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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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하전은 조선 후기의 왕족으로, 덕흥대원군의 13대손이며, 1842년에 태어나 1862년에 사망했다. 1849년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왕위 계승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안동 김씨 세력의 견제로 철종이 즉위하면서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그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비판하다가 1862년 역모 혐의로 체포되어 제주목에 유배된 후 사사되었다. 사후 고종 때 신원 및 복권되었으며, 증 정일품 흥록대부 경원군으로 추봉되었다. 이하전은 안동 김씨 세도정치에 맞서 왕권 강화를 주장한 인물로 평가받으며, 그의 죽음은 조선 왕조 쇠퇴와 세도정치의 폐단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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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작위 | 도정궁 사손(都正宮 嗣孫) |
휘 | 이하전 (李夏銓) |
아명 | 이인손 (李仁孫) |
자 | 치홍(致弘) |
출생일 | 1842년 2월 15일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사망지 | 조선 전라도 제주도 제주목 |
사망일 | 1862년 8월 20일 (향년 20세) |
가문 | 전주 이씨 |
왕조 | 조선(朝鮮) |
종교 | 유교(성리학) |
가족 관계 | |
배우자 | 서대혜(경원군부인 달성 서씨) |
양자 | 창산군 이해창 |
아버지 | 완창군 이시인 |
어머니 | 완창군부인 경주 김씨(생모) 완창군부인 남원 윤씨(전모) 완창군 측실 평양 조씨(서모) |
할아버지 | 완성군 이희 |
종조부 | 이옥 |
이복 종조부 | 이완 |
이복 형 | 이우용 |
사촌 형 | 이사규 |
10촌 형 | 이돈 |
양숙부 | 이익주, 이시문, 이시백 |
외할아버지 | 김성곡 |
고모부 | 민치구 |
고종사촌 누나 | 여흥부대부인 민씨 |
장인 | 서음순 |
처형 | |
사인 | 사형(사사, 독살) 집행됨. |
2. 생애
이하전은 전주 이씨로, 덕흥대원군의 13대손이다. 아버지는 완창군 이시인이며, 어머니는 김성곡의 딸인 경주 김씨이다. 흥선대원군의 부인 여흥대원비 민씨는 이하전의 고종사촌으로, 이하전 가문과 흥선대원군 가문은 가까운 친척 관계였다.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완창군 이시인 | |
어머니 (생모) | 경주군부인 김씨 | 김성곡의 딸 |
서모 | 평양 조씨 | |
서형 | 이우용 | 본명 이우전 |
부인 | 달성군부인 서씨 | 서음순의 딸 |
고종사촌 | 여흥대원비 민씨 | 흥선대원군의 부인, 고종의 어머니 |
1849년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이하전은 풍양 조씨 계열의 지지를 받으며 유력한 왕위 계승 후보로 거론되었다.[1] 그러나 안동 김씨 세력은 강화도에 있던 은언군의 손자 이원범(철종)을 왕으로 옹립하였고, 이하전은 견제를 받게 되었다.
음서제로 관직에 올라 돈녕부참봉을 시작으로 여러 벼슬을 거쳤다. 1856년 돈녕부참봉이 된 이후,[2] 돈녕부주부, 진찬소 낭관, 경모궁령, 사직서령, 종친부전부, 전생서판관, 충훈부도사 등을 역임하고 도정으로 승진했다.
안동 김씨의 세도로 관직이 임명되는 것에 분개한 이하전은 철종에게 "이 나라가 이씨의 나라입니까? 아니면 김씨의 나라입니까?"[1]라고 직언했다. 안동 김씨 세도가는 이 발언을 문제삼아 이하전을 비난하고, 그가 다른 마음을 먹었다고 참소했다.
1862년 전오위장 김순성, 이극선 등이 이하전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오위장 이재두 등의 무고로, 이하전은 체포, 압송되어 심문을 받았다.[1] 김순성은 이항로 등과 모의하여 이하전을 추대하려 했다고 진술했으나,[1] 이항로는 혐의를 부인했고,[3] 이후 고령인데다 이돈의 실존 여부가 불확실하여 풀려났다.[4]
1862년 이하전은 전라도 제주목에 유배된 뒤, 위리안치형을 받았다. 이후 사약을 받고 21세로 사사되었다.[1] 이하전이 사사된 원인은 안동 김씨 세도의 전횡에 분노하여 철종에게 항의했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2. 1. 가계 배경
이하전은 전주 이씨로, 덕흥대원군의 13대손이다. 아버지는 완창군 이시인(李時仁)이며, 어머니는 경주 김씨(慶州郡夫人 金氏)로 김성곡(金星轂)의 딸이다. 서모 평양 조씨에게서 태어난 서형 이우전(李禹銓)은 후에 이우용(李禹鎔)으로 개명하였다. 부인은 참봉(參奉) 서음순(徐音淳)의 딸인 달성군부인 서씨(達城郡夫人 徐氏)이다.흥선대원군의 부인 여흥대원비 민씨는 이하전의 고종사촌으로, 이하전 가문과 흥선대원군 가문은 가까운 친척 관계였다. 이는 생조부 이옥(李𪸛)의 딸 중 한 명이 민치구(閔致久)와 혼인하여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친정어머니이자 고종의 외조모가 되었기 때문이다.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완창군 이시인(李時仁) | |
어머니 (생모) | 경주군부인 김씨(慶州郡夫人 金氏) | 김성곡(金星轂)의 딸 |
서모 | 평양 조씨 | |
서형 | 이우용(李禹鎔) | 본명 이우전(李禹銓) |
부인 | 달성군부인 서씨(達城郡夫人 徐氏) | 서음순(徐音淳)의 딸 |
고종사촌 | 여흥대원비 민씨 | 흥선대원군의 부인, 고종의 어머니 |
2. 2. 왕위 계승 후보
1849년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이하전은 유력한 왕위 계승 후보 중 한 명으로 거론되었다. 당시 이하전은 풍양 조씨 계열의 지지를 받았으며, 특히 권돈인은 이하전을 적극적으로 후계자로 추천했다.[1] 그러나 안동 김씨 세력은 강화도에 있던 은언군의 손자 이원범(철종)을 왕으로 옹립하였고, 이하전은 견제를 받게 되었다. 일설에는 순원왕후가 이하전을 헌종의 후사로 내정하고 '인손'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도 하나, 김좌근과 김수근이 순원왕후를 설득하여 철종을 옹립했다고 한다.2. 3. 관직 생활
음서제로 관직에 올라 돈녕부참봉(敦寧府參奉)을 시작으로 여러 벼슬을 거쳤다. 1856년 2월 6일 돈녕부참봉이 되었다.[2] 3월 7일 돈녕부주부, 11월 24일 진찬소(進饌所) 낭관에 차하되었다.[2] 1857년(철종 8) 6월 1일 경모궁령(景慕宮令), 6월 26일 사직서령(社稷署令)을 지냈다. 1858년 6월 12일 원정(原情)을 언급했다가 파직되었으나 곧 복직했다. 1858년 6월 15일 다시 사직서령, 6월 22일 종친부전부(典簿), 1859년(철종 10) 10월 7일 전생서판관, 12월 사직서령, 1860년(철종 11) 2월 3일 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 경모궁령, 종친부전부(典簿) 등을 역임하고 이후 도정(都正)으로 승진했다.2. 4. 세도가와의 갈등과 죽음
안동 김씨의 세도로 관직이 임명되는 것에 분개한 이하전은 철종에게 "이 나라가 이씨의 나라입니까? 아니면 김씨의 나라입니까?"[1]라고 직언했다. 안동 김씨 세도가는 이 발언을 문제삼아 이하전을 비난하고, 그가 다른 마음을 먹었다고 참소했다. 헌종 사후 철종을 옹립할 때 이하전이 풍양 조씨 계열의 지지를 받았고, 권돈인이 이하전을 후계자로 지명했었기에, 안동 김씨는 그를 후환으로 여겼다.1862년(철종 13) 전오위장 김순성, 이극선 등이 이하전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오위장 이재두 등의 무고로, 이하전은 7월 19일부터 7월 23일까지 체포, 압송되어 심문을 받았다.[1] 7월 19일 공초에서 김순성은 경기도 양근군에 사는 이항로, 이하전의 서족인 이돈 등과 모의하여 이하전을 추대하려 했으며, 그 장소는 이항로의 집이었다고 진술했다.[1] 그러나 9월 22일 의금부도사 조성교가 이항로를 압송하여 추국했으나 이항로는 혐의를 부인했고,[3] 이후 이항로는 고령인데다 이돈의 실존 여부가 불확실하여 풀려났다.[4] 그러나 이돈은 실존인물로, 이하전과 10촌간이었으나 서얼이었다.[5][6] 김순성은 이하전의 종형제인 이사규를 역모 가담자로 지목하기도 했다.[5]
1862년 7월 25일 이하전은 국문 후 전라도 제주목에 유배된 뒤, 바로 위리안치형을 받았다. 이후 양사와 빈청에서 거듭 그를 탄핵했고, 8월 10일 위리지전의 명령이 내려졌다. 8월 11일 철종이 사약을 내려,[1] 8월 20일 21세로 사사되었다. 이때 금부도사가 갖고 내려온 사약은 그의 아내가 직접 달여서 주었다고 한다.
이하전이 사사된 원인은 안동 김씨 세도의 전횡에 분노하여 철종에게 "이 나라가 김씨의 나라인가, 이씨의 나라인가" 항의했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미치광이를 가장한 이하응은 살아남았지만, 이하전은 출중한 왕족이라는 이유로 모함을 받아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은 흥선대원군 등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한편, 이하전을 역모로 몬 것은 병약한 철종의 사후를 대비하여 유력한 왕위계승자를 제거하려는 김흥근과 김좌근 등의 책략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1] 풍양 조씨 계열은 이 사건의 여파가 자파 지지세력인 이하전과 이항로에게 미치지 않도록 노력한 반면, 안동 김씨는 풍양 조씨 외곽지지세력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사태의 확대를 기도하였다.[7]
3. 사후
1864년(고종 1) 7월 흥선대원군 집권 후에 신원되었고, 7월 14일 죄명이 효부처리된 뒤 7월 18일 복작되었다.[1] 1872년(고종 9) 7월 25일 다시 덕흥대원군의 사손으로 복권되었다.[2] 고종은 덕흥대원군의 사손으로 이하전을 다시 정하였다.[2] 1872년(고종 9) 7월 30일 이하전의 후사를 세우는 일로 전주 이씨 각 파(派)의 문장(門長)들을 모아서 의논을 하니, 덕흥대원군의 증손이자 밀산군의 10대손이며 유학(幼學) 이경용의 아들인 8살 난 이봉길을 양자로 삼았다.[2]
증 정일품 흥록대부 경원군(慶原君)으로 추봉되었다.[3]
이하전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관계 | 이름 및 설명 |
---|---|
아버지 | 완창군 이시인(1805년 5월 2일 - 1843년 3월 11일), 이옥의 차남으로 큰아버지 완성군 이희에게 입양됨. |
생모 | 경주군부인 김씨(1816년 7월 19일 - 1863년 3월 9일), 김성곡의 딸. |
전모 | 남원군부인 윤씨(1803년 5월 22일 - 1835년 4월 15일), 윤이현의 딸. |
서모 | 평양 조씨 |
부인 | 달성군부인 서씨(1842년 1월 15일 - 1924년), 이름은 대혜(大慧), 서음순의 딸. |
양자 | 이해창(1865년 - 1945년), 이경용의 아들. (덕흥대원군의 증손 밀산군의 10대손.) |
양며느리 | 남양 홍씨(1866년 2월 12일 ~ 1898년 11월 1일), 홍종우의 딸. |
양서며느리 | 이름모름 |
서형 | 이우용(1827년 1월 17일 - ?년), 처음 이름은 우전(禹銓). |
서형수 | 평양 조씨(1825년 11월 9일 ~ ?), 조병기(趙秉琦)의 딸 |
장인 | 서음순 |
3. 1. 복권과 추증
1864년(고종 1) 7월 흥선대원군 집권 후에 신원되었고, 7월 14일 죄명을 효부처리된 뒤 7월 18일 복작되었다.[1] 이해 8월 29일 그의 부인 서씨가 상소를 올려 시아버지 완창군을 덕흥대원군의 사당에 봉사하는 문제와 남편 이하전의 후사를 이호선으로 정하는 것을 격쟁하였다.[1] 같은 날 종친부에서 흥선대원군에게 덕흥대원군의 뒤를 잇는 문제를 아뢰자 다음과 같이 전교하였다. "완창군이 덕흥대원군의 종손(宗孫)으로서 그 자신이 죽은 지도 이미 오래된 후에 자기의 아들에게 연루되어 신주(神主)가 사당에서 내쳐졌으니, 본디 지극히 불행한 일이다. 아들이 이미 죄를 벗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만 그대로 내쳐져 있다면 저승에서라도 억울해서 울부짖지 않을 수 있겠는가? 완창군의 사판(祀版)을 도로 사당에 봉안하고, 이익주(李益周)는 완성군(完城君)의 둘째 아들로 순서를 정하여 조상의 제사를 대신 받들게 하다가 손자가 생기면 이하전의 후사로 삼아서 종부(宗府)와 예조(禮曹)로 하여금 잘 알고 거행하게 하라."[1]1872년(고종 9) 7월 25일 다시 덕흥대원군의 사손으로 복권되었다.[2] 고종은 덕흥대원군의 사손으로 이하전을 다시 정하고, 다음과 같이 전교하였다. "이하전(李夏銓)의 일은 죄명과 누명을 벗었으니 이제는 문제되는 바가 없다. 완성군(完城君)의 차양자(次養子)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섭사손(攝祀孫)이 된 것은 그때로서는 부득이한 일이었다. 사손을 대신한 이재익(李載益)은 본가에 돌려보내고 이하전의 후사(後嗣)를 세울 것을 종친부(宗親府)로 하여금 속히 거행하게 하라."[2] 1872년(고종 9) 7월 30일 이하전(李夏銓)의 후사를 세우는 일로 전주 이씨 각파(各派)의 문장(門長)들을 모아서 의논을 하니,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증손이자 밀산군(密山君)의 10대손이며 유학(幼學) 이경용(李慶鎔)의 아들인 8살 난 이봉길(李鳳吉)을 양자로 삼았다.[2]
증 정일품 흥록대부 경원군(慶原君)으로 추봉되었다.[3]
3. 2. 가족 관계
이하전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관계 | 이름 및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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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 완창군 이시인(1805년 5월 2일 - 1843년 3월 11일), 이옥의 차남으로 큰아버지 완성군 이희에게 입양됨. |
생모 | 경주군부인 김씨(1816년 7월 19일 - 1863년 3월 9일), 김성곡의 딸. |
전모 | 남원군부인 윤씨(1803년 5월 22일 - 1835년 4월 15일), 윤이현의 딸. |
서모 | 평양 조씨 |
부인 | 달성군부인 서씨(1842년 1월 15일 - 1924년), 이름은 대혜(大慧), 서음순의 딸. |
양자 | 이해창(1865년 - 1945년), 이경용의 아들. (덕흥대원군의 증손 밀산군의 10대손.) |
양며느리 | 남양 홍씨(1866년 2월 12일 ~ 1898년 11월 1일), 홍종우의 딸. |
양서며느리 | 이름모름 |
서형 | 이우용(1827년 1월 17일 - ?년), 처음 이름은 우전(禹銓). |
서형수 | 평양 조씨(1825년 11월 9일 ~ ?), 조병기(趙秉琦)의 딸 |
장인 | 서음순 |
4. 평가 및 의의
이하전은 안동 김씨 세도정치에 정면으로 맞섰던 인물로, 왕실의 권위 회복과 개혁을 추구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안동 김씨의 세도로 관직이 임명되는 것에 분개하여 철종에게 "이 나라가 이씨의 나라입니까? 아니면 김씨의 나라입니까?"[1]라고 직언을 할 정도로 강직한 성품을 지녔다.
그러나 이러한 강직함은 안동 김씨 세도가에게는 눈엣가시였다. 안동 김씨는 이하전이 헌종 사후 철종을 옹립할 때 풍양 조씨의 지지를 받았고, 풍양 조씨 계열의 권돈인이 이하전을 후계자로 지명한 적이 있다는 점을 들어 그를 제거하려 했다.[1] 결국 이하전은 1862년 김순성, 이극선 등에 의해 역모로 몰려 제주도로 유배된 후 위리안치되었고, 같은 해 8월 20일 21세의 젊은 나이에 사사되었다.[1]
이하전의 죽음은 조선 왕조의 쇠퇴와 세도정치의 폐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특히, 개혁적이고 능력 있는 인물이 세도가에 의해 희생된 점은 조선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적폐를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하전의 비극적인 죽음은 훗날 흥선대원군의 개혁 정치에 영향을 미쳤으며, 조선 말기 정치 상황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일각에서는 이하전을 역모로 몬 것이 병약한 철종 사후를 대비하여 유력한 왕위 계승자를 제거하려는 안동 김씨의 책략이었다는 견해도 있다.[1]
참조
[1]
서적
화서학파의 사상과 민족운동(한국사연구총서 28)
국학자료원
2006
[2]
웹사이트
http://kyujanggak.sn[...]
[3]
서적
화서학파의 사상과 민족운동(한국사연구총서 28)
국학자료원
2006
[4]
서적
화서학파의 사상과 민족운동(한국사연구총서 28)
국학자료원
2006
[5]
서적
화서학파의 사상과 민족운동(한국사연구총서 28)
국학자료원
2006
[6]
문서
그의 선조 응천군 이돈과는 동명이인이다
[7]
서적
화서학파의 사상과 민족운동(한국사연구총서 28)
국학자료원
2006
[8]
문서
당시까지만 해도 조선시대 인물들이 일부 생존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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