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오키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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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사는 오키나와에서 악귀를 쫓고 복을 불러온다고 여겨지는 사자 형상의 상징물이다. 중국의 산예에서 유래했으며, 코마이누와 유사한 기원을 갖는다. 13~14세기에 제작된 에이소왕의 석관 부조를 가장 오래된 시사 조각으로 추정하며, 류큐 왕국의 상징으로 발전했다. 17세기 말 사쓰마의 지배 이후에는 풍수 관념과 함께 오키나와 본섬 남부 마을로 확산되었다. 시사상은 한 쌍으로 배치되어, 입을 벌린 수컷은 복을, 입을 다문 암컷은 재난을 막는 역할을 한다고 여겨진다. 메이지 시대 이후에는 가옥 지붕에 설치되기 시작했으며, 현재는 관광 상품으로도 널리 판매된다. 토미모리 시사는 오키나와현 지정 유형 문화재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탄흔이 남아있는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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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예 - 코마이누
코마이누는 일본 신사와 사찰 입구에 한 쌍으로 놓이는 사자나 개 형상의 조각상으로, 아형과 운형으로 구성되어 악령을 쫓는 의미를 지니며, 고대 오리엔트 사자상에서 기원하여 나라 시대에 일본에 전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 산예 - 백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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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오키나와) | |
---|---|
개요 | |
![]() | |
종류 | 전설의 생물 |
기원 | 류큐 왕국 |
형태 | 사자와 유사 |
역할 | 수호, 액막이 |
분포 지역 | 오키나와, 일본 |
명칭 | |
일본어 | シーサー (Shīsā) |
류큐어 | シーサー (Shiisaa) |
어원 | 사자의 류큐어 방언 |
특징 | |
외형 | 사자와 유사한 모습 다양한 크기와 형태 암수 한 쌍으로 구성 (일반적으로) |
위치 | 집, 사찰, 성문 등 지붕, 문, 입구 등 높은 곳에 설치 |
상징 | 복과 행운을 가져옴 악령과 재앙을 막아줌 |
성별 구분 | 입을 벌린 시사: 수컷, 복을 불러들임 입을 다문 시사: 암컷, 들어온 복을 지킴 |
문화적 의미 | |
오키나와 문화 | 오키나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조형물 오키나와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 |
액막이 풍습 | 집, 건물, 마을의 수호신 역할 액운을 막고 평안을 기원하는 의미 |
관광 상품 | 다양한 형태의 시사 기념품 판매 오키나와 관광의 상징 |
기원 및 역사 | |
기원 | 고대 오리엔트의 사자 조각상 |
전파 경로 | 중국을 거쳐 류큐 왕국으로 전래 |
역사 | 류큐 왕국 시대부터 널리 보급 오키나와 고유의 문화로 정착 |
초기 형태 | 사자와 유사한 모습 |
변화 과정 | 점차 오키나와 고유의 형태로 발전 다양한 디자인과 색상 등장 |
설치 위치 및 의미 | |
지붕 위 | 집 전체를 보호하는 의미 악령으로부터 집을 지키는 역할 |
문 앞 |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악운을 막는 의미 가정의 평안을 기원하는 역할 |
마을 입구 | 마을 전체를 보호하는 의미 전염병이나 재해로부터 마을을 지키는 역할 |
형태 및 종류 | |
재료 | 석재, 시멘트, 도자기, 금속 등 다양한 재료 사용 |
크기 | 작은 장식용부터 대형 조각상까지 다양 |
색상 | 전통적인 색상: 붉은색, 흰색, 검은색 현대적인 색상: 파란색, 노란색, 녹색 등 다양 |
표정 | 용맹스러운 표정, 익살스러운 표정 등 다양 |
종류 | 오키나와 시사: 전통적인 형태 야에야마 제도 시사: 독특한 형태 현대적인 시사: 다양한 디자인 |
제작 방법 | |
전통적인 방법 | 석재 조각, 도자기 제작 등 수작업으로 제작 |
현대적인 방법 | 시멘트 몰딩, 금속 주조 등 대량 생산 가능 |
기타 | |
참고 자료 | 오키나와 향토사 연구 자료 민속학 관련 서적 |
관련 웹사이트 | 오키나와 시사 여행기 |
2. 역사
시사는 코마이누처럼 중국의 산예(사자)에서 유래했다.[38] 개라는 설도 있지만, 오키나와와 관련이 깊었던 중국이나 남방의 영향을 고려하면 사자일 것이라는 의견과 인식이 우세하며,[39][40] 한자 명칭으로 보아도 사자라고 단언되는 경우가 있다.[41]
학자들은 우라소에의 왕릉(요우도레)에 있는 에이소왕의 석관에 부조로 조각된 시사를 가장 오래된 시사 조각으로 추정한다. 제작 시기는 에이소왕 사망 직후(13~14세기)인지, 쇼신왕 때(15세기)인지에[43] 대한 논쟁이 있으며, 오키나와에 시사가 최초로 전래된 시기를 이 시기로 본다.[44] 부조가 아닌 시사 조각상 중에는 류큐국의 도성 슈리성의 정문 칸카이몬 앞에 있는 한 쌍의 시사상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본다.[45] 칸카이몬은 쇼신왕 때 건립되었으며, 슈리성의 정문에 세워진 것을 근거로 초기의 시사가 류큐국의 건국과 함께 왕을 상징하는 문화 표상으로 도입되었다고 해석한다.[46] 이 외에도 요우도레에 있는 석조 시사, 엔가쿠지 방생교에 세워진 시사상, 타마우둔에 세워진 시사상 등이 오래된 시사상으로 꼽힌다.[46] 기록이 명확히 남아있는 것으로는 1498년에 제작된 엔가쿠지 방생교 난간 기둥 위의 새끼를 데리고 있는 시사상이 있다.[47]
사쓰마의 침공과 지배로 왕권이 약화하면서[48] 17세기 말부터 중국에서 온 풍수 관념과 함께 시사가 오키나와 본섬 남부의 마을로 확산되었다.[49] 1689년(쇼테이 21년) 당시 화재가 빈발하여 곤란을 겪고 있던 고친다의 도모리 사람들이 풍수사에게 조언을 구했고, 풍수사는 야에세다케(八重瀬岳)의 영향 때문이라고 하며, 이를 막으려면 시사상을 만들어 그 산을 향해 설치하라고 조언했다. 주민들이 그 말에 따라 시사를 설치하자 화재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류큐국 역사서 《규요》(球陽)에 기록되어 있다.[50][51][52] 한편, 슈리성 동쪽에 위치한 별궁 우차야우둔의 벼랑에 세워진 시사상(17~18세기 제작 추정)도 야에세다케를 바라보고 있어 나쁜 기운으로부터 성을 보호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53]
시사상은 1개 또는 음양이나 불교의 아운의 의미를 가진 한 쌍으로 설치되는데,[54][55] 한 쌍으로 설치되는 경우가 더 많다.[56] 대문 기둥 위나 건물 현관 또는 전면에는 한 쌍의 시사를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57] 음양 또는 아운의 차이에 따라 암수 구별과 역할이 있다.[55] 일반적으로[35] 입을 벌린 시사가 수컷으로 오른쪽에 두어 복을 불러들이고, 입을 다문 시사가 암컷으로 왼쪽에 두어 재난을 막는다고 한다. 암수 구별에는 다양한 해석이 있어,[58] 암수를 놓는 위치가 바뀌거나,[59] 입의 개폐에 따라서 수컷이 입을 다물어 나쁜 것이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암컷이 입을 벌려 좋은 것을 나눈다고 보기도 한다.[60] 액운을 막기 위해 지붕 위에 단독 설치된 시사는 대부분 입을 벌리고 있다.[57]
메이지 시대 이후 서민에게 기와 지붕이 허용되면서 각 가정의 지붕 위에 시사가 설치되기 시작했다.[78][60] 이전에는 사찰, 성문, 우타키, 귀족 묘역, 마을 출입구 등에만 설치되었다. 재질은 돌, 도기(토기 또는 도자기), 회반죽이 기본이지만, 최근에는 콘크리트나 청동 제품도 있다.
오늘날에는 관광 상품화되어 다양한 표정과 자세를 가진 시사 조각이 기념품으로 판매되고 있다.[61][62]
2. 1. 기원
시사는 코마이누처럼 중국의 산예(사자)에서 유래했다.[38] 개라는 설도 있지만, 오키나와와 관련이 깊었던 중국이나 남방의 영향을 고려하면 사자일 것이라는 의견과 인식이 우세하며,[39][40] 한자 명칭으로 보아도 사자라고 단언되는 경우가 있다.[41]학자들은 우라소에의 왕릉(요우도레)에 있는 에이소왕의 석관에 부조로 조각된 시사를 가장 오래된 시사 조각으로 추정한다. 제작 시기와 관련해서는 에이소왕 사망 직후(13~14세기)에 제작되었는지,[42] 쇼신왕 때(15세기) 제작되었는 지에[43] 대한 논쟁이 있으며, 오키나와에 시사가 최초로 전래된 시기를 이 시기로 본다.[44]
시사상은 1개로 설치되기도 하고, 암수에서 비롯한 음양의 의미 또는 불교의 영향으로 아운의 의미를 가진 한 쌍으로 설치되기도 하는데,[54][55] 단일 형태보다는 한 쌍으로 설치되는 경우가 더 많다고도 한다.[56] 음양 또는 아운의 차이에 따라 암수의 구별이 있으며, 각각의 역할이 있다고 한다.[55] 일반적으로[35] 입이 벌어진 시사가 수컷으로 오른쪽에 두어 복을 불러들이고, 입을 다문 시사가 암컷으로 왼쪽에 두어 온갖 재난이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고 한다. 암수 구별에는 다양한 해석이 있어,[58] 암수를 놓는 위치가 바뀌거나,[59] 입의 개폐에 따라서 수컷이 입을 다물어 나쁜 것이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암컷이 입을 벌려 좋은 것을 나눈다고 보기도 한다.[60]
2. 2. 류큐 왕국 시대
시사는 코마이누처럼 중국의 산예(사자)에서 유래했다.[38] 개라는 설도 있지만, 오키나와와 관련이 깊었던 중국이나 남방의 영향을 고려하면 사자일 것이라는 의견과 인식이 우세하며,[39][40] 한자 명칭으로 보아도 사자라고 단언되는 경우가 있다.[41]학자들은 우라소에의 왕릉(요우도레)에 있는 에이소왕의 석관에 부조로 조각된 시사를 가장 오래된 시사 조각으로 추정한다. 제작 시기는 에이소왕 사망 직후(13~14세기)인지,[42] 쇼신왕 때(15세기)인지에[43] 대한 논쟁이 있으며, 오키나와에 시사가 최초로 전래된 시기를 이 시기로 본다.[44] 부조가 아닌 시사 조각상 중에는 류큐국의 도성 슈리성의 정문 칸카이몬 앞에 있는 한 쌍의 시사상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본다.[45] 칸카이몬은 쇼신왕 때 건립되었으며, 슈리성의 정문에 세워진 것을 근거로 초기의 시사가 류큐국의 건국과 함께 왕을 상징하는 문화 표상으로 도입되었다고 해석한다.[46] 이 외에도 오래된 시사상으로는 요우도레에 있는 석조 시사, 엔가쿠지 방생교에 세워진 시사상, 타마우둔에 세워진 시사상 등이 있다.[46] 기록이 명확히 남아있는 것으로는 엔가쿠지 방생교 난간 기둥 위의 새끼를 데리고 있는 시사상이 있는데,[47] 1498년에 제작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류큐국 또는 류큐왕의 상징이었던 시사는 사쓰마의 침공과 지배로 왕권이 약화하면서[48] 17세기 말부터 중국에서 온 풍수 관념의 도입과 함께 오키나와 본섬 남부의 마을로 확산되었다.[49] 이와 관련하여 시사에 대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류큐국 역사서 《규요》(球陽)에 실려 있다. 1689년(쇼테이 21년)의 일로, 당시 화재가 빈발하여 곤란을 겪고 있던 고친다의 도모리 사람들이 풍수사에게 조언을 구했더니, 풍수사는 야에세다케(八重瀬岳)의 영향 때문이라고 하며, 이를 막으려면 시사상을 만들어 그 산을 향해 설치하라고 조언했다. 주민들이 그 말에 따라 시사를 설치하자 화재가 발생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50][51][52] 한편, 슈리성 동쪽에 위치한 별궁 우차야우둔의 벼랑에 세워진 시사상(17~18세기 제작 추정)도 야에세다케를 바라보고 있어 나쁜 기운으로부터 성을 보호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53]
시사상은 1개로 설치되기도 하고, 암수에서 비롯한 음양의 의미 또는 불교의 영향으로 아운의 의미를 가진 한 쌍으로 설치되기도 하는데,[54][55] 단일 형태보다는 한 쌍으로 설치되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56] 대문의 기둥 위나 건물의 현관 또는 전면에는 한 쌍의 시사를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57] 음양 또는 아운의 차이에 따라 암수의 구별이 있으며, 각각의 역할이 있다고 한다.[55] 일반적으로[35] 입이 벌어진 시사가 수컷으로 오른쪽에 두어 복을 불러들이고, 입을 다문 시사가 암컷으로 왼쪽에 두어 온갖 재난이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고 한다. 암수 구별에는 다양한 해석이 있어,[58] 암수를 놓는 위치가 바뀌거나,[59] 입의 개폐에 따라서 수컷이 입을 다물어 나쁜 것이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암컷이 입을 벌려 좋은 것을 나눈다고 보기도 한다.[60] 액운을 몰아내기 위해 지붕 위에 단독으로 설치된 시사는 대부분 입을 벌리고 있다.[57]
2. 3. 민간 확산
시사는 코마이누처럼 중국의 산예(사자)에서 유래했다.[38] 오키나와와 관련이 깊었던 중국이나 남방의 영향을 고려하면 사자일 것이라는 의견이 우세하다.[39][40]류큐국 또는 류큐 왕국의 상징이었던 시사는 사쓰마의 침공과 지배로 왕권이 약화하면서[48] 17세기 말부터 중국에서 온 풍수 관념과 함께 오키나와 본섬 남부의 마을로 확산되었다.[49] 1689년(쇼테이 21년)의 일로, 당시 화재가 빈발하여 곤란을 겪고 있던 고친다의 도모리 사람들은 풍수사의 조언에 따라 야에세다케를 향해 시사상을 설치하여 화재를 막을 수 있었다는 기록이 《규요》에 남아있다.[50][51][52]
시사상은 1개 또는 음양이나 불교의 아운의 의미를 가진 한 쌍으로 설치되는데,[54][55] 한 쌍으로 설치되는 경우가 더 많다.[56] 일반적으로 입을 벌린 시사가 수컷으로 오른쪽에 두어 복을 불러들이고, 입을 다문 시사가 암컷으로 왼쪽에 두어 재난을 막는다고 한다.[35][58]
서민에게 기와 지붕이 허용된 메이지 시대 이후, 시사는 각 가정의 지붕 위에 설치되기 시작했다.[78][60] 그전에는 사찰, 성문, 우타키, 귀족의 묘역, 마을의 출입구 등에만 설치되었다. 재질은 돌, 도기, 회반죽이 기본이지만, 최근에는 콘크리트나 청동 제품도 있다.
오늘날에는 관광 상품화되어 다양한 표정과 자세를 가진 시사 조각이 기념품으로 판매되고 있다.[61][62]
2. 4. 근대 이후
사쓰마 번의 침공과 지배로 류큐 왕권이 약화된 17세기 말부터 중국에서 온 풍수 관념과 함께 시사가 오키나와 본섬 남부 마을로 확산되었다.[49]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시사 관련 기록은 류큐국 역사서 《구양(球陽)》에 실려 있다. 1689년(쇼테이 21년) 화재가 잦았던 고친다의 도모리 사람들이 풍수사의 조언에 따라 야에세다케(八重瀬岳)를 향해 시사상을 설치하자 화재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50][51][52]시사상은 하나만 설치되기도 하고, 음양 또는 불교의 아운의 의미를 가진 한 쌍으로 설치되기도 한다.[54][55] 단일 형태보다는 한 쌍으로 설치되는 경우가 더 많다.[56] 대문 기둥 위나 건물 현관, 전면에는 한 쌍의 시사를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57] 음양 또는 아운의 차이에 따라 암수 구별과 역할이 있다.[55] 일반적으로[35] 입을 벌린 시사가 수컷으로 오른쪽에 두어 복을 불러들이고, 입을 다문 시사가 암컷으로 왼쪽에 두어 재난을 막는다고 한다. 암수 구별에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58] 액운을 막기 위해 지붕 위에 단독 설치된 시사는 대부분 입을 벌리고 있다.[57]
메이지 시대 이후 서민에게 기와 지붕이 허용되면서 각 가정의 지붕 위에 시사가 설치되기 시작했다.[78][60] 이전에는 사찰, 성문, 우타키, 귀족 묘역, 마을 출입구 등에만 설치되었다. 재질은 돌, 도기(토기 또는 도자기), 석회가 기본이지만, 최근에는 콘크리트나 청동 제품도 있다.
오늘날에는 관광 상품화되어 다양한 표정과 자세를 가진 시사 조각이 기념품으로 판매되고 있다.[61][62]
3. 종류
시사는 오키나와의 전설적인 동물로, 사자를 오키나와 방언으로 발음한 것이다.[10] 야에야마 방언으로는 '시이시이',[11] '시-시-'라고도[12] 불린다. 스핑크스나 중국의 석사자, 일본본토의 고마이누처럼 고대 오리엔트의 사자에서 기원했다고 알려져 있다.[13] 개라는 설도 있지만, 오키나와와 관련이 깊었던 중국이나 남방의 영향을 고려하여 사자일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14] 중국 남부나 대만에는 바람을 막는 수호신으로 설치하는 석조 사자인 펑스예(風獅爺)가 있는데, 이를 시사로 번역하기도 한다.[16]
『구양(球陽)』에 따르면, 시사는 1689년에 화재가 잦았던 사람들이 풍수사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풍수사는 야에세 산의 영향 때문이라며 사자상을 만들어 산을 향해 설치하라고 조언했다. 주민들이 시사를 설치하자 화재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13]
시사는 1개만 놓이기도 하고, 불교의 영향으로 아웅상 1쌍으로 놓이기도 한다.[17] 단독보다는 1쌍으로 놓이는 경우가 더 많다.[18] 아웅의 차이에 따라 암수가 구별되며, 각각 역할이 있다고 한다.[10] 일반적으로[12] 입을 벌린 시사가 수컷으로 오른쪽에 놓여 복을 불러들이고, 입을 다문 시사가 암컷으로 왼쪽에 놓여 모든 재난을 막는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입 모양으로 암수를 구별하는 것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10][19]
메이지 시대 이전에는 사찰, 성문, 우타키, 귀족 묘소, 마을 입구 등에만 시사를 설치했다. 서민에게 기와 지붕이 허용된 이후 각 가정의 지붕 위에 놓이게 되었다. 재질은 돌, 도기, 회반죽이 기본이지만, 최근에는 콘크리트나 청동으로 만든 것도 있다. 시사의 조형은 일정하지 않고 다양한 표정과 자세를 보인다.[8]
3. 1. 무라 시사
오키나와 본섬 남부를 중심으로 구스쿠나 취락에 설치된 시사 석상을 특히 "무라 시사"(村獅子)라고 부른다. 17세기부터 확산하기 시작한 무라 시사는[49] 2021년 현재 153기가 현존하고 있다.[64] 단일로 설치되는 무라 시사는 화재 방지(불막이)를 목적으로, 두 개 이상으로 설치한 것은 액막이(잡귀막이)를 목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65] 또한, 이웃 마을과의 대항 관계 때문에 설치된 예도 있다.[66] 크기가 작고 형태가 조악한 것이 대부분이라 류큐국 시대의 행정구역인 마기리(間切)간 경계를 표시하는 기능으로 쓰였다고 보기도 한다.[67]무라 시사에 대한 문헌 기록은 시사에 대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1689년의 《규요(球陽)》에 언급되어 있으며, 화재를 막기 위해 야에세다케를 향해 설치되었다고 전한다.[66] 이 문헌에서 언급하는 시사이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것으로 알려진 무라 시사는 야에세정(구 코치바루초) 도모리 지구에 있는 도모리 시사로,[51][68][69] 오키나와현 지정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70] 높이는 1.4m 정도, 전체 길이는 1.75m이다.[70]

도모리 시사의 표면에는 여러 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71] 이것은 전쟁의 흔적으로, 이 일대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5년 오키나와 전투에서 지상전의 무대 중 한 곳이었다.[72] 구 일본군이 야에세다케에 진지를 설치했고,[73] 이에 맞서는 미군이 야에세다케를 향해 서 있는 이 시사를 방패삼아 일본군의 동태를 살피는 사진이 남아있다.[74] 시사 표면의 구멍은 이 전투에서 생긴 탄흔이다.[75] 시사 주변의 풍경은 전후의 식림으로 인해 숲으로 바뀌었지만,[76] 이 시사는 지금도 변함없이 서 있다.[69] 전후 반세기가 지나 탄흔은 많이 희미해졌다.[77]
19세기 말 류큐국이 멸망하고 메이지 유신으로 말미암은 근대화로 인해 촌락이 쇠퇴하며 20세기 초부터 마을 단위의 무라 시사는 더 이상 제작되지 않게 되었다.[78]
3. 2. 야네 시사
1889년(메이지 22년) 개인 주택에 붉은 기와로 지붕을 만들도록 허가하면서 오키나와에서는 지붕 위에 시사를 설치하게 되었고, 이 시사를 "야네 시사"(屋根獅子)라고 하였다.[78] 초기에는 지붕을 만드는 야네코우(屋根工)가 집을 새로 지은 것을 축하하는 의미로 기와 조각을 사용하여 사자, 호랑이, 개 등의 형상을 지붕에 올려두는 것에서 시작하였다.[79] 이미 집이 만들어진 뒤에 야네 시사를 올리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기와가 아닌 도자기로 야네 시사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지붕이 없는 콘크리트 주택이 도입된 이후에는 대문 두 기둥에 한 쌍을 배치하거나, 대형 건물에는 건물 입구나 발코니에 쌍으로 야네 시사를 배치한다.[80]
야네 시사는 집 밖의 액운이 집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다는 의미로 설치하기 때문에 험한 인상으로 입을 벌리고 엉덩이를 드는 자세로 만들었다.[57][81]
4. 형태 및 배치
시사는 1개로 설치되기도 하고, 음양 사상 또는 불교의 영향으로 아운의 의미를 가진 한 쌍으로 설치되기도 한다.[54][55] 단일 형태보다는 한 쌍으로 설치되는 경우가 더 많다고도 한다.[56] 대문의 기둥 위나 건물의 현관 또는 전면에는 한 쌍의 시사를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57]
음양 또는 아운의 차이에 따라 암수의 구별이 있으며, 각각의 역할이 있다고 한다.[55] 일반적으로[35] 입이 벌어진 시사가 수컷으로 오른쪽에 두어 복을 불러들이고, 입을 다문 시사가 암컷으로 왼쪽에 두어 온갖 재난이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고 한다. 암수 구별에는 다양한 해석이 있어,[58] 암수를 놓는 위치가 바뀌거나,[59] 입의 개폐에 따라서 수컷이 입을 다물어 나쁜 것이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암컷이 입을 벌려 좋은 것을 나눈다고 보기도 한다.[60] 액운을 몰아내기 위해 지붕 위에 단독으로 설치된 시사는 대부분 입을 벌리고 있다.[57]
시사가 각 가정의 지붕 위에 설치되기 시작한 것은 서민에게 기와 지붕이 허용되기 시작한 메이지 시대 이후이다.[78][60] 그 전까지는 사찰이나 성문, 우타키, 귀족의 묘역, 마을의 출입구 등에만 설치되었다. 재질은 돌이나 도기(토기 또는 도자기), 회반죽이 기본이지만, 최근에는 콘크리트나 청동 제품도 있다.
5. 전설
시사는 코마이누처럼 중국의 산예(사자)에서 유래했다.[38] 개라는 설도 있지만, 오키나와와 관련이 깊었던 중국이나 남방의 영향을 고려하면 사자일 것이라는 의견이 우세하며,[39][40] 한자 명칭으로 보아도 사자라고 단언된다.[41]
학자들은 우라소에의 왕릉(요우도레)에 있는 에이소왕의 석관에 부조로 조각된 시사를 가장 오래된 시사 조각으로 추정한다. 류큐국 또는 류큐왕의 상징이었던 시사는 사쓰마의 침공과 지배로 왕권이 약화하면서[48] 17세기 말부터 중국에서 온 풍수 관념과 함께 오키나와 본섬 남부의 마을로 확산되었다.[49]
시사에 대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류큐국 역사서 《규요》(球陽)에 실려 있다. 1689년(쇼테이 21년)의 일로, 당시 화재가 빈발하여 곤란을 겪고 있던 고친다의 도모리 사람들이 풍수사에게 조언을 구했더니, 풍수사는 야에세다케(八重瀬岳)의 영향 때문이라고 하며, 이를 막으려면 시사상을 만들어 그 산을 향해 설치하라고 조언했다. 주민들이 그 말에 따라 시사를 설치하자 화재가 발생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50][51][52]
시사상은 1개로 설치되기도 하고, 암수에서 비롯한 음양의 의미 또는 불교의 영향으로 아운의 의미를 가진 한 쌍으로 설치되기도 하는데,[54][55] 단일 형태보다는 한 쌍으로 설치되는 경우가 더 많다고도 한다.[56] 일반적으로[35] 입이 벌어진 시사가 수컷으로 오른쪽에 두어 복을 불러들이고, 입을 다문 시사가 암컷으로 왼쪽에 두어 온갖 재난이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고 한다.
한 중국 사신이 슈리성 궁정으로부터 돌아올 때 왕에게 선물로 시사 모양의 장식이 달린 목걸이를 가져왔다. 왕은 이를 매우 마음에 들어 했고 옷 안에 착용했다. 나하 항구 만의 마단바시 마을은 주민들을 잡아먹고 재산을 파괴하는 바다 용에게 자주 시달렸다. 어느 날 왕이 마을을 방문했을 때 이러한 습격이 발생했고, 모든 사람이 도망가서 숨었다. 현지의 노로는 꿈에서 왕이 방문했을 때 해변에 서서 용을 향해 장식물을 들어올리라고 지시하라는 계시를 받았다. 왕이 장식물을 높이 들고 괴물과 마주섰을 때, 즉시 마을 전체를 흔드는 강력한 포효가 울려 퍼져 용조차 떨게 만들었다. 그때 하늘에서 거대한 바위가 떨어져 용의 꼬리를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용은 죽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은 용의 영혼과 다른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큰 석조 시사를 만들었다.[63]
6. 현대적 의의
시사는 원래 류큐국 또는 류큐 왕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사쓰마의 지배로 왕권이 약화되면서 17세기 말부터 풍수 사상과 함께 오키나와 본섬 남부 마을로 퍼져나갔다.[49] 일반 가정에 시사가 설치되기 시작한 것은 메이지 시대 이후로, 서민에게 기와 지붕이 허용되면서 부터이다.[78][60] 그 전에는 사찰, 성문, 우타키, 귀족 묘역, 마을 출입구 등에만 설치되었다.
시사상은 보통 1개만 설치되기도 하지만, 음양이나 불교의 아운 개념을 담아 한 쌍으로 설치되는 경우가 더 많다.[54][55][56] 대문의 기둥 위나 건물의 현관, 전면에는 한 쌍의 시사를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57] 일반적으로 입을 벌린 시사가 수컷으로 오른쪽에 설치되어 복을 불러들이고, 입을 다문 시사가 암컷으로 왼쪽에 놓여 재난을 막는다고 알려져 있다.[35] 액운을 막기 위해 지붕 위에 தனியாக 설치되는 시사는 대부분 입을 벌리고 있다.[57]
오늘날 시사는 오키나와를 대표하는 관광 상품 중 하나로 자리 잡았으며, 기념품 가게에서는 다양한 표정과 자세를 가진 시사 조각상을 판매하고 있다.[6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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