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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통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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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圓)은 동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사용되었거나 사용되고 있는 통화의 단위이다. 중국에서 은화가 유입되면서 멕시코 달러를 "은원"이라 부르며 유통된 것이 시초이다. 이후 일본, 한국, 대만 등에서도 통화 단위로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대한민국, 일본, 중국, 홍콩, 마카오, 대만, 몽골 등에서 각기 다른 통화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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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통화)
통화 정보
인민폐 기호
인민폐 기호
통화 이름위안 (圆/元)
ISO 4217 코드CNY (인민폐)
JPY (엔, 대용으로 사용 가능)
기호¥, 元
보조 단위자오 (角) (1/10)
펀 (分) (1/100)
통화별 단위1 위안 = 10 자오
1 자오 = 10 펀
사용 국가중화인민공화국 (인민폐)
일본 (엔, 대용으로 사용 가능)
발행 기관중국인민은행 (인민폐)
(엔 대용 시) 일본은행
역사
어원둥글다 (圓)
사용 시작청나라 시대
이전 통화다양한 은화, 동전
주조
주화1자오
5자오
1위안
지폐1위안
5위안
10위안
20위안
50위안
100위안
가치
환율변동 (실시간 환율 정보는 중국인민은행 또는 금융 기관 참조)
기타
참고인민폐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공식 통화
위안은 통화의 기본 단위 명칭

2. 역사적 배경

은량(銀兩)과 엽전(葉錢)은 원래 중국에서 사용되던 두 가지 화폐 체계였으며, 근대에 들어서면서 중국의 영향을 받은 한자 문화권일본, 조선, 베트남 등도 이를 사용했다. 은화는 주로 대량 거래에 사용되었고, 무게를 재어 가치를 매기는 계량화폐로서 양(兩)을 기본 단위로 삼았다. 반면 엽전은 개수를 세어 사용하는 계수화폐로 문(文)을 기본 단위로 사용했다.

유럽의 대항해시대 이후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 등 유럽 국가들은 동아시아와의 교역을 크게 늘렸다. 산업혁명을 거치며 발달한 기계 생산 기술은 화폐 제조에도 적용되어, 무게와 모양이 균일하고 도안이 정교한 은화가 대량으로 생산되었다. 이 서양 은화들은 무역선을 통해 동양으로 지속적으로 유입되었다. 당시 청나라의 은량은 주조, 유통, 관리를 통일적으로 담당하는 부서가 없었고 무게, 형태, 색상 등이 제각각이어서 사용에 불편함이 많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규격화된 서양 은화의 유입은 중국의 전통적인 은량 제도에 큰 충격을 주었다.

18세기 후반부터 서양 은화가 대량으로 중국에 유입되기 시작했는데, 종류는 매우 다양했다. 그중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초기에 유입된 스페인스페인 달러 은화와 후기에 유입된 멕시코의 레알 은화였다. 이 두 은화는 모두 북아메리카의 멕시코에서 주조되었는데, 스페인 달러가 만들어질 당시 멕시코는 스페인의 식민지였다. 이 은화들은 8 레알의 가치를 지녔으며 흔히 '8조각'(pieces of eight)으로 불렸고, 사실상 세계 최초의 국제 통화 중 하나로서 18세기 후반 스페인이 필리핀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에 진출하면서 널리 유통되기 시작했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동전이 널리 사용되었지만, 경제 규모가 커지고 구리 생산이 부족해지면서 동전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 시대 이후에는 지폐나 은(은괴, 은제품)이 화폐를 대신하게 되었고, · 시대에도 동전은 계속 사용되었지만 은정이라 불리는 은괴가 통화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8세기에 견직물이나 무역의 대가로 스페인과 멕시코에서 멕시코 달러와 같은 대형 은화가 대량 유입되면서, 이 은화들은 '은원'(銀圓중국어)이라 불리며 중국 내에서도 널리 유통되었다. '은원'이라는 명칭은 기존의 은정과 달리 멕시코 달러가 둥근 모양(圓)이었던 데서 유래했다.[7] 멕시코는 한자로 '墨西哥'라고 표기되었기에 멕시코 달러는 '묵은'(墨銀중국어)이라고도 불렸다.

표준 중국어에서 '원'(圓/圆|yuán중국어)은 글자 그대로 "둥글다"는 의미를 가진다. 청나라와 초기 중화민국 시대에 '위안화'는 멕시코 은화를 본떠 만든 크고 둥근 은화를 가리켰다.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元중국어으로 표기하는데, 이는 원래 '시작'을 의미하지만 '圓'의 약자로 사용된다. 위조 방지를 위해 지폐나 동전, 계약서 등에는 원래 이름인 '圓/圆'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일본 역시 미국의 개항 요구 이후 1859년부터 국내외 의 교환 비율 차이로 인해 고반이 대량 유출되는 통화 문제를 겪었고, 그 자리를 멕시코 달러가 채우게 되었다.

헤라클레스의 기둥 도안으로 유명한 스페인 달러(필라 달러)는 스페인 왕 카를 1세의 명으로 1535년부터 주조되었다. 이후 1821년 멕시코가 독립하면서 1823년부터는 독수리 도안의 멕시코 달러가 발행되었다. 특히 멕시코 달러는 1903년까지 총 주조량이 약 35.5억달러에 달하며 세계 유통 시장을 압도했다.[8] 멕시코 달러의 무게는 약 27.07g, 은 순도는 90.3%였으며[9], 스페인 달러도 거의 동일했다.

멕시코 달러(8 레알), 1894년

2. 1. 원과 달러의 관계

달러의 기원은 탈러로 알려져 있지만, 미국의 1달러 은화멕시코의 레알 은화를 본떠 무게와 은의 순도를 거의 동일하게 만들었다.[7][8][9] 동아시아에서는 달러를 "둥글다"라는 뜻의 한자 '원'(圓)으로 표기했으며, 한국의 , 달러, 중국의 위안(元)은 모두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같은 어원을 공유한다. 19세기 후반, 원과 달러는 국제 통화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300년 이상 유통되며 압도적인 주조량을 자랑했던 멕시코 레알 은화(멕시코 달러)에 비해, 미국, 홍콩, 일본 등에서 발행된 은화는 역사가 짧고 유통 규모가 작아 시장에서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에 미국과 일본은 무게를 420 그레인 (27.216g)으로 약간 늘린 무역은을 발행하여 경쟁하려 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19세기까지 세계적으로 은본위제가 주류였으나, 1821년 영국을 시작으로 1873년에는 미국독일 제국, 1876년에는 프랑스 등 서구 여러 나라가 잇따라 금본위제로 전환했다. 일본 역시 명목상으로는 1871년 금본위제를 도입했으나, 금 보유량 부족과 금화의 해외 유출 문제로 인해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결국 일본은 1878년 무역 은화를 사실상의 본위 화폐로 삼아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처럼 은본위제를 유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세계적인 금본위제 전환 추세와 은 생산량 증가는 은 가격의 하락을 불러왔다. 결과적으로 19세기 후반에는 은본위제를 채택하고 있던 동아시아 국가들의 원화 가치가 미국 달러와 같은 금본위제 통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현상이 나타났다.[10]

오늘날에도 이러한 역사적 배경의 흔적이 남아 있어, 중국 대륙, 홍콩, 대만 등에서는 미국 달러를 '메이위안'(美元중국어), 유로를 '어우위안'(歐元중국어)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2. 2. 동아시아 각국의 원

중국어 글자 은 홍콩 달러, 마카오 파타카, 신 대만 달러의 기본 단위를 나타내기도 한다. 신 대만 달러의 단위는 표준 중국어로 '위안(yuán)'이라고 하며, 元 또는 圓으로 표기한다.

대한민국일본 역시 이름의 유래가 중국어 '위안(yuán)'과 같으며, 한국어일본어에서도 '둥근' 모양을 의미한다.

일본 엔(en)은 원래 간지(한자) 圓일본어으로 표기되었으나, 1946년 도요 간지 공포 이후 円일본어으로 단순화되었다.

대한민국 원(won)은 1902년부터 1910년까지 한자한국어으로 표기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잠시 圓한국어으로 표기되기도 했다. 현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대한민국 모두 한글 표기인 원한국어을 사용한다.

몽골 투그릭( төгрөгmn ) 역시 몽골어로 '둥근'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2. 2. 1. 일본

일본페리 원정 이후 미국과 가나가와 조약을 체결하며 쇄국정책을 포기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 국내외 금과 은의 환율 차이로 인해 은이 유출되고 멕시코 은화가 대량 유입되는 문제를 겪었다.[10] 1871년 6월 27일(음력 메이지 4년 5월 10일), 태정관포고 제267호에 따라 엔(円일본어)이 일본의 법정 통화로 제정되었다.

에도 시대의 화폐 제도는 금, 은, 전(銭일본어) 세 종류의 화폐가 병행 유통되었으며, 각 단위는 (両), 분(分), 주(朱) / (貫), 몬메(匁) / (文)으로 나뉘었다. 이 화폐들은 변동 환율제로 거래되었고 복잡한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개국 이후 통화의 국제화 필요성이 대두되자, 막부는 게이오 2년(1866년) 개세약서에서 외국 금은화를 일본 화폐로 개주할 수 있는 자유 조폐국 설립을 약속했다.

새 화폐 단위 '엔(円일본어)'의 채택 배경에는 여러 설이 있다. 메이지 2년(1869년) 오쿠마 시게노부가 "엄지와 검지로 원을 만들면 아이도 화폐임을 안다"고 발언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11], 이는 단순히 화폐의 둥근 모양에서 유래했다는 속설일 수 있다. 한편, 에도 시대 후기 지식인들 사이에서 '냥(両일본어)'을 '원(圓일본어)'으로 부르는 관습이 있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7][11] (『고사류원』). 공식적으로 '엔' 단위 채택은 메이지 2년 3월 4일(1869년 4월 15일) 의결서에 "...각국 통행의 제도에 따라 100전을 1원으로 정하고..."라고 기록된 것에서 확인된다[12]. 엔의 로마자 표기가 'En'이 아닌 'Yen'인 이유에 대해서는 'En'이 '인'으로 발음되거나 'Ten en'(10엔)이 '테넨'으로 오독될 우려, 또는 세 글자가 안정감을 준다는 등의 설이 있다[7].

메이지 3년(1871년) 초기에는 1원 은화를 본위 화폐로 하는 안이 검토되었으나, 미국에 있던 이토 히로부미가 세계적인 금본위제 추세를 건의함에 따라 금본위제가 채택되었다. 메이지 4년 5월 10일(1871년 6월 27일) 제정된 신화 조례(新貨条例)는 1엔을 순금 1.5g으로 정의하고, 보조 단위로 1/100엔인 센(銭일본어)과 1/1000엔인 린(厘일본어)을 두었다. 또한 무역 거래 전용으로 홍콩 1원 은화와 동일한 양과 품위를 가진 무역 1엔 은화(貿易銀)도 발행되었다. 초기에는 무역 1엔 은화 100엔이 금화 101엔과 등가로 정해졌으며, 구 화폐 1냥은 신 화폐 1엔과 등가로 교환되어 통화 단위 전환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무역 1원 은화, 1871년


1원 금화, 1872년


명목상 금본위제를 채택했으나, 금 준비 부족과 금화의 해외 유출로 인해 금본위제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다. 결국 1878년부터는 무역 1엔 은화를 사실상의 본위 화폐로 사용하며 실질적인 은본위제로 전환했다. 이는 당시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과 유사한 상황이었다. 19세기 후반, 세계적인 은 생산량 증가와 서구 국가들의 금본위제 전환은 금 가격 상승과 은 가격 하락을 유발했고, 은본위제를 유지하던 일본 엔화의 가치는 미국 달러 등 금본위제 통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하락했다[10].

메이지 30년(1897년) 10월 1일 시행된 화폐법에서는 1엔의 가치를 순금 2푼(0.2몬메, 0.75g)으로 재정의하여 금 평가액을 절반으로 줄였다.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후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대응하기 위해 쇼와 21년(1946년) 3월 3일 신엔 전환(新円切替)이 실시되었다. 같은 해 11월 16일 국어 심의회가 제정한 상용 한자표에 따라 엔의 표기는 기존의 '圓일본어'에서 신자체인 '円일본어'으로 간소화되었다. 이 표기는 쇼와 23년(1948년) 발행된 1엔 동전 및 5엔 동전, 지폐는 쇼와 25년(1950년) 발행된 1000엔 지폐부터 사용되었다. 중화권에서는 엔을 '일원(日圓중국어)' 또는 '일원(日元중국어)'으로 표기한다.

일본 엔한국 원은 모두 만다린어 '위안(yuán중국어)'과 어원이 같으며, 양국 언어에서 '둥글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2. 2. 2. 한국

조선은 전통적으로 중국 화폐의 영향을 받아 문(文)을 기본 통화 단위로 사용하였다. 1883년, 고종의 지시에 따라 화폐 주조 기관인 전환국이 설치되어 근대적인 화폐 발행을 시도하였다. 이후 1892년에는 화폐 단위를 (兩)으로 변경하였는데, 1냥은 10전(錢), 100분(分)의 가치를 가졌다.

1902년, 대한제국은 화폐 개혁을 단행하여 기존의 10냥을 1 (圓)으로 변경하는 새로운 화폐 단위를 도입하였다. 1원은 보조 단위로 100전(錢)에 해당했다. 그러나 1910년 한일 병합으로 대한제국이 일본 제국의 식민 통치 하에 들어가면서, 대한제국 원은 조선은행에서 발행한 조선 엔으로 강제 대체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 제국이 패망하고 광복을 맞이하면서 한반도에서는 기존의 조선 엔 화폐가 '원'이라는 이름으로 통용되기 시작했다. 이후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면서 화폐 체계도 나뉘게 되었다. 소비에트 민정청의 영향 아래 있던 북위 38도선 이북 지역에서는 1947년 12월 6일, 조선 엔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으로 대체되었다. 한편, 미 군정 하의 북위 38도선 이남 지역에서는 한동안 조선은행에서 발행한 구 대한민국 원 화폐가 계속 사용되었다. 1950년 6월 12일, 대한민국의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이 설립되면서 조선은행의 화폐 발행 기능을 승계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6.25 전쟁으로 인한 극심한 물가 상승과 경제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1953년 2월 15일 제1차 화폐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개혁으로 화폐 단위가 '원'에서 (圜)으로 변경되었으며, 교환 비율은 100원 대 1환이었다. 이후 경제 성장의 기반을 마련하고 화폐 가치를 안정시키기 위해 1962년 6월 10일 제2차 화폐 개혁이 이루어졌다. 이때 환 화폐는 현재 사용되는 대한민국 원으로 다시 변경되었고, 교환 비율은 10환 대 1원이었다.

한국의 '원'과 일본(円)은 모두 중국어 '위안'(圓)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한국어와 일본어 모두에서 '둥글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대한제국 시기 원은 한자 '圜'으로 표기되기도 했으며, 광복 이후 한때 '圓'으로 표기되다가 현재는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모두 한글 표기인 '원'을 공식적으로 사용한다.

2. 2. 3. 중국

오늘날 '위안'은 일반적으로 중국 인민폐(RMB), 즉 중화인민공화국 통화의 주요 계산 단위를 가리킨다.[1] 인민폐 지폐는 1위안부터 100위안까지 발행되며, 국제적으로 중국 통화를 지칭하는 동의어로도 사용된다. 인민폐의 ISO 4217 코드는 CNY (중국 위안, Chinese Yuan)이다.

위안(元)이라는 명칭은 일본 엔(円)한국 원(圓)을 지칭하는 데에도 사용되며, 미국 달러( 美元|메이위안중국어 )나 유로( 欧元|어우위안중국어 ) 등 다른 통화를 번역할 때도 쓰인다. 현대 외환 시장에서 중국 위안(CNY)은 중국 본토의 공식 통화인 중국 인민폐(RMB)를 의미한다.

표준 중국어에서 위안(圓/圆, yuán)은 원래 "둥글다"는 뜻으로, 청나라와 초기 중화민국 시대에 멕시코 은화를 본떠 만든 크고 둥근 은화에서 유래했다. 현재는 일반적으로 간체자인 元중국어으로 표기하며, 이는 '시작'을 의미하지만 圓의 약자로 사용된다. 위조 방지를 위해 지폐나 동전, 공식 문서에는 원래 명칭인 圓/圆을 사용하기도 한다. 국제적으로 금액 앞에는 '¥' 또는 'RMB'를 붙여 표기한다(예: RMB¥100 또는 ¥100元).

위안화는 18세기 후반 스페인 제국필리핀, 등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로 진출하면서 널리 유통된 스페인 달러 또는 멕시코 달러 (8 레알 은화)에 기원을 둔다. 이는 기존의 동전(錢)과 은괴(세폐, 량(兩) 단위로 측정)를 대체했다.[3] 1위안은 약 0.72량(7전 2푼)에 해당했다.[4] 중국 위안화는 1위안 = 10자오( 角|자오중국어 ) = 100펀( 分|펀중국어 ) = 1,000원( 文|원중국어 )의 단위 체계를 가졌다.

광서원보, 칠전이분, 1904년


18세기 이후 청나라에서는 기존의 은괴와 함께 멕시코에서 유입된 멕시코 달러가 유통되었다. 1890년 광둥 조폐창에서 멕시코 달러와 비슷한 무게(7전 2푼, 약 26.86g), 순도 90%의 은화인 광서원보(光緖元寶)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는 중앙 정부가 아닌 각 성 정부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액면가가 아닌 무게(7전 2푼은 일본의 7푼 2리에 해당)를 나타냈다. 이러한 계수 은화 발행은 은괴 환전 수수료로 이익을 얻던 환전상들의 반발에 부딪히기도 했다. 1890년대부터 다른 지역 조폐창에서도 1, 2, 5, 10, 20 문(文) 단위의 동전과 유사한 은화를 생산했다.[4] 중앙 정부는 1903년부터 위안화 체계의 동전을 발행하기 시작했으며, 황동 1문, 구리 2, 5, 10, 20문, 은 1, 2, 5자오 및 1위안 동전이 있었다.

1890년대부터 여러 지방 은행, 민간 은행, 그리고 제국 정부가 설립한 중국 제국 은행 및 호부은행(이후 대청은행)에서 위안화 지폐를 발행했다. 제국 시대에는 1, 2, 5자오, 1, 2, 5, 10, 50, 100위안 지폐가 발행되었으나 1위안 미만 지폐는 드물었다.

신해 혁명(1912년)으로 중화민국이 성립된 후, 중화민국 3년(1914년)부터 위안스카이의 초상을 새긴 무게 7전 2푼(26.86g), 순도 90%의 1원 은화가 발행되었다. 혁명 이후에도 동전의 크기와 재질은 1930년대까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혁명 이후 통화 발행 은행 수가 급증했으며, 주요 국립 은행으로는 중국 상업 은행, 중국 은행, 교통 은행, 닝보 상업 은행, 중국은행, 중국 농민 은행 등이 있었다. 지방 은행과 중국 공산당도 지폐를 발행했다. 전국 통용 지폐에는 "국가 통화" 문구가, 지방 지폐에는 "지방 통화" 문구가 적혀 서로 다른 환율로 유통되었다. 1, 2, 5푼 단위의 소액 지폐도 널리 발행되었다.

중화민국 시대에 중국은행에서 발행한 5 위안 지폐


1917년, 만주를 장악한 군벌 장쭤린은 동삼성 지역에서 사용할 펑톈 위안(奉天-)을 발행했다. 초기에는 일본 엔과 거의 같은 가치를 유지했으나, 장쭤린의 군사 활동 자금 조달을 위한 남발로 가치가 하락하여 1928년경에는 거의 휴지 조각이 되었다.

중화민국 22년(1933년) 3월, 국민 정부는 폐량개원(廢兩改元)을 통해 무게 단위 화폐인 량(兩)을 폐지하고 은원(銀圓)을 공식 통화로 도입했다. 상하이 중앙 조폐창에서 쑨원의 초상을 새긴 무게 26.67g, 순도 88%의 1원 은화(일명 '쑨원상폐')를 발행했다. 보조 단위는 각(角, 1/10위안), 분(分, 1/100위안), 문(文, 1/1000위안)이었다.

중화민국 24년(1935년) 11월, 국민 정부는 통화 개혁을 단행하여 은본위제를 폐지하고 관리 통화 제도를 도입했다. 은화 유통과 사유가 금지되었고, 대신 법정 통화인 법폐( 法幣|파비중국어 ) 지폐가 발행되었다. 통화 발행은 중국 은행, 중국은행, 교통 은행, 중국 농민 은행의 4대 정부 통제 은행으로 제한되었다. 법폐는 영국 파운드에 대해 1원 = 1실링 2.5펜스의 고정 환율제로 운영되었다. 1936년부터는 니켈, 구리-니켈 합금(5, 10, 20푼 및 반 위안 동전), 알루미늄(1, 5푼 동전) 등 새로운 재질의 보조 주화가 발행되었다.

중일 전쟁 시기, 일본은 점령지에 괴뢰 정부를 세우고 독자적인 화폐를 발행했다. 베이징의 중화민국 임시 정부( 中華民國臨時政府중국어 )는 中國聯合準備銀行|중국연합준비은행중국어을 설립하여 리( 釐|리중국어, 1/1000위안), 펀, 자오, 위안 단위의 화폐를 발행했고, 난징의 왕징웨이 괴뢰 정부는 중앙저축은행(中央儲備銀行)을 통해 화폐를 발행했다. 일본은 이들 화폐와 국민당 법폐 간의 환율을 정했으나, 실제 유통과 수용 정도는 지역마다 달랐다. 만주국 역시 1932년부터 1945년까지 독자적인 만주국 위안을 발행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국공 내전 기간 동안 국민당 정부 하의 중국은 극심한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겪었다. 법폐 가치가 폭락하면서 1941년 500위안권, 1942년 1,000, 2,000위안권, 1945년 2,500, 5,000위안권, 1947년 10,000위안권 등 고액권이 연이어 발행되었다. 1930년부터 1948년까지 중국은행은 관세 금 단위(關金)로 표시된 지폐(금 위안 지폐)도 발행했는데, 이 역시 법폐와 함께 통용되었다.

1948년 8월, 국민당 정부는 300만 구 위안 = 1 금 위안의 비율로 금 위안(金圓券)을 도입했으나, 이 역시 단기간에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겪으며 가치를 상실했다. 금 위안 발행 초기에는 1, 2, 5자오, 1, 5, 10, 20, 50, 100위안권이 발행되었으나, 1949년에는 500위안부터 최고 5,000,000위안권까지 발행되었다. 1949년 7월에는 다시 은 위안(銀圓券)을 도입(1 은 위안 = 5억 금 위안)했지만, 국공 내전 패배로 중국 본토에서는 거의 유통되지 못했다.

한편, 중국 공산당의 통제 하에 있던 지역(소비에트 정부)에서는 1930년대부터 독자적인 화폐(동전 및 지폐)를 발행했다. 발행 주체와 단위는 지역별로 다양했다. 아래는 주요 발행 내역이다.

지역시작 연도종료 연도권종
중국 소비에트 공화국193319361 펀
5 펀
1 자오
2 자오
5 자오
1 위안
2 위안
3 위안
후난-후베이-장시193119331 자오
2 자오
3 자오
5 자오
1 위안
북서 안후이19322 자오
5 자오
1 위안
5 위안
푸젠-저장-장시1932193410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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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2월 1일, 중국 공산당은 중국 인민 은행을 설립하고 인민폐( 人民币|런민비중국어 )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인민폐는 중국 본토의 유일한 법정 통화가 되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인민폐의 보조 단위는 자오(角, 1/10위안)와 펀(分, 1/100위안)이다. 1945년 일본 패망 후 중화민국 중앙은행이 만주 지역에서 발행했던 동북위안( 東北九省流通券|둥베이주성류퉁취안중국어 )은 1948년 금 위안으로 대체되었다(15만 동북위안 = 1 금 위안).

2. 2. 4. 홍콩

광둥어는 광둥, 광시, 홍콩마카오에서 널리 사용되는데, 홍콩에서는 '위안', '자오', '펀'에 해당하는 단위로 각각 蚊|만yue, 毫|호우yue, 仙|신yue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신'은 영어 단어 '센트(cent)'에서 유래한 외래어이다.

아편 전쟁의 결과, 1842년 난징 조약에 따라 청나라로부터 홍콩 섬이 영국에 할양되었다. 영국은 1864년 홍콩에 조폐국을 설립하고, 1866년부터 무게 416그레인(26.957g), 은 순도 90%의 1원 은화(1달러 은화)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이 은화는 표면에 "壹圓" 및 "ONE DOLLAR" 액면이 표기되어 "향양"이라고 불렸다.

홍콩 1원 은화, 1867년


그러나 당시 다량 유통되던 멕시코 달러와의 경쟁에서 밀려 널리 사용되지 못했고, 결국 1868년 제조가 중단되었으며 조폐국도 폐쇄되었다.[11] 발행량은 총 2,108,054개에 그쳤다. 당시 홍콩 조폐국장이었던 토마스 윌리엄 킨더는 이후 일본 조폐료의 책임자가 되었고, 홍콩 조폐국의 기계 설비도 일본으로 매각되었다.

이후 영국은 동양과의 무역에서 다양한 종류의 은화가 혼용되는 상황 속에서 식민지에서의 금융 주도권을 강화하기 위해, 1895년부터 무역 거래 전용 은화인 무역 은을 발행했다. "참인양"이라고 불린 이 무역 은은 이전에 홍콩에서 발행된 1원 은화 및 일본의 1원 은화와 동일한 무게와 품위로 제작되었다.

현재 사용되는 홍콩 달러(HKD)는 중국어로 항원(港元)으로 표기된다. 통화의 보조 단위로는 1원의 1/10에 해당하는 10센트를 "호(毫)", 1/100에 해당하는 1센트를 "선(仙)"으로 표기한다. 여기서 '선'은 영어 '센트(cent)'를 음차한 것이다.

2. 2. 5. 마카오

壹圓(1 파타카)은화, 1952년


伍圓(5 파타카스)은화, 1971년


1513년 포르투갈인이 마카오에 도착하여 명나라와 교역을 시작했고, 마카오에 거류지를 확보했다. 홍콩이 영국의 식민지가 된 이후, 1845년 포르투갈은 "마카오 자유항"을 선언하고 1849년 마카오를 식민지로 삼았다.

당시 마카오에서는 멕시코 달러를 비롯한 다양한 은화가 널리 유통되었다. 1905년부터 대서양 은행(Banco Nacional Ultramarino)에서 마카오 파타카(MOP)를 발행하기 시작했으며, 마카오 고유의 화폐는 1952년부터 발행되었다.

'파타카'(Pataca)라는 이름은 스페인 페소 은화를 아랍에서 '아브다카'라고 부른 데서 유래했다. 또한 '파타카'는 '원(圓)'을 뜻하는 포르투갈어 발음이기도 하다. 1980년대부터는 화폐 디자인에서 포르투갈의 색채가 점차 옅어졌다.

1952년에 발행된 5파타카 은화는 무게 15g, 은 함량 72%였고, 1파타카 은화는 무게 3g, 은 함량 72%였다. 그러나 1971년에 발행된 5파타카 은화는 무게 10g, 은 함량 65%로 품위가 낮아졌다.

파타카의 보조 단위로는 1/10 단위인 아보스(avos)와 1/100 단위인 아보(avo)가 있다. 아보스는 '毫(호)', 아보는 '仙(선)'으로 표기하며, 한자 표기는 홍콩 달러와 동일하다.

현재 마카오 파타카홍콩 달러에 대해 고정 환율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중국어로는 "澳門圓(마카오 위안)" 또는 "澳門幣(마카오 폐)"로 표기된다.

2. 2. 6. 타이완

타이완의 통화인 신 대만 달러(新臺幣)는 관화로 위안(圓)이라고 표기한다.

과거 대만에서도 중국 본토와 마찬가지로 멕시코 달러 등 대형 은화가 유통되었다. 1870년대 이후에는 일본의 1원 은화도 유입되기 시작하여 점차 점유율을 높여갔다. 당시 대만에서는 각인이 찍힌 일본 은화는 '거친 용 은화', 찍히지 않은 것은 '빛나는 용 은화'라고 부르며 사용했다.

1895년 청일 전쟁 이후 대만이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일본 화폐의 영향은 더욱 커졌다. 그러나 1897년 일본이 금본위제를 중심으로 하는 화폐법을 시행하면서 1원 은화의 제조가 중단되었고, 일본 본토에서는 1898년 4월 1일부터 사용이 금지되었다. 이는 당시 일본의 지배하에 있던 대만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조치였다.

이에 대한 잠정 조치로, 일본 정부는 1897년 10월 22일부터 1원 은화에 둥근 은(銀) 자를 새겨 대만으로 보내 공적인 납부나 정부 지불에 사용하도록 허용했다. 하지만 각인 유무에 따라 통용 여부가 달라지는 혼란을 막기 위해 같은 해 11월 21일부터는 각인 여부와 관계없이 통용을 인정했다. 1898년 7월 30일부터는 1원 은화가 대만 총독이 고시하는 시세에 따라 무제한 통용되도록 하였다.

1901년부터는 기존의 1원 은화와 동일한 형식의 '대만 은행권 인환 원화 은화'가 제조되어 대만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은 시세가 불안정했기 때문에, 1911년 4월 1일에는 대만에도 일본의 화폐법이 시행되어 일본의 통화 체제에 편입되었다.[13]

1949년 6월 15일, 국공 내전 이후 대만으로 이전한 중화민국 정부는 신 대만 달러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때 통화 단위는 기존에 사용되던 '원(圓)'을 그대로 이어받아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통화의 보조 단위로는 1원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각(角, Chiao)'을 사용한다.

일본 1엔 은화 (메이지 34년)


1949년 발행된 대만 5각(角) 주화


1973년 발행된 대만 1원(圓) 주화

2. 2. 7. 몽골

1투그릭 은화, 1925년


몽골이나 만주국몽골어공용어로 사용하는 국가에서는 "원(圓)"과 동의어인 "투그릭( Төгрөг|투그릭mn, Tukhrik)"이 화폐 단위로 사용되었다.

몽골에서는 1911년 독립 선언 이후에도 중국산 은화, 중국·러시아·독일·영국산 은량(1냥=37.3g), 러시아 루블, 미국 달러 등이 유통되는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통화 주권을 확립하기 위해 인민혁명당 정권은 1924년 6월에 "몽골 상공업 은행"을 설립했다. 이듬해인 1925년 2월, 국가 화폐인 투그릭(1투그릭=순은 18g) 발행을 결정하고, 1, 2, 5, 10투그릭 지폐 총 600만 투그릭 분량을 소련에 발주하여 같은 해 12월 9일부터 유통을 시작했다. 이때 1투그릭 은화도 40만 매가 발행되었는데, 무게는 19.9957g이고 은 함량은 90%였다. 통화 보조 단위로는 투그릭의 1/100 가치인 "몽고(Mongo)"가 사용된다.

1927년 1월 1일부터 모든 재정 보고, 예산, 재정 거래를 투그릭으로 산출하도록 결정했으며, 1928년 4월 1일부터는 투그릭을 몽골 내에서 유일하게 통용되는 법정 통화로 지정했다. 같은 달 13일에는 투그릭의 교환 가치를 안정시키기 위해 금본위제를 도입했다.[14]

몽골 화폐는 소련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제조되었다. 처음에는 몽골 문자로 표기되었으나, 1941년 소련의 민족주의 부정 정책에 따라 러시아키릴 문자가 공용 문자로 지정되면서 1946년부터 화폐에도 키릴 문자가 사용되었다. 이후 1989년 소련 붕괴의 영향으로 1994년부터 발행된 화폐에는 앞면에 몽골 문자가 다시 사용되고 뒷면에는 키릴 문자가 병기되었다.[15]

한편, 만주국에서도 화폐 단위로 "원(圓)"을 사용했지만, 지폐에는 "원" 표시와 함께 몽골 문자로 "투그릭"이 병기되기도 했다.

2. 2. 8. 만주

대동 원년(1932년) 만주국 건국 선언 3개월 후인 6월 11일에 만주국 화폐법이 시행되어 "순은의 무게 23.91g을 화폐의 단위로 하고 이를 원(圓)이라 칭한다"라고 통화 단위로 (Yuan)이 규정되었다. 처음에는 형식상 기존 중국의 화폐 제도에 따라 은본위제였으나, 강덕 2년(1935년)부터 중화민국 정부가 불환 지폐인 법폐를 발행하자, 만주국 원은 같은 해 11월부터 금본위제에 근거한 일본의 통화에 대해 고정 환율제로 등가(等價)로 정해졌다. 다만 만주 중앙 은행이 발행한 지폐(만주 중앙 은행권)는 불환 지폐였으며, 당시 태환이 정지된 일본의 통화와 마찬가지로 금본위제는 명목상의 제도였다.

통화 보조 단위는 원의 1/10이 "각(角, Chiao)", 1/100이 "분(分, Fen)", 1/1000이 "리(釐, Li)"였다. 만주에 이주했던 당시 일본인들은 원을 "엔"이라고 불렀다. 1945년 8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의 패전으로 만주국은 붕괴되었고, 1948년에는 약 120억 원의 만주 중앙 은행권이 회수되었다.

3. 현존하는 통화

현재 사용되는 '원' 계열의 통화는 다음과 같다.



'원'(元)이라는 명칭은 중국어에서 일본의 통화 단위인 (円)과 대한민국의 통화 단위인 (圓)을 지칭하는 데에도 사용되며, 미국 달러( 美元|메이위안중국어 )나 유로( 欧元|오우위안중국어 )와 같이 다른 일부 통화를 번역하는 데에도 사용된다.

오늘날 '위안'이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중국 인민폐(RMB), 즉 중화인민공화국의 통화의 주요 계산 단위를 지칭한다.[1] 인민폐는 중국 본토에서 사용되는 공식 통화이며, ISO 4217 표준 코드는 CNY이다.

타이완에서도 '위안'이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1949년, 기존 통화를 대체하여 신 타이완 달러가 도입되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 타이완의 통화로 사용되고 있다. 중화민국 시대(1911–1949) 동안, 최초의 위안 지폐 뒷면에는 음역 "위안" 또는 "달러"가 인쇄되기도 했다.[5] 중화민국에서 일반적으로 영어 이름은 "신 대만 달러"이지만, 1949년에서 1956년 사이에 발행된 지폐는 음역으로 "위안"을 사용했다.[6]

4. 옛 통화

한반도에서는 1892년까지 상평통보 (엽전) 1문전, 절이전(2문전), 5문전, 10문전 등이 유통되었다. 1883년에는 근대적 화폐 제도를 도입하기 위해 전환국이 설치되었다. 기존의 1000문을 1환(Whan)으로 정하고, 1888년부터는 1환 은화와 보조 화폐인 1량(Yang, 1/5환 해당) 은화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1897년 대한제국이 수립된 후, 1902년에는 화폐 단위를 1원(Won) = 100전(Chon)으로 개정했다. 이때의 원은 한국어로 도형의 을 나타내는 문자이다. 1905년 6월부터는 일본 오사카 조폐국에서 한국의 화폐 제조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이는 일본 화폐와 무게, 순도, 도안이 유사했다.

1910년 한일 병합 이후, 1911년 1월 조선총독은 구 한국 화폐 조례에 근거한 화폐 발행을 중단하고 일본 화폐법에 따른 화폐로 통일할 방침을 정했다. 1918년 4월 1일부터는 한반도에서 일본의 화폐법이 시행되어 조선 엔이 통용되었다.[13]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1945년 조선은행이 해체되었다. 미국 통치하의 대한민국에서는 잠정적인 원 화폐가 발행되었고, 1950년 한국은행 설립 이후 제1차 대한민국 원이 발행되었다. 이후 1953년에는 대한민국 환으로 화폐 개혁이 이루어졌다.

한편, 소비에트 연방 통치하의 북한 지역에서는 1947년 12월 6일, 일제강점기 통화를 대체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이 발행되게 되었다. 소비에트 민정청 시기에는 잠시 붉은 군대 사령부의 원이 사용되기도 했다.

중화권에서는 대한민국 원을 '한위안(韓圓)',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을 '조선위안(朝鮮圓)'으로 표기한다.

과거 한반도 및 관련 지역에서 사용된 통화
통화명사용 지역사용 기간
대한제국 원대한제국1900년 ~ 1910년
조선 엔일제강점기 조선,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 소비에트 민정청1910년 ~ 1945년
만주국 위안만주국1932년 ~ 1945년
대한민국 원 (제1차)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 대한민국1945년 ~ 1953년
붉은 군대 사령부의 원소비에트 민정청1945년 ~ 1947년
구 대만 달러대만1946년 ~ 1949년
대한민국 환대한민국1953년 ~ 1962년


참조

[1] 뉴스 Yuan or renminbi: what's the right word for China's currency? https://blogs.wsj.co[...] The Wall Street Journal 2014-03-03
[2] 서적 Chinese Business 2.0 | Internationalizing the RMB https://books.google[...] Springer 2019-05-24
[3] 웹사이트 History of the Chinese Yuan http://currencyinfor[...] Currency Information and Research 2019-12-02
[4] 웹사이트 Chinese Dragon Coinage http://www.kenelks.c[...] Ken Elks 2000
[5] 웹사이트 Banknote images of China, 1914–1949 http://www.banknotew[...] 2006-11-23
[6] 웹사이트 Table of New Taiwan dollar http://www.sinobankn[...] 2006-11-23
[7] 서적 円の百年―日本経済側面史 朝日選書 1986
[8] 서적 江戸の貨幣物語 東洋経済新報社 1996
[9] 서적 Standard catalog of WORLD COINS Krause publications 1989
[10] 간행물 貨幣制度調査会報告 1895
[11] 서적 円の社会史―貨幣が語る近代 中公新書 1989
[12] 서적 明治財政史(第11巻)通貨 大蔵省編纂 1905
[13] 서적 明治大正財政史(第13巻)通貨・預金部資金 大蔵省編纂 1939
[14] 서적 モンゴル史 恒文社 1988
[15] 서적 世界コイン図鑑 日本専門図書出版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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