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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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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길찬은 신라 시대의 관료와 장군에게 수여된 관등으로, 다양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여러 인물들이 이 관등을 받고 활약했다. 이들은 지방관, 외교 사절, 군사 지휘관 등으로 활동하며 신라의 정치, 군사, 외교 등 다양한 분야에 기여했다. 일길찬에 임명된 인물들은 소문국 정벌, 일본 파견, 고구려 정벌, 백제 격퇴 등 다양한 군사적, 외교적 활동을 수행했으며, 일부는 반란 진압에 참여하거나 부정부패로 처벌받기도 했다.

2. 관료

신라 시대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일길찬 관직에 임명되었다.


  • 대곡(大谷)은 292년(유례이사금 9) 왜병이 사도성(경상북도 영덕군)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을 때 왕명을 받아 군사를 이끌고 가서 사도성을 되찾은 장군이다.
  • 안나함(安那含)은 670년(문무왕) 신라군의 장수가 되어 고구려 부흥군과 연합하여 당나라군을 공격하였다. 671년 안시성을 함락하고, 672년 평양을 거쳐 백수성(白水城)을 수복하는 과정에서 당나라군을 격퇴하였지만, 석문(황해도 서흥) 싸움에서 여러 장수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 흥선(興宣)은 155년(아달라 이사금 2년) 일길찬에 임명되었고, 168년 4월 이찬(伊飡)에 임명되었다.
  • 자간(自簡)은 660년 (태종무열왕 7년) 백제 공격 후 좌평(佐平) 충상(忠常)·상영(常永)과 함께 일길찬 관등을 받고 총관(摠管)에 임명되었다. 661년(문무왕 1년)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한 고구려 공격에 하주총관(下州摠管)으로서 참가하였다.
  • 양질(良質)은 281년(미추 이사금 20년) 일길찬이 되었으며, 283년 백제가 침범했을 때 군사를 이끌고 나가 물리쳤다.
  • 장웅(張雄)은 822년(헌덕왕 14년) 김헌창의 난 진압에 공을 세워 상을 받았다.
  • 진공(眞功)은 681년(신문왕 1년) 김흠돌(金欽突)의 반란에 동조하였다가 죽임을 당했다.
  • 양신(良臣)은 672년(문무왕 12) 고구려 부흥군을 진압하기 위해 참전하였으나 당나라군에 패하고 전사하였다.
  • 예파(穢破)는 655년 백제·고구려 연합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하여 일길찬에 추증되었고, 세인들은 「양산가(陽山歌)」를 지어 슬퍼하였다.
  • 충상(忠常)은 백제부흥운동을 진압한 나당연합군의 장수이며, 좌평, 일길찬, 총관, 아찬(阿飡)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 직선(直宣)은 266년(미추 이사금 5년) 봉산성(烽山城)을 공격한 백제군을 물리친 공으로 일길찬에 임명되었다.
  • 현승(玄昇)은 918년(경명왕 2년) 모반(謀反)하다가 처형되었다.
  • 김흠운(金歆運·金欽運)은 신라의 왕족 출신 군인이다.

2. 1. 김살유

金薩儒|김살유일본어는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된 신라의 관리였다.

2. 2. 구수혜

185년(벌휴 이사금 2년) 2월에 파진찬(波珍飡) 구도(仇道)와 함께 좌우군주(左右軍主)에 임명되어 소문국(경상북도 의성군) 정벌에 참여하였다.

2. 3. 김유길

貢調使|공조사일본어705년 (성덕왕 4년)에 일본에 다녀온 사신이다.

2. 4. 홍필

841년(문성왕 3년) 일길찬의 관등으로 모반을 꾀하다가 발각되어 해도로 도망쳤다.

2. 5. 제일

701년(효소왕 10년) 5월 영암군 태수(지방관)로 있으면서 공익을 위배하고 사리(私利)를 탐하다가 장(杖) 100대의 형을 받고 섬에 유배되었다.

2. 6. 아진함

672년(문무왕 12년) 일길찬 관등으로 거열주(居烈州:경상남도 거창군) 대감(大監)으로 있었다. 백제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신라까지 차지하려는 당나라와 적대 관계가 계속되자, 당나라의 고간(高侃)이 거느린 군사 1만 명과 이근행(李謹行)이 거느린 군사 3만 명이 신라를 공격하였다. 신라군과 당나라군은 대방(帶方: 황해도 평산)에서 싸워 처음에는 신라군 장창당(長槍幢)의 활약으로 신라가 승리하였으나, 장창당의 공을 시기한 다른 당의 후퇴로 계속 패하여 거열주까지 밀려 내려왔다. 이때 상장군(上將軍)에게 “공들은 빨리 가라. 내 나이 70이니 얼마나 더 살 수 있겠는가. 오늘이 바로 내가 죽을 날이다.”라고 하면서 아군을 피신시키고 적진에 돌진하여 전사하였고, 그의 아들도 따라 죽었다.

2. 7. 김인장

김지성의 아버지이며, 중아찬(重阿飡)의 관등에 올랐다. 아들 김지성은 아버지 김인장과 어머니 관소리(觀肖里) 부인을 위해 20여 리의 전장(田莊)을 희사하여 감산사(甘山寺·남월산南月山)를 짓고 돌미륵 하나를 만들었다. 또한 개원(愷元) 이찬(伊飡), 동생 양성(良誠) 소사(小舍)와 현도사(玄度師), 누이 고파리(古巴里), 전처 고노리(古老里)와 후처 아호리(阿好里), 서형 급한(及漢) 일길찬과 일당(一幢) 살찬(薩飡), 총민(聰敏) 대사(大舍), 누이동생 수힐매(首肹買) 등을 위해 이러한 선행을 베풀었다.

2. 8. 장흔

297년(유례 이사금 14년) 일길찬(一吉飡)에 임명되었고, 299년(기림 이사금 2년)에는 이찬(伊飡)에 임명되어 내외(內外)의 병마사(兵馬事)를 관장하였다.

2. 9. 김상경

668년 한산주(漢山州) 소감(少監)으로 김유신 휘하에서 고구려 원정에 참전했다. 사천원(蛇川原)에서 대아찬 김문영(金文潁) 등과 함께 고구려군을 크게 격파하여 승리했으나, 김상경은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사천원 전투로 고구려군의 사기가 꺾여 평양성이 함락되는 결과를 낳았고, 이후 김상경은 일길찬(一吉飡) 관등과 조(租·벼) 1,000석을 추증받았다.

2. 10. 박경한

668년(문무왕 8년) 8월 신라당나라의 연합군이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할 때 한산주소감(漢山州少監)의 직책으로 출전하여 평양성의 군주(軍主)인 술탈(述脫)을 죽였다. 이 싸움으로 고구려는 멸망하였고, 보장왕은 대신 등 20여만 명과 함께 당나라에 포로로 끌려갔다. 그해 10월 고구려 정벌에 대한 전공을 논의할 때 평양성 대문의 싸움에서 공이 큰 흑악령(黑嶽令) 선극(宣極)과 사천싸움에서 공이 큰 대당소감(大幢小監) 본득(本得)과 함께 일급 공로자로 인정받아 일길찬의 관등을 제수받고 조(租) 1,000석(石)을 하사받았다.

3. 장군

신라 시대에는 많은 장군들이 군사적 업적을 세웠다. 다음은 그 중 일부 장군들에 대한 정보이다.

3. 1. 대곡

유례 이사금 9년(292년) 왜병이 사도성(沙道城: 경상북도 영덕군)을 공격하여 함락하자 왕명을 받아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사도성을 수복한 장군이다.

3. 2. 안나함

安那含|안나함중국어문무왕 10년(670년) 일길찬의 관등으로 신라군의 장수가 되어 고구려 부흥군의 태대형 고연무와 신라 장군 설오유가 이끄는 연합군에 참여하였다. 이 연합군은 압록강을 건너 당나라군을 공격하였고, 671년에는 고구려 부흥군의 전초기지였던 안시성을 함락시켰다. 문무왕 12년(672년)에는 평양을 거쳐 백수성을 수복하는 과정에서 황해도 서흥석문에서 당나라군을 격퇴하였으나, 安那含|안나함중국어은 여러 장수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3. 3. 양질

281년(미추 이사금 20년) 정월에 일길찬이 되었으며, 283년 9월 백제가 변경을 침범하여 같은 해 10월 괴곡성(충청북도 괴산)을 에워싸자, 왕명을 받고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이를 물리쳤다.

3. 4. 장웅

822년(헌덕왕 14년) 3월, 김헌창이 웅천주 도독(熊川州都督)직을 이용하여 난을 일으켰다. 김헌창은 국호를 ‘장안(長安)’이라 하고, 연호를 ‘경운(慶雲)’이라 칭하며 신라 9주 5소경 가운데 4주 3소경을 장악하는 등 크게 기세를 떨쳤다. 이에 일길찬(一吉飡) 관등의 장웅은 진압 부대의 선발대로 참전하였다. 장웅은 잡찬 위공(衛恭)과 파진찬 제릉(悌凌)이 이끄는 후발대와 함께 도동현(道冬峴)에서 반군을 무찌르고, 삼년산성(三年山城, 지금의 충청북도 보은군)을 공격해 함락시켰으며, 속리산으로 이동해 적병을 섬멸하였다. 난이 평정된 후, 장웅은 그 공을 인정받아 상을 받았다.

3. 5. 양신

672년(문무왕 12) 고구려 부흥군 진압을 위해 평양에 이르러 한시성(韓始城)·마읍성(馬邑城)을 공격하고 백수성(白水城) 부근에 군영을 짓자 일길찬(一吉湌) 관등으로 참전했다. 그는 고구려 부흥군과 함께 석문으로 퇴각한 당나라군을 공격했으나 크게 패하고 전사했다.

3. 6. 충상

忠常중국어백제부흥운동을 나당 연합군의 일원으로 정벌한 장수이다. 관직은 백제의 좌평(佐平), 신라의 일길찬(一吉飡), 총관(摠管), 아찬(阿飡)을 역임하였다.

4. 기타


  • 김살유(金薩儒) :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된 관리였다.
  • 구수혜(仇須兮) : 185년(벌휴 이사금 2년) 2월에 파진찬(波珍飡) 구도(仇道)와 함께 처음으로 좌우군주(左右軍主)에 임명된 지방관리로 소문국(召文國: 경상북도 의성군)을 정벌하였다.
  • 대곡(大谷) : 292년(유례 이사금 9년) 왜병의 사도성(沙道城: 경상북도 영덕군) 공격으로 함락되었을 때 왕명을 받아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사도성을 수복한 장군이다.
  • 김유길(金儒吉) : 705년(성덕왕 4년)에 일본에 다녀온 사신으로 공조사(貢調使)였다.
  • 김상경(金相京) : 668년 한산주(漢山州)소감(少監)으로 김유신(金庾信) 휘하에서 고구려 원정에 출전한 장군이다. 사천원(蛇川原)에서 대아찬 김문영(金文潁) 등과 함께 고구려군을 크게 격파하여 승리하였으나 전사하였다. 사천원 전투로 고구려군의 예기가 꺾여 평양성이 함락되는 결과를 낳아 일길찬(一吉飡)의 관등을 추증과 조(租·벼) 1,000석을 받았다.
  • 안나함(安那含) : 670년(문무왕) 일길찬의 관등으로 신라군의 장수가 되어 고구려 부흥군의 태대형 고연무(高延武)와 신라 장군 설오유(薛烏儒)가 이끄는 연합군이 압록강을 건너 당나라군을 공격할 때 참전하였다. 671년 고구려 부흥군의 전초기지였던 안시성을 함락하고, 672년 평양을 거쳐 백수성(白水城) 수복하는 과정에 8월 석문(石門 : 황해도 서흥) 싸움에 당나라군을 격퇴하였지만 여러 장수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 홍필(弘弼) : 841년(문성왕 3년) 일길찬(一吉飡)의 관등으로서 모반(謀反)을 하다가 발각되어 해도(海島)로 도망친 관료였다.
  • 양질(良質) : 281년(미추 이사금 20년) 정월에 일길찬(一吉飡)이 되었으며, 283년 9월 백제가 변경을 침범하여 10월 괴곡성(槐谷城 : 충청북도 괴산)을 에워싸자, 왕명을 받고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이를 물리친 관리였다.
  • 장웅(張雄) : 822년(헌덕왕 14년) 3월 김헌창이 난을 일으켜 국호를 ‘장안(長安)’이라 하고, 연호를 ‘경운(慶雲)’이라 하면서 신라의 9주5소경(九州五小京) 가운데 4주3소경을 장악하여 기세를 떨치자, 일길찬(一吉飡)의 관등으로 진압 부대의 선발대가 되어 도동현(道冬峴)에서 반군을 무찌르고, 위공(衛恭)과 제릉(悌凌)의 군대와 합세하여 삼년산성(三年山城: 충청북도 보은군)을 공격해 함락하고, 다시 속리산으로 가 적병을 섬멸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난을 평정한 공으로 상을 받았다.
  • 양신(良臣) : 672년(문무왕 12년) 고구려 부흥군을 진압하기 위하여 평양에 이르러 한시성(韓始城)·마읍성(馬邑城)을 공격하고 백수성(白水城) 부근에 군영을 짓자 일길찬(一吉湌)의 관등으로 참전하여 고구려 부흥군과 함께 석문으로 퇴각한 당나라군을 공격하였으나 크게 패하고 전사하였다.
  • 박경한(朴京漢) : 668년(문무왕 8년) 8월 신라당나라의 연합군이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할 때 한산주(漢山州)소감(少監)의 직책으로 출전하여 평양성의 군주(軍主)인 술탈(述脫)을 죽이는 공을 세웠다. 이 싸움으로 고구려는 멸망하였고, 보장왕은 대신 등 20여만 명과 함께 당나라에 포로로 끌려갔다. 그해 10월 고구려 정벌에 대한 전공을 논의할 때 흑악령(黑嶽令) 선극(宣極)과 대당소감(大幢小監) 본득(本得)과 함께 일급 공로자로 인정받아 일길찬의 관등을 제수받고 조(租) 1,000석(石)을 하사받았다.
  • 제일(諸逸) : 701년(효소왕 10년) 5월 영암군(靈巖郡) 태수(太守·지방관)로 있으면서 공익을 위배하고 사리(私利)를 탐하다가 장(杖) 100의 형을 받고 섬에 유배되었다.
  • 충상(忠常) : 백제 부흥 운동을 나당 연합군의 일원으로 정벌한 장수이며 관직은 좌평(佐平), 일길찬(一吉飡), 총관(摠管), 아찬(阿飡)이었다.
  • 장흔(長昕) : 297년(유례 이사금 14년) 일길찬(一吉飡)에 임명되었고, 299년(기림 이사금 2년)에는 이찬(伊飡)에 임명되어 내외(內外)의 병마사(兵馬事)를 관장하였다.
  • 아진함(阿珍含) : 신라 제30대 문무왕 때의 관리이다. 672년 일길찬의 관등으로 거열주(居烈州:경상남도 거창군)대감으로 재직하였다.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신라까지도 차지하려는 당나라와 적대 관계가 계속되자 672년(문무왕 12년) 당나라의 고간(高侃)이 거느린 군사 1만 명과 이근행(李謹行)이 거느린 군사 3만 명이 신라를 공격하였다. 신라군과 당나라군은 대방(帶方: 황해도 평산)에서 싸워 처음에는 신라군의 장창당(長槍幢)의 활약으로 신라가 승리하였으나, 장창당의 공을 시기한 다른 당의 후퇴로 계속 패하여 거열주(居烈州:경상남도 거창군)까지 밀려 내려오자 일길찬의 관등으로 거열주의 대감(大監)으로 있던 중 상장군(上將軍)에게“공들은 빨리 가라. 내 나이 70이니 얼마나 더 살 수 있겠는가. 오늘이 바로 내가 죽을 날이다.”라고 하면서 아군을 피신시키고 적진에 돌진하여 전사하였고, 그의 아들도 따라 죽었다.
  • 김인장(金仁章) : 중아찬(重阿飡)의 관등에 올랐으며, 67세에 집사부시랑(執事部侍郞) 직에서 물러난 김지성(金志誠)의 아버지다. 아들인 김지성은 돌아가신 아버지 김인장과 어머니 관소리(觀肖里) 부인을 위해 20여 리의 전장(田莊)을 희사하여 감산사(甘山寺·남월산(南月山)) 한 채를 조성하고 돌미륵 하나를 만들었다.(미륵상彌勒像: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과 아미타상阿彌陀像: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을 안치) 그리고 개원(愷元) 이찬(伊飡)과 동생 양성(良誠) 소사(小舍)와 현도사(玄度師), 누이 고파리(古巴里), 전처 고노리(古老里)와 후처 아호리(阿好里), 서형 급한(及漢) 일길찬과 일당(一幢) 살찬(薩飡), 총민(聰敏) 대사(大舍)와 누이동생 수힐매(首肹買) 등에게까지 미치게 하기 위해 이러한 선을 베풀었다. 어머니 관초리 부인이 고인이 되자 동해 흔지(欣支) 주변에 뼈를 뿌렸다.

4. 1. 흥선

155년(아달라 이사금 2년) 일길찬에 임명되었다. 167년 7월 백제가 신라 서쪽의 두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자, 아달라 이사금이 8,000 기병을 거느리고 백제의 한수(漢水)에 진군하여 큰 공을 세워 168년 4월에 이찬에 임명되었다.

4. 2. 자간

달솔(達率), 일길찬(一吉飡), 하주총관(下州摠管)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660년(태종 무열왕 7년) 11월 신라백제를 공격하여 승리한 후, 전사한 신라 장군 및 기타 전공이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백제 인원도 재능을 헤아려 임용하였다. 이때 백제에서 달솔이었던 자간은 좌평(佐平) 충상(忠常)·상영(常永)과 함께 일길찬의 관등을 받고 총관(摠管)에 임명되었다. 그 뒤 661년(문무왕 1년) 7월 김유신(金庾信)을 대장군으로 한 나당연합군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충상은 상주총관(上州摠管), 자간은 하주총관(下州摠管)으로서 참전하였다.

4. 3. 진공

681년(신문왕 1년) 8월 18일 김흠돌이 자신의 딸인 신문왕비가 폐출당하자 파진찬(波珍飡) 흥원(興元)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고, 이때 진공은 대아찬(大阿飡)이자 일길찬(一吉飡)의 관직으로 반란에 동조하였다가 죽임을 당했다.

4. 4. 직선

266년(미추 이사금 5년) 8월 백제봉산성을 공격해 오자, 성주(城主)로서 장사 200인을 거느리고 나가 적을 격퇴한 공으로 일길찬에 임명되고, 사졸들은 후한 상을 받았다.

4. 5. 현승

918년(경명왕 2년) 2월 모반(謀反)하다가 복주(伏誅)되었다.

4. 6. 예파

穢破|예파중국어충청북도 영동군 양산면의 양산(陽山) 대감(大監)을 지냈다. 655년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하여 신라의 변경을 공격해 오자, 화랑 김흠운과 함께 양산 조천성(助川城, 충청북도 영동군 양산면 비봉산성)에서 백제군에 맞서 싸웠다. 김흠운과 함께 전사한 후, 일길찬(一吉飡)으로 추증되어 그 무훈을 기렸으며, 사람들은 양산 전투를 기리는 노래인 「양산가」를 지어 슬퍼하였다.

4. 7. 김흠운

신라의 왕족으로서 낭당대감(郎幢大監) 직책을 맡았던 군인이다. 655년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하여 신라 변경을 공격해 오자, 양산 대감(大監) 예파와 함께 양산 조천성(助川城 : 충청북도 영동군 양산면 飛鳳山城)에서 백제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신라 조정은 그의 무훈을 기리기 위해 일길찬(一吉飡) 관등을 추증하였고, 백성들은 양산 전투를 기리는 노래 양산가를 지어 슬픔을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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