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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노다니 아사쿠라씨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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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치노다니 아사쿠라씨 유적은 일본 후쿠이현 후쿠이시에 위치한, 아사쿠라 씨가 1471년부터 1573년까지 약 100년간 거점으로 삼았던 유적이다. 지리적으로는 깊은 계곡 지형에 위치하며, 교토의 문화를 받아들여 발전한 성하 마을과 무로마치 시대 말기의 정원 양식을 보여주는 다양한 정원, 아사쿠라 씨 당주 거주지, 사찰 등 다양한 시설이 남아있다. 1960년대부터 발굴 조사가 시작되어, 현재는 일본의 국가지정 특별사적으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으며, 후쿠이 현립 이치조다니 아사쿠라 씨 유적 박물관, 미치노에키 이치조다니 아사쿠라 물의 역 등 주변 관광 시설과 함께 많은 관광객의 방문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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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노다니 아사쿠라씨 유적
개요
아사쿠라 야카타 유적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거주지)
아사쿠라 야카타 유적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거주지)
이름이치조다니 아사쿠라씨 유적
일본어 이름一乗谷朝倉氏遺跡 (이치조다니 아사쿠라시 이세키)
별칭이치조다니 성
위치후쿠이시, 일본
지역호쿠리쿠 지방
좌표35.999474, 136.29557
상세 정보
건설 시기1471년
버려진 시기1573년
시대무로마치 시대
발굴1967년-
상태특별 국가지정 사적
일반 공개
역사
건축 연도남북조 시대
개축가쓰라다 나가토시
통치자아사쿠라 씨, 가쓰라다 나가토시
폐성 연도1575년 (덴쇼 3년)
구조
성곽 구조산성
천수각 구조없음
유구토루, 해자, 호구, 석벽, 초석
문화재유적 (특별사적), 정원 (특별명승), 유적 출토품 (중요문화재)

2. 지리적 특징

이치조다니는 현재 후쿠이시 시가지에서 동남쪽으로 약 1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구즈류강지류인 아스와강의 또 다른 지류인 이치조다니강을 따라 형성된 계곡이다. 계곡의 규모는 동서 너비 약 500m, 남북 길이 약 3km이다.

지형적으로 동쪽, 서쪽, 남쪽 세 방향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으로는 아스와강이 흐르는 천연의 요새이다. 주변 산봉우리에는 성채와 망루가 축조되어, 지역 전체가 광대한 요새군을 이루었다.

또한 이치조다니는 후쿠이 평야가 끝나고 산지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어 교통의 요충지였다. 수 킬로미터 앞에는 호쿠리쿠도오노 분지로 통하는 미노 가도, 시카마타 고개를 넘어 에치젠 후추로 이어지는 가도, 호쿠리쿠도와 연결된 아사쿠라 가도[13][14] 등 주요 도로들을 바로 확보할 수 있는 위치였다.

3. 역사

1471년, 아사쿠라 씨는 시바 씨를 대신하여 에치젠 국의 ''슈고''(守護, 군사 지휘관)가 되었다.[1] 같은 해, 7대 당주 아사쿠라 도시카게는 이치조다니 계곡 남북 입구에 성벽과 문을 세우고 주변 산에 요새를 구축하여 방어 체계를 갖추었다.[1] 계곡 안에는 자신의 저택을 중심으로 가신들의 집, 사찰, 상공업자들의 거주지가 들어섰다. 이치조다니는 동, 서, 남쪽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북쪽에 아스와강이 흐르는 천연의 요새였으며, 호쿠리쿠도 등 주요 도로와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했다.[13][14]

오닌의 난을 피해 교토에서 온 피난민 중에는 높은 문화적 소양과 기술을 가진 이들이 많았고, 아사쿠라 도시카게는 이들을 받아들여 이치조다니는 점차 문화, 군사, 인구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10대 당주 아사쿠라 다카카게 (10대 당주) 시대에는 인구가 1만 명을 넘어서며 전성기를 맞이했고, '기타노쿄'(北ノ京, 북쪽의 교토)라 불릴 정도로 번성했다.

아사쿠라 씨는 아시카가 막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1499년에는 아시카가 요시타네가 9대 당주 아사쿠라 사다카게 (9대 당주)에게 의탁했으며, 1567년에는 11대 당주 아사쿠라 요시카게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안요지에 맞이했다.[2][3] 그러나 1568년, 요시아키는 상락(上洛, 교토로 가는 것)을 위해 오다 노부나가에게 의탁하고자 미노 국으로 떠났다.

이후 아시카가 요시아키오다 노부나가와 대립하며 아사쿠라 요시카게에게 도움을 요청하자[4], 노부나가는 1570년 에치젠 침공을 개시했다. 요시카게는 가네가사키 포위전과 아네가와 전투에서 연이어 패배하며 수세에 몰렸다.[1][5][6] 1573년 8월, 도네자카 전투에서 오다 군에게 대패한 요시카게는 이치조다니를 버리고 오노 군으로 도주했으며, 다음 날 오다 군의 방화로 이치조다니 전체가 소실되었다.[7]

전후 처리 과정에서 노부나가는 아사쿠라 가문의 옛 가신인 마에나미 요시쓰구에게 에치젠 슈고다이 직을 주어 이치조다니에서 통치하게 했으나, 이에 반발한 도미타 나가시게 등 다른 가신들과 잇코잇키 세력이 결탁하여 봉기했다. 1575년 1월, 3만 명이 넘는 에치젠 잇코잇키 세력은 이치조다니를 공격하여 마에나미 요시쓰구와 그 일족을 살해했다. 이후 오다 노부나가는 잇코잇키를 진압하고 시바타 가쓰이에에게 에치젠 국을 맡겼다. 가쓰이에는 교통이 편리한 기타노쇼(北ノ庄, 현 후쿠이시)에 새로운 거점을 마련했고, 중심지 기능을 상실한 이치조다니는 점차 폐허가 되어 농경지 아래 묻히게 되었다.

오랜 시간 땅속에 묻혀 있던 유적은 1967년부터 시작된 발굴 조사를 통해 그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7][8]

4. 이치조다니 성

이치조다니 성은 아사쿠라 씨 당주관의 동쪽 배후 산인 이치조다니 성산(해발 473m)에 축성된 중세 산성으로, 서쪽으로 후쿠이 평야를 조망할 수 있는 요지에 자리 잡고 있다. 15세기 전반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실제 전투에 사용되지 않고 폐성되었다.

성터에는 구루와(曲輪), 해자, 호리키리(堀切), 다테보리(竪堀), 토루, 복병 구덩이 등 다양한 중세 성곽 유구가 능선과 계곡을 따라 남아 있다. 성의 전체적인 구조는 총 길이 1.5km, 폭 200m에 달하는 여러 구루와로 구성되며, 주곽(主郭) 부분은 약 600m × 200m 규모이다. 혼마루(本丸, 본성)에 해당하는 천첩지는 해발 416m에 위치하며, 이곳에서 동남쪽 능선을 따라 이치노마루(一の丸, 443m), 니노마루(二の丸, 463m), 산노마루(三の丸, 473m)가 연이어 배치되어 있다. 각 구루와는 호리키리로 명확하게 구분되는 연곽식(連郭式) 성곽의 특징을 보여준다.

겐키 연간(1570년 ~ 1573년)에는 오다 노부나가의 침공에 대비하여 성을 개수한 것으로 보이며, 이때 약 140개에 달하는 우네조 다테보리(畝状竪堀, 밭고랑 모양의 도랑)가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 천첩지(본성)

: 본성 터로 여겨지는 천첩지는 이치조다니 성 내에서 가장 넓은 구역이다. 주곽군 중에서는 비교적 나중에 조성된 것으로, 아사쿠라 요시카게 시대에 산허리를 깎아 평탄하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북쪽에는 다테보리군이 방어 시설로 배치되어 있다. 내부에는 마스카타 코구치(枡形虎口, 꺾여 들어가는 입구) 구조를 갖춘 간논야시키(観音屋敷) 터, 후쿠이 평야를 조망하기 좋은 위치의 숙직(망루) 터, 아카부치묘진(赤淵明神) 터와 츠키미야구라(月見櫓, 달맞이 망루) 터 등이 남아 있으며, 이들은 호리키리와 토루로 구획되어 있다. 서쪽에는 음료수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후도신스이(不動清水)라는 용수지가 있다. 천첩지는 단순한 방어 시설 외에 문화적인 공간으로도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 이치노마루

: 해발 443m의 산 정상을 평탄하게 조성한 구루와이다. 서쪽에는 해자를 두어 방어력을 강화했다.

; 니노마루

: 사방이 큰 호리키리로 둘러싸여 있어 견고한 방어 구조를 갖추고 있다.

; 산노마루

: 성 내에서 가장 높은 해발 473m 지점에 위치한 구루와이다. 다테보리군과 호리키리 등이 복잡하게 배치되어 있어 복합적인 방어 체계를 보여준다.

; 출성

: 이치조다니 성 본성 외에도 방어력을 높이기 위한 출성(出城)들이 주변에 배치되었다. 성의 북서쪽 낮은 지대에는 코미바나시 성(小見放城)이라는 출성이 축조되었고, 이곳에는 우마다시(馬出し, 말 출입 시설) 등이 설치되었다. 또한, 이치조다니 성 주변의 다른 산봉우리들에도 동쪽의 토고 마키야마 성(東郷槙山城), 북쪽의 조간지 성(成願寺城), 남쪽의 미네 성(三峰城) 등 여러 출성이 함께 축조되어 광대한 방어망을 형성했다.

5. 주요 유적

이치조다니 아사쿠라씨 유적은 전국 시대 에치젠국을 지배했던 아사쿠라 가문의 거점 유적으로, 당시의 조카마치(성하 마을) 전체가 잘 보존되어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유적은 크게 아사쿠라 가문 당주의 거처였던 아사쿠라관 터와 그 주변 시설, 성하 마을, 그리고 방어 시설인 성문과 산성 등으로 구성된다.

아사쿠라관 터는 유적의 중심부로, 당문, 주전, 회소, 정원, 화단 등 다양한 시설의 흔적이 발굴되었다. 특히 유적 내 여러 곳에서 발견된 정원들은 무로마치 시대 말기의 정원 양식을 잘 보여주며, 그중 네 곳은 일본의 특별명승으로 지정되어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성하 마을은 계곡을 따라 약 1.7km에 걸쳐 조성되었으며, 무사 저택, 상인 마을, 사찰 등이 계획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발굴 조사를 통해 드러난 건물터와 도로 유구를 바탕으로 당시 거리 모습의 일부가 복원되어 공개되고 있다.

이 외에도 아사쿠라 가문 역대 당주 및 주요 인물과 관련된 묘소, 어머니의 거처, 기타 시설 등이 유적 곳곳에 남아 있다. 유적 전체는 발굴 조사를 통해 그 역사적 중요성이 밝혀졌으며, 일본의 특별사적, 특별명승,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5. 1. 당문

아사쿠라관 터 정면의 해자에 면하여 세워진 문이다. 폭은 2.3m이며, 당파풍 지붕을 가진 향당문 형태이다. 이 문은 아사쿠라 씨의 유적은 아니며, 후에 세워진 쇼운인의 사찰 문으로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문 표면에는 아사쿠라 가문의 상징인 세 개의 묏부리 문장이 새겨져 있다. 현재 남아있는 문은 에도 시대 중기에 재건된 것이다.

5. 2. 아사쿠라관 터

일승곡 중심부에 위치한 아사쿠라 가문 당주가 거주했던 관이다. 동쪽 후방에는 산성이 있으며, 서쪽, 남쪽, 북쪽 세 방향은 높이 1.2m에서 3m 정도의 토루로 둘러싸여 있다. 이 토루 바깥쪽으로는 폭 약 8m, 깊이 약 3m의 해자가 파여 있었다. 세 방향의 토루에는 각각 모서리에 야구라와 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서쪽에 있는 문이 정문(어문)이었으며, 현재는 가라몬이 세워져 있다. 관이 자리 잡은 평탄부의 면적은 약 6400m2이며, 내부에는 17채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관 내부에서 가장 큰 건물인 상어전(東西 약 21.4m, 남북 약 14.2m)을 중심으로, 남쪽에는 주전이나 회소, 다실, 정원, 화단 등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시설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북쪽에는 부엌이나 지불당, 온돌, 창고, 마구간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시설들이 모여 있었다. 건물들은 모두 초석 위에 기둥을 세워 지어졌으며, 지붕은 얇은 나무판 등을 덮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귀면와나 동으로 만든 장식 등도 발굴되었다. 건물 내부에는 마이라도나 아카리쇼지 같은 미닫이문을 많이 사용했으며, 다다미를 깐 방도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 화단 ===

1968년(쇼와 43년)에 상어전 남쪽 안뜰에서 화단의 유구가 발견되었다. 동서 9.8m, 남북 2.8m 크기의 직사각형 형태이다. 꽃가루 분석 등을 통해 봄에는 서양철쭉이나 모란 등이, 가을에는 국화싸리 등이 심어졌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 화단 유구는 현재 일본에서 발견된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 아사쿠라 요시카게 묘 ===

관터의 동남쪽 구석에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묘가 있다. 1576년(덴쇼 4년)에 마을 주민들이 세운 작은 사당 자리에, 1663년(간분 3년) 후쿠이 번의 번주였던 마쓰다이라 미쓰토시가 묘탑을 세웠다. 이와 별개로 오노시에도 에도 시대에 세워진 요시카게의 가 있다.

=== 안의 어전터 ===

요시카게 관터의 남쪽에 인접한 곳으로, 빈 해자를 사이에 두고 온돌터 정원과 거의 같은 높이에 위치한다. 아시카가 요시아키로부터 종2위 벼슬을 받은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어머니 코토쿠인이 거주했던 어전 터로 전해진다. 동쪽과 남쪽이 토루로 둘러싸여 있다. 1972년(쇼와 47년) 이후의 발굴 조사를 통해 문터, 정원터, 건물터의 일부가 확인되었다.

관의 뒤편으로는 아사쿠라 일족의 저택들이 늘어서 있었고, 관의 서쪽에는 말을 타거나 훈련하는 장소인 개마장, 유마장 등의 외곽 시설이 존재했다.

유적 내 자료관에는 발굴 조사를 바탕으로 제작된 아사쿠라관의 복원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5. 3. 정원

이치조다니에는 정원 연못과 석조가 웅장한 임천 정원에서부터 자갈, 입석, 복석 등으로 구성된 고요한 고산수 정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정원이 잘 남아 있다. 이 정원들은 후대에 큰 변화 없이 무로마치 시대 말기의 정원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특히 유전 터 정원을 제외한 나머지 정원들은 석조 형식이 유사하여 아사쿠라 요시카게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탕전터, 남양사터, 스와관터의 세 정원은 일찍부터 정원석 일부가 지상에 드러나 있어 1930년(쇼와 5년) 7월 8일 국가지정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이후 관리가 미흡하여 훼손되자 1967년(쇼와 42년)부터 표토 제거, 잡목 벌채 등 정비 작업이 시작되었다. 1987년(쇼와 62년)에는 탕전터와 스와관터에서 물을 끌어들이기 위한 석조 도랑과 암거가 발굴되기도 했다.

1991년(헤이세이 3년) 5월 28일에는 유전 터 정원, 난요지 터 정원, 스와 관 터 정원, 아사쿠라 관 터 정원 등 네 곳이 그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지정 특별명승으로 지정되었다.[15][12]

5. 3. 1. 이치조다니 아사쿠라 씨 정원

이치조다니에는 정원 연못과 석조가 웅장한 임천 정원부터 자갈과 입석, 복석으로 이루어진 고요한 고산수 정원까지 다양한 정원이 남아 있다. 이 정원들은 후대에 큰 변화 없이 무로마치 시대 말기의 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유전 터 정원을 제외하면 석조 형식이 유사하여 아사쿠라 요시카게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탕전터, 남양사터, 스와관터의 세 정원은 일찍부터 정원석이 지상에 드러나 있어 1930년(쇼와 5년) 7월 8일 국가지정 명승으로 지정되었으나, 이후 관리가 미흡하여 훼손되었다. 이에 1967년(쇼와 42년)부터 표토 제거와 잡목 벌채 등 정비 작업이 이루어졌고, 1987년(쇼와 62년)에는 탕전터와 스와관터에서 물을 끌어들이기 위한 석조 도랑과 암거가 발굴되었다. 1991년(헤이세이 3년) 5월 28일에는 다음 네 곳의 정원이 국가지정 특별명승으로 지정되었다.[15][12]

  • '''유전 터 정원''' (어유전 터 정원이라고도 함[15])
  • -

해발 63m 높이에 위치하여 아사쿠라관 터를 내려다볼 수 있다. '관음산'이라는 작은 산을 배경으로 하며, 이끼 낀 정원석들이 늘어서 있다. 전국시대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거칠고 웅장한 석조로 꾸며져 있어 네 정원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16세기 초, 10대 당주인 아사쿠라 타카카게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15] 남북으로 길고 복잡하게 얽힌 형태의 정원 연못이 있으며, 당시에는 도수로를 통해 물이 채워져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응회각력암 거석을 사용하여 연못 가장자리, 폭포, 삼존불 형태의 석조 등이 만들어졌다. 좌우 높이가 거의 같은 폭포 받침돌이 있으며, 1단의 물 떨어지는 돌과 물을 나누는 수분석이 있다. 정원을 거닐던 길 터도 남아 있으며, 연못 끝부분에는 다리 기둥돌로 보이는 돌이 있어 돌다리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남쪽에는 해자의 석축이 남아 있다. 연못 동쪽 끝에는 '거북 섬'이라 불리는 작은 석조 섬이 있고,[15] 서쪽 끝에는 '학 석조'가 있다.[15] 이 '거북 섬' 구조는 시가현의 구 슈린지 정원에서도 볼 수 있는데, 구조적 유사성으로 보아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15]

  • '''난요지 터 정원'''

난요지는 아사쿠라 우지카게의 부인 텐신 세이유 다이시가 세우고, 이후 3대 당주 아사쿠라 사다카게가 재건한 사찰이다. 아사쿠라 관의 북동쪽 고지대에 있었으며, 아사쿠라 가문의 여성들이 대대로 비구니로 거주했다. 당시에는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산기슭에 정원의 일부만 남아 있다. 1568년(에이로쿠 11년) 3월 벚꽃이 필 무렵, 이 정원에서 아사쿠라 요시카게가 아시카가 요시아키(훗날 15대 쇼군 요시아키)를 초대하여 연회와 가회를 열었다. 현재 이곳에는 당시 두 사람이 읊은 시를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다.

  • '''스와 관 터 정원'''

스와 관은 아사쿠라 요시카게가 네 번째 측실인 코쇼쇼를 위해 지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근처 자료관에는 스와 관 지붕의 무게추나 액막이용 귀면 기와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정원은 상하 2단으로 구성된 회유식 정원이다. 상단에는 폭포 석조와 샘솟는 물을 표현한 용천 석조가 있고, 하단에는 큰 단풍나무 아래 높이 4.13m, 폭 2.5m에 달하는 일본 최대 크기의 폭포 받침돌을 사용한 호쾌한 폭포 석조가 있다. 낙차가 커서 물이 떨어지는 돌은 4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분석, 돌다리, 예배석, 다리 기둥돌 등이 정형화된 배치로 남아 있어 당시 정원 양식을 잘 보여준다. 매우 형식적인 구성으로 보아 전문 정원사가 만든 것으로 추측된다. 네 정원 중 규모가 가장 크며, 회유식 임천 정원으로는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호화로움을 자랑한다고 평가받는다. 1847년(고카 4년)에는 폭포 받침돌 표면에 신게츠지 18대 주지 겟센 화상의 글씨로 교케이, 사다카게, 타카카게의 법호를 새겨 공양했다.

  • '''아사쿠라 관(요시카게 관) 터 정원'''

아사쿠라 관 터 남쪽에 있는 정원으로, 완전히 묻혀 있다가 1968년(쇼와 43년) 발굴되었다. 연못 가장자리 돌(호안석)을 건물 기초석(초석)으로 함께 사용했으며, 정원을 둘러싸듯 접객용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정원 연못은 다실 터 남쪽 산기슭에 있으며, 폭포 입구 앞에는 수분석이 있다. 중앙에는 폭포 석조가 배치되어 있고, 부근에는 다리 기둥돌과 돌다리 조각이 남아 있다. 연못 바닥에는 크고 평평한 강돌이 깔려 있다. 동쪽의 가파른 비탈면에는 도수로가 있어 물이 정원 연못으로 굽이쳐 흘러내리도록 설계되었다. 다실 터 서쪽에는 작은 자갈을 깔고 정원석 몇 개를 배치한 고산수 양식의 공간이 있다. 이 정원의 정원석 일부에는 바다에서 가져온 안지마석(보통 휘석 자소휘석 안산암)과 청석(녹색편암)이 사용되었다.

5. 4. 성하 마을

현재 후쿠이시 시가지에서 동남쪽으로 약 10km 떨어진 아스와강의 지류인 이치조다니강 계곡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전국 시대의 조카마치(성하 마을)와 아사쿠라 가문의 관저, 그리고 뒤편의 산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치조다니는 동서 약 500m, 남북 약 3km의 좁은 계곡이지만, 후쿠이 평야 끝에서 산지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 잡아 교통의 요충지였다. 주변에는 호쿠리쿠도오노 분지로 통하는 미노 가도, 에치젠 후추로 이어지는 가도 등이 지나갔다.[13][14]

동, 서, 남쪽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북쪽에는 아스와강이 흐르는 천연의 요새 지형을 갖추고 있다. 남북 양 끝에 성문을 설치하고, 그 사이 약 1.7km 길이의 "성문 안(키도노우치)" 지역에 성주의 관저를 비롯해 사무라이 저택, 사찰, 장인과 상인의 마을 등이 계획적으로 조성되었다. 도로는 교토를 모방하여 100척(약 30m)을 기준으로 정연하게 구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변 산봉우리에는 성채와 망루가 세워져 지역 전체가 거대한 요새 역할을 했다. 발굴 조사를 통해 당시의 거리 모습 일부가 복원되어 공개되고 있다.

5. 4. 1. 무사 저택

아사쿠라 관에서 이치조다니 강을 사이에 둔 맞은편 지역에는 아사쿠라 씨의 주요 가신들이 거주했던 저택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저택들은 주변에 토루를 두른 대규모 형태였으며, 여러 채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1]

현재 이 지역은 '복원 정비된 거리'로 정비되어 있으며, 당시 무사 저택 중 한 채가 사료 등을 참고하여 복원되었다. 복원된 저택은 약 30평 규모의 주 건물과 함께 , 정원, 창고, 납품소, 우물, 변소까지 당시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도록 재현되어 있다.[1]

5. 4. 2. 상인 마을

복원된 거리의 원경


이치노다니 유적의 상업 구역은 남북을 성문으로 둘러싼 약 1.7km 길이의 계곡에 형성되었다. 거리는 100척(약 30m)을 기준으로 계획적으로 구획되어 교토처럼 정연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는 소규모 건물이 좁게 늘어서 있었으며, '''평면 복원 지구'''나 성문(城戸) 근처에도 마치야(町屋, 상인 및 수공업자의 주택 겸 점포)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어 당시 인구 밀도가 상당히 높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1995년에는 발굴 조사 결과와 관련 사료 등을 바탕으로 약 200m에 걸쳐 당시의 거리가 복원되어 '''복원된 거리'''로 공개되고 있다. 이 복원된 거리 내에는 10채의 마치야가 재현되어 있으며, 단순한 건물 외형뿐만 아니라 뒷마당, 우물, 변소 등 당시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시설들도 함께 복원되었다. 이는 실물 크기의 입체 모형으로는 일본 최초의 사례이다.

5. 4. 3. 사찰

이치조다니에는 약 40개의 사원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안양사 터

아사쿠라 토시카게가 1473년(분메이 5년)에 이치조다니 동신정에 건립한 정토종 사찰이다. 개산은 켄요 스님이다. 1488년(초쿄 2년) 8월에는 에치젠 후츄에 머물던 신세이(텐다이종 신세이파의 시조)가 아사쿠라 사다카게의 초청으로 이 절에서 설법하였고, 사다카게는 신세이에게 귀의하였다. 1547년(덴분 16년)경에는 이치조다니에 체류하던 키요하라 노리카타가 "대학", "중용" 등을 강의하기도 했다. 1567년(에이로쿠 10년)에는 아사쿠라 요시카게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이 절에서 맞이했으며, 절 옆에는 요시아키의 거처가 마련되었다. 아사쿠라 가문 멸망 후인 1575년(텐쇼 3년)에 기타노쇼로 이전되었다. 이치조다니 시절의 사찰 유구는 아사쿠라 관 유적의 이치조다니 강 건너편에 위치한 ''평면 복원 지구''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세이겐지

카미키도(上城戸) 바깥에 위치한 텐다이종 신세이파의 사원이다. 1492년(메이오 원년)에 신세이가 건립했다고 전해진다. 높이 3m에 가까운 큰 지장보살을 비롯하여 부동명왕, 비사문천 등 700여 구의 석불과 석탑이 남아 있다.

; 서산 광조사 터

시모키도(下城戸) 바깥, 그 북서쪽에 위치했던 사찰 터이다. 절에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창건은 헤이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사쿠라 토시카게가 숙부인 마사카게의 명복을 빌기 위해 재건하였다. 텐다이종 신세이파 사찰이었으며, 이치조다니에서 가장 큰 규모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사쿠라 가문 멸망 후인 1611년(게이초 16년)에 기타노쇼로 이전되었다. 현재는 옛 참배길 양쪽에 지붕이 설치되어 38구의 석불이 남아 있으며, 가장 큰 부동명왕 석상의 높이는 2.6m에 달한다.

; 석불군

현재에도 이치조다니에는 석불과 석탑이 3,000구 이상 남아 있다. 그 대부분은 텐다이종 신세이파의 것으로, 덴분 연간부터 에이로쿠 연간 사이에 많이 만들어졌다. 이 석불들은 전투에서 사망한 병사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석불과 석탑 대부분은 부드럽고 가공하기 쉬운 샤쿠타니 석으로 만들어졌다.

5. 4. 4. 성 내부 기타 시설

; 영림총(英林塚)

영림총(英林塚) 아사쿠라 타카카게의 묘


성주의 관(館) 터 뒤편, 이치조다니(一乗谷) 산 중턱에 위치한 아사쿠라 토시카게(朝倉敏景, 타카카게 또는 노리카게라고도 불림)의 묘이다. 토시카게의 법명인 '이치조지전 영림종웅'(一乗寺殿英林宗雄)에서 이름을 따와 영림총이라 불린다. 높이 약 2m의 쿳타니석(笏谷石)으로 만들어진 보협인탑 형태를 하고 있다. 현재는 탑의 보존을 위해 건물로 덮여 보호받고 있다. 옛날부터 에치젠(越前) 지방에 위기가 닥치면 이 탑이 울린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 탑은 에도 시대 겐로쿠(元禄) 및 호에이(宝永) 연간(17세기 말~18세기 초)에 아사쿠라 가문의 보리사(菩提寺)인 심월사(心月寺)의 18대 주지 류도(龍堂)가 무로마치 시대의 오래된 석탑을 가져와 수리하고 다시 세운 것이라고 한다.

; 과할청수(瓜割清水)

넓이 약 80m2 정도의 용수지이다. 샘 남쪽 고지대에는 과거 난요지(南陽寺) 터가 있다. 물이 매우 차가워, 담가 두었던 참외가 저절로 쪼개질 정도였다는 이야기에서 '과할청수'(瓜割清水, 참외를 가르는 맑은 샘)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이 샘물은 일 년 내내 10°C 전후의 수온을 유지하며, 현재도 지역 주민들의 생활용수로 사용되고 있다.

5. 4. 5. 성문

카미키도(上城戸)의 토루


이치노다니(一乗谷)를 방어하기 위해, 조카마치(성 아랫마을)의 남쪽과 북쪽에 토루(흙으로 쌓은 보루)를 쌓고 성문을 배치했다. 교토에 가까운 남쪽 문은 카미키도(上城戸), 북쪽 문은 시모키도(下城戸)라고 불렸다. 이 두 문 사이의 약 1.7km 구간인 '키도노우치(城戸ノ内)'에는 아사쿠라 가문의 저택과 사무라이 저택 등이 들어서 조카마치의 중심부를 이루었다.

; 시모키도(下城戸)

: 동쪽과 서쪽의 산이 가까워지는 계곡 입구에 설치되었다. 현재는 폭 18m, 높이 5m, 길이 20m의 토루가 남아 있다. 마스가타(성문 앞 네모난 공간) 형태의 문터에는 무게 10ton이 넘는 돌들이 쌓여 있으며, 그중에는 40ton이 넘는 거대한 돌도 있다. 또한 성문 바깥쪽에는 폭 10m, 깊이 3m의 해자(성 주위에 판 못)가 있었으며, 과거에는 이치조다니 강과 직접 연결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카미키도(上城戸)

: 현재는 폭 13m, 높이 5m, 길이 50m의 토루가 남아 있다. 시모키도와 달리 거대한 돌은 남아 있지 않다. 바깥쪽 해자도 설치되어 있었다.

5. 4. 6. 성 외부

성 바깥에도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특히 성문 밖 북쪽에 위치한 아와가(후쿠이시 아와가마치)나 마에나미(후쿠이시 마에나미마치)는 미쿠니 항으로 이어지는 아스와강이 흘러 이치조다니의 강 항구로서 번성했다. 또한 미노 가도와 아사쿠라 가도[13][14]도 이곳을 지나갔기 때문에 많은 물자가 모이는 곳이었다. 쌀은 물론이고, 중국 등에서 온 물품(당나라 물품)도 거래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시장도 열려 주요 물품의 가격을 결정하는 역할을 했다.

6. 발굴 및 복원

1573년 이치조다니 성 전투에서 오다 노부나가의 군대에 의해 마을 전체가 불타 잿더미가 된 후, 이치조다니는 오랫동안 논밭 아래에 묻혀 있었다.[7]

시간이 흘러 1930년(쇼와 5년) 7월 8일, 지상에 일부 노출되어 있던 정원 유구(탕전터, 남양사, 스와관터 정원)가 국가 명승으로 지정되었으나, 이후 관리가 미흡하여 훼손되었다. 본격적인 발굴 조사는 1967년(쇼와 42년)에 시작되었다.[7][8] 같은 해, 명승으로 지정되었던 정원에 대한 정비와 조사가 이루어졌고, 지하에서 잘 보존된 정원 유구가 추가로 발견되었다. 1968년(쇼와 43년)부터는 아사쿠라 가문 당주의 관(館) 터에 대한 발굴이 시작되었고, 초석과 정원석 등이 좋은 상태로 발굴되면서 유적 전체에 대한 전면 발굴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상어전 남쪽 안뜰에서는 1968년에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확인된 화단 유구가 발견되기도 했다.

1971년(쇼와 46년) 7월 29일, 산성 터를 포함한 약 278ha의 넓은 지역이 국가 특별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이듬해인 1972년(쇼와 47년) 4월 1일, 후쿠이현은 아사쿠라 씨 유적 조사 연구소를 설립하여 본격적인 발굴 조사와 사적 공원으로서의 환경 정비를 시작했다.

발굴 조사를 통해 영주 저택, 사무라이 저택, 사찰, 상인 및 장인의 집터, 도로 등 전국 시대 성곽 도시의 모습이 거의 완전한 형태로 드러났다. 약 5,000기의 유구가 확인되었고, 170만 점이 넘는 유물이 출토되었다.

1981년(쇼와 56년)에는 발굴 성과를 보존하고 전시하기 위해 유적 부근에 후쿠이현 이치조다니 아사쿠라 씨 유적 자료관이 개관했다. 1991년(헤이세이 3년) 5월 28일에는 스와관터 정원, 탕전터 정원, 관터 정원, 난요사터 정원 등 4개의 정원이 국가 특별명승으로 지정되었다. 이 정원들은 후대의 변형이 거의 없어 무로마치 시대 말기의 정원 양식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1995년(헤이세이 7년)에는 발굴 조사 결과와 사료를 바탕으로 사무라이 저택과 상인 마을 구역을 중심으로 약 200m 길이의 거리가 복원되어 '복원된 거리(復元町並)'로 일반에 공개되었다.[9] 이는 일본 최초의 실물 크기 복원 사례이다.

2004년(헤이세이 16년) 7월 18일에는 후쿠이 호우로 인해 유적 부근의 이치조다니 강이 범람하여 유적 일부와 자료관이 침수 피해를 입기도 했다.

2007년(헤이세이 19년) 6월,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 중 2,343점이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10] 이 유물들은 대부분 이치조다니 아사쿠라 씨 유적 자료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듬해인 2008년(헤이세이 20년) 3월 13일에는 전국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칼 장식(메누키, 코가이 등) 주형 37점이 추가로 출토되었다고 발표되었다.

이치조다니 아사쿠라씨 유적은 다음과 같이 국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 '''특별 명승''': 스와 야카타 아토 정원, 유도노 아토 정원, 아사쿠라 야카타 아토 정원, 난요지 아토 정원
  • '''특별 사적''': 유적 전체 (약 278ha)
  • '''중요문화재''': 출토 유물 2,343점

7. 현지 정보

(내용 없음)

7. 1. 위치

후쿠이현 후쿠이시 키도노우치정(城戸ノ内町) 일대에 위치한다. 현재 후쿠이시 시가지에서 동남쪽으로 약 10km 떨어진 곳으로, 구즈류강지류인 아스와강, 그리고 아스와강의 또 다른 지류인 이치조다니강을 따라 형성된 계곡에 자리 잡고 있다. 유적은 전국 시대조카마치(城下町, 성 아랫마을)와 아사쿠라씨의 관저, 그리고 뒤편의 산성으로 구성된다.

이치조다니 계곡은 동서 약 500m, 남북 약 3km로 좁지만, 후쿠이 평야가 끝나고 산지로 접어드는 길목에 있다. 이곳은 수 킬로미터 거리에 호쿠리쿠도(北陸道)나 오노 분지로 통하는 미노 가도(美濃街道), 시카마타 고개를 넘어 에치젠 후추로 이어지는 가도, 호쿠리쿠도와 연결된 아사쿠라 가도[13][14] 등이 지나가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지형적으로 이치조다니는 동쪽, 서쪽, 남쪽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으로는 아스와강이 흘러 천연의 요새와 같은 조건을 갖추었다. 남북 양쪽에 성문을 세우고, 그 사이 약 1.7km에 이르는 "성문 안" 지역에는 아사쿠라관(朝倉館, 아사쿠라 가문의 저택)을 중심으로 사무라이 저택, 사찰, 장인과 상인의 마을이 계획적으로 정비된 도로 양편에 들어서 당시 일본 유수의 조카마치 핵심부를 이루었다. 주변 산봉우리에는 성채와 망루가 세워져 있어, 지역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요새군이었다.

7. 2. 복원 마을 접근 방법

'''대중교통'''

  • 후쿠이역 (호쿠리쿠 신칸센, 하피라인 후쿠이선, 에치젠 철도 가쓰야마에이헤이지선, 후쿠이 철도 후쿠부선)에서 아래의 일반 노선 버스를 이용하여 "복원 마치나미(복원 마을)" 정류장에서 하차한다.
  • * 게이후쿠 버스 62계통 이치조다니 도고선: 후쿠이역 서쪽 출구 5번 승강장에서 출발하며, 후쿠이역 동쪽 출구(아오사 동쪽)에도 정차한다. 대략 1시간에 1번 운행한다.
  • * "아사쿠라·에이헤이지 다이렉트 버스"나 "아사쿠라 유메마루호" 등 임시 버스가 운행되는 해도 있다.
  • JR 에츠미호쿠 선 이치조다니역에서 하차. 아래쪽 성문터(下城戸) 및 니시야마 코쇼지 터(西山光照寺跡)까지는 도보 5분, 아사쿠라 관터(朝倉館跡) 및 복원 마을까지는 도보 약 30분이 소요된다. 운임은 버스보다 저렴하지만, 운행 횟수가 적어 2~3시간에 1번 정도 운행한다.


'''자동차'''

  • E8 호쿠리쿠 자동차도 후쿠이IC에서 국도 158호, 후쿠이현도 31호 시노오 가쓰야마선, 후쿠이현도 18호 사바에 미야마선을 경유하여 약 10분 소요된다.

7. 3. 주변 정보


  • 후쿠이 현립 이치조다니 아사쿠라 씨 유적 박물관: 유적에서 발굴된 다양한 출토품을 전시하고 있다. 주요 전시품으로는 무기류(일본도, 조총 등), 생활용품(나막신, 화장품, 조리 기구, 식기 등), 유예품(꽃꽂이 도구, 향, 장기 말, 다기 등), 문방구(벼루, 먹), 건축 부재(귀면 기와, 마룻돌), 난방 기구, 에치젠야키 큰 항아리 등 장인 도구류, 그리고 중국 및 조선 제 도자기 등이 있다. 이 외에도 이치조다니 전체 모형, 아사쿠라 관 복원 모형, 사진 패널 등 유적과 관련된 각종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 미치노에키 이치조다니 아사쿠라 물의 역
  • 아바카스가 봄날 신사
  • 신게쓰지: 아사쿠라 토시카게가 할아버지 노리카게(1463년 사망)의 명복을 빌기 위해 15세기 후반에 건립한 절이다. 이후 아사쿠라 가문보리사가 되었으며, 과거에는 승려가 300명 가까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아사쿠라 사다카게 시절에는 오슈다이묘가 700명을 이끌고 머물렀다는 이야기도 남아있다. 당시 절의 위치는 현재 이치조 초등학교(후쿠이시 니시신마치, 가미키도 근처) 부근으로 추정된다. 이치조다니가 소실된 후에는 잠시 단생군(사바에시역 부근)으로 이전했다가, 1599년(게이초 4년) 아사쿠라 관터에 다시 세워졌다. 그러나 1601년(게이초 6년) 유키 히데야스가 에치젠으로 들어오면서 키타노쇼(현재의 후쿠이성)로 이전되었다. 아사쿠라 관터에 남겨진 절은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법명(쇼운인덴 타큐소코 다이거사)을 따 '쇼운인'으로 명명되었고, 신게쓰지의 말사가 되었다.
  • 전승 유구: 후쿠이현 쓰루가시에 있는 사이후쿠지의 아미타당이 이곳에서 옮겨간 것이라는 전승이 있다.
  • 마키야마성

8. 관련 작품


  • 아카가미 료, 『취상의 유법 아사쿠라 성쇠기』(코단샤, 2018년 12월 18일 출판, ISBN 978-4-06-514035-2) - 이치조다니 아사쿠라씨 유적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참조

[1] 백과사전 Asakura Yoshikage http://rekishi.jkn21[...] Shogakukan 2012-08-22
[2] 백과사전 朝倉 義景 http://rekishi.jkn21[...] Shogakukan 2012-08-22
[3] 백과사전 朝倉 義景 http://rekishi.jkn21[...] Shogakukan 2012-08-22
[4] 백과사전 朝倉 義景 http://rekishi.jkn21[...] Shogakukan 2012-08-22
[5] 백과사전 朝倉義景 http://rekishi.jkn21[...] Shogakukan 2012-08-22
[6] 서적 Battles of the Samurai Arms and Armour Press
[7] 웹사이트 Ichijodani Asakura Family Site Museum http://asakura-museu[...] 2017-10-10
[8] 간행물 Ichijōdani Asakura-shi iseki—hakkutsu chōsa seibi jigyō gaihō http://ci.nii.ac.jp/[...] Fukui-ken Asuwa-chō 2017-10-10
[9] 웹사이트 Restored street of Ichijōdani (diolama) http://www.city.fuku[...] 2017-10-10
[10] 웹사이트 Shutsudohin gyararī http://asakura-museu[...] 2017-10-10
[11] 데이터베이스 一乗谷朝倉氏遺跡
[12] 데이터베이스 一乗谷朝倉氏庭園
[13] Google Books 吉川博和 戦国朝倉:史跡からのリポート https://books.google[...]
[14] 문서 福井県道238号一乗谷朝倉氏遺跡東大味線
[15] 문서 重森・176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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