 정6위 상, 오와리노스케 | ||
덴표호지 4년 | 760년 | 산인도순찰사 | |
덴표호지 5년 | 761년 | 종5위 하, 스루가노카미 | |
덴표호지 6년 | 762년 | 문부소보 | |
덴표호지 8년 | 764년 | 미마사카노카미 (8월), 정5위 상, 오미노스케 (9월) |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난 진압 공로, 훈3등 서훈 |
덴표진고 2년 | 766년 | 도산도순찰사 (9월) | 공전 20정 하사 (2월) |
진고케이운 원년 | 767년 | 병부대보 (3월), 다자이쇼니 (8월) | 순찰사 해임 (6월) |
호키 2년 | 771년 | 형부대보 | |
호키 3년 | 772년 | 대학두, 문장박사 겸임 | |
호키 8년 | 777년 | 대판사 | |
호키 9년 | 778년 | 대학두 | |
호키 11년 | 780년 | 종4위 하 | |
덴오 원년 | 781년 | 대학두, 어장속사 | |
엔랴쿠 원년 | 782년 | 이나바노카미 겸임 | |
엔랴쿠 3년 | 784년 | 형부경 | |
엔랴쿠 4년 | 785년 | 사망 | 최종 관위: 형부경 종4위하 겸 이나바노카미 |
2. 3.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난 진압
덴표호지 8년(764년) 8월 미마사카노카미로 임명된 지 한 달 만인 같은 해 9월, 에미노 오시카쓰의 난이 일어났다. 이때 미후네는 저수지 조성을 담당하는 조이케사(造池使)로서 오미국 세타에 있었다. 후지와라노 나카마로가 우지에서 오미국 방면으로 도망쳐 병력을 모으기 위해 사자를 보냈는데, 미후네는 조이케사 판관 사에키노 미노와 함께 나카마로의 사자와 그 일당을 체포하였다. 또한 세타 다리를 불태워 나카마로 군이 도산도로 진격하는 것을 막음으로써 고켄 상황 측에 가담하여 활약했다.난이 진압된 후, 미후네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기존의 종5위하에서 세 계급 승진한 정5위상이 되었고, 훈3등의 서훈을 받았으며 오미노스케에 임명되었다[7]. 이후 덴표진고 2년(766년)에는 공전 20정(町)을 받았다.
2. 4. 도산도순찰사와 좌천
쇼토쿠 천황 시대인 덴표진고 2년(766년) 9월 23일, 미후네는 도산도 순찰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순찰사로서 자신의 명예와 영달을 더 중요하게 여겨 지방관들에 대한 감찰을 매우 엄격하게 실시했다. 특히 시모쓰케국의 국사들이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고 관청 물품을 빼돌리는 등의 부정 행위(정세의 미납 · 관유물의 횡령)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그는 시모츠케노스케(下野介) 유게노 사츠마에게만 외출 금지령을 내리고 직무를 보지 못하게 했으며, 사츠마가 은사를 받은 후에도 다시 죄를 물으려 한 것이 문제시되었다.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결국 진고케이운 원년(767년) 6월 5일 순찰사 직에서 해임되었고, 두 달 뒤인 8월 29일에는 다자이쇼니로 좌천되었다. 그의 해임 배경에는 당시 고켄 천황의 총애를 받던 승려 도쿄와의 관계가 작용했다는 설도 있다.2. 5. 만년
고닌 천황 시대로 접어들면서, 호키 2년(771년) 7월 23일 형부대보로 임명되어 교토의 관직에 복귀하였다.[4] 이후 대학두, 문장박사 등을 역임하며 학문 분야에서 활동했다. 호키 3년(772년) 4월 20일에는 대학두 겸 문장박사로 임명되었고,[4] 호키 8년(777년)에는 대판사, 호키 9년(778년)에는 다시 대학두를 맡았다.[4]호키 11년(780년) 2월 27일, 종4위하에 서임되었다.[4] 간무 천황 시대가 시작된 덴오 원년(781년)에는 대학두와 어장속사를 맡았다.[4] 엔랴쿠 원년(782년) 8월 25일에는 이나바노카미(因幡守)를 겸임하게 되었다.[4]
엔랴쿠 3년(784년) 4월 2일에는 형부경으로 승진했다.[4] 다음 해인 엔랴쿠 4년(785년) 7월 17일, 형부경 종4위하 겸 이나바노카미의 관직에 있던 중 향년 64세로 사망하였다.[1][2][3][4][6] 최종 관위는 형부경 종4위하 겸 이나바노카미였다.[4]
3. 학문적 업적 및 평가
《속일본기》(續日本紀)의 졸전(卒傳)에 따르면, 오미노 미후네는 총명하고 예민한 성품이었으며 많은 책을 독파하고 저술을 즐겼다고 평가된다.[7] 나라 시대 말기에는 문인으로서 이소노카미노 야카쓰구와 함께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꼽히며 '문인의 우두머리'(文人の首)라고 불렸다.[8] 그는 문학과 역사에 두루 통달했으며, 서예에도 뛰어났다고 전해진다.[7]
젊은 시절 승려였던 경험과 당나라 학문의 영향으로 외전(外典)과 한시에도 능통했다. 그의 한시 5수는 《경국집》에 실려 있으며, 현존하는 일본 최고(最古)의 한시집 《회풍조》의 편찬자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 특히 신라 승려 원효의 《금강삼매경론》에 감탄하여 호키 10년(779년) 일본을 방문한 원효의 손자 설중업에게 시를 지어주기도 했다.
역사 분야에서는 《일본서기》의 주석서 《석일본기》에 인용된 《사기》(私記)에 따르면, 진무 천황부터 지토 천황 또는 겐쇼 천황에 이르는 역대 천황들의 중국풍 시호(諡號)를 일괄적으로 제정하여 올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속일본기》 전반부 편집에도 관여한 것으로 여겨진다.
호키 10년(779년)에는 당나라에서 온 승려 간진의 일본 내 활동을 기록한 전기 《당대화상동정전》을 저술하였다.[9] 이 외에도 그의 행적은 《일본고승전요문초》에 일부 남아 있는 『엔랴쿠 승록』의 「담해거사록」(淡海居士錄) 등을 통해 전해진다.
3. 1. 한시와 회풍조
오미노 미후네는 총명하고 예민한 성품으로 많은 책을 읽어 문학과 역사에 통달했으며, 서예에도 능했다고 전해진다.[7] 나라 시대 말기에는 이소노카미노 야카츠구와 함께 당대 최고의 문인으로 꼽히며 '문인의 우두머리'로 불렸다.[8]젊은 시절 승려로 지내며 당나라 사람에게 가르침을 받은 경험이 있어, 외전(外典)과 한시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특히 신라의 승려 원효가 지은 《금강삼매경론》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호키 10년(779년) 일본을 방문한 신라 사절단의 판관 설중업이 원효의 손자라는 것을 알고 그에게 직접 한시를 지어 선물하기도 했다. 그의 한시 다섯 수는 《경국집》이라는 한시 선집에 실려 전해진다.[3]
미후네는 현존하는 일본 최고(最古)의 한시집인 《회풍조》의 편찬자로 유력하게 거론된다.[2][3] 또한 770년에는 중국 승려 간진의 일본 내 활동을 기록한 전기인 《당대화상동정전》을 저술했으며,[2][3][4][9] 《속일본기》 전반부 편집에도 관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3. 2. 천황 시호 제정
오미노 미후네는 생전에 시호가 없었던 초기 천황들에게 정식 중국식 시호를 부여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3] 당시 천황들은 일본 고유의 칭호만 가지고 있었기에, 미후네의 작업은 일본 역사 기록 체계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일본서기》(日本書紀)의 주석서인 《석일본기》(釋日本紀)에 인용된 《사기》(私記)에 따르면, 미후네는 초대 진무 천황부터 지토 천황까지의 역대 천황들과, 천황 부재 시 섭정 지위에 있었던 진구 황후의 한풍 시호를 일괄적으로 지어 올렸다고 한다. 다만, 당시 천황으로 간주되지 않았던 미후네의 증조부 고분 천황은 이 과정에서 제외되었다. 또 다른 기록에서는 미후네가 진무 천황부터 겐쇼 천황에 이르는 천황들의 시호를 찬진했으며, 이때도 고분 천황과 몬무 천황은 제외되었다고 전한다.
구체적으로 762년부터 764년 사이에 진무 천황, 스이제이 천황, 안네이 천황 등의 시호를 정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2] 일반적으로 겐메이 천황과 겐쇼 천황의 시호 역시 미후네가 지은 것으로 여겨지지만, 겐메이 천황에 대해서는 세이 신사의 합사 기록 등을 근거로 다른 견해도 제시되고 있다.
3. 3. 기타 저술
《속일본기》(續日本紀)의 졸전(卒傳)에 따르면, 오미노 미후네는 총명하고 예민한 성품으로 많은 책을 읽었으며 글쓰기를 즐겼다고 한다.[7] 나라 시대 말기에는 문인으로서 이소노카미노 야카츠구와 함께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인정받아 '문인의 우두머리'(文人の首)라 불렸다.[8] 그는 문학과 역사에 두루 통달했으며, 서예에도 뛰어났다고 전해진다.[7]젊은 시절 승려였던 경험과 당나라 학문(外典)의 영향으로 한시에도 능통했다. 그의 한시 5수가 《경국집》(経國集)에 실려 있으며,[3] 현존하는 일본 최고(最古)의 한시집인 《회풍조》(懐風藻)의 편찬자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2][3]
역사 서술에도 관여하여 《속일본기》 전반부 편집에 참여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주석서인 《석일본기》(釋日本紀)에 인용된 《사기》(私記)에 따르면, 미후네는 진무 천황부터 겐쇼 천황에 이르는 역대 천황들의 중국풍 시호(諡號)를 일괄적으로 제정하여 올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당시 천황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고분 천황과 몬무 천황을 제외하고, 섭정 지위에 있던 진구 황후를 포함하는 것이다. 다만 겐메이 천황과 겐쇼 천황의 시호 포함 여부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한다.
호키(寶龜) 10년(779년)에는 두 가지 중요한 활동이 있었다. 먼저, 당나라에서 온 승려 간진(鑑真)의 일본 활동을 기록한 전기인 《당대화상동정전》(唐大和上東征伝|토다이와조토세덴일본어)을 저술했다.[2][3][4][9] 이 책의 저자명은 진인 원개(真人元開)로 되어 있다.[9] 또한 같은 해, 신라의 승려 원효(元曉)가 지은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마침 일본을 방문한 신라 사절단의 판관(判官) 설중업(薩仲業)이 원효의 손자라는 것을 알고 그에게 직접 한시를 지어 선물하는 등, 신라와의 문화 교류에도 관심을 보였다.
이 외에도 《일본고승전요문초》(日本高僧傳要文抄)에는 『엔랴쿠 승록』(延曆僧録)에 실렸던 미후네의 전기인 「담해거사전」(淡海居士傳) 또는 「담해거사록」(淡海居士錄)의 일부가 남아 전해진다.
3. 4. 불교 연구
젊었을 때는 승려였던 경력이 있으며, 불교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특히 신라의 승려 원효가 지은 《금강삼매경론》을 읽고 깊이 감탄하였다. 호키 10년(779년)에는 일본을 방문한 신라 사신단의 판관(判官) 설중업(薩仲業)이 원효의 손자라는 사실을 알고 그에게 존경의 의미를 담아 한시를 지어주기도 했다.[2]그는 불교 경전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를 수행하기도 했는데, 779년에는 대승기신론( 釈摩訶衍論일본어 )이 실제로는 용수( 龍樹일본어 )가 저술한 것이 아니라 후대에 만들어진 위작이라고 주장하였다.[2] 이는 그의 깊이 있는 불교 연구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또한 같은 해인 호키 10년(779년)에 당나라에서 일본으로 건너와 계율을 전한 승려 간진(鑑真)의 전기인 《당대화상동정전》(唐大和上東征伝)을 저술하였다.[9] 이 책의 저자명은 진인 원개(眞人元開)로 기록되어 있다.[9]
그의 불교 관련 활동에 대한 기록은 후대의 문헌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일본고승전요문초》(日本高僧傳要文抄)에는 『엔랴쿠 승록』(延曆僧録)이 지은 「담해거사록」(淡海居士錄)의 일부가 남아 전해진다.
4. 신라와의 관계
젊은 시절 승려로 활동한 경험이 있으며, 신라의 승려 원효가 지은 《금강삼매경론》을 읽고 크게 감탄하였다. 779년(호키 10년)에는 일본을 방문한 신라 사신단의 판관(判官) 설중업(薛仲業)이 원효의 손자라는 것을 알고 그에게 직접 한시를 지어 선물하기도 했다. 이는 그가 불교 경전 외에도 외전(外典)이나 한시에 능통했음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5. 자손
나카다 노리노부(中田憲信)의 《황윤지(皇胤誌)》를 비롯한 일부 계도에는 오미노 하마나리(淡海浜成)와 다카누시(高主)가 미후네의 손자로 기록되어 있다.
- 딸: 다치바나노 시마다마로의 아내
참조
[1]
서적
Nihon Koten Bungaku Daijiten
[2]
간행물
Ōmi no Mifune
https://kotobank.jp/[...]
Britannica
[3]
간행물
Ōmi no Mifune
https://kotobank.jp/[...]
Hitachi
[4]
간행물
Ōmi no Mifune
https://kotobank.jp/[...]
Shogakukan
[5]
문서
続日本紀』天平勝宝8歳5月10日条
[6]
문서
続日本紀』天平勝宝8歳5月13日条
[7]
문서
続日本紀』延暦4年7月17日条
[8]
문서
続日本紀』天応元年6月24日条
[9]
서적
唐大和上東征伝
https://dl.ndl.go.jp[...]
建初律唐招提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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