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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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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의사는 1942년 염동진이 중국에서 결성한 반공 결사단체로, 해방 후 재조직되어 활동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항일 테러 활동을 벌였으며, 해방 후에는 북한 요인 암살 시도, 미군정과의 협력, 좌우합작운동 반대, 여운형·장덕수 암살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쇠퇴했으며, 일부는 KLO 특수부대로 전환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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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사
백의사
창립 지도자염동진
설립일1945년 11월
해산일1950년경
분리된 조직남의사
이념반공주의
한국 초민족주의
민족주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통론
정치 성향극우
공격김일성 암살 미수 사건
여운형 암살
김구 암살
동맹미국
대한민국 임시정부 (1945년–1948년)
적대 세력소비에트 연방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1946년–1948년)
북한
한국어 이름백의사
백의사
로마자 표기Baeguisa
Paegŭisa
이전 조직대동단 (1943년)
관련 정보신탁 통치 반대
활동 시기
활동 기간1942년 ~ 1948년
주요 인물
지도자김구
신익희
유진산
염동진
기타 정보
활동 지역한반도
적대 단체조선건국동맹
남조선로동당

2. 결성 배경

1910년부터 제2차 세계 대전 종전까지 한국은 일제 강점기하에 있었다. 일부 한국인들은 특히 중국으로 망명하여 일본에 맞서 싸웠는데, 이 과정에서 해외 독립운동 진영 내 좌익과 우익 간의 이념적 차이는 점차 심화되었다. 많은 우익 성향의 한국인들은 중국 국민당과 연대한 망명 정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8]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42년 8월, 염동진은 중국에서 중국 국민당의 특무기관이자 장제스 휘하의 반공 결사 단체였던 남의사藍衣社|남의사중국어를 모델로 삼아 백의사를 결성했다.[29] 중국 내 백의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예하 조직으로 활동했으며,[29] 1944년에는 백의사 단원들이 국내로 잠입하여 항일 활동을 전개하는 등 국내 진공 작전을 시도하기도 했다.[30]

2. 1. 일제강점기 염동진의 활동

1935년 육군사관학교 졸업 당시 염동진. 알려진 그의 사진 두 장 중 하나임(2021년 기준).


염동진은 일제강점기 중국으로 망명하여 한국광복군 및 중국 국민당과 관계를 맺고 활동한 인물이다. 1934년에는 독립운동가 양성을 위한 한국광복군-중국 국민당 합작 과정인 낙양군관학교에 입학하여 게릴라 훈련을 받았다.[8] 이 시기 학교 운영진 중 한 명이었던 김구와 가까워졌으나, 이후 김구가 자금 횡령 혐의로 비판받는 사건이 발생하자 염동진은 김구를 비판하는 주요 인물 중 하나가 되었다.[8]

사관학교 졸업 후 염동진은 중국 국민당 내 비밀 무장 단체인 청방과 연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의사 단원들의 후일 증언에 따르면,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국민당의 정보기관인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정통)에서 정보 수집 업무를 맡았다. 이 조직은 국민당을 위해 간첩 활동, 암살, 정보 수집 등을 수행했다.[9][10]

활동 중 염동진은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는데, 체포 주체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린다. 한국 학계에서는 일본 관동군 헌병대에 체포되어 고문 끝에 일본을 위한 간첩 활동을 강요받았다고 보는 반면,[11] 미군 정보 보고서에는 중국 공산당에 의해 체포 및 고문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1] 기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고문으로 인해 염동진이 시력을 잃었다는 점은 모든 자료에서 일치한다. 이후 염동진은 석방되어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왔다.[11]

1942년 8월, 염동진은 중국에서 장제스 휘하의 반공 결사 단체인 남의사(藍衣社)를 본떠 백의사를 결성했다.[29] 이후 1943년에는 평양에서 항일 비밀결사 단체인 대동단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중국 내 백의사는 임시정부 예하 조직으로 계속 활동하였다.

1944년 백의사 단원들은 국내 진공 및 투입 작전을 개시하기도 했다. 단원 박기수(朴基秀)는 임시정부의 지령을 받고 국내에 잠입하여 영천의 신사를 불태우고 대구 주둔 일본군 탄약고를 폭파하는 등 항일 활동을 벌이다 일본 헌병에 쫓기게 되었다.[30] 박기수는 고향 선배이자 형의 친구였던 엄민영(당시 무주군수)을 찾아가 피신을 요청했다. 엄민영은 박기수가 백의사 단원임을 알면서도 당시로서는 거금이었던 돈 5백 원과 가짜 신분증을 마련해주어 도피를 도왔다. 만약 항일 운동가를 도운 사실이 발각되었다면 조선총독부 관리였던 엄민영의 지위는 위태로워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30] 이 내용은 박기수 본인이 월간 '한국인' 1984년 4월호에서 밝힌 바 있다.[30]

2. 2. 대동단 결성

1943년 평양에서 염동진이 항일 비밀결사 단체인 대동단을 결성하여 활동했다는 주장이 있으나,[12] 구체적인 결성은 1944년 8월 평양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 다수설이다.[8][13] 대동단은 염동진(염홍섭)이 설립한 반공주의 단체로, 이후 결성되는 백의사의 직접적인 전신으로 여겨진다.[8] 이는 1919년에 결성된 동명의 대동단과는 다른 조직이다.[8][13]

대동단이 구상된 불교 사찰 용명사(1930년대 경)


대동단 결성은 평양의 불교 사찰인 용명사에서 처음 구상되었다.[11] 당시 용명사는 좌익과 우익 민족주의자들이 모이는 장소였는데,[11] 승려 박고봉은 1944년 8월 여운형이 설립한 좌익 성향의 건국동맹에 대항하기 위해 우익 성향의 단체를 만들 것을 제안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11][8] 용명사는 한국 전쟁 중에 파괴되었다.[11]

염동진과 박고봉이 함께 대동단을 이끌었으며,[11] 초기 단원으로는 백관옥과 선우봉 등이 있었다.[11] 학자 안기석에 따르면, 염동진은 중학생을 포함한 다른 대부분의 단원들을 모집했으나, 후일 증언을 포함하여 이 단체가 실제 항일 독립운동 활동에 참여했다는 뚜렷한 증거는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다.[11]

3. 해방 이후

1949년 김구


1949년 6월 26일, 백의사 단원으로 알려진 안두희김구를 암살했다.[20][21] 당시 미군 CIC 요원이었던 씨리(Cilley)의 보고서에 따르면, 안두희는 CIC의 정보원이었다가 요원으로 활동했으며, 백의사 단장 염동진(염홍섭)의 지시를 받고 김구를 암살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22] 씨리는 또한 염동진과 김구가 암살 사건 전에 당시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군사 쿠데타를 모의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21] 그러나 안기석은 염동진이 김구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많은 백의사 단원들이 김구를 존경했다는 점을 들어 염동진의 암살 지시 여부에 의문을 제기한다.[11]

3. 1. 백의사 재조직

1945년 현준혁 암살 사건 이후 염동진은 소련의 감시를 피해 월남하였다.[27] 이후 서울 낙원동에 자리를 잡고 백의사를 재조직하였다. 백의사라는 이름은 중국의 남의사백의민족에서 따온 것이다. 근거지는 곧 궁정동으로 옮겼다.

초창기에 이들은 김구-신익희로 이어지는 임정계의 지휘라인의 명령을 받아 활동했다.[31] 이들은 북조선에도 사람을 보내 대북 타격 작전을 수행하기도 했다.[31]

1946년 상반기 백의사를 비롯한 임정계 반탁 운동원들은 북한 지역에 침투하여 김일성, 김책, 최용건, 강량욱 등에 대한 암살, 테러를 시도하는 한편, 반탁 운동을 선동하고 임정의 정권 접수를 선포했다.[32]

1946년부터 1948년까지 백의사는 중국과 북한 국경 북쪽에 우익 게릴라 군대를 조직하려는 “만주계획”을 세웠다. 염동진은 김구의 도움을 받았고, 김구는 오랜 동맹이었던 장개석에게 연락했다. 그러나 장개석이 1949년 중국 국공 내전에서 패배하면서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11]

대부분의 자료는 백의사가 1947년 12월 2일에 장덕수를 암살했다고 보고 있다.[15][20]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백의사와 다른 민간 무장 단체들의 역할은 감소하기 시작했다.[11] 대부분의 요원들은 돌아갈 직업이 있었지만, 약 100명의 요원들은 갈 곳이 없었다. 대한민국 육군본부에서 정보 장교가 된 전직 백의사 요원이 자신의 부서에 많은 백의사 요원들을 영입했다.[11]

1949년 2월,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정보국장인 찰스 A. 윌로비 장군은 특사를 염동진에게 보내 북한 정보 획득을 위한 협력을 요청했다. 이러한 상호 작용의 결과로 1949년 6월 1일 한국 연락 사무소(Korean Liaison Office, KLO)가 설립되었다. 남은 백의사 요원들은 그곳에서 일하게 되었다.[11][15]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서울 제1차 전투로 시작되었다. 염동진은 서울을 탈출하지 않고 행방불명되었으며, 대부분 북한군에 체포되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11]

전쟁 후, 백의사 본부는 법무부 장관 이인의 소유가 되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에는 중앙정보부가 그 건물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 건물은 나중에 1979년 박정희 암살 사건이 발생한 바로 그 장소가 되었다.[11][8]

3. 2. 1946년 북한 요인 암살 시도

1945년 현준혁 암살 사건 이후 염동진은 소련의 감시를 피해 월남하였다.[27] 서울 낙원동에 자리 잡고 백의사를 재조직했으며, 이후 근거지를 궁정동으로 옮겼다. 백의사라는 이름은 중국의 남의사백의민족에서 유래했다.

초기 백의사는 김구-신익희로 이어지는 임정계의 지휘 아래 활동했으며,[31] 북조선 지역에도 대원을 파견하여 대북 타격 작전을 수행했다.[31] 1946년 상반기, 백의사를 포함한 임정계 반탁 운동 세력은 북한 지역에 침투하여 김일성, 김책, 최용건, 강량욱 등 주요 인물에 대한 암살과 테러를 시도하고, 반탁 운동을 선동하며 임시정부의 정권 접수를 주장했다.[32]

1946년 2월 초, 이성렬, 백시영, 김형집, 최기성, 이희두 등으로 구성된 임시정부 정치공작대와 백의사 결사대는 신익희의 낙산장에서 정보 수집 및 지하 활동 훈련을 받고 북한으로 파견되었다.[31] 3월 1일 평양역 앞 광장에서 열린 북한3·1절 기념행사에서 이들은 반탁 운동을 벌이는 동시에 김일성을 포함한 지도부 암살을 위해 수류탄을 투척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신속히 피했고, 현장에 있던 소련군 장교 야코프 노비첸코 중위가 수류탄을 다른 곳으로 던져 암살은 미수에 그쳤다.[31][19]

김일성 암살 시도 실패 이후에도 백의사 결사대의 북한 요인 암살 시도는 계속되었다.[31]

결과 ! 비고 |
최용건 | 실패 | 자택 습격[31] |
최용건 | 실패 | 자택 재습격[31][19] |
김책 | 실패 (결과 불명확) | 자택 습격[31][19] |
강량욱 | 가족 등 사망 | 자택 습격, 강량욱 본인 암살은 실패[31][19] |



이 과정에서 결사대원 중 최기성과 김정의는 현장에서 조선인민군에게 체포되었고, 이희두는 총격전 중 사망했으며, 이성렬만 남쪽으로 탈출했다. 이들이 은신했던 아지트에서는 임정 포고문 제1, 2호가 발견되었다. 소련군에 체포된 김정의는 심문 과정에서 임정 내무부 정보국장 박문이 증명서 발급과 자금 지원을 했다고 진술했으며, 김구가 계획을 승인했지만 자신이 직접 만나지는 않아 북한행을 알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말했다.[31] 또한 신익희 외무부장 명의의 승차권이 발견되었다는 기록도 있다.[34]

1945년 김일성(왼쪽에서 두 번째)과 소련 군 장교들


1946년 3월, 군사 시설이 미비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백의사의 북한 습격은 북한 지도부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31] 이를 계기로 북한은 내부 치안 단속을 강화했으며, 김구이승만을 "팟쇼테로 강도단의 두목"이라며 강하게 비난했다.[31]

러시아연방국방성중앙문서보관소의 소련군정 문서(남조선 정세 보고서, 1946년 ~ 1947년)에는 백의사가 김구의 직접적인 지도 하에 있으며, 중국에서 귀국한 한국인과 청년 단체 회원들로 구성되어 공산당, 인민당 당원 및 인민위원회 지도자 살해를 목표로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35] 그러나 백의사와 김구의 관계는 지휘-산하 관계라기보다는 상호의존적인 협력 관계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김두한은 백의사가 임시정부 계통이며, 염동진 역시 임정 계통이기에 신익희를 비롯한 임정 요원들이 자주 방문했다고 증언했다.[36]

한편, 1946년 1월부터 9월까지 백의사는 미군 미 육군 정보대(CIC) 및 주한미군(USFK) 군 정보부(G-2)와 협력하여 북한에 파견할 정보원을 훈련시켰으며, 매달 약 20명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백의사 요원들은 1946년 5월 초 북한에 잠입하여 북한군 병력 배치, 특히 소련제 장비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도 했다.[11] 역사학자 이종수는 당시 미군이 백의사의 북한 테러 공격을 직접 지원했을 가능성은 낮다고 보았다. 미군의 북한 내 정보 활동은 주로 정보 수집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북한 내 반대 세력에 대한 지원은 미미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러한 국경을 넘나드는 첩보 활동은 재정적 어려움, 훈련 문제, 그리고 38선 경비 강화로 인해 점차 중단되었으나, CIC는 백의사 해체 시까지 다른 활동에서 협력을 지속했다.

3. 3. 미군정과의 협력

백의사 단원 염동진의 진술에 따르면, 백의사는 1946년 1월부터 미군정 하에서 미군 미 육군 정보대(CIC)와 협력했다.[8] 기밀 해제된 실리 보고서는 CIC 요원 실리가 1947년 10월경부터 염동진을 알고 있었으며,[21] 1947년부터 1948년 사이에 백의사 요원들이 CIC의 활동에 동원되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대북 첩보 활동염동진의 서술에 따르면, 1946년 1월부터 9월까지 백의사는 미군 CIC 및 주한미군(USFK) 군 정보부와 협력하여 북한에 파견할 스파이를 훈련시켰다. 매달 약 20명의 요원이 북한으로 보내졌다. 안씨 또한 1946년 5월 초 백의사 요원들이 북한에 잠입하여 북한군 병력 배치, 특히 소련이 보낸 장비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고 증언했다.[11]

CIC와의 협력 하에 진행된 스파이 훈련은 서울 정릉동에 위치한 백의사의 거점에서 이루어졌다. 이 집은 과거 부유한 일본인의 별장이었으며, 한국 전쟁 제2차 서울 전투 이후에는 대한민국 국군 정보대의 비밀 훈련 장소로 사용되어 북파공작원을 양성하는 곳이 되었다.[11] 훈련 요원 선발 기준은 엄격했으며, 파견될 지역의 방언을 유창하게 구사해야 했다. 각 도(道)마다 해당 지역 출신 요원 두 명씩 선발되었다. 안씨에 따르면, 대동단 출신이었다가 백의사에 합류한 박현영(朴玄英)이 훈련 관리를 맡았다.[11]

이러한 국경을 넘나드는 첩보 활동은 재정적 어려움, 훈련상의 문제, 그리고 38선의 경비 강화로 인해 점차 중단되었다.[11] 당시 국경은 북위 38도선이었으며, 현재의 한국 비무장 지대(DMZ)는 한국 전쟁 이후 설정되었고 전쟁 이전의 38선 국경을 기준으로 한다. 그러나 CIC는 백의사가 해체될 때까지 다른 활동에서 백의사와 계속 협력했다.
협력 배경안명철의 주장에 따르면, 염동진은 중국 망명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신익희를 통해 처음 CIC와 연결되었다. 신익희는 염동진을 자신의 집인 낙산장으로 초대하여 CIC 소속 한국계 미국인 요원 이순용에게 소개했다. 이순용은 신익희에게 그의 정치 조직을 해산하거나, 아니면 조직을 이용해 미국을 위해 북한에서 첩보 활동을 하라는 미 8군 사령관 존 R. 호지 장군의 요구를 전달했다. 이에 격분한 신익희는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그러나 신익희의 보좌관 조중서는 백의사가 대신 첩보 활동을 맡을 것을 제안했다. 이후 염동진의 CIC와의 주된 연락책은 CIC 서울 지부장인 위테커 소령(영어 표기 불확실)이 되었으며, 그는 북한 정보를 제공하는 대가로 백의사를 보호하겠다고 약속했다.[11] 백의사는 또 다른 CIC 요원 장석윤과도 연계되어 있었다.[8]
미군 지원 범위에 대한 시각역사가 이종수는 미군이 백의사의 대북 정보 수집 활동은 지원했을 수 있으나, 같은 시기 백의사가 자행한 것으로 알려진 북한 내 테러 공격까지 지원했을 가능성은 낮다고 보았다. 그는 "소련 통치에 대한 저항 운동의 어려움 중 하나는 남한의 민족주의자들이나 미군정으로부터 재정적 또는 인적 지원을 거의 받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1946년 봄 [백의사]와 기타 남한의 우익 세력이 소련 점령군과 북한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산발적인 폭력 행위를 자행했고, 미군 정보부와 나중에는 CIA가 1946년 초부터 북한에 요원을 파견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북한에서의 미 정보 및 대첩 활동은 주로 정보 수집을 위한 것이었고, 북한의 반대 세력에 대한 지원은 거의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기술했다.
기타 활동 연관성백의사는 미군정 시기 여러 정치적 암살 사건에도 연루된 것으로 지목된다.

  • 여운형 암살 (1947년 7월 19일): 단체 조직원으로 알려진 한지근(韓志根)이 여운형을 암살했다. 대부분의 자료는 백의사가 이 암살의 배후라고 본다.[15][20] 2021년 정병준은 백의사 부사령관 박경구가 생전 인터뷰에서 여운형 암살이 백의사의 지시였다고 증언했다고 밝혔다. 염동진은 백의사 고문 김영철을 통해 암살범들(신동운, 김흥성 등)을 만났고, 이들에게 .45구경 권총을 지급했다. 이후 염동진은 친일 경찰로 알려진 노덕술과 공모하여 사건 은폐를 시도했다. 다만, 학자 안기석은 2005년 한지근이 백의사 단원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며 기존의 통설에 반박하기도 했다.[11]
  • 장덕수 암살 (1947년 12월 2일): 대부분의 자료는 장덕수 암살 역시 백의사의 소행으로 보고 있다.[15][20] 한국 학자들과 실리는 이 암살이 백의사에 의해 자행되었다는 데 대체로 동의하지만, 실리는 백의사와 이 사건을 연결하는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또한 백의사는 1946년부터 1948년까지 중국과 북한 국경 북쪽에 우익 게릴라 군대를 조직하려는 이른바 “만주 계획”을 추진했다. 염홍섭이 주도하고 김구가 지원했으며, 김구는 오랜 동맹이었던 장개석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장개석이 1949년 중국 국공 내전에서 패배하면서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11]

4. 활동

백의사는 주로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연계하여 북한 지역에서의 공작 활동 및 요인 암살을 시도했다. 1946년 3월 초, 백의사는 결사대를 조직하여 '북한임시인민위원회 지도자 암살'을 목표로 삼았다.[31] 2월 초에는 이성렬, 백시영, 김형집, 최기성, 이희두 등으로 구성된 임정 정치공작대와 백의사 결사대가 신익희의 낙산장(駱山莊)에서 정보 수집 및 지하 활동 훈련을 받고 북한으로 파견되었다.[31]

이들은 평양역 앞 광장에서 열린 북한의 3·1절 기념행사에서 반탁 시위를 벌이는 동시에 김일성을 포함한 북한 정권 지도부를 암살하기 위해 수류탄을 투척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신속히 피했고, 현장에 있던 소련군 장교 노비첸코 중위가 수류탄을 다른 곳으로 던져 암살은 실패로 돌아갔다.[31] 이 사건 이후에도 백의사 결사대의 암살 시도는 계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결사대원 중 최기성과 김정의는 현장에서 조선인민군에게 체포되었고, 이희두는 총격전 중 사망했으며, 이성렬만이 남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들이 은신하던 곳에서는 임정 명의의 포고문 제1, 2호가 발견되었다. 체포된 김정의는 소련군의 심문 과정에서 임정 내무부 정보국장 박문이 증명서 발급과 자금 지원을 했다고 진술했으며, 김구가 계획을 승인했는지는 자신이 직접 만나지 않아 알 수 없다고 언급했다.[31] 또한, 임정 외무부장 신익희 명의의 승차권이 발견되었다는 기록도 있다.[34]

1946년 3월에 이루어진 백의사의 북한 습격은 군사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도 북한 지도부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북한은 내부 치안 단속을 강화했고, 김구이승만을 "팟쇼테로 강도단의 두목"이라며 강하게 비난했다.[31]

백의사와 김구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과 증언이 존재한다. 러시아연방국방성중앙문서보관소의 소련군정 문서(1946년 ~ 1947년 남조선 정세 보고서)에는 "이 단체(백의사)는 김구의 직접적인 지도 하에 있다. [...] 이 단체의 목적은 공산당과 인민당의 당원들 및 인민위원회 지도자들을 살해하는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35] 그러나 일각에서는 백의사와 김구의 관계를 상하 관계보다는 상호 의존적인 관계로 보기도 한다. 김두한은 백의사가 임시정부 계통이며, 염동진 역시 임정 계통이기에 신익희를 비롯한 임정 요원들이 자주 방문했다고 증언했다.[36]

김두한은 백의사에 대해 "함경남북도하고 평안남북도하고 황해도 일부에서 공산당한테 재산과 생명을 빼앗기고 학살당한 이북 5도 동포가 모여서 만든" 단체이며, 중국 군통국대립(戴笠)이 장개석 총통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남의사'를 본떠 '백의사'라 이름 붙였다고 설명했다. 그는 백의사의 사령관이 평양 출신의 염동진이며, 염동진은 장개석 휘하 군통국 소속으로 활동하다가 평양에서 공산당에 의해 고문을 당해 척추 부상과 실명을 겪었다고 언급했다.[37] 미군정 보고서에는 염동진이 "파시스트 및 나치 성향의 반공 지하조직"을 설립했으며, 추종자 대부분이 김구의 추종자라고 기록되어 있다.[38]

4. 1. 여운형 암살 (1947)

1947년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한 여운형의 암살에 관여하기도 했다.[27]

4. 2. 장덕수 암살 (1947)

(내용 없음)

4. 3. 만주 계획 (1946~1948)

1946년부터 1948년까지 백의사는 중국과 북한 국경 북쪽에 우익 성향의 게릴라 군대를 조직하려는 "만주계획"(만주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을 위해 염홍섭은 김구의 도움을 받았고, 김구는 오랜 동맹 관계였던 장개석에게 연락하여 지원을 모색했다. 그러나 1949년 중국 국공 내전에서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 정부가 패배하면서 이 계획은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11]

5. 해체 과정

1948년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과 함께 백의사는 급격하게 쇠퇴의 길로 들어서면서 일부 핵심 인물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흩어졌다.[39] 이후 김구 암살과의 연관성 논란이 제기되기도 했으나[27][39] 명확한 증거는 부족하다는 반론이 있다.[39] 일부 단원들은 한국 전쟁 중 KLO 특수부대로 전환되어 활동했으며,[26] 단장 염동진은 한국 전쟁 중 납북되어 행방불명되었다.

5. 1.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쇠퇴

1946년부터 1948년까지 백의사는 중국과 북한 국경 북쪽에 우익 게릴라 군대를 조직하려는 “만주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염동진의 동생 염홍섭이 주도했으며, 김구의 도움을 받아 오랜 동맹이었던 장개석에게 연락하기도 했다. 그러나 장개석이 1949년 중국 국공 내전에서 패배하면서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11]

대부분의 자료는 백의사가 1947년 12월 2일에 장덕수를 암살했다고 보고 있다.[15][20] 한국 학자들과 미군정의 실리 보고서(Cilley Report)는 이 암살이 백의사에 의해 자행되었다는 데 대체로 동의하지만, 실리 보고서 자체는 백의사와 사건을 연결하는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백의사는 급격하게 쇠퇴의 길로 들어서면서 일부 핵심 인물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흩어졌다.

한편, 백범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가 백의사 단원이라는 미군정 측의 주장이 있다. 그러나 안두희는 미군 방첩대(CIC) 소속이라는 다른 견해도 존재한다.[27] 미군정 실리 보고서는 안두희가 백의사 단원이며 염동진김구 암살의 배후로 지목했으나, 백의사 단원들은 이를 강력하게 부인했다. 단장 염동진김구의 암살 소식을 듣고 분노했으며,[27] 단원 백찬옥(백관옥의 동생) 역시 노발대발했다고 전해진다.[39] 김구의 비서를 지낸 선우진 또한 백의사와의 연관성을 부인했다.[39] 김구 연구자인 도진순 교수는 염동진김구의 관계가 적대적이기보다는 상호의존적이었으며, 염동진안두희에게 암살을 지시했다는 언급은 문서 어디에도 없는 명백한 오보라고 반박했다. 그는 당시 정황상 염동진이 암살을 지시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주장했다.[39]

백의사 단원 중 일부는 6.25전쟁 중 KLO 특수부대로 활동하기도 했다.[26] 단장 염동진은 한국전쟁 때 북한에 의해 납북되어 행방불명되었다.

5. 2. 김구 암살과의 연관성 논란

백범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가 백의사 단원이었다는 미군정 측의 주장이 있다.[27] 그러나 안두희는 CIC 소속이었다는 다른 견해도 있으며, 백의사 단장 염동진은 김구의 암살 소식을 듣고 분노했다는 증언도 있다.[27]

한편, 미국 육군정보대의 실리보고서(Cilley Report)는 안두희가 백의사 단원이며 염동진을 백범 김구 암살의 배후로 지목하기도 했다.[39] 하지만 백의사 단원들은 이러한 연관성을 강력하게 부인했다.[39] 백의사 단원이자 백관옥의 동생인 백찬옥은 백범 김구 암살 소식을 듣고 크게 분노했다고 전해지며,[39] 백범 김구의 비서를 지낸 선우진 또한 백의사와의 연관성을 부인했다.[39]

백범 김구 연구자인 도진순 교수는 염동진이 백범 김구에 대해 적대적이기보다는 상호의존적인 관계였으며, 실리보고서에는 염동진이 안두희에게 김구 암살을 지시했다는 언급이 전혀 없어 이는 명백한 오보라고 반박했다. 또한 당시 정황상 염동진이 암살을 지시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주장했다.[39]

백의사는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급격히 쇠퇴하여, 백범 김구 암살 사건(1949년) 당시에는 이미 조직력이 약화된 상태였다.[39]

5. 3. KLO 특수부대로 전환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백의사는 점차 세력이 약해지고 단원들도 흩어지게 되었다.[27][39] 이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이들 중 일부는 KLO 특수부대로 전환되어 활동하기도 했다.[26] 한편, 백의사 단장이었던 염동진은 한국 전쟁 중 북한에 의해 납북되어 행방불명되었다.

5. 4. 염동진 납북

백의사 단원 중 일부는 6.25 전쟁 발발 후 KLO 특수부대로 활동하기도 했다.[26] 단장 염동진은 한국 전쟁 중 북한에 의해 납북되어 행방불명되었다.

6. 조직 구조

백의사의 지휘 체계는 총사령관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총사령관은 염동진이 맡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8][15] 총사령관 아래에는 부사령관과 고문단을 두었으며, 조직국, 정보국, 집행국, 비서실, 훈련국, 총무국 등 여러 기능별 부서를 운영했다.[8] 고문단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경력이 있는 인사들이 포함되었고, 각 부서 책임자 중 일부는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나 군 등에서 활동을 이어가기도 했다. 또한 조직 내에는 암살과 같은 특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별도의 '특공대'가 존재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21]

6. 1. 총사령관: 염동진

백의사의 지휘부에 대해서는 염동진이 총사령관을 역임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여러 자료에 따르면 박진구가 부사령관이었다고 하나[8][15], 2021년 정병준은 부사령관을 박경구(朴經九)로 명시하며 다음과 같이 지휘부를 설명했다.

직책 (한국어)담당자비고
총사령염동진
부사령박경구(朴經九)함경남도 출신. 국방경비대 부사령관으로 공식적으로 근무.
고문유진산, 백창섭, 김영철모두 전 임시정부 출신.
* 유진산: 이후 여러 차례 대한민국 국회 의원 역임.
* 백창섭(白昌燮): 이전에 임시정부 특파사무국 국장 역임.
* 김영철: 임시정부의 급진적 조직인 조선애국단 일원.[8]
조직국장안병석(安炳奭)공식적으로 노총 조직부장.
정보국장김명욱(金明煜)이후 대한민국 국방부 과장 역임.
집행국장한승규(韓承奎)본명 한철민(韓哲民).
비서실장백관옥평양 출신. 현준혁 암살에 가담한 대동단원 중 한 명.[8]
훈련국장선우봉평안북도 출신.
총무국장정병모(鄭柄模)평양 우체국장의 차남.



한편, 실리(Cilley)는 백의사 내부에 "혁명 그룹" 또는 "특공대"가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이 특공대는 5개 그룹으로 나뉘어 각 4명의 대원으로 구성되었으며, 암살 명령 시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을 맹세했다고 한다. 그는 김구 암살범인 안두희가 특공대 1그룹 대원이었다고 주장했다.[21]

6. 2. 부사령관: 박경구

일부 초기 자료에서는 박진구를 부사령관으로 지목하기도 했다.[8][15] 그러나 2021년 정병준의 연구에 따르면 백의사의 부사령관은 박경구(朴經九)이다. 함경남도 출신인 그는 공식적으로 국방경비대 부사령관으로 활동했으며, 이 부대는 1951년 국방경비대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6. 3. 고문: 유진산, 백창섭, 김영철

백의사의 고문으로는 '''유진산''', '''백창섭|白昌燮한국어''', '''김영철''' 세 사람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대한민국 임시정부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 '''유진산''': 이후 여러 차례 대한민국 국회 의원을 역임했다.
  • '''백창섭|白昌燮한국어''': 이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파사무국 국장을 지냈다.
  • '''김영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급진적 조직이었던 조선애국단의 일원이었다.[8]

6. 4. 조직국장, 정보국장, 집행국장, 비서실장, 훈련국장, 총무국장

백의사 주요 국장
직책담당자비고
조직국장안병석(安炳奭)공식적으로 노동조합(노총 조직부장) 조직부장이었다.
정보국장김명욱(金明煜)이후 대한민국 국방부 과장(과장)을 역임했다.
집행국장한승규(韓承奎)본명 한철민(韓哲民).
비서실장백관옥평양 출신. 현준혁 암살에 가담한 대동단원 중 한 명.[8]
훈련국장선우봉평안북도 출신.
총무국장정병모(鄭柄模)평양 우체국장의 차남.


6. 5. 특공대

실리(Cilley)는 백의사 내부에 "혁명 그룹" 또는 "특공대"가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이 특공대는 5개 그룹으로 나뉘었으며, 각 그룹은 4명의 대원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특공대원들은 암살 명령이 내려지면 필요하다면 목숨을 바쳐 싸울 것을 맹세했다고 전해진다. 실리는 김구 암살범인 안두희가 특공대 제1그룹의 대원이었다고 주장했다.[21]

7. 입단 의식

백의사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입단 의식을 거쳐야 했다. 안기석의 증언에 따르면 이 의식은 조직 본부 내 비밀스러운 공간에서 진행되었으며, 입단 희망자는 염동진 앞에서 특정 내용을 서약하고 손가락을 베어 피의 맹세를 하는 과정을 거쳤다고 한다.[11] 이 의식은 외부에는 철저히 비밀로 부쳐졌다.

7. 1. 비밀 의식

안기석의 증언에 따르면, 백의사는 비밀스러운 입단 의식을 거쳤다.[11] 이 의식은 본부 내부의 비밀 방에서 열렸으며, 이 방의 문에는 자물쇠가 두 개 달려 있었다. 입단 희망자는 먼저 '염(Yeom)'이라는 인물을 만나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오른손을 들어야 했다. 이후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약을 했다.[11]

: 하나, 나는 조국의 자주적인 정부 수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맡은 바 임무를 완수한다.

: 하나, 나는 목숨을 걸고 백의사의 명령에 복종한다.

: 하나,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조국과 백의사를 배반하지 않는다.

서약을 마친 후, 입단자는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피로 계약을 맺는 절차를 거쳤다.[11]

7. 2. 서약

안기석에 따르면, 백의사는 비밀 입단 의식을 거쳤다. 이 의식은 본부 내부의 비밀 방에서 열렸으며, 문에는 두 개의 자물쇠가 있었다. 입단자는 염동진을 먼저 만나 무릎을 꿇고 오른손을 들었다. 그런 다음 다음과 같은 서약을 했다.[11]

  • 조국의 자주적인 정부 수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맡은 바 임무를 완수한다.
  • 목숨을 걸고 백의사의 명령에 복종한다.
  • 어떠한 경우에도 조국과 백의사를 배반하지 않는다.


그 후 입단자는 손가락을 베어 피로 계약을 맺었다.[11]

7. 3. 피의 맹세

실리(Cilley)는 백의사 내부에 "혁명 그룹" 또는 "특공대"가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이 특공대는 5개 그룹으로 나뉘었으며, 각 그룹은 4명의 대원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암살 명령이 내려지면 대원들은 필요하다면 목숨을 바쳐 싸울 것을 맹세했다고 전해진다. 실리는 김구 암살범인 안두희가 이 특공대의 1그룹 대원이었다고 주장했다.[21]

안기석에 따르면, 백의사는 비밀 입단 의식을 거쳤다. 이 의식은 본부 내부의 비밀 방에서 진행되었으며, 문에는 두 개의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입단자는 염동진을 먼저 만나 무릎을 꿇고 오른손을 들어 다음과 같은 서약을 해야 했다.[11]



백의사 단원으로 입단하면서 다음과 같이 서약합니다.

하나, 조국의 자주적인 정부 수립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맡은 바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하나, 목숨을 걸고 백의사의 명령에 복종하겠습니다.

하나, 어떠한 경우에도 조국과 백의사를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서약 후 입단자는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피의 맹세를 하였다.[11]

8. 다른 단체와의 관계

백의사는 해방 이후 여러 국내외 단체와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활동했다. 주요 관련 단체로는 미군 방첩대(CIC), 대한민국 임시정부, 서북청년단,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 등이 있다.

미군 방첩대와는 정보 제공 및 활동 지원 등의 협력 관계를 유지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와는 주요 인물 간의 연결 고리를 통해 간접적인 관계를 맺었다. 특히 신익희가 주도한 중앙정치공작대와는 실질적으로 매우 긴밀한 관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반공주의 성향의 청년 단체인 서북청년단 및 우익 노동조합인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과도 연관성을 가지고 활동했다. 이러한 관계망은 백의사가 당시 정치 지형 속에서 영향력을 확보하고 활동 기반을 넓히기 위해 다양한 세력과 연계했음을 보여준다.

8. 1. 미군 방첩대 (CIC)

염동진의 진술서에 따르면, 백의사는 1946년 1월부터 미군 방첩대(CIC)와 협력했다. 기밀 해제된 실리 보고서는 실리가 1947년 10월경부터 염동진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 이 보고서는 또한 1947년부터 1948년 사이에 백의사 요원들이 미군 방첩대의 활동에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

안명철의 주장에 따르면, 염동진은 중국 망명 시절 친분이 있던 신익희를 통해 처음으로 미군 방첩대와 연결되었다. 신익희는 염동진을 그의 집인 낙산장으로 초대하여 미군 방첩대 한국계 미국인 요원 Lee Sun-yong|이순용eng에게 소개했다. 이순용은 신익희에게 그의 정치 조직을 해산하거나 미국을 위해 북한을 염탐하는 데 이용하라는 미 8군 사령관 존 R. 호지 장군의 요청을 전달했다. 이에 격분한 신익희는 방에서 뛰쳐나갔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신익희의 보좌관 조중서kor는 백의사가 대신 첩보 활동을 맡는 것을 제안했다. 염동진의 미군 방첩대와의 주된 연락책은 미군 방첩대 서울 지부장인 Whitaker|위테커eng 소령이 되었고, 그는 미국에 북한 정보를 제공하는 한 백의사를 보호할 것을 약속했다.[11]

이 단체는 또 다른 미군 방첩대 요원 장석윤kor과도 연계되어 있었다.[8]

8. 2. 대한민국 임시정부 (KPG)

1919년 수립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백의사 지도부의 많은 인물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적극적으로 또는 이전에 연관되어 있었다. 특히 염동진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요 인물이었던 신익희 사이의 오랜 친분은 두 단체를 가깝게 연결하는 고리가 되었다.

두 단체의 연관성은 신익희가 1945년 12월 6일 설립한 중앙정치공작대(CPTF)를 통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중앙정치공작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 산하의 비밀 준군사 조직이었다. 이 조직의 목표는 정보 수집이나 때로는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정치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신익희 개인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백의사와 중앙정치공작대는 공식적으로 연결된 조직은 아니었다. 신익희염동진에게 중앙정치공작대의 직책을 제안했으나, 염동진은 백의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이를 거절했다.[11]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의사 단원이었던 이성렬은 2000년대 초 인터뷰에서 "조직 운영에 있어서는 ‘백의사=중앙정치공작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고 증언하며 두 조직의 실질적인 관계가 매우 밀접했음을 시사했다.[8]

8. 3. 서북청년단 (NYL)

소련군 철수를 요구하는 서북청년단원들 (1948년 5월 31일)


서북청년단 (NYL)은 서북청년회(WSS)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8] 서북청년단은 1946년 11월 30일 여러 소규모 단체의 합병을 통해 설립된 반공 청년 단체였다. 단원들은 대부분 북한 출신이었으며 악명 높은 폭력성을 지녔고, 좌익 세력 및 경찰과 여러 차례 큰 충돌을 일으켰다.[25]

유진산은 서북청년단의 간부로 추정되며, 서북청년단으로 합병된 단체 중 하나를 이끌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8]

8. 4.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 (GKILL)

백의사는 극우 성향의 노동조합인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大韓獨立促成勞動總聯盟, Great Korean Independent Labor League영어, 약칭 GKILL)과도 연관되어 있다. GKILL은 좌익 성향의 전평에 대항하기 위해 설립되었다.[8]

9. 구성원

백의사 구성원은 주로 북한 출신의 우익 인사들이었으며, 상당수가 김구를 지지하는 경향을 보였다.[8][21] 이들은 공산주의자와 반정부 정치인을 제거하는 것을 공동의 목표로 삼았다.[8][21]

구성원들의 직업 배경은 매우 다양하여, 경찰관이나 국방부 소속 군인뿐만 아니라 소방관, 상인, 실업가, 농민, 심지어 남한의 노동조합원까지 포함되었다.[11][8][21] 백의사는 한반도를 넘어 만주에서도 활동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지만, 정확한 규모나 활동 범위는 불확실하다.[21]

조직 운영에 있어서는 철저한 비밀 유지가 강조되었으며, 회원들은 지속적인 감시를 받았다. 내부 규율을 어겼을 경우 '동지 재판'이라는 자체적인 조사를 거쳐 처벌받았다.[11] 이러한 비밀주의 때문에 1948년까지 회원 수가 3만 명에 달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확인된 바는 없다.[11]

일부 구성원들은 강도 및 갈취와 같은 범죄 행위에 연루되어 체포되기도 했는데, 이는 단체 활동 자금 마련을 위한 목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정치 깡패'로 알려진 김두한과의 연관성도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8]

9. 1. 북한 출신 우익 인사, 김구 추종자

백의사 회원들은 공산주의자와 반정부 정치인들을 모두 제거하려는 목표를 공유했다. 대부분은 북한 출신의 우익 인사들이었으며, 상당수가 김구의 추종자들이었다.[8][21]

회원들의 직업 배경은 다양했다. 염홍섭한국어(廉弘燮)은 회원들이 경찰관이 되거나 대한민국 국방부에 들어가도록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11] 다른 요원들은 소방관, 상인, 실업가, 농민으로 활동했다.[8][21] 염홍섭한국어은 또한 한국 남부의 노동조합원들을 모집하기도 했다.[11] 쉴리(Cilley)는 백의사가 한반도뿐만 아니라 만주에서도 활동했을 것이라고 추측했지만, 그 규모와 크기에 대해서는 불확실성이 있다고 언급했다.[21]

회원들은 활동에 대해 철저한 비밀을 지킬 것을 서약했고, 비밀을 유지하고 명령에 복종하는지 끊임없이 감시를 받았다. 잘못을 저지른 것으로 고발된 회원들은 '동지 재판한국어'을 통해 조사를 받았다. 경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으면 '앉은뱅이 형벌한국어'을 받았는데, 본부 내 경비가 삼엄한 독방에 10일 또는 한 달 동안 감금되는 것이었다. 중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으면 '출당한국어'되었다.[11]

염홍섭한국어은 또한 회원들의 신원을 서로에게 숨기는 데 주력했다. 안기석은 이 때문에 1948년까지 백의사 회원이 3만 명이 넘었다는 설이 있지만, 이를 확인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11]

9. 2. 다양한 직업 배경

백의사 회원들의 직업 배경은 다양했다. 염홍섭(廉弘燮)은 회원들이 경찰관이 되거나 대한민국 국방부에 들어가도록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11] 다른 요원들은 소방관, 상인, 실업가, 농민 등으로 활동했다.[8][21] 염홍섭은 또한 한국 남부의 노동조합원들을 모집하기도 했다.[11]

9. 3. 비밀 유지, 동지 재판

회원들은 활동에 대해 철저한 비밀을 지킬 것을 서약했고, 비밀을 유지하고 명령에 복종하는지 끊임없이 감시를 받았다. 잘못을 저지른 것으로 고발된 회원들은 동지 재판을 통해 조사를 받았다. 경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으면 앉은뱅이 형벌을 받았는데, 이는 본부 내 경비가 삼엄한 독방에 10일 또는 한 달 동안 감금되는 것이었다. 중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으면 출당되었다.[11]

염홍섭은 또한 회원들의 신원을 서로에게 숨기는 데 주력했다. 안기석은 이 때문에 1948년까지 백의사 회원이 3만 명이 넘었다는 설이 있지만, 이를 확인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11]

9. 4. 경범죄 연루

백의사 구성원들은 여러 차례 경범죄로 체포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범죄가 백의사와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연구자 정(Jung)은 그들이 단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의도였을 것으로 추측했다.

1946년 5월 2일, 서누봉과 김융기(김융기한국어)는 강도미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 및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그들은 1946년 11월 30일에 석방되었다. 이후 1947년 1월 5일에 또 다른 강도 행각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도주했다. 1947년 2월 12일에는 돈암동의 한 사업가로부터 10만 원이 넘는 금액을 갈취했으며, 정(Jung)은 이 자금이 백의사의 간첩 활동 자금 조달 목적이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같은 해 2월 27일, 또 다른 강도 행각을 시도하던 중 종로구에서 체포되었고, 1947년 6월 1일 각각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9. 5. 김두한과의 관계

1955년의 김두한 의원


김두한은 악명 높은 "정치 폭력배"로, 사실상 백의사의 일원으로 여겨져 왔다. 생전에 그는 백의사 회원임을 부인하고 자신을 기껏해야 "고문"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영신의 1994년 저서에 따르면, 염홍섭은 김두한을 "꼬봉"으로 여기고 백의사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그에게 지시와 임무를 하달했다.[8]

참조

[1] 뉴스 남의사(藍衣社)와 백의사(白衣社): 치열하게 살다 안개처럼 사라져간 韓·中의 反共투사들 https://monthly.chos[...] 2024-08-07
[2] 서적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 : 8·15 해방에서 6·25 전야까지(개정판) https://books.google[...] 인물과사상사
[3] 뉴스 폭력, 어떻게 볼 것인가 - 1.폭력의 기원과 한국근대정치 https://gspress.cauo[...] 2024-08-07
[4] 웹사이트 Criticism of the Sanctification of Legitimacy Theory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Korea and the Rise of 'ROK Nationalism' https://www.dbpia.co[...] 2024-08-07
[5] 서적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 : 8·15 해방에서 6·25 전야까지(개정판) https://books.google[...]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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