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크로아티아의 역사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크로아티아의 역사는 선사 시대부터 시작하여 고대 로마 제국의 지배를 거쳐 중세 크로아티아 공국과 왕국 시대를 거쳤다. 19세기에는 민족주의 운동이 전개되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서 자치를 얻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 왕국에 편입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크로아티아 독립국이 수립되었고, 이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을 거쳐 1991년 독립을 선언했다. 독립 후 크로아티아 전쟁을 겪었으며, 20세기 말 민주화와 경제 개혁을 추진했다. 2009년 NATO에 가입하고 2013년 EU에 가입했으며, 2023년 유로존과 솅겐 지역에 합류하며 유럽 통합을 이루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크로아티아의 역사 - 달마티아
    달마티아는 아드리아해 동부 해안을 따라 뻗은 역사적, 지리적, 문화적 지역으로, 고대 로마 속주였으며 현재는 크로아티아의 역사적 지역으로 인식되지만 명확한 법적 경계는 없고, 다양한 세력의 지배와 문화적 교류를 거쳐 크로아티아 역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 크로아티아의 역사 - 오스트리아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은 1804년 시작되어 나폴레옹 전쟁과 1848년 혁명을 거치며 유럽 강대국으로 부상했으나, 1866년 프로이센과의 전쟁 패배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전환되었다.
크로아티아의 역사
지도
기본 정보
공식 명칭크로아티아 공화국
현지어 명칭Republika Hrvatska (레푸블리카 흐르바츠카)
수도자그레브
공용어크로아티아어
역사
초기 역사크로아티아의 크로아트족 이전 역사
로마 시대로마 판노니아 및 로마 달마티아
중세아바르족의 지배, 크로아티아 공국, 크로아티아 왕국 (925년-1102년)
근세합스부르크 크로아티아, 오스만 크로아티아
현대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크로아티아 (1995년-현재)
정치
정치 체제대통령 중심제 공화국
대통령조란 밀라노비치
지리
위치유럽
경제
통화크로아티아 쿠나 (HRK)
주요 산업관광 산업
기타
국가 코드HR
ISO 3166-1HR
국가 도메인.hr
전화 코드+385
역사적 국가 및 지역

2. 선사 및 고대 시대

오늘날 크로아티아로 알려진 지역은 선사 시대 전반에 걸쳐 사람이 살았다. 중기 구석기 시대에 살았던 네안데르탈인의 화석이 크로아티아 북부에서 발굴되었으며, 가장 유명하고 잘 알려진 유적지는 크라피나이다.[2] 신석기 시대와 금석병용 시대 문화 유물은 크로아티아 북부 강 유역에서 주로 발견되었으며, 스타르체보 문화, 부체돌 문화, 바덴 문화 등이 대표적이다.[4][5] 철기 시대에는 초기 일리리아인할슈타트 문화켈트족라텐 문화 흔적이 남아있다.[6]

발칸 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인류는 전기 구석기 시대에 나타났다고 여겨진다. 크로아티아 샤먄다르 동굴에서 발견된 턱뼈는 중기 홍적세 전반의 것으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 속하는 가장 오래된 인류 화석으로 추정된다. 중기 구석기 시대에는 네안데르탈인이 나타나 무스티에 문화를 퍼뜨렸으며, 크라피나에서는 동굴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후 4만 년 전 후기 구석기 시대에는 오리냐크 문화와 Gravettian|그라베티안 문화영어가 생겨났다.

기원전 6500년경 농경과 목축서아시아에서 전파되어 기원전 5000년경까지 크로아티아를 포함한 발칸 전역에 보급되었다. 아드리아 해 연안에서는 임프레소 토기 문화(압인문 토기 문화)가 발달했으며, 달마티아가 기원으로 여겨진다.

고대 그리스의 암흑 시대(기원전 12세기경) 유고슬라비아 주변에는 일리리아인청동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에 이르는 문화를 유지하며 정착해 있었다. 기원전 4세기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정복되었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일리리아 지방은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2. 1. 일리리아와 로마 제국

헤카타이오스는 기원전 500년경, 동부 아드리아해 지역에 히스트리족, 리부르니아족, 일리리아족과 같은 토착 부족들이 거주했다고 언급했다.[7] 그리스의 식민화로 인해 정착민들은 이사 (비스), 코르출라, 흐바르 섬의 스타리그라드 섬과 트로기르, 스토브레치에 무역 거점을 세웠다.[9] 기원전 3세기에 이사의 그리스 식민지는 당시 부상하고 있던 로마 공화국과 동맹을 맺었다. 이세이의 해상 무역이 일리리아의 해적 활동으로 인해 영향을 받자, 그들은 일리리아 왕국에 대항하기 위해 로마의 개입을 요청했고, 이는 기원전 229년의 제1차 일리리아 전쟁으로 이어져 동부 아드리아해에서 로마의 팽창이 시작되었다.[9]

야포디족의 머리 장식과 기타 물질 문화, 가츠카 계곡에서 출토, 크로아티아


로마 제국 확장 이전, 동부 아드리아 해안은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전 220년대의 일리리아 전쟁까지 일리리아 왕국의 북부 지역[10]을 형성했다. 기원전 168년, 로마 공화국은 네레트바 강 남쪽에 보호령을 설치했다. 네레트바 강 북쪽 지역은 일리리쿰 속주가 공식적으로 설립된 기원전 32–27년경까지 천천히 로마의 소유로 편입되었다.

이후 이 땅은 일리리쿰 속주의 일부가 되었다. 서기 6년에서 9년 사이, 이 땅의 이름을 부여한 달마타이를 포함한 부족들이 대 일리리아 반란에서 로마에 대항하여 일어났지만, 반란은 진압되었고, 서기 10년에 일리리쿰은 판노니아와 달마티아의 두 속주로 분할되었다. 달마티아 속주는 내륙으로 뻗어 디나르 알프스 전체와 동부 아드리아 해안 대부분을 덮었다. 달마티아는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출생지였으며, 그는 서기 305년에 황제에서 은퇴한 후 살로나 근처에 대형 궁전을 지었고, 그곳에서 스플리트 시가 나중에 발전했다.[11][12]

4세기 경 로마 지도 ''타불라 포이팅게리아나''의 이스트라 반도 지도


테오도어 몸젠과 베르나르 바반트와 같은 역사가들은 달마티아 전체가 4세기까지 완전히 로마화되고 라틴어를 사용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13] 반면 알렉산다르 스티프체비치와 같은 학자들은 로마화 과정이 선택적이었으며, 주로 도시 중심지에 국한되었고 이전 일리리아 사회 정치 구조가 로마 행정과 정치 구조에 필요한 경우에만 적용된 시골 지역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14]

서로마 제국이 476년에 멸망하고 민족 대이동 시대가 시작된 후, 율리우스 네포스는 476년 이탈리아에서 도망친 후 디 오클레티아누스 궁전에서 그의 축소된 영토를 잠시 통치했다.[16] 그 후 이 지역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535년에 이 영토를 비잔틴 제국에 합병할 때까지 동고트족에 의해 통치되었다. 나중에 비잔틴 제국은 같은 영토에 달마티아 테마를 형성했다.[17]

3. 중세 시대

아바르와 크로아티아인의 침략으로 로마 시대는 막을 내렸고, 로마인들은 해안 지역으로 후퇴했다.[18] 라구사는 에피다우룸 생존자들이 세운 도시이다.[19] 7세기 초, 크로아티아인들이 소폴란드와 우크라이나 서부에서 이주해 왔다는 주장이 있으나,[20][21] 최근 고고학적 자료는 이들이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에 이주하여 정착했음을 보여준다.[22][23][24]

7세기 중반부터 925년까지 크로아티아 지역에는 크로아티아 공국과 하부 판노니아 공국이 존재했다. 크로아티아 공국보르나가 통치했으며 프랑크 왕국봉신국이었다.[25] 류데비트 포사브스키는 프랑크족과 싸웠으며 판노니아 크로아티아를 통치했다.[26] 미슬라프 통치 기간에 프랑크족의 지배가 끝났고,[28] 트르피미로비치 왕조의 창시자인 트르피미르 공작이 즉위하여 비잔틴 제국, 베네치아, 불가리아와 성공적으로 싸웠다. 도마고이 공작은 베네치아와 비잔틴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으며, 베네치아인들은 그를 "최악의 크로아티아 공작"이라 불렀다.[29][30] 9세기에는 크로아티아의 브라니미르 공작 통치 하에 달마티아 크로아티아가 교황 요한 8세로부터 국가 인정을 받았다.[32]



크로아티아의 초대 국왕은 토미슬라프[33]로 여겨지며, 스플리트 교회 공의회 기록과 교황 요한 10세의 서한에 언급된다.[34][35]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드미타르 즈보니미르 시대에 번영을 맞이했다.[225] 다른 통치자로는 보스니아를 정복한 미하엘 크레시미르 2세,[36] 비잔티움 편에서 불가리아 황제 사무엘과 전쟁에 참전한 스테판 드르지슬라프,[37] 크로아티아 왕국을 재건하고 크닌교구를 설립한 스테판[38][39]이 있다.

토미슬라브의 대관


페타르 크레시미르


11세기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드미타르 즈보니미르 통치 기간에 크로아티아 왕국은 절정에 달했다.[40] 왕국은 "크로아티아와 달마티아 왕국"이라고 불렸다.[41]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는 대분열을 이용하여 달마티아 도시들에 대한 지배력을 주장했다.[42] 그는 도시에 자치를 허용했지만 조공을 징수하고 전쟁 시 선박을 요구했다.[42] 새로운 도시 개발을 장려하고,[42] 수도원 설립을 장려하고 교회에 기증했다.[42] 드미타르 즈보니미르는 헬레나와 결혼하여 크닌에서 통치했다. 즈보니미르의 통치는 안정으로 특징지어졌고,[47] 교황의 봉신이었다.[48]



스테판 2세 사망으로 트르피미로비치 왕조는 막을 내렸다. 옐레나는 오빠인 러슬로 1세에게 크로아티아 왕관을 요구하도록 요청했다. 페타르 스나치치가 등장했지만,[51][52] 그보즈 산 전투에서 헝가리군에게 패배했다.

1102년, 헝가리 국왕 콜로만이 크로아티아 왕위를 차지하면서 크로아티아와 헝가리는 동군 연합을 이루게 되었다.[53] 크로아티아와 헝가리는 별개의 왕국으로, 공통 국왕에 의해서만 연결되었다.[54][55] 헝가리 국왕은 "헝가리, 달마티아, 크로아티아의 국왕" 칭호를 사용했으며,[56] 크로아티아 국왕으로 별도 대관식을 치렀다. 크로아티아의 반(총독), 별도 조세 제도, 화폐, 군대가 존재했다.[54]

1288년에 작성된 비노돌 법전은 글라골 문자로 쓰여진 크로아티아어로 된 가장 오래된 법전이다.


봉건 제도가 도입되었고, 후대 왕들은 도시에 특권을 부여하여 영향력을 되찾으려 했다.[58] 제2차 십자군제3차 십자군 사이에 템플 기사단과 병원 기사단[59]이 크로아티아에 처음 나타났다.[60] 1202년 제4차 십자군 당시, 십자군은 자다르(자라)를 점령하여 빚을 갚도록 요청받았다. 자다르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약탈했다.[61] 1217년, 헝가리 국왕 언드라시 2세는 제5차 십자군에 참여했으나, 크로아티아인들의 참여 의지가 낮아 성지로 떠났다.[63]

벨라 4세는 몽골의 헝가리 침략에 맞서 싸웠다. 1241년 사요 강 전투에서 패배한 후, 달마티아로 후퇴하여 트로기르에 피신했다. 오고타이 칸 사망 소식으로 몽골군이 철수하면서 벨라 4세는 위기에서 벗어났다. 슈비치 가문과 프랑코판 가문이 유력 귀족 가문으로 성장했다.

클리스 요새는 스플리트 마을의 내륙에 위치하며, 1242년 몽골의 헝가리 침략 당시 격전을 치른 장소 중 하나였다.

3. 1. 크로아티아 공국과 왕국

7세기 중반부터 925년 통일 이전까지 오늘날 크로아티아 영토에는 크로아티아 공국과 하부 판노니아 공국 두 개의 공국이 있었다. 크로아티아 공국은 818년부터 아인하르트의 연대기에 기록된 바와 같이 보르나가 통치했으며, 당시 프랑크 왕국봉신국이었다.[25] 하부 판노니아의 가장 중요한 통치자는 류데비트 포사브스키였으며, 819년부터 823년 사이에 프랑크족과 싸웠다. 그는 810년부터 823년까지 판노니아 크로아티아를 통치했다.[26]

프랑크족의 지배는 20년 후 미슬라프의 통치 기간에 끝났다.[28] 미슬라프 공작의 뒤를 이어 트르피미로비치 왕조의 창시자인 트르피미르 공작이 즉위했다. 트르피미르는 비잔틴 제국, 베네치아, 불가리아와 성공적으로 싸웠다. 트르피미르 공작의 뒤를 이은 도마고이 공작은 베네치아와 비잔틴을 상대로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으며, 베네치아인들은 이 크로아티아 통치자를 "최악의 크로아티아 공작" (dux pessimus Croatorum)이라고 불렀다.[29][30] 콘스탄티누스 7세에 따르면, 크로아티아인의 기독교화는 7세기에 시작되었지만, 이 주장은 논쟁의 여지가 있으며 일반적으로 기독교화는 9세기와 관련이 있다.[31] 879년, 크로아티아의 브라니미르 공작 통치 하에서 달마티아 크로아티아는 교황 요한 8세로부터 국가로서 교황의 인정을 받았다.[32]

10세기 크로아티아의 주(주판야) 지도. (제국 통치에 관하여)에 언급된 대로다. 파란색으로 표시된 주는 크로아티아 반이 통치하던 지역이다.


크로아티아의 초대 국왕은 일반적으로 10세기 전반의 토미슬라프[33]로 여겨지며, 그는 스플리트 교회 공의회의 기록과 교황 요한 10세의 서한에서 그렇게 언급된다.[34][35]

토미슬라브가 928년에 사망하자 크로아티아인들의 통일 국가의 기반이 흔들리게 되었지만,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Peter Krešimir IV of Croatia)와 그의 아들 드미타르 즈보니미르(Demetrius Zvonimir of Croatia) 시대에 번영을 맞이했다.[225]

그 시대의 다른 중요한 크로아티아 통치자들은 다음과 같다.

  • 미하엘 크레시미르 2세: 949–969, 보스니아를 정복하고 크로아티아 왕국의 권력을 회복했다. 10세기에는 두 명의 크로아티아 여왕도 알려져 있다. 첫 번째는 도마슬라바[36]이고, 두 번째는 헬레나로, 그녀의 묘비명은 19세기 말 프라네 불리치가 실시한 고고학적 발굴 중에 솔린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후자는 또한 국왕 스테판 드르지슬라프 (969–997)의 어머니이기도 했다. 그는 비잔티움 편에서 불가리아 황제 사무엘과의 전쟁에 참전했고, 그에 대한 대응으로 불가리아인들은 크로아티아를 습격하여 자다르까지 초토화한 후 오흐리드로 후퇴했다.[37] 비잔틴 황제 바실 2세는 그 보답으로 스테판 드르지슬라프를 크로아티아와 달마티아의 세습 국왕으로 임명하고 왕실 휘장을 보냈다.[37]
  • 스테판: 1030–1058, 크로아티아 왕국을 재건하고 크닌교구를 설립했다.[38][39]


중세 크로아티아 왕국은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 (1058–1074)와 드미타르 즈보니미르 (1075–1089)의 통치 기간인 11세기에 절정에 달했다.[40]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 시대부터 왕국은 공식적으로 "크로아티아와 달마티아 왕국"이라고 불렸다.[41] 그는 1054년의 대분열을 이용하여 달마티아 도시들에 대한 비잔틴 통치를 약화시키고 그들에 대한 자신의 지배력을 주장했다.[42] 그는 도시에 일정 수준의 자치를 허용했지만, 또한 일정량의 조공을 징수하고 전쟁 시에는 그들의 선박을 요구했다.[42] 자다르와 스플리트와 같은 오래된 도시들을 크로아티아화하는 것 외에도,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는 비오그라드, 닌, 카린, 스크라딘, 시베니크와 같은 새로운 도시의 개발을 장려했다.[42] 그는 또한 새로운 수도원의 설립을 장려하고 교회에 기증을 했다.[42] 트르피미르 마찬과 같은 역사가들은 크레시미르의 통치 기간에 중세 크로아티아 왕국이 최대 영토에 도달했다고 본다.[42] 현대 역사가들은 또한 그의 통치가 노르만 백작 지오빈아초의 아미쿠스에게 포로로 잡혔을 때 끝났을 것으로 본다.[43]

크레시미르 4세의 뒤를 이은 사람은 헝가리 공주 헬레나와 결혼하여 수도 크닌에서 통치한 드미타르 즈보니미르였다. 즈보니미르의 통치는 안정으로 특징지어졌다.[47] 그는 교황의 봉신이었으며, 그의 왕국이 기사 웨젤린의 침략으로 위협받았을 때 교황이 그를 파문하겠다고 위협한 것처럼 교황의 보호를 받았다.[48] 그에게는 라도반이라는 아들이 있었지만, 젊은 나이에 사망했기 때문에 즈보니미르는 1089년에 사망했을 때 남성 상속인을 남기지 않았다.[48][49]

한편, 1096년에 제1차 십자군을 이끌던 툴루즈의 레몽이 크로아티아의 산악 지역을 통과했다. 십자군은 십자군 대열을 공격한 적대적인 현지인들과 마주쳤고, 툴루즈의 레몽은 붙잡은 공격자들을 잔혹하게 처벌했다. 역사가 크레시미르 쿠지치는 이러한 적대 행위를 당시 크로아티아의 "무정부 상태"로 설명한다.[50]

즈보니미르 국왕의 뒤를 이은 사람은 1091년에 사망한 스테판 2세였으며, 이로써 트르피미로비치 왕조는 막을 내렸다. 크로아티아 왕국이 또 다른 봉건 권력 투쟁으로 치닫자, 즈보니미르의 미망인인 옐레나 (헬레나)는 헝가리 국왕 벨라 1세의 딸이었는데, 그녀는 오빠인 러슬로 1세에게 크로아티아로 와서 크로아티아 왕관을 요구하도록 요청했다. 한편 크로아티아에서는 또 다른 왕위 주장자인 페타르 스나치치가 등장했지만,[51][52] 그의 군대는 스나치치가 사망한 그보즈 산 전투에서 헝가리군에게 패배했다.

3. 2. 헝가리와의 동군연합



1089년 드미타르 즈보니미르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크로아티아 왕국은 혼란에 빠졌다. 즈보니미르의 미망인 옐레나 (헬레나)는 헝가리 국왕 벨라 1세의 딸로, 오빠인 러슬로 1세에게 크로아티아 왕위를 요구했다. 한편, 크로아티아에서는 페타르 스나치치가 왕위를 주장했으나,[51][52] 그보즈 산 전투에서 헝가리군에게 패배하고 전사했다.

결국 1102년, 헝가리 국왕 콜로만이 크로아티아 왕위를 차지하면서 크로아티아와 헝가리는 동군 연합을 이루게 되었다.[53] 이는 크로아티아와 헝가리가 별개의 왕국으로, 공통의 국왕에 의해서만 연결됨을 의미했다.[54][55] 헝가리 국왕은 "헝가리, 달마티아, 크로아티아의 국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으며,[56] 크로아티아 국왕으로 별도의 대관식을 치러야 했다. 또한, 크로아티아의 반(총독), 별도의 조세 제도, 화폐, 군대가 존재했다.[54]

헝가리와의 동군 연합의 결과, 봉건 제도가 도입되었다. 후대 왕들은 도시에 특권을 부여하여 영향력을 되찾으려 했다.[58] 제2차 십자군제3차 십자군 사이에 템플 기사단과 병원 기사단[59]이 크로아티아에 처음 나타났다.[60]

1202년 제4차 십자군 당시, 십자군은 베네치아인들에게 약속한 금액을 지불하지 못해 자다르(자라)를 점령하여 빚을 갚도록 요청받았다. 1202년 11월, 십자군-베네치아 군대는 자다르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약탈했다.[61] 교황은 십자군 전체를 파문했다.[61]

1217년, 헝가리 국왕 언드라시 2세는 제5차 십자군에 참여하여 스플리트에 도착했으나, 크로아티아인들의 참여 의지가 낮아 성지로 떠났다.[63] 이는 1202년 자다르 약탈과 관련된 과거의 좋지 않은 기억 때문이었다.[64]

언드라시 2세의 아들 벨라 4세는 몽골의 헝가리 침략에 맞서 싸웠다. 1241년 사요 강 전투에서 패배한 후, 달마티아로 후퇴하여 트로기르에 피신했다. 몽골군은 클리스 요새를 공격했으나, 국왕이 없음을 알고 트로기르로 향했다.

오고타이 칸의 사망 소식으로 몽골군이 철수하면서 벨라 4세는 위기에서 벗어났다. 이 기간 동안 슈비치 가문이 부상했으며, 프랑코판 가문과 함께 크로아티아의 유력 귀족 가문으로 성장했다.

4. 오스만 제국과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

헝가리 왕국과의 동군 연합은 크로아티아에 봉건제를 도입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헝가리 왕들은 도시에 특권을 부여하며 왕권 회복을 시도했다.[58] 제2차 십자군제3차 십자군 사이에 템플 기사단과 구호기사단이 크로아티아에 처음 나타났는데,[59] 이들의 주된 목적은 유럽에서 중동으로 가는 수송로를 확보하고 여행자들을 보호하는 것이었다.[60]

1202년 제4차 십자군 원정 당시, 십자군은 베네치아에 약속한 수송 비용을 지불할 수 없게 되자, 베네치아는 십자군에게 자다르(자라)를 점령하여 빚을 갚을 것을 요구했다. 교황은 이러한 공격을 경고했지만, 1202년 11월 십자군과 베네치아 연합군은 자다르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약탈했다.[61] 이에 교황은 십자군 전체를 파문했다.[61]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헝가리의 임레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십자군이 자다르를 정당한 통치자에게 돌려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61]

1217년, 헝가리 왕 언드라시 2세제5차 십자군에 참전하기 위해 군대를 소집하여 코프리브니차, 크리제브치, 자그레브, 토푸스코, 비하치, 크닌을 거쳐 스플리트에 도착했다.[62] 그러나 크로아티아인들이 십자군 합류에 소극적임을 확인한 언드라시 2세와 헝가리군은 성지로 떠났다.[63] 크로아티아인들이 십자군 참여에 소극적이었던 이유는 1202년 자다르 약탈 사건과 관련된 부정적인 기억 때문이었다.[64] 언드라시 2세는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오면서 여러 유물들을 가져왔는데, 그 중 일부는 자그레브 대성당의 보물 창고에 보관되었다.[65][66]

언드라시 2세의 아들 벨라 4세는 몽골의 헝가리 침략에 맞서 싸워야 했다. 1241년 사요 강 전투에서 패배한 후, 벨라 4세는 달마티아로 피신하여 트로기르에 은신했다.[67] 몽골군은 클리스 요새를 공격했으나, 벨라 4세가 없음을 확인하고 트로기르로 이동했다. 벨라 4세는 배를 준비하여 몽골군을 피해 달아났다.[67] 몽골군은 오고타이 칸의 사망 소식을 듣고 철수했다. 벨라 4세가 달마티아에 머무는 동안, 슈비치 가문은 벨라 4세를 보호한 공로로 브리비르를 하사받았고, 브리비르의 바오 1세 슈비치 시대에 권력이 절정에 달했다.[68]

이 시기에 프랑코판 가문과 슈비치 가문이 크로아티아의 유력 가문으로 떠올랐다. 이후 크로아티아의 많은 반(총독)들이 이 두 가문에서 배출되었다.[69] 특히 슈비치 가문의 브리비르 공들은 달마티아, 슬라보니아, 보스니아의 넓은 지역을 통치하며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250x250px


14세기 초, 파울 슈비치는 자신의 화폐를 주조하고 크로아티아 반의 세습 작위를 보유하는 등 사실상 독립적인 통치자로 군림했다. 헝가리의 라슬로 4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 위기가 발생하자, 1300년 파울은 앙주의 카롤 로베르를 헝가리 왕국으로 초청하여 왕위에 오르도록 했다.[71] 이후 벌어진 내전에서 카롤은 1312년 로즈고니 전투에서 승리하며 헝가리 왕위를 확고히 했다.

크로아티아 국왕 대관식은 점차 사라졌다. 카롤 로베르는 1301년 크로아티아 국왕으로 별도로 대관식을 치른 마지막 왕이었으며, 이후 크로아티아는 별도의 헌법을 가지게 되었다. 1312년 파울 슈비치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믈라덴이 크로아티아 반 작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믈라덴은 1322년 블리스카 전투에서 왕실군과 동맹군에게 패배하면서 몰락했다. 믈라덴 슈비치의 몰락으로 발생한 권력 공백은 베네치아가 달마티아 도시들에 대한 지배권을 다시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1350년경, 벤코바츠 근처에서 크로아티아-달마티아 의회(hrvatski Sabor)가 처음으로 개최되었다.[72] 이 의회는 크로아티아 반의 주도로 소집되었으며, 크로아티아의 12 귀족 가문 구성원들이 참석했다. 이후 크로아티아-달마티아 의회는 주로 크닌에서 개최되었다.[73]

위대한 루이의 통치(1342–1382)는 중세 크로아티아 역사의 황금기로 여겨진다.[74] 루이는 베네치아를 상대로 군사 작전을 펼쳐 1358년 자다르 조약을 체결하도록 강요했다. 이 조약으로 라구사 공화국은 베네치아로부터 독립을 얻었다. [75]

오스트리아 국립 문서 보관소에 보존되어 있는 1527년 체틴그라드 헌장에는 이반 카를로비치, 니콜라 III 즈린스키, 크로아티아 체크무늬 인장이 포함되어 있다.


15세기 초, 달마티아 대부분이 베네치아 공화국의 세력권에 들어가면서 크로아티아는 내륙 지역과 달마티아 지역으로 분단되었다. 한편, 오스만 제국이 발칸 반도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크로아티아는 위협에 직면했다. 1444년 바르나, 1448년 코소보에서 기독교 세력이 패배했고, 1453년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면서 비잔틴 제국이 멸망했다. 쉴레이만 1세 시대에는 세르비아가 오스만 제국에 병합되었고,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마저 정복당했다.[237] 크로아티아 역시 1409년에 달마티아를 상실했고, 1493년 크르바바 전투,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연이어 패배했다.[238] 결국 크로아티아는 합스부르크 제국과 관계를 맺고 자치권을 얻는 대신 그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지만,[239] 변방 지역으로 전락하여 사회, 경제, 군사 정책 등 모든 면에서 불리한 대우를 받았다.[240]

이러한 상황에서 크로아티아 총독(반)이었던 니콜라 슈비치 즈린스키는 합스부르크 황제로부터 세게트(시게트바르) 방어를 맡게 되었다. 1566년, 약 2,500명의 병력으로 10만 명의 오스만 군대에 맞서 시게트를 포위당했지만, 즈린스키는 병사들과 함께 오스만 군에 돌격하여 장렬히 전사했다. 이 사건은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전사한 레오니다스 왕에 비유되어 즈린스키는 '달마티아의 레오니다스'로 칭송받게 되었다.[241]

오스만 제국의 진출로 인해 많은 크로아티아인들이 이탈리아나 합스부르크 영내로 피난을 갔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로부터의 피난민들이 달마티아와 슬라보니아로 유입되었다. 이들은 우스코크(도망자)라고 불렸으며, 달마티아 북부의 세니를 거점으로 오스만 제국 지배하에서 해적 활동을 벌였다.[244] 헝가리에서는 1514년 도자 이슈트반의 난이 발생했고, 1573년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에서도 농민 반란이 일어났는데, 마티야 구베츠가 이끈 반란이 가장 큰 규모였다.[245] 1670년에는 크로아티아 총독이었던 페타르 즈린스키가 프란 크르스토 프랑코판 및 헝가리 귀족들과 함께 합스부르크 제국에 대항하는 반란을 계획했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1671년 즈린스키와 프랑코판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 사건을 즈린스키-프랑코판의 반란이라고 부른다.[246]

오스만 제국은 텅 비어버린 크로아티아 땅에 정교회 신자인 블라흐인들을 이주시켰다. 이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역사학자들 사이에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시기 크로아티아 지역에는 가톨릭과 정교회 신자, 크로아티아인, 블라흐인, 세르비아인들이 공존하게 되었다. 크로아티아의 중심지는 내륙의 자그레브로 이동했고, 크로아티아는 합스부르크 영토와 오스만 제국의 국경 지대가 되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달마티아 북부에서 슬라보니아 및 바나트에 이르는 지역에 '군사 변방 지대 (Vojna Krajna)'를 설치하고 직접 통치했다. 17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많은 세르비아인들이 코소보 등지에서 보이보디나와 슬라보니아로 국경 경비병으로 이주했다. 페치의 대주교 아르세니예 3세-차르노예비치가 이끈 이주[248]는 '세르비아인의 대이동(Velike seobe Srba)'이라고 불리며, 훗날 '세르비아인 문제'를 야기하여 1991년 크로아티아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249]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 체결로 오스만 제국은 모하치 전투 이후 획득한 영토를 모두 상실했다. 1718년 파사로비츠 조약으로 달마티아 일부가 베네치아에 양도되었다. 1688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등 의용병이 도나우강 이남으로 진격할 때 오스트리아 군에 합류했지만, 오스트리아 군이 철수하면서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등 4만 명 가까이가 오스만 제국의 보복을 피해 헝가리로 이주했다.[250]

군정 변방 지대


군정 변방 지대는 오스만 제국의 빈 포위(1529년) 등 중앙 유럽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설치되었으며, 1754년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에 확립되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이 지역에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등을 이주 시켰다.[251] 1910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군정 변방 지대에는 크로아티아계가 62.5%, 세르비아계가 24.6% 거주했다.[252]

군정 변방 지대는 "기독교 세계의 전선" 역할을 했다. 1630년 합스부르크 제국은 "블라흐 규약"을 발표하여 군정 변방 지대의 자치를 인정했고, 1667년 두브로브니크 대지진 이후, 17세기에는 우스코크 전쟁을 통해 크로아티아의 군정 변방 제도가 발전했다. 17세기 이후에는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했는데, 이 인구 증가에는 세르비아인들의 역할이 컸다.[254][255]

16세기 달마티아


군정 변방 지대 내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들의 지역은 "크라이나"라고 불렸으며, 18세기 전반까지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 달마티아를 분단하는 형태를 이루었다.[256] "산악 크라이나(크로아티아 크라이나의 별칭)"는 이반 마주라니치 총독(1873년 - 1880년) 시대에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의 민족 통합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크로아티아 권리주의 아래 세르비아 배타주의의 거점(그린나, 코레니차)이 형성되기도 했다.[257] 합스부르크 제국 지배하의 크로아티아에는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뿐만 아니라 각지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섞여 살게 되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크라이나에서 발생한 잦은 반란들을 진압할 수 있었다. 1755년의 반란은 규모가 매우 커서 크로아티아 사회를 붕괴 직전까지 몰고 갔지만, 이는 오히려 합스부르크 제국의 절대주의를 크로아티아 지역에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258]

합스부르크 제국의 군사화 정책으로 인해 크로아티아에서는 다시 농노화가 진행되었고, "'''자드루가'''"라고 불리는 부계 사회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크라이나" 병사들과 농민들의 부담은 18세기 후반에 더욱 커졌고, 사바 강 남쪽의 크로아티아 크라이나에서는 기아 상태에 빠졌다. 남성들이 전쟁에 동원되면서 여성들이 농업 등 중노동을 담당했지만, 18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 여성의 수는 항상 남성의 수보다 적었다. 이로 인해 "자드루가"의 붕괴는 더욱 가속화되었다.[259] "블라흐 규약"에서 인정된 자치가 "자드루가"의 자치를 능가하면서 "자드루가"가 이차적인 존재가 된 것도 문제였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자드루가"의 붕괴를 막기 위해 보호 조치를 취했지만, 이는 군정 변방 지대를 유지하기 위해 크라이나가 농업 사회로 머물러야 했고, 사회 발전을 멈춰야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블라흐 규약"에서 인정된 자치와 특권은 점차 제한을 받았고, 군사화와 함께 폐지되었다. "자드루가"는 붕괴를 면했지만, 이러한 보호 조치로 인해 이 지역의 발전이 저해되었다.[260]

결과적으로 18세기 말, 크로아티아는 베네치아, 오스만 제국, 합스부르크 제국으로 삼분되었다.[261]

크로아티아 귀족들은 1527년 체틴그라드에 모여 페르디난트 1세를 크로아티아의 새로운 통치자로 선출했다. 합스부르크 대표단은 1526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체틴그라드에 도착했고, 1526년 새해 전야에 모인 크로아티아인들은 다음 날 체틴의 프란체스코 수도원에서 열린 미사에서 페르디난트 1세를 새로운 통치자로 선출했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94] 합스부르크 통치자들은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크로아티아를 방어하고, 크로아티아의 정치적 권리를 존중할 것을 약속했다.[58][83][95]

인근 슬라보니아 의회는 스자폴리아이를 지지하면서 두 경쟁 왕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지만, 합스부르크가 스자폴리아이를 제압하면서 두 왕관은 통합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이러한 혼란을 틈타 16세기에 슬라보니아 대부분, 서부 보스니아(당시 터키령 크로아티아로 불림), 리카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이 영토들은 루멜리아 에얄레트, 부딘 에얄레트, 보스니아 에얄레트, 카니제 에얄레트 등에 속하게 되었다.

1590년 오스만 제국이 사파비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종결하면서, 텔리 하산 파샤가 오스만 보스니아 에얄레트의 새로운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크로아티아를 완전히 정복하기 위해 대규모 공세를 시작했다. 그의 공세는 비하치 포위전과 브레스트 전투에서 승리하는 등 초반에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1593년 6월 시사크 전투에서 저지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이 전투에서 패배했고, 하산 파샤도 전사했다. 시사크 전투에서의 패배 소식은 콘스탄티노플에 큰 충격을 주었고, 오스만 제국은 합스부르크 군주국에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하면서 장기 투르크 전쟁이 시작되었다.[108] 시사크 전투에서의 패배는 크로아티아와 오스만 제국 사이의 국경을 안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17세기에는 오스만 제국의 힘이 점차 약화되기 시작했다.[86]

17세기, 크로아티아의 귀족 니콜라 즈린스키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친 장군 중 한 명이었다. 1663/1664년에 그는 오스만 제국 영토로 성공적인 군사 작전을 이끌었고, 판노니아 평원과 발칸 반도를 연결하는 중요한 오시예크 다리를 파괴했다. 즈린스키는 프랑스 왕 루이 14세로부터 칭찬을 받기도 했다. 크로아티아 귀족들은 오스만 제국의 추가적인 진격을 막기 위해 노비 즈린 성을 건설했다. 한편, 황제 합스부르크의 레오폴트 1세는 합스부르크 영토 전체에 대한 절대적인 통치를 강화하려 했고, 이는 크로아티아 의회와 반(총독)의 권한 상실을 의미했기 때문에 크로아티아인들 사이에 불만을 야기했다.[111]

1664년 7월, 대규모 오스만 군대가 노비 즈린을 포위하고 파괴했다. 이 오스만 군대는 오스트리아 영토로 진격했지만, 성 고타르 전투에서 합스부르크 제국군에 의해 궤멸되었다. 크로아티아인들은 이 승리를 계기로 오스만 제국을 몰아낼 수 있는 반격을 기대했지만, 레오폴트 1세는 바스바르 평화 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했다. 레오폴트 1세의 결정은 크로아티아 지도층 귀족들 사이에 분노를 일으켰고, 합스부르크 왕가를 다른 통치자로 교체하려는 음모를 촉발시켰다. 니콜라 즈린스키가 사망한 후, Fran Krsto Frankopan과 Petar Zrinski가 이 음모를 주도했다.[111]

음모자들은 프랑스, 베네치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심지어 오스만 제국과도 접촉했지만, 결국 합스부르크 첩자에 의해 발각되었다. 음모자들은 황제와 화해하라는 초대를 받고 이에 응했지만, 오스트리아에 도착한 후 반역죄로 기소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들은 1671년 4월 비너 노이슈타트에서 처형되었고, 그들의 가문은 제국 당국에 의해 몰락했으며, 재산은 몰수되었다.[111]

17세기 오스만 제국의 세력이 약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스만 제국 최고 사령부는 바스바르 조약이 만료될 예정이었던 1683년에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 빈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 공격은 실패로 끝났고, 오스만 제국은 연합 기독교 군대에 의해 빈 근처에서 패퇴했다. 이후 성전 동맹이 결성되었고, 대튀르크 전쟁이 시작되었다. 크로아티아 전선에서는 루카 이브리시모비치와 마르코 메시치가 반 오스만 봉기를 이끌었다. 하이두크 지도자 스토얀 얀코비치는 달마티아에서 군대를 이끌며 활약했다. 크로아티아 반 니콜라 (미클로스) 에르도디는 비로비티차 포위전에서 군대를 지휘했다. 오시예크는 1687년에, 코스타이치차는 1688년에, 슬라본스키 브로드는 1691년에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해방되었다.[112] 비하치를 탈환하려는 시도도 1697년에 있었지만, 대포 부족으로 인해 중단되었다.[113] 같은 해, 사보이 공자 외젠은 군대를 이끌고 보스니아로 진격하여 사라예보를 약탈하고 불태웠다.[114] 이 사건 이후, 보스니아에서 온 많은 기독교 난민들이 슬라보니아에 정착했다.[115] 1697년 젠타 전투에서 사보이 공자 외젠의 군대에 의해 오스만 제국이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후,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이 체결되어 슬라보니아 전역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러나 크로아티아는 우나 강과 르바스 강 사이의 중세 후기 영토 상당 부분을 잃었고, 이 지역은 오스만 제국의 보스니아 아이알레트에 남게 되었다.[116] 이후 몇 년 동안, 독일어 사용이 새로운 군사 국경 지역에서 확산되었고, 독일어를 사용하는 식민지 주민들이 국경 지역에 정착하면서 다음 두 세기 동안 번성했다.[117]

4. 1. 오스만 제국의 침략과 저항

요한 바이카르트 폰 발바소르가 묘사한 1593년 6월 22일 제3차 시사크 전투. 하산 파샤의 대공세의 절정이었다.


1590년 오스만 제국이 사파비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종결하면서, 호전적인 텔리 하산 파샤가 오스만 보스니아 에얄레트의 새로운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크로아티아를 완전히 정복하기 위해 대대적인 공세를 시작했고, 크로아티아의 "잔재의 잔재"를 노렸다.[108] 그는 보스니아 에얄레트에서 동원 가능한 모든 병력을 소집했다. 그의 공세는 비하치 포위전(크로아티아가 다시 탈환하지 못했다)이나 브레스트 전투와 같이 크로아티아인과 그 동맹국들을 상대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1593년 6월 시사크 전투에서 중단되었다.[108] 오스만 제국은 이 전투에서 패배하고 하산 파샤도 전사했다. 시사크 근처에서 보스니아 파샤의 패배 소식은 콘스탄티노플에서 분노를 일으켰다. 오스만 제국은 합스부르크 군주국에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하기로 결정했고, 이는 장기 투르크 전쟁의 시작을 촉발했다.[108] 전략적으로 시사크 근처에서의 오스만 제국의 패배는 크로아티아와 오스만 제국 사이의 국경을 안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86]

300x300px


17세기, 저명한 크로아티아 귀족 니콜라 즈린스키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투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크로아티아 장군 중 한 명이 되었다. 1663/1664년에 그는 오스만 제국 지배 영토로 성공적인 침략을 이끌었고, 판노니아 평원과 발칸 반도를 연결하는 중요한 오시예크 다리를 파괴했다.[111] 크로아티아 귀족들은 오스만 제국의 추가 진격을 막기 위해 노비 즈린 성을 건설했다.[111]

1664년 7월, 대규모 오스만 군대가 노비 즈린을 포위하고 파괴했다. 이 군대는 오스트리아 영토로 진격했지만, 성 고타르 전투에서 합스부르크 제국군에 의해 궤멸되었다.[111]

4. 2.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와 군사 변경 지대

헝가리와의 동군 연합은 봉건 제도 도입을 가져왔다. 이후 왕들은 도시에 특권을 부여하여 영향력을 되찾으려 했다.[58] 제2차 십자군제3차 십자군 사이에 템플 기사단과 병원 기사단이 크로아티아에 처음 나타났다.[59] 이들의 목적은 유럽에서 중동으로 가는 수송로를 확보하고 여행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60]

1202년 제4차 십자군 선포 후, 십자군은 베네치아인들에게 약속한 금액을 지불할 수 없었다. 베네치아인들은 십자군에게 자다르(자라)를 점령하여 차액을 보상해 달라고 요청했다. 교황은 경고했지만, 1202년 11월 십자군-베네치아 군대는 자다르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약탈했다.[61] 교황은 십자군 전체를 파문했다.[61]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헝가리의 임레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십자군이 자다르를 정당한 통치자에게 돌려주도록 요청하는 편지를 썼다.[61]

1217년, 언드라시 2세는 제5차 십자군에 참여했다. 그는 남쪽으로 코프리브니차, 크리제브치, 자그레브, 토푸스코, 비하치, 크닌을 거쳐 스플리트에 도착했다.[62] 크로아티아인들이 십자군에 합류하지 않을 것을 깨달은 왕과 군대는 성지로 떠났다.[63] 이는 1202년 자다르 파괴와 약탈과 관련된 과거의 좋지 않은 기억 때문이었다.[64] 언드라시 2세는 십자군에서 돌아올 때 유물을 가져왔고, 일부는 자그레브 대성당의 보물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65][66]

언드라시의 아들 벨라 4세는 몽골의 헝가리 침략에 대처해야 했다. 1241년 사요 강 전투에서 패배한 후, 벨라 4세는 달마티아로 후퇴하여 트로기르로 피신했다.[67] 몽골군은 클리스 요새를 공격했지만, 벨라 4세가 없다는 것을 알고 트로기르로 향했다. 벨라 4세는 배를 준비하여 도주했다.[67]

몽골의 트로기르 공격은 오고타이 칸의 사망 소식으로 철수하면서 일어나지 않았다. 벨라가 달마티아에 머무는 동안, 슈비치 귀족 가문은 그를 보호한 공로를 인정받아 브리비르를 하사받았고, 브리비르의 바오 1세 슈비치 시대에 권력이 절정에 이르렀다.[68]

이 기간 동안 프랑코판과 슈비치가 두각을 나타냈다. 크로아티아의 많은 반들은 이 두 가문에서 유래했다.[69] 슈비치 가문의 브리비르 공들은 달마티아, 슬라보니아, 보스니아의 넓은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주장했다.

14세기 초 파울 슈비치는 독립적인 통치자로 군림했다. 그는 자신의 화폐를 주조했고 크로아티아 반의 세습 작위를 보유했다. 헝가리의 라슬로 4세 사후 계승 위기가 발생했고, 1300년 파울은 앙주의 카롤 로베르를 헝가리 왕국으로 초청했다.[71] 내전이 발발했고, 카롤 측은 1312년 로즈고니 전투에서 승리했다.

크로아티아 국왕의 대관식은 점차 중단되었다. 카롤 로베르는 1301년 크로아티아 국왕으로 별도로 대관식을 치른 마지막 인물이었으며, 이후 크로아티아는 별도의 헌법을 갖게 되었다. 파울 슈비치는 1312년에 사망했고, 믈라덴이 크로아티아 반의 작위를 물려받았다. 믈라덴은 1322년 블리스카 전투에서 왕실군과 동맹군에게 패배했다. 믈라덴 슈비치의 몰락으로 인한 권력 공백은 베네치아가 달마티아 도시에 대한 통제권을 재확립하는 데 이용되었다. 1350년경, 크로아티아-달마티아 의회(hrvatski Sabor)의 첫 번째 사례가 벤코바츠 근처에서 열렸다.[72] 의회는 8월에 크로아티아 반에 의해 소집되었으며, 크로아티아의 12 귀족 가문 구성원들이 모였다. 이후 크로아티아-달마티아 의회는 크닌에서 열렸다.[73]

위대한 루이의 통치(1342–1382)는 중세 크로아티아 역사의 황금기로 여겨진다.[74] 루이는 베네치아를 상대로 군사 작전을 시작하여 1358년 자다르 조약을 체결하도록 했다. 같은 조약으로 라구사 공화국은 베네치아로부터 독립을 얻었다. [75]

크로아티아 귀족들은 1527년 체틴그라드에 모여 페르디난트 1세 합스부르크 왕가를 크로아티아의 새로운 통치자로 선출했다. 합스부르크 대표단은 1526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체틴그라드에 도착했다. 1526년 새해 전야에 모인 크로아티아인들은 다음 날 체틴의 프란체스코 수도원에서 열린 미사에서 결정을 선포했다.[94] 합스부르크 통치자들은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크로아티아를 방어하고, 크로아티아의 정치적 권리를 존중할 것이라고 확인했다.[58][83][95]

인근 슬라보니아의 의회는 스자폴리아이를 선출했고, 내전이 벌어졌지만, 합스부르크가 스자폴리아이를 제압하면서 두 왕관은 통합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16세기에 슬라보니아 대부분, 서부 보스니아 (당시 터키령 크로아티아로 불림), 리카를 포함하도록 확장했다. 이 영토들은 루멜리아 에얄레트, 부딘 에얄레트, 보스니아 에얄레트, 카니제 에얄레트의 일부가 되었다.

오스만 제국이 1590년 사파비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종결하면서, 텔리 하산 파샤가 오스만 보스니아 에얄레트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크로아티아를 완전히 정복하기 위해 대공세를 시작했다. 그의 공세는 비하치 포위전, 브레스트 전투와 같은 성공을 거두었지만, 1593년 6월 시사크 전투에서 중단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패배했고 하산 파샤도 사망했다. 시사크 근처에서 보스니아 파샤의 패배 소식은 콘스탄티노플에서 분노를 일으켰다. 오스만 제국은 합스부르크 군주국에 전쟁을 선포했고, 장기 투르크 전쟁이 시작되었다.[108] 시사크 근처에서의 오스만 제국의 패배는 크로아티아와 오스만 제국 사이의 국경을 안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17세기의 일반적인 특징은 오스만 제국의 힘이 쇠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86]

17세기 동안, 니콜라 즈린스키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투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크로아티아 장군 중 한 명이 되었다. 1663/1664년에 그는 오스만 제국 영토로 성공적인 침략을 이끌었다. 이 작전은 오시예크 다리의 파괴로 끝났다. 즈린스키는 프랑스 왕 루이 14세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크로아티아 귀족들은 노비 즈린 성을 건설했다. 황제 합스부르크의 레오폴트 1세는 합스부르크 영토 전체에 절대적인 통치를 부과하려 했고, 이는 크로아티아 의회와 반에게 권한 상실을 의미하며 크로아티아인들 사이에서 불만을 야기했다.[111]

1664년 7월, 대규모 오스만 군대가 노비 즈린을 포위하고 파괴했다. 이 군대는 성 고타르 전투에서 합스부르크 제국군에 의해 궤멸되었다. 크로아티아인들은 오스만 제국을 몰아내기 위한 반격을 기대했지만, 레오폴트는 바스바르 평화 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했다. 크로아티아에서 그의 결정은 지도적인 귀족들 사이에서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합스부르크 왕가를 다른 통치자로 교체하려는 음모를 촉발시켰다. 니콜라 즈린스키가 사망한 후, Fran Krsto Frankopan과 Petar Zrinski가 음모를 지지했다.[111]

음모자들은 프랑스, 베네치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오스만 제국과 접촉했지만, 합스부르크 첩자에 의해 발각되었다. 음모자들은 황제와 화해하라는 초대를 받았고, 동의했다. 그러나 그들은 반역죄로 기소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들은 1671년 4월 비너 노이슈타트에서 처형되었다. 그들의 가족은 제국 당국에 의해 근절되었고, 재산은 몰수되었다.[111]

17세기에 오스만 제국의 힘이 쇠퇴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스만 제국 최고 사령부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 빈을 1683년에 공격했는데, 바스바르 평화 조약이 만료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격은 재앙으로 끝났고, 오스만 제국은 연합 기독교 군대에 의해 패주했다. 성전 동맹이 결성되었고 대튀르크 전쟁이 시작되었다. 크로아티아 전장에서는 루카 이브리시모비치, 마르코 메시치는 반 오스만 봉기를 이끌었다. 하이두크 지도자 스토얀 얀코비치는 달마티아에서 군대를 이끌었다. 크로아티아 반 니콜라 (미클로스) 에르도디는 비로비티차 포위전에서 군대를 이끌었다. 오시예크는 1687년에, 코스타이치차는 1688년에, 슬라본스키 브로드는 1691년에 해방되었다.[112] 비하치를 탈환하려는 시도도 1697년에 있었지만, 중단되었다.[113] 같은 해, 사보이 공자 외젠은 보스니아로 진격하여, 사라예보를 약탈하고 불태웠다.[114] 이 약탈 이후, 보스니아에서 온 대규모 기독교 난민들이 슬라보니아에 정착했다.[115] 1697년 젠타 전투에서 사보이 공자 외젠의 군대에 의해 오스만 제국이 패배한 후,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이 체결되어 슬라보니아 전체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해방되었음을 확인했다. 크로아티아는 우나 강과 르바스 강 사이의 중세 후기 영토의 상당 부분을 잃었고, 이 지역은 오스만 제국의 보스니아 아이알레트에 남게 되었다.[116] 독일어 사용이 새로운 군사 국경 지역에서 확산되었고, 독일어를 사용하는 식민지 주민들이 국경 지역에 정착하면서 다음 두 세기 동안 번성했다.[117]

오스만 제국은 발칸 반도로 손을 뻗었다. 1444년 바르나, 1448년 코소보에서 기독교 세력이 패배했고, 1453년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여 비잔틴 제국이 멸망했다. 쉴레이만 1세 시대에는 세르비아를 병합했고, 1526년 모하치 전투로 헝가리마저 정복했다.[237] 크로아티아도 1409년에 달마티아를 잃었고, 1493년 크르바바 전투,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패배하여[238] 합스부르크 제국과 관계를 맺어 자치권을 얻으면서도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지만[239], 변방 지역으로 전락하여 사회 경제와 군사 정책 모두에서 부정적인 대우를 받게 되었다.[240]

크로아티아 총독(반) 니콜라 슈비치 즈린스키는 합스부르크 황제로부터 세게트 (시게트바르) 방어를 맡게 되었다. 1566년 시게트는 약 2,500명의 병력으로 10만 명의 오스만 군에게 포위되었지만, 즈린스키는 공격을 감행했으나, 휘하의 병사들과 함께 전사했다 (시게트바르 포위전). 이 일은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전사한 레오니다스 왕에 비유되어 '달마티아의 레오니다스'로 칭송받게 되었다.[241]

15세기달마티아의 대부분이 베네치아의 세력권이 되어 내륙부와 분단되었다. 오스만 제국도 크로아티아 방면으로 진격을 시작하여 과거 크로아티아 왕국의 3분의 2가 빼앗기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진출로 많은 크로아티아인들이 이탈리아나 합스부르크 영내로 이주했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로부터의 피난민이 달마티아와 슬라보니아로 유입되었다. 그들은 우스코크(도망자)라고 불리며, 달마티아 북부의 세니를 거점으로 활동하며 오스만 제국 지배하에서 해적으로 약탈 행위를 저질렀다.[244] 헝가리에서는 도자 이슈트반의 난이 1514년에 발생했지만, 1573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에서도 농민 반란이 일어났으며, 마티야 구베츠가 이끈 것이 최대 규모였다.[245] 1670년 페타르 즈린스키가 프란 크르스토 프랑코판, 헝가리 귀족까지 끌어들여 합스부르크 제국에 대한 반란을 계획했지만, 미연에 방지되었고, 1671년 즈린스키와 프랑코판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 사건을 즈린스키-프랑코판의 반란이라고 부른다.[246]

텅 비어버린 크로아티아 땅에 오스만 제국은 정교 신자인 블라흐인들을 이주 시켰지만, 이 일은 현재에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각국의 역사학자들이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크로아티아 지역에서는 가톨릭과 정교도, 크로아티아인, 블라흐인, 세르비아인들이 공존했다. 크로아티아의 중심 지역이 내륙부의 자그레브로 옮겨지면서 크로아티아는 합스부르크 영토와 오스만 제국의 국경을 형성하게 된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달마티아 북부에서 슬라보니아 및 바나트에 걸쳐 '군사 변방 지대 (Vojna Krajna)'를 설치하여 직접 통치를 했다. 17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많은 세르비아인들이 코소보 지방을 비롯한 각지에서 보이보디나 및 슬라보니아로 국경 경비병으로서 이주했다. 페치의 대주교 아르세니예 3세-차르노예비치가 이끈 것[248]은 '세르비아인의 대이동(Velike seobe Srba)'라고 불리는데, '세르비아인 문제'를 낳는 요인이 되어, 1991년에는 크로아티아 전쟁을 발발시키게 된다.[249]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오스만 제국은 모하치 전투 이후 획득한 영토를 모두 잃었다. 1718년 파사로비츠 조약에 의해 달마티아 일부가 베네치아에 양도되었다. 1688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등의 의용병이 도나우강 이남으로 진격했을 때 오스트리아 군에 참여했지만, 오스트리아 군이 철수함에 따라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등 4만 명 가까이가 오스만 제국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헝가리로 이주했다.[250]

군정 변방 지대는 오스만 제국이 1529년 빈 포위 등 중앙 유럽 침공에 대항하기 위해 설치되었으며, 1754년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에 확립되었지만, 합스부르크 제국은 이 지역에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등을 이주 시켰다[251]1910년 인구 배분에서는 62.5%가 크로아티아계, 24.6%가 세르비아계가 되었다[252]

군정 변방 지대는 "기독교 세계의 전선"이 되었다. 1630년 합스부르크 제국은 "블라흐 규약"을 발포하여 군정 변방 지대의 자치를 인정하고, 1667년에 치명적인 지진이 발생한 후, 17세기에는 우스코크 전쟁을 통해 크로아티아가 군정 변방 제도가 발전하게 되었다. 17세기 이후에는 인구가 증가 추세를 보이게 되었다. 이 인구 회복에는 세르비아인들의 역할이 컸다[254][255]

군정 변방 지대 내,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들의 지역은 "크라이나"라고 불렸지만, 이 지역은 18세기 전반까지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달마티아를 분단하는 형태를 이루었다[256]。 "산악 크라이나(크로아티아 크라이나의 별칭)"는 이반 마주라니치 총독(1873년 - 1880년) 시대에,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의 민족 통합을 추진하는 가운데, 크로아티아 권리주의 아래, 세르비아 배타주의의 거점이 그린나, 코레니차에 형성되었다[257]。합스부르크 제국 지배 하의 크로아티아에서는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뿐만 아니라 각지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을 포함하게 되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크라이나에서 잇따른 반란을 진압할 수 있는 상태였다. 1755년의 반란은 규모가 커서, 크로아티아 사회를 붕괴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에 의한 절대주의를 크로아티아 지역에 퍼뜨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258]

합스부르크 제국이 군사화를 추진하면서 크로아티아에서는 다시 농노화가 시작되었고, "'''자드루가'''"라고 불린 부계 사회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크라이나"의 병사들과 농민들의 부담은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더욱 증가하고, 사바 강 남쪽의 크로아티아 크라이나에서는 기아 상태에 빠졌다. 남성이 많은 전쟁에 동원되었기 때문에, 여성이 농업 등 중노동을 했지만, 18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 여성의 수가 항상 남성의 수를 밑돌았다. "자드루가"의 붕괴는 더욱 진행되었다[259]。 "블라흐 규약"에서 인정한 자치가 "자드루가"의 자치를 능가하는 것이었고, "자드루가"가 이차적인 존재가 된 것도 문제였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이 붕괴를 막기 위해 자드루가를 보호했다. 군정 변방 지대를 존속시키기 위해서는 크라이나가 농업 사회여야 하고, 사회 발전을 멈출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블라흐 규약"에서 인정된 자치와 특권은 점차 제한을 받게 되었고, 군사화와 함께 폐지되었다. "자드루가"의 존재는 붕괴를 면했지만, 이 보호 조치 때문에 이 지역의 발전이 방해받게 되었다.[260]

크로아티아는 18세기 말까지 베네치아, 오스만 제국, 합스부르크 제국에 삼분할되었다[261]

5. 19세기 민족주의 운동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18세기 무렵, 오스만 제국은 헝가리에서 축출되었고, 오스트리아는 제국을 중앙 통제 하에 두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고, 이는 1741년부터 1748년까지 이어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일으켰다. 크로아티아 의회는 1712년 국사조칙을 통해 마리아 테레지아를 정당한 통치자로 인정하고, 그 대가로 헝가리로부터 크로아티아의 자치를 인정받고자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를 마지못해 허락했다.[118] 그녀의 통치 기간 동안 교육 및 의료 분야에서 제한적인 근대화가 이루어졌다. 1767년 바라주딘에 크로아티아 왕립 평의회(Consilium Regni Croatiae)가 설립되어 크로아티아 정부 역할을 했지만, 1779년에 폐지되면서 권한이 헝가리로 넘어갔다. 바라주딘은 크로아티아의 행정 수도였으나, 1776년 대화재로 큰 피해를 입어 주요 행정 기관들이 자그레브로 이전했다.[119]

마리아 테레지아의 후계자 오스트리아 황제 요제프 2세는 계몽 절대주의 방식으로 통치했지만, 그의 개혁은 중앙 집권화와 독일화 시도로 특징지어졌다. 이 시기 카를로바츠리예카, 카를로바츠세니를 잇는 요세피나 (도로)가 건설되었다.[120] 오스트리아-튀르크 전쟁 (1788-1791)을 끝낸 시스토바 조약에 따라 돈지 라파츠, 체팅그라드, 드레즈니크 그라드, 야세노바츠가 합스부르크 왕가에 할양되어 크로아티아 군사 변경지대에 편입되었다.[121]

현대 자그레브의 사바 강변에 있는 일리리아 지방의 경계 표시


나폴레옹 군대가 유럽을 지배하면서 크로아티아도 프랑스와 접촉하게 되었다. 1797년 나폴레옹이 베네치아 공화국을 멸망시키자, 달마티아의 옛 베네치아 영토는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809년 나폴레옹이 바그람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를 격파하면서 프랑스 지배 영토는 사바 강까지 확장되었다. 프랑스는 류블랴나를 중심으로 일리리아 지방을 설립하고 오귀스트 드 마르몽 원수를 총독으로 임명했다. 프랑스는 프랑스 혁명의 자유주의 사상을 크로아티아에 전파하고, 프리메이슨 로지를 설립했으며, 기반 시설을 건설했다. 달마티아에서는 현지 언어로 된 최초의 신문 ''크라글스키 달마틴/일 레지오 달마타''가 이탈리아어와 크로아티아어로 발행되었다.[122] 크로아티아 군인들은 러시아까지 나폴레옹의 정복에 동참했다. 1808년 나폴레옹은 라구사 공화국을 멸망시켰다.[123] 보스니아의 오스만 제국은 프랑스령 크로아티아를 습격하여 1809년 체틴그라드 지역을 점령했으나, 오귀스트 드 마르몽이 1810년 5월 5일 비하치를 점령하며 대응했다. 오스만 제국이 프랑스 영토 습격을 중단하고 체틴그라드에서 철수할 것을 약속한 후, 마르몽은 비하치에서 철수했다.[124]

나폴레옹 몰락 후, 프랑스 지배 하의 크로아티아 땅은 다시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9세기 중반, 독일 낭만주의, 프랑스 정치 사상, 범슬라브주의의 영향을 받은 크로아티아 낭만주의 민족주의 운동이 크로아티아에서 일어났다. 이 운동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독일화와 헝가리의 헝가리화 정책에 맞서 크로아티아의 민족 정체성을 확립하고 강화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후 내용은 하위 섹션인 '일리리아 운동과 크로아티아 민족 부흥'에서 상세히 다루어진다.)

5. 1. 일리리아 운동과 크로아티아 민족 부흥

19세기 중반, 독일 낭만주의, 프랑스 정치 사상, 범슬라브주의의 영향을 받아 크로아티아에서 크로아티아 낭만주의 민족주의가 나타나 크로아티아의 독일화와 헝가리화에 맞섰다. 류데비트 가이는 크로아티아 민족 운동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언어 문제였는데, 지역별 크로아티아 방언을 표준화해야 했다. 슈토 방언은 크로아티아인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르비아인들에게도 공통적으로 사용되었기에, 이 운동은 남슬라브적인 특성을 지녔다.[125] 당시 "크로아티아"는 오늘날 크로아티아의 남서부에 거주하는 인구를 지칭했을 뿐, "일리리아"는 남슬라브 전역에서 사용되었다. 더 많은 대중을 유치하기 위해 일리리아라는 명칭을 사용하려 했다.[125] 일리리아 활동가들은 크로아티아어의 표준 버전으로 카이 방언 대신 슈토 방언을 선택했다. 일리리아 운동은 세르비아인이나 슬로베니아인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엄격하게 크로아티아 민족 운동으로 남았다. 1832년, 크로아티아의 백작 얀코 드라슈코비치는 ''Disertacija'' (''논문'')라고 불리는 크로아티아 민족 부흥의 선언문을 썼다. 이 선언문은 크로아티아를 슬라보니아, 달마티아, 리예카, 군사 변경 지역, 보스니아, 그리고 슬로베니아 지역과 헝가리 부분 내에서 통합하여 하나의 단위로 만들 것을 요구했다. 이 단위는 크로아티아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반이 통치할 것이다.[125] 이 운동은 달마티아, 이스트라, 그리고 보스니아의 프란체스코 수도사들 사이로 확산되었다. 이는 현대 크로아티아 민족의 출현과 결국 최초의 크로아티아 정당 결성을 가져왔다.[125] 일리리아 명칭은 1843년에 사용이 금지되었고, 일리리아주의 지지자들은 그들의 이름을 크로아티아인으로 변경했다.[125]

1835년 잡지 ''Danicza'', 후일 크로아티아 국가가 된 "Lijepa naša domovino" ("우리의 아름다운 조국")의 가사가 실려있다.


1843년 5월 2일, 이반 쿠쿨레비치 사크친스키는 크로아티아 사보르에서 최초로 크로아티아어 연설을 하여 크로아티아어를 공공 기관의 공식 언어로 지정할 것을 요청했다. 당시 이 요청은 중요한 단계였는데, 당시 크로아티아의 공공 기관에서는 여전히 라틴어가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1847년 사보르에서는 크로아티아어가 크로아티아의 공식 언어로 선포되었다.[126][127]

크로아티아 역사학자 네나드 모아차닌에 따르면, 낭만주의의 등장은 크로아티아 인구 감소 지역에 정착한 블라흐족의 일부에게도 영향을 미쳐 스스로를 세르비아인이라고 선언하게 만들었다고 한다.[128]

옐라치치와 크로아티아 의회


1848년3월 25일, 류데비트 가이 등은 자그레브에서 민족 회의를 개최, 이 회의에서는 "민족의 요구"로서 크로아티아, 달마티아의 통합, 헝가리로부터의 독립, 크로아티아어의 공용화, 신분제 의회의 대의제 전환 등이 포함되었고,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은 단일 민족이며, 통합해야 한다는 요구도 포함되었다.[277] 그리고 크로아티아 총독(=반)으로는 일리리아 운동의 지지자인 요십 옐라치치가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 요구를 받은 헝가리 자체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원했기 때문에 이에 대응할 수 없었고, 더욱이 헝가리의 독립을 저지하려던 합스부르크 황제는 이 상황을 이용하려 했다. 그 때문에 옐라치치는 크로아티아 총독으로 임명된 후에 헝가리 혁명의 진압의 선봉으로 사용되었지만, 헝가리 혁명이 1848년에 진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크로아티아인의 요구는 무시되었고,[278] 달마티아의 일부와 리에카의 병합만이 인정되는 데 그쳤다.[279] 그러나, 혁명 정세가 소멸되자 점차 이 약속은 파기되었고, 결국 합스부르크 제국에 의한 직접 지배가 이루어지게 된다.

요십 옐라치치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가 패배하자 제국의 재편은 피할 수 없게 되었고, 1867년, 헝가리는 독립했지만 오스트리아와는 동군 연합을 형성하게 되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성립되었다. 크로아티아는 헝가리 왕국에 속하게 되었지만, 1868년, 크로아티아와 헝가리 사이에서 "협약(나고드바)"가 체결됨으로써 헝가리가 임명하는 총독(반)을 받아들임으로써 제한적이면서도 자치를 얻게 되었다.[282][283]

일리리아 주(Illyrian Provinces)


달마티아는 오랫동안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았지만, 나폴레옹의 진군 과정에서 달마티아 연안도 정복되었고, 1808년, 두브로브니크 공화국도 폐지되었다. 이듬해, 이 지역은 "프랑스령 일리리아 주"로 재편되어 1813년까지 통치되었다. 이때 프랑스에 의해 나폴레옹 법전이 시행되었고, 크로아티아인 거주 지역에서는 크로아티아어, 슬로베니아인 거주 지역에서는 슬로베니아어가 인정되었다. 농노 해방, 길드 폐지, 토지 개간, 도로 건설, 공중 위생 도입이 이루어져 문화적, 경제적으로 급속히 발전하게 되었지만,[265] 일리리아 지방은 프랑스 지배하의 이탈리아 왕국으로 편입되었다.[266] 나폴레옹은 어느 정도의 자치를 부여함으로써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 등이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바라지 않도록 했다.[267] 그러나, 1815년, 프랑스 제국의 해체에 따라 합스부르크 제국에 병합되게 된다. 헝가리화를 두려워하는 내륙의 크로아티아인들은 자치권을 유지하려고 계속 노력했다.[268]

19세기 전반, 독일 낭만주의가 발생하자 크로아티아에서는 프랑스 통치 시대와의 관계도 있어 '''"일리리아 운동"'''이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는 중세 크로아티아 왕국 시대의 영역 재통합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지만, 이 중 달마티아와 슬라보니아에는 이미 세르비아인 등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운동의 중심 인물인 류데비트 가이는 남 슬라브인 전체의 연대를 고려하여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 사이의 공통 의식 형성을 촉진했다. 이 민족 부흥 운동은 1848년의 "제 국민의 봄" 이후, 19세기 후반에 정치적 운동으로 변했지만, 이는 복잡함을 동반하게 되었다.[272]

한편 류데비트 가이는 문예 협회 "'''마티차 일리스카''' (후의 마티차 흐르바츠카)"를 설립, "일리리아어"(=남 슬라브) 문학 운동을 추진했지만,[273] 가이식 라틴 알파벳에 기초한 남 슬라브 공통 언어의 정자법을 확립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문장의 규범이 통일되지 않아 방언적 차이를 온존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274]

5. 2.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서의 크로아티아

1848년 혁명 당시, 마자르 민족주의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인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 달마티아 삼위일체 왕국은 헝가리 혁명군에 대항하여 합스부르크 궁정을 지지했다.

1848년 3월 25일에 열린 크로아티아 사보르 회기 동안, 요시프 옐라치치 대령이 크로아티아의 반으로 선출되었고, "국민의 요구(Zahtjevanja naroda)"라는 청원이 작성되어 오스트리아 황제에게 전달될 예정이었다. 이 자유주의적 요구사항들은 독립, 크로아티아 영토의 통일, 헝가리와 독립적이며 크로아티아 의회에 책임을 지는 크로아티아 정부, 헝가리로부터의 재정적 독립, 사무실과 학교에서의 크로아티아어 도입,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 농노제의 폐지, 귀족 특권의 폐지, 국민 군대의 창설, 그리고 법 앞의 평등을 요구했다.[129]

헝가리 정부가 크로아티아의 이름과 국권을 부인하고 크로아티아 기관을 지방 당국처럼 취급하자, 옐라치치는 크로아티아와 헝가리 간의 관계를 단절했다.[130] 1848년 5월, 크로아티아 정부의 모든 행정 권한을 가진 반 의회가 구성되었다. 크로아티아 의회는 봉건주의와[127] 농노제를 폐지하고, 군주국이 독립적인 국가 정부와 빈에 있는 하나의 연방 의회를 가진 평등한 국가들의 입헌 연방 국가가 될 것을 요구했다. 또한 크로아티아 의회는 군사 국경과 달마티아의 크로아티아 본토와의 통일을 요구했다. 사보르는 또한 이스트라, 슬로베니아 영토 및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이 거주하는 헝가리 남부 지역과의 정의되지 않은 동맹을 요청했다.[131] 옐라치치는 리에카와 달마티아의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며 "군사 국경의 제국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크로아티아 영토의 대부분을 통치하게 되었다. 크로아티아인과 헝가리인 간의 협상이 결렬되면서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다.[132] 옐라치치는 1848년 9월 7일에 헝가리에 전쟁을 선포했다. 1848년 9월 11일, 크로아티아군은 드라바 강을 건너 메지무르예를 병합했다. 드라바 강을 건너면서 옐라치치는 그의 군대에 크로아티아 국기를 합스부르크 제국 국기로 바꾸라고 명령했다.[133]

요시프 옐라치치 반이 헝가리 독립 전쟁을 진압하는 데 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여파로 크로아티아는 헝가리인보다 빈으로부터 더 호의적인 대우를 받지 못했고, 따라서 국내 자치를 상실했다.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가 패배하자 제국의 재편은 피할 수 없게 되었고, 1867년, 헝가리는 독립했지만 오스트리아와는 동군 연합을 형성하게 되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성립되었다. 크로아티아는 헝가리 왕국에 속하게 되었지만, 1868년, 크로아티아와 헝가리 사이에서 "'''협약(나고드바)'''"가 체결됨으로써 헝가리가 임명하는 총독(반)을 받아들임으로써 제한적이면서도 자치를 얻게 되었다.[282][283] 그러나, 1871년의 선거에서는 "나고드바"의 무효를 주장하는 완전 자치파가 크로아티아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고, 남 슬라브 통일을 요구했지만,[284] 이는 1881년에 군정 국경 지대가 제1차 세계 대전 후에 달마티아가 반환될 때까지 그 통일 요구는 계속될 것이다. 크로아티아는 제한적인 자치를 얻게 됨으로써 정당 활동이 활발해졌지만, 친 헝가리파, 제국의 범위 내에서 남 슬라브의 통일을 도모하는 민족당,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주장하는 권리당의 3개 파벌로 나뉘게 되었다.[285][286]

6. 20세기와 유고슬라비아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타협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군주국이 성립되었다. 1868년 크로아티아-헝가리 협약을 통해 크로아티아의 자치가 회복되었으나, 리예카(피우메)의 지위 문제 등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1871년 7월 군사 변경 지역 영토를 크로아티아에 통합하기로 결정[134], 1873년 비무장화된 후 크로아티아 총독 라디슬라브 페야체비치가 권한을 인수했다.[135] 카로이 쿠엔-헤데르바리는 1883년부터 1903년까지 강경한 마자르화 정책을 펼쳐 크로아티아-헝가리 협약을 위반, 문제를 야기했다. 1903년 대규모 폭동으로 헝가리 국기가 불태워지고 헌병 및 군대와의 충돌로 시위대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 헤데르바리는 총독직에서 물러났으나 헝가리 총리로 임명되었다.[136]

1902년, 자그레브 세르비아인 신문 ''스르보브란''은 "우리나 당신이 멸망할 때까지"라는 대 세르비아 이념이 담긴 기사를 게재, 크로아티아 민족과 언어의 존재를 부인하고 세르비아의 승리를 선언했다.[137][138] 이 기사로 인해 자그레브에서 반 세르비아 폭동이 발생, 세르비아인 소유 재산이 공격받았다. 자그레브 세르비아인들은 기사 내용과 거리를 두었다.[138]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이중 군주국은 종식되었다. 크로아티아는 큰 인명 피해를 입었다. 전쟁 말 크로아티아/남슬라브 분단을 가진 연방 국가 전환 제안이 있었으나, 우드로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 정책 발표로 실행되지 못했다.

1918년 말, 크로아티아 의회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오스트리아-헝가리로부터의 분리 소식을 접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관계를 단절했다.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 달마티아는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 및 세르비아인의 국가의 일부가 되었다. 이 국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남슬라브 영토로 구성, 임시 정부는 자그레브에 있었다. 그러나 1915년 런던 조약에 의해 약속된 크로아티아 아드리아해 영토를 점령하려는 이탈리아군이 문제였다. 세르비아 왕국과의 통일이 해결책으로 모색되었는데, 세르비아는 이탈리아에 대항할 군대를 보유, 파리 평화 회의에서 국제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었다.

1934년, 알렉산다르 국왕은 마르세유 방문 중 우스타샤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IMRO) 연합에 의해 암살, 왕정 독재가 종식되었다. 1935년 집권한 밀란 스토야디노비치 정부는 유고슬라비아를 프랑스, 영국과의 동맹에서 멀어지게 하고 파시스트 이탈리아, 나치 독일과 가까워지도록 했다. 1937년 세니에서 크로아티아 애국가를 불렀다는 이유로 크로아티아 농민당 청년 회원 수십 명이 살해되었다.[147][148] 나치 독일 부상과 유럽 전쟁 가능성이 임박하면서, 세르비아 정치 엘리트들은 크로아티아인과의 관계 개선을 판단, 국가 단결을 꾀했다. 츠베트코비치-마체크 협약 체결로 유고슬라비아 내 자치 크로아티아 바노비나가 창설되었다. 1939년 두 개의 바나트와 제타, 브르바스, 드리나, 다뉴브 바나트 일부로 만들어졌다. 재구성된 크로아티아 의회는 반과 부반을 선택했다. 보스니아 일부, 헤르체고비나 대부분, 두브로브니크와 주변 지역이 포함되었다.

전쟁 말기, 많은 우스타샤, 지지 민간인, 체트니크, 반공주의자들이 오스트리아로 도주, 영국군에 항복하여 피난처를 희망했다. 블라이부르크 송환 이후 영국군에 의해 억류, 파르티잔에게 반환되어 대량 학살당했다.

6. 1. 유고슬라비아 왕국

1918년 말, 새로운 국가가 탄생했다. 시르미아는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를 떠나 보이보디나와 함께 세르비아에 합류했고, 곧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세르비아 합류를 묻는 국민투표가 뒤따랐다. 당시 반세기에 걸쳐 이어져 온 범슬라브주의 전통에 따라, 크로아티아 사보르의 승인 없이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 및 세르비아인의 인민 평의회(''Narodno vijeće'')는 세르비아 왕국과 합병하여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및 슬로베니아인 왕국을 이루었다.

전쟁 직후, 제1차 세계 대전 연합국은 아드리아해 문제 해결의 일환으로 아드리아해 동부를 점령했다. 이 문제는 1920년 라팔로 조약으로 해결되었다.

1921년,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크로아티아의 가장 큰 정당인 크로아티아 농민당(''Hrvatska seljačka stranka'')을 실망시키는 중요한 변화를 겪었다. 새 헌법은 크로아티아와 슬라보니아를 포함한 역사적/정치적 실체를 폐지하고, 수도인 베오그라드에 권력을 집중시켰다. 크로아티아 농민당은 1925년부터 1927년까지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세르비아 인민 급진당 정부를 보이콧했는데, 이 기간은 외부 이탈리아의 팽창주의가 알바니아,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와 동맹을 맺고 유고슬라비아 전체를 위협했을 때였다.

새로운 국가 통치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개념은 크로아티아 농민당이 이끄는 크로아티아 엘리트와 세르비아 엘리트 간의 주요 갈등 원인이었다. 크로아티아 주요 정치인들은 크로아티아인들이 어느 정도 자율성을 갖는 연방 국가를 원했지만(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처럼), 세르비아 중심 정당들은 단일주의, 중앙 집권화, 동화를 옹호했다. 새 국가의 군대는 주로 세르비아 기관이었으며, 1938년까지 육군 장교의 약 10%만이 크로아티아인이었다. 새 학교 시스템은 세르비아 중심이었고, 크로아티아 교사들은 은퇴, 숙청, 전근되었다. 세르비아인들은 고위 공무원으로 배치되었다.[142] 이전 오스트리아-헝가리 크로네의 교환은 4 크로네 대 1 세르비아 디나르라는 불공정한 비율로 이루어졌다.[142]

1920년대 초, 세르비아 총리 니콜라 파시치의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유권자와 소수 민족에 대한 경찰의 압력, 야당 팜플렛 몰수,[139] 선거 부정을 사용하여 주로 크로아티아 농민당과 그 동맹을 유고슬라비아 의회에서 소수로 유지했다.[140] 파시치는 유고슬라비아가 가능한 한 중앙 집권화되어야 하며, 각 지역 정부와 정체성 대신 베오그라드의 손에 권력을 집중시키는 대세르비아 국가 개념을 창출해야 한다고 믿었다.[141]

베오그라드 국회에서 크로아티아 국회의원 암살 사건은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 사이의 관계를 크게 손상시킨 사건 중 하나였다.


1928년 국회 회의 중, 세르비아 급진 국민당 의원 푸니샤 라치치는 크로아티아 의원들을 향해 총격을 가해 파블레 라디치와 듀로 바사리체크를 살해하고, 이반 페르나르와 이반 그란자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당시 크로아티아의 정치적 지도자였던 스테판 라디치는 부상을 입고 후에 상처로 사망했다. 이러한 살인 사건들은 크로아티아 국민들의 분노를 촉발했고, 크로아티아 전역에서 폭력 시위, 파업, 무력 충돌을 일으켰다. 범세르비아적인 영향을 받은 유고슬라비아 왕가는 크로아티아 지역을 "절단"하여 대 세르비아 국경 내에만 유고슬라비아를 남겨두는 것을 고려했지만, 크로아티아 농민당 지도부는 이 아이디어를 거부했다.[142] 라치치는 여러 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았지만, 포자레바츠의 호화로운 별장에서 형을 살았으며, 그곳에서 여러 하인을 부리고 언제든지 드나들 수 있었다.[143]

국회 총격 사건에 대한 대응으로 알렉산드르 1세는 의회 제도를 폐지하고 왕정 독재를 선포했다. 그는 기존의 모든 민족 정체성을 제거하고 "통합 유고슬라비아주의"를 강요하는 새로운 헌법을 강요했다. 그는 또한 국가의 이름을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의 왕국에서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변경했다. 크로아티아 영토는 주로 사바 바노비나와 리토랄 바노비나로 분할되었다. 정당은 금지되었고 왕정 독재는 점점 더 가혹해졌다. 크로아티아 최대 정당인 크로아티아 농민당의 지도자 자리를 라디치로부터 물려받은 블라드코 마체크는 투옥되었다.

안테 파벨리치는 유고슬라비아에서 추방되었고 유고슬라비아를 파괴하고 크로아티아를 독립 국가로 만들려는 궁극적인 목표를 가진 초국가주의 우스타샤 운동을 창설했다. 영국 역사가 미샤 글레니에 따르면, 친유고슬라비아 신문 ''노보스티''의 편집자 토니 슐레겔이 1929년 3월 살해된 사건은 정권으로부터 "격렬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144] 리카와 특히 서헤르체고비나는 "크로아티아 분리주의의 온상"으로 묘사되었으며, 글레니는 다수의 세르비아인 경찰이 "어떤 제약도 없이" 행동했다고 썼다.[144] 한 저명한 크로아티아 작가의 말에 따르면, 슐레겔의 죽음은 모든 형태의 테러의 구실이 되었다. 정치는 곧 "갱스터주의와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145] 1931년, 왕정은 크로아티아 과학자이자 지식인인 밀란 수플라이를 자그레브 거리에서 암살했다. 이 암살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하인리히 만과 같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식인들에 의해 규탄받았다.[146] 1932년, 우스타샤 운동은 리카에서 벨레비트 봉기를 실패적으로 계획했다. 억압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우스타샤 대의에 소수의 사람들만이 동조했고, 이 운동은 크로아티아 국민들로부터 심각한 지지를 얻을 수 없었다.

6. 2. 제2차 세계 대전과 크로아티아 독립국

1941년 유고슬라비아의 추축국 점령으로 크로아티아 급진 우파 우스타샤가 권력을 잡고, 안테 파벨리치가 ''포글라브니크'' 역할을 맡아 "크로아티아 독립국"(Nezavisna Država Hrvatska, NDH)을 결성했다.[349] 유럽의 다른 파시스트 정권의 패턴에 따라 우스타샤는 인종 법을 제정하고 소수 민족인 세르비아인, 로마인, 유대인, 그리고 정권에 반대하는 크로아티아인과 보스니아 무슬림을 대상으로 8개의 강제 수용소를 만들었다. 가장 큰 강제 수용소는 크로아티아의 야세노바츠 강제 수용소였다. NDH는 밀레 부닥이 구상한 프로그램에 따라 "3분의 1을 죽이고, 다른 3분의 1을 추방하고, 나머지 3분의 1을 동화"시키는 방식으로 크로아티아에서 세르비아인을 숙청하려 했다.[149] 박해의 주요 대상은 세르비아인으로, 약 33만 명이 살해되었다.[150][151]

크로아티아 독립국 국기


1941년 아돌프 히틀러와 악수하는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포글라브니크인 안테 파벨리치.


추방되는 세르비아인, 1941년 7월


다양한 세르비아 민족주의 체트니크 집단 또한 리커의 많은 지역과 북부 달마티아 일부 지역에서 크로아티아인에 대해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152] 유고슬라비아의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체트니크는 약 18,000~32,000명의 크로아티아인을 살해했다.[153]

반파시스트 공산주의 주도의 파르티잔 운동은 1941년 초 크로아티아 출신인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지휘 아래 등장하여 유고슬라비아의 여러 지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제1시사 파르티잔 부대는 점령된 유럽에서 최초의 무장 반파시스트 저항 군사 부대로 칭송받으며, 크로아티아 시사 근처의 브레조비차 숲에서 결성되었다. 이 운동이 인기를 얻기 시작하면서 파르티잔은 통일된 연방 유고슬라비아 국가를 믿는 크로아티아인, 보스니아인, 세르비아인, 슬로베니아인, 마케도니아인으로부터 힘을 얻었다.

1943년까지 파르티잔 저항 운동이 우위를 점했고, 1945년에는 소련 붉은 군대의 도움을 받아(단, 보이보디나와 같은 작은 지역만 통과), 추축국과 지역 지지자들을 몰아냈다. 크로아티아 민족 해방을 위한 국가 반파시스트 평의회(ZAVNOH)는 1942년부터 활동했으며 1943년까지 임시 민간 정부를 구성했다. NDH의 전쟁 및 내부 보안 장관인 믈라덴 로르코비치와 안테 보키치는 연합군 측으로 전환하려 했다. 파벨리치는 처음에는 그들을 지지했지만, 자신의 직위를 떠나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들을 레포글라바 감옥에 가두었고, 그곳에서 처형되었다.

크로아티아 독립국은 추축국으로서 제2차 세계 대전에 참가했고[349], 대(對)소련 선전 포고도 했다.[350] 파벨리치는 나치 독일과 마찬가지로 인종 정책을 추진하여, 유대인, 로마인 등은 물론 세르비아인도 열등 민족으로 규정하여 박해했다. 이 때문에 나치 독일과 전쟁 중이던 세르비아계 저항 조직인 체트니크티토가 이끄는 파르티잔과도 싸우게 되었다. 우스타샤 대 파르티잔, 우스타샤 대 체트니크, 그리고 체트니크 대 파르티잔의 싸움은 "형제 살해"라고 불렸고, 사망자 수는 170만 명에 이르렀다. 이는 1991년 크로아티아 전쟁에서 세르비아인이 크로아티아인을 우스타샤, 크로아티아인이 세르비아인을 체트니크라고 부르는 원인이 되었다.[351]

6. 3.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문장


크로아티아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을 구성하는 6개의 사회주의 공화국 중 하나였다. 새로운 공산주의 체제에서 사유 공장과 토지는 국유화되었고, 경제는 계획된 시장 사회주의 유형에 기반을 두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피해를 복구하고 재건 과정을 거쳐 산업화를 겪었으며, 관광 산업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154]

이 나라의 사회주의 체제는 노동자 자주 관리 투자를 통해 생활 공간을 지불하는 대기업으로부터 무료 아파트를 제공했다. 1963년부터 유고슬라비아 시민들은 중립적인 정치 덕분에 거의 모든 국가를 여행할 수 있었다. 동부나 서부, 자본주의나 공산주의 국가를 여행하는 데 비자가 필요하지 않았다.[154] 이러한 자유로운 여행은 당시 동구권 국가와 일부 서방 국가(예: 당시 독재 국가였던 스페인 또는 포르투갈)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는 외국에서 일하는 것이 더 재정적으로 유리하다는 것을 알게 된 크로아티아 주민들에게 도움이 되었다. 은퇴 후에는 크로아티아(당시 유고슬라비아)로 돌아와 더 비싼 부동산을 구입하는 것이 일반적인 계획이었다.

유고슬라비아에서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무료 의료, 무료 치과 진료, 안정적인 연금을 보장받았다.[155] 또한, 국내의 자유 무역과 여행은 모든 이전 공화국에서 수입 및 수출을 하는 크로아티아 산업을 도왔다.

학생들과 군인들은 다른 공화국을 방문하여 이 나라에 대해 더 많이 배울 것을 권장했으며, 중등 교육 및 고등 교육을 포함한 모든 수준의 교육이 무료였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크로아티아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연맹의 회원은 요제프 스탈린이나 니키타 흐루쇼프 치하의 소련에서와 마찬가지로 대학 입학 및 정부 직책에 대한 필수 조건이었다.

경제는 노동자들이 사회 소유 기업을 통제하는 '사모우프라블리아니예'(자주 관리)라고 불리는 사회주의의 한 유형으로 발전했다. 크로아티아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집중적인 산업화를 겪었고, 산업 생산량이 수 배로 증가했으며, 자그레브는 산업 분야에서 베오그라드를 능가했다. 공장 및 기타 조직은 종종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으로 명명되었으며, 그들은 유고슬라비아 인민 영웅으로 선포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크로아티아의 산업이 발달하지 않아 대다수의 사람들이 농업에 종사했다. 1991년까지 이 나라는 완전히 현대화된 산업 국가로 변모했다. 동시에 크로아티아 아드리아 해안은 인기 있는 관광지가 되었고, 해안 공화국(하지만 주로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은 이로 인해 큰 이익을 얻었다. 정부는 전례 없는 경제 및 산업 성장, 높은 수준의 사회 보장, 매우 낮은 범죄율을 가져왔다. 이 나라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완전히 회복되었고, 현재 공화국보다 훨씬 높은 매우 높은 GDP와 경제 성장률을 달성했다.

사브카 다브체비치-쿠차르, 크로아티아의 봄 참가자; 유럽 최초의 여성 총리


1963년 헌법은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 간의 권력 균형을 유지했다. 그러나 1965년 이후의 경향(예: 1966년 OZNA 및 UDBA 수장 알렉산다르 란코비치의 실각)[156]은 1970–71년 크로아티아의 봄으로 이어졌고, 자그레브의 학생들은 더 큰 시민의 자유와 더 큰 크로아티아 자치를 달성하기 위해 시위를 조직했다. 정권은 공개 시위를 억누르고 지도자들을 투옥했지만, 이는 1974년 유고슬라비아 헌법의 비준으로 이어져 개별 공화국에 더 많은 권리를 부여했다.

1980년, 티토의 사망 이후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어려움이 커지기 시작했고 연방 정부는 붕괴되기 시작했다. 코소보의 위기, 그리고 1986년 세르비아에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등장은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에서 매우 부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두 공화국의 정치인들은 그의 의도가 자치권을 위협할 것을 두려워했다. 1980년대 동유럽 전역의 변화의 분위기와 함께 공산주의 헤게모니에 대한 도전이 시작되었고 (동시에 밀로셰비치 정부는 점차적으로 유고슬라비아의 권력을 세르비아에 집중하기 시작했으며), 자유 다당제 선거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160]

1989년 6월, 전직 티토의 파르티잔 운동 투사이자 JNA 장군이었던 프라뇨 투지만이 이끄는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반체제 인사들에 의해 크로아티아 민주 연합(HDZ)이 창당되었다. 1989년 12월 13일이 되어서야 집권 크로아티아 공산주의자 연맹이 야당을 합법화하고 1990년 봄에 자유 선거를 실시하는 데 동의했다.[160]

1990년 1월 23일, 제14차 총회에서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연맹은 정치 권력 독점을 폐지하기로 투표했다. 같은 날, 슬로베니아 공산주의자 연맹이 SR 세르비아의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개혁주의적 제안을 모두 차단한 후 탈퇴하면서 사실상 국가 정당으로서의 존재가 사라졌고, 이로 인해 크로아티아 공산주의자 연맹은 공동 국가의 아이디어에서 더욱 거리를 두게 되었다.[161]

7. 독립과 크로아티아 전쟁

프라뇨 투지만, 현대 독립 크로아티아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1990년 크로아티아에서 최초의 자유 다당제 선거가 실시되면서 프라뇨 투지만이 이끄는 크로아티아 민주 연합(HDZ)이 승리하며 독립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이는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계 주민과 베오그라드의 연방 정치인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1990년 7월,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인들은 스르브에 세르비아 의회를 설립하고 "세르비아인의 주권과 자치"를 선언했다.[162] 밀란 바비치를 의장으로, 밀란 마르티치 중심으로 준군사 조직을 결성, 통나무 혁명을 통해 크로아티아를 사실상 분리시켰다.

1990년 12월, 크로아티아 헌법은 세르비아인을 소수 민족으로 분류했고, 크라이나 세르비아 자치주가 창설되었다. 1991년 3월, 플리트비체 호수 국립공원에서 발생한 플리트비체 호수 사건은 첫 유혈 충돌이었다.[163][164]

1991년 5월, 크로아티아는 독립 국민투표를 통해 독립을 결정했다. 크라이나 세르비아인들은 투표를 거부하고 유고슬라비아 잔류를 선택했다. 1991년 6월,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가 동시 독립을 선언하며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이 시작되었다.[167]

전쟁 초기,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은 세르비아계 주민 보호 명목으로 개입, 크로아티아 영토 일부를 점령했다. 부코바르는 3개월간 포위 끝에 함락되었고, 부코바르 학살이 발생했다. 국제 연합(UN) 중재로 휴전했지만, 1995년 크로아티아군의 폭풍 작전으로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이 붕괴, 세르비아계 주민들이 대규모 탈출했다.

1995년 데이턴 협정으로 보스니아 전쟁이 종식되고, 1998년 UN 감독하에 동 슬라보니아 지역이 크로아티아에 통합되며 전쟁은 종결되었다. 그러나 전쟁 난민 문제는 여전히 미해결 과제이다.

7. 1. 독립 선언과 크로아티아 전쟁 발발

1990년 4월 22일과 5월 7일, 크로아티아에서 최초의 자유 다당제 선거가 실시되었다. 프라뇨 투지만의 크로아티아 민주 연합(HDZ)은 이비차 라찬의 개혁 공산주의 민주 변혁당(SDP)을 누르고 승리했다. HDZ는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추구했지만, 크로아티아 내 일부 세르비아계 주민과 베오그라드의 연방 정치인들은 이에 반대했다.

1990년 7월 25일,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인의 정치적 대표 기구인 세르비아 의회가 크닌 북쪽 스르브에서 설립되었다. 세르비아 의회는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인의 주권과 자치"를 선언했다.[162] 밀란 바비치가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밀란 마르티치의 지휘 아래 준군사 조직이 결성되었다.

1990년 8월 17일, 크로아티아의 세르비아인들은 이른바 통나무 혁명을 시작하여 도로에 통나무 바리케이드를 설치했다. 이로 인해 크로아티아는 달마티아 해안 지역과 나머지 지역으로 분리되었다. 크로아티아 정부는 특수 경찰 팀을 보냈지만, 유고슬라비아 공군에 의해 저지되었다.

크로아티아 헌법은 1990년 12월에 통과되었으며, 세르비아인을 소수 민족으로 분류했다. 1990년 12월 21일, 바비치의 행정부는 크라이나 세르비아 자치주(SAO 크라이나)의 창설을 발표했다.

부활절 일요일인 1991년 3월 31일, 플리트비체 호수 국립공원에서 크로아티아 경찰과 반란 세르비아군 사이에 최초의 치명적인 충돌(플리트비체 호수 사건)이 발생했다. 세르비아 준군사 조직은 크로아티아 경찰을 매복 공격했고, 양측 간의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 교전으로 크로아티아인 1명과 세르비아인 경찰 1명이 사망했다.[163][164]

1991년 5월 2일, 크로아티아 의회는 독립 국민투표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166] 1991년 5월 19일, 국민투표 결과 93.24%가 독립에 찬성했다. 크라이나는 국민투표를 보이콧하고, 자신들이 통제하는 지역에서 별도의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유고슬라비아 잔류를 결정했다.

1991년 6월 25일, 크로아티아 의회는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같은 날 슬로베니아도 독립을 선언했다.[167]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 두브로브니크의 중심 거리인 ''스트라둔''이 두브로브니크 포위전 당시 폐허가 된 모습; 초기 분쟁의 상징인 손상된 부코바르 물탑, 크로아티아 삼색기가 펄럭이는 모습; 크로아티아군의 군인들이 세르비아 탱크를 파괴할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 부코바르 기념 묘지; 드르니시로 가는 길에서 파괴된 세르비아의 T-55 탱크


이후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이 발발했다. 민간인들은 대규모로 탈출했으며,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에 의한 인종 청소가 발생했다.[168] 부코바르부코바르 전투 동안 3개월 동안 포위되었고,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1991년 11월 18일, 도시는 세르비아군에 점령되었고, 부코바르 학살이 발생했다.

국제 연합(UN)의 중재로 휴전이 이루어졌지만, 교전 당사자들은 참호전을 벌였다.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로 철수했고, 보스니아 전쟁이 시작되었다.

크로아티아에서의 무력 충돌은 1995년까지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1995년 8월 초, 크로아티아는 폭풍 작전을 시작하여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영토 대부분을 수복했고, 세르비아 인구의 대규모 탈출이 발생했다.[169][170]

몇 달 후, 데이턴 협정으로 보스니아 전쟁이 종식되었다. 동 슬라보니아의 남은 세르비아 통제 영토는 1998년 UN의 감독하에 크로아티아에 평화적으로 통합되었다.

7. 2. 전쟁의 종식과 평화 정착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동안 민간인들은 무력 충돌 지역에서 대규모로 탈출했으며, 수십만 명의 크로아티아인들이 보스니아와 세르비아 국경 지역에서 이주했다. 많은 곳에서 다수의 민간인들이 주로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에서 온 징집병과 세르비아의 비정규군으로 구성된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에 의해 강제로 쫓겨났으며, 이는 인종 청소로 알려지게 되었다.[168]

국경 도시 부코바르부코바르 전투 동안 3개월 동안 포위되었다. 이로 인해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대다수의 주민들이 탈출해야 했다. 도시는 1991년 11월 18일 세르비아군에 의해 점령되었고, 부코바르 학살이 발생했다.

이후 국제 연합(UN)이 중재한 휴전이 이어졌고, 교전 당사자들은 대부분 참호전을 벌였다.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은 크로아티아에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로 철수했으며, 그곳에서 새로운 긴장 국면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보스니아 전쟁이 곧 시작될 예정이었다. 1992년과 1993년 동안 크로아티아는 주로 보스니아 무슬림을 포함하여 보스니아에서 온 약 70만 명의 난민을 처리했다.

크로아티아에서의 무력 충돌은 1995년까지 간헐적으로, 주로 소규모로 이어졌다. 8월 초, 크로아티아는 폭풍 작전을 시작하여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당국으로부터 대부분의 영토를 신속하게 수복했으며, 이로 인해 세르비아 인구의 대규모 탈출이 발생했다. 작전 전, 중, 후 탈출한 세르비아인의 수는 9만 명에서 20만 명 사이로 추산된다.[169][170]

이 작전의 결과로 몇 달 후 데이턴 협정의 협상을 통해 보스니아 전쟁이 종식되었다. 동 슬라보니아의 남은 세르비아 통제 영토의 평화로운 통합은 1998년 UN의 감독하에 완료되었다. 이전 크라이나에서 탈출한 세르비아인 대다수는 인종 폭력, 차별, 재산 반환 문제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돌아오지 않았으며, 크로아티아 정부는 아직 완전한 재통합을 위한 조건을 달성하지 못했다.[171] 유엔 난민 고등판무관에 따르면, 1991~1995년 분쟁에서 탈출한 약 12만 5천 명의 세르비아계가 크로아티아로 귀환한 것으로 등록되었으며, 이 중 약 5만 5천 명이 영구적으로 거주하고 있다.[172]

8. 현대 크로아티아

크로아티아는 1996년 유럽 평의회에 가입했다.[173] 1990년대 후반 프라뇨 투지만 대통령은 권위주의적 통치를 강화했고, 자그레브 위기[174], 라디오 101 폐쇄 시도와 이에 대한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175] 1998~99년에는 경제 불황을 겪었다.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지역은 에르두트 협정을 통해 평화적으로 크로아티아에 재통합되었다.

1999년 투지만 대통령 사망 후, 2000년 총선과 대선에서 크로아티아 사회민주당 중심의 중도 좌파 정부가 들어섰다. 이비차 라찬 총리와 스테판 메시치 대통령은 의원 내각제로 헌법을 개정하고, 경제 개혁과 A1 고속도로 건설 등 여러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크로아티아는 2000년 세계 무역 기구(WTO)에 가입하고, 2003년 유럽 연합(EU) 가입 절차를 시작했다.

2003년 총선에서 크로아티아 민주 연합(HDZ)이 승리하여 이보 사나더가 총리가 되었으나,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 형사 재판소(ICTY) 협력 문제로 EU 가입이 지연되었다. 사나더는 2007년 재선되었지만 2009년 갑작스럽게 사임하고 야드란카 코소르가 총리직을 승계했다. 코소르는 긴축 정책을 추진하고 슬로베니아와의 협정을 통해 EU 가입을 진전시켰다.

2009년 대선에서 이보 요시포비치가 당선되었고,[176] 사나더는 부패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177][178] 2011년 총선에서 쿠쿠리쿠 연합이 승리하여 조란 밀라노비치가 총리가 되었다.[180][181]

2012년 크로아티아 유럽 연합 가입 국민투표를 거쳐 2013년 7월 1일 EU에 가입했고,[182] 2014년 대선에서 콜린다 그라바르키타로비치가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되었다.[183] 2015년 총선에서는 애국 연합이 승리했으나, 2016년 총선에서 HDZ가 다시 승리하여 안드레이 플렌코비치가 총리가 되었다.[184]

2020년 대선에서는 조란 밀라노비치가 당선되었고,[185] 같은 해 총선에서 HDZ가 다시 승리했다.[187] 2022년 펠리에사츠 다리가 개통되었고,[193] 2023년 유로존과 솅겐 지역에 가입했다.[194]

크로아티아는 '발칸'이라는 용어의 정치적 함의 때문에 자국을 발칸 국가로 규정하는 것에 대해 논란이 있었지만, 2000년대 이후 동남유럽 협력 프로세스(SEECP)에 참여하고,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 형사 재판소(ICTY)에 협력하는 등 국제 협력을 강화했다. 2009년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가입, 2013년 EU 가입, 2023년 유로존 및 솅겐 지역 가입은 이러한 노력의 결실이다.

8. 1. 민주화와 경제 개혁

크로아티아는 1996년에 유럽 평의회 회원국이 되었다.[173] 1995년부터 1997년까지 프라뇨 투지만은 권위주의적으로 변해 자그레브 위기를 초래했다.[174] 1996년, 그의 정부는 라디오 101을 폐쇄하려 했다. 라디오 101의 방송권이 박탈되자 약 12만 명의 크로아티아 시민들이 반 옐라치치 광장에서 시위를 벌였다.[175] 투지만은 경찰 기동대를 동원해 시위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당시 내무부 장관 이반 야르냐크는 그의 명령을 거부하여 해임되었다.[175] 1998년과 1999년에 크로아티아는 수천 명의 실업자를 발생시키는 경제 불황을 겪었다.

크라이나 공화국의 나머지 지역은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과 인접해 있었으며, 크로아티아 정부와 평화적인 재통합 과정을 협상했다. 에르두트 협정으로 해당 지역은 동슬라보니아, 바라냐, 서시르미움에 대한 유엔 과도 행정부의 임시 보호령이 되었다. 이 지역은 1998년에 크로아티아에 공식적으로 재통합되었다.

프라뇨 투지만 정부는 1990년대 초 의심스러운 민영화 거래와 국제적 고립에 대한 비판을 받으며 인기를 잃었다. 1998년과 1999년에는 완만한 경기 침체를 겪었다.

1999년 투지만이 사망하고, 2000년 초 의회 선거에서 크로아티아 민주 연합 (HDZ) 정부는 크로아티아 사회민주당이 이끄는 중도 좌파 연합으로 교체되었고, 이비차 라찬이 총리가 되었다. 같은 시기 대통령 선거에서 온건파 스테판 메시치가 승리했다. 새 라찬 정부는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제에서 의원 내각제로 정치 체제를 변경하고, 대통령의 행정 권한 대부분을 의회와 총리에게 이전했다.

새 정부는 국가 지원 주택, 난민 귀환을 위한 재건 노력, A1 고속도로 건설 등 여러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 기간 동안 국가는 눈에 띄는 경제 성장을 달성했지만, 실업률은 2001년까지 상승하다가 감소하기 시작했다. 크로아티아는 2000년 세계 무역 기구 (WTO) 회원국이 되었고, 2003년 크로아티아의 유럽 연합 가입을 시작했다.

크로아티아 국기와 유럽 국기가 자그레브 외교 및 유럽부 청사에 게양되어 유럽 평의회유럽 연합 회원 자격을 상징한다.


2003년 말, 새로운 의회 선거에서 개혁된 HDZ 정당이 이보 사나더의 지도 하에 승리하여 총리가 되었다. 유럽 가입은 안테 고토비나 등 군 장성들의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 형사 재판소 (ICTY) 인도를 둘러싼 논란으로 지연되었다.

사나더는 2007년 의회 선거에서 재선되었다. 2008-2009년 크로아티아의 EU 가입에 대한 슬로베니아의 봉쇄 등 여러 문제로 EU 협상 과정이 지연되었다. 2009년 6월, 사나더는 갑자기 사임하고 야드란카 코소르를 후임으로 임명했다. 코소르는 경제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긴축 조치를 도입하고 공무원을 대상으로 한 반부패 캠페인을 시작했다. 2009년 말, 코소르는 보루트 파호르 슬로베니아 총리와 협정을 체결하여 EU 가입을 진행할 수 있게 했다.

2009-2010년 크로아티아 대통령 선거에서 SDP 후보 이보 요시포비치가 압승을 거두었다.[176] 사나더는 2010년 HDZ에 복귀하려 했지만 축출되었고, USKOK은 그를 여러 부패 혐의로 체포했다.[177]

2012년 11월, 크로아티아 법원은 2003년부터 2009년까지 재임했던 이보 사나더 전 총리에게 뇌물 수수 혐의로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사나더는 자신에 대한 사건이 정치적 동기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178]

2011년, 가입 협정이 체결되어 크로아티아가 가입을 허가받았다.[179]

2011년 크로아티아 국회의원 선거는 2011년 12월 4일에 치러졌고, 쿠쿠리쿠 연합이 승리했다.[180] 선거 후, 조란 밀라노비치가 이끄는 중도 좌파 정부가 구성되었다.[181] 프라뇨 투지만이 1999년에 사망하자 크로아티아는 민주화가 진전되었고, 동남유럽 지역 통합과 화해를 추진하게 되었다.

2000년 2월, 부쿠레슈티에서 동남유럽 협력 프로세스(SEECP) 제3차 정상 회담이 개최되자 크로아티아는 옵저버 자격으로 참가했다. 2005년부터 동남유럽 협력 프로세스의 정식 멤버가 되었다.

2001년 안테 고토비나 등이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 형사 재판소(ICTY)에 기소되자 국내에서 강한 반발이 있었지만, 크로아티아 정부는 ICTY에 협력하기로 결정했다. 2005년 도주하던 고토비나가 체포되어 크로아티아의 유럽 통합에 큰 진전이 있었다.

2009년에는 북대서양 조약 기구, 2013년에는 유럽 연합에 각각 가입했다. 2023년부터는 유로를 도입하고, 솅겐 지역 가입도 달성했다.

8. 2. 유럽 통합과 국제 협력

크로아티아는 1996년에 유럽 평의회 회원국이 되었다.[173] 1995년부터 1997년 사이 프라뇨 투지만 대통령은 권위주의적인 통치를 강화했고, 1996년에는 HDZ에 비판적인 라디오 101을 폐쇄하려 시도했다. 이에 12만 명의 시민들이 항의 시위를 벌였으나, 투지만은 진압 명령을 내렸지만 당시 내무부 장관이 거부하여 해임되었다.[175] 1998년과 1999년에는 경제 불황으로 수천 명의 실업자가 발생했다.

크라이나 공화국의 나머지 지역은 유고슬라비아와 협상을 통해 평화적으로 재통합되었으며, 에르두트 협정에 따라 동슬라보니아, 바라냐, 서시르미움에 대한 유엔 과도 행정부의 임시 보호령을 거쳐 1998년 크로아티아에 재통합되었다.

1999년 투지만 대통령이 사망하고, 2000년 총선에서 크로아티아 사회민주당이 이끄는 중도 좌파 연합이 승리하여 이비차 라찬이 총리가 되었다. 대통령 선거에서는 온건파 스테판 메시치가 당선되었다. 라찬 정부는 의원 내각제로 헌법을 개정하고, 국가 지원 주택, 난민 귀환, A1 고속도로 건설 등 여러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크로아티아는 2000년 세계 무역 기구(WTO)에 가입하고, 2003년 크로아티아의 유럽 연합 가입 절차를 시작했다.

2003년 총선에서 개혁된 HDZ가 승리하여 이보 사나더가 총리가 되었다.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 형사 재판소(ICTY)에 군 장성들을 인도하는 문제로 유럽 가입이 지연되기도 했다.

사나더는 2007년 총선에서 재선되었으나, 2009년 6월 갑작스럽게 사임하고 야드란카 코소르를 후임으로 임명했다. 코소르는 긴축 정책을 도입하고 반부패 캠페인을 시작했다. 2009년 말, 코소르는 슬로베니아 총리 보루트 파호르와 협정을 체결하여 EU 가입을 진행시켰다.

2009-2010년 크로아티아 대통령 선거에서 SDP 후보 이보 요시포비치가 승리했다.[176] 사나더는 2010년 HDZ 복귀를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여러 부패 혐의로 체포되었다.[177] 2012년 11월, 크로아티아 법원은 사나더에게 뇌물 수수 혐의로 징역 10년을 선고했다.[178]

2011년 가입 협정이 체결되었고,[179] 2011년 총선에서 쿠쿠리쿠 연합이 승리하여 조란 밀라노비치가 총리가 되었다.[180][181]

2022년 6월 펠리에사츠 다리


2012년 크로아티아 유럽 연합 가입 국민투표를 거쳐 2013년 7월 1일 크로아티아는 EU에 가입했다.[182]

2014-15년 크로아티아 대통령 선거에서 콜린다 그라바르키타로비치가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되었다.[183]

2015년 크로아티아 총선에서 애국 연합이 승리하여 독립 명단 다리와 함께 새 정부를 구성했으나, 불신임 투표로 티호미르 오레슈코비치 내각이 무너졌다. 2016년 크로아티아 총선 이후 안드레이 플렌코비치 내각이 구성되었다.[184]

2020년 1월, 대통령 선거에서 사회 민주당(SDP)의 전 총리 조란 밀라노비치가 승리했다.[185] 2020년 7월, 총선에서 집권 중도 우파 정당 HDZ가 승리했다.[187]

2022년 7월 26일, 펠리에사츠 다리가 개통되어 크로아티아 최남단과 나머지 지역이 연결되었다.[193] 2023년 1월 1일, 크로아티아는 유로존과 솅겐 지역 회원국이 되었다.[194]

크로아티아는 1992년 독립 이후 "발칸"이라는 명칭이 정치적인 뉘앙스를 띄게 되어 부정적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해, 자국이 발칸 지역의 일부라고 자임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계속해 왔다. 1997년 11월 크레타 섬에서 열린 발칸 정상 회담에 "발칸 국가가 아니다"라며 참석을 거부했다. 그러나 현재까지 발칸이라는 개념 자체에는 명확한 규정이 없는 상태이다.

2000년 2월,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동남유럽 협력 프로세스(SEECP) 정상 회담에 옵서버 자격으로 참가했고, 2005년부터 정식 회원국이 되었다.

2001년 안테 고토비나 등이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 형사 재판소(ICTY)에 기소되자 국내에서 반발이 있었지만, 크로아티아 정부는 ICTY에 협력했다. 고토비나는 2005년에 체포되어 크로아티아의 유럽 통합에 큰 진전이 있었다.

2009년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2013년 유럽 연합(EU)에 가입했고, 2023년부터 유로를 도입하고 솅겐 지역 가입도 달성했다.

참조

[1] 논문 Prefac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 논문 Krapina Neanderthal Museum as a Well of Medical Information http://hrcak.srce.hr[...] Hrvatsko znanstveno društvo za povijest zdravstvene kulture 2011-10-15
[3] 논문 Study of the Neolithic and Eneolithic as reflected in articles published over the 50 years of the journal Opuscula archaeologica http://hrcak.srce.hr[...] University of Zagreb, Faculty of Philosophy, Archaeological Department 2011-10-15
[4] 논문 The Kostolac horizon at Vučedol http://hrcak.srce.hr[...] University of Zagreb, Faculty of Philosophy, Archaeological Department 2011-10-15
[5] 논문 Prilog poznavanju neolitičkih obrednih predmeta u neolitiku sjeverne Hrvatske http://hrcak.srce.hr[...] University of Zagreb, Faculty of Philosophy, Archaeological Department 2011-10-15
[6] 논문 Prilog poznavanju naseljenosti Vinkovaca i okolice u starijem željeznom dobu http://hrcak.srce.hr[...] Institut za arheologiju 2011-10-15
[7] 서적 Povijest hrvatskih zemalja u antici do cara Dioklecijana Leykam international
[8] 서적 The Illyrians https://books.google[...] Wiley-Blackwell 2011-10-15
[9] 서적 Od Helena do Hrvata Školska knjiga
[10] 서적 Encyclopaedia Biblica: A Critical Dictionary of the Literary, Political and Religious History, the Archaeology, Geography, and Natural History of the Bible 1899
[11] 웹사이트 Diocletian's Palace http://www.megalithi[...] 2007-10-06
[12] 서적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https://books.google[...] Modern Library 2011-10-27
[13] 서적 Dalmatia
[14] 서적 Iliri Školska knjiga Zagreb
[15] 서적 The Croatian-Slavonian Kingdom: 1526–1792 Walter de Gruyter GmbH & Co KG
[16] 서적 History of the later Roman empire from the death of Theodosius I. to the death of Justinian https://books.google[...] Macmillan Publishers 2011-10-15
[17] 서적 The History of Croatia and Slovenia ABC-CLIO 2020
[18] 웹사이트 Map of Roman Dalmatia area, with added actual croatian names http://www.croatia-i[...]
[19] 서적 Researches on the Danube and the Adriatic https://books.google[...] Trübner 2011-10-15
[20] 서적 Mužić
[21] 서적 Becoming Slav, Becoming Croat: Identity Transformations in Post-Roman and Early Medieval Dalmatia https://books.google[...] BRILL
[22] 논문 Razvoj i osnovne značajke starohrvatskih grobalja horizonta 7.-9. stoljeća na povijesnim prostorima Hrvata https://morepress.un[...] 2000
[23] 서적 The early Slavic settlement of Central Europe in the light of new dating evidence Institute of Archaeology and Ethnology of the Polish Academy of Sciences 2013
[24] 서적 Rani srednji vijek između Panonije i Jadrana: ranoslavenski keramički i ostali arheološki nalazi od 6. do 8. stoljeća https://www.research[...] Arheološki muzej Istre 2016
[25] 서적 Mužić
[26] 웹사이트 Ljudevit Posavski Hrvatska enciklopedija https://www.enciklop[...] 2022-11-19
[27] 논문 Sarkofag kneza Branimira https://www.academia[...]
[28] 서적 Mužić
[29] 웹사이트 Domagoj Hrvatska enciklopedija https://enciklopedij[...] 2022-12-29
[30] 웹사이트 Traces of history - Turistička zajednica grad Metković https://www.tzmetkov[...] 2022-12-29
[31] 논문 Pokrštenje Hrvata prema najnovijim znanstvenim rezultatima http://hrcak.srce.hr[...] University of Zagreb, Catholic Faculty of Theology 2011-10-18
[32] 서적 Mužić
[33] 논문 Povijesni zemljovidi i granice Hrvatske u Tomislavovo doba http://hrcak.srce.hr[...] 2011-10-16
[34] 웹사이트 Jedinstvena rekonstrukcija života vladara koji je ujedinio Hrvatsku https://www.vecernji[...] 2023-06-18
[35] 웹사이트 RUŠIMO HRVATSKE MITOVE Je li Tomislav stvarno bio prvi hrvatski kralj? https://www.index.hr[...] 2023-06-18
[36] 웹사이트 Jutarnji list - POVIJESNA SENZACIJA: Kraljica Domaslava, najstarija hrvatska vladarica, živjela je u 10. stoljeću! https://www.jutarnji[...] 2012-02-21
[37] 웹사이트 DRŽISLAV STJEPAN I. - Hrvatski biografski leksikon https://hbl.lzmk.hr/[...] 2024-01-27
[38] 웹사이트 Vladari srednjovjekovne Kraljevine Hrvatske https://braniteljski[...] 2020-07-22
[39] 웹사이트 Povjesnica : Red Hrvatske Krune http://www.rhk.hr/po[...] 2022-11-18
[40] 논문 Regnum Croatiae et Dalmatiae u doba Stjepana II. http://hrcak.srce.hr[...] 2011-10-16
[41] 서적 Zagreb i Slavonija
[42] 서적
[43] 웹사이트 Petar Krešimir IV. Hrvatska enciklopedija https://www.enciklop[...] 2023-07-28
[44] 논문 Ritual deditio na reljefu hrvatskoga vladara https://hrcak.srce.h[...] 2016-01-01
[45] 웹사이트 English: Info panel next to the Hollow Church site. https://commons.wiki[...] 2022-11-12
[46] 서적 Izvori za hrvatsku povijest do 1526. godine Fortuna
[47] 서적
[48] 웹사이트 Zvonimir Hrvatska enciklopedija https://www.enciklop[...] 2023-07-28
[49] 서적
[50] 서적 Hrvati i križari
[51] 웹사이트 HRVATSKI KRALJEVI (12) Petar Snačić, posljednji kralj narodne krvi, poginuo je od mađarske ruke na Gvozdu https://www.croexpre[...] 2016-09-14
[52] 웹사이트 Posljednji hrvatski kralj Petar bio je Snačić https://vojnapovijes[...] 2022-11-17
[53] 논문 Hrvatsko-ugarski odnosi od sredinjega vijeka do nagodbe iz 1868. s posebnim osvrtom na pitanja Slavonije http://hrcak.srce.hr[...] Hrvatski institut za povijest – Podružnica za povijest Slavonije, Srijema i Baranje 2011-10-16
[54] 서적
[55] 웹사이트 Hungary - Politics and Society under Stephen's Successors https://countrystudi[...] 2023-07-27
[56] 서적 Zagreb i Slavonija
[57] 웹사이트 Pacta conventa - Hrvatska enciklopedija https://www.enciklop[...] 2024-09-21
[58] 웹사이트 Povijest saborovanja http://www.sabor.hr/[...] Sabor 2010-10-18
[59] 서적
[60] 서적 Templari i Ivanovci u Hrvatskoj Dom i svijet
[61] 서적
[62] 서적 Hrvati i križari Hrvatski institut za povijest
[63] 서적 Historia Salonitana
[64] 서적
[65] 웹사이트 Sve tajne crkvenog blaga: Skrivali ga od ratova, lukavih kradljivaca, a njegova je vrijednost - neprocjenjiva https://www.tportal.[...] 2023-07-27
[66] 웹사이트 Relikvije, kosti, krv, ljubavna pisma: RTL Direkt otkriva zanimljivosti riznice zagrebačke katedrale! https://danas.hr/zan[...] 2016-06-23
[67] 서적 HISTORIA SALONITANA Književni krug
[68] 논문 Šubići Bribirski do gubitka nasljedne banske časti (1322.) https://hrcak.srce.h[...]
[69] 논문 Ugarsko Kraljevstvo i Hrvatska u srednjem vijeku http://hrcak.srce.hr[...] Croatian Institute of History 2011-10-17
[70] 웹사이트 Bribir: Napušteni grad Šubića, hrvatska Troja https://www.vecernji[...] 2022-08-17
[71] 문서 Karbić, 15
[72] 웹사이트 Zasjedanje prvog Općeg sabora Kraljevine Dalmacije i Hrvatske 1350. godine http://www.sabor.hr/[...] 2024-07-21
[73] 웹사이트 Zasjedanje prvog Općeg sabora Kraljevine Dalmacije i Hrvatske 1350. godine https://www.sabor.hr[...] 2024-11-26
[74] 논문 The crown, the king and the town – the relation of Dubrovnik community toward the crown and the ruler in the beginning of movement against the Court https://hrcak.srce.h[...] 2004
[75] 논문 The Mediaeval Sabor (Assembly) ofNoble Croats at Podbrižane https://hrcak.srce.h[...] 1998-11-05
[76] 문서 Macan, 63
[77] 서적 Povijest Hrvata Matica hrvatska
[78] 서적 Povijest Hrvata Vol 2, 256-257
[79] 서적 Povijest Hrvata Vol 2, 258-261
[80] 서적 Povijest Hrvata Vol 2, 258-268
[81] 웹사이트 Sigismund Luksemburgovac https://www.enciklop[...] 2023-04-01
[82] 웹사이트 Ladislav Napuljski https://www.enciklop[...] 2023-04-01
[83] 서적 Frucht 2005, p. 422-423
[84] 웹사이트 Campoformio https://www.enciklop[...] 2023-04-08
[85] 웹사이트 Hrvatinić, Hrvoje Vukčić https://www.enciklop[...] 2023-06-10
[86] 웹사이트 Matica hrvatska - Hrvatska revija 2, 2015. - Croato-Turcica: pregled povijesne interakcije Globalni okvir https://www.matica.h[...] 2023-03-10
[87] 서적 Vrijeme sazrijevanja, vrijeme razaraja Matica hrvatska
[88] 문서 Tracy, 43
[89] 서적 Bitka na Krbavskom polju 1493. godine Školska knjiga
[90] 서적 Klaić, Book IV, 219
[91] 웹사이트 R. W. SETON -WATSON:The southern Slav question and the Habsburg Monarchy page 18 https://archive.org/[...] 2012-04-24
[92] 문서 Margetić, ''Zagreb i Slavonija'', 98 - 101
[93] 서적 A History of the Habsburg Empire, 1526–1918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94] 서적 Cetin: grad izbornog sabora Kraljevine Hrvatske 1527. Karlovačka žzpanija
[95] 웹사이트 R. W. SETON -WATSON:The Southern Slav question and the Habsburg Monarchy page 18 https://archive.org/[...] 2012-04-24
[96] 웹사이트 reliquiae reliquiarum https://www.enciklop[...] 2022-05-03
[97] 서적 Povijest Zagreba Nakladni zavod Matice hrvatske
[98] 서적 Zagreb i Slavonija: izbor studija Croatian Academy of Arts and Sciences, Vitagraf d.o.o, Adamić d.o.o
[99] 웹사이트 Slavonija https://www.enciklop[...] 2024-07-21
[100] 논문 Jedan od temeljnih izvora hrvatske povijesti: pozivnica zajedničkog Hrvatsko-Slavonskog Sabora iz 1558. godine https://hrcak.srce.h[...] 2005-12-19
[101] 웹사이트 Jedinstveni staleški Sabor http://www.sabor.hr/[...] 2024-03-31
[102] 서적 Balkan Wars: Habsburg Croatia, Ottoman Bosnia, and Venetian Dalmatia, 1499–1617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103] 서적 Povijest Zagreba Nakladni zavod Matice hrvatske
[104] 서적 The Habsburg Monarchy, 1618–1815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
[105] 서적 Whose democracy?: nationalism, religion, and the doctrine of collective rights in post-1989 Eastern Europe https://www.worldcat[...]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1997
[106] 웹사이트 Banija ili Banovina? Oba su oblika dopuštena i pravilna, niti je Banija srpski niti je Banovina "hrvatskije" https://dnevnik.hr/v[...] 2023-08-07
[107] 웹사이트 Jutarnji list - Piše Inoslav Bešker: Kaže li se Bànija ili Bánovina? Evo zašto su obje inačice podjednako legitimne https://www.jutarnji[...] 2023-08-07
[108] 서적 Poviest hrvatska II https://books.google[...] Tisak K. Albrechta
[109] 문서 Macan, 111
[110] 웹사이트 Ozalj {{!}} Hrvatska enciklopedija https://www.enciklop[...] 2023-06-09
[111] 문서 Macan, 108-110
[112] 서적 Povijest Hrvata 1526.-1918. Marijan tisak
[113] 웹사이트 Pad Bihaća u ruke Osmanlija 1592. https://vojnapovijes[...] 2022-05-03
[114] 웹사이트 SARAJEVO GA PAMTI PO ZLU: Znate li šta je Eugen Savojski zapisao u svom dnevniku o spaljivanju Sarajeva? https://www.slobodna[...] 2022-05-04
[115] 웹사이트 Stanovništvo Slavonije krajem 17. i početkom 18. stoljeća https://hrcak.srce.h[...] 2022-05-04
[116] 서적 Dva stoljeća uplakane Hrvatske Matica hrvatska
[117] 서적 The Germans and the East Purdue University Press
[118] 문서 Macan, 119-120
[119] 웹사이트 Kraljevinsko vijeće {{!}} Hrvatska enciklopedija https://enciklopedij[...] 2022-10-31
[120] 웹사이트 Like - Karolina, Jozefina, Lujzijana ... Jeste li za road trip slavnim hrvatskim povijesnim cestama? https://www.jutarnji[...] 2022-08-10
[121] 간행물 Seobe i naselja u Lici Yugoslav Academy of Sciences and Arts 1962
[122] 웹사이트 Na današnji dan 12. srpnja 1806. godine izašle prve novine na hrvatskom jeziku Kraglski Dalmatin https://ezadar.net.h[...] 2022-08-11
[123] 웹사이트 Napoleon ukida Dubrovačku Republiku https://zg-magazin.c[...] 2022-08-11
[124] 웹사이트 Mittheilungen des k.u.k. Kriegs-Archivs - Supplement (1892) | Könyvtár | Hungaricana https://library.hung[...]
[125] 문서 Macan, 134-142
[126] 웹사이트 Govor Ivana Kukuljevića Sakcinskog u Saboru 2. svibnja 1843. http://www.sabor.hr/[...] 2022-10-31
[127] 웹사이트 Povijest saborovanja http://www.sabor.hr/[...] 2022-10-31
[128] 웹사이트 'Prije 19. stoljeća nema koncepcije velike Srbije. Korijen sukoba je u 20. stoljeću' https://www.vecernji[...] 2023-02-09
[129] 문서 Macan, 144 -148
[130] 웹사이트 Hrvati i manjine u Hrvatskoj: moderni identiteti https://www.azoo.hr/[...] 2022-09-19
[131] 문서 Macan, 152
[132] 문서 Macan, 154
[133] 서적 Ban Jelačić Mladost izdavačka radna organizacija
[134] 웹사이트 Vojna krajina {{!}} Hrvatska enciklopedija https://www.enciklop[...] 2022-11-19
[135] 웹사이트 Pejačević, Ladislav {{!}} Hrvatska enciklopedija https://www.enciklop[...] 2022-11-19
[136] 문서 Macan, 182-183
[137] 웹사이트 ''S Olujom je završila mučna epizoda duga četiri godine. Nažalost na takav način, ali to je bio srpski izbor'' https://www.vecernji[...] 2022-08-10
[138] 웹사이트 Globus - DVA STOLJEĆA HRVATSKO-SRPSKOG RATA I MIRA Kako su opasne nacionalističke koncepcije preživjele od 19. do 21. stoljeća i postale još opasnije https://www.jutarnji[...] 2022-08-10
[139] 잡지 Balkan Politics https://web.archive.[...] 1923-03-31
[140] 잡지 Elections https://web.archive.[...] 1925-02-23
[141] 뉴스 The Opposition https://web.archive.[...] Time 1925-04-06
[142] 서적 Hrvatska povijest Matica hrvatska
[143] 웹사이트 Crnogorci postavili ploču atentatoru koji je pucao na Stjepana Radića i prvake HSS-a https://www.tportal.[...] 2022-07-17
[144] 서적 The Balkans 1804–1999 Granta Books
[145] 서적 Politička povijest Hrvatske 1918–1929 Zagreb
[146] 웹사이트 Šufflay, Milan Hrvatska enciklopedija https://www.enciklop[...] 2022-07-17
[147] 웹사이트 Župan Petry položio vijenac u sjećanje na Senjske žrtve https://www.novilist[...] 2022-05-09
[148] 웹사이트 Senjske žrtve: Obljetnica tragične pogibije sedam mladih Gospićana https://www.vecernji[...] 2022-07-17
[149] 서적 Tapon
[150] 웹사이트 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about Jasenovac and Independent State of Croatia https://web.archive.[...] Ushmm.org 2011-06-03
[151] 서적 Genocide and Resistance in Hitler's Bosnia: The Partisans and the Chetniks, 1941–1943
[152] 서적 European Resistance in the Second World War https://books.google[...] Pen and Sword
[153] 학술지 Human Losses of the Croats in World War II and the Immediate Post-War Period Caused by the Chetniks (Yugoslav Army in the Fatherland) and the Partisans (People's Liberation Army and the Partisan Detachments of Yugoslavia/Yugoslav Army) and the Communist Authorities: Numerical Indicators https://hrcak.srce.h[...] Croatian Institute of History
[154] 뉴스 Socialism of Sorts https://web.archive.[...] Time 1966-06-10
[155] 학술지 Financial Burden of Medical Care, Dental Care, and Medicines among Older-Aged Population in Slovenia, Serbia, and Croatia 2022-03
[156] 뉴스 The Specter of Separatism https://web.archive.[...] Time 1972-02-07
[157] 학술지 Avengers of Bleiburg: Émigré Politics, Discourses of Victimhood and Radical Separatism during the Cold War https://pdfs.semanti[...]
[158] 뉴스 Conspiratorial Croats https://archive.toda[...] Time 1972-06-05
[159] 뉴스 Battle in Bosnia https://web.archive.[...] Time 1972-07-24
[160] 뉴스 The New York Times 1989-12-14
[161] 학술지 Who Were the Yugoslavs? Failed Sources of a Common Identity in the Former Yugoslavia https://www.jstor.or[...]
[162] 웹사이트 The Prosecutor vs. Milan Martic (paragraph 127–150) http://www.icty.org/[...] International Criminal Tribunal for the former Yugoslavia 2007-06-12
[163] 서적 Croatia: A History C. Hurst & Co
[164] 서적 The Yugoslav Drama McGill-Queens University Press
[165] 서적 The Serbs: History, Myth and the Destruction of Yugoslavia Yale University Press
[166] 웹사이트 Odluka Predsjednika RH o raspisu referenduma http://www.nn.hr/cla[...] Narodne novine
[167] 웹사이트 Yugoslavia Serbia Croatia War 1991 http://www.onwar.com[...] Onwar.com
[168] 웹사이트 Ethnic cleansing War Crimes & Genocide Prevention Britannica https://www.britanni[...] 2024-05-29
[169] 웹사이트 Croatian report from 1995 http://www.unhchr.ch[...] Unhchr.ch
[170] 웹사이트 Document https://www.amnesty.[...]
[171] 웹사이트 World Report 2011: Croatia | Human Rights Watch https://web.archive.[...] Hrw.org 2011-01-24
[172] 웹사이트 Croatia | Human Rights Watch https://www.hrw.org/[...] Hrw.org 2009-01-14
[173] 뉴스 Croatia: New Member Joins Council Of Europe https://www.rferl.or[...] 2008-04-09
[174] 웹사이트 Globus - Rat je završen, 'Tuđman je Bog'; 1995. – 1999.: Od pobjedničke Oluje do poraza tuđmanizma https://www.jutarnji[...] 2020-12-17
[175] 웹사이트 Protiv gašenja Stojedinice 1996. ustalo je 120 tisuća građana https://www.vecernji[...]
[176] 뉴스 Josipovic elected Croatia leader http://news.bbc.co.u[...] BBC News 2010-01-11
[177] 웹사이트 Former Croatian PM Sanader Arrested on Power Abuse Charges http://seenews.com/n[...] 2010-12-11
[178] 뉴스 Croatia jails ex-PM Ivo Sanader for taking bribes https://www.bbc.com/[...] BBC News 2012-11-20
[179] 웹사이트 EUROPA – Press Releases – EU closes accession negotiations with Croatia http://europa.eu/rap[...] Europa (web portal) 2011-06-30
[180] 뉴스 Croatian Opposition Hails Election Win https://www.rferl.or[...] Radio Free Europe/Radio Liberty
[181] 웹사이트 Zoran Milanovic – not Flash Gordon or Zorro but Speedy Gonzales, perhaps? https://inavukic.com[...] 2011-12-28
[182] 웹사이트 Croatia becomes 28th EU member state https://euobserver.c[...] 2013-07
[183] 웹사이트 Croatia elects conservative in presidential election runoff http://www.theguardi[...] 2015-01-11
[184] 웹사이트 Plenković Named Prime Minister-Designate https://balkaneu.com[...] 2016-10-10
[185] 웹사이트 Croatia election: Ex-leftist PM Zoran Milanovic wins | DW | 05.01.2020 https://www.dw.com/e[...]
[186] 뉴스 Zagreb hit by earthquake while in coronavirus lockdown https://www.theguard[...] The Guardian 2020-03-22
[187] 뉴스 Croatia's ruling conservatives win parliamentary election https://www.euronews[...] euronews 2020-07-04
[188] 웹사이트 Desni ekstremizam problem tek kad zapuca i na Banske dvore https://www.politika[...] null
[189] 웹사이트 Godinu od potresa u Petrinji i dalje ruševine https://www.slobodna[...] 2021-12-29
[190] 웹사이트 Petrinja je neprepoznatljiva, razoran potres uništio grad https://portal53.hr/[...] 2020-12-30
[191] 웹사이트 Jutarnji list - Broj zaraženih koronavirusom u značajnom porastu, ali bolnice se ne pune jer je bolest najčešće blaža https://www.jutarnji[...] 2022-07-09
[192] 웹사이트 Dron koji je pao u Zagrebu izvučen iz zemlje, slijedi analiza https://www.tportal.[...] null
[193] 웹사이트 Jutarnji list - Svi detalji otvorenja: Rimčeva Nevera prva će prijeći most koji se ipak neće zvati kako se mislilo https://www.jutarnji[...] 2022-07-16
[194] 뉴스 Croatia begins new euro and Schengen zone era https://www.bbc.com/[...] BBC News 2023-01-01
[195] 서적 バルカン史 柴編 1998
[196] 서적 バルカン史 柴編 1998
[197] 서적 図説バルカン 柴 2001
[198] 서적 バルカン現代史 木戸 1977
[199] 서적 バルカン史 柴編 1998
[200] 서적 バルカン史 柴編 1998
[201] 서적 バルカン現代史 木戸 1977
[202] 서적 図説バルカン 柴 2001
[203] 서적 図説バルカン 柴 2001
[204] 서적 バルカン現代史 木戸 1977
[205] 서적 図説バルカン 柴 2001
[206] 서적 null 矢田 1977
[207] 서적 図説バルカン 柴 2001
[208] 서적 バルカン史 柴編 1998
[209] 서적 null 矢田 1977
[210] 서적 図説バルカン 柴 2001
[211] 서적 柴編(バルカン史)
[212] 서적 矢田
[213] 서적 柴編(バルカン史)
[214] 서적 図説バルカン
[215] 서적 柴編(バルカン史)
[216] 서적 図説バルカン
[217] 서적 柴編(バルカン史)
[218] 서적 図説バルカン
[219] 서적 柴編(バルカン史)
[220] 서적 矢田
[221] 서적 カステラン・ヴィダン
[222] 서적 図説バルカン
[223] 서적 図説バルカン
[224] 서적 柴編(バルカン史)
[225] 서적 図説バルカン
[226] 서적 矢田
[227] 서적 矢田
[228] 서적 矢田
[229] 서적 矢田
[230] 서적 矢田
[231] 서적 Croatia: A Nation Forged in War Yale University Press
[232] 서적 柴編(バルカン史)
[233] 서적 柴編(バルカン史)
[234] 서적 矢田
[235] 서적 矢田
[236] 서적 柴編(バルカン史)
[237] 서적 図説バルカン
[238] 서적 ロクサンディチ(現代東欧史)
[239] 서적 図説バルカン
[240] 서적 ロクサンディチ(現代東欧史)
[241] 서적 図説バルカン
[242] 서적 図説バルカン
[243] 서적 図説バルカン
[244] 서적 図説バルカン
[245] 서적 図説バルカン
[246] 서적 ロクサンディチ(現代東欧史)
[247] 서적 ロクサンディチ(現代東欧史)
[248] 간행물 ヴォイヴォディナの1848年革命に関する研究動向
[249] 서적 図説バルカン
[250] 서적 矢田
[251] 서적 ロクサンディチ(現代東欧史)
[252] 서적 柴編(バルカン史)
[253] 서적 ロクサンディチ(現代東欧史)
[254] 서적 ロクサンディチ(現代東欧史)
[255] 서적 ロクサンディチ(現代東欧史)
[256] 서적 ロクサンディチ(現代東欧史)
[257] 서적 ロクサンディチ(現代東欧史)
[258] 서적 ロクサンディチ(現代東欧史)
[259] 서적 ロクサンディチ(現代東欧史)
[260] 서적 ロクサンディチ(現代東欧史)
[261] 서적 ロクサンディチ(現代東欧史)
[262] 서적 図説バルカン
[263] 서적 矢田
[264] 서적 ロクサンディチ(現代東欧史)
[265] 서적 木戸(バルカン現代史)
[266] 서적 木戸(バルカン現代史)
[267] 서적 矢田
[268] 서적 図説バルカン
[269] 서적 木戸(バルカン現代史)
[270] 서적 図説バルカン
[271] 서적 柴編(バルカン史)
[272] 서적 図説バルカン
[273] 서적 柴編(バルカン史)
[274] 서적 柴編(バルカン史)
[275] 서적 図説バルカン
[276] 서적 図説バルカン
[277] 서적 木戸(バルカン現代史)
[278] 서적 図説バルカン
[279] 서적 柴編(バルカン史)
[280] 서적 木戸(バルカン現代史)
[281] 서적 現代東欧史
[282] 서적 図説バルカン
[283] 서적 バルカン史
[284] 서적 バルカン現代史
[285] 서적 図説バルカン
[286] 서적 バルカン史
[287] 서적 (제목 없음)
[288] 서적 図説バルカン
[289] 서적 バルカン史
[290] 서적 (제목 없음)
[291] 서적 バルカン現代史
[292] 서적 図説バルカン
[293] 서적 バルカン史
[294] 서적 図説バルカン
[295] 서적 バルカン現代史
[296] 서적 バルカン史
[297] 서적 バルカン現代史
[298] 서적 図説バルカン
[299] 서적 図説バルカン
[300] 서적 旧東欧世界
[301] 서적 バルカン史
[302] 서적 バルカン史
[303] 서적 バルカン現代史
[304] 서적 (제목 없음)
[305] 서적 バルカン史
[306] 서적 バルカン現代史
[307] 서적 バルカン現代史
[308] 서적 バルカン史
[309] 서적 バルカン現代史
[310] 서적 バルカン現代史
[311] 서적 バルカン史
[312] 서적 図説バルカン
[313] 서적 バルカン史
[314] 서적 バルカン現代史
[315] 서적 バルカン史
[316] 서적 バルカン史
[317] 서적 バルカン史
[318] 서적 バルカン史
[319] 서적 バルカン史
[320] 서적 バルカン史
[321] 서적 図説バルカン
[322] 서적 バルカン史
[323] 서적 バルカン現代史
[324] 서적 バルカン史
[325] 서적 バルカン現代史
[326] 서적 図説バルカン
[327] 서적 バルカン史
[328] 서적 バルカン現代史
[329] 서적 バルカン史
[330] 서적 バルカン現代史
[331] 서적 バルカン史
[332] 서적 図説バルカン
[333] 서적 バルカン史
[334] 서적 バルカン史
[335] 서적 バルカン史
[336] 서적 バルカン現代史
[337] 서적 バルカン現代史
[338] 서적 図説バルカン
[339] 서적 バルカン現代史
[340] 서적 バルカン現代史
[341] 서적 バルカン史
[342] 서적 バルカン現代史
[343] 서적 バルカン史
[344] 서적 バルカン史
[345] 서적 バルカン史
[346] 서적 バルカン史
[347] 서적 バルカン史
[348] 서적 図説バルカン
[349] 서적 図説バルカン
[350] 서적 バルカン史
[351] 서적 図説バルカン
[352] 서적 柴編(バルカン史)
[353] 서적 図説バルカン
[354] 서적 図説バルカン
[355] 서적 柴編(バルカン史)
[356] 서적 図説バルカン
[357] 서적 柴編(バルカン史)
[358] 서적 木戸(バルカン現代史)
[359] 서적 柴編(バルカン史)
[360] 서적 木戸(バルカン現代史)
[361] 서적 柴編(バルカン史)
[362] 서적 マトヴェイェーヴィチ(旧東欧世界)
[363] 서적 ロスチャイルド(現代東欧史)
[364] 서적 図説バルカン
[365] 서적 ロスチャイルド(現代東欧史)
[366] 서적 ロスチャイルド(現代東欧史)
[367] 서적 ロスチャイルド(現代東欧史)
[368] 서적 図説バルカン
[369] 서적 ロスチャイルド(現代東欧史)
[370] 서적 マトヴェイェーヴィチ(旧東欧世界)
[371] 서적 ロスチャイルド(現代東欧史)
[372] 서적 ロスチャイルド(現代東欧史)
[373] 서적 図説バルカン
[374] 서적 ロスチャイルド(現代東欧史)
[375] 서적 図説バルカン
[376] 서적 ロスチャイルド(現代東欧史)
[377] 서적 柴編(バルカン史)
[378] 서적 ロスチャイルド(現代東欧史)
[379] 서적 ロスチャイルド(現代東欧史)
[380] 서적 ロスチャイルド(現代東欧史)
[381] 서적 図説バルカン
[382] 서적 柴編(バルカン史)
[383] 서적 図説バルカン
[384] 서적 図説バルカン
[385] 기타
[386] 백과사전 크로아티아의 역사·주민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