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데르 조리그투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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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수데르 조리그투 칸은 1388년에서 1391년까지 북원의 칸으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아리크 부케의 후손으로, 1388년 토구스 테무르를 살해하고 칸위에 올랐다. 그의 즉위는 몽골 제국 제위 계승 전쟁 이후 아리크 부케 가문이 칸위를 되찾은 사건으로, 오이라트 부족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내분으로 인해 세력이 약화되었으며, 1392년 명나라와의 전투에서 사망했거나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수데르 사후 그의 아들 엥케 칸이 대칸이 되었으나, 잦은 혼란으로 칸의 권위는 실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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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데르 조리그투 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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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조리그투 칸 |
한자 표기 | 卓里克圖汗 |
몽골어 표기 (몽골 유니코드) | ᠵᠣᠷᠢᠭᠲᠤ ᠬᠠᠭᠠᠨ |
몽골어 (키릴 문자) 표기 | Зоригт Хаан |
몽골어 (음역) | 조리그트 하안 |
다른 이름 | 이에스데르 |
페르시아어 표기 | یسودار |
통치 정보 | |
칭호 | 카간 |
국가 | 몽골 제국 |
왕조 | 북원 |
즉위 | 1388년 |
퇴위 | 1391년 |
전임자 | 우스칼 칸 토구스 테무르 |
후임자 | 엥케 칸 |
생애 | |
출생 | 1358년 또는 1359년 |
사망 | 1391년 (추정) |
부친 | 정보 없음 |
모친 | 정보 없음 |
배우자 | 정보 없음 |
자녀 | 엥케 칸(?) |
가계 | |
왕가 | 보르지긴 가문 |
가문 분파 | 아리크부케 파 (?) |
2. 생애
1358년 혹은 1359년경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조리그투'는 몽골어로 '용감한'이라는 뜻을 가진다. 그의 초기 생애와 가계에 대해서는 기록이 명확하지 않아, 칭기스 칸의 손자이자 쿠빌라이와 칸위를 다투었던 아리크 부케의 후손이라는 설과 북원의 우스칼 칸 토구스 테무르의 아들이라는 설 등 여러 주장이 엇갈린다. 몽골 측 사료에는 '조리그투 칸'으로, 명나라 측 사료에는 '이수데르'(也速迭儿|예수데르중국어, Есүдер|예수데르mn)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황후 보르지긴씨는 원 소종 아유르시리다르 빌레그트 칸과 고려 출신 권황후(권겸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황녀였다.
그의 이름이 역사 기록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1388년 무렵이다. 그해 명나라 군대의 공격으로 당시 북원의 칸이었던 우스칼 칸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자, 이수데르는 몽골고원 서부의 오이라트 부족과 연합하여 기회를 엿보았다. 1388년 11월 1일, 그는 툴 강변에서 우스칼 칸과 그의 장남을 습격하여 시해하고 북원의 대칸으로 즉위했다. 이는 그의 조상인 아리크 부케가 쿠빌라이에게 패배한 몽골 제국 제위 계승 전쟁 이후 124년 만에 아리크 부케 가문이 칸위를 되찾은 사건이었다.
이수데르가 칸에 즉위할 무렵, 북원은 명나라와의 계속된 전쟁 패배와 내부 분열로 인해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많은 황족과 귀족들이 명나라에 투항했으며, 차가타이 칸의 후예 구나시리가 카라델 칸국을 세워 독립하고, 오이라트 부족과 다른 동몽골 부족들도 북원의 종주권을 거부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는 등 내부 혼란이 극심했다. 테무게 옷치킨 가문의 후예인 아자시르가 우량하이 3위로 명나라에 투항한 것도 이 시기였다. 이수데르는 중국식 풍습을 거부하고 옛 몽골 제국의 영광을 되찾으려 시도했으나, 칸의 권위는 이미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
1392년, 명나라 장군 주흥(周興)이 이끄는 군대의 공격을 받아 오논강 유역과 후룬호 인근 전투에서 연이어 패배하였다. 이 전투 이후 그의 행적은 불분명하며, 전투 중 사망했거나 직후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사후 아들 엥크 칸이 뒤를 이었으나, 칸의 권위는 더욱 약화되어 오이라트 부족 연합의 지도자들에게 실권을 빼앗기는 등 몽골의 분열은 심화되었다. 명나라는 이수데르가 쿠빌라이 가문을 대칸 위에서 몰아낸 것을 기점으로 대원 울루스가 단절되었다고 보았으나, 몽골인들은 대원의 역사가 계속 이어진다고 인식했다.
2. 1. 대칸 즉위 이전
1358년 혹은 1359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조리그투'는 몽골어로 '용감한'이라는 뜻이다. 그의 초기 생애와 부모에 대한 기록은 명확하지 않다. 가계에 대해서는 칭기스 칸의 손자이자 쿠빌라이와 칸위를 다투었던 아리크 부케의 후손이라는 설과, 북원의 우스칼 칸 토구스 테무르의 아들이라는 설 등 여러 주장이 존재한다. 몽골 측 사료인 황금사 등에는 '조리그투 칸'으로 기록된 반면, 명나라의 명사, 명실록 등에는 '이수데르'(也速迭儿|예수데르중국어, Есүдер|예수데르mn)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그의 황후 보르지긴씨는 원 소종 아유르시리다르 빌레그트 칸과 고려 출신 권황후(권겸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황녀였다.그의 이름이 역사 기록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1388년 무렵이다. 그해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남옥(藍玉) 등을 지휘관으로 삼아 15만 대군으로 북원을 공격했다. 명군의 공세로 당시 북원의 칸이었던 우스칼 칸 토구스 테무르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자, 이수데르는 이를 기회로 삼았다. 그는 몽골고원 서부의 오이라트 부족과 손을 잡고 1388년 11월 1일, 우스칼 칸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그가 북원의 대칸으로 즉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2. 1. 1. 불확실한 가계와 정체
1358년 혹은 1359년에 태어났으나 정확한 생일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조리그투 칸 이수데르의 부모와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명확하지 않아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의 칭호인 '조리그투'는 몽골어로 '용감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그의 가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 가장 유력한 설은 그가 칭기스 칸의 막내아들 툴루이의 아들인 아리크 부케의 5세손이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아리크 부케의 차남 나리쿠 부케의 후손으로 추정되지만, 상세한 가족 관계는 기록이 소실되어 정확히 알 수 없다. 1382년 명나라에서 편찬된 《화이역어》(華夷訳語)에는 '아리크 부케의 자손 대왕 이수데르'(Ariqbökö-yin uruγ-un kö'ün Yisüder)라는 기록이 있어 이 설을 뒷받침한다. 아리크 부케는 쿠빌라이와 대칸 자리를 놓고 경쟁하다 패배했지만, 그의 후예들은 이수데르 시대까지 몽골 고원 서부 지역에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몽고원류》(蒙古源流)에서는 그를 북원의 우스칼 칸 토구스 테무르의 장남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오르도스부 출신의 몽골 역사가 사강 세첸 역시 그가 원나라 황제 토곤테무르 우카가투 칸의 둘째 아들인 토구스테무르 우스칼 칸의 장남이자 후계자였다고 주장했다. 만약 이 설이 사실이라면, 그의 황후 보르지긴씨(원 소종 아유르시리다르 빌레그트 칸과 고려 출신 권황후의 딸)는 그와 사촌 관계가 된다.
사료마다 그의 이름 표기도 다르게 나타난다. 몽골의 연대기인 황금사에는 '조리그투 칸'으로 기록된 반면, 명나라의 기록인 명사나 명실록에는 '이수데르'(也速迭儿|예수데르중국어, Есүдер|예수데르mn)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또한, 이수데르 조리그투 칸과 그의 뒤를 이은 엔케 칸의 관계에 대해서도 기록이 엇갈린다. 티무르 제국의 문헌과 명나라 측 사료는 조리그투 칸과 엔케 칸을 별개의 인물로 본다. 명나라 기록에 따르면 조리그투 칸 이수데르는 1388년부터 1391년까지 통치했고, 그의 아들 엔케가 1391년부터 1393년까지 통치했다고 한다. 그러나 《몽골원류》에서는 조리그투 칸과 엔케 칸을 동일 인물로 보아 '엥크 조리그투 칸'이라고 칭하는 반면, 《황금사》에서는 두 사람을 다른 인물로 기록했다. 일부 다른 몽골 역사 자료에서는 엔케 조리그투 칸을 토구스테무르 우스칼 칸의 아들로 언급하기도 한다.
이러한 기록의 혼란 때문에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일부 학자들은 조리그투 칸을 아리크 부케의 후손인 이수데르와 동일 인물로 간주하며, 다른 학자들은 엔케 칸이 이수데르의 아들이었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학자들은 엔케 칸과 조리그투 칸이 이름은 다르지만 동일 인물일 가능성을 제기하며, 이들을 '엥크-조리그투 칸'으로 부르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이수데르 조리그투 칸의 정확한 출생 배경과 가계, 그리고 엔케 칸과의 관계는 여전히 불확실한 점이 많으며, 그의 출생지와 초기 활동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가 없다.
2. 1. 2. 출생 및 초기 활동
1358년 혹은 1359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생일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조리그투 칸 이수데르의 부모와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 역시 불분명하여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의 칭호인 '조리그투'는 몽골어로 '용감한'이라는 의미를 지닌다.이수데르의 가계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존재한다. 그는 칭기즈 칸의 막내아들 툴루이의 아들이자 쿠빌라이 칸과 칸위 계승을 놓고 다투었던 아리크 부케의 5대손으로, 아리크 부케의 차남 나리쿠 부케의 후손으로 추정되지만, 자세한 가족 관계는 전해지지 않는다. 1382년 명나라에서 편찬된 《화이역어(華夷譯語)》에는 '아리크 부케의 자손 대왕 이수데르'(Ariqbökö-yin uruγ-un kö'ün Yisüdermn)라는 언급이 남아 있어, 그가 아리크 부케 가문 출신임을 시사한다. 쿠빌라이와의 경쟁에서 패배한 아리크 부케는 몽골 서부 지역을 영지로 받았고, 이 영지는 그의 후예들에게 계승되었다.
한편, 오르도스부 출신의 몽골 역사가 사강 세첸(Саган сэцэн)이 저술한 《몽고원류(蒙古源流)》에 따르면, 이수데르는 북원의 천원제 토구스 테무르의 장남이자 후계자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다른 기록들과 상충되는 부분이 있다. 황금사에는 그가 조리그투 칸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명나라의 기록인 명사나 명실록에는 이수데르(也速迭儿, Есүдер|예수데르mn)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티무르 제국 계열의 문헌에서는 1389년부터 1393년 무렵에 조리그투 카안과 엥크 카안이라는 두 명의 다른 카안이 존재했다고 언급하기도 한다.
그의 황후 보르지긴씨는 원 소종 아유르시리다르 빌레그트 칸과 고려 출신 권겸(權謙)의 딸인 권황후 사이에서 태어난 황녀였다.
이수데르의 출생지와 초기 활동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다. 그의 이름이 역사 기록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1388년 무렵이다. 그해 4월 12일,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남옥(藍玉)을 정로대장군(征虜大将軍)으로, 당승종(唐勝宗)을 좌부장군(左副将軍)으로, 곽영(郭英)을 우부장군(右副将軍)으로 삼아 15만 대군을 이끌고 만리장성 너머 북원을 공격하게 했다. 당시 북원의 칸이었던 토구스 테무르(우스칼 칸)의 군대는 명나라 군대에 맞서 싸웠으나 고전을 면치 못했다. 같은 해 10월, 명나라 군대가 다시 내몽골을 침공하여 몽골고원 동부로 진격하자, 이수데르는 이를 기회로 삼았다. 그는 오이라트 부족과 손을 잡고 1388년 11월 1일, 토구스 테무르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2. 2. 정변과 즉위
1388년 (북원 천원 10년/명 홍무 21년) 10월, 고원 동부 후룬베이얼 지방 부이르 노르(호수) 근처에서 명나라 장군 남옥(藍玉)의 군대에게 천원제 토구스 테무르 우스칼 칸의 북원군이 대패하여 70,000명이 전사하는 참극이 벌어졌다(부이르 노르 전투). 토구스 테무르가 군사를 이끌고 부이르 노르로 간 사이, 승상 카자크(咬住)는 카라코룸의 유수를 맡고 있었다. 토구스 테무르가 남옥의 군대에게 대패할 무렵, 이수데르는 툴 강변에서 카자크를 습격하여 크게 무찔렀다.11월 1일(음력 10월 3일), 이수데르는 오이라트 병력과 함께 툴 강 강변에 매복하고 있다가, 서부 전선의 장군들과 합류하기 위해 단 16기의 기병만을 거느리고 카라코룸 서쪽으로 이동하던 토구스 테무르를 습격했다. 토구스 테무르는 소수의 측근들과 함께 도망쳤으나, 이수데르는 대왕 호르후다슨(홀후다순) 등을 파견하여 토구스 테무르를 사로잡았다.[5] 이수데르는 부이르 노르 인근 혹은 툴 강변에서 토구스 테무르와 그의 장남을 시해하고 북원의 대칸으로 즉위했다. 토구스 테무르의 시해 방법에 대해서는 독살설도 있고, 이수데르가 파견한 대왕 카라쿠타슨(火兒忽答孫, 호르후다슨과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있음)이 활시위로 목 졸라 죽였다는 설도 있다. 후자의 설은 《명태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수데르가 토구스 테무르를 시해하고 대칸 자리에 오른 것은, 그의 조상인 아리크 부케가 쿠빌라이에게 패배한 몽골 제국 제위 계승 전쟁 이후 124년 만에 아리크 부케 가문이 칸위를 되찾은 사건이었다. 이수데르가 정변을 일으킬 때 오이라트의 지지를 받았다. 《화이역어》에 따르면, 과거 아리크 부케가 쿠빌라이 칸과 칸위 계승을 놓고 다툴 때 아리크 부케를 지원했던 오이라트 부족이 이번에도 이수데르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고 한다.[6] 몽골 제국 초기에 번성했던 오이라트는 쿠빌라이 시대 이후 역사에서 잠시 멀어졌는데, 이는 쿠빌라이와 아리크 부케의 대립 당시 아리크 부케 편에 섰기 때문이었다.
한편, 교주 카자크와 태위 마라크(馬兒哈)는 토구스 테무르의 군대와 합류하려 했으나, 11월 1일의 폭설로 길이 막혀 합류하지 못하고 그대로 명나라로 투항했다. 11월 4일, 토구스 테무르 칸의 암살 소식을 들은 국공 노철, 승상 시레문, 우승 카라타이, 상서 타구타이 등도 3천 명을 이끌고 명나라로 투항했다.
2. 3. 즉위와 내부 혼란
1388년, 쿠빌라이의 후예인 토구스 테무르 칸이 살해되면서 쿠빌라이 가문은 몰락했다. 이수데르는 오이라트 태사들의 지원을 받아 몽골의 새로운 대칸으로 즉위했다. 이 시기는 동몽골의 북원과 서몽골의 오이라트 모두 내부적으로 권력 교체를 위한 변화가 빠르게 진행되던 때였다. 특히 1388년 오이라트의 수장 우게치가 쿠빌라이 계통의 대칸을 제거하면서 동몽골과 서몽골 사이의 대립이 시작되었고, 이후 10여 년간 혼란이 이어졌다.이수데르가 칸에 즉위할 무렵, 북원은 명나라와의 계속된 전쟁 패배와 내부 분열로 인해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 많은 황족과 귀족들이 명나라에 항복했다. 1389년 (홍무 22년) 명나라는 현재의 내몽골 지역인 타인에 군대를 보내 몽골 정벌군을 편성하기도 했다. 같은 해 4월, 과거 우스칼 칸의 측근이었던 네케레이와 시레문이 명나라에 투항하여 각각 전녕위의 장관으로 임명되었다.[7] 다음 해인 1390년 5월에는 옷치긴 가문의 후예인 아자슈리마저 명나라에 항복하여, 그의 세력은 우리앙카이 삼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8]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수데르는 중국식 풍습을 거부하고, 중국 내에 있던 옛 몽골의 재산을 되찾으려 시도했다. 또한 원나라 황제들이 전통적으로 여름과 겨울에 거처를 옮기던 관행도 따르지 않았다. 황금사(黃金史)에 따르면 그가 원나라, 즉 대원(大元)이라는 국호를 폐지했다는 기록도 있지만, 이후 에센 타이시, 톡토아부카 타이순 칸, 바흐뭉케 다얀 칸, 부얀 서천 칸 등이 스스로 대원의 칸을 칭했기 때문에 이견이 있다.
북원의 약화와 귀족들의 이탈에 대응하여, 이수데르는 부하인 안다 나가추를 파견하여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고자 했다. 안다 나가추는 오논 강 유역까지 진출하여 명나라에 항복했던 몽골인들과 비밀리에 접촉했다. 1389년 8월, 명나라에 투항했던 시레문은 함께 투항했던 네케레이를 살해하고 안다 나가추에게로 도망쳐 합류했다.[9]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명나라는 1392년 (홍무 25년) 주흥을 파견하여[10] 오논 강과 힝안 산맥 일대에 있던 안다 나가추 및 이수데르를 따르는 세력을 토벌하게 했다.[11]
2. 4. 구 몽골 세력의 이탈
1389년 4월, 우스칼 칸의 측근이었던 노얀 네케레크와 시레문이 오르도스에서 반란을 일으켜 명나라로 투항했다. 홍무제 주원장은 이들을 전녕위(全寧衛)의 장관으로 임명했다.[7] 같은 해, 차가타이 칸의 후손인 구나시리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 동부 하미 일대에서 세력을 모아 카라델 칸국을 세우고 북원에서 독립했다.[18] 또한 오이라트부와 다른 동몽골 부족들도 북원의 종주권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명나라는 내몽골의 타이위안에 세 개의 몽골인 경비 부대를 배치했으며, 지린 성 자오얼하(洮儿河) 부근의 태녕위(泰寧衛)에도 몽골인 병력을 두어 북원을 견제했다. 한편, 네케레크와 시레문을 따라 명나라에 투항했던 일부 몽골 병사들은 다른 몽골 대장을 살해하고 다시 이수데르 칸에게 귀순하기도 했다.1390년 5월에는 랴오양(요양) 지역의 유력자이자 테무게 옷치킨 가문의 후손인 아자시르(Ажашир)가 군대를 이끌고 명나라에 투항하여 우량하이 3위(兀良哈三衛)에 봉해졌다.[8] 이러한 세력 이탈에 대응하여 이수데르 칸은 자신의 '안다'(의형제)인 잘라이르 부족의 나하추를 파견해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고자 했다. 나하추는 오논강 유역까지 진출하여 명나라에 투항한 몽골인들과 비밀리에 접촉했다. 같은 해 8월 25일, 명나라에 투항했던 네케레크는 부하 몽골 병사들에게 살해당했고, 이들은 나하추에게 귀순했다.[9]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몽골 지역은 점차 명나라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명나라는 1392년 명태조 주원장의 명으로 장군 주흥을 파견하여 오논강과 힝안 산맥 일대에서 활동하던 나하추와 이수데르 칸을 따르는 세력을 토벌하게 했다.[10][11] 이수데르 칸이 즉위할 무렵 북원은 계속된 전쟁 패배와 내부 분열로 인해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으며, 많은 왕족과 귀족들이 명나라에 항복하는 상황이었다.
2. 5. 명나라와의 교전과 최후
1392년 3월 2일, 명나라의 명 태조 주원장은 장군 주흥(周興)을 총병관(總兵官) 겸 북평도지휘사(北平都指揮使)로 임명하고 병력 6~7천 명(혹은 1만 명)을 주어 몽골을 공략하도록 지시했다. 주흥은 몽골인으로 구성된 부대까지 동원하여 공격에 나섰다.같은 해 8월, 주흥이 이끄는 명나라 군대와 몽골 귀순자 부대는 오논강과 힝간산맥 일대에 있던 안다 나하추 세력과 이수데르 칸을 공격했다. 8월 11일 명군은 斡難河|알난하중국어(오논강)에서 안다 나하추를 공격하여 그의 거마를 파괴하고, 몽골인 500여 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말, 소, 양 등 많은 가축을 약탈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몽골인이 살해되거나 포로로 끌려갔고 가축들도 도살되거나 빼앗겼다.
이수데르 칸 역시 오논강 전투에서 주흥의 군대에 패배한 후, 呼倫池|후룬지중국어(현 내몽골 후룬호) 서남쪽에 위치한 철철아산(徹徹兒山)으로 후퇴했다. 그러나 추격해 온 주흥 군대에게 다시 패배하였고, 이때 몽골 병력 500여 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다수의 가축과 은인(銀印)을 명나라에 빼앗기는 수모를 겪었다.
이수데르 칸의 패배 이후 그의 영토는 오이라트부와 아수드부의 아룩타이 등이 차지하게 되었다. 그의 이후 행적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각에서는 1393년에 사망했다는 설도 제기된다. 1392년 그의 장남 엥크가 아버지 조리그투 칸의 뒤를 이어 대칸으로 즉위했다. 명나라의 역사서인 명사에는 토구스 테무르 이후 다섯 명의 칸이 살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이수데르 역시 피살되었거나 전투 중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2. 6. 사후
몽골 서부의 오이라트는 북원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다. 명나라는 이수데르가 쿠빌라이 가문을 대칸 위에서 몰아낸 것을 기점으로 대원 울루스가 단절되었다고 보았다. 이후 명나라는 오이라트 부족 연합을 '오이라트'로, 동쪽의 몽골 부족 연합을 '달단(타타르)'으로 구분하여 불렀다.그러나 몽골인들은 이러한 외부의 시각과 달리, 오이라트 부족 연합 출신의 에센 칸이나 몽골 부족 연합 출신의 다얀 칸 등이 스스로 "대원의 칸"을 칭한 것처럼, 이수데르 조리그투 칸 이후에도 대원 대몽골 울루스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칸의 권위는 점차 약화되어, 이수데르 칸 사후에는 고하이 태위나 우게치 카스하와 같은 오이라트 부족 연합의 지도자들에게 실권을 빼앗기게 되었다.
3. 대원 국호 폐지설 & 단절설
이수데르가 즉위하면서 원나라 국호를 폐지했다는 설이 있다. 또한, 명나라는 이수데르의 쿠데타로 쿠빌라이 가문의 칸이 축출되자 이를 대원 울루스의 단절 시점으로 파악했다. 명나라는 이후 오이라트 부족 연합을 瓦剌|와랄중국어, 동방의 부흥한 몽골 부족 연합을 韃靼|달단중국어(타타르)이라고 부르며, 더 이상 원나라나 원조(元朝)라고 칭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외부의 시각과 달리, 이후의 부냐시리 울제이테무르 칸, 오이라트부 출신 에센 타이시, 보르지긴 가문 출신인 다얀 칸 등은 스스로를 원나라의 황제라고 칭했다. 오이라트부의 토곤 타이시 역시 스스로를 대원 유왕(大元 類王)이라 했고, 아수드부의 아룩타이도 자신의 직책을 대원 승상(大元 丞相)이라고 칭했다. 이는 몽골인의 자의식 속에서는 이수데르 즉위 이후에도 대원 대몽골 울루스가 단절되지 않고 계속 존속했다고 여겼음을 보여준다.
참조
[1]
서적
Altan Tobchi
[2]
서적
Shajrat Ul Atrak: Or The Genealogical Tree Of The Turks And Tatars
"//books.google.com/[...]
[3]
서적
The Mongol Empire and Its Legacy
https://books.google[...]
Brill
[4]
문서
唯一北元時代のハーンの生年を記す『蒙古源流』において「エンケ・ジョリクト・ハーン」の生年を己亥(1359年)とすることに拠る。ただし、岡田英弘は『蒙古源流』に記される干支紀年を整理する過程で(1)ダヤン・ハーン以後の紀年は他の史料と大凡一致するがそれ以前の紀年は一致しないこと、(2)ただしダヤン・ハーン以前の紀年も十干を除いて十二支のみで数えればハーンの没年のみは他の史料と一致することを指摘し、「『蒙古源流』の元になった史料にはダヤン・ハーンの子孫の生没年を干支で記したものと、ダヤン・ハーン以前のハーンの在位年代と没年を十二支のみで記したものの2つがあり、作者の[[サガン・セチェン]]は編纂の過程で体裁を統一するためにダヤン・ハーン以前の紀年にも十干を加え生年も付け足したが、これらは後世の創作で信じるに値しない」と論じた(岡田2010,244-246頁)。従って、「己亥(1359年)生まれ」という記述も後世の創作である可能性が高い。
[5]
간행물
『明太祖実録』洪武二十一年十月丙午「初虜主脱古思帖木児在捕魚児海、為我師所敗、率其餘衆、欲還和林、依丞相咬住。行至土剌河、為'''也速迭児'''所襲撃、其衆潰散独与捏怯来等十六騎遁去。適遇丞相咬住・太尉馬児哈咱領三千人来迎、又以闊闊帖木児人馬衆多、欲往依之、会天大雪、三日不得発。'''也速迭児'''遣大王火児忽答孫・王府官孛羅追襲之、獲脱古思帖木児、以弓絃縊殺之、並殺其太子天保奴。故捏怯来等恥事之、遂率其衆来降」
[6]
간행물
岡田2010,362-365頁
[7]
간행물
『明太祖実録』洪武二十二年四月己亥「詔置全寧衛。遣使齎印往命捏怯来為指揮使、失烈門以下俱授以武職有差」
[8]
간행물
和田1959,30頁
[9]
간행물
『明太祖実録』洪武二十二年八月「是月……故元丞相失烈門潜通塔失海牙等、率其部下襲刼捏怯来、至'''也速迭児'''僉院'''安達納哈出'''所殺之其部下潰散。詔令朶顔・福餘等衛招撫之、送大寧給与糧食、仍還全寧居住」
[10]
간행물
『明太祖実録』洪武二十五年八月庚申「……先是、興率師至斡難河、転至兀古児札河、按視'''安達納哈出'''之地、見車馬跡、遂追至兀者河、得空車百餘輌、将還。適永平衛百戸汪広報言、哨遇胡兵、与戦敗之、追奔八十餘里、胡兵棄輜重潰去。……」
[11]
간행물
和田1959,33-34頁
[12]
간행물
井上2004,2-3頁
[13]
간행물
森川2008、66-67頁
[14]
간행물
岡田2010,229-236頁
[15]
간행물
本田1991,601-603頁
[16]
간행물
岡田2010,231頁
[17]
간행물
岡田2010,251-253頁
[18]
서적
The Mongol Empire and Its Legacy
Br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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