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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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권동진은 충청북도 괴산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조선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무관으로 근무하다 개화파에 참여했다. 을미사변 이후 일본 망명 중 천도교에 입교하여 3.1 운동에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신간회 부회장, 신탁통치 반대 운동, 신한민족당 창당 등 광복 후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했으며, 1946년 민주의원 의원으로 위촉되었으나 이듬해 사망했다. 1962년 건국훈장이 추서되었고, 청주 삼일공원에 동상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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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보는 일제강점기 및 한국전쟁 시기에 활동한 사학자, 시조 작가, 교육자로, 민족주의 역사관과 ‘얼’ 사상을 형성하고, 연세대학교 강사, 동아일보 논설위원, 국학대학교 학장, 감찰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조선사 연구』 등의 저서를 남겼으나 한국전쟁 중 납북되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 6·10 만세운동 - 신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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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은 충청남도 홍성 출신의 승려이자 시인, 독립운동가로, 3.1 운동에 참여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불교 혁신과 민족 독립을 위해 헌신했으며, 시집 《님의 침묵》을 통해 저항 문학을 대표했다. - 신간회의 인물 - 김병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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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호는 천도교 제4대 교주이자 독립운동가로, 갑오농민전쟁에 참여, 3·1 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 《조선독립신문》 발간을 주도하는 등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헌신하였다.
권동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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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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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명 | 權東鎭 |
한글 | 권동진 |
한자 | 權東鎭 |
가타카나 | クォン・ドンジン |
로마자 표기 | Kwon Dong-Jin |
아호(雅號) | 애당(愛堂), 우당(憂堂) |
도호(道號) | 실암(實菴) |
출생일 | 1861년 12월 15일 |
출생지 | 조선 충청도 괴산군 |
사망일 | 1947년 3월 9일 |
사망지 | 미 군정 조선 서울특별자유시 |
거주지 | 조선 충청도 괴산군 조선 경기도 포천군 조선 한성부 대한제국 한성부 일제강점기 경성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경력 | 독립운동가 종교인 정치인 신한민족당 총재 겸 대표최고위원 한국독립당 고문 겸 대표최고위원 |
종교 | 천도교 |
배우자 | 채씨 부인 |
자녀 | 권영직(아들), 권정숙(딸) |
웹사이트 | 권동진(독립유공자 공훈록) |
서훈 | [[파일:건국훈장2대통령장.png|x10px]]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
군사 경력 | |
군복무 | 조선 육군 |
복무 기간 | 1881년 ~ 1882년 |
계급 | 조선 육군 참령 |
근무 | 조선 육군 |
지휘 | 조선 육군 장교 |
공직 | |
임기 | 1880년 4월 9일 ~ 1881년 5월 31일 |
직책 | 조선국 경상도 함안군 군수 |
군주 | 고종 이형 |
정당 | 한국독립당 |
2. 생애
권동진은 조선 말기 함안 군수와 육군 참령을 지냈으며, 이후 개화당에 들어가 구한말 개혁운동에 참여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손병희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일본 체류 중 손병희의 권고로 천도교에 입도하여 도사가 되었다. 1895년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 암살에 가담했다가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여 1907년까지 망명 생활을 하였다.[1]
남궁억의 대한협회 설립에 참여하여 실업부장을 역임했다. 1919년 3·1 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운동을 지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3년간 수감되었다. 1919년 3·1 운동은 손병희, 오세창, 권동진, 최린 등 천도교인 네 사람의 의논에서 시작되었으며, 독립운동의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화를 결정하였다.[2] 이후 기독교, 불교계, 유림 등 각 종교단체의 협력, 지지를 얻어 범종교적 결집체를 구성하고 각 교단과 사회단체의 대표들로 민족대표를 구성하기로 합의하였다.[2]
출옥 후 1927년 신간회를 조직하여 부회장을 맡았고, 1929년 광주 학생 운동에 연루되어 다시 1년간 수감되었다. 신간회는 일본인 학생들의 난동에 대한 진상 규명을 위한 진상조사단을 광주에 파견하였고, 결과 보고 후 민중대회 개최를 추진해 나갔다.[3]
1945년 8·15 광복 이후 정계에 투신하여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우파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 참여, 1945년 12월 16일 신한민족당을 창당하여 당수가 되었다. 신한민족당은 안재홍의 국민당과 함께 김구의 한국독립당에 참여하였다. 1946년 미군정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 반탁 세력을 중심으로 구성한 임시 입법 기관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원으로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사망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이 추서되었고, 청주의 삼일공원에 동상이 건립되었다.
2. 1. 생애 초기
권동진은 조선 말기 함안 군수와 육군 참령을 지냈으며, 이후 개화당에 들어가 구한말 개혁운동에 참여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손병희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일본 체류 중 손병희의 권고로 천도교에 입도하여 도사가 되었다. 1895년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 암살에 가담했다가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여 1907년까지 망명 생활을 하였다.[1]2. 1. 1. 출생과 성장
권동진은 충청북도 괴산군에서 태어났으며[1], 어린 시절 경기도 포천시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후 한성부 숭인동에서 성장하였다. 윤치소, 이종훈, 의친왕 등과 필운학당에서 함께 공부했다.[2]2. 1. 2. 군인 생활과 개화 운동
조선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무관으로 복무하며 거문도 첨사, 함안 군수, 육군 참령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개화당에 참여하여 구한말 혁신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일본으로 피신하여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1] 일본 체류 중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3년간 육군부내사무를 연구하고, 도쿄 등을 방문하며 문물 제도를 시찰하였다.[1]2. 2. 을미사변 가담과 망명 생활
그는 조선 말기 함안 군수, 육군 참령을 지내다가 개화당에 들어가 구한말 개혁운동에 참여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손병희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고, 일본 체류 중 손병희의 권고로 천도교에 입도하여 도사가 되었다. 1895년 을미사변에 가담했다가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여 1907년까지 망명 생활을 하였다.2. 2. 1. 을미사변 가담
1895년 을미사변 당시 권동진은 일본인 낭인들과 함께 명성황후 암살에 가담한 조선인 행동대 중 한 명이었다.[3] 권동진은 자신의 형 권형진 외에도 정난교, 조희문, 이주회, 유혁로 등이 왕비 암살에 가담했다고 증언하였다.[3]강본류지조|오카모토 류노스케일본어 외 일본인 30여 명과 조선인 개혁파 관계자들이 이 음모에 가담했다. 권동진의 형 권형진(사변 후 경무사로 임명) 등도 이 계획에 참여했고, 훈련대 외에 일본사관학교 생도 8명이 직접 행동에 나섰다.[3]
그러나 실제로는 일본 낭인들이 먼저 명성황후를 발견하여 살해했다.
2. 2. 2. 장기간의 망명 생활
1895년 을미사변 이후 권동진은 오세창, 정난교 등과 함께 화를 피해 일본으로 망명했다.[4] 일본 망명 중 천도교 교주 손병희를 만나 천도교에 입도하였고, 손병희, 오세창과 함께 진보회를 조직하여 개화 운동을 전개했다. 한편, 대한제국 고종은 일본 정부에 망명 개화파 인사들의 송환을 요청했으나, 일본 정부는 이를 거절하여 권동진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2. 3. 사회 운동과 귀국
권동진은 조선 말기 함안 군수와 육군 참령으로 재직하다가 개화당에 합류하여 개혁 운동에 참여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손병희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그곳에서 손병희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교하여 도사가 되었다. 1895년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 암살에 가담한 후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여 1907년까지 머물렀다.일본 망명 중 손병희, 오세창과 함께 진보회를 조직하여 개화 운동을 지속하였다. 한편, 고종은 일본 정부에 망명 개화파 인사들의 송환을 요청하였으나, 일본 정부는 이를 거절하여 그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5]
1907년 귀국 직전까지의 내용은 사회단체, 언론 활동에서 상세히 다루고 있다.
1919년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수감되었다. 3·1 운동 당시 손병희, 오세창, 최린 등 천도교 인사들과 함께 독립선언서 작성 및 발표 계획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출옥 후 1927년 신간회를 조직하여 부회장을 맡았고, 1929년 광주 학생 운동에 연루되어 다시 1년간 수감되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신한민족당 당수가 되어 우파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영 준비 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고,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 참여하였다. 1946년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원으로 임명되었으나, 1947년 사망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이 추서되었고, 청주의 삼일공원에 동상이 건립되었다.
2. 3. 1. 사회단체, 언론 활동
1904년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는 운동을 펼쳤으나 실패하였다.[5] 1906년(광무 9년) 6월 3일 윤치소, 김성수, 신상우, 김필수 등 90여 명과 함께 동덕여자학교 설립에 재산을 출연하고[6], 재단 이사의 한 사람으로 선임되었다. 그해 6월 16일 천도교 손병희, 오세창 등이 만세보를 발간하자 일본 체류 중 만세보의 필진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만세보는 이듬해인 1907년 7월 1일 부로 폐간되고 만다.1907년(융희 1년) 9월 귀국 후 중추원 부찬의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11월 출판사 보문관(普文館)을 설립하였다. 같은 해 11월 남궁억의 대한협회(大韓協會)에도 설립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대한협회의 실업부장(實業部長)을 맡았다.
2. 4. 한일 합방 이후
1882년 임오군란으로 손병희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한 뒤, 일본 체류 중 손병희의 권고로 천도교에 입도하여 도사가 되었다. 1895년 10월 을미사변 당시에는 명성황후 암살에 가담했다가 일본으로 망명했고, 이후 1907년까지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하였다.남궁억의 대한협회 설립에 참여하여 실업부장을 역임했다. 1919년 3·1 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운동을 지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3년간 수감되었다. 출옥 후 1927년에는 신간회를 조직하는 데 참여,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이후 광주 학생 운동에 관련되어 다시 1년간 수감됐다가 풀려났다.
2. 4. 1. 독립운동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 천도교 포교 활동에 전념하다가 1918년 11월 일본 오사카를 방문, 오사카 매일신보(每日新報)에 소개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론과 민족자결 14개 조항을 읽고, 보다 구체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였다.[1] 귀국 후, 그해 12월에 천도교측의 오세창, 최린 등과 함께 독립 만세 시위를 개최하기로 발의하고 손병희와 상의하였으며 기독교쪽으로도 사람을 보냈다.[1]1919년 3·1 운동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 운동을 주도했다.[2] 기미독립선언서를 작성해 발표한다는 3·1 운동 초기 구상은 손병희, 오세창, 권동진, 최린의 천도교인 네 사람의 의논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2] 그들은 첫째, 독립운동의 대중화, 둘째 독립운동의 일원화, 셋째 독립운동의 비폭력화를 결정하였다.[2] 그리고 이를 거족적으로 펴기 위해 다른 종교 교단에도 사람을 보내 기독교, 불교계, 유림 등 각 종교단체의 협력, 지지를 얻어 범종교적 결집체를 구성하는 동시에 각 교단과 사회단체의 대표들로 민족대표를 구성하기로 합의하였다.[2]
2. 4. 2. 3.1 만세 운동 참여
1919년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각계에서 민족대표를 선출하여 기미독립선언서를 작성해 발표한다는 3·1 운동 초기 구상은 손병희, 오세창, 권동진, 최린 등 천도교인 네 사람의 의논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1] 그들은 첫째, 독립운동의 대중화, 둘째 독립운동의 일원화, 셋째 독립운동의 비폭력화를 결정하였다.[1] 그리고 이를 거족적으로 펴기 위해 다른 종교 교단에도 사람을 보내 기독교, 불교계, 유림 등 각 종교단체의 협력, 지지를 얻어 범종교적 결집체를 구성하는 동시에 각 교단과 사회단체의 대표들로 민족대표를 구성하기로 합의하였다.[1]1919년 2월 초 권동진은 최남선, 최린 등과 만나 여러 차례 회의를 거듭하여, 만세 시위 장소와 인쇄물 등을 준비하였다.[1] 이어 최남선 등이 인쇄해 온 "조선의 독립은 시대의 대세에 순응하며 인류 공동 생존권의 정당한 발동으로서, 무엇으로도 저지ㆍ억제할 수 없으므로 조선민족은 마땅히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독립의 의사를 발표하고 서로 힘을 모아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를 벗어나 독립해야 한다"는 내용의 독립 선언서를 보고 우선 손병희, 오세창 등과 함께 그 취지에 적극 찬성했다.[1]
또한 일본 제국주의의 무단정책과 조선인 차별 정책, 인종 차별을 비난하고 미국 대통령 우드로우 윌슨에게 보낼 편지와, 민족자결주의를 적극적으로 지지, 찬동하는 요지의 청원서, 그리고 프랑스 파리강화회의에 참가한 김규식 일행은 물론이고, 파리강화회의에 참가한 참가국 대표자들에게 제출할 의견서 초안을 검토하고 이에 찬동했다.[1] 손병희, 오세창 등과 함께 천도교인의 대표로서 2월 25일부터 2월 27일까지 천도교 대표들을 소집, 당시 천도교 기도회의 종료보고와 국장을 참배하기 위해 경성부로 올라온 임예환, 나인협, 홍기조, 김완규 등에게도 독립 만세 운동 계획을 알리고, 민족대표자 서명란에 서명을 받았다.[1]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경 경성부 인사동에 있는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으로 서명하였다.[1] 이때 지방에 거주하던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 등 4명이 빠지고 29명이 모였으며 권동진도 그 중 한 사람으로 서명, 날인하였다.[1] 그는 민족대표의 1인으로 참여하여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는 만세 삼창을 외치고, 현장에 도착한 조선총독부 경무국원에 의해 체포, 경시청총감부에 구금되었다가 서대문 형무소로 투옥되었다.[1] 이 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 수감생활 중에 재판을 받았으며, 최종 재판 끝에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혐의로 3년형을 선고받고 수감생활을 하다가, 1923년 출옥하였다.[1]
2. 4. 3. 신간회와 광주학생운동
1926년 3월 경성부 종로구 당주동 자택에서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를 연합해 범민족적 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창하였다.[2] 같은 해 5월 공산당과 급진민족주의자들이 국민당을 조직하고 일대 민족독립운동을 계획하여 권동진을 당수로 추대할 계획이었으나, 밀정을 통한 조선총독부 경찰의 사전검거로 실패하였다.[2] 이후 그는 공산주의계 인물로 몰려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주목 대상이 되었다.[2]1927년 2월 결성된 좌·우익 계열을 망라한 국내 민족운동 세력의 집결체인 신간회(新幹會)에 적극 참여하였다.[3] 이상재가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권동진은 부회장으로 활동했으며,[3]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적인 시위 확대를 계획, 조병옥, 허정숙 등과 함께 연행되었다.[3] 신간회는 일본인 학생들의 난동에 대한 진상 규명을 위한 진상조사단을 광주에 파견하였고, 결과 보고 후 민중대회 개최를 추진해 나갔다.[3] 12월 13일 신간회의 부대표 자격으로 연설을 담당할 예정이었으나, 밀정의 보고로 또다시 서울 종로경찰서에 검거되어 복역 중 재판, 징역 1년 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하였다.[3] 조선총독부는 요시찰인 관련 문서에서 그를 "키 5척 4촌으로, 긴 얼굴형에 까만 피부. 왼쪽 눈썹에 5전 동화(銅貨) 만큼 큰 사마귀가 있음. 조선독립을 몽상하여 그를 위해 운동할 우려가 있음"이라 평하였다.[3]
2. 4. 4. 태평양 전쟁 시기
1930년대 이후 권동진은 천도교 포교 활동에 전념하였다. 천도교가 구파와 신파로 나뉘어 갈등할 때 이종린 등과 함께 천도교 신파에 가담하였다.1938년 4월 2일 천도교 신파에서 경성부 부내 경운정에서 새 교주로 춘암 박인호를 선출할 때 그는 천도교 대표 장로로 선출되었다.[7]
2. 5. 광복 이후
1945년 8·15 광복 이후 정계에 투신하여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 참여, 1945년 12월 16일 신한민족당을 창당하여 당수가 되었다. 신한민족당은 안재홍의 국민당과 함께 김구의 한국독립당에 참여하였다. 1946년 미군정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 반탁 세력을 중심으로 구성한 임시 입법 기관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원으로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사망하였다.2. 5. 1. 광복 직후 활동
1945년 8·15 광복 이후 정계에 투신하여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8월 16일 건국준비위원회의 참여 요청과 9월 한민당 창당 시 영수 추대는 모두 사양하였다.[8]9월 국민대회준비위원회에 참여하여 상하이 임시정부 봉대 운동을 하였고, 10월 16일 이승만 귀국 시 김포비행장에 나가 영접하였다. 이후 임시정부환영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임정 요인들을 맞이하였다.[8]
12월 1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봉영식에 임정환국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참여하였다. 윤보선의 사회, 오세창의 개회사, 이인의 봉영문 낭독 후 권동진이 만세삼창을 하였다. 봉영문은 권동진, 김성수, 이인을 통해 김구에게 전달되었다.[8]
1945년 12월 23일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여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9] 12월 30일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하여 결성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곧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10]
2. 5. 2. 반탁 운동과 신한민족당 창당
1945년 12월 1일 임시정부 봉영식에 임정환국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참여하였다. 서울그라운드에서 윤보선의 사회로 임시정부 봉영식이 시작되었다. 오세창의 개회사, 이인의 봉영문 낭독에 이어 권동진은 만세삼창을 외쳤다. 봉영문은 권동진, 김성수, 이인을 통해 김구에게 전달되었다.[8]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여[9]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9]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고,[10] 곧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10]
이후 우익 민족진영의 원로로서 반탁 운동에 참가했으며, 1945년 12월 16일 신한민족당(新韓民族黨)을 창당하여 당수를 지냈다. 신한민족당은 안재홍의 국민당과 함께 김구의 한국독립당 결성에 참여하게 된다.
2. 5. 3. 만년
1946년 2월 14일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11]1946년 미군정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 반탁 세력을 집결시켜 임시 입법기관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민주의원)을 구성했을 때 의원으로 위촉되었으나, 86세의 고령으로 인해 활발한 활동을 펼치지는 못하고 이듬해 사망했다.
3. 사후
1947년 3월 15일 서울 천도교 강당에서 사회단체장으로 장례가 거행되었으며, 김구, 김규식, 이승만, 서재필, 오세창 등이 참석하였다.[1] 시신은 화장 후 괴산군 선산에 안치되었다.[1]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2] 청주 삼일공원에 그의 동상이 설치되어 있다.[3]
4.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
부인 | 채씨(菜氏) |
아들 | 권영직(權寧直) |
며느리 | 한씨(韓氏) |
손자 | 권오범(權五範) |
손녀 | 권오엽(權五燁) |
딸 | 권정숙(權貞淑) |
참조
[1]
일반
[2]
웹사이트
Daum 카페
http://cafe.daum.net[...]
[3]
뉴스
風雨廿年 天道敎重鎭 權東鎭氏 (3)
동아일보
1930-01-29
[4]
뉴스
生物進化論을 修正케한 世界的植物學者
동아일보
1950-01-22
[5]
간행물
내일을 여는 역사 26호
서해문집
2006
[6]
뉴스
우리손에 자라난 동덕여고 창립 어언 삽주년
동아일보
1936-06-07
[7]
뉴스
교주박인호씨인퇴 이종인씨사장에
동아일보
1938-04-05
[8]
서적
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1993
[9]
서적
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1993
[10]
서적
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1993
[11]
서적
대한민국 임시정부 30년사
국학자료원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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