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조갑제는 1945년 일본에서 태어나 대한민국 공군에서 복무 후, 1971년 국제신문 기자로 언론계에 입문했다. 1974년 한국기자상을 수상했으며, 박정희 정부 비판으로 해직되기도 했다. 이후 월간 마당, 월간조선 등에서 활동하며 탐사보도에 주력했고, 월간조선 편집장과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1998년부터는 보수 논객으로 활동하며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비판하고 박정희를 재평가했으며, 현재는 조갑제닷컴을 통해 시사 평론을 하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조선일보사 - 방우영
방우영은 조선일보의 회장으로서 조선일보의 성장을 이끌었으며, '밤의 대통령'이라 불릴 정도로 영향력이 컸고, 언론 사업 확장과 사회 공헌 활동에도 참여한 언론인이다. - 조선일보사 - 조만식
조만식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 한국의 민족주의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로, 간디의 비폭력 저항 사상에 영향을 받아 실력 양성 운동에 참여하고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주도했으나, 한국 전쟁 중 처형되었다. - 대한민국 공군 군인 - 김동완 (1935년)
김동완(1935년)은 기상캐스터, 방송인으로 활동하며 KBS, MBC, TBC 등에서 일기예보를 진행했고, 저서로는 《날씨 때문에 속상하시죠》, 《날씨의 신비》가 있다. - 대한민국 공군 군인 - 김상우 (정치인)
김상우는 김대중 대통령 후보 외교특보로 정계에 입문하여 제15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국제안보대사, 노무현 대통령 후보 외신대변인, 민주당 광진갑 지구당위원장, 사단법인 EACOS 사무총장 등을 역임한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 국민중심당 - 정진석 (정치인)
정진석은 1960년 충청남도 공주 출생으로 한국일보 기자 출신이며, 16, 17, 18, 20, 21대 국회의원을 역임하고 이명박 정부에서 대통령 정무수석비서관을 지냈으며, 20대 국회에서 새누리당 원내대표와 국회 부의장을 역임했다. - 국민중심당 - 심대평
심대평은 대한민국 정치인으로, 충청남도지사, 국회의원, 국민중심당 대표, 자유선진당 대표 등을 역임했으며, 17대 대선 후보로 출마했다가 사퇴하고 정계 은퇴 후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조갑제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한글 이름 | 조갑제 |
한자 이름 | 趙甲濟 |
로마자 표기 | Jo Gap-je |
출생일 | 1945년 10월 24일 |
출생지 | 일본 사이타마현 사이타마 |
국적 | 대한민국 |
학력 | 부산수산대 중퇴 |
직업 | 언론인 작가 정치인 사회운동가 문인 경영인 |
정당 | 무소속 |
종교 | 개신교(예장고신) |
자녀 | 2녀 |
웹사이트 | 조갑제닷컴 트위터 조갑제TV 공식 유튜브 페이지 |
경력 | |
주요 활동 | 월간조선 대표 역임 국민행동본부 설립 |
기타 | |
참고 자료 | 인물연구]전 월간조선 대표 조갑제] [[https://www.n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72890 반골기자에서 극우논객으로 ‘비판의 펜’ 조갑제 미국도 꿰뚫어보는 한국의 '반일 연극' 창립66주년 정기총회 조갑제 씨,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군대에 가지 않은 나라" 조갑제 대표의 교양 강좌 낙담한 어른들에게 (상) |
2. 생애
대한민국 경기도 출신으로, 출생 직후 한국으로 돌아와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수산대학교에 진학했으나 중퇴하였다. 1971년 국제신보(후의 국제신문)에 입사하여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1974년 중금속 오염 추적 보도 등으로 한국기자상을 7회 수상하였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여 두 차례 정직 처분을 받았고, 5·18 민주화 운동을 직접 취재하려다 해고당하였다.
이후 서울로 이주하여 1983년 월간조선 편집부에 입사하였다. 박정희 대통령 피살 사건을 취재하면서 박정희를 근대 혁명가로 평가하게 되었다. 1991년부터 2004년까지 월간조선 편집장으로 재임하였고, 이후 인터넷 매체 "조갑제닷컴"을 중심으로 언론 활동을 하고 있다.[5] 조선일보에 따르면 2019년 5월 기준 정치·사회·경제 관련 유튜브 채널 116개 중 해당 채널은 누적 조회수 1억 319만 회로 5위를 차지했다.[9]
2. 1. 초기 생애 및 학창 시절
1945년 10월 24일 일본 사이타마현에서 2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1946년 부모를 따라 고향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으로 돌아와 초등학교까지 성장하였다.[10] 이후 가정 형편 때문에 경상남도 부산시로 이주하여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고교 재학 시절 미국과 일본의 프로야구 중계방송에 빠져 단파라디오로 하루 4~6시간씩 미국과 일본의 프로야구 중계를 들으며 영어와 일어를 익혔다. 그의 외국어 능력은 기자 생활 당시 취재 영역을 넓히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10] 부산수산대학에 입학하였지만 군 복무 후 복학을 포기하였다.[10]2. 2. 언론인 활동
1971년 부산 국제신보 (국제신문의 전신)에 입사하여 기자 생활을 시작했고, 1981년 상경하여 월간 마당에 창간 멤버로 입사하여 2대 편집장을 지낸 후 1983년부터 월간조선 기자로 활동하였다. 과거 군사독재 정권 시절에 체제비판적 언론인으로 명성을 떨쳤으나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기점으로 심경에 변화를 일으켜 1990년대 이후로는 보수주의 성향의 논객으로 활동하고 있다.조선일보에 입사한 이래 주로 탐사보도 방면에서 활동했는데, 그 과정에서 10·26 사태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죽음에 관해 집중적으로 보도하게 된다. 그가 박정희 전 대통령 연구에 평생 매달리게 된 것도 10·26 취재가 그의 정치적 감성을 자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조갑제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의 민족주의적 ‘조국 근대화’ 논리에 깊이 천착하고 이에 경도됐기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
1987년 6월에는 민주화 운동의 선봉에 나서기도 했다.[14] 1991년부터 월간조선의 편집장을 역임하면서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 화해 정책을 비판했고, 박정희 재평가에 힘써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라는 전기를 조선일보에 연재하기도 했다.
1974년 중금속 오염 추적 보도 등으로 한국기자상을 7회 수상하였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여 두 차례 정직 처분을 받았고, 5·18 민주화 운동에서는 직접 취재하려다 해고당하였다. 이후 서울로 이주하여 1983년에 월간조선 편집부에 입사하였다. 이때 박정희 대통령 피살 사건을 취재한 것을 계기로 박정희를 근대 혁명가로 평가하게 된다. 1991년에 월간조선 편집장이 되어 2004년까지 재임하였고, 이후 인터넷 매체 "조갑제닷컴"을 중심으로 언론 활동을 펼치고 있다.[5] 조선일보에 따르면 2019년 5월 기준 정치·사회·경제 관련 유튜브 채널 116개 중 해당 채널은 누적 조회수 1억 319만 회로 5위를 차지했다.[9]
2. 2. 1. 국제신문 기자 시절
1971년 부산 국제신보 (국제신문의 전신) 입사 시험에 1위로 합격하며 기자 생활을 시작하였다.[10] 1974년 중금속 오염 실태를 취재해 기사를 연재했는데, 이 기사로 입사 4년차인 만 29세에 한국기자상(7회)을 수상했다. 조갑제는 당시 박정희를 비판한 글을 자신만큼 많이 쓴 사람이 없다며, 사회부 기자로서 권력에 쓰러져 가는 사람들, 고문 받는 사람들, 억울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쫓아다니면서 기사를 썼다고 한다.[11] 이 과정에서 박정희 정부를 비판하다 두 차례 강제 해직당했다.[12]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취재를 자청했던 것이 주요 동기가 되어 신군부에 의해 해직됐다.[10] 이 광주민주화운동 취재는 1985년 양대 월간지에 보도를 내놓기 시작하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노태우 정부가 들어선 다음인 1988년 국회에서 광주특위와 5공특위가 열리게 한 기초자료가 되었다.[13]2. 2. 2. 월간 마당 및 월간조선 기자 시절
1971년 부산 국제신보 (국제신문의 전신)에 입사하여 기자생활을 시작했고, 1981년 상경하여 월간 마당에 창간 멤버로 입사했다. '마당'의 2대 편집장을 지낸 후 1983년부터 월간조선 기자로 활동하였다.[10]1971년 부산 국제신보 입사 시험에 1위로 합격하며 기자생활을 시작,[10] 1974년 중금속 오염 실태를 취재해 기사를 연재했는데, 이 기사로 입사 4년차인 만 29세에 한국기자상(7회)을 수상했다. 그는 박정희를 비판한 글을 자신 만큼 많이 쓴 사람이 없다며, 사회부 기자로서 권력에 쓰러져가는 사람들, 고문 받는 사람들, 억울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쫓아다니면서 기사를 썼다고 한다.[11] 이 과정에서 박정희 정부를 비판하다 두 차례 강제해직 당했고,[12]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취재를 자청했던 것이 주요 동기로 신군부에 의해 해직됐다.[10] 특히 이 광주민주화운동 취재는 1985년 양대 월간지에 보도를 내놓기 시작하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 노태우 정부가 들어선 다음인 1988년, 국회에서 광주특위와 5공특위가 열리게 한 기초자료가 되었다.[13]
1981년 상경하여 월간 마당에 창간 멤버로 입사했고 르포 기사 분야에서 일했다. 당시 그의 대표적인 기사가 ‘부산 김근하(金根夏)군 유괴 살인 사건의 내막-하느님은 아신다. 그러나 기다리신다’는 기사였다.
2. 2. 3. 월간조선 편집장 및 대표이사
1983년부터 월간조선 기자로 조선일보에서 활동하였다. 1991년부터 월간조선의 편집장을 역임하면서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대북 화해 정책을 비판했고, 박정희 재평가에 힘써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를 조선일보에 연재하기도 했다. 2001년 월간조선의 독립 법인화에 따라 편집장 겸 대표이사로 재임했으나, 2004년에는 편집장, 2005년에는 대표이사 자리에서 각각 물러났다.[5]2. 3. 2000년대 이후 활동
1998년부터 조갑제는 자유민주주의 원칙을 확고히 한 보수 성향 논객으로 활동하며 김대중, 노무현 정부와 민족 해방 계열 정치인, 주체사상파(NL)와 민중 민주주의파(PD), 그리고 그들이 만든 반체제 시민단체를 비판했다.[5]1999년부터는 개인 홈페이지와 출판사 조갑제닷컴을 운영하며 활동 영역을 넓혔다. 이 두 매체를 통해 수구좌익 인사 및 좌파 정부, 설익은 우파 정부와 얼치기 보신기회주의 우익 모두를 비판하고 있다.[5] 현재는 강연을 통해 자신의 시국관과 이념을 전파하고 있으며, 정치 평론 사이트 조갑제닷컴에 자신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세계관을 지닌 인사, 독자들의 글을 선별해서 칼럼 형식으로 싣고 있다.[5] 조선일보에 따르면 2019년 5월 기준 정치·사회·경제 관련 유튜브 채널 116개 중 해당 채널은 누적 조회수 1억 319만 회로 5위를 차지했다.[9]
3. 정치·사회적 견해
1998년부터 조갑제는 자유민주주의 원칙을 확고히 한 보수 성향 논객으로 활동하며 김대중, 노무현 정부와 민족 해방 계열 정치인, 주체사상파(NL) 및 민중 민주주의파(PD), 그리고 그들이 만든 반체제 시민단체를 비판했다.[15] 1999년부터는 개인 홈페이지와 출판사 조갑제닷컴을 통해 수구좌익 인사 및 좌파 정부뿐만 아니라, 미숙한 우파 정부와 기회주의적인 보수 우익까지 비판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다.
대북(對北) 관계에 있어서는 원칙적인 태도를 고수하며, 김정일을 '민족반역자', '고난의 행군 시기 300만 동포들을 굶겨 죽인 국적(國賊)'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2000년 시드니 하계 올림픽 남북한 선수단 동시입장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시각을 보였다.[17]
광우병 쇠고기 파문에 대해서는 MBC와 KBS의 선동보도를 비판하며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을 주장했다.[18]
역사관에 있어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조국 근대화' 논리에 공감하며 그를 높이 평가했다.[10] 연개소문에 대해서는 북한의 김정일과 비슷하다며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고구려 멸망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비판했다.[21][22]
친일파 문제에 대해서는 "일제강점기에 한국인의 선택은 항일 독립 운동하여 죽거나 감옥에 갈 것인가 아니면 순응하여 살면서 실력을 길러 독립준비를 할 것인가의 양자택일이었다"고 주장했다.[25]
2009년 일본 우익 언론 <산케이 신문>의 구로다 가쓰히로 기자가 대한민국의 비빔밥을 '양두구육'이라고 비하한 발언에 대해 비판이 거세지자, 구로다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던 조갑제가 그의 발언을 감싸는 주장을 하였다.[26]
2019년에는 대남선전매체인 우리민족끼리에서 전광훈 목사와 김문수 전 지사에 대한 비판을 소개하는 글을 조갑제닷컴에 실으며 북한이 남한의 일거수일투족을 훈수한다고 비판하였다.
3. 1. 민주화 운동에 대한 입장
1998년부터 자유민주주의 원칙을 확고히 한 보수 성향 논객으로 활동하며 김대중, 노무현 정부와 민족 해방 계열 정치인, 주체사상파(NL)와 민중 민주주의파(PD)와, 그들이 만든 반체제 시민단체를 비판하는 활동을 했다.[15]언론에서 조갑제는 민주화 운동 자체를 좌익이라고 비판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4·19 혁명, 6·3 사태, 부마항쟁, 광주 민주화 운동, 1987년의 6월 항쟁을 근본적으로 반공성향의 반독재민주화운동이라고 규정하며, 이 운동 속에 소수의 좌익이 끼어 있었을 수도 있지만 대세를 이루지 못했고 주도권도 잡지 못했다고 주장한다.[15]
여기서 조갑제가 말하는 반공민주화운동은 멸공북진통일을 희망하는 군사독재 및 극우세력과 정반대로, 대한민국이 남북 분단의 장기화로 인해 마치 섬나라처럼 된 것을 인정하고 「"대한민국과 북한"이라는 선을 긋자」는 주장을 하는 것을 말한다.
3. 2. 5.18 민주화 운동 북한 개입설에 대한 반박
2013년 일부 종편이 탈북자의 발언을 인용해 5.18 민주화 운동에 북한이 개입했다고 보도하자 이를 반박하는 글을 개인 홈페이지에 싣기도 했다.[16]3. 3. 대북관
1998년부터 자유민주주의 원칙을 확고히 한 보수 성향 논객으로 활동하며 김대중, 노무현 정부와 민족 해방 계열 정치인, 주체사상파(NL) 및 민중민주주의파(PD), 그리고 그들이 만든 반체제 시민단체를 비판하였다.대북(對北) 관계에 있어서는 원칙적인 태도를 견지하며, 김정일을 '민족반역자', '고난의 행군 시기 300만 동포들을 굶겨 죽인 국적(國賊)'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평가한다. 2000년 시드니 하계 올림픽 남북한 선수단 동시입장에 대해서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각각 태극기와 인공기를 들고 따로 입장했어야 한다며 부정적인 시각을 보였다.[17] 그러나 최근엔 북한 핵 개발을 '자주국방' 차원에서 해석하기도 했다.[17]
3. 4. 광우병 파동에 대한 입장
뉴라이트가 주최한 광우병선동센터 KBS, MBC 규탄 기자회견에 참여하고, 광우병 쇠고기 파문에 대해서 “MBC와 KBS의 선동보도에 넘어가면 안 된다. 미국산 쇠고기는 절대적으로 안전하다”라고 입장을 밝혔다. 또 “이명박 대통령이 국민에게 직접 'MBC와 KBS의 선동보도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미국산 쇠고기가 안전하다'는 것을 확실히 얘기해줬어야 했다”며 이 대통령의 기자회견을 비판했다.[18] 한편, 조갑제닷컴에서는 “광우병이 미국에서 발생해도 계속 수입해야 한다는 문제에 대해 대책, 설명 없이 무조건 안전하다 하니 걱정할 수밖에 없다”며 “국민이 걱정하면 바로잡는 게 마땅한 정부의 자세다. 국민이 납득하고 안심할 수 있는 대책을 빨리 내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19]2008년 6월 18일, 한국방송 김영선 PD의 단박 인터뷰에 출연해 자신을 진보 논객이라고 주장함과 동시에 촛불시위는 청소년이 밤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미국산 쇠고기는 세계에서 가장 최고의 안전한 품질이라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미국산 소고기 대국민 사과에 대해 조갑제는 “진실을 밝히지 못하고 거짓말과 폭력에 항복했기 때문에 이런 사태가 빚어졌다고 했다”라고 말했고, 지지율이 떨어진 이유는 “이념이 없는 실용주의 노선을 발표하면서 소신을 밝히지 못해 보수층의 지지가 떨어진 것이다. 또한 초기 내각이 실패한 이유는 한반도는 이념 전쟁이 있는 곳인데도 불구하고 이 이념 전쟁터에서 이념을 버리고 그 노선에 맞는 고분고분하고 경험 없는 교수 중심의 내각으로 싸울 줄 모르는 사람들을 모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14]
3. 5. 역사관
조갑제는 조선일보 기자 시절 탐사보도를 통해 10·26 사태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죽음을 집중적으로 보도하면서 박정희 연구에 매달리게 되었다. 그는 박정희의 민족주의적 '조국 근대화' 논리에 깊이 공감하여 그를 높이 평가했다.[10]1987년 6월 민주화 운동 당시에는 시위대의 선봉에 서기도 했으나,[14] 1991년부터 월간조선 편집장을 맡으면서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대북 화해 정책을 비판하고 박정희 재평가에 힘썼다. 조선일보에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를 연재하기도 했다.
3. 5. 1. 신라에 대한 견해
문무왕이 자신의 조상을 김일제라 칭하여 사대모화적이라는 비판을 받자 조갑제는 이의를 제기하였다. 그는 문무왕이 모화사상에 젖어 족보를 조작하려 했다면, 왜 하필 중국 한족이 싫어하고 한나라에 반역했다가 도륙된 흉노족 김일제의 후손을 자처했겠느냐며 반론을 제기했다.[20]3. 5. 2.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
2008년 2월 조갑제는 연개소문을 북한의 김정일과 비슷하다고 평가하였다. 그 근거로 두 인물 모두 포악하고, 외교에 실패해 적국(연개소문은 당나라, 김정일은 미국)의 원수가 되었으며, 아들들을 잘못 키웠다고 지적하였다.[21] 또한 조갑제는 고구려 멸망의 결정적 원인을 제공했다고 보았다.[22] 그는 실패한 역사 인물이라 평가하였으며 그를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만든 것은 삐뚤어진 역사관의 발로라고 비판하였다.[21]조갑제는 고구려 추앙 분위기 속에서 대체로 연개소문이 과대평가되고 미화되었지 폄하된 적은 거의 없다고 하였으며, 연개소문 긍정론에 대해 연개소문을 통해서 신라의 삼국통일을 폄하하려는 의도를 지닌다며 비판하였다.[22]
조갑제는 또한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서강대학교 교수 이종욱(李鍾旭)의 글을 인용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22]
- 연개소문의 포악함은 고구려 백성들의 마음이 왕국을 떠나도록 했다.
- 집권 과정에서 100여 명의 대신들을 죽였다. 이들은 왕정을 담당하던 세력이었다.
- 쿠데타에 반대한 지방 세력을 장악하지 못했다. 따라서 나·당 연합군이 쳐들어왔을 때 국력을 총동원할 수가 없었다.
- 당나라와 싸우려면 국내의 단합을 도모해야 했는데 분열을 조장했다.
- 안시성에서 싸워 이긴 성주는 연개소문에 반대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연개소문의 도움 없이 당나라군을 무찔렀다.
- 연개소문은 당나라에 대한 두려움을 몰랐다.
3. 5. 3. 역대 대통령에 대한 평가
박정희를 역대 최고의 대통령으로, 김영삼을 최악의 대통령으로 각각 꼽는다. 김영삼은 지금의 좌파를 키워준 좌파의 숙주(宿主)라고 간주했다. 우파이면서 좌파가 활약할 수 있도록 한 실패한 대통령이라고 평가했다. 민주당계 정권을 친북좌파세력이라고 평가했다. “박정희는 모택동 군대와 싸웠고 비록 만주국 군인이었지만 항상 조국의 독립을 생각했고 민족정신이 강했다는 증언이 많다”라며 박정희가 친일파가 아님을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혈서, 좌익전력, 여자관계 등 박정희의 부정적인 부분은 대부분은 자신이 발굴했다며 박정희를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썼다고 주장했다. ‘남북정상회담’이라 하지 않고 ‘노무현-김정일 회담’이라 하기도 했다.[23][24]김대중에 대해서는 민주화를 위해 투쟁한 것은 인정하나, 6.15 선언 이후에 헌법과 배치되는 방향으로 가버렸다며 6.15 선언은 만악의 근원이라고 주장하였다.
3. 5. 4. 친일 청산 문제에 대한 입장
조갑제는 조갑제닷컴에 올린 '친일파와 친북파 비교'라는 글에서 "일제강점기에 한국인의 선택은 항일 독립 운동하여 죽거나 감옥에 갈 것인가 아니면 순응하여 살면서 실력을 길러 독립준비를 할 것인가의 양자택일이었다"고 주장했다.[25] 그는 조국이 없는 상태에서 독립운동에 적극적이지 못했다고 모두를 친일파로 모는 것은 불합리하며, 대부분 인사의 자발적이거나 타의에 의해서이거나 일제에 협력한 때가 40년 이후임도 감안해야 한다고 말했다.조갑제일본어는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과 관련해 ‘친일파보다 친북파가 더 나쁘다’라는 논지의 글을 올리며, ‘당시에 친일은 생존의 수단이었고 친일파들은 일제가 이길 것이란 잘못된 정보 때문에 친일을 한 것이다’라는 주장을 했다.[25]
조갑제일본어는 해방 후 70년, 광복 후 67년이 지난 시점에서 살아남은 친일파(부일파)는 거의 없으나, 4~586운동권이 기성세대가 된 이후로 친일타도 몰이가 6~70년대의 빨갱이 몰이 만큼이나 강력하다고 비판했다. 그는 적대하고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한 일본이라면 일본을 더 잘 이해하고 일본을 더 잘 이용하자는 용일론(用日論)까지 친일로 매도하는 전체주의가 횡행하는 것을 꼬집었다.
김구일본어는 귀국 후 "살아남은 사람 모두가 죄인이다"라고 말했으며, 장준하는 그의 글에서 김구일본어가 귀국 후 머물렀던 경교장이 친일파 이창학이 기부한 곳이었음을 언급했다. 조갑제일본어는 프랑스는 점령기간이 짧았지만 우리는 한 세대 이상을 당했음을 강조했다.
3. 6. 일본 관련 발언
2009년 12월 일본 우익 언론 <산케이 신문>의 구로다 가쓰히로 기자가 대한민국의 비빔밥을 '양두구육'이라고 비하한 발언에 대해 비판이 거세지자, 구로다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던 조갑제가 구로다의 발언을 감싸는 주장을 하였다.[26]3. 6. 1. 구로다 가쓰히로 비빔밥 비하 발언 옹호 논란
2009년 12월 일본 우익 언론 <산케이 신문>의 구로다 가쓰히로 기자가 대한민국의 비빔밥을 '양두구육'이라고 비하한 발언에 대해 비판이 거세지던 가운데, 구로다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던 조갑제가 "음식점 주인이 손님으로부터 지적을 당하면 '앞으로 더 잘 만들겠습니다'라는 모습을 보여야지 '싫으면 먹지 마!'라고 화를 낸다면 누가 그 음식점을 다시 찾겠는가?"라며 구로다의 발언을 감싸는 주장을 하였다.[26]3. 6. 2. 우리민족끼리 비판
1998년부터 자유민주주의 원칙을 확고히 한 보수 성향 논객으로 활동하며 김대중, 노무현 정부와 민족 해방 계열 정치인, 주체사상파(NL)와 민중민주주의파(PD), 그리고 그들이 만든 반체제 시민단체를 비판하는 활동을 했다.1999년부터는 운영해 온 개인 홈페이지와 출판사 조갑제닷컴으로 활동 영역을 옮겨, 이 두 매체를 통해 수구좌익 인사 및 좌파 정부, 설익은 우파 정부와 얼치기 보신기회주의 우익 모두를 비판하고 있다. 현재는 강연을 통해 자신의 시국관과 이념을 전파하고 있으며, 정치 평론 사이트 조갑제닷컴에 자신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세계관을 지닌 인사, 독자들의 글을 선별해서 칼럼 형식으로 싣고 있다.
2019년에는 대남선전매체인 우리민족끼리에서 전광훈 목사와 김문수 전 지사에 대한 비판을 소개하는 글을 조갑제닷컴에 실으며 북한이 남한의 일거수일투족을 훈수한다고 비판하였다.
4. 수상 경력
연도 | 수상 내역 |
---|---|
1974년 | 제7회 한국기자상 (한국기자협회) - 중금속 오염의 추적[1] |
1990년 | 한국잡지협회 제정 잡지기자상 |
1991년 | 제4회 아시아-태평양상 특별상 (마이니치 신문 주관) |
1994년 | 관훈클럽언론상 - 북한인권문제 보도 |
5. 저서
조갑제의 저서 목록한국어
제목 | 출판사 | 출판년도 | ISBN |
---|---|---|---|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 | 한길사 | 1987년 | ISBN 2007898000400 |
《거짓의 MBC를 끄자》 | 조갑제닷컴 | 2008년 | ISBN 9788992421393 |
《공수부대의 광주사태》 (재출간) | 조갑제닷컴 | 2007년 | ISBN 9788992421300 |
《이명박 혁명》 | 조갑제닷컴 | 2007년 | ISBN 9788992421287 |
《박정희 전기 -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전 13권) (재출간 합본) | 조갑제닷컴 | 2006년 | ISBN 8995772166 |
《김대중의 정체》 (재출간) | 조갑제닷컴 | 2006년 | ISBN 8995772107 |
《김현희의 하나님》 | 고시계사 | 1990년 | ISBN 2000383000299 |
《유고》(有故) | 한길사 | 1987년 | ISBN 2007898004248 |
- 일본어 저서
제목 | 번역자 | 출판사 | 출판년도 | ISBN |
---|---|---|---|---|
《한국을 震撼させた十一日間》 | 황 기 | JICC出版局 | 1987년 12월 | ISBN 4-88063-383-6 |
《한국의 뉴리더》 | 황 민기 | 講談社 | 1990년 6월 | ISBN 4-06-149009-5 |
《김현희는 고백한다: 대한항공 폭파 500일 후의 심정, 심층 취재》 | 이케다 기쿠토시(池田菊敏) | 德間書店 | 1990년 2월 | ISBN 4-19-144111-6 |
《북한 여성 비밀 공작원의 고백: 대한항공기 폭파 사건의 숨겨진 진실》 | 이케다 기쿠토시(池田菊敏) | 德間書店 | 1997년 11월 | ISBN 4-19-890788-9 |
《군부!: 말해지지 않은 한국의 어둠》 | 황 민기 | JICC出版局 | 1990년 7월 | ISBN 4-88063-938-9 |
《국가안전기획부: 한국 현대사의 그림자 권력!》 | 황 민기, 왕보윤(皇甫允) | JICC出版局 | 1990년 12월 | ISBN 4-7966-0030-2 |
《샤부!: 알려지지 않은 범죄 지하 제국의 생태》 | 황 민기 | JICC出版局 | 1991년 3월 | ISBN 4-7966-0096-5 |
《박정희: 한국 근대 혁명가의 실상》 | 나가모리 요시아키(永守良孝) | 亜紀書房 | 1991년 10월 | ISBN 978-4-7505-9119-3 |
《김정일과 김대중: 야심과 야망》 | 황 민기 | 講談社 | 2000년 9월 20일 | ISBN 4-06-272039-6 |
《「수령의 전사」김대중의 정체》 | 김선영 | 洋泉社 | 2006년 9월 | ISBN 4-86248-062-4 |
《박정희, 마지막 하루: 한국의 역사를 바꾼 총성》 | 배연홍 | 草思社 | 2006년 5월 | ISBN 4-7942-1496-0 |
《이명박 혁명: 보수주의가 한국을 구하다》 | 이영 | 作品社 | 2008년 3월 | ISBN 978-4-86182-186-8 |
《조선총독부: 봉인된 증언》 | 강창만 | 洋泉社 | 2010년 10월 | ISBN 978-4-86248-614-1 |
《북한 지옥에서 온 보고: 최신 기아 보고와 수용소 실태》 | 中根悠 | 河出書房新社 | 2001년 2월 24일 | ISBN 4-309-24240-5 |
《최악의 북한: 2004년,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다!》 | 中根悠 | 비즈니스샤(ビジネス社) | 2004년 1월 | ISBN 4-8284-1093-7 |
《북한 대봉쇄》 | 황민기(黄民基) | 講談社 | 2007년 4월 3일 | ISBN 978-4-06-213871-0 |
《김현희로부터의 편지(金賢姫からの手紙)》 | 西岡力 | 草思社 | 2009년 5월 1일 | ISBN 978-4-7942-1709-7 |
《일중한(日中韓) 역사 대논쟁(歴史大論争)》 | 櫻井よしこ, 타쿠보 타다에(田久保忠衛), 후루타 히로시(古田博司), 류 강영(劉江永), 호헤이(歩平), 김찬영(金燦栄), 조갑제(趙甲濟), 홍형(洪熒) | 文藝春秋 | 2010년 10월 20일 | ISBN 978-4-16-660777-8 |
참조
[1]
뉴스
(인물연구) 전 월간조선 대표 조갑제
http://news.naver.co[...]
Naver / Kyunghyang Sinmun
2008-06-26
[2]
웹사이트
[인물연구]전 월간조선 대표 조갑제
https://n.news.naver[...]
2024-02-01
[3]
웹사이트
친일파 파묘·KAL기 폭파·10.26, “내 무덤에 침 뱉어라”
https://www.ntoday.c[...]
2020-05-29
[4]
웹사이트
반골기자에서 극우논객으로 ‘비판의 펜’ 조갑제
https://www.khan.co.[...]
2008-04-10
[5]
웹사이트
米国も見透かす韓国の「卑日一人芝居」
http://business.nikk[...]
日経ビジネスオンライン
2013-09-12
[6]
웹사이트
창립66주년 정기총회
https://hamanjo.com/[...]
함안조씨 부산화수회
2015-06-15
[7]
웹사이트
趙甲済氏「大統領と国務総理が軍隊へ行かなかった国」
https://japanese.joi[...]
中央日報
2009-09-11
[8]
웹사이트
趙甲済代表の教養講座 落胆している大人たちへ(上)
http://news.onekorea[...]
統一日報
2018-01-01
[9]
웹사이트
韓国の既存メディアへ異論 百家争鳴、保守論客がユーチューブで活躍中(1/2)
https://www.koreawor[...]
2019-08-23
[10]
뉴스
[인물연구]전 월간조선 대표 조갑제
https://news.naver.c[...]
뉴스메이커
2008-06-26
[11]
방송
백지연의 피플INSIDE 조갑제편
TvN
2009-12-11
[12]
뉴스
반골기자에서 극우논객으로 ‘비판의 펜’ 조갑제
https://news.naver.c[...]
2008-04-10
[13]
잡지
‘救國의 논객’vs‘안보상업주의자’ 조갑제의 비밀
http://www.donga.com[...]
신동아
2006-08-01
[14]
웹사이트
단박인터뷰 조갑제 발언
http://www.kbs.co.kr[...]
2008-07-30
[15]
뉴스
조갑제 "극성우파, 민주화운동을 좌익으로 몰면 안돼"
https://news.naver.c[...]
동아일보
2007-03-16
[16]
웹사이트
조갑제닷컴, "대대규모 북한군의 광주개입" 주장은 믿을 수 없다!
http://www.chogabje.[...]
2013-05-20
[17]
뉴스
조갑제 "외국군 주둔은 사대주의... 노예근성 벗어나야"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13-06-10
[18]
뉴스
촛불 이용한 무시무시한 정부 전복... 문건 있다
http://www.ohmynews.[...]
[19]
뉴스
조갑제발언
http://www.dailyseop[...]
오마이뉴스
2013-06-10
[20]
서적
한국 7대 불가사의
위즈덤하우스
2007
[21]
뉴스
민족사 2대 쾌거, 신라통일·대한민국 건국
http://www.freezonen[...]
프리존뉴스
2008-02-24
[22]
웹사이트
자료집: 亡國的 역사관-新羅죽이기에 답한다
http://www.chogabje.[...]
조갑제
[23]
뉴스
조갑제 “박정희가 친일파면 나는 매국노”
http://www.dailian.c[...]
[24]
뉴스
대통령 군사분계선 넘을 때 교도소 담장 넘는다 느껴
http://www.ohmynews.[...]
[25]
뉴스
조갑제, “친일은 기본적으로 생존의 수단”
http://news.khan.co.[...]
경향닷컴
2009-11-09
[26]
뉴스
조갑제, '비빔밥 망언' 구로다 적극 옹호
http://www.viewsnnew[...]
뷰스앤뉴스
2009-12-30
[27]
뉴스
강정구-조갑제, 알고보니 부산高 동기동창
http://www.donga.com[...]
동아일보
2005-10-14
[28]
뉴스
극과 극은 통한다? 조갑제-강정구 알고보니 고교 동창
https://archive.toda[...]
중앙일보
2005-10-24
[29]
웹사이트
“대한민국에 서민은 없어, 국가 위하는 국민만 있어요”
http://news.khan.co.[...]
2011-05-02
[30]
뉴스
서울의 향토인들-(16)언론계
https://news.naver.c[...]
[31]
뉴스
2007년 大選 승리의 主役은 양갑(兩甲)이다.
http://nac.or.kr/art[...]
조선일보
[32]
뉴스
조갑제, 이제 그만 '저주의 굿판'을 거두어라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9-08-2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