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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곤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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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익곤궁은 중국 자금성 내 서6궁 중 하나로, 명나라 영락제 때 만안궁으로 지어져 청나라 시대까지 황후와 후궁들이 거처했던 곳이다. 광서제 시기 서태후가 저수궁으로 이주한 후 저경궁과 연결되었으며, 광서제의 후궁 간택과 황후 간택 장소로 사용되었다. 주요 건축물로는 정전, 동배전, 서배전, 체화전 등이 있으며, 각 건물에는 황제와 황후의 현판이 걸려 있다. 명나라 융경제 시기 효정황후, 만력제 시기 황귀비 정씨, 청나라 강희제 시기 의비, 건륭제 시기 계황후 등 여러 황족이 거주했으며, 2013년에는 한 남성이 유리창을 깨고 유물을 파손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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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곤궁
궁궐 정보
전각 이름 (한자)翊坤宮
전각 이름 (로마자 표기)Yìkūngōng
위치자금성 서6궁
역할비빈의 거주지

2. 역사

자금성 내정 서6궁의 하나로 , 시기 후궁의 거처였다. 영락 18년(1420년)에 지어져 처음에는 '''만안궁(萬安宮)'''으로 불렸다. 가정 14년(1535년)에 '''익곤궁(翊坤宫)'''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청나라에서도 옛 명칭 그대로 사용하였고, 여러 번 수리를 거쳤다. 원래 익곤궁은 이진원이었는데, 청 말기, 익곤궁의 후전을 헐고, 체원전 동서 이방을 각각 한 칸씩 통로로 만들어, 익곤궁과 저수궁이 이어져 남북의 사진원이 되었다.[2]

광서 10년(1884년), 서태후 50번째 생일 때, 저수궁으로 이주하여 체화전에서 하례를 받았다. 광서제의 후궁을 간택하는 일도 체원전에서 거행되었다.[3]

익곤궁 정전 앞 처마 밑에는 익곤궁(翊坤宫)이라는 가파른 현판이 걸려있다. 건륭 6년(1741년), 건륭제는 영수궁의 현판을 따라 11면 현판을 만들었고, 동6궁, 서6궁은 영수궁을 제외한 11궁의 정전에 각각 걸려있다. 건륭제는 "자계한 후, 천만년이 지나도 제멋대로 움직이거나, 비빈이 다른 궁으로 옮겨가더라도 바꿀 수 없다"라는 명을 내렸다.

지금도 익곤궁은 궁궐 생활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다.

1535년 가정제 치세에 현재의 이름을 얻었다. 새로운 이름은 곤괘("땅")와 일치하며, 이는 건청궁(전통적으로 명나라와 초기 청나라 시대 황후의 거처)의 이름에도 나타나며 "땅의 지배자를 돕는다"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궁궐의 이름은 황후를 보좌하는 후궁의 지위를 나타낸다. 역설적이게도, 이곳은 고위 후궁(귀비, 황귀비 또는 황후)만을 위한 거처는 아니었다.[2]

1885년, 이 궁궐은 자희태후의 거처인 저경궁과 연결되었다. 1889년에는 황후를 간택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3]

3. 주요 건축물

익곤문 앞에서 서쪽을 바라본 사진. 사진의 가장 오른쪽 끝에 익곤문이 있고, 가운데 먼 문은 숭희문 안쪽이다.


익곤궁의 주요 건축물은 다음과 같다.

  • 익곤궁(翊坤宮) 정전: 면적이 5칸이며, 유리기와 지붕으로 앞뒤에 복도가 있다. 처마 밑에는 두공이 있고, 양방에는 소풍 채화가 그려져 있다. 문은 만자금바닥, 오박쥐 수치마판 칸막이 문이며, 창은 보보금지적창으로 만자단수문(萬字團壽文)을 하고 있다. 앞쪽 처마 밑에는 '익곤궁' 현판과 '보슬요금번도천세과(寶瑟瑤琴蟠桃千歲果), 기화지초온수사시춘(琪花芝草溫樹四時春)' 대련이 있다. 앞쪽 복도 안 명간 밖 앞처마 밑에는 자희태후가 제작한 '이록수후(履祿綏厚)' 가로 현판이 남향으로 걸려있고, 양쪽 대련은 '송창낙춘장(松牖樂春長)은 편안하고 길하며(松牖樂春長既安且吉), 난계계계 이서영(宜書永)을 수이강(壽而康)(蘭陔宜書永曰壽而康)'이다. 명간 한가운데에는 지평좌, 병풍, 향로, 궁선이 있고, 그 바로 위에는 자희태후가 제작한 '유용덕대(有容德大)' 현판이 남쪽을 향하고 있다. 정전 앞 대석 밑에는 동봉, 동학, 동로가 각각 한 쌍씩 설치되어 있다. 푸이는 정전 앞 복도에 그네를 설치했으나, 현재는 철거되고 틀만 남아있다.

  • 연홍전(延洪殿): 익곤궁의 동배전으로 면적은 3칸이고 유리기와가 산정되어 있다. 앞처마 밑에는 자희태후가 제작한 '경운재(慶雲齋)' 현판이 있고, 위쪽 정중앙에 '자희황태후 어필지보' 인(印)이 있다. 양옆 대련은 자희태후가 제작한 '채운보나무 경전둘레(彩雲寶樹瓊田繞), 선하기화벽간향(仙霞琪花碧澗香)'이다.

  • 원화전(元和殿): 익곤궁의 서배전으로 면적은 3칸이고, 유리기와가 산정되어 있다. 앞처마 밑에는 자희태후가 제작한 '도덕당(道德堂)' 현판이 걸려있고, 현판 위쪽 정중앙에는 '자희황태후 어필지보(慈熙皇太后御筆之寶)' 인(印)이 있다. 양옆 대련은 '봉각효하홍산기(鳳閣曉夏紅山奇), 용지춘수록생파(龍池春水錄生波)'이다.

  • 체화전(體和殿): 익곤궁의 이진원을 위한 정전이었다. 청나라 말기, 저수궁과 익곤궁을 연결하면서 익곤궁의 후전을 천당전으로 바꾸고 체화전이라 불렀다. 면적은 5칸으로 앞뒤로 문이 열리며, 뒤처마는 복도를 나와 노란 유리기와경산 정상이다. 체화전 처마 밑에는 '상봉위림(翔鳳爲林)' 현판이, 양쪽 기둥에는 '구유경광화일월소조(九有慶光華日月所照)가 천지동류(天地同流, 自熙太後)'라는 대련이 걸려 있다. 체화전 명간 안 북쪽 처마 밑에는 자희태후가 제작한 '체일포원(體一包元)' 현판이 남쪽을 향하고 있다. 체화전 뒷마루의 처마 밑에는 자희태후가 제작한 '운윤성휘(雲潤星輝)' 현판이 북쪽으로 걸려 있고, 뒷마루에는 북쪽의 처마 기둥에 '행물생(行物生) 두 칸 선도묘(宣道妙)'와 '일훤우윤만회하천공(日훤雨潤萬會下天功)'이라는 영련(楹聯)이 걸려 있다.

  • 평강실(平康室)익수재(益寿斋): 체화전 앞 동배전은 앞처마 밑에 자희태후가 제작한 '평강실(平康室)' 현판이 걸려 있고, 양옆으로 '금녹춘명화부귀(錦鏽春明花富貴), 낭엽서보죽평안(琅玕書報竹平安)'이라는 대련이 붙어 있다. 체화전 앞 서배전은 앞처마 밑에 '익수재(益壽齋)' 현판이 걸려 있고, 양옆으로는 자희태후가 제작한 '천배헌수제남악(天杯憲壽齊南岳), 성조광휘동북진(聖造光光動北辰)' 대련이 붙어 있다.

3. 1. 익곤문(翊坤門)



익곤궁의 정문으로, 남향이다. 익곤문 안에는 '광명성창(光明盛昌)'이라는 병문이 있었고, 이 글자는 남쪽을 향해 있었다.

익곤궁 앞 동쪽에 있는 동로, 동봉, 동학, 동항아리

3. 2. 익곤궁(翊坤宮)

자금성 내정 서6궁의 하나로 , 시기 후궁들의 거처였다. 1420년(영락 18년)에 지어져 처음에는 '''만안궁(萬安宮)'''으로 불렸다. 1535년(가정 14년)에 '''익곤궁(翊坤宫)'''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청나라가 되어서도 옛 명칭 그대로 사용하였고, 여러 번 수리를 거쳤다. 원래 익곤궁은 이진원이었는데, 청 말기에 익곤궁의 후전을 헐고, 체원전 동서 이방을 각각 한 칸씩 통로로 만들어, 익곤궁과 저수궁이 이어져 남북의 사진원이 되었다.[2]

광서 10년(1884년), 서태후 50번째 생일 때, 저수궁으로 이주하여 체화전에서 하례를 받았다. 광서제의 후궁을 간택하는 일도 체원전에서 거행되었다.[3]

익곤궁 정전 앞 처마 밑에는 익곤궁(翊坤宫)이라는 가파른 현판이 걸려있다. 1741년(건륭 6년), 건륭제영수궁의 현판을 따라 11면 현판을 만들었고, 동6궁, 서6궁은 영수궁을 제외한 11궁의 정전에 각각 걸려있다. 건륭제는 "자계한 후, 천만년이 지나도 제멋대로 움직이거나, 비빈이 다른 궁으로 옮겨가더라도 바꿀 수 없다"라는 명을 내렸다.

지금도 익곤궁은 궁궐 생활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다.

익곤궁의 주요 건축물은 다음과 같다.

  • 익곤궁(翊坤宮) 정전: 면적은 5칸, 유리기와지붕으로 앞뒤로 복도가 있다. 처마 밑에는 두공이, 양방에는 소풍 채화가 그려져있다. 문은 만자금바닥, 오박쥐 수치마판 칸막이 문, 창은 보보금지적창으로 만자단수문(萬字團壽文)을 하고있다. 앞쪽 처마 밑에 '익곤궁'이라는 가파른 현판이 걸려있고, 양 옆으로 '보슬요금번도천세과(寶瑟瑤琴蟠桃千歲果), 기화지초온수사시춘(琪花芝草溫樹四時春)'이라고 써있는 대련이 있다. 앞쪽 복도 안 명간 밖 앞처마 밑에 '이록수후(履祿綏厚)'라는 가로 현판 (자희태후 제작)이 남향으로 걸려있고, 양쪽 대련은 '송창낙춘장(松牖樂春長)은 편안하고 길하며(松牖樂春長既安且吉), 난계계계 이서영(宜書永)을 수이강(壽而康)(蘭陔宜書永曰壽而康)'이라고 한다. 명간 한 가운데에는 지평좌, 병풍, 향로, 궁선이 있고, 그 바로 위에는 '유용덕대(有容德大)' 현판 (자희태후 제작)이 남쪽을 향하고 있다. 명간 동쪽에는 꽃배나무 투조 까치가 매실을 덮고 있어, 동차간과 정간이 구분되어있다. 명간 서쪽에는 꽃배나무 투조 등나무가 가지를 감아 만든 갓이 있어, 정간과 서차간 사이를 가른다. 동차간과 동초간, 서차간과 서초간 사이를 칸막이로 나누었다. 정전 앞 대석 밑에는 동봉, 동학, 동로가 각각 한 쌍씩 설치돼 있다. 푸이는 정전 앞 복도에 그네를 설치했으나, 현재 그네는 철거되고, 그네를 매달은 틀만 남아있다.


3. 3. 연홍전(延洪殿)

익곤궁의 동배전은 면적이 3칸이고 유리기와가 산정되어 있다. 앞처마 밑에는 자희태후가 제작한 '경운재(慶雲齋)' 현판이 있고, 위쪽 정중앙에 '자희황태후 어필지보' 인(印)을 찍었다. 양옆 대련으로는 자희태후가 제작한 '채운보나무 경전둘레(彩雲寶樹瓊田繞), 선하기화벽간향(仙霞琪花碧澗香)'을 잇는다.

3. 4. 원화전(元和殿)



익곤궁의 서배전은 면적이 3칸이고, 유리기와가 산정되어있다. 앞처마 밑에는 자희태후가 제작한 '도덕당(道德堂)' 현판이 걸려있고, 현판 위쪽 정중앙에는 '자희황태후 어필지보(慈熙皇太后御筆之寶)' 인(印)이 있다. 양옆 대련으로는 '봉각효하홍산기(鳳閣曉夏紅山奇), 용지춘수록생파(龍池春水錄生波)'가 있다.

3. 5. 체화전(體和殿)



익곤궁의 이진원을 위한 정전이다. 청나라 말기, 저수궁과 익곤궁을 연결하면서 익곤궁의 후전을 천당전으로 바꿔 체화전이라 불렀다. 면적은 5칸으로 앞뒤로 문이 열리며, 뒤처마는 복도를 나와 노란 유리기와경산 정상이다. 체화전 처마 밑에는 '상봉위림(翔鳳爲林)' 현판이, 양쪽 기둥에는 '구유경광화일월소조(九有慶光華日月所照)가 천지동류(天地同流, 自熙太後)'라는 대련이 걸려 있다. 체화전 명간 안 북쪽 처마 밑에는 자희태후가 제작한 '체일포원(體一包元)' 현판이 남쪽을 향하고 있다. 체화전(體和殿) 뒷마루의 처마 밑에는 자희태후가 제작한 '운윤성휘(雲潤星輝)'라는 현판이 북쪽으로 걸려 있고, 뒷마루에는 북쪽의 처마 기둥에 '행물생(行物生) 두 칸 선도묘(宣道妙)'와 '일훤우윤만회하천공(日훤雨潤萬會下天功)'이라는 영련(楹聯)이 걸려 있다.

3. 6. 평강실(平康室)과 익수재(益寿斋)



체화전 앞에 있는 동배전은 앞처마 밑에 '평강실(平康室)'이라는 현판(자희태후 제작)이 걸려 있고, 양옆으로 '금녹춘명화부귀(錦鏽春明花富貴), 낭엽서보죽평안(琅玕書報竹平安)'이라는 대련이 붙어 있다.

체화전 앞에 있는 서배전은 앞처마 밑에는 '익수재(益壽齋)'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양옆으로는 '천배헌수제남악(天杯憲壽齊南岳), 성조광휘동북진(聖造光光動北辰)'(자희태후 제작)이라는 대련이 붙어 있다.

4. 익곤궁에 거주했던 주요 인물

익곤궁은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에 여러 황족과 후궁들이 거처했던 곳이다.


  • 명나라


연도황제거주 인물비고
1560–1572융경제효정황태후
1581–1620만력제정귀비[5]
1629–1644숭정제원귀비[6]


  • 청나라


연도황제거주 인물비고
1677년 ~ 1722년강희제의비귀인을 거쳐 의빈(宜嫔)으로, 이후 의비(宜妃)로 진봉되었다.
1722년 ~ 1725년옹정제돈숙황귀비귀비였다가 사후 황귀비로 추존되었다.
1735년 ~ 1766년건륭제계황후 휘발나랍씨한비(嫻妃)로 시작하여 한귀비(嫻貴妃)를 거쳐 황귀비로 진봉, 황후 대리직을 수행하다 황후가 되었다. 그러나 총애를 잃고 익곤궁 후전에 구금되었다.
1763년 ~ 1795년돈비
1767년 ~ 1774년경공황귀비
1786년 이전 ~ 1786년건륭제화석화각공주의 장녀코르친탁리극도친왕(科爾沁卓哩克圖親王) 공게라부탄(貢格拉布坦)의 아들인 1등대(一等台) 길림친돌제(吉林親돌濟)에게 시집갔다.
1776년 이전 ~ ?건륭제고륜화효공주
1801년 ~ 1820년가경제안빈
1822년 ~ 1850년도광제향비
?불명상비


4. 1. 명나라

가정제 치세인 1535년에 현재의 이름을 얻었다. 새로운 이름은 곤괘(坤卦중국어)와 일치하며, 이는 건청궁(전통적으로 명나라와 초기 청나라 시대 황후의 거처)의 이름에도 나타나며 "땅의 지배자를 돕는다"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궁궐의 이름은 황후를 보좌하는 후궁의 지위를 나타낸다. 역설적이게도, 이곳은 고위 후궁(귀비, 황귀비 또는 황후)만을 위한 거처는 아니었다.[2]

연도황제황후비고
1560–1572융경제효정황태후
1581–1620만력제정귀비[5]
1629–1644숭정제원귀비[6]


4. 2. 청나라


  • 의비: 초기 직위는 귀인이었다. 강희제 16년(1677년) 8월 의빈(宜嫔)으로 진봉되었고, 강희 20년(1681년)에 의비(宜妃)로 진봉되었다.
  • 돈숙황귀비: 초기 직위는 귀비였다. 옹정제 3년(1725년) 11월 23일 훙거(薨逝)하였고, 사후 황귀비로 추존되었다.
  • 계황후 휘발나랍씨: 옹정제 12년(1734년) 3월, 수녀선발로 뽑혀 홍력의 측복진(側福晉)이 되었고, 그해 11월 8일 혼인하였다. 이듬해 9월 홍력이 즉위하자 한비(嫻妃)로 봉해졌다. 건륭제 10년(1745년) 1월 23일, 한귀비(嫻貴妃)로 진봉되었다. 건륭 13년(1748년) 3월, 효현순황후 부찰씨가 사망하자 한귀비는 황귀비로 진봉되어 황후 대리직을 수행하다가 이듬해 4월 황귀비 책봉례를 거행, 후궁을 통솔하였다. 건륭 15년(1750년) 6월 11일, 효현순황후의 27개월 장례가 끝나고, 7월 10일에 나랍씨를 황후로 봉하고, 8월 2일에 책립의식을 거행하였다. 건륭 30년(1765년)에 머리카락을 자르고 총애를 잃어 익곤궁의 후전에 구금되었다. 이듬해 7월 사망하여 유릉(裕陵) 순혜황귀비원침(純惠皇貴妃園寢)에 묻혔다.[2]
  • 돈비 왕씨: 건륭 41년(1776년)의 기록에 따르면, 다섯 번째 궁인 익곤궁 타탄의 한곳에 다섯 명의 부역을 고용했다. 익곤궁에는 귀인이나 그 이상의 비가 한 명 살고 있고, 그 이상의 비는 7명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한 명의 비가 거주하게 된다. 《첨감저당(添減底檔)》에도 서비, 유비, 영비, 용비에 이어 다섯 번째 서열인 돈비가 이곳에 거주했을 가능성이 크다.
  • 화석화각공주의 장녀: 《궁중잡건(宮中雜件)》에 따르면 익곤궁에 격격(格格)이 2명이 있었다. 익곤궁에 함께 살던 고륜화효공주는 이미 언급이 되었기 때문에, 익곤궁에 사는 다른 격격은 화석화각공주의 장녀를 말한다. 현재 서6궁에 거처하는 격격은 익곤궁 격격밖에 없다는 기록이 있다. 건륭 51년(1786년)까지 익곤궁의 격격은 여전히 익곤궁에 머물다가 코르친탁리극도친왕(科爾沁卓哩克圖親王) 공게라부탄(貢格拉布坦)의 아들인 1등대(一等台) 길림친돌제(吉林親돌濟)에게 하가(下嫁)하였다.
  • 고륜화효공주: 궁중의 기록물에서 익곤궁공주(翊坤宮公主)라고 기록되어있다. 건륭 41년(1776년) 1월 3일 《익곤궁공주 돌잡이 주검지희용(翊坤宮公主周歲抓晬盤之喜用)》의 익곤궁공주는 화효공주를 뜻한다.
  • 안빈 소완과이가씨
  • 상비 뉴호록씨


연도황제황귀비비고
1677년 ~ 1722년강희제의비
1722년 ~ 1725년옹정제돈숙황귀비
1735년 ~ 1766년건륭제계황후[7]1765년 남순(南巡) 중 머리카락을 자른 후, 그녀는 죽을 때까지 이 궁에 갇혔다.
1763년 ~ 1795년돈비[8]1775년 하급 황귀비들을 감독하기 시작했다.
1767년 ~ 1774년경공황귀비
1801년 ~ 1820년가경제안빈[9]그녀는 일등 시녀로서 감시를 받으며 이곳에서 살았다.
1822년 ~ 1850년도광제향비


5. 사건

2013년 5월 4일 오전, 한 남성이 익곤궁에 들어가 맨손으로 정전 유리창을 부수는 사건이 발생했다.[1] 이 남성은 고궁박물관 직원에 의해 15초 만에 제압되었다.[1] 창문이 깨지면서 안에 있던 청나라 시기 유물인 동도금금전화수법인 타종(18세기 영국제, 국가 2급 문화재, 일련번호 故183054)이 떨어져 파손되었다.[1]

사건 직후 유리창은 교체되었고, 파손된 동도금금전화수법인 타종은 문화재 수장고로 보내져 수리를 받았다.[1]

참조

[1] 서적 从北京故宫到避暑山庄/"A review of the Forbidden city in Peking". 山东画报出版社/Shandong Typography.
[2] 웹사이트 Palace of Earthly Honour (Yikungong), Forbidden City, Beijing https://www.travelch[...] 2020-10-01
[3] 웹사이트 翊坤宫 - 故宫博物院 https://www.dpm.org.[...] 2020-10-01
[4] 웹사이트 游客击碎故宫翊坤宫玻璃 致一文物钟表受损(图) - 延展阅读-新华网 http://news.xinhuane[...] 2022-09-11
[5] 서적 "萬曆野獲編·卷三"/"Compilation of Wanli era catastrophes", Volume 3
[6] 서적 《崇禎朝野紀 第五卷》/ "Chongzhen era chronicles", book 5
[7] 서적 《雍和宮滿文檔案譯編》
[8] 서적 《宮中雜件》/"Central Palace records"
[9] 서적 'Draft History of Q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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