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 대전의 외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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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의 외교사는 전쟁 목표, 외교 전략, 주요 참전국들의 외교 활동, 그리고 신생 국가들의 외교적 노력을 다룬다. 연합국은 독일의 세력 확장을 막고 민족주의 원칙에 따른 영토 변경을 추구했으며, 비밀 조약과 선전을 통해 중립국을 끌어들이려 했다. 독일은 '9월 계획'을 통해 유럽 지배를 시도했지만,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미국의 참전을 유발하는 등 전략적 실수를 범했다. 주요 참전국들은 동맹 관계를 맺고, 경제적 지원과 선전을 통해 자국의 이익을 추구했다. 전쟁의 결과로 폴란드, 우크라이나, 체코슬로바키아, 발트 3국 등 새로운 국가들이 등장했으며, 국제 연맹 창설 시도가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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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의 외교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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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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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 1914년 - 1918년 |
주요 참가국 | 프랑스 영국 러시아 제국 이탈리아 왕국 미국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
배경 | |
주요 원인 | 제국주의적 경쟁 민족주의적 긴장 군비 경쟁 동맹 체제 |
직접적 원인 | 사라예보 사건 |
주요 외교적 사건 | |
1914년 | 7월 위기 독일의 벨기에 침공 |
1915년 | 이탈리아의 삼국 협상 합류 |
1917년 | 미국의 참전 러시아 혁명 |
주요 인물 | |
삼국 협상 | 조지 5세 (영국) 레이몽 푸앵카레 (프랑스) 니콜라이 2세 (러시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이탈리아) 우드로 윌슨 (미국) |
삼국 동맹 | 빌헬름 2세 (독일) 프란츠 요제프 1세 (오스트리아-헝가리) 메흐메트 5세 (오스만) |
주요 조약 및 합의 | |
전쟁의 종결 | |
결과 | 국제 연맹 창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해체 유럽 지도 재편 |
영향 | 전후 국제 질서 변화 민족주의 부상 경제적 혼란 |
기타 | |
관련 주제 | 제1차 세계 대전 전간기 |
2. 전쟁 목표
전쟁 발발 초기, 모든 교전국 국민이 전쟁을 열렬히 환영했다는 인식이 퍼졌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며 오히려 깊은 불안감이 널리 퍼져 있었다. 특히 독일 군대가 벨기에 등지에서 저지른 민간인 학살, 인질 처형, 문화유산 파괴 등의 잔혹 행위에 대한 보고는 당시 중립국이었던 미국과 영국 내 반전 여론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이나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전쟁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전쟁이 금방 끝날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은 드물었다. 흔히 알려진 "크리스마스 전에 끝난다"는 구호는 전쟁 발발 후 3년이 지나서야 등장한 것이다.[4] 역사가들은 전쟁 발발 당시 대중의 열광적인 지지를 보여주는 증거는 매우 부족하다고 평가한다.[5]
2. 1. 연합국의 전쟁 목표
1914년 전쟁이 예기치 않게 시작되었을 때, 연합국은 공식적인 장기 전쟁 목표를 미리 설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1914년 9월 초, 프랑스와 영국 대사, 러시아 외무장관의 임시 회동에서 비공식적이지만 연합국 외교가에서 널리 공유되던 전쟁 목표들이 논의되었다. 이 목표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 파리, 런던뿐만 아니라 벨기에,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등 다른 동맹국들 사이에서도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6]# "세 동맹국의 주요 목표는 독일의 권력과 군사적, 정치적 지배 주장을 분쇄하는 것이어야 한다."
# "영토 변경은 민족주의 원칙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
# 러시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특정 지역을 병합해야 한다.
# "프랑스는 알자스-로렌을 되찾고, 원한다면 라인 프로이센과 팔라티네 일부를 추가해야 한다."
# 벨기에와 덴마크의 새로운 영토 확보 및 하노버 왕국의 부활에 대한 조항 (5-7항 통합).
# 오스트리아는 보헤미아 왕국을 격상시켜 삼중 군주국이 되어야 한다.
# "세르비아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달마티아, 북부 알바니아를 병합해야 한다."
# 불가리아와 그리스에 영토가 추가되어야 한다 (10-11항 통합).
# "영국, 프랑스, 일본은 독일 식민지를 분할해야 한다."
#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전쟁 배상금을 지불해야 한다."
이러한 연합국의 전쟁 목표는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않았다. 대신 비밀 조약의 형태로 논의되고 약속되었으며, 1917년 11월 러시아에서 볼셰비키가 정권을 장악한 후 이 조약들을 폭로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7] 비밀 조약의 내용은 연합국의 제국주의적 영토 확장 의도를 드러내면서 국제적인 비판에 직면했다. 특히 사회주의자들은 자본가들이 이익을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삼았고, 이는 전 세계 좌익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1918년 1월, 전쟁 목표에 대한 도덕적 우위를 확보하고 새로운 국제 질서를 제시하기 위해 윌슨의 14개조를 발표했다. 이 원칙의 첫 번째 조항은 "평화를 위한 공개적인 협약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그 이후에는 어떤 종류의 사적인 국제적 이해도 없어야 하며 외교는 항상 솔직하고 공개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명시하며 비밀 외교를 비판했다.[8]
한편, 역사가 휴 스트라찬은 영토 확장에 초점을 맞춘 전쟁 목표들이 실제 전쟁의 원인이나 과정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오히려 전쟁의 명분이나 이념을 내세운 선전전이 전쟁의 목적을 형성하는 데 더 중요했다고 평가했다. 영국의 작가 H. G. 웰스의 말을 인용하며 "우리는 국가를 파괴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아이디어를 죽이기 위해 싸운다... 우리의 일은 아이디어를 죽이는 것이다. 이 전쟁의 궁극적인 목적은 선전이며, 특정한 믿음을 파괴하고 다른 것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9]
2. 2. 동맹국의 전쟁 목표
독일 제국은 전쟁 초기에 일련의 명확하고 공식적인 전쟁 목표를 확정하지는 않았다.[10] 그러나 전쟁 발발 직후인 1914년 9월, 독일 총리 테오발트 폰 베트만 홀베크의 수석 참모였던 쿠르트 리즐러는 독일의 잠재적 전쟁 목표에 대한 아이디어를 구상했는데, 이는 후일 역사학자들이 "9월 프로그램"으로 명명했다.[10][11]이 프로그램은 주로 경제적 이득 확보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핵심 목표는 중부 유럽과 서유럽 전체를 독일의 강력한 통제하에 두는 거대한 공동 시장, 즉 Mitteleuropa|미텔오이로파de를 창설하는 것이었다. 세부 계획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했다.[10][11]
- 벨기에: 독일의 종속국으로 만들고, 영국을 직접적으로 위협할 수 있는 해군 기지를 건설한다.
- 프랑스: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부과하여 경제적으로 독일에 예속시킨다.
- 네덜란드: 독일의 영향력 아래 있는 종속적인 위성 국가로 만든다.
- 러시아: 동유럽의 광대한 영토를 할양받는다. (이는 1918년 초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통해 실제로 일부 실현되었다.)
- 아프리카: 잃어버린 아프리카 식민지를 되찾고 확장하여 새로운 식민 제국을 건설한다.
리즐러가 구상한 이 9월 프로그램은 공식적으로 채택되거나 승인된 계획은 아니었다. 베트만 홀베크 총리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도 못했으며, 정부나 군의 공식적인 의사 결정 과정을 거치지도 않았다.[10] 또한 이 계획은 전쟁이 시작된 이후에 급하게 구상된 것으로, 일부 역사가(프리츠 피셔)가 주장했던 것처럼 전쟁 이전부터 존재했던 장기적인 계획은 아니었다.[10][11]
그럼에도 불구하고 9월 프로그램은 만약 독일이 전쟁에서 승리했을 경우 유럽 대륙에서 추구했을 공격적이고 팽창적인 패권 정책의 윤곽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실제로 독일은 전쟁 기간 동안 점령한 벨기에와 프랑스 북부 지역에서 매우 가혹한 통치를 시행했으며,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에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통해 러시아에게 매우 가혹한 조건을 강요하며 핀란드에서 우크라이나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사실상 독일의 영향권 아래 두려 했다. 이는 9월 프로그램에 담긴 독일 제국의 야심이 단순한 구상에 그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10][11]
3. 외교 전략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참전국들은 명확한 장기 외교 목표 없이 전쟁에 돌입했다.[6] 전쟁이 예상과 달리 장기화되면서 각국은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적국을 약화시키기 위한 다양한 외교 전략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주요 전략 중 하나는 비밀 조약을 통한 동맹 확보 및 영토 확장이었다. 연합국과 동맹국 모두 중립국의 참전을 유도하거나 기존 동맹을 공고히 하기 위해 비밀리에 영토 할양 등을 약속했다.[15][16][17] 이러한 비밀 외교는 훗날 러시아 혁명 이후 볼셰비키에 의해 폭로되어 국제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으며,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윌슨의 14개조에서 투명하고 공개적인 외교를 주장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7][8]
선전 활동 역시 중요한 외교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각국 정부는 국내외 여론을 자국에 유리하게 조성하고, 참전의 정당성을 확보하며 적국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확산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전쟁 초기, 각국 정부는 자국의 입장을 정당화하고 상대에게 전쟁 책임을 돌리려는 의도로 외교 문서를 선별적으로 편집한 이른바 '컬러 북'(Color Book)을 발행하기도 했다.[30][31][32] 역사가 휴 스트라찬은 당시 전쟁 목표가 단순히 영토를 확장하는 것보다, 특정 사상을 파괴하고 새로운 믿음을 심으려는 선전적 성격이 강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9]
이 외에도 적국의 경제를 압박하기 위한 해상 봉쇄나 무제한 잠수함 작전과 같은 군사 행동과 연계된 외교 정책이 펼쳐졌으며, 전쟁의 참화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국제 연맹과 같은 새로운 국제 기구를 만들려는 시도도 이루어졌다.
3. 1. 비밀 조약
연합국의 전쟁 목표에 대한 공식적인 성명은 발표되지 않았으며, 비밀 조약들은 1917년 11월 러시아에서 볼셰비키가 집권하여 이를 공개하기 전까지 비밀로 유지되었다.[7] 이러한 비밀 조약의 폭로는 사회주의자들이 자본가들이 이익을 위해 전쟁을 조종했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으며, 영토 약속에 대한 증거는 전 세계 좌익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이에 대응하여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1918년 1월 윌슨의 14개조를 발표하며 공개적인 외교를 강조했다. 14개조의 첫 번째 조항은 "평화를 위한 공개적인 협약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그 이후에는 어떤 종류의 사적인 국제적 이해도 없어야 하며 외교는 항상 솔직하고 공개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명시했다.[8] 윌슨 대통령은 비밀 조약이 전쟁의 원인 중 하나라고 비판하며 공개적인 합의를 촉구했다.제1차 세계 대전 중 체결된 주요 비밀 조약들은 다음과 같다.
- 오스만-독일 동맹 조약 (1914년 8월 2일): 독일과 터키 사이에 체결된 비밀 조약이다. 이 조약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 간의 분쟁에서 양국이 중립을 유지하도록 규정했으나, 러시아가 군사적으로 개입할 경우 군사 동맹으로 전환될 것을 명시했다.[15]
- 런던 조약 (1915년 4월 26일): 이탈리아가 삼국 협상(연합국) 측에 참전하는 대가로 특정 영토를 할양받기로 약속받은 조약이다.[16] 이 조약을 통해 이탈리아는 연합국 진영에 합류하게 되었다.
- 부쿠레슈티 조약 (1916년 8월 17일): 루마니아와 연합국(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간에 체결되었다. 루마니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를 공격하고 특정 영토를 얻는 대가로 단독으로 평화 협정을 맺지 않기로 약속했다. 조약 제16조는 "본 협정은 비밀로 유지한다"고 명시하여 조약의 비밀성을 강조했다.[17]
3. 2. 독일의 외교 전략
독일은 전쟁 초기에 명확한 전쟁 목표를 설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1914년 9월, 독일 총리 테오발트 폰 베트만 홀베크의 수석 참모였던 쿠르트 리즐러는 이후 "9월 프로그램"으로 알려진 구상을 스케치했다. 이 계획은 공식적으로 채택되거나 승인된 것은 아니지만, 독일이 승리했을 경우 추구했을 법한 공격적인 목표를 보여준다. 주요 내용은 중부 및 서유럽을 독일의 경제적 통제 하에 두는 공동 시장 창설, 벨기에의 종속국화, 영국을 위협할 해군 기지 건설, 동유럽 영토 확보 (실제로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서 일부 실현됨), 프랑스에 대한 막대한 배상금 부과 등이었다. 네덜란드 역시 종속적인 위성 국가로 만들고 영국 상업을 배제하며, 아프리카에 식민 제국을 재건하는 내용도 포함되었다.[10][11] 역사학자 프리츠 피셔는 이 계획이 전쟁 전부터 존재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전쟁 발발 후 구상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계획은 독일이 유럽에서 매우 공격적인 지배적 지위를 추구했음을 시사한다. 실제로 독일은 점령한 벨기에와 프랑스에 대해 가혹한 정책을 폈다.[10][11]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독일 역시 장기적인 목표를 고려하게 되었으며, 유럽에서의 군사적 지배력 확보에 집중했다. 독일은 다른 동맹국들과 마찬가지로 비밀 조약을 활용하여 동맹을 확보하려 했다. 대표적인 예로 1914년 8월 2일 체결된 오스만-독일 동맹 조약이 있는데, 이는 러시아가 개입할 경우 독일과 오스만 제국이 군사 동맹이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15]
독일은 선전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전쟁 발발과 함께 비공식 선전 기구를 확장하여 중앙 해외 봉사국(Zentralstelle für Auslandsdienst)을 설립했다. 이 기구는 중립국에 선전물을 배포하여 독일 편을 들거나 중립을 유지하도록 설득하는 임무를 맡았다. 영국이 해저 전신 케이블을 차단하자, 독일은 강력한 나우엔 송신기지를 이용해 친독일 뉴스 보도를 전 세계로 송출했다. 또한, 이동식 영화관을 전선에 보내 병사들의 사기를 유지하고, 뉴스 영화를 통해 독일의 시각에서 사건을 전달했다. 독일 선전은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과 군사적 역량, 그리고 승리의 불가피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133]
독일 외교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는 적대국 내부를 분열시키고 개별적으로 평화 조약을 맺어 연합국의 결속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1917년 12월, 독일 외무장관 리하르트 폰 퀼만은 러시아를 연합국의 "가장 약한 고리"로 보고, 러시아 내부의 분리주의 경향을 조장하고 볼셰비키를 지원하는 전복 활동을 벌였다고 밝혔다. 그는 독일이 볼셰비키에게 자금을 지원하여 그들의 기관지인 프라우다를 설립하고 선전 활동을 강화하며 당의 기반을 넓히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설명했다. 퀼만은 볼셰비키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평화가 필요하며, 독일은 이 상황을 이용하여 휴전과 평화를 달성하는 것이 이익에 부합한다고 판단했다.[134][135]
또한 독일은 스페인과 같은 중립국을 대상으로 외교관, 사업가 네트워크, 영향력 있는 스페인 인사들에 대한 자금 지원 등을 통해 선전 활동을 벌여 중립을 유지하도록 설득했으며, 실제로 스페인은 전쟁 기간 동안 중립을 지켰다.[136]
그러나 독일은 1917년 1월,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재개하는 중대한 전략적 실수를 저질렀다. 이는 영국 주변 해역의 모든 상선을 국적이나 화물에 관계없이 경고 없이 격침하는 정책이었다. 이는 국제법 위반이었을 뿐 아니라,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는 것이었다. 독일 군부는 미국의 참전을 각오하면서도, 미국이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전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마지막 기회로 여겼다. 하지만 이는 영국의 해상 봉쇄에 대한 대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미국의 참전을 촉발하여 독일의 패배를 앞당기는 요인이 되었다. 군부는 이 결정이 영국의 재정적 파탄을 가속화할 것이라 기대했지만, 오히려 미국의 막대한 자원과 인력이 연합국 측에 가담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29] 독일은 전쟁 목표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를 국내 정치적 분열과 동맹 관계 악화를 우려하여 꺼렸다.[28]
3. 3. 연합국의 외교 전략
1914년 전쟁 발발 당시 연합국은 명확한 장기 목표를 설정하지 않았으나, 전쟁 초기부터 독일의 군사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1914년 9월, 영국, 프랑스, 러시아는 비공식적으로 "독일의 권력과 군사적, 정치적 지배 주장을 분쇄"하고, 민족주의 원칙에 따라 영토를 조정하며, 프랑스가 알자스-로렌을 되찾는 등의 목표를 공유했다.[6] 이들은 전쟁 발발 한 달 만에 독일과 단독으로 평화 협정을 맺지 않기로 합의했으며, 이는 연합국 결속의 기초가 되었다.[12]전쟁이 1914년 말 교착 상태에 빠지자, 연합국은 장기적인 전략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는 독일 군사력의 완전한 파괴를 공동 목표로 설정했다.[12] 이는 중앙 동맹국, 특히 군사적 우위에 집중했던 독일과는 다른 접근 방식이었다.[18][19] 연합국은 군사력뿐만 아니라 외교, 금융, 선전, 심지어 전복 활동까지 포함하는 다차원적인 전략을 추구했다.[20]
연합국 외교 전략의 핵심 중 하나는 중립국을 연합국 측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비밀 조약을 활용하여 참전의 대가로 영토 확장을 약속했다.
- 1915년 런던 조약에서는 이탈리아에게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영토 일부를 약속하며 참전을 유도했다.[16][22]
- 1915년 콘스탄티노플 협정에서는 러시아에게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약속했다.[23]
- 1916년 부쿠레슈티 조약에서는 루마니아에게 오스트리아-헝가리 영토를 대가로 참전을 약속했다.[17]
- 1917년 발푸어 선언에서는 유대인에게 팔레스타인 지역에 민족적 고향 건설을 약속했으며, 동시에 아랍 민족에게도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지역에 독립 국가 건설을 약속하기도 했다.
이러한 비밀 조약들은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볼셰비키 정부가 폭로하기 전까지 비밀로 유지되었다.[7] 일부 영토가 여러 국가에 중복 약속되는 등 문제점을 안고 있었으며, 이는 전후 이탈리아 등에서 불만을 야기하는 원인이 되었다.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이러한 비밀 외교를 비판하며, 1918년 14개조 원칙에서 "공개적으로 맺어진 공개적인 평화 조약"을 주장했다.[8]
재정 및 경제 전략 또한 중요했다. 영국은 러시아, 프랑스, 이탈리아 등 동맹국에 막대한 전쟁 자금을 대출해주었으며, 독일에 대한 해상 봉쇄를 통해 경제적 압박을 가했다.[24] 영국의 자금력이 한계에 다다르자 1917년부터는 미국이 더 큰 규모의 대출을 제공하며 연합국의 전쟁 수행 능력을 뒷받침했다.[24] 영국은 미국 남부의 면화 산업을 대규모로 지원함으로써 미국의 전쟁 노력을 간접적으로 지원하기도 했다.[24]
선전전 역시 연합국 외교 전략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연합국은 독일의 벨기에 침공 당시 잔혹 행위와 RMS 루시타니아호 침몰 사건 등을 부각하며 독일을 군국주의와 동일시하고 비인도적인 국가로 묘사했다.[4][25] 특히 영국은 뛰어난 선전 활동을 통해 미국 내 여론을 연합국에 우호적으로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25] 연합국은 전쟁의 명분을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수호, 그리고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으로 포장하여 국제적인 지지를 얻고자 했다. 1917년 3월, 러시아에서 2월 혁명으로 차르 체제가 무너지자,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이를 계기로 전쟁을 민주주의를 위한 십자군으로 규정하며 미국의 참전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27] 또한, 각국 정부는 자국의 참전을 정당화하고 상대방에게 전쟁 책임을 돌리기 위해 외교 문서를 선별적으로 편집한 컬러 북을 발행하기도 했다.[30][31][32]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연합국 내에서는 전후 평화 체제에 대한 구상도 이루어졌다. 특히 영국과 미국에서는 미래의 전쟁을 방지하기 위한 국제 기구 설립 논의가 활발해졌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영국 총리와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국제 연맹 창설을 지지했으며, 윌슨은 이를 14개조 원칙의 하나로 포함시켰다.[33] 아서 발푸어 영국 외무장관 역시 국제법과 평화 조약을 실효성 있게 만들기 위한 국제적 제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33]
3. 4. 국제 연맹 창설 시도
1917년 11월 러시아에서 볼셰비키가 집권하면서 연합국 간에 맺어졌던 비밀 조약들이 폭로되기 시작했다.[7]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영토 분할 등을 약속했던 이 비밀 조약들의 내용은 기존의 제국주의적 외교 방식에 대한 큰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사회주의자들은 이를 근거로 전쟁이 자본가들의 이익 추구를 위해 벌어졌다고 주장하며 전 세계 좌파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이러한 배경 속에서,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전쟁의 참혹함을 반복하지 않고 새로운 국제 질서를 수립하기 위한 구상을 제시했다. 1918년 1월, 윌슨 대통령은 윌슨의 14개조 평화 원칙을 발표하며 국제 사회의 주도권을 잡고자 했다. 이 원칙의 첫 번째 조항은 "평화를 위한 공개적인 협약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그 이후에는 어떤 종류의 사적인 국제적 이해도 없어야 하며 외교는 항상 솔직하고 공개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선언하며, 과거의 비밀 외교 관행을 정면으로 비판했다.[8]
윌슨의 14개조는 민족 자결주의, 군비 축소, 자유 무역 등과 함께, 향후 국제 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상설 국제 기구로서 국제 연맹의 창설을 제안하는 내용을 핵심으로 담고 있었다. 이 제안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새로운 국제 질서를 모색하는 데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으며, 전후 처리 과정과 국제 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4. 주요 참전국
제1차 세계 대전은 전 세계의 많은 국가가 참여한 국제적 분쟁이었다. 전쟁은 주로 연합국과 동맹국이라는 두 진영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주요 연합국으로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1917년까지), 미국(1917년부터), 이탈리아(1915년부터), 일본 등이 있었다. 주요 동맹국으로는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1915년부터) 등이 참여했다.
각 주요 참전국의 외교 정책, 참전 배경, 전쟁 중 역할 등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각 국가별 섹션에서 다룬다.
- 영국
- 프랑스
- 러시아
- 미국
- 이탈리아
- 일본
- 오스만 제국
- 불가리아
4. 1. 영국
제1차 세계 대전 중 영국의 외교는 주요 동맹국과의 협력, 중립국을 대상으로 한 선전 활동 증진, 그리고 특히 해상 봉쇄를 통한 독일 경제 붕괴 시도에 집중되었다.1914년 8월 4일, 영국 정부는 국왕의 이름으로 전쟁을 선포하여 영국과 대영 제국 전체가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31][32] 독일이 벨기에와 프랑스 해안을 장악할 경우 발생하는 전략적 위험은 영국에게 용납될 수 없는 위협으로 간주되었다.[46][47] 또한, 협상국 파트너인 프랑스, 러시아와의 관계도 중요한 고려 사항이었다. 외무 장관 에드워드 그레이는 프랑스와 비밀리에 맺은 해군 협정을 근거로, 영국이 해협을 방어해야 할 도덕적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내각의 공식 승인을 받지 않은 협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참전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46][47] 만약 영국이 협상국 동맹을 외면한다면, 독일이 승리하든 협상국이 영국 없이 승리하든 영국은 국제적으로 고립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영국 외무부 관료 에어 크로는 이러한 상황이 영국과 대영 제국의 안보를 취약하게 만들 것이라고 경고했다.[48] 국내 정치적으로는, 당시 집권 중이던 자유당 내 반전 여론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를 지원하고 호전적인 보수당을 견제하기 위해 참전을 결정했다. 독일의 벨기에 침공은 실제 참전의 복합적인 이유 중 하나였지만, 전쟁을 꺼리는 자유당 지지자들을 설득하기 위한 명분으로 특히 강조되었다.[46][47]
영국은 전쟁 수행 과정에서 동맹국에 대한 재정 지원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러시아, 프랑스, 이탈리아 및 다른 소규모 동맹국들에게 막대한 자금을 대여했으며, 영국의 자금력이 한계에 다다르자 1917년 초부터는 미국이 더 큰 규모의 대출을 제공하며 그 역할을 이어받았다.[24] 영국은 경제 원조, 무역 통제, 선전 활동과 같은 '소프트 파워'를 적극 활용했다. 예를 들어, 독일로 향하는 모든 면화 선적을 차단하는 동시에, 미국의 면화 산업을 대규모로 지원하여 미국 남부 지역의 전쟁 지지를 유도했다.[24] 영국의 선전 활동은 자유주의 사상의 승리와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국제적인 호소력을 얻는 데 성공적이었으나, 독일의 선전은 상대적으로 비효율적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25] 연합국 선전은 독일을 군국주의와 동일시하고 벨기에 침공 및 RMS 루시타니아호 침몰 사건 등을 통해 이를 부각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1915년부터 파리에서 연합국 회의가 열려 동맹국 지원, 탄약 생산, 그리고 독일로 재수출될 가능성이 있는 중립국에 대한 원자재 배급을 조정했다. 영국은 이를 위해 블랙리스트 제도, 해운 통제 위원회, 봉쇄부를 신설하여 운영했다.
독일 해상 봉쇄는 영국 해군이 독일의 식량, 원자재 및 기타 물품 수입을 차단하기 위해 사용한 매우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이 과정에서 중립국의 권리가 침해되는 경우가 많아 미국의 항의를 받기도 했지만, 영국 외교는 이를 관리하며 봉쇄를 유지했다.[57] 영국은 네덜란드나 스웨덴 같은 중립국을 통해 독일로 물품이 흘러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중립국으로의 선적을 면밀히 감시하고, 거의 모든 상품을 금수품으로 지정하여 압수했으며, 중립국 대상 수입량 할당제를 실시하고, 연합국 항구에서 중립국 상선을 수색했다. 또한 독일과 거래하는 미국 기업들을 블랙리스트에 올리기도 했다.[57] 미국은 이러한 조치에 항의했지만,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궁극적으로 영국의 정책을 용인하는 입장을 취했다.[58]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영국은 전후 세계 질서에 대한 구상에도 관여했다. 1916년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내각이 들어서면서 미래의 전쟁을 방지하기 위한 국제 기구 설립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다. 로이드 조지 총리는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요구에 부응하여 국제 연맹 창설 구상을 지지했다.[33] 외무 장관 아서 발푸어는 지속적인 평화를 위해서는 국제법과 조약을 뒷받침할 국제적 제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33] 1918년 1월 5일, 로이드 조지는 영국의 전후 비전을 발표했으며, 이는 윌슨 대통령의 14개조 원칙 발표보다 3일 앞선 것이었다.[129] 영국과 미국의 구상은 민족 자결과 국제 기구 창설 등 많은 부분에서 일치했지만, 전쟁 배상금 문제나 공해 자유 원칙 등에서는 이견을 보이기도 했다.[129]
발푸어 선언은 영국 외교의 중요한 결정 중 하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오스만 제국을 분할하여 영국은 남부 지역을, 프랑스는 북부 지역을 차지하기로 계획했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지위에 대해 영국 내각은 여러 요인을 고려했다. 이집트 방면에서 영국군이 진격함에 따라 팔레스타인 지역이 연합국 통제 하에 들어갈 것이 예상되었고, 이에 대한 계획 발표가 필요했다. 이미 1915년 10월, 이집트 주재 영국 고등 판무관 헨리 맥마흔 경은 아랍 지도자 메카의 샤리프 후세인 빈 알리에게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대가로 아랍 민족의 독립을 지지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었다.[49] 한편,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시온주의 운동이 확산되고 있었고, 유대인에게 팔레스타인에 '민족적 고향'을 약속하는 것은 이들의 지지를 확보하는 데 유리하다고 판단되었다. 또한 기독교 시오니즘을 신봉하는 개신교도들의 성지 회복에 대한 열망과, 외무 장관 아서 발푸어 개인의 동유럽 유대인 박해에 대한 우려 및 시온주의 지도자 하임 와이츠만과의 교류도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17년 11월, 발푸어는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을 위한 "민족적 고향(national home)" 건설을 영국 정부가 지지하며,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내용의 선언을 발표했다. 동시에 팔레스타인 내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적, 종교적 권리나 다른 나라에 거주하는 유대인의 권리 및 정치적 지위를 침해하지 않을 것임을 명시했다.[50][51] 이 선언은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비밀 승인을 받았으며[52][53], 1922년 국제 연맹이 영국에 부여한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 문서에 포함되었다.[54] 그러나 이 선언은 이후 아랍 민족과의 심각한 갈등을 야기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55] 영국 정부 내에서는 오스만 제국 분할을 통해 중동에 대한 영국의 통제를 강화하려던 '급진파'의 입장이 반영된 결과라는 분석도 있다.[56]
4. 2. 프랑스
1914년까지 프랑스 외교 정책은 러시아와의 동맹과 영국과의 비공식적인 협력에 기반을 두었으며, 양국 모두 독일을 주요 위협으로 간주했다.[59][60][61]1914년 위기가 발생하자, 독일이 러시아의 동원령에 대응하여 군대를 동원함에 따라 프랑스 역시 동원령을 내려야 했다. 이후 독일은 파리를 신속히 점령하여 전쟁에서 승리하려는 슐리펜 계획의 일환으로 벨기에를 침공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전쟁은 1918년까지 서부 전선에서 참혹한 교착 상태로 이어졌다.[62]
전쟁 중 외교적 주도권은 대부분 영국이 가졌지만, 모든 핵심 사안에 대해서는 파리와 긴밀히 협의했다.[63] 1916년 영국과 체결한 사이크스-피코 협정은 오스만 제국을 분할하여 프랑스와 영국의 영향력 범위를 나누는 비밀 협정이었다. 이 협정에 따라 프랑스는 터키 남동부, 이라크 북부, 시리아, 레바논 지역을 통제하게 되었다.[64]
전쟁 수행 과정에서 프랑스의 재정 상황은 악화되었다. 1916년에는 신용도가 크게 하락하여 영국으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대출받기 시작했다. 뉴욕의 J.P. 모건 & Co. 은행은 1916년 가을 프랑스 대출을 인수했으며, 1917년 미국이 전쟁에 참전하자 이 대출 업무는 미국 정부로 이관되었다.[65][66] 프랑스의 직접적인 전쟁 비용은 약 101억달러(1913년 기준)에 달했으며, 이는 당시 국가 소득의 26%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프랑스는 동맹국에 11.040000000000001억달러를 대출해주었고, 미국과 영국으로부터는 29.089999999999996억달러를 대출받았다.[35]
프랑스는 막대한 전투 사상자와 재정적 손실을 겪었으며, 독일 점령 지역은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패전국 독일에 대한 강경한 입장은 프랑스의 주요 목표였고, 클레망소 총리는 비교적 온건한 입장을 취하려던 영국과 미국의 영향을 상당 부분 막아냈다. 프랑스는 막대한 배상금을 확보하고 알자스-로렌을 되찾았으며, 아프리카에 있던 이전 독일 식민지의 일부를 위임 통치하게 되었다.[67]
전쟁 중 프랑스와 영국은 군사 및 외교적으로 긴밀히 협력했다. 프랑스 외교의 주요 목표 중 하나는 이러한 긴밀한 관계를 영구적으로 유지하고 미국을 포함한 민주주의 삼각 동맹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은 파리 강화 회의에서 수립된 새로운 유럽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군사력을 사용할 의지가 부족했다. 로이드 조지나 우드로 윌슨의 관점에서 클레망소의 요구는 중부 유럽을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는 과도한 것으로 여겨졌다. 영국은 전쟁 이전의 제국 중심적 이해관계로 돌아갔고, 프랑스를 잠재적 경쟁자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군사 동맹을 거부했으며, 윌슨 대통령의 건강 악화로 인해 외교 정책은 방향성을 잃었다.[68]
4. 3. 러시아
서부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진 것과 달리, 동부 전선에서는 수백 마일에 걸친 광범위한 전투가 벌어졌다. 1914년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러시아군 대규모 병력이 포위되어 패배한 것을 시작으로, 오스트리아와 독일은 러시아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1916년 브루실로프 공세가 실패로 돌아간 이후 러시아의 군사적 역량은 약화되었고,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인한 내부 혼란은 군의 붕괴를 가속화했다. 결국 러시아는 전쟁에서 이탈하게 되었고, 새롭게 수립된 볼셰비키 정부는 1918년 3월 3일 동맹국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해야 했다. 이 조약으로 독일은 동유럽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게 되었다.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새로운 볼셰비키 정부와 동맹국 사이에 맺어졌다. 역사학자 스펜서 터커는 "독일 참모진은 독일 협상가조차 충격을 받을 정도로 매우 가혹한 조건을 공식화했다"고 평가했다.[130] 조약에 따라 러시아는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우크라이나, 리투아니아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해야 했다. 폴란드는 조약에 명시되지 않았지만 독일의 점령 하에 놓였다. 일부 영토는 터키에 할양되었으며, 러시아는 60억 독일 금 마르크에 달하는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이 조약은 독일에 여러 전략적 이점을 제공했다. 가장 큰 이점은 동부 전선의 주력 부대를 서부 전선으로 이동시켜, 미국의 본격적인 참전 이전에 연합국보다 병력 우위를 점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또한 동유럽 대부분을 통제하려는 독일의 전쟁 목표를 달성했으며, 러시아의 곡창지대였던 우크라이나를 통해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내부적으로 혼란스러워 약속된 식량이 독일로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볼셰비키 정부가 내전에 집중하기 위해 독일과의 전쟁을 시급히 끝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군사적 관점에서 이 조약은 러시아에게 재앙이었지만, 러시아의 전쟁 이탈은 연합국에게는 차르 정부 시절의 외교적 제약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특히 전쟁 후 영토 획득에 관한 러시아와의 약속들이 무효화되었다. 또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의 가혹한 조건은 연합국에게 독일과의 협상 평화가 불가능하며, 명확한 승리를 거둘 때까지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이 조약은 독일이 1918년 11월 휴전 협정을 체결하면서 무효가 되었다.[131] 이후 독일이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이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불평했을 때, 연합국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보다는 온건한 조건이라고 반박했다.[132]
4. 4. 미국
미국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은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미국을 중립으로 유지하고 타협적인 평화를 중재하려는 2년 반의 노력 끝에 1917년 4월에 이루어졌다. 윌슨은 1917년 초 참전 결정을 내릴 때 최소한의 협의만을 거쳤다.[110]1914년 전쟁 발발 당시 미국인 대다수는 전쟁을 예상하지 못했으며, 전쟁 발발로 여객선 운항이 중단되자 유럽에 있던 10만 명이 넘는 미국 시민들이 고립되었다. 이들은 주로 관광, 사업, 친척 방문 목적으로 유럽에 머물고 있었다. 당시 런던에 거주하던 민간인 신분의 허버트 후버는 이들의 귀환 노력을 이끌었다.
1914년 8월, 미국의 전 대통령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는 일본과 미국이 중립을 유지한다면 유럽 전쟁 종식을 위한 중재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111] 윌슨 대통령 하에서 미국은 중립을 유지했다. 윌슨은 정부의 모든 행동이 중립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교전국들이 미국의 중립을 존중하고 국제법 규범을 준수할 것을 요구했다. 1914년 8월 상원에서 그는 미국이 "행동뿐만 아니라 생각에서도 공정해야 하며... 어느 한쪽을 선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모든 거래뿐만 아니라 우리의 감정에도 제약을 가해야 한다"고 말했다.[112] 그러나 윌슨 자신도 개인적으로는 연합국에 동정적이었다. 그는 최고 외교 고문인 커널 하우스에게 독일이 승리할 경우 미국의 문명이 바뀌고 군사 국가가 될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했으며, 더 나은 국제 윤리 강령을 위한 자신의 정책이 저해될 것이라는 깊은 유감을 나타냈다. 그는 특히 독일의 벨기에 침공과 벨기에 조약을 "단지 종잇조각"으로 취급한 독일 총리의 태도에 분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윌슨은 이러한 개인적인 감정이 미국의 공식적인 엄격한 중립 정책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113]
1914년부터 1916년까지 미국의 여론은 영국을 지지하는 일부 친영파를 제외하고는 강력하게 중립을 선호했다. 독일계 미국인 공동체 역시 중립을 요구했으며, 중앙 강대국 편에 서자는 주장은 거의 없었다. 윌슨 행정부는 경제를 평시 상태로 유지했고, 전쟁에 대한 군사적 준비나 계획을 세우지 않았으며, 육군과 해군을 작은 평시 규모로 유지했다.[114]
전쟁 중 교전국들이 사용한 주요 간접 전략은 해상 봉쇄였다. 영국 해군은 독일로 향하는 전쟁 물자와 식량 수송을 효과적으로 차단했다. 국제법상 허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과 교역하려던 중립국 미국의 선박들은 나포되거나 회항 조치되었다. 독일 역시 잠수함을 이용한 영국 봉쇄로 맞섰다. 1915년, 독일 잠수함이 영국 여객선 루시타니아호를 격침시켜 100명 이상의 미국인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윌슨 대통령은 잠수함을 이용한 상선 공격이 "공정한 규칙, 이성, 정의, 그리고 모든 현대적 의견이 필수적이라고 간주하는 인도성을 무시하지 않고서는 상업 파괴에 사용할 수 없다는 실질적인 불가능성에 놓여있다"며 강력히 항의했다.[115] 루시타니아호 침몰 사건은 미국 여론을 연합국 쪽으로 기울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영국 역시 선박 나포를 통해 미국의 중립적 권리를 침해했지만, 인명 피해를 발생시키지는 않았다.[116]
독일 정부는 미국의 항의를 받아들여 잠수함에 여객선 공격 중단을 명령했다. 그러나 1917년 1월, 독일 군부 지도자인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영국으로 향하는 모든 선박에 대한 무제한 잠수함 공격 재개가 전쟁 승리의 유일한 길이라고 판단했다. 그들은 이것이 미국과의 전쟁을 초래할 것임을 알았지만, 미국이 군사력을 동원하기 전에 승리할 수 있다고 도박했다. 그들은 미국의 군사력이 약해 1년 이상 서부 전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정확히 예측했지만, 호송선단이 잠수함 공격의 효과를 크게 떨어뜨릴 것이라는 점은 계산하지 못했다. 독일의 민간 정부는 이 결정에 반대했지만, 빌헬름 2세 황제는 군부의 손을 들어주었다.[117]
윌슨 대통령은 1918년 1월 14개조 평화 원칙에서 밝혔듯이, 공격적이고 비민주적인 군국주의 국가가 존재하는 한 평화는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는 평화가 자유 민주주의에 기반한 세계 질서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미국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싸워야 할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118]
미국 내 다양한 민족 집단들은 전쟁에 대해 각기 다른 입장을 보였다. 유대계 미국인들은 초기에는 러시아 제국에 대한 반감 때문에 연합국 지지를 주저했지만, 1917년 2월 러시아에서 차르 정권이 무너지자 이러한 반감이 사라졌다. 특히 영국이 발포어 선언을 발표하고 윌슨이 이를 지지하자 유대인들의 연합국 지지는 더욱 커졌다. 아일랜드계 가톨릭 신자들은 영국에 대한 적대감 때문에 연합국 지원에 반대했지만, 윌슨은 전쟁 후 아일랜드 독립 문제를 고려할 것처럼 암시하며 이들의 반발을 일부 무마하려 했다. 그러나 전후 윌슨이 이 약속을 지키지 않자 아일랜드계의 불만은 커졌고, 이는 1919년 국제 연맹 가입 반대와 1920년 대선에서 민주당에 대한 미온적인 지지로 이어졌다.[119] 독일계 미국인들은 강력하게 중립을 지지했으며,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하자 대체로 침묵을 지켰다. 이들은 잠재적 불충성 혐의로 감시를 받았으나 실제적인 불충성 사례는 거의 없었으며, 전쟁 이후 독일계 미국인 공동체의 정치적 영향력은 크게 줄어들었다.[120] 스칸디나비아계 미국인들도 대체로 중립을 선호했다.[121]
1916년경부터 미국 내에서는 국가적 이익과 민족주의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유럽 전선의 막대한 사상자 수는 미국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전쟁이 세계사의 결정적인 사건이 될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평화 중재 노력은 번번이 실패했고, 헨리 포드가 후원한 민간 평화 사절단은 별다른 성과 없이 평화주의에 대한 조롱만 샀다. 독일 첩보원들의 활동, 특히 미국의 여론 조작 시도와 파괴 공작 계획이 드러나면서 독일에 대한 반감과 경계심이 커졌다. 프란츠 린텔렌 폰 클라이스트와 같은 독일 첩보원들은 캐나다에서의 파괴 공작, 미국과 멕시코 간의 갈등 조장, 노동 파업 선동 등에 자금을 지원했다. 이러한 사건들은 미국 사회 내부에 스파이와 사보타주에 대한 광범위한 불안감을 조성했으며, 이는 독일에 대한 두려움과 독일계 미국인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졌다.[122] 미국인들은 점차 강력한 군대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준비 운동(Preparedness Movement)'은 언론을 통해 미군의 준비 부족 실태(계획, 장비, 훈련 부족, 국가방위군의 문제점 등)를 폭로하며 군비 증강을 촉구했다. "국가의 탄생"(1915)이나 "평화의 포효"(1915) 같은 영화들은 가상적인 미국의 침략을 묘사하며 군사적 대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123]
미국의 참전 과정은 3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미국 여론이 극적으로 변화했음을 보여준다. 1914년 전쟁을 끔찍한 실수로 여기며 참전을 결사 반대했던 미국인들은 1917년에는 참전이 필요하고 도덕적으로 옳다고 강하게 믿게 되었다.[124] 이 과정에서 군사적 고려보다는 도덕성과 미래에 대한 비전이 중요한 논쟁점이었다. 미국은 자유와 민주주의 원칙에 헌신하는 우월한 도덕적 지위를 가진 국가이며, 반동적인 제국들의 다툼에서 벗어나 이러한 이상을 지켜야 한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1917년에는 민주주의와 자유에 반하는 세력이 승리할 심각한 위험에 직면했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제인 애덤스와 같은 여성 지도자들,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등은 평화주의와 도덕주의를 강력히 주장했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윌슨주의를 내세운 윌슨 대통령이었다.[125]
1917년, 민주당원인 윌슨은 "세계를 민주주의를 위해 안전하게 만드는 전쟁"을 선포함으로써 대부분의 도덕주의자들의 지지를 얻어 정치적 수완을 발휘했다. 그는 미국인들이 진정으로 자신들의 이상을 믿는다면 지금이 바로 싸워야 할 때라고 역설했다. 미국인들은 이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했다.[126]
1917년 초 베를린은 이 문제를 강제했다. 공해상에서 모든 선박을 침몰시키려는 결정은 미국의 참전을 촉발한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1917년 3월에는 5척의 미국 상선이 침몰했다. 결정적으로, 독일 외무장관 아르투르 치머만이 멕시코에 동맹을 제안하며 미국과의 전쟁에 참여하면 텍사스, 뉴멕시코, 애리조나 등 과거 멕시코 영토를 되찾도록 돕겠다는 내용의 치머만 전보가 공개되면서 미국 내 분노는 극에 달했다. 격앙된 여론의 지지 속에서 윌슨은 1917년 4월 2일 의회에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를 요청했다. 그는 세계를 민주주의를 위해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 미국은 전쟁에 참여할 도덕적 책임이 있다고 선언했다. 세계의 미래는 전장에서 결정되고 있었으며, 미국의 국익은 발언권을 요구했다. 윌슨의 상황 정의는 널리 찬사를 받았고, 실제로 그 이후로 미국의 세계 및 군사 문제에서의 역할을 형성했다. 윌슨은 독일이 승리한다면 그 결과가 미국에 좋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1918년에 14개조 평화 원칙이 된 노선을 따라 미국이 형성한 "승리 없는 평화"를 해결책으로 제시했다.[127]
미국은 공식적인 동맹 조약을 맺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연합국의 '협력 파트너(Associated Power)'로서 전쟁에 참여했다. 미국은 연합국과 조약을 맺지 않았지만, 고위급 접촉을 유지했다. 윌슨은 커널 하우스에게 영국 관리들과 협력하는 핵심 역할을 맡겼다. 미국이 참전을 선포하자마자 영국은 1917년 4월~5월에 고위급 발포어 미션을 파견했다. 프랑스도 같은 시기에 별도의 미션을 파견했다. 두 미션의 주요 목적은 연합국의 대의를 홍보하고, 전시 협력을 위한 계획을 세우는 것이었다. 발포어는 윌슨과 하우스 대령을 만나 영국과 프랑스가 이탈리아 등과 맺은 비밀 조약을 검토했다. 대표단들은 국가 정부, 금융, 산업 및 정치 분야의 많은 고위 지도자들을 만나 영국의 입장을 설명했다. 다른 회의에서는 탄약 및 기타 수출품 공급, 그리고 제안된 발포어 선언에 대해 논의했다. 영국은 잠수함 위협에 대항하기 위한 해군 지원을 요청했지만, 미국 육군의 규모가 작다는 것을 알고 처음에는 병력 파병을 요청하지 않았다.[128]
미국과 영국은 모두 1918년 1월에 이상적인 전후 세계에 대한 비전을 발표했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영국 총리는 1월 5일에 영국의 비전을 발표했고, 윌슨은 1월 8일에 자신의 14개조를 발표했다. 윌슨의 선언은 전 세계, 특히 1918년 10월까지 자체 조건으로 평화를 결정한 독일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다른 연합국들은 전후 계획을 발표하지 않았는데, 이는 주로 독일로부터의 현금 배상과 오스트리아 및 터키로부터의 특정 영토 획득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영국과 미국의 선언은 상당 부분 겹쳤다. 두 선언 모두 민족의 자결권을 명시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새로운 국제 기구(국제 연맹)의 창설을 명시했다. 그러나 그들은 패전국이 지불해야 할 배상금에 대해 의견이 달랐는데, 윌슨은 처음에는 이에 반대했다. 윌슨은 또한 무역 장벽 완화, 특히 공해 자유를 원했지만, 영국은 이를 지지할 수 없었다.[129]
4. 5. 이탈리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은 이탈리아에게 독일 및 오스트리아와의 삼국 동맹 유지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만들었다. 이탈리아는 삼국 동맹이 방어적 목적만을 위한 것이었다는 명분 하에 6개월 동안 중립을 유지했다. 중립을 선호하는 강력한 대중적, 엘리트적 정서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정부는 1915년 봄 전쟁 참전을 결정했다. 당시 이탈리아는 크고 가난한 국가였으며, 정치 체제는 혼란스러웠고 재정은 심각하게 압박받았으며 군대는 매우 부실하게 준비되어 있었다.[90]삼국 동맹은 이탈리아인이나 오스트리아인에게 큰 의미가 없었으며, 실제로 빈은 로마와 상의 없이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탈리아 외교 정책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안토니오 살란드라 총리와 시드니 손니노 외무장관 두 사람이 모든 결정을 내렸다. 그들은 비밀리에 활동하며 나중에 국왕을 끌어들였지만, 군 및 정치 지도자들은 완전히 배제했다. 그들은 양측과 협상하여 최고의 조건을 얻어내려 했고, 결국 연합국으로부터 더 좋은 조건을 얻어냈다. 연합국은 티롤과 트리에스테를 포함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상당 부분을 약속했을 뿐만 아니라, 알바니아를 이탈리아의 보호령으로 만들려고 했다. 다만 러시아는 이탈리아가 달마티아를 차지하는 것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영국은 오스트리아의 남쪽 측면을 위협할 3,600만 명의 이탈리아인을 새로운 동맹국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보조금과 대출을 기꺼이 제공했다.[91][92]
4. 6. 일본
일본은 연합국에 가담하여 중국과 태평양 섬에 있던 독일의 자산을 점령하고, 러시아와 거래를 맺었으며, 확장을 위해 중국에 강력한 압력을 가했다.[93] 1915년에는 새롭고 취약한 중화민국에 21개조 요구를 비밀리에 제시했다. 이 요구에는 이전 독일의 자산, 만주 및 내몽골에 대한 지배권, 중국 중부의 주요 광업 및 야금 복합 시설의 공동 소유, 중국이 어떤 해안 지역도 제3국에 양도하거나 임대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 그리고 다른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통제가 포함되었다. 그 결과는 중국을 사실상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중국 정부와의 지지부진한 협상, 광범위한 중국의 반일 감정과 국제적 비난에 직면하여, 일본은 1915년 5월 조약이 체결될 때 최종 요구 사항 그룹을 철회해야 했다.[94]일본의 북중국 지배는 다른 국제 협정을 통해 용이해졌다. 1916년 러시아와의 협정은 만주와 내몽골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더욱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1917년 프랑스, 영국, 그리고 미국과의 협정은 일본의 새로운 영토 획득을 인정했다. 일본의 대중국 차관은 중국을 더욱 묶어두었다. 1917년 말 러시아에서 볼셰비키가 정권을 장악한 후, 일본군은 바이칼 호 서쪽까지 러시아 시베리아를 점령하기 위해 움직였다. 중국으로부터 통행권을 허락받은 후, 7만 명 이상의 일본군이 러시아 내전의 연합국 개입의 일환으로 1918년 7월 시베리아에 파견된 연합 원정군의 훨씬 더 작은 부대에 합류했다.[95]
4. 7. 오스만 제국

1914년 오스만 제국은 약 2,500만 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 중 터키인이 1,400만 명이었고 다수의 아랍인, 아르메니아인, 그리스인 및 기타 소수 민족이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유럽의 환자"로 불리던 오스만 제국은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서방 국가들에 비해 크게 뒤처져 있었다. 지난 20년간 유럽 열강에게 여러 차례 패배를 겪으며 1913년에는 북아프리카 영토 전부와 동트라키아를 제외한 유럽 영토 대부분을 상실했다. 개혁 시도에도 불구하고 경제는 여전히 전통적인 방식에 머물러 있었지만, 독일의 강력한 영향 아래 철도 건설 등 일부 현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1914년 콘스탄티노플의 오스만 정부는 동맹국 편에 서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오스만-독일 동맹 참조). 오스만 군대는 이미 오토 리만 폰 산더스 장군 등 독일 군사 고문단의 지도를 받고 있었다. 영국은 오스만 제국이 독일과 동맹을 맺을 것을 예상하고, 오스만 제국이 비용을 지불하고 건조 중이던 드레드노트급 전함 두 척을 압수했다. 오스만 제국은 연합국과의 협상에서 매우 큰 양보를 요구했으나 협상은 결렬되었다. 대신 8월 초, 독일과 비밀 동맹을 맺고 이전 전쟁에서 러시아, 그리스, 세르비아에 빼앗긴 영토를 되찾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괴벤과 브레슬라우 추격 사건에서 독일 군함 두 척은 전쟁 초기 콘스탄티노플로 피신했다. 독일 선원들이 탑승하고 있었지만, 이 배들은 공식적으로 터키 해군에 편입되어 술탄의 명령을 따랐다. 1914년 10월, 이 군함들은 흑해의 러시아 항구를 공격했고, 며칠 후 오스만 제국과 연합국 간의 상호 전쟁 선포로 이어졌다.
독일의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은 회고록에서 오스만 제국의 참전 덕분에 수적으로 열세였던 동맹국이 2년 더 전쟁을 지속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으며, 역사가 이안 F.W. 베켓도 이 견해에 동의한다.
오스만 제국은 여러 전선에서 전투를 벌였다. 흑해와 코카서스 전선(동부 터키와 러시아령 코카서스), 메소포타미아 전선(이라크), 시나이 및 팔레스타인 전선(1917년부터), 그리고 갈리폴리 전투에서 연합군과 싸웠다.
영국은 1917년부터 1918년까지 스위스에서 오스만 대표들과 비밀 평화 회담을 가졌으나, 오스만 지도부의 내부 분열과 영국의 추가 영토 점령 의지로 인해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1916년에 시작된 아랍 반란은 중동 전선에서 오스만 제국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무드로스 휴전 협정은 1918년 10월 30일에 체결되었고, 이후 세브르 조약의 조건에 따라 오스만 제국의 분할이 계획되었다. 이 조약은 술탄의 지위와 칭호는 유지하도록 했으나, 콘스탄티노플 점령과 이즈미르 점령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훗날 '아타튀르크'라는 성을 받음)가 이끄는 터키 민족 운동을 촉발시켰다. 이들은 터키 독립 전쟁(1919–1923)에서 승리했다. 오스만 술탄국은 1922년 11월 1일에 폐지되었고, 마지막 술탄 메흐메트 6세(재위 1918–1922)는 1922년 11월 17일에 국외로 망명했다. 오스만 칼리파국은 1924년 3월 3일에 폐지되었다.

아르메니아인 학살은 오스만 정부가 자국 내 아르메니아 민족을 의도적이고 체계적으로 제거하려 한 사건이다.[152][153] 1915년, 러시아 코카서스군이 동부 지역으로 진격해오자 오스만 군대는 이 지역에 거주하던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인종 청소를 시작했다. 학살은 두 단계로 진행되었다. 첫째, 건강한 남성들을 살해하거나 강제 노역에 동원했고, 둘째, 여성, 어린이, 노인, 병자들을 시리아 사막으로 향하는 죽음의 행진에 강제로 내몰았다. 군대의 감시 아래 이동하면서 이들은 식량과 물을 빼앗기고 주기적으로 강도, 강간, 학살의 대상이 되었다.[154] 외교적으로 연합국은 이 학살에 대응하려 했다. 오스만 관리들은 학살 사실을 부인했고, 동맹국인 독일은 이를 은폐하는 데 협조했다. 연합국 정부는 외교적 노력을 통해 학살을 막으려 했으나 무시당했다.[155] 1915년 5월 24일, 연합국은 공동 성명을 통해 아르메니아인 "대량 학살"을 규탄하며, 이를 "인류와 문명에 대한 새로운 범죄"로 규정하고 전쟁 후 책임자들에게 개인적인 책임을 묻겠다고 선언했다. 전승국들은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이 문제를 제기했지만 실질적인 후속 조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156] 일부 고위 관리들이 새로운 오스만 정부에 의해 재판을 받았고, 당시 망명 중이던 최고 지도자들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1923년 로잔 조약은 나머지 관련자들에게 사면을 부여했다.[157]
4. 8. 불가리아

발칸 전쟁에서 패배하고 제한적인 영토 획득에 그친 불가리아는 배신감을 느끼며 이전 동맹국이었던 러시아에 등을 돌렸다. 1914년부터 1915년까지 불가리아는 중립을 유지했다. 1915년,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를 군사적으로 격파하여 독일에서 터키로 이어지는 보급선을 확보하고 동부 전선에서 러시아에 대항하기 위해 불가리아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불가리아는 참전의 대가로 상당한 영토 확장을 요구했으며, 특히 마케도니아 지역을 원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처음에는 이를 꺼렸으나 베를린의 압력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불가리아는 연합국과도 협상했지만, 연합국이 제시한 조건은 중앙 열강보다 덜 관대했다. 결국 1915년, 자유주의 성향의 바실 라도슬라보프 총리가 이끄는 정부는 불가리아를 중앙 열강과 동맹을 맺도록 이끌었다. 이는 불가리아의 전통적인 정치적, 종교적 적대국이었던 오스만 제국과 같은 편에 서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 불가리아는 오스만 제국에 대한 영토적 주장은 없었으나, 세르비아, 그리스, 루마니아가 불가리아의 정당한 영토라고 믿었던 지역을 점령한 것에 대해 강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불가리아는 1915년 9월 독일 및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동맹 조약을 체결했으며, 이 조약은 전후 불가리아가 발칸 지역을 지배하는 구상을 담고 있었다.[158][159]
불가리아군은 1915년부터 1917년까지 군사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으나, 1918년 여름부터 그 효율성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는 식량이 부족했고, 전선에서는 탄약 부족으로 병사들의 사기가 저하되었다. 전쟁 피로감이 누적되면서 불가리아 지도층과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 독일의 의도에 대한 불신도 커졌다. 병사들은 장기화되는 전쟁에 배신감을 느꼈으며, 많은 이들이 무슬림 국가인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고 같은 정교회 신자인 다른 민족들과 싸우는 것에 대해 분개했다. 1918년에 이르러 불가리아 지도부는 국민의 지지를 상실했다. 1917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2월 혁명은 불가리아 내에 존재하던 많은 불만을 표면화시켰고, 반전 및 반군주제 정서가 빠르게 확산되었다. 결국 1918년 6월 라도슬라보프 정부는 사임했다. 1918년 9월, 연합군은 29개 사단, 70만 명의 병력으로 공세를 시작했고 불가리아 전선은 빠르게 붕괴되었다. 차르 페르디난트는 퇴위했고, 군대는 반란을 일으켰다. 새로운 불가리아 정부는 연합군의 진격 앞에서 항복하고 휴전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오스만 제국은 남은 중앙 열강과 지리적으로 분리되었고, 10월 30일 자체적으로 휴전에 동의하며 곧 붕괴했다.
1919년, 불가리아는 연합국에 의해 뇌이 조약 체결을 강요받았다. 이 조약의 조건은 매우 가혹했다. 불가리아는 에게해 항구를 통한 지중해 접근권을 포함하여 더 많은 영토를 상실했다. 결과적으로 불가리아는 제1차 발칸 전쟁에서 얻기 위해 싸웠던 영토 대부분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었다. 전쟁 자금 조달을 위해 독일로부터 빌린 부채는 파리에서 탕감되었으나, 이는 연합국이 부과한 1억 파운드의 막대한 제1차 세계 대전 배상금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었다. 이 배상금은 당시 심각한 경제난을 겪고 있던 불가리아의 현실적인 재정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160]
5. 신생 국가
제1차 세계 대전은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독일 제국과 같은 거대 제국들의 붕괴를 가져왔고, 이는 동유럽과 발트해 연안 지역에서 여러 민족들이 독립 국가를 세우는 계기가 되었다. 오랫동안 외세의 지배 아래 있던 민족들은 전쟁의 혼란 속에서 민족 자결주의 원칙에 힘입어 독립을 향한 열망을 실현하고자 했다.
전쟁 전 분할 상태였던 폴란드는 연합국과 동맹국 사이에서 외교적 노력을 펼치며 독립을 모색했고, 결국 전쟁 후 독립 국가를 재건하는 데 성공했다. 우크라이나 역시 독립을 선포했으나, 주변 강대국들의 개입과 내부 혼란 속에서 영토가 분할되는 아픔을 겪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 과정에서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은 연합국의 지지를 바탕으로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을 수립했다.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던 발트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또한 러시아 혁명과 내전의 혼란기를 거치며 독립을 쟁취했다. 이들 신생 국가의 등장은 전후 유럽의 정치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5. 1. 폴란드
폴란드는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한 세기 넘게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독일 제국에 의해 분할된 상태였다. 전쟁 중 폴란드 영토는 수많은 전투가 벌어지는 주요 전장이 되었고, 이는 주로 러시아의 패배로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다각적인 외교 활동을 펼쳤다.[161]폴란드인들은 전쟁으로 고통받는 민간인들의 참상을 알려 국제적인 동정 여론을 얻으려 했으며, '폴란드 문제', 즉 독립 폴란드 국가 수립의 필요성을 국제 사회의 주요 의제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식량 구호를 위한 노력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전쟁 당사국인 연합국과 동맹국 양측 모두 폴란드인 병력이 필요했기에, 폴란드의 충성과 군대 징병을 대가로 각종 약속과 미래의 자치권을 제안하며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커져갔다.[161]
러시아 측에서는 폴란드의 자치권을 인정하고 연합국을 지지하는 폴란드 국민 위원회의 결성을 허용했다. 러시아 외무장관 세르게이 사조노프는 폴란드인에게 자체적인 내부 행정, 종교의 자유 보장, 학교와 행정에서의 폴란드어 사용이 가능한 자치 폴란드 왕국 창설을 제안하기도 했다.[162] 로만 드모프스키와 같은 민족주의 지도자는 연합국을 설득하여 우선 러시아 통치 하의 폴란드 영토를 하나로 통합하고, 이를 독립의 발판으로 삼으려 했다.[163]
한편,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등 동맹국 측에서는 유제프 피우수트스키가 러시아 제국을 폴란드 독립의 주적으로 간주하고, 러시아를 격파하기 위해 폴란드 군단을 조직하여 동맹국을 지원했다. 그러나 독일 제국은 폴란드의 완전한 독립보다는 괴뢰 국가를 세우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동시에 폴란드 국경 지대 계획을 통해 점령지에서 수백만 명의 폴란드인을 추방하고 그 자리에 독일인을 정착시키려는 민족 청소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전쟁 후반, 1917년 러시아에서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동부 전선에서 이탈하자 상황은 급변했다. 볼셰비키 정부는 사실상 동유럽에 대한 통제권을 독일에 넘겨주었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연합국이 기존에 러시아와 맺었던 폴란드 관련 약속에서 자유로워지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미국의 전쟁 참전은 윌슨 대통령이 전쟁의 목표를 민주주의 확산과 피압박 민족의 해방으로 내세우는 계기가 되었다.[164] 윌슨 대통령이 발표한 14개조 평화 원칙 중 13번째 조항은 폴란드의 부활을 연합국의 주요 전쟁 목표 중 하나로 명시했다. 이에 따라 폴란드 내 여론은 연합국 지지로 확고히 기울었고,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역시 독일과의 협력을 거부했다.
1918년 10월, 폴란드인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통치 하에 있던 갈리치아와 체신 실롱스크 지역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1918년 11월,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바르샤바로 돌아와 새로 수립된 폴란드 공화국의 임시 국가 원수로서 통치권을 행사했다. 전쟁 막바지에 각 지역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지방 정부들도 곧 바르샤바의 중앙 정부에 충성을 맹세했다. 이로써 폴란드는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러시아령 폴란드), 서부 갈리치아(당시 리비우는 우크라이나 군대에 의해 포위된 상태였다), 그리고 체신 실롱스크의 일부 지역을 통제하는 독립 국가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5. 2.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 역사는 폴란드와 달리 국제 사회의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미국 내 우크라이나인 인구가 적었던 탓에 윌슨 대통령 역시 이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다.[165]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명한 우크라이나인들은 내부의 격렬한 갈등을 극복하고 우크라이나 국가 라다(Rada)를 설립했으며, 여러 분열 끝에 우크라이나 국가 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위원회는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고 다양한 구호 및 정보 활동을 펼쳤다. 특히 오스만 제국을 대상으로 활발한 로비 활동을 벌였으나, 당시 오스만 제국은 큰 영향력을 행사할 입장이 아니었다.[166]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1918년 1월 22일 독립을 선포했다. 이 신생 국가는 러시아, 영국, 프랑스의 승인을 받았으며,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독일과 동맹국들의 승인을 얻어내려 했고, 1918년 2월에 이를 달성했다. 그러나 독립 우크라이나는 처음부터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으며, 자국 영토를 완전히 통제하지 못했고 끊임없이 내외부의 적들에게 위협받았다.[167] 역사가 오레스트 수브텔니는 당시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1919년 우크라이나에는 완전한 혼란이 휩싸였다. 실제로 유럽의 현대 역사에서 이 시기에 우크라이나만큼 완전한 무정부 상태, 격렬한 내전, 권위의 완전한 붕괴를 경험한 국가는 없었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볼셰비키, 백군, 연합국(프랑스), 폴란드, 아나키스트 등 여섯 개의 군대가 이 영토에서 활동했다. 키예프는 1년도 안 되어 다섯 번이나 주인이 바뀌었다. 도시와 지역은 수많은 전선으로 서로 단절되었다. 외부 세계와의 통신이 거의 완전히 끊어졌다. 기아에 시달리는 도시들은 식량을 찾아 사람들이 시골로 이동하면서 텅 비었다.[168]
영국은 전쟁 기간 동안 우크라이나를 독일의 괴뢰국으로 간주했다.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영국의 수상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는 우크라이나 지도자 시몬 페트류라(1874–1926)를 모험가로 폄하하며 그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았다.[169] 결국 1922년까지 폴란드가 서부 우크라이나를, 볼셰비키 러시아가 동부 우크라이나를 장악하게 되었다.[170]
5. 3. 체코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독일의 영향력 아래 놓이며 외교적으로 수동적인 역할을 수행했다.[137][138] 전쟁이 길어지면서 제국 내 민족적 단결은 약화되었고, 연합국은 소수 민족의 분리 요구를 부추기며 제국은 해체의 위기에 직면했다. 1916년 말 즉위한 카를 1세 황제는 연합국과의 평화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139][140][141] 제국의 경제난과 군대의 사기 저하는 소수 민족의 분리주의 운동을 더욱 강화시켰다.[142]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14개조 중 하나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국민들에게 자율적 개발을 위한 가장 자유로운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고 요구했다.[145] 이에 카를 1세는 1918년 10월 16일, 제국 내 각 민족 집단이 자치권을 가지는 연방제를 골자로 하는 선언("1918년 10월 16일 황제 선언")을 발표했다.[146] 이 선언은 제국의 오스트리아 지역(시스라이타니아)을 독일, 체코, 남슬라브, 우크라이나의 4개 부분으로 구성된 연방으로 개편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제국 내 민족 지도자들은 이미 완전한 독립을 목표로 하고 있었기에 이 제안을 거부했다.[146]

1917년 10월 14일, 체코슬로바키아 임시 정부는 연합국에 가담했다.[175] 1918년 10월 18일, 미국 국무 장관 로버트 랜싱은 연합국이 체코, 슬로바키아, 남슬라브 민족의 독립을 지지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카를 황제가 제안한 자치권 부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답변하며 사실상 연방제 제안을 거부했다.[147][148] 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를 결정짓는 계기가 되었다.[148]
전쟁 패배가 임박하고 미국의 지지를 확인하자, 체코 정치인들은 1918년 10월 28일 프라하에서 평화적으로 제국의 통치권을 인수했다. 이 날은 훗날 체코슬로바키아의 건국 기념일이 되었다. 며칠 뒤인 10월 30일에는 슬로바키아인들이 마틴에서 이에 합류했다. 앞서 10월 29일,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은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 국가 수립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5. 4. 발트 3국
남쪽의 리투아니아, 중앙의 라트비아, 북쪽의 에스토니아를 묶어 부르는 발트 지역은 본래 러시아 제국의 일부였다. 1905년 혁명과 1917년 2월 러시아 혁명 이후 이 지역에서는 민족주의 의식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1917년 10월에 이르러서는 자치 요구가 독립 요구로 발전했다.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5년부터 1917년까지 독일군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진격하며 발트 지역을 점령하고 군정을 실시했다. 전쟁 기간 동안 대규모 군대가 오가면서 리가는 일곱 번이나 정권이 바뀌는 혼란을 겪었다. 세 나라 전역에서 민간인 공격, 강제 추방, 초토화 작전, 강제 수용소 운영 등이 자행되었으며,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러시아로, 심지어 시베리아 동부의 블라디보스토크까지 피난을 가야 했다.[171]
혼란 속에서 현지 민족주의자들과 볼셰비키는 여러 차례 권력을 장악하려 시도했다. 볼셰비키는 1917년 5월까지 이스콜라트 정권으로, 이후 라트비아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라트비아를 통제했으나 결국 축출되었다. 볼셰비키는 또한 에스토니아를 통제하다가 1918년 초 독일군에 의해 쫓겨났다. 소련의 붉은 군대는 1918년 12월부터 1919년 1월까지 세 나라 모두를 침공했지만, 1919년 8월까지 핀란드의 지원을 받은 현지 군대에 의해 격퇴되었다. 마침내 1920년, 소비에트 정부와 세 발트 국가 사이에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고, 이들은 1940년까지 독립을 유지했다.[172][173]
한편, 빌뉴스 주변의 리투아니아 남부 지역은 1920년부터 1922년까지 중앙 리투아니아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다. 이는 사실상 폴란드가 통제하는 괴뢰 국가였으며, 1922년 폴란드에 공식적으로 병합되었다. 폴란드의 빌뉴스 점령은 리투아니아와의 관계를 극도로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174]
6. 결론
1914년 독일의 벨기에 침공은 영국이 전쟁에 참여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으나, 벨기에 정부 자체는 외교 문제에서 제한적인 역할을 수행했다.[86] 벨기에는 주로 중립국으로부터 구호 물품을 받는 통로 역할을 했으며, 연합국은 벨기에를 독일에 대한 선전 도구로 활용했는데, 특히 독일군에 의한 잔학 행위, 소위 '벨기에 강간' 사건을 강조했다.
1914년 8월 2일, 독일 정부는 벨기에 영토를 자유롭게 통과할 수 있도록 허가할 것을 요구했으나, 벨기에 정부는 다음 날인 8월 3일에 이를 거부했다.[87] 알베르 1세 국왕은 8월 4일 의회 연설에서 "1830년 이후 벨기에에게 이보다 더 심각한 순간은 없었다. 우리의 권리와 유럽의 자율적 존립에 대한 필요성이 우리로 하여금 두려운 사건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희망을 갖게 한다."라고 말하며 벨기에의 권리와 유럽의 자율성 수호 의지를 천명했다.[88] 같은 날 새벽, 독일군은 벨기에를 침공했다. 전쟁 기간 동안 벨기에 영토 대부분은 독일에 점령되었고, 서쪽 끝의 일부 지역만이 벨기에군의 통제 하에 남았다. 벨기에 정부는 프랑스의 생테아드레스로 이전하여 망명 정부를 운영했으며, 아프리카의 벨기에령 콩고에 대한 통제는 유지했다. 벨기에는 공식적으로 독일과 전쟁 상태를 유지했지만, 실제 전투 참여는 미미했으며 연합국에 공식적으로 합류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무부 장관 폴 위망은 연합국으로부터 공동 교전국 지위를 약속받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1916년 2월 생테아드레스 선언을 통해 영국, 프랑스, 러시아는 벨기에가 향후 평화 협상에 참여하고, 독립을 회복하며, 독일에 의한 피해에 대해 금전적 보상을 받을 것임을 보장했다.
전후 처리 과정인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벨기에는 오랜 중립국 지위를 공식적으로 포기하고, 독일로부터 가장 먼저 배상금을 받는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영토 요구는 대부분 받아들여지지 않아 독일 영토의 일부만을 할양받았으며, 룩셈부르크 전체와 네덜란드 일부 지역에 대한 요구는 거부되었다. 대신 벨기에는 과거 독일 식민지였던 르완다와 부룬디에 대한 국제 연맹의 위임 통치권을 얻었다. 폴 위망은 파리 강화 회의에서 소국들을 대표하는 주요 인물로 활동했으며, 새롭게 창설된 국제 연맹의 첫 번째 총회 의장을 맡기도 했다.
한편, 전쟁 발발 직후인 1914년, 위망은 미국 워싱턴 D.C.를 방문하여 우드로 윌슨 대통령으로부터 벨기에에 대한 구호 및 식량 지원 약속을 확보했다. 이러한 구호 활동은 주로 미국인 허버트 후버의 지휘 아래 벨기에 구호 위원회(Commission for Relief in Belgium, CRB), 미국 구호 관리국(American Relief Administration, ARA), 벨기에의 국립 구호 및 식량 위원회(Comité National de Secours et d'Alimentation) 등 여러 기관의 협력으로 이루어졌다.[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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