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의 역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전학련)은 1948년, 수업료 인상 반대 투쟁을 계기로 결성된 일본 학생 운동의 전국 조직이다. 전후 학원 민주화 투쟁과 학생 자치회 결성을 거치며 세력을 확장했으나, 일본공산당과의 노선 갈등, 60년 안보 투쟁의 실패, 내부 분열 등을 겪으며 여러 파벌로 갈라졌다. 1960년대에는 공산주의자동맹(분트)의 붕괴와 함께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혁공동) 등 신좌익 계열이 주도권을 잡았고, 60년 안보 투쟁, 70년 안보 투쟁,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 등 격렬한 시위를 주도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전공투 운동이 확산되었으나, 70년대 이후 학생 운동이 쇠퇴하면서 전학련의 세력도 약화되었다. 1980년대 이후에는 여러 분파로 나뉘어 명맥을 유지했으며, 1990년대 이후에는 학생 가치관의 다양화, 대학 당국의 관리 강화 등으로 인해 세력이 더욱 감소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 - 스나가와 투쟁
스나가와 투쟁은 1955년부터 1977년까지 도쿄도 스나가와에서 일어난 다치카와 비행장 확장 계획에 대한 주민들의 반대 운동으로, 스나가와 기지 확장 반대 동맹을 중심으로 격렬한 시위와 법정 소송을 거쳐 미군의 기지 확장 중단과 반환을 이끌어낸 평화헌법 수호 및 반미 운동의 상징이다. - 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 - 카로우지 켄타로
1937년 홋카이도 하코다테시에서 태어난 카로우지 켄타로는 홋카이도 대학에서 학생운동에 참여하여 전학련 위원장으로 활동, 공산주의 운동에 관여하다 정치 활동을 중단하고 사업가, 어부 등으로 살다 직장암으로 사망했다. - 전후 일본의 사회 운동 - 안보 투쟁
안보 투쟁은 1960년 기시 노부스케 내각의 미일안전보장조약 개정에 반대하여 일본에서 일어난 대규모 사회 운동으로, 조약 강행 처리와 시위 격화 속에 발효되었고, 이후 일본 정치에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 전후 일본의 사회 운동 - 레드 퍼지
레드 퍼지는 1940년대 후반 미국이 냉전의 영향으로 일본 공산당 세력 확대를 억제하기 위해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인물들을 숙청한 사건이다.
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의 역사 | |
---|---|
기본 정보 | |
명칭 | 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 |
약칭 | 전학련 (全学連) |
영어 명칭 | Zengakuren (All-Japan Federation of Student Autonomies) |
로마자 표기 | Zen'nihon Gakusei Jichikai Sōrengō |
유형 | 학생 조직 |
활동 시기 | 1948년 9월 ~ 현재 |
이념 | 마르크스-레닌주의 공산주의 반제국주의 반자본주의 |
역사 | |
창립 | 1948년 9월 |
분열 시작 | 1960년대 |
주요 활동 | 안보 투쟁 대학 분쟁 나리타 투쟁 |
조직 구조 | |
가맹 조직 | 각 대학의 학생 자치회 |
주요 파벌 | 공산주의자동맹 (분트) 일본공산당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전국위원회 (중핵파) 혁명적노동자협회 (해방파) 제4인터내셔널 일본지부 (JRCL) 마르크스주의청년동맹 (마르청동) |
관련 인물 | |
주요 인물 | 카라사와 슌노스케 시마 시게오 아키타 에이이치 야마모토 요시타카 미야타 카즈오 타지마 히데오 오시마 나기사 |
기타 | |
영향 | 일본의 학생 운동 일본의 신좌파 |
관련 단체 | 민주학생동맹 (민학동) 사회주의학생동맹 (사학동) |
2. 전사(前史)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일본의 학생운동은 궤멸되었으나, 1945년 가을부터 다시 부활했다.[145] 사회과학연구회, 학생도서협의회(훗날의 학생도서협회) 활동, 대학생협 결성 등이 그 시작이었다.[145][146] 1946년 5월, 학도구호회와 문부성이 추진하고 GHQ가 공인한 학생 주택 확보를 위한 학생회관이 설립되었다. 이는 학생들이 학문 접근권, 물자 및 수업 부족, 민주주의 결핍 문제에 직면했기 때문이었다.[145] 근로동원이나 학도출진에서 돌아온 학생들이 주로 운동을 이끌었다.[147]
이러한 움직임과 함께 1945년 9월부터 학생 정치 운동 재건을 위한 학원민주화투쟁이 일어났고,[146] 이는 학생자치회 출현의 계기가 되었다.[148]
2. 1. 학원 민주화 투쟁과 학생 자치회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일본의 학생운동은 궤멸되었으나, 1945년 가을부터 다시 부활했다.[145] 사회과학연구회, 학생도서협의회(훗날의 학생도서협회) 활동, 대학생협 결성 등이 그 시작이었다.[145][146] 1946년 5월, 학도구호회와 문부성이 추진하고 GHQ가 공인한 학생 주택 확보를 위한 학생회관이 설립되었다. 이는 학생들이 학문 접근권, 물자 및 수업 부족, 민주주의 결핍 문제에 직면했기 때문이었다.[145] 근로동원이나 학도출진에서 돌아온 학생들이 주로 운동을 이끌었다.[147]이러한 움직임과 함께 1945년 9월부터 학생 정치 운동 재건을 위한 '''학원민주화투쟁'''이 일어났고,[146] 이는 학생자치회 출현의 계기가 되었다.[148] 미토고등학교에서 동맹휴학과 기숙사 농성 투쟁으로 군국주의 교장 파면과 진보 교수 복직을 이뤄낸 것을 시작으로, 여러 대학에서 학원 민주화 투쟁이 벌어지면서 사회과학연구회나 자치회가 결성되었다.[148]
학교 |
---|
우에노고등여학교 |
홋카이도 대학 |
도쿄 공업대학 |
구제시즈오카고등학교 |
와세다 대학 |
도쿄 여자대학 |
구제사가고등학교 |
구제동경상과대학 |
니혼 대학 예과 |
호세이 대학 |
리츠메이칸 대학 |
릿쿄 대학 |
구제오사카상과대학 |
교토 대학 |
주오 대학 |
학생들은 군국주의 교육 비판, 민주주의로 전향하는 교사의 무절제함 비판 등을 목표로 했고, "학원보국단 해체, 전범 교사 추방, 민주 교원 복귀, 학생 조직 결성" 등의 구호를 내걸었다.[146] 이를 통해 나타난 학생 자치회들은 전전의 개인 가맹 단체와 달리, 전교생 전원 가맹을 지향하는 새로운 자치회 제도를 확립하고자 했다.[146] 1946년 5월, 와세다 대학 학생 대회가 자치회 규약을 가결하고 학교 당국도 승인하면서 전국 최초로 전교생 가입 학생 자치회가 결성되었다.[146]
이 시기 운동은 전전의 남성, 국립대학 중심 학생 운동과 달리 사립, 여자고등학교에서도 발생했다는 특징이 있다.[148] GHQ의 방임으로 이 시기 투쟁은 학생 측 승리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고, 운동을 위한 언론으로서 학생 신문과 잡지가 잇따라 부활했다.[148] 다키카와 유키토키, 다나카 고타로, 스에카와 히로시 등 전시 중 공직에서 물러났다가 민주화 바람 속에 대학에 복귀한 교수진이 학생과 대립하기도 했다.[148]
2. 2. 일본공산당의 개입과 갈등
전후 학생 운동 초기에는 학교로 돌아간 학생들의 순수한 반발과 비판이 중심이었지만, 이후 부활한 일본 공산당에 참여한 학생 당원과 신파층이 운동에 박차를 가했다[2][5]。 그들은 조직자로서 생활과 지식의 곤궁에 시달리는 학생들을 정력적으로 조직하여 운동을 확대해 나갔다[2][5]。그러나, 일본 공산당 중앙과 학생 당원 사이에는 이 시점에서부터 갈등이 생겨나고 있었다[5]。 당 중앙은 학생의 대중 운동에 대한 이론적인 평가나 위치를 부여할 수 없었고, 학생을 지도할 수 있는 인재도 없었다. 당시 당의 공식 견해로는, 학생은 "계급적 부동 분자"이며, 프롤레타리아트에 지도받고 나서야 비로소 계급 투쟁에 기여하는 "수상쩍은" 존재였다[5]。 그 때문에, 당 중앙은 학생 운동의 폭발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이는 훗날 학생 당원과의 갈등으로 이어졌다[5]。
당은 학생 조직으로서 1946년 2월 일본 청년 공산 동맹을 결성했고[6], 청공 동대반을 시작으로 전국 대학에 대학반·사연을 결성해 나갔다[2]。 1946년까지 "학생 연락 협의회"라는 블록 조직이 생겨났고, 이는 "학생 정치 협의회"와 같은 전국적 조직으로 발전해 나갔다[2]。 같은 달 학생 생활 협의회도 결성되었다[6]。 1946년 5월 26일, 교바시 공회당에서 학생 사회 과학 연구회 연합회 주최로 전후 최초의 타키가와 사건 기념 전국 대회가 열렸고, 학생 자치 조직 확립, 학생 민주화 전선 즉시 결성 등이 결의되었다[6]。 이를 바탕으로 6월에 학생 자치회 연락회가 조직되었다[6]。 와세다 대학의 전학 자치회 결성을 모델로 11월, 학생 자치회 연락회는 전국 학생 자치회 연합으로 개편되어 발족했다[2][6]。
1946년 가을, 전산 쟁의를 경계로 생산 관리 투쟁은 탄압으로 인해 하강세를 보였고, 노동 운동은 일본 공산당 지도 하의 전일본 산업별 노동 조합 회의(산별 회의)에 조직된 파업 투쟁으로 진행되었다[5]。 이 과정에서 학생 당원들은 2·1 제네럴 스트라이크 패배 때까지 노동 운동에 조직원으로 동원되었고, 학생 사회에서의 운동은 뒷전으로 밀려났다[5]。 제네럴 스트라이크 전날인 1월 31일, "인민 광장"이라고 불리던 황거 앞 광장에서 관동 연합 학생 대회를 열어, 40개교 2만 9천 명에서 3만 명이 데모를 벌였다[2][6]。
2·1 제네럴 스트라이크 패배 직후인 2월 7일, 점령군 민간 정보 교육국(CIE)은 "학생이 자치의 실험실에서 벗어나 학교 행정에 부당 개입하는 것은 배제되어야 한다"는 각서를 발표했다[5]。 이는 GHQ가 지금까지의 방침을 전환하여, 문부성의 정책에 동조하여 학생 자치를 "실험실"에 억누르는 것을 지지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각 대학에서는 학생 처분, 반정부적인 교직원 배제가 이루어졌고, 이를 계기로 학생 운동은 전후 최초의 퇴조기를 맞이하게 된다[5]。 이러한 패배로 인한 좌절감과 탄압의 시작은 학생활동가에게도 큰 영향을 미쳐, 수업료 인상 반대 학생 대회조차 무산되는 상황도 나타났다[2]。 이 기간 동안, 일본 공산당은 학생 당원에게 "학원으로 돌아가라"는 소환령을 내렸다[7]。
3. 전학련 결성과 초기 활동 (1948년 ~ 1950년대)
전학련은 1948년 9월 18일부터 사흘간 도쿄 제2사범학교(도쿄 대학 38번 교실 사용이 거부되어 제2사범 여자부 강당으로 변경[10]), 와세다 대학, 도쿄 상과 대학에서 전국 연맹 결성 대회를 열어 결성되었다. 145개 학교의 대의원 250명이 참가했다.[6][7]
이 대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슬로건을 채택했다.[6][7]
# 교육의 파쇼적 식민지 재편 반대
# 학문의 자유와 학생 생활 옹호
# 학생 아르바이트의 저임금과 스캡 반대
# 파시즘 반대, 민주주의를 지켜라
# 청년 전선의 즉시 통일
# 에로그로 문화 배격, 민족·문화를 지켜라
# 학생의 정치 활동의 완전한 자유
초대 중앙 집행 위원장은 다케이 아키오(도쿄 대학)이었고, 부위원장은 와세다 대학 학생, 서기장은 도쿄 대학 학생이었다.[6] 사무국은 도쿄 대학에 설치되었다.[10] 도쿄 대학과 와세다 대학에서 집행부가 선출된 것은 일본공산당 세포가 강력했고 당의 이론과 현상 분석이 철저했기 때문이다.[10] 1948년 말 전학련에는 266개교, 222,581명이 가입했다.[8]
1949년 4월, 요시다 내각은 단체 등 규제령을 공포·시행하여 레드 퍼지를 시작했다.[7] 점령군도 반공 정책을 강화하고 학생 운동을 탄압했다. 7월 19일 니가타 대학을 시작으로, CIE 고문 일즈를 전국 대학에 파견하여 "적색 교관과 파업 학생 추방"을 주장했다(일즈 성명).[7][15]
일본공산당은 학생들에게 "동맹 등교"를 명령했고, 전학련은 "인민과 함께 교육을 방위한다"는 명목으로 총파업을 결의했다.[12] 각 대학에서 일즈 성명에 대한 반대 투쟁이 일어났고, 전학련은 전면 강화, 전 점령군 철수, 일즈 성명 반대, 레드 퍼지 반대를 주장하며 파업을 벌였다.[7]
1950년 5월 28일부터 5월 30일까지 열린 전학련 제2회 대회에서는 스톡홀름 호소 백만 명 서명을 중심으로 한 평화 옹호 운동, 군사 기지 반대, 전면 강화 및 전 점령군 철수 투쟁, 일즈 성명 철회 및 레드 퍼지 반대 투쟁, 수업료 및 육영 자금 등 부분적 요구 투쟁, 학생 전선 통일과 노학 공동 투쟁 강화를 방침으로 결정하고, 국제학련 가입 절차를 밟았다.[7][10][15] 8월 전학련은 단체 등 규제령 적용 대상이 되었다.[7]
1950년 한국 전쟁 발발과 함께 데모가 금지되고 레드 퍼지가 진행되자, 전학련은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평양 방송을 통해 조선 학생들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등 활동을 펼쳤다.[7] 9월부터 10월까지는 레드 퍼지 반대를 위해 "9·30 고마바"를 비롯한 시험 거부 및 총파업을 실시했다.[7][15] 각 대학 당국은 록아웃(lockout, 직장 폐쇄)으로 경찰과의 충돌을 피하려 했으나, 반대 운동은 잦아들지 않았고, 아마노 문상은 결국 대학 내 레드 퍼지를 철회했다.[7][15]
이 과정에서 와세다대학 사건 처분, 중앙대학 탈퇴 등으로 전학련 투쟁은 표면적인 화려함을 잃어갔다.[14] 전국적으로 2만 명 이상이 레드 퍼지를 당했지만, 학생 운동은 대학의 치외법권적 지위와 운동의 폭발적 고양으로 인해 승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7][15]
3. 1. 전학련 결성 (1948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궤멸 상태였던 학생운동은 1945년 가을부터 다시 활발해졌다. 사회과학연구회, 학생도서협의회(후의 학생도서협회) 등의 활동과 대학생협 결성이 그 시작이었다.[1][2] 1946년 5월에는 학도구원회와 문부성의 추진으로 연합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GHQ)의 공인을 받아 학생들의 주택 확보를 위한 학생회관이 설립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학생들이 학문에 접할 기회, 물자와 수입, 민주주의의 결핍이라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으며, 근로동원이나 학도출진에서 학교로 돌아온 학생들이 주역이었다.[1][3]이러한 생활 개선 움직임과 함께 학생들의 정치 운동도 재건되어, 1945년 9월부터 '''학원민주화투쟁'''이 일어났고, 이는 학생자치회 출현의 계기가 되었다.[2][4] 미토 고등학교에서 군국주의 교장 해임 및 진보적 교수 복직을 요구하는 파업과 기숙사 농성 투쟁이 성공한 것을 시작으로, 우에노 고등여학교, 도쿄 물리학교, 홋카이도 대학 등 여러 대학에서 학원 민주화 투쟁이 벌어졌고, 그 과정에서 사회과학연구회나 자치회가 결성되었다.[2][4] 이들은 군국주의 교육을 비판하고 민주주의로의 전환에 소극적인 교사들을 비판했으며, "학원 보국단 해체, 전범 교사 추방, 민주적 교원의 복귀, 학생 조직의 결성" 등을 요구했다.[2] 이 과정에서 나타난 학생자치회는 전 학생의 의무 가입을 통한 새로운 자치회 제도의 확립을 목표로 했다.[2] 1946년 5월, 와세다 대학 학생 대회가 자치회 규약을 가결하고 당국이 이를 승인하면서 전국 최초의 전원 가입 학생자치회가 결성되었다.[2]
이 시기 학생운동은 이전의 남성, 국립대학 중심에서 벗어나 사립, 여자 학교에서도 활발하게 일어났다는 특징이 있다.[4] GHQ의 지원으로 학생 측이 승리하는 경우가 많았고, 운동을 위한 언론으로서 학생 신문과 잡지가 부활했다.[4] 다키가와 유키토키 등 전시 중 공직에서 물러났다가 민주화와 함께 대학에 복귀한 교수진이 학생들과 대립하는 모습도 나타났다.[4]
1947년 동안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수업료 폭등과 생활고에 대한 반대 투쟁이 일어나면서 학생 운동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6]
전국학생자치회연합은 1948년 4월 전국 대표자 회의에서 "수업료 인상안 철회, 미납 체제 강화, 문교 예산 및 육영 자금 증액"을 결의하고, 수업료 인상이 학생 생활을 압박하고 대학 교육을 부유층 자녀만의 것으로 만들 것이라고 주장했다.[6] 당시 학생들은 학비를 마련할 여력이 없었고, 아르바이트 자리도 부족한 상황이었다.[8] 이에 학생 운동은 "미납 운동"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5월 25일, 관동학생자치회연합은 "교육 부흥 선언"을 발표했고, 6월 1일에는 국립대학고등전문학교 자치회 연맹과 공동으로 히비야 공회당에서 교육 부흥 학생 궐기 대회를 열어 6천 명의 학생들이 토의하고 동맹 휴학을 결의했다.[9] 이를 계기로 전국 관공립 대학 고등 자치회 연락회가 결성되었고,[7] 전국 대학에 수업료 인상 반대 파업과 시위가 확산되었다.[6] 도쿄에서는 연일 시위가 이어졌고, 26일부터는 114개교 20만 명이 참가하는 전국 파업에 돌입하는 등 전후 학생 운동 사상 최대 규모로 미납 투쟁이 격화되었지만,[7] 문부성의 교섭 중단과 국회에서의 예산 통과로 학비의 3배 인상을 막지 못하고 종결되었다.[6] 그러나 이 투쟁을 통해 학생 운동은 반동 교육 정책 타파라는 질적 전환을 이루었고, 학생들은 전국적인 연대가 승리를 가져올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6]
1948년 7월 3일, 58개교가 참가하는 학생 운동의 전국적 통일 조직 결성을 위한 준비 회의가 열렸고, 7월 6일에는 138개 대학·고등전문학교 대표 400명이 도쿄 대학에서 회의를 열어 '''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전학련) 결성을 결정했다.[6] 9월 18일부터 사흘간, 도쿄 제2사범(도쿄 대학 38번 교실 사용이 거부되어 제2사범 여자부 강당으로 변경), 와세다 대학, 도쿄 상과 대학에서 전국 연맹 결성 대회가 열렸고, 145개교의 대의원 250명이 참가했다.[6][7]
이 대회는 다음 슬로건을 채택했다.[6][7]
# 교육의 파쇼적 식민지 재편 반대
# 학문의 자유와 학생 생활 옹호
# 학생 아르바이트의 저임금과 스캡 반대
# 파시즘 반대, 민주주의를 지켜라
# 청년 전선의 즉시 통일
# 에로그로 문화 배격, 민족·문화를 지켜라
# 학생의 정치 활동의 완전한 자유
이 결성 대회에서 선출된 중앙 집행 위원장은 다케이 아키오(도쿄 대학)이었고, 부위원장은 와세다 대학 학생, 서기장은 도쿄 대학 학생이었다.[6] 사무국은 도쿄 대학에 설치되었다.[10] 도쿄 대학과 와세다 대학에서 집행부가 선출된 것은 공산당 세포가 강력했고 당의 이론과 현상 분석이 철저했기 때문이며, 이후에도 역대 전학련 지도부에 양교 출신자가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10] 1948년 말 전학련에는 266개교, 222,581명이 가입했다.[8]
3. 2. 반(反)레드퍼지 투쟁과 한국전쟁 반대 운동
1949년 4월, 요시다 내각은 단체 등 규제령을 공포·시행하여 레드 퍼지를 시작했다.[7]。점령군도 반공 정책을 강화하고 학생 운동을 탄압했다. 7월 19일 니가타 대학을 시작으로, CIE 고문 일즈를 전국 대학에 파견하여 "적색 교관과 파업 학생 추방"을 주장했다(일즈 성명).[7][15]。
일본공산당은 학생들에게 "동맹 등교"를 명령했고, 전학련 중앙투쟁위원회는 "인민과 함께 교육을 방위한다"는 명목으로 총파업을 결의했다.[12]。각 대학에서 일즈 성명에 대한 반대 투쟁이 일어났고, 전학련은 전면 강화, 전 점령군 철수, 일즈 성명 반대, 레드 퍼지 반대를 주장하며 파업을 벌였다.[7]。
1950년 5월 28일부터 5월 30일까지 열린 전학련 제2회 대회에서는 스톡홀름 호소 백만 명 서명을 중심으로 한 평화 옹호 운동, 군사 기지 반대, 전면 강화 및 전 점령군 철수 투쟁, 일즈 성명 철회 및 레드 퍼지 반대 투쟁, 수업료 및 육영 자금 등 부분적 요구 투쟁, 학생 전선 통일과 노학 공동 투쟁 강화를 방침으로 결정하고, 국제학련 가입 절차를 밟았다.[7][10][15]。이러한 반대 자세로 인해 8월 전학련은 단체 등 규제령 적용 대상이 되었다.[7]。
1950년 한국 전쟁 발발과 함께 데모가 금지되고 레드 퍼지가 진행되자, 전학련은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평양 방송을 통해 조선 학생들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등 활동을 펼쳤다.[7]。9월부터 10월까지는 레드 퍼지 반대를 위해 "9·30 고마바"를 비롯한 시험 거부 및 총파업을 실시했다.[7][15]。각 대학 당국은 록아웃(lockout, 직장 폐쇄)으로 경찰과의 충돌을 피하려 했으나, 반대 운동은 잦아들지 않았고, 아마노 문상은 결국 대학 내 레드 퍼지를 철회했다.[7][15]。
이 과정에서 와세다대학 사건 처분, 중앙대학 탈퇴 등으로 전학련 투쟁은 표면적인 화려함을 잃어갔다.[14]。전국적으로 2만 명 이상이 레드 퍼지를 당했지만, 학생 운동은 대학의 치외법권적 지위와 운동의 폭발적 고양으로 인해 승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7][15]。
1949년 11월 2일부터 11월 3일까지 오쿠마 강당에서 열린 제3회 대회에서는 일본공산당 중앙과 전학련 간의 갈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간토 대의원의 70%(전체 대의원의 40%)가 일본공산당의 대회 중지 지시를 받고 불참했다.[10]。
4. 60년 안보 투쟁과 분열 (1960년대)
1960년 일본에서 미일 안보 조약 개정에 반대하여 전학련이 격렬한 투쟁을 전개한 것을 60년 안보 투쟁이라고 한다. 이 과정에서 가바 미치코가 사망하기도 했다.
60년 안보 투쟁 이후 전학련은 여러 분파로 분열되었다. 주요 분파로는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전국위원회(중핵파), 혁명적 마르크스주의파(혁마르파), 사회주의 학생 동맹(사학동) 등이 있었다.
4. 1. 60년 안보 투쟁의 전개
1960년 일본에서 미일 안보 조약 개정에 반대하여 전학련은 격렬한 투쟁을 전개했다. 전학련은 국회 돌입 시위, 가두 시위 등 적극적인 투쟁 방식을 택했다.이 과정에서 가바 미치코가 사망하는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4. 2. 분트(공산주의자동맹)의 붕괴와 전학련의 분열
60년 안보 투쟁 이후 공산주의자동맹(분트)은 붕괴되었고, 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전학련)은 여러 분파로 분열되었다. 이러한 분열은 각 분파의 이념적 지향점과 주요 활동, 그리고 분파 간의 갈등 양상에 따라 진행되었다. 주요 분파로는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전국위원회(중핵파), 혁명적 마르크스주의파(혁마르파), 사회주의 학생 동맹(사학동) 등이 있었다. (요약 참조)5. 전공투 운동과 70년 안보 투쟁 (1960년대 후반 ~ 1970년대)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에 걸쳐 전학련을 중심으로 한 일본 학생운동은 전학공투회의(전공투) 운동과 70년 안보 투쟁으로 대표된다.
1968년부터 본격화된 전공투 운동은 베트남 전쟁 반대, 대학 운영의 민주화 요구 등 다양한 사회적 이슈를 제기하며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특히, 1967년 10월 8일 사토 에이사쿠 총리의 남베트남 방문을 저지하기 위한 하네다 사건은 학생운동이 헬멧과 각목을 사용한 무장 투쟁으로 발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후 사세보 엔터프라이즈 기항 저지 투쟁 등 격렬한 시위가 이어지면서 70년 안보 투쟁의 전초전으로 평가받는다.
1970년 미일안전보장조약 자동 연장을 앞두고 일본 학생운동은 최고조에 달했다. 이 시기 학생운동은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과 깊이 연계되었으며, 국제 정세에 대한 학생들의 비판적 인식을 반영한다. 학생들은 국내 정치 문제뿐만 아니라 미국의 대외 정책에 대한 비판 등 국제적인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5. 1. 전공투(전학공투회의) 운동의 확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궤멸되었던 학생운동은 1945년 가을부터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1] 사회과학연구회, 학생도서협의회(후의 학생도서협회) 등의 활동과 대학생협의 결성이 그 시작이었다.[1][2] 1946년 5월, 학도구원회와 문부성의 추진으로 연합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GHQ)의 공인을 받아 학생들의 주택 확보를 위한 학생회관이 설립되었다. 이는 당시 학생들이 학문에 접할 기회, 물자와 수입, 민주주의의 결핍이라는 문제의식을 가졌기 때문이었다.[1] 근로동원이나 학도출진에서 학교로 돌아온 학생들이 그 주역이었다.[3]이러한 생활 개선 움직임과 함께 학생들의 정치 운동도 재건되어, 1945년 9월부터 '''학원민주화투쟁'''이 일어났고,[2] 이는 학생자치회의 출현을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4] 미토 고등학교에서 군국주의 교장 해임과 진보적 교수 복직을 요구하는 파업과 기숙사 농성 투쟁으로 교장 등이 해임되고 처분 중인 교수가 복직된 것을 시작으로,[6] 우에노 고등여학교, 도쿄 물리학교, 홋카이도 대학, 도쿄 공업대학, 시즈오카 고등학교, 와세다 대학, 도쿄 여자 대학, 사가 고등학교, 도쿄 산업대학, 니혼 대학 예과, 호세이 대학, 리츠메이칸 대학, 릿쿄 대학, 오사카 상과대학, 교토 대학, 주오 대학 등에서 학원 민주화 투쟁이 벌어졌고,[2] 그 과정에서 사회과학연구회나 자치회가 결성되었다.[4] 이들은 군국주의 교육 비판, 민주주의로의 전환에 따른 교사들의 무절제 비판을 목표로 하였으며, "학원 보국단 해체, 전범 교사 추방, 민주적 교원의 복귀, 학생 조직의 결성" 등의 구호를 내걸었다.[2] 여기서 나타난 학생자치회는 전전의 개인 가입 단체와 달리, 전 학생의 전원 가입을 통한 새로운 자치회 제도 확립을 목표로 했다.[2] 1946년 5월, 와세다 대학 학생 대회가 자치회 규약을 가결하고 당국도 이를 승인하면서 전국 최초의 전원 가입 학생자치회가 결성되었다.[2]
이 시기 운동의 특징은 전전의 남·국립대학 중심 학생운동과 달리 사립·여자 학교에서도 발생했다는 점이다.[4] GHQ의 지원으로 이 시기 투쟁은 학생 측이 승리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러한 투쟁 과정에서 운동을 위한 언론의 장으로서 학생 신문·잡지가 잇따라 부활했다.[4] 그 외에도 다키가와 유키토키, 다나카 고타로, 스에카와 히로시 등 전시 중에 공직에서 물러났다가 민주화와 함께 대학에 복귀한 교수진이 학생들과 대립하는 모습도 보였다.[4]
5. 2. 70년 안보 투쟁과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
1970년 미일안전보장조약 자동 연장을 앞두고 일본 학생운동이 격화되면서 70년 안보 투쟁이 나타났다. 이 시기 학생운동은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과 연계되어 진행되었으며, 이는 국제 정세에 대한 학생들의 비판적 인식을 반영한다.1967년 10월 8일, 사토 에이사쿠 총리의 남베트남 방문을 저지하기 위한 하네다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학생운동이 처음으로 헬멧과 각목을 사용한 무장 투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학생들은 사세보 엔터프라이즈 기항 저지 투쟁 등에서 격렬한 시위를 이어갔다. 이러한 투쟁들은 70년 안보 투쟁의 전초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시기 학생운동은 단순히 안보 조약 반대에 그치지 않고,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 미국의 제국주의적 정책에 대한 비판 등 국제적인 문제로까지 확장되었다. 이는 학생운동이 국내 정치 문제뿐만 아니라 국제 정세에도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했음을 보여준다.
5. 3. 학생운동의 쇠퇴와 내부 항쟁
1950년대 일본공산당(일공)의 급진적인 무장 투쟁 노선은 학생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야마무라 공작대, 중핵 자위대와 같은 조직이 창설되었고, 학생들은 농촌 게릴라전에 참여했다.[16] 그러나 이러한 노선은 대중과의 연대 부족으로 학생 운동의 쇠퇴를 가져왔다.[20] 교토대 천황 사건, 도쿄대 포포로 사건 등이 이 시기에 발생했다.[16][20]1952년, 전학련은 극좌 모험주의 노선으로 전환했다.[21] 타마이 히토시를 위원장으로 하는 새 집행부가 선출되었고, 이전 지도부는 제명되었다.[21][24] 화염병 투쟁이 전개되었으나, 대중의 희생과 탄압을 초래했고, 많은 학생들이 노선에 반대하며 이탈했다.[21] 1953년 이후, 극좌 노선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지만, 여전히 섹트주의와 '스파이 사냥'이 만연했다.[24]
1955년, 일본공산당은 '''제6회 전국협의회'''(6전협)에서 무장 투쟁 노선을 비판했지만, 이는 "혁명은 가깝다"고 믿었던 활동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16][21] 학생들은 혼란에 빠졌고, 일부는 신경쇠약이나 자살을 선택하기도 했다(육전협 노이로제).[21][26][27] 전학련은 "자치회 서비스 기관론"을 내세우며 페스티벌을 개최하고, 화장실에 비누를 비치하는 등의 활동을 했지만, 많은 학생들은 따르지 않았다.[16][26][28]
1956년, 전학련은 다시 대중적 정치 운동 노선으로 전환했다.[16] 스나가와 기지 반대 투쟁은 학생 운동 재기의 계기가 되었다.[16][29] 그러나 스나가와 투쟁의 평가를 둘러싸고 지도부 간의 갈등이 발생했고, 헝가리 사건과 일본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의 발족은 학생들의 자립적인 운동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29]
6. 1980년대 이후의 전학련
경직법 투쟁이 반대파의 승리로 끝난 후, 일본 정부는 미일 안전 보장 조약 개정에 나섰다.[40] 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전학련)은 1959년 4월 2일 안보 개정 저지 청년 학생 공투 회의(청학 공투) 결성에 참여했다.[40] 전학련 내부에서는 안보 개정을 일본 제국주의 부활로 보는 중집파와 대미 종속을 심화시킨다고 보는 일공계로 나뉘었고, 중집파도 혁공동계와 공산동계로 대립했다.[40] 1959년 6월 5일 제14회 대회에서 가라시 겐타로를 위원장으로 선출하고 중집을 공산동계가 독점했으며, 사학동 내에서도 공산동이 주도했다.[40] 이 대회에서는 가라시 겐타로, 시미즈 다케오 등 평균 21세의 젊은 지도부가 구성되었다.[22] 일공계 학생들은 전학련 지도부를 "학생 전선을 평화 민주 세력의 전선에서 고립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비판했다.[41] 1959년 8월 26일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혁공동)이 분열(제2차 분열)했고, 혁공동 전국위는 공산동과 손을 잡고 주류파에 잔류했다.[40] 1959년 11월 27일, 일본 노동 조합 총평의회 계열 조합원 3만 명과 학생 2만 명이 미일 안보 조약 저지 전국 통일 행동 데모를 개최했다. 이 중 2만 명의 학생들이 국회에 들어가 집회를 열었고, 학생과 경찰대와 충돌하여 양측에 28명의 중상자, 730명의 경상자가 발생했다.[42][43]
1960년 1월 16일, 전권단 도미 저지를 위해 하네다 공항 로비를 점거하여 가라시 겐타로 등 76명이 체포되었다.[40] 이 일은 비판을 받았지만, 동시에 안보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높이는 역할도 했다.[44] (이에 영향을 받아 일본 사회주의 청년 동맹(사청동) 전국 학생반 협의회와 마르크스주의 학생 동맹(마르학동)이 결성되었다.[44]). 1960년 2월 제22회 중앙위원회에서는 도쿠에 가즈오 등 8명의 혁공동 간사이파계 중집이 파면되었고, 3월 16일부터 17일에 걸쳐 열린 제15회 임시 전국 대회에서는 혁공동 간사이파와 일공계 대의원을 파면하고 공산동과 소수의 혁공동 전국위에 의한 지배를 확립했다.[40] 이에 반주류파는 '''도쿄도 자치회 연락 회의'''(도자련)를 결성하고 전학련에 대항하는 운동을 전개했다.[40] 1960년 4월 10일, 일공 항구 구 지구위원회가 조직째 공산동에 가입했다.[40] 4월 26일, 국회 앞 바리케이드 돌파 투쟁(4.26 국회 돌입 투쟁)으로 가라시 겐타로가 체포되었다.[45]
1960년 4월에 전학련 주류파가 총파업을 단행했지만, 5월 20일 새벽에 신 안보 조약이 강행 채결되었다.[40] 강행 채결 이후, 거리에는 연일 데모 인파가 넘쳐났고, 6월 10일에는 노동자와의 공투로 하기티 사건, 6월 15일 제18차 통일 행동일에는 전학련 국회 돌입 사건이 발생했다.[40][44] 174명의 체포자를 낸 이 사건으로, 가바 미치코가 사망하는 비극도 일어났다.[40] 6월 18일, 투쟁은 정점에 달했지만, 신 안보 조약이 승인되었다.[40][44]
60년 안보 투쟁에서 분트 전학련의 무방침과 "자멸 전략"은 기존 좌익보다 "한 걸음만 왼쪽"을 지향했기 때문에 발생했다.[22] 전학련 내부에서도 이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22] 60년 안보와 분트 전학련의 출현은 일본의 계급 투쟁에 대해 "전위당 신화의 붕괴"를 알리는 역할을 했다.[46] 요시모토 다카아키는 훗날 분트 전학련이 전전파의 지도하는 "의제 전위"에 스스로 싸우고, 투쟁을 방향 짓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완벽하게 드러냈다고 평가했다.[46]
1960년 7월 4일부터 7일, 전학련 제16회 대회는 주류파가 일공계, 혁공동 간사이파계를 배제했기 때문에 분열되었고, 일공계의 반주류파 학생들은 전국 조직으로서 '''전국 학생 자치회 연락 회의'''(전자련)를 결성했다.(의장 구로하네 스미히사, 부의장 노구치 다케히코, 사무장 마쓰모토 준이치)[40][47] 공산동은 7월 전국 대회에서 해체 상태에 있는 것이 밝혀졌고, 전학련 서기국 그룹의 프로 통파, 노대 그룹의 전선파, 도쿄대 세포 등의 혁통파, 공산주의 깃발파로 분열, 안보 분트는 붕괴되었다.[40][44]
6. 1. 1980년대의 침체
1960년 안보 투쟁의 패배 이후, 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전학련)의 운동은 급속히 정체기를 맞이했다. 중심 활동가들 사이에서는 "소모"되어 전선에서 이탈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대중들 역시 대규모 투쟁에 대한 피로감을 느끼면서 운동은 더 이상 활기를 띠지 못했다.[49] 1961년 봄 정치적 폭력 행위 방지 법안 반대 투쟁으로 학생 운동이 다시 고양되는 듯했으나, 60년 안보 투쟁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약했다.[49]1960년에 내걸었던 "이케다 내각 타도" 슬로건 아래에서의 투쟁은 전학련의 방침 혼선과 활동가들의 과격한 선동으로 인해 오히려 혼란이 심화되었다.[49]
공산당계 전학련은 1987년 국제학생연맹 대회에서 27년 만에 서기장 지위를 회복하고 서기국에 대표를 보내는 등[70] 일정한 조직을 유지했지만, 1983년 3월 제34회 정기 대회에서 교섭 수를 하향 수정해야 했다.[69] 1980년대 국립 대학에서 자치회비 대리 징수 제도가 폐지되면서 자치회비 부족으로 전학련에 대한 단위 자치회의 기관지 대금 상납이 불가능해졌다.[69]
1980년대 각 파의 전학련 대회 참가자는 세 자릿수로 떨어졌고, 1984년 시점 가맹 수는 다음과 같았다.[69]
파벌 | 가맹 학교 수 | 가맹 자치회 수 |
---|---|---|
일본공산당 | 171 | 362 |
혁마르파 | 16 | 25 |
중핵파 | 5 | 10 |
청해파 | 4 | 10 |
분트계 | 3 | 5 |
제4인터계 | 2 | 2 |
6. 2. 1990년대 이후의 분열과 재편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을 칭하는 단체는 4개가 존재했다.[53]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걸쳐 혁마르파(革マル派) 계열 전학련은 세력을 유지했지만, 고쿠가쿠인 대학, 센슈 대학 등에서 체육회 학생에 의한 혁마르파 계열 집행부의 임원 취임 저지, 류큐 대학 자치회 선거에서 전학련 탈퇴를 공약으로 내세운 학생의 입후보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일반 학생들의 반발이 현저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71]1999년, 상위 단체인 혁로협(革労協) 하자마파(狭間派)의 분열과 함께 해방파 계열 전학련이 혁로협 현대사파(주류파)와 혁로협 적새사파(반주류파) 두 개로 분열되었다.[71] 이후, 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을 자칭하는 단체가 5개로 존재하게 되었다.[71]
- '''일본공산당계 전학련'''
- 1997년경, 일본공산당 계열의 전학련은 약해 에이즈 소송 지원과 재해 봉사 활동을 통해 많은 학생들을 확보했다.[44]
- '''혁마르파계 전학련'''
- 오쿠시마 타카야스가 총장으로 취임한 1994년 이후, 와세다 대학은 혁마르파 세력의 학내 배제에 나섰다.[44] 1995년, 상학부 자치회가 공인 취소 및 자치회비 대리 징수 폐지된 것을 시작으로, 1997년에는 와세다제 프로그램의 광고 수입을 혁마르파의 지배하에 있는 와세다 대학 신문회에 빼돌린 것이 발각되어 와세다제를 중지했다.[44] 상학부 자치회의 공인 취소는 자금 고갈을 의미하기 때문에, 전학련은 연일 항의를 벌였으며, 자치회비 인도를 요구하는 소송도 제기했다.[44] 이에 맞서 혁마르파는 와세다 대학 학생부장 자택의 전화를 도청하는 사건(와세다 대학 학생부장 자택 도청 사건)을 일으켰다.[44] 1999년 이후에는, 혁마르파 계열이 1960년대 이래로 지배하며 자치회 보조금을 혁마르파 계열의 더미 서클에 분배하기 위해 사용해 온 문화 단체 연합회에 대해, 와세다 대학 당국은 일체의 교섭을 거부하기로 결정했다.[44]
- 2000년, 와세다 대학에서 "자치회 해체"에 대한 비판 운동을 하는 한편, 사회과학부 자치회와 문화단체 연합회를 사수하기 위해 대학 측의 자치회비 사용 감사를 수용하는 등 강온 양면의 대항책을 펼쳤다.[44]
- 2001년, 와세다 대학에서 신 학생회관이 완공됨에 따라 제1·제2 학생회관 등에 퇴거 명령을 내린 것에 대해 7월 31일부터 8월 1일에 걸쳐 학내와 대학 주변에서 일반 학생을 끌어들인 항의 행동을 실시했다.[44]
- 2002년, 와세다 대학의 강연에 게스트 스피커로 초청된 아베 신조가 "핵무기 사용은 위헌이 아니다"라고 발언한 것과 관련하여 대학 당국에 대한 질문서와 내각부에 대한 아베의 관방 부장관 사임을 요구하는 요청서를 제출했다.[44] 또한 같은 해, 고베 대학에서 세미나로 자위대와 공동으로 연구를 진행하는 "안전 보장 공동 워크숍"이 실시되는 것을 두고, 오사카 경제 대학과 나라 여자 대학의 학생들을 동원하여 "고베 대학의 유사시 연구를 용서하지 않는 회"를 결성하고 대학 당국에 대한 추궁에 나섰다.[44]
- 2003년, 몇 차례에 걸쳐 미국에 활동가를 파견하여 "ANSWER", "캠퍼스 반전 네트워크" 등 미국의 반전 단체와 교류했다.[44]
- 2004년, 와세다 대학은 사회과학부 자치회에 대한 편의 제공을 재검토할 방침임을 통고했다.[44] 2005년 3월 2일, 와세다 대학 당국은 사회과학부 자치회의 공인 폐지와 자치회실 반납을 결정했다.[44] 전학련은 공인 폐지 무효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지만 2007년에 도쿄 지방 법원은 소송을 기각했다.[44]
- 2005년, 혁마르파 심파로 오사카 경제 대학 전 교수인 사토가미 조에이 특임 교원이 임용 취소된 것에 반발하여 항의 활동을 전개했다.[44] 같은 해 3월, 1970년대 이래 혁마르파 전학련의 와세다 대학 지배의 핵을 담당해 온 사회과학부 자치회가 공인 폐지를 결정했다.[44] 혁마르파 전학련은 전국에서 100명 정도의 학생을 결집하여 공인 폐지 반대 호소를 했지만, 일반 학생에게는 "자치회 = 혁마르"라는 인식이 침투해 있었기 때문에 일반 학생을 끌어들인 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했다.[44] 또한 와세다 대학에서 혁마르파 계열로 여겨져 온 상학부·일문·이문·사회과학부의 자치회와 문화단체 연합회는 학부장 자택 도청 사건 당시에는 혁마르파와의 관계를 부인해 왔지만, 이때 마르학동 혁마르파 와세다 대학 지부는 위의 단체가 혁마르파의 지배하에 있다는 것을 『해방』지에 공공연하게 인정했다.[44] 2005년 5월 3일, 와세다 대학의 학생을 중심으로 한 활동가 40명이 가두 선전 중 우익 단체 구성원 약 60명과 말다툼이 벌어져 난투로 발전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튿날 오쿠노 위원장 등이 해방사에서 기자 회견을 열고 "국가 권력이 꾸민 우익의 습격"이라고 탄핵하고, 후일 국가 배상 청구를 제기했다.[44] 같은 해 11월, 오사카 경제 대학의 직원과 활동가가 몸싸움을 벌여 이시하라 카츠야 학우회 위원장이 직원에게 폭행을 당했다며 사과를 요구했다.[44] 대학 당국은 폭행은 자작극이라고 하며 사과를 거부하고, 11월 10일에는 자치회의 공인 폐지와 자치회비·학우회비의 대리 징수 폐지를 결정했다.[44]
- 2006년 1월, 혁마르파 계열이 30년 이상 지배해 "간사이 지역의 불변의 거점"으로 삼았던 오사카 경제 대학에서의 입간판 제한을 두고 대학 직원에게 폭행을 가한 활동가 9명 체포(그 중 동 대학 학생 5명은 퇴학)되었고, 이를 계기로 혁마르파 계열 자치회·서클은 비공인화된다.[44] 오사카 경제 대학에서 활동하던 혁마르파 활동가는 10명이었지만, 학적을 가지고 있던 것은 전술한 5명뿐이었으며, 그 5명도 타 대학에서 온 기존의 학생활동가였다.[44] 이로 인해 오사카 경제 대학에서의 동 전학련의 영향력이 크게 후퇴한다.[44] 오사카 경제 대학에서 혁마르파가 완전히 배제되었다는 분석도 있으며, 호리베 야스타로에 따르면 와세다 대학 사회과학부 자치회의 공인 폐지보다 더 큰 타격을 혁마르파에 안겨주었다고 한다.[44] 같은 해, 다카하타 이사오를 초청하여 강연회를 개최했다.[44]
- '''중핵파계 전학련'''
- 1990년에는 '90년 천황 결전'이라고 칭하며 중핵파 전체가 124건이나 되는 게릴라 사건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경찰의 단속이 더욱 심해지면서 활동에 염증을 느낀 학생활동가들의 잇따른 이탈이 발생했다.[71]
-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핵파 전학련은 호세이 대학을 '불빠지지 않는 거점'으로 삼아, 자치회비의 대리 징수로 막대한 자금을 확보하고, 동 학생회관을 철판으로 요새화하여 활동가를 상주시키고 있었다.[71] 그러나 호세이 대학에서도 중핵파 배제가 시작되어, 1995년에는 제1법학부 자치회, 1996년에는 제1문학부 자치회가 공인을 정지당했고, 대학이 보관하고 있던 자치회비는 학생들에게 반환되었다.[71] 이에 대항하여 1997년 호세이 대학교수 자택에 시한 발화 장치로 방화했으나, 호세이 대학은 이에 굴하지 않고 배제를 진행해 갔다.[71]
- 오카야마 대학에서는 1995년에 학우회가 교우회로의 발전적 해산을 결정했지만, 중핵파 전학련은 이를 대학 당국의 개입이 있었다고 하며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44] 같은 해 도호쿠 대학과 히로시마 대학에서는 프랑스의 핵실험에 반대하는 파업이 감행되었다.[44]
- 2000년 6월, 해방파 내 게바의 틈을 타 규슈 대학 학우회의 주도권을 현대사파로부터 탈취했다.[71] 같은 해 11월 21일, 도호쿠 대학에서 3년 만에 바리케이드 스트라이크를 벌여 수업을 보이콧했다.[44]
- 2001년 6월, 1991년경부터 활동이 보이지 않았던[44] 히로시마 대학 학생 자치회를 재건했다.[71] 같은 해, 도호쿠 대학 유붕 료의 폐쇄 결정에 대해 전국 학생활동가를 도호쿠 대학에 결집시켜 반대 운동을 실시했다.[44]
- 2002년, 이라크 반전 운동에 편승하여 "전쟁으로 가는 길을 멈추자! 백만 명 서명 운동"의 대학 연락회를 발족하여, 공백 대학에서의 자치회 건설의 발판을 마련했다.[44] 같은 해, 호세이 대학 제1경영학부 자치회가 공인 정지되었다.[71]
- 2003년, 이라크 반전 운동에 편승하여 섹트 색을 은폐한 영어 표기 명칭의 반전 학생 조직을 잇따라 10개 단체 설립했다. 그 중에서도 호세이 대학의 활동가가 중심이 되어 발족한 "STOP WAR! WORLD ACTION"은 대학생이나 고등학생에게 호소하여 시부야 등에서 퍼레이드를 벌여 최대 1000명의 참가자를 모았다.[44] 또한 같은 해, 도호쿠 대학에서는 폐쇄가 결정된 유붕 료에서 입주자의 자율 모집을 실시했지만, 이에 응하여 입주한 학생에게 정학 처분이 내려졌고, 자치회는 국회의원 5명을 포함한 문화인 등 30명을 찬동자로 내세워 처분 철회와 폐쇄 철회를 요구하는 신청 행동을 실시했다.[44]
- 2004년, 수도권에서의 최대 거점이었던 호세이 대학에서, 전학련 서기국을 두었던 학생회관이 철거되었고, 반대 운동으로 연 42명이 체포되었다.[71] 또한 같은 해, 독립 행정법인화에 따라 도호쿠 대학이 도호쿠 대학 학생 자치회를 공인 폐지했다.[44] 같은 해, 호세이 대학이 제2교양부를 폐지했기 때문에 제2교양부 자치회가 유명무실화되었다.[71]
- 2005년에는 논 헬멧 스타일의 "소프트 노선" 권유를 실시, 도호쿠 대학 자치회가 축구 일본 대표 트루시에 감독의 통역이었던 플로랑 다바디의 강연회를 개최했을 때 고등학생을 포함한 약 300명이 몰려들었다.[44] 또한 같은 해, 히로시마 대학 학생 자치회를 재건했다.[71]
- 2006년 2월부터 호세이 대학이 실시한 입간판・전단 배포 규제에 관해, 같은 해 3월 14일 당국의 경영학부 자치회의 미신고 간판 철거에 항의하던 오다 위원장・우치우미 부위원장・나카지마 부위원장・하라다 부위원장 등 29명이 건조물 침입과 위력 업무 방해 혐의로 체포되었다.[71] 체포 당시 약 200명의 공안 경찰이 동원되었다. 중핵파는 이 사건을 "2006・3・14 호세이 대학 탄압 사건"이라고 칭하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25일에는 29명 전원이 석방되었고, 그 중 호세이 대학생이었던 5명에게는 정학이나 퇴학 처분이 내려졌다. 그 후, 처분 학생 5명은 "3・14 호대 탄압을 용서하지 않는 호대생의 모임"이라는 단체를 결성하여, 학내외에서 항의 활동을 벌였다.[71] 또한, "퇴학 처분을 철회하라! 호세이 대학 통일 OB회"도 결성되어 투쟁을 지원했다.[71] 대학 측은 경비원을 상주시키는 등 대처하고 있다. 06, 07년 중에 정학 학생에 대해 무기한 정학이나 퇴학 등 추가 처분이 내려졌고, (대학 무관계자 포함) 체포자는 40명을 넘었다. 직전에 오사카 경제 대학에서의 혁마르파 전학련과 당국의 충돌과 방교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전철을 밟는 듯한 행동이 취해진 배경으로, 중핵파 전학련이 입간판을 금지당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캠퍼스 내에서 배제된 것과 마찬가지라는 점에 상당한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 지적되고 있다.[71]
- 같은 2006년 10월, 도야마 대학은 학생 자치회를 비공인화했고,[71] 2007년 3월 말일을 기한으로 자치회실 인도 통고를 했지만, 같은 자치회는 이를 거부했고, 적어도 2008년 초 시점까지 점거를 지속하고 있었다.[44] 도호쿠 대학 유붕 료에서는 폐쇄에 반대하여 점거를 계속하는 학생의 료 인도 소송의 상고심이 기각, 12월에 료의 봉쇄가 강제 집행되었고 그 당시 활동가 1명 체포[44] (최종적으로 2011년에 대학 측이 승소[44])되었다.
- 이 무렵, 대학 당국에 의한 조여오는 압박이 강화되는 가운데, 통신 교육 제도를 이용한 활동가의 투입을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인터넷을 이용한 올그를 실시하여, 실제로 활동가를 획득하고 서클 건설 등을 통해 거점화를 진행하기 시작했다.[71]
- 2007년 4월 27일, 퇴학 처분에 대한 중핵파 등의 데모 중, 전학련 활동가 학생 2명이 대학 직원에게 폭행 혐의로 체포되었다. 또한 같은 해, 규슈 대학 학우회를 장악하고 있던 학생활동가가 제적되어, 영향력이 저하되었다.[44] 같은 해 호세이 대학에서는 입간판 철거 방해 등으로 최소 34명 체포 (이 시점에서의 연 45명)되었다.[44] 같은 해, 규슈 대학 학우회가 자치회비를 사적으로 횡령한 것이 발각되어 활동가 4명이 체포, 학우회는 사실상 괴멸했다.[71]
- 2008년 5월, 호세이 대학 문화 연맹을 폐지하고 서클을 등록제로 한 호세이 대학에 대한 항의 집회 등을 벌여 전학련 활동가 등 33명 체포되었다.[44]
- 2008년 7월, 전학련 외 3단체에 의한 "3・14 호대 탄압을 용서하지 않는 호대생의 모임"이 "호대 탄압 날려 버려! 7・24 전국 집회"를 개최했고, 이 집회 전후에 호세이 대학 부지 내 건조물 침입으로 3명 체포 (이 시점에서의 연 88명 체포)되었다.[44]
- 2009년 4월 24일, 도쿄 지방 법원에 의한 "정보 활동 금지 등 가처분 명령", 대학 측에 의한 처분 발령 등에 대한 중핵파 등에 의한 항의 집회와 데모에서, 전학련 활동가 학생 6명이 공무 집행 방해 등의 혐의로 체포 (집회 중에 5명, 데모 후에 경찰서 앞에서 행해진 항의 행동으로 1명) 되었다.
- '''혁로협(革労協) 적새사파(赤砦社派)계 전학련'''
- 2000년, 내부 항쟁이 잇따른 것을 이유로 메이지 대학은 대리 징수한 학생 자치회비 지급 동결 및 대학 축제를 중단했다.[44] 2001년, 메이지 대학의 학생 자치회가 공인을 정지당했다.[44] 또한, 대학 축제에 동 전학련 지배하의 자치회·서클의 참가가 인정되지 않자 이에 항의하여 메이지 대학이 위탁한 경비 회사의 사장 자택 및 농학부 교수 자택 등에 방화했다.[44]
- 2007년, 규슈 대학 학우회를 장악하고 있던 중핵파 전학련 활동가가 제적되었고, 3월의 학우회 대의원 총회에서 적새파 전학련이 헤게모니를 탈취했다.[44]
- '''혁로협(革労協) 현대사파(現代社派)계 전학련'''
- (상위 단체의 내분으로 인하여 특별한 활동내용 없음)
- '''기타 전학련'''
항목 | 설명 |
---|---|
활동 내용 | 전국 대회에서는 매번 저명인사에 의한 기조 강연이 행해지고 있으며, 내각부 참여관인 유아사 마코토(2008년 대회) 등이 강사로 참여하고 있다. 또한, 전국학련 세미나라고 칭하며 학생 자치회 관계자의 경험 교류 행사를 열고, 미가맹 자치회나 자치회를 갖지 않은 대학으로부터의 참석자에게 가맹을 권유하는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44] |
가맹 자치회 | 거점교・자치회는 2005년 시점에서 도립대 전학, 동대 교양・경제・이・공・교육, 호세이 대학 Ⅱ문・Ⅱ법・Ⅱ사, 명대 법・문・경제・리・공・농・의・교육・정보문화, 경대 법・종합인간・교육 등 100개 대학・고전 198개 자치회이다.[44] 2009년의 60회 대회에서 신슈대 섬유학부 자치회 재건, 릿쿄대 영상・약・생명과학부 자치회 결성, 일본복지대학 아동발달・국제복지개발학부 자치회 결성이 보고되었다.[44] 이 대회의 결의에서는 활동하고 있는 대학으로 구체적으로 신슈대 이・섬유학부, 일본복지대학 아동발달・국제복지개발학부, 릿쿄대 문・산업사회・영상・법학부, 메이조 대학, 도쿄 가쿠게이 대학, 도쿄 대학, 도쿄 경제 대학, 나고야 대학, 도쿄 농공대학 농학부, 오사카 경제 법과 대학, 오사카 시립 대학, 오타니 대학, 교토 타치바나 대학, 나고야 공업 대학, 나고야 상과 대학, 와코 대학, 주오 대학 등이 열거되어 있다.[44] |
분담금 | 2006년에는 가맹 분담금 합계의 과반수를 릿쿄 대학의 가맹 자치회에 의한 출연이 차지했다.[71] 릿쿄 대학으로부터 회비의 대리 징수를 계속하는 조건으로 전학련・교토부 학련에의 가맹 분담금을 지불하지 않을 것을 요구받아, 자치회 측도 승낙했기 때문에, 그 후는 릿쿄 대학의 가맹 학생 자치회도 가맹 분담금을 내지 않게 되었다. |
지방 조직 | 오사카부 조직으로 6개 대학 8개 자치회가 가맹하는 오사카부 학생자치회연합(부학련)이 있었다. 2005년에 구 오사카 부립 대학・오사카 여자 대학・오사카 부립 간호 대학의 부립계 3개 대학이 통폐합되면서, 자치회 조직이 재편되는 것을 계기로, 같은 해 2월, 제71기 부학련 대회에서 오사카 부립 대학 학생자치회연합이 부학련에서 탈퇴했다. 이에 대응하여, 부학련도 동 대회에서 임원 부족에 의한 활동 휴지를 결정하고, 새롭게 대체 조직으로서 오사카 학생 요구 실현 연락회(오사카 연락회)를 설치했다.[72] 오사카 부립 대학 학생자치회연합은 2005년도 6월에 "오사카 부립 대학 나카즈메 캠퍼스 학생자치회"로 재편[73]된 후, 전학련 재가맹을 검토했지만, 2008년도 후기에 가맹하지 않기로 결정했다.[74] |
6. 3. 2000년대 이후의 동향
2000년대 이후 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전학련)은 다양한 사회적 이슈에 참여하며 활동을 이어왔다.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 그룹(혁마르파) 계열 전학련은 2000년 와세다 대학에서 '자치회 해체'에 대한 비판 운동을 벌였다.[71] 2002년에는 아베 신조 당시 관방 부장관의 "핵무기 사용은 위헌이 아니다"라는 발언에 대해 항의하고 사임을 요구했다.[40] 같은 해 고베 대학에서 자위대와 공동 연구를 진행하는 것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다.[40] 2003년에는 미국의 반전 단체들과 교류했다.[40] 2005년 와세다 대학 사회과학부 자치회의 공인이 폐지되자 이에 반대하는 소송을 제기했지만, 2007년 패소했다.[40] 같은 해 오사카 경제 대학 전 교수의 임용 취소에 반발하여 항의 활동을 벌였다.[40] 2006년 오사카 경제 대학에서 혁마르파 계열 자치회가 비공인화되면서 영향력이 크게 줄었다.[40]
중핵파 계열 전학련은 2000년 규슈 대학 학우회 주도권을 탈취하고, 도호쿠 대학에서 바리케이드 파업을 벌였다.[40] 2001년 히로시마 대학 학생 자치회를 재건하고, 도호쿠 대학 유붕 료 폐쇄 반대 운동을 벌였다.[40] 2002년 이라크 반전 운동에 참여하며, 공백 대학에서의 자치회 건설을 시도했다.[40] 2004년 호세이 대학 학생회관 철거 반대 운동으로 많은 체포자가 발생했다.[40] 2005년 도호쿠 대학 자치회가 필리프 트루시에 감독 통역 강연회를 개최하여 많은 학생이 모였다.[40] 2006년 호세이 대학의 입간판 규제에 항의하다 29명이 체포되었다.[40] 2007년 도야마 대학 학생 자치회가 비공인화되고, 도호쿠 대학 유붕 료 강제 집행으로 활동가 1명이 체포되었다.[40] 2008년 호세이 대학 문화 연맹 폐지에 항의하다 33명이 체포되었다.[40] 2009년 정보 활동 금지 가처분 명령 등에 항의하다 6명이 체포되었다.[40]
2007년 시점에서 신좌익이 장악하는 자치회 수는 크게 감소했다.[40] 학생들의 가치관 다양화, 대학 당국의 관리 강화, 종파적 사고에 대한 혐오감 등이 원인으로 분석된다.
전학련은 2007년부터 교토 대학을 중심으로 '학비 제로 넷' 운동을 벌였다.[40] 학비 면제를 요구하고, 학생들의 경제 실태를 조사하여 '학비・고용 흑서'를 발간했다.[40]
항목 | 설명 |
---|---|
가맹 자치회 | 2005년 기준 100개 대학, 198개 자치회.[71] 2009년 신슈 대학, 릿쿄 대학, 일본복지대학 등에서 자치회 결성.[72] |
지방 조직 | 오사카 대학을 중심으로 오사카부 학생자치회연합(부학련)이 있었으나, 2005년 활동 중지.[73] |
7. 역대 전학련 대회 및 위원장
와세다 대학 36번 교실
도쿄 상대 겸송강당
동 31번 교실
동 상학부 401번 교실
와세다 대학 4호관
도쿄 가세이 학원 강당
교토 민생회관
리츠메이칸 대학 16호 교실
중노위 회관
시바 공회당
지요다 공회당
시타야 공회당
시바 공회당
신주쿠 회관
중노위 회관
국노 회관
아자부 공회당
와세다 대학 문학부 강당
호세이 대학
와세다 대학
와세다 대학 문학부 강당
와세다 대학 오쿠마 강당
동 22호관
동 22호관
와세다 대학 1호관 109
고엔지 회관
무사시노 공회당
고토구 종합 구민센터
고토구 종합 구민센터
하타가야 구민회관
미도리 커뮤니티 센터
요요기하치만 구민회관
센다가야 구민회관
요요기하치만 구민회관
후루이시바 문화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