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피누스 카를로마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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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피누스 카를로마누스는 샤를마뉴의 아들이자 이탈리아 왕으로, 777년에 태어나 810년에 사망했다. 781년 교황 아드리아노 1세로부터 롬바르드 왕으로 임명받았으며,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여 아바르족, 베네벤토 공국, 베네치아 등을 공격했다. 806년 제국 분할 계획에 따라 이탈리아, 바이에른 등을 상속받을 예정이었으나, 베네치아 원정 중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사후 아들 베른하르트가 이탈리아를 통치했으나, 곧 경건왕 루이에게 반역하여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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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피누스 카를로마누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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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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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이탈리아 왕 |
출생명 | 카를로만 |
왕가 | 카롤링거 왕조 |
통치 | |
즉위 | 781년 |
대관식 | 로마 (781년) |
선임 | 카를 마르텔 |
후임 | 카를 대제, 베르나르도 |
생애 | |
출생 | 777년 |
사망 | 810년 7월 8일 |
사망 장소 | 밀라노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카를 대제 |
어머니 | 힐데가르트 |
자녀 | 베르나르도, 이탈리아 왕 |
2. 생애
피피누스 카를로마누스는 777년 샤를마뉴와 그의 아내 힐데가르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피피누스에게는 형 젊은 샤를과 샤를마뉴의 장남인 이복 형 곱사등이 피핀이 있었다.
781년, 샤를마뉴와 힐데가르트는 피피누스를 동생 경건왕 루이, 누이 로트루드, 샤를마뉴의 딸 베르타와 함께 교황 아드리아노 1세의 요청으로 로마로 데려갔다. 피피누스는 네 살이었지만, 그의 부모는 교황이 세례를 베풀 수 있도록 세례를 늦추었다. 피피누스는 세례를 받았고, 아드리아노는 그에게 롬바르드 왕(나중에 이탈리아 왕)의 왕관을 씌웠고, 그의 동생 루이에게는 아키텐 왕의 왕관을 씌웠다. 피피누스의 세례의 일환으로 그는 이름을 피핀으로 바꾸었는데, 이는 그의 이복 형과 같은 이름이었다. 이름 변경의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교황청의 확고한 동맹으로 기억되는 그의 할아버지 단신왕 피핀의 기억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선택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 유산은 이탈리아를 통치할 어린 왕에게 강조하는 것이 중요했다.
네 살에 불과했지만, 피핀의 대관식은 명목상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샤를마뉴가 제공한 고문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롬바르디아에서 살게 되었는데, 가장 중요한 고문들은 코르비의 아달라르, 라이헤나우의 발도, 롬바르드 공작 로트힐트, 앙길베르트였다., 피핀의 궁정은 주로 베로나에 있었지만, 그는 만토바와 전통적인 롬바르드 수도인 파비아에 있는 궁전에서도 활동했다. 피핀은 자신의 이름으로 왕이었지만, 샤를마뉴는 심지어 피핀이 성인이 된 후에도 이탈리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심지어 때때로 직접 법을 공포하기도 했다.
피핀이 성인이 된 후, 그는 군사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그는 786년 바이에른의 타실로 3세에 대항한 아버지의 원정에 참여했다. 796년, 그는 아바르 카간국에 대한 원정을 이끌어 그들의 요새를 점령하고 아바르 국가의 붕괴를 촉진하여 프랑크 왕국이 동쪽으로 확장할 수 있게 했다. 피핀의 승리는 동시대 라틴 시 De Pippini regis Victoria Avaricala에서 기념되었다. 피핀은 또한 베네벤토 공국에 대한 여러 차례의 습격을 이끌었고, 810년에는 베네치아 공화국에 대한 성공적인 원정을 수행했다.,
806년, 샤를마뉴는 아들들을 모아 자신의 사후 제국 상속 계획을 공식화한 Divisio Regnorumla을 발표했다. 피핀은 이탈리아 통치를 확정받았으며, 바이에른과 알레마니아의 대부분을 얻었다. 루이는 아키텐 외에 프로방스, 셉티마니아 및 부르군디의 대부분을 얻었고, 좋은 평판을 얻은 장남(곱사등이 피핀은 반란 실패 후 수도원에 유폐됨)인 샤를은 프랑키아 본토와 작센, 노르트가우 및 알레마니아 일부를 포함한 상속의 가장 큰 몫을 받았다. 샤를마뉴는 800년에 얻은 신성 로마 황제의 칭호 상속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Divisiola는 또한 형제 중 누구라도 사망하는 경우에 대비하여 그들과 상속받을 조카들 간의 평화를 촉구했다.
샤를마뉴의 상속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다. 피핀은 810년 7월 8일에 사망했고, 그 뒤를 이어 누이 로트루드, 고모 셸스의 기젤라 수녀원장, 이복 형 피핀, 형 샤를이 810~811년에 차례로 사망했다., 모두 810년에 가축에서 시작된 전염병의 희생자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죽음 이후, 샤를마뉴는 피핀의 아들 이탈리아의 베른하르트를 이탈리아의 통치자로, 자신의 유일한 생존 아들 루이를 제국의 나머지 상속자로 선언했다. 루이와 베른하르트는 813년 9월에 샤를마뉴의 상속자로 공식 임명되었으며, 814년 샤를마뉴가 사망한 후 완전히 계승했다.,
2. 1. 출생과 초기 생애
771년 4월 3일 또는 773년에 아헨에서 태어난 피피노의 원래 이름은 카를로만이었다.[1] 유럽의 아버지로 불리는 신성로마제국의 초대 황제인 카롤루스 대제(일명 샤를마뉴, 715-768)와 세 번째 부인 히스파니아의 힐데가르트(Hildegarde Hispynia) 혹은 빈츠가우의 힐데가르트(Hildegarde Vintzgau) 사이에 태어난 첫 번째 아들이고 곱사등이 피핀에 이어서 차남이다. 히스파니아와 알레만니아의 백작 빈츠가우의 게롤드와의 엠므 폰 알레만니아의 딸인 모후 히스파니아의 힐데가르트를 통해 알레만니 족의 혈통을 일부 물려받았다.773년 9월 프랑크 족 군대는 롬바르드 왕국의 수도를 포위하였고 774년 6월 4일 데시데리우스를 축출하고 롬바르드 왕국을 장악했다. 롬바르디아는 7년 뒤 피피노 카를로만에게 주어졌다.
피핀의 외모에 대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으나, 829년~836년경 이탈리아의 로마 가톨릭 사제가 에버하르투스 프리울리의 명으로 작성된 풀다 연대기 사본에 그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풀다 연대기의 그림 중 아버지 카롤루스 대제가 오른편에 앉아 있고, 왼편에는 칼을 차고 지팡이를 짚고 앉아있는 피피노 카를로만, 아래 쪽에는 왜소한 체구에 꼽추병을 앓는 이복 형 곱사등이 피핀이 앉아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아버지 카를루스 대제는 친척이기도 한 코르비에의 코르비에 대수도원의 원장 아달하르트(Adalhard)에게 그의 교육을 맡겼고, 나중에는 또다른 사촌인 라이체나우의 발도(Waldo de Reichenau)와 로트칠드(Rotchild)에게 어린 피피노 카를로만의 교육을 맡겼다.
781년 4월 14일, 교황 하드리아누스 1세가 대부가 되어 세례를 받았을 때 아버지 카를루스에 의해 피핀(Pipin)으로 개명되었다.[2] 같은 해, 피핀은 이탈리아 왕이 되었고, 교황 하드리아누스 1세의 손으로 대관식을 치렀다.[3]
2. 2. 축성과 롬바르드 왕
780년 4월 아버지 카롤루스 대제에 의해 롬바르디아의 분국왕(Rex Langobardorum)에 책봉되고, 781년 봄 아버지 카롤루스 대제에 의해 동생 경건왕 루트비히와 함께 알프스산맥을 넘어 그해 4월 15일 로마로 가 로마 교황의 축성과 기름부음 세례를 받았다.[1][2] 그의 첫 이름은 카를로만이었는데, 교황 하드리아노 1세에게 세례받을 당시에도 카를로만이라는 이름으로 축성받았다. 이어 아버지 카롤루스 대제로부터 롬바르디아의 왕에 다시 임명되었다. 781년 4월 15일 로마 교황 하드리아노 1세는 그에게 직접 기름부음 세례식을 행한 뒤, 역대 롬바르드 왕국의 국왕들이 쓰던 철왕관을 씌워 주었다.[3] 이때 샤를마뉴는 그에게 피핀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러나 카롤루스 대제의 큰아들과 구별하기 위해 피핀 카를로만, 피피노 카를로만 혹은 이탈리아의 피피노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된다. 780년 이복 형 곱사등이 피핀이 황태자 자리를 박탈당하고 만다.
바로 샤를마뉴는 동생 루트비히를 데리고 돌아갔고, 그는 롬바르디아 밀라노에 남겨져 롬바르디아 왕으로 체류하였으며, 카롤루스 대제는 곧 안길베르트와 측근들을 파견하였다. 얼마 뒤 아버지 카롤루스 대제는 친척이기도 한 코르비에의 아달하르트(Adelhardo di Corbie)를 그의 후견인으로 지정, 이들을 이탈리아로 파견하였다. 그는 아달하르트 등의 보호하에 파비아에 거주하였다. 코르비에 수도원장이기도 했던 아달하르트는 카롤루스 대제의 삼촌 베른하르트 공작의 아들이었다. 부왕 샤를마뉴는 그에게 롬바르디아의 전통적 정책을 계승하는 역할이 아니라, 자신이 맡을 수 없는 영토에 대한 대리 방어 권한만을 그에게 위임하였다. 카롤루스는 곧 이탈리아의 왕궁에 안길베르트 등의 비서를 보내주었다.
피피노 카를로만은 아버지 샤를마뉴의 정책으로 무료 법률, 재판을 위한 프랑크 왕국의 법률도서관(Hofbibliothek)을 롬바르디아에 도입, 설치하였다.
피피노 카를로만의 통치기간 중에 알레만니아에서 주민들이 이탈리아로 이주했는데 대부분 밀라노와 파비아, 코모(Como)부터 레코(Lecco), 파르마, 루카, 피아첸차 주변에 정착했다. 이때 알레만니아의 주민 3분의 1 가량이 이주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들 알레만니아인은 피피노 카를로만을 따라 전투에 출정한 장교와 군인들이었다.
2. 3. 정복 활동
781년 하드리아누스 1세에게 세례를 받고 롬바르드 왕으로 즉위한[3] 피피누스 카를로마누스는 787년부터 아버지 카롤루스 대제의 바이에른 공략에 참여했다.[6]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소부대를 지휘한 카롤루스 대제와 동행하여 알레만니아족 부대를 이끌었으며, 아디제 협곡을 통해 진격하여 타실로 3세를 항복시켰다.[6]788년과 799년 이스트라반도를 정복하고,791년 롬바르드 군대를 이끌고 카롤루스 대제와 함께 드라바 계곡과 판노니아 평원을 공격하여 아바르족과 프리기아족 등을 정벌했다. 피핀은 다뉴브강가의 아바르 족을 몰아내고 영토를 빼앗았으며,[6] 796년까지 아바르 족 토벌에 계속 참여하였다.[6]
792년 다뉴브강 바르 지역 근처에서 벌어진 색슨족의 반란을 프리울리의 에릭 공작과 함께 진압하고, 793년 프랑크 왕국의 종주권을 거부하던 베네벤토 공국을 공격하여 복속시켰다.[6] 베네벤토 공작 그리모알드 3세는 프랑크 왕국에 인질로 잡혀있다가 787년 귀국하여 공작이 되었으나, 프랑크 왕국의 권위에 도전하였다.[7] 피피노는 스폴레토의 힐데브란트 등과 함께 동로마 제국으로 망명했던 아달기스의 침공을 물리치기도 했다.[6]
795년과 796년 아바르 족이 판노니아 평원에 만든 도시인 링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 시기부터 약탈한 재물과 보석을 탈취했다.[6] 796년 중엽 롬바르드 군대를 이끌고 스페인에 출몰하는 아바르 족을 격퇴하고, 797년 바이에른족과 롬바르디아족 연합군을 이끌고 프랑크 왕국 동부 국경지대를 침략한 슬라브족을 몰아냈다.[6] 799년 슬라브족이 롬바르드를 침략하자 다시 이들을 이탈리아 밖으로 축출하고, 프랑크 왕국 동부에서 벌어진 색슨족의 소규모 반란을 진압했다. 800년 이탈리아를 침략한 무어인들을 베네벤토 근처에서 격퇴했다.[6]
803년 아바르족 원정에 참여하여 최종적으로 아바르족을 정복하였다. 809년부터 810년 베네치아를 공격하여 6개월간의 공방전 끝에 굴복시켰다.[6] 베네치아 공국은 롬바르디아로부터 독립했거나 동로마 제국의 속국으로 여겨졌으나, 피피노의 공격으로 프랑크 왕국파 도제 오베레이오가 축출되었다.[6] 베네치아 원정은 카롤루스 대제가 동로마 제국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조건을 얻는 데 기여했다.[6] 810년 이스트리아, 달마티아와 베네치아의 일부 섬들을 점령했지만 곧 동로마 제국에 양보했다.[8] 그러나 원정 도중 피피노는 전염병으로 신장 질환을 앓게 되었고, 이스트리아와 달마티아 해안 도시 원정, 베네치아 정복전쟁은 실패로 끝났다.[6]
2. 4. 베네치아 원정 실패와 최후
804년 아버지 샤를마뉴는 베네치아에 현지인 출신 오베레이오(Obelerio degli Antoneri)를 총독으로 임명했지만, 베네치아 내 반(反) 프랑크 여론은 계속되었다. 810년 피피노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베네치아를 공략했다. 오베레이오는 피피노의 군대를 영접할 준비를 했지만, 성난 베네치아 시민들은 오베레이오를 축출하여 도주하였다. 피피노는 6개월간 베네치아를 포위했지만, 피피노의 군대는 현지의 풍토병과 말라리아, 갈증, 군량미 부족으로 인한 체력 저하와 열병 등으로 사상자가 속출하여 결국 밀라노로 퇴각해야 했다.806년 2월 6일 아버지 샤를마뉴는 티옹빌 칙령을 내려 영토 분할 계획을 세우고, 자신이 죽으면 피피노에게 이탈리아, 바이에른, 카린타니아(오늘날의 케른텐), 알레만족의 영토를 물려주기로 했다. 그러나 피피노는 베네치아 원정 중 걸린 병으로 아버지 샤를마뉴보다 먼저 죽게 된다.
806년 피피노는 동로마의 니키포로스 1세와 조약을 체결, 지원군을 파병받았다. 807년 여름 콘스탄티노플에서 보내준 동로마 군대는 809년 초, 케 팔로니아에서는 또 다른 함대를 베네치아 해역으로 보내주었다. 그러나 이는 정식 조약 체결이 아니었고, 동로마 군대는 곧 빠져나가 피피노는 고전하게 된다.
810년 초 피피노 카를로만은 코르시카에 상륙한 무어인을 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갔으나 실패하고 퇴각했다. 그는 죽음을 예감하고 피에트라세카(Pietrasecca)에 자신이 안치될 장소를 준비하고, 성곽을 쌓게 했다. 810년 피피노는 동로마 제국의 속령인 이스트리아(Istria), 달마티아 원정에 참여, 이들 도시를 공략하고 베네치아 공략을 준비하던 중, 인근 습지에서 병사들과 함께 풍토병에 감염되었다. 퇴각하여 밀라노로 가서 병석에 누웠다가, 810년 7월 8일 밀라노에서 신장 질환과 말라리아로 추정되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신장 질환이나 말라리아는 810년 6개월간 베네치아를 공략하던 중 그해 7월 무렵에 걸린 전염병이 원인으로 보고 있다. 시신은 밀라노 또는 베로나의 성 제노 마조레 대성당(Basilica di San Zeno Maggiore)에 안치되었다.
부인 쿠니군데 사이에 난 아들 혹은 서자인 베른하르트 1세(797-818)에게 이탈리아의 왕을 물려주었다.[9]
3. 사후
피피노 카를로만이 죽고 811년 이복 형 곱사등이 피핀, 동생 소 샤를 등도 연이어 사망하여, 그에게로 돌아갈 예정이었던 이탈리아와 알레만니 등의 영지는 결국 동생 경건왕 루트비히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814년 제국 전체를 물려받은 동생 경건왕 루트비히는 암암리에 피피노의 아들 혹은 서자인 베른하르트와 갈등하게 되었다. 피피노의 아들 베른하르트는 결국 818년 경건왕 루트비히의 상속령에 반발했다가 루트기히에 의해 반역으로 몰려 죽게 되고, 영토는 루트비히의 아들 로타르 1세에게로 가게 된다.
피피노의 아들 혹은 서자였던 베른하르트의 서자인 피핀은 베르망두아 백작 가문을 세워 13세기까지 명문가문을 유지한다. 손자 피핀의 후손들은 다른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된 뒤에도 13세기까지도 직계 후손이 이어졌다.
베로나의 이름미상의 시인이 지은 ''아바르 전쟁의 승리의 왕 피핀의 노래''(Rythmus or Carmen de Pippini regis Victoria Avarica)는 그가 아바르 족 원정에서 승리한 것을 축하하는 작품이다.
4. 가계
피피누스 카를로마누스는 카롤루스 대제와 히스파니아의 힐데가르트의 아들이었다.[10] 그의 형제자매로는 청년왕 샤를, 루트비히 1세, 아델라이드, 앙겔베르트와 결혼한 베르타 등이 있었다. 그는 796년 이전에 클로타이스(Chrotais) 또는 루아델하이트(Ruadlheid)로 추정되는 여성과 결혼했다.[10] 그밖에 작센 족과 바이에른 족 출신 첩이 몇 명 더 있었다.
그의 적자녀로는 814년 이전에 사망한 이름 미상의 아들과 리우돌프와 결혼한 아델라(혹은 아델하이트), 아둘라, 군트라다, 쿠네군다, 베르타, 테오도라다가 있었다. 아델라의 딸 오다는 작센 공작 리우돌프와 결혼하여 리우돌핑거 왕조를 형성했다.[5]
그는 베른하르트라는 서자도 두었는데, 베르나르트는 레온의 쿠니군데와 결혼하여 헤르베르터 왕조의 시조 피핀 2세를 낳았다. 피핀은 아버지의 사촌이자 조언자였던 아달라르의 누이 테오드라다와 결혼했으나, 루이는 이들의 관계를 부당한 결혼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베르나르의 남계 후손들은 11세기까지 베르망두아 백작으로 이탈리아를 통치했다.
참조
[1]
서적
五十嵐
[2]
서적
五十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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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五十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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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五十嵐
[5]
서적
Settipa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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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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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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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ettipani
1993
[9]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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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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