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정 (16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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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원정(1622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1622년 경상북도 성주에서 태어났다. 1652년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관직에 나섰으며, 전주판관, 동래부사, 의주부윤 등을 역임했다.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며 외교적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으나, 당쟁에 휘말려 여러 차례 파직과 복직을 반복했다. 경신대출척으로 숙청되어 1680년 장살되었으나, 사후 기사환국으로 신원되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원정(李元禎)은 1622년 경상북도 성주군에서 태어나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이암(耳巖)에서 살았다. 본관은 광주이며, 아버지는 부응교(副應敎)를 지내고 의정부좌찬성에 증직(贈職)된 이도장(李道長)이다. 어머니는 안동 김씨 김시양의 딸이며, 부인은 벽진이씨이다. 숙종 때 이조참판을 지낸 이담명(李聃命)의 아버지이다.
스스로 재주와 말을 잘한다고 확신하였다. 영남(嶺南)에서는 그를 변국 제조(變局提調)라고 불렀다.[9]
2. 생애
고려 때 판전교시사(判典校侍事)를 지낸 이집(李集)의 후손으로, 조선의 공신 이지직의 9대손이다. 6대조 이지(李摯)가 경상북도 칠곡으로 낙향하여 정착하였다. 이후 할아버지 이윤우가 광해군 때 공조참의를 역임하고 아버지 이도장이 부응교에 임명되면서 한성부로 이주하였다. 친할아버지는 이윤우였으나, 아버지 이도장은 군자감 주부(主簿)를 지내고 이조판서에 증직된 5촌 당숙 이영우에게 입양되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한강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허목, 윤휴 등과 교류하였다. 문신이자 학자인 할아버지 이윤우(李潤雨)에게서도 학문을 배웠다. 성인이 되어서는 자(字)를 사징(士徵), 호(號)를 귀암(歸巖)이라 하였고, 고향 성주의 별칭인 경산(京山)을 별호로 사용하였다. 어려서부터 시를 짓기 시작했는데, 그의 시가 청나라로 전해져 청나라 대신들을 놀라게 하였다.
1648년(인조 26)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성균관에서 공부하였다. 1652년(효종 3) 증광문과에 갑과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상의원 직장(尙衣院直長)에 임명되었으나,[2] 성균관 문묘 참배 문제로 동료들과 연명 상소를 올렸다가 좌의정 김육의 비판을 받았다.[1]
이후 의주 부윤, 장례원판결사, 형조참의, 승지, 광주부윤, 한성부 좌윤, 공조참판, 형조참판 등 여러 관직을 거쳤다. 1667년 세자 책봉식에 독책관(讀冊官)으로 참여하고 가선대부로 승진했다. 청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중국어와 한자에 능통한 실력을 바탕으로 외교 업무를 원만하게 수행하였다.[8]
1674년 예송 논쟁 당시 남인의 입장에서 송시열 처벌을 주장하였고, 남인 집권 후 대사간,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678년 영남 지역 대동법 시행을 주도하는 등 대동법 시행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삭탈관작 당하고 초산에 유배되었다. 유배지로 가던 도중 허적, 윤휴가 사사된 뒤 소환되어 장형을 받던 중 장살(杖殺)당하였다.
사후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신원(伸寃)되어 복관되었고, 증직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1] 그러나 1694년 갑술옥사로 추탈되었다가 1697년 다시 관작이 회복되는 등 정국의 변화에 따라 여러 차례 추탈(追奪)되었다.[1]
2. 1. 생애 초반
1622년 경상북도 성주군에서 태어나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이암(耳巖)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부응교(副應敎)를 지내고 의정부좌찬성에 증직(贈職)된 이도장(李道長)이고, 어머니는 안동 김씨 김시양의 딸이며, 부인은 벽진이씨이다. 숙종 때 이조참판을 지낸 이담명(李聃命)의 아버지이다.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고려 때 판전교시사(判典校侍事)를 지낸 이집(李集)의 후손으로, 조선의 공신 이지직의 9대손이다. 이지직의 셋째 아들 이예손이 이원정의 8대조가 된다. 6대조 이지(李摯)가 승사랑(承仕郞)으로 있을 때 경상북도 칠곡으로 낙향하여 정착하였다. 이후 할아버지 이윤우가 광해군 때 공조참의를 역임하고 아버지 이도장이 부응교에 임명되면서 한성부로 이주하였다. 친할아버지는 이윤우였으나, 아버지 이도장은 군자감 주부(主簿)를 지내고 이조판서에 증직된 5촌 당숙 이영우에게 입양되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하여, 선비들이 사자소학과 천자문 등을 물으면 막힘없이 대답하여 신동으로 칭송받았다. 한강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허목, 윤휴 등과 교류하였다. 문신이자 학자인 할아버지 이윤우(李潤雨)에게서도 학문을 배웠다. 성인이 되어서는 자(字)를 사징(士徵), 호(號)를 귀암(歸巖)이라 하였고, 고향 성주의 별칭인 경산(京山)을 별호로 사용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글을 읽을 때 한 눈에 여덟 줄씩 읽고 배우는 대로 외웠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시를 짓기 시작했는데, 그의 시가 청나라로 전해져 청나라 대신들을 놀라게 하였다.
1648년(인조 26)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성균관에서 공부하였다. 1652년(효종 3) 증광문과에 갑과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성균관의 문묘가 잠겨 있어, 급제 후 3일 안에 성균관 문묘에 인사하지 못하자 동료들과 함께 항의하는 연명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1] 갑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권지를 거치지 않고 바로 상의원 직장(尙衣院直長)에 임명되었다.[2] 하지만 그가 주도한 연명 상소가 문제가 되자, 좌의정 김육은 그해 11월 상소를 올려 상소는 고자질과 비슷하므로 신진들의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비판하였다.
2. 1. 1. 출생과 가계
1622년 경상북도 성주군에서 태어나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이암(耳巖)에 살았다. 본관은 광주(廣州)로 아버지는 부응교(副應敎)를 지내고 의정부좌찬성에 증직(贈職)된 이도장(李道長)이며, 어머니는 안동김씨 김시양의 딸이고, 부인은 벽진이씨이다. 숙종 때 이조참판을 지낸 이담명(李聃命)의 아버지이다.
고려 때 판전교시사(判典校侍事)를 지낸 이집(李集)의 후손으로, 조선의 공신 이지직의 9대손이다. 이지직의 둘째 아들이 의정부좌의정을 지낸 이인손이며, 이극균, 이극돈, 이극감, 이이첨 등은 그의 방계 조상들이었다. 이지직의 셋째 아들 이예손이 이원정의 8대조가 된다. 그 뒤 6대조 승사랑(承仕郞) 이지(李摯)의 대에 경북 칠곡으로 낙향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이후 할아버지 이윤우가 광해군 때 공조참의를 지내고 아버지 이도장이 부응교에 임명되어 중앙정계로 진출하면서 한성부로 올라갔다.
친할아버지는 이윤우였으나, 아버지 이도장은 군자감주부를 지내고 이조판서에 증직된 5촌 당숙 이영우의 양자로 가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하여 선비들이 그를 불러 사자소학과 천자문 등을 묻자 막힘없이 줄줄이 대답하여 선비들을 감탄시키니 신동이라 칭송받았다. 한강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허목, 윤휴 등을 알게 되었다. 문신이자 학자인 할아버지 이윤우(李潤雨)에게도 수학하였다. 성인이 되자 자를 사징(士徵)이라 하고 호는 귀암(歸巖)이라 하였으며, 별호로는 고향 성주의 별칭인 경산(京山)이라 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글을 읽을 때 한 눈에 여덟 줄씩 읽고 배우는 대로 외웠다고 전한다. 어려서부터 시를 짓기 시작했는데, 그 시가 청나라로 전해져 청나라 대신들을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2. 1. 2. 유년기와 수학
1622년 경상북도 성주군에서 태어나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이암(耳巖)에 살았다.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아버지는 부응교(副應敎)를 지내고 의정부좌찬성에 증직(贈職)된 이도장(李道長)이다. 어머니는 안동 김씨 김시양(金時讓)의 딸이며, 부인은 벽진 이씨이다. 숙종 때 이조참판을 지낸 이담명(李聃命)의 아버지이다.
고려 때 판전교시사(判典校侍事)를 지낸 이집(李集)의 후손으로, 조선의 공신 이지직의 9대손이다. 이지직의 둘째 아들이 의정부좌의정을 지낸 이인손이며, 이극균, 이극돈, 이극감, 이이첨 등은 그의 방계 조상들이었다. 이지직의 셋째 아들 이예손이 이원정의 8대조가 된다. 6대조 이지(李摯)가 승사랑(承仕郞)으로 있을 때 경상북도 칠곡으로 낙향하여 정착하였다. 이후 할아버지 이윤우가 광해군 때 공조참의를 역임하고 아버지 이도장이 부응교에 임명되면서 한성부로 이주하였다.
친할아버지는 이윤우였으나, 아버지 이도장은 군자감 주부(主簿)를 지내고 이조판서에 증직된 5촌 당숙 이영우에게 입양되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하여, 선비들이 사자소학과 천자문 등을 물으면 막힘없이 대답하여 신동으로 칭송받았다. 한강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허목, 윤휴 등과 교류하였다. 문신이자 학자인 할아버지 이윤우(李潤雨)에게서도 학문을 배웠다. 성인이 되어서는 자(字)를 사징(士徵), 호(號)를 귀암(歸巖)이라 하였고, 고향 성주의 별칭인 경산(京山)을 별호로 사용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글을 읽을 때 한 눈에 여덟 줄씩 읽고 배우는 대로 외웠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시를 짓기 시작했는데, 그의 시가 청나라로 전해져 청나라 대신들을 놀라게 하였다.
2. 1. 3. 과거 급제
1648년(인조 26)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성균관에서 공부하였다. 1652년(효종 3) 증광문과에 갑과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성균관의 문묘가 잠겨 있어, 급제 후 3일 안에 성균관 문묘에 인사하지 못하자 동료인 김익창(金益昌)·정창도(丁昌燾)·조성(趙䃏)·구음(具崟)·안후열(安後說)·장건(張鍵)·김도(金濤) 등과 함께 항의하는 연명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1] 갑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권지를 거치지 않고 바로 상의원 직장(尙衣院直長)에 임명되었다.[2]
하지만 그가 주도한 연명 상소가 문제가 되자, 좌의정 김육은 그해 11월 상소를 올려 상소는 고자질과 비슷하므로 신진들의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비판하였다.
2. 2. 관료 생활
1663년(현종 4) 11월 24일 의주 부윤(義州府尹)에 임명되었으나, 민정중으로부터 장성 부사(長城府使) 시절 관곡(官穀) 남용 및 동래에서의 미흡한 일 처리로 탄핵받고 3일 만에 파면되었다. 12월 초, 동래 부사 시절 구휼어사로 파견되었던 남구만이 그를 두둔하였다.
1664년(현종 5) 2월 장례원판결사, 4월 18일 형조참의를 거쳐 6월 9일 승지가 되었다. 6월 21일 다시 승지가 된 후 호조 참의를 거쳐 1664년 6월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때 숙경공주(淑敬公主)의 집을 건축하는 데 도방군(到防軍)을 동원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현종은 '이는 새로운 규정이 아니고, 전부터 행해지던 일'이라며 도방군을 숙경공주의 집 건축에 징발하였다.[6] 지평 민시중이 현종을 옹호하며 그를 공격하였다. 그해 윤 6월 사직을 청하였으나 거부되었다. 7월 병으로 숙직하지 않은 이조 좌랑 이유상(李有相)의 일을 보고했다가 하옥당했다. 홍명하(洪命夏), 허적(許積) 등이 그가 억울하게 처벌받는다고 옹호하였다.
이전 지방관 시절 미곡 처리 실수 등이 문제되어 의금부에서 장 80대와 도형 2년을 선고받았으나, 영상 정태화, 우상 홍명하의 건의로 장 80대는 면제되었다. 8월 23일 호조참의가 되었다가 9월 29일 전주부윤으로 나갔다.
1666년 형조참의, 호조참의, 5월 21일 승지를 지내고, 6월 왕명으로 사직을 청하는 우상 허적을 설득했다. 9월 호조참의, 10월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장성 부사 시절 일로 대간의 논핵이 있을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대기하다가, 좌상 홍명하의 탄핵으로 11월 18일 면직되었다. 11월 28일 승지가 되고, 12월 이조 참의 이시술(李時術)의 후임을 건의하였다.
1667년 1월 대간 해임 시 인피 문자를 삭제했다는 이유로 파면된 원만리와 김우형을 두둔했으나 실패했다. 1월 말 우승지가 되고, 2월 초 대간의 탄핵을 받은 영상 정태화, 좌상 홍명하, 우상 허적에게 내리는 돈유문(敦諭文)을 대신 지었다.
그러나 돈유문에 대관(臺官)을 배척하는 내용이 문제되어 승지직을 사직하였다. 2월 말, 유학 황연(黃壖)을 시켜 송시열과 송준길이 국정을 어지럽혔으며, 조경, 허목, 윤휴, 홍우원을 배척하게 했다는 탄핵 상소를 올리게 했다.[7]
2. 2. 1. 초반 관직 생활과 지방관
이후 검열(檢閱), 교리(校理)를 거쳐 상의원 직장에 임명되었다. 그 뒤 낙향하였으나 효종이 거듭 불러 다시 조정에 출사하였다. 전주부판관(全州府判官)으로 부임하여 전임자가 미뤄놓은 미결문서와 해결하기 어려운 송사를 모두 처리하였다. 이때 송사를 처리함에 있어 눈으로 문서를 읽으며, 귀로는 송사를 듣고, 입으로는 판결문을 부르며, 한편으로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네 가지 일을 한꺼번에 처리하는 데도 조금도 소홀하거나 잘못되는 점 없이 함으로써 보는 이들을 탄복하게 했다는 것이다. 전주판관 재직 시 미해결 문제를 모두 해결하고, 송사들도 모두 신속하고 공정하게 처리함으로써 백성들이 잘 살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해 그들의 신임과 존경을 받았다. 전주판관으로 있을 때 송사를 해결한 내용이 2권의 책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그 공정한 판정과 문장이 뛰어나 문화재로 지정됐다.
1656년(효종 7) 8월 예문관 검열·교리를 지내고, 이듬해 3월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다. 그해 3월 왕족 낭선군 이우의 종 홍귀종(洪貴宗), 강시망(姜時望)과 사헌부 관리 민유중의 부하가 싸운 일로 장령 오두인과 지평 민유중이 해임당하자 상소를 올려 사직을 청하였다.
그러나 효종이 허락하지 않아 무마되었다. 오두인 등이 외직으로 인사 불이익을 당하자 3월 25일 집의 권대운과 함께 다시 항의성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 뒤 효종의 급서로 복상 문제가 발생하자 허목, 윤휴, 윤선도, 홍우원의 설을 쫓아 3년복설을 지지하였다.
1660년(현종 1) 1월 사은사(謝恩使) 홍득기(洪得箕)가 청나라(書狀官)에 파견될 때 사은사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해 5월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 그해 8월 다시 사헌부 장령이 되고, 9월 장령 황준구(黃儁耉)·이원정(李元禎), 지평 이행도(李行道) 등과 함께 향시를 부정으로 주관한 전 전라 도사(全羅都事) 권대재(權大載), 강원 도사 박세견(朴世堅), 송라 찰방(松羅察訪) 홍석(洪錫)과 업무 미숙인 군위 현감(軍威縣監) 윤이명(尹以明), 안동부사 이인 등을 탄핵하였다. 이어 헌납 김만기(金萬基)가 추쇄 어사(推刷御史)로 부임했을 때 사사로운 청탁을 들어준 종부시 정 이연년(李延年)을 탄핵할 때는 이연년을 옹호하였다.
1660년 말 장성 부사(長城府使)로 나갔다가 1661년(현종 2년) 3월 동래 부사가 되었다. 10월 왜차(倭差)를 영접하고 조정에 장계를 올려 병조 좌랑 윤석(尹晳)을 파견하여 응대하게 했다. 그해 12월 쓰시마섬에 화재가 발생하여 쓰시마의 사자가 구호를 청할 때는 거절하였다.[4] 이어 이를 장계로 올렸다.[5] 동래 부사 재임 중 선정을 베풀어 그가 이임할 때 주민들이 그의 이임을 만류했다고 한다. 당시 진휼어사로 밀파된 남구만(南九萬)이 이를 보고 조정에 보고하여, 경성에 온 뒤 동래에서의 선정을 베푼 치적이 알려져 말(馬) 한 필을 특별히 상으로 하사받기도 했다.
1662년 5월 사헌부지평 원만리(元萬里)로부터 입암(笠巖)에 비축 곡식을 많이 보냈다는 이유로 [탄핵, 의금부에 끌려가 대질심문을 당했으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져 석방되었다.
1667년(현종 8년) 초 세자 책봉식 때 독책관(讀冊官)으로 참여하였고, 그 뒤 책봉례를 거행할 때의 수고로 그해 3월 가선대부로 승진했다. 1667년 5월 광주부윤(廣州府尹)이 되었다. 그러나 광주 사람 김선립(金先立)이 자기 아버지 김막금(金莫金)을 도적이라고 고발했다가 강상죄로 참수형을 당하자 10월 9일 부윤이던 그도 인심을 잘 다스리지 못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1668년(현종 9년) 8월 총관(摠官)으로 현종의 온양 행궁을 수행하였다. 1669년 2월 28일 한성부 좌윤, 4월 25일 한성부 우윤, 7월 공조 참판을 거쳐 11월 소결청의 당상을 선발할 때 소결청 당상(疏決廳堂上)이 되었고, 1670년(현종 11년) 1월 형조참판이 되었다. 6월 청나라에 진하사와 사은사가 파견될 때 그는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 정재륜(鄭載倫) 진하 부사 겸 사은 부사로 임명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중국어와 한자에 두루 능통했던 그는 청나라에 가서 청나라 외교관들과 시문을 주고받았는데, 그 글이 뛰어나 청나라 관리들을 놀라게 했다. 이로 인해 외교 업무를 원만하게 수행할 수 있었다. 그가 이때 지은 시들 중에는 청나라 당대의 유명한 시와 한 데 엮어져 '화인문초(華人文抄)'라는 책에 실려 전해지고 있다. 귀국할 때, 청나라의 학사들이 그의 뛰어난 학문과 글재주, 표현 능력에 탄복해 중국의 열두 달 풍속을 그린 열두 폭 화폭을 선물로 받았으며, 이는 그의 후손들에게 전해졌고 뒤에 문화재로 지정됐다. 그해 10월 20일 귀국하였고, 귀국 직후 11월 다시 형조참판이 되었다.
2. 2. 2. 외교 활동
1667년(현종 8년) 청나라에 진하사와 사은사가 파견될 때 진하부사 겸 사은부사로 임명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8] 중국어와 한자에 두루 능통했던 그는 청나라 외교관들과 시문을 주고 받았는데, 그 글이 뛰어나 청나라 관리들을 놀라게 했다. 이로 인해 외교 업무를 원만하게 수행할 수 있었다. 그가 이때 지은 시들 중에는 청나라 당대의 유명한 시와 한 데 엮어져 '화인문초(華人文抄)'라는 책에 실려 전해지고 있다. 귀국할 때, 청나라의 학사들은 그의 뛰어난 학문과 글재주, 표현 능력에 탄복하여 중국의 열두 달 풍속을 그린 열두 폭 화폭을 선물로 주었고, 이는 그의 후손들에게 전해졌다.[8]
2. 2. 3. 정치 활동과 갈등
1663년(현종 4) 11월 24일 의주 부윤(義州府尹)에 임명되었으나, 민정중으로부터 장성 부사(長城府使) 시절 관곡(官穀)을 남용하고 동래(東萊)에서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는 탄핵을 받고 3일 만에 파면되었다. 12월 초, 동래부사 시절 구휼어사로 파견되었던 남구만이 그를 두둔하였다.
1664년(현종 5) 2월 장례원판결사, 4월 18일 형조참의를 거쳐 6월 9일 승지가 되었다. 6월 21일 다시 승지가 되고 이후 호조 참의를 거쳐 1664년 6월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때 도방군(到防軍)을 숙경공주(淑敬公主)의 집을 건축하는 사적인 일에 사용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현종은 '이는 새로운 규정이 아니고, 그전부터 행해지던 일'이라며 도방군을 숙경공주의 집 건축에 징발하였다.[6] 지평 민시중이 현종을 옹호하며 그를 공격하였다. 그해 윤 6월 사직을 청하였으나 거부되었다. 7월 병으로 숙직하지 않은 이조 좌랑 이유상(李有相)의 일을 보고하였으나 하옥당했다. 그가 직접 이조좌랑 이유상을 심문하였으나 도승지 남용익(南龍翼), 좌승지 권대운(權大運), 우승지 이경억(李慶億) 등이 이유상을 옹호하면서 취소되었고, 이유상이 사직소를 올리자 오히려 그 병세를 몰랐다 하여 추고당했다. 그가 처벌되자 홍명하(洪命夏), 허적(許積) 등이 그가 억울하게 처벌받는다며 그를 옹호하였다.
이전 지방관 시절 미곡처리 실수 등이 문제되어 의금부에서 장 팔80대(杖八十)와 도형 2년으로 죄를 결정하였으나, 영상 정태화, 우상 홍명하가 지나치다고 건의하여 장 80대는 면제되었다. 8월 23일 호조참의가 되었다가 9월 29일 전주
1666년 형조참의, 호조참의, 5월 21일 승지를 지내고, 6월 왕명으로 사직을 청하는 우상 허적을 설득시켰다. 9월 호조참의, 10월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장성 부사 시절 일에 대해 대간이 논핵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그 논핵이 중지되었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대기하였으며, 좌상 홍명하로부터 장성부사 시절 미곡처리 잘못을 탄핵당하여 한 달 만인 11월 18일 면직되었다. 11월 28일 승지가 되고 12월 체직된 이조 참의 이시술(李時術)의 후임을 건의하였다.
1667년 1월 대간을 해임할 때 인피하는 문자를 삭제했다는 이유로 파면된 원만리와 김우형을 두둔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월 말 우승지가 되고 2월 초 왕명으로 대간의 탄핵을 받은 영상 정태화, 좌상 홍명하, 우상 허적에게 내린 돈유문(敦諭文)을 대신 지었다.
그러나 삼정승에게 내리는 돈유문(敦諭文)을 대신 지을 때 대관(臺官)을 배척한 말이 문제 되어 결국 승지직을 사직하였다. 2월 말 유학 황연(黃壖)을 시켜 송시열과 송준길이 국가의 기강을 어지럽혔으며, 조경, 허목, 윤휴, 홍우원을 배척하게 했다는 탄핵 상소를 올리게 했다.[7]
1673년(현종 14) 6월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무마되었다. 9월 다시 도승지에 오르고, 1677년(숙종 3)에 대사간·형조판서를 지냈다. 당색을 초월하여 대동법(大同法)을 지지, 1678년(숙종 4) 영남에서 대동법을 시행할 때 그 일을 맡아 처리하여 백성들이 그의 치적에 감탄하였다.
1673년 1월 한성부우윤을 거쳐 4월 도승지에 임명되었으며, 사간원정언 정유악으로부터 재상의 반열에 오른 후 청현(淸顯)을 거치지 못했다는 이유로 탄핵당했으나 왕이 무마시켰다. 9월 다시 도승지가 되고, 형조참판, 12월 병조참판, 1674년 2월 29일 예조참판, 3월 21일 도승지, 6월 호조참판을 지냈다.
어머니의 병이 위중할 때에도 허적(許積)의 집에 자주 출입하며[9] 서인을 공격하였다.
1674년 8월 현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산릉 도감 당상(山陵都監堂上)이 되고, 1675년(숙종 1) 1월 경연특진관(特進官)으로 경연에서 《서경(書經)》의 구절을 인용해 송시열 처단을 주장하였다. 김석주(金錫胄)가 그의 말이 지나치다고 비판했으나, 논란 끝에 송시열은 유배형을 당했다. 1월 말 지의금(知義禁)을 거쳐 2월 형조판서 물망에 올랐으나 모친상으로 취소되었다. 비변사 당상이 되었다.
남인 유생들을 독려하여 2차 예송 논쟁 당시 복제가 잘못되었음을 상소하도록 사주하였다. 송시열을 공격한 유생 중에는 도신징(都愼徵)도 있었다. 1675년 4월 경기도 출신 진사 성호석이 송시열 석방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이를 문제 삼았다. 직접 출사할 수 없었던 그는 대사간 남천한(南天漢)의 상소 초안을 잡아주거나 상소를 대신 작성하여 송시열을 공격하기도 했다.[10]
남인 집권 후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1677년(숙종 3) 4월 대사간이 되고, 5월 비변사 상황 개선과 군사훈련계책 10조목을 올렸다. 그러나 숙종은 적당히 답변하고 넘겼다.
5월 말 숙종이 죄수들을 석방시키려 했으나 반대하였다. 송시열 고묘 여론이 나오자 적극 찬성하였다. 서인의 반발이 강해지자 송시열 고묘를 옹호하며 윤원형의 고사를 들어 고묘 후 처형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6월 5일 대사헌이 되었다가 6월 8일 승지가 되었다. 비변사당상이 되었으나 정지화(鄭知和)·이지익(李之翼)이 상소하여 그의 고묘 옹호론을 문제 삼자 사직하였다.
1677년 7월 다시 사간원대사간이 되고 정언(正言) 박진규(朴鎭圭)와 함께 고묘 문제로 사직을 청했다가 7월 말 송시열이 효종을 서자로 만들었다며 송시열 고묘를 강하게 주장하였다. 그러나 숙종은 그의 주장을 물리쳤다. 이후 도승지를 거쳐 9월 대사성이 되었다.
비변사와 허적의 추천으로 10월 형조판서(刑曹判書)를 거쳐 12월 겸 대사성(兼大司成)으로 성균관대사성을 겸임하였다.
1678년 윤 3월 다시 송시열이 효종의 적통을 부정했다는 탄핵 상소를 올렸다. 그의 상소에 분노한 서인들은 그와 허목, 윤휴, 윤선도, 홍우원 등을 맹렬하게 성토하였다.
2. 2. 4. 아들 이담명의 과거시험 개입 논란
그러나 그해 11월 과거 시험의 고시관 중 한 사람으로 시험을 주관하였다. 그런데 이때 전시 합격자 이담명(李聃命)의 일에 개입했다 하여 문제가 되었다. 이담명의 답안지 대책문(對策文) 가운데 중두(中頭)와 당금(當今), 편종(篇終)의 세 곳의 성책(聖策) 위에 모두 ‘복독(伏讀)’ 두 자를 빠뜨려 문제되었다. 그러나 여러 시관이 이담명의 문장을 취하려 하다가 규격에 어긋나서 망설이던 차에 시관 중 한 사람인 이원정이 자기가 과거를 볼 때의 일로 증명하자 여러 의논이 있다가 합격되었다.[8]
이에 대사간 남이성이 이를 문제삼기도 했다. 이어 우의정 홍중보, 부호군 김우형(金宇亨), 부호군 이단하(李端夏), 교리 김석주 등이 이를 문제삼았고, 11월 19일에는 집의 이익상이 그를 탄핵했다가 지평 이우정이 그의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대신을 공격했다고 이익상을 공격하여 논란이 되었다. 이어 사헌부 지평 이익상이 그를 탄핵하였고, 이후 1671년 2월 말까지 매일 서인계 언관들이 계속 그를 공격하였다.
1671년 2월 왕의 하교로 무마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계속 그의 아들이 불합격인데 그의 개입으로 합격했다며 서인계 언관들이 공격하였고, 1671년 7월 양주 목사로 나갔다.
2. 2. 5. 남인 집권과 예송 논쟁
1663년(현종 4) 11월 24일 의주 부윤(義州府尹)에 임명되었으나 민정중으로부터 장성 부사(長城府使)로 있을 때 관곡(官穀)을 남용한 죄를 지었다는 탄핵을 받고 3일 만에 파면되었다. 그 뒤 동래에 있으면서도 일을 제대로 선처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12월 초, 동래 부사 시절 구휼어사로 밀파되었던 남구만이 그를 두둔하였다.[6]
1664년(현종 5) 2월 장례원판결사, 4월 18일 형조참의를 거쳐 6월 9일 승지가 되었다. 6월 21일 다시 승지가 되고 이후 호조 참의를 거쳐 6월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때 숙경공주(淑敬公主)의 집을 건축하는 데 도방군(到防軍)을 동원하는 것을 비판하였다.[6] 그러나 현종은 '이는 새로운 규정이 아니고, 전부터 행해지던 일'이라며 숙경공주의 집 건축에 도방군을 징발하였다.[6] 그해 윤 6월 사직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7월, 병으로 숙직하지 않은 이조 좌랑 이유상(李有相)의 일을 보고했다가 하옥당했다. 홍명하(洪命夏), 허적(許積) 등이 그가 억울하게 처벌받는다고 옹호하였다.
이전 지방관 시절 미곡처리 실수 등이 문제되어 의금부에서 장 80대와 도형 2년을 선고받았으나, 영상 정태화, 우상 홍명하의 건의로 장 80대는 면제되었다. 8월 23일 호조참의가 되었다가 9월 29일 전주부윤으로 나갔다.
1666년 형조참의, 호조참의, 5월 21일 승지를 지내고, 6월 왕명으로 사직을 청하는 우상 허적을 설득했다. 9월 호조참의, 10월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장성 부사 시절 미곡처리 문제로 대간의 논핵이 있을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대기하다가, 좌상 홍명하의 탄핵으로 11월 18일 면직되었다. 11월 28일 승지가 되고, 12월 이조 참의 이시술(李時術)의 후임을 건의하였다.
1667년 1월 대간 해임 시 인피 문자를 삭제했다는 이유로 파면된 원만리와 김우형을 두둔했으나 실패했다. 1월 말 우승지가 되고, 2월 초 대간의 탄핵을 받은 영상 정태화, 좌상 홍명하, 우상 허적에게 내리는 돈유문(敦諭文)을 대신 지었다. 그러나 돈유문에 대관(臺官)을 배척하는 내용이 문제되어 승지직을 사직하였다. 2월 말, 유학 황연(黃壖)을 시켜 송시열과 송준길이 국정을 어지럽혔으며, 조경, 허목, 윤휴, 홍우원을 배척하게 했다는 탄핵 상소를 올리게 했다.[7]
1673년(현종 14) 6월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무마되었다. 9월 도승지에 오르고, 1677년(숙종 3) 대사간, 형조판서를 지냈다. 당색을 초월하여 대동법(大同法)을 지지, 1678년(숙종 4) 영남에서 대동법을 시행할 때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1673년 1월 한성부우윤, 4월 도승지에 임명되었으나, 사간원 정언 정유악으로부터 재상 반열에 오른 후 청현(淸顯)을 거치지 못했다는 이유로 탄핵받았으나 왕이 무마시켰다. 9월 다시 도승지, 형조참판, 12월 병조참판, 1674년 2월 29일 예조참판, 3월 21일 도승지, 6월 호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어머니의 병환이 위중할 때에도 허적(許積)의 집에 자주 드나들며[9] 서인을 공격하였다.
1674년 8월 현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산릉 도감 당상(山陵都監堂上)이 되었다. 1675년(숙종 1) 1월 경연특진관(特進官)으로 경연에서 송시열 처단을 주장했다. 김석주(金錫胄)가 이를 문제삼았으나, 논란 끝에 송시열은 유배형을 받게 된다. 1월 말 지의금(知義禁), 2월 형조판서 물망에 올랐으나 모친상으로 취소되었다. 비변사 당상을 겸임했다.
남인 유생들을 부추겨 2차 예송 논쟁 당시 복제가 잘못되었음을 상소하게 했다. 송시열을 공격한 유생 중에는 도신징(都愼徵)도 있었다. 1675년 4월 경기도 출신 진사 성호석이 송시열 석방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자 이를 문제삼았다. 대사간 남천한(南天漢)의 상소 초안을 잡아주는 등 송시열을 공격하는 상소를 대신 작성하기도 했다.[10]
남인 집권 후 1677년(숙종 3) 4월 대사간, 5월 비변사 개혁 및 군사훈련 10조목을 건의했다. 그러나 숙종은 적절히 답변하고 넘겼다. 1678년 증광문과 고시관(考試官)을 맡았다. 비변사 유사당상으로 회의에 참석, 4월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 시행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5월 대사헌, 7월 4일 한성부 판윤, 9월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군비 절감을 위해 도체찰사부 복설을 주장하여 숙종의 동의를 얻었다. 강화부유수가 조정 내직을 겸하는 것을 비판했고, 10월 말 부사직(副司直)으로서 병조 판서(兵曹判書) 김석주(金錫胄)와 강화도를 답사하고 지도를 만들어 숙종에게 보고하였다.
11월 28일 대사간(大司諫), 12월 행 대사헌(行大司憲), 12월 25일 호조판서(戶曹判書)가 되었다. 윤휴(尹鑴) 등과 도체부(都體府) 설치, 조세 제도 개선, 인재 양성을 주장했으나, 서인과 남인 당수 허목 등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679년 2월 역마(驛馬)를 사적으로 사용했다는 의혹으로 조사받았고, 4월 의정부우참찬, 5월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6월 무신들의 위계서열 및 국사 논의를 비판했고,[12] 이조판서 홍우원 사임 후 이조판서직을 대리하다가 이조판서가 되었다.
2. 3. 경신환국과 죽음
1679년(숙종 5) 11월 윤의제와 함께 과거 시험을 주관하고, 우참찬을 거쳐 11월 7일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이 되었다. 이후 비변사당상으로 회의에 참석, 비변사에서 인재를 발탁할 때 이운징 등을 추천하였다. 그러나 11월말 비변사 인재 천거 과정에서 발탁된 유상운의 인사를 반대하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 파직되었다. 영의정 허적이 그를 구명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숙종의 노여움은 오래 갔다.
1679년 12월 이조판서로 다시 복직하였다. 1680년(숙종 6) 1월 약방제조(藥房提調)를 거쳐 다시 이조판서가 되고 3월 숭정대부로 승진, 겸 판의금(判義禁)이 되었다.
그러나 1680년(숙종 6) 3월 이조판서 때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3월 29일 왕의 친국을 받은 뒤 체찰부(體察府)를 복설해 군권을 장악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삭탈관작당하고 문외출송되었다. 그러나 서인 언관들의 맹공격을 당한 뒤 그해 4월 '처음에는 체부를 반대하다가 나중에 체부 설치를 적극 찬성한 점이 해괴하다' 하여 초산에 유배되었다. 유배지로 가던 도중, 허적, 윤휴가 사사당한 뒤 그해 윤 8월 소환되어 오정일의 형제 숙질과 친하다는 이유로 국문을 당하였다. 윤 8월 21일 장형을 받던 중 장살(杖殺) 당하였다. 이때 그를 따라 초산으로 향하던 아들 이담명은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하고 은거하였으나, 뒤에 거듭된 권고로 조정에 나와 송시열, 김수항 공격에 적극 가담하였다.
2. 4. 사후
그의 작품은 대부분 서인들에 의해 불에 탔고, 경산(京山)의 향토지인 '경산지'는 경상도 관찰사 이수언에 의해 조헌, 윤두수, 정철을 모함하는 내용이라고 폄하당하였다.[1] 1689년(숙종 15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신원(伸寃)되어 2월 복관되었다.[1] 2월 28일 아들 이담명이 아버지 이원정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렸다.[1]
臣之父 平生罪案 乃更置體察府之議 實出於金錫胄 而臣父因聞於金錫胄 而奏達故云 臣父被逮 金錫胄來言 我欲爲證 臣父謫去時 有書猶在 及至復鞫 金錫胄不惟不言 反有投石 又以與李柟親密 亦爲臣父罪 且臣父與吳挺一甚親 而李楨、柟 則吳挺一生姪 故臣父或相知 亦曾有非斥之語 則豈可謂之親密 吳挺昌猶有此言 不過因臣父爲嶺南人 而忤時議最甚 故欲快其所樂聞耳 父寃雖伸 臣不忠不孝 何以戴天履地 復辱朝廷|신의 아비 평생죄안 내경치체찰부지의 실출어김석주 이신부인문어김석주 이주달고운 신부피체 김석주래언 아욕위증 신부적거시 유서유재 급지부국 김석주불유불언 반유투석 우이여이남친밀 역위신부죄 차신부여오정일심친 이이정 남 즉오정일생질 고신부혹상지 역증유비척지어 즉기가위지친밀 오정창유유차언 불과인신부위영남인 이오시의최심 고욕쾌기소악문이 부원수신 신불충불효 하이대천리지 부욕조정중국어[1]
그해 11월 우의정 김덕원의 상소로 증직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숙종이 예관(禮官)을 보내 치제하였다.[1] 그 후에도 정국의 변화에 따라 여러 차례 추탈(追奪)되었다.[1]
1694년 갑술옥사로 추탈되었다가 1697년 다시 관작이 회복되었고, 1712년(숙종 38) 삭직되자 그의 손자 이세원의 노력으로 관직이 다시 회복되었다.[1] 그의 손자 이세원은 당시 대궐에 징을 들고 무단으로 담을 넘어 잠입해, 격쟁(擊錚)이라는 방법으로 그의 억울함을 호소했다.[1] 이후 다시 관작이 회복되었는데, 사헌부의 상소로 관작을 다시 추탈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숙종이 듣지 않았다.[1] 1713년 양사가 합계하여 그의 관작을 삭탈할 것을 청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1] 사헌부와 사간원 등에서 그에 대한 복관을 환수해야 한다는 요청이 2년 동안 이어졌지만 왕은 '윤허하지 않는다' 등의 말로 계속 물리쳤다.[1]
1722년 노론의 집권 후 추탈당했다가 정조 집권 후, 1795년(정조 19년) 다시 복권되었다.[1]
3. 평가
한편, 그는 여러 가지 재주가 뛰어나고 글을 잘 지었다. 서인 측에서는 이를 두고 '사람됨이 거칠고 음험하며 권모술수(權謨術數)가 많았다.'라고 평가절하하기도 했다.[9]
벼슬을 하면서 탐욕을 마음껏 부려 한번 동래 부사가 되자 그의 집안이 큰 부자가 되었다.[9]
4. 저서 및 작품
5.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
고조부 | 이준경 |
증조부 | 이희복(李熙復) |
양증조부 | 이광복 |
종증조부 | 이명복 |
할아버지 | 이윤우 |
양할아버지 | 이영우 |
아버지 | 이도장(李道長, 1603년 - 1644년, 호는 낙촌) |
어머니 | 안동 김씨, 하담 김시양(金時讓)의 딸 |
동생 | 이원록(李元祿) |
부인 | 벽진 이씨 |
아들 | 이담명(1646년 - 1701년, 호는 정재) |
손자 | 이세침 |
아들 | 이한명(1651년 ∼ 1681년) |
손자 | 이세원 |
참조
[1]
문서
과거 급제 후 3일 안에 성균관 문묘에 인사하는 것이 관례였다.
[2]
문서
초임 관리는 1,2년간 권지를 거쳐서 실직에 배임되었다.
[3]
실록
낭선군 이우의 추고를 청한 일로 지평 이원정이 사직을 청하다
1657-03-22
[4]
실록
대마도에 화재가 발생하여 물품을 보내주기를 요구하다
1661-12-24
[5]
실록
동래 부사 이원정이 치계하다
1661-12-24
[6]
실록
도방군에게 숙경 공주 집의 역사를 시키니 승지 이원정이 부당함을 아뢰다
1664-06-24
[7]
실록
유학 황연이 진주사 건과 나라의 기강 확립에 대해 올린 상소
1667-02-29
[8]
실록
대사간 남이성이 이담명의 시험지 일로 사직하니 한참 후에 답하다
1670-11-13
[9]
실록
이담명을 주서로 제수하다
1675-04-25
[10]
실록
목창명을 정언으로, 남천한을 대사간으로 제수하다
1675-04-09
[11]
실록
효종 때의 예론에 관한 형조 판서 이원정의 상소문
1678-03-12
[12]
실록
대사헌 이원정이 무신들이 국사를 논평하는 폐단을 진달하다
1679-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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